제주도.

  사람들이 많이 여행하는 곳.

  낯선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

  이제는 낯선 언어로 말하는 사람이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낯선 언어를 만나 생소함을 느낄 수 있는 곳.


  그런 제주도에는 볼거리만큼이나 아픈 역사도 있다. 아픈 역사만큼이나 가족이 겪은 비극도 많다. 또한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겪은 고통도 있고.


  단순히 관광으로 끝날 섬이 아니다. 그런 제주도를 아우를 수 있어야 제주도 여행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과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곳. 제주도. 이 청소년 시집에는 제주의 이 모든 것이 다 녹아들어가 있다.


제주도 소년과 소녀가 느끼는 감정, 그리고 제주가 겪은 역사. 제주의 자연 등등. 이 시집에는 다양한 제주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해녀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시인이 해녀의 딸이라고 해서 그런지, 해녀의 생활이 시에 많은 편인데, 바다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 마찬가지로 남자들은 배를 타고 멀리 나간다. 생계를 위해서.


이런 저런 제주도의 모습을,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시를 통해 만나다가, 제주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폐를 끼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시에서 만나고는 씁쓸해지기도 했다.


시인은 이런 시를 통해서 사람들이 제주도에 와서 제주도의 본 모습을 체험해야지, 오로지 자신들의 관점에서 제주도를 이해하고 행동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관광객들이 현지인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인식도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시를 통해서 그것을 보여주고 있으니 우리들의 행태를 살펴봐야 한다.


 올레길은 돌아서


길은 주인이 없다지만

동네에선 널어놓은 깨가 먼저고

귤 실은 트럭이 먼저고

지팡이 짚은 할머니가 먼저고

아기 업은 엄마가 먼저라서

친구들과 우르르

올레길에 몰려다니다가도

한쪽으로 비켜서는데

길마나 코스 이름 번호 붙더니

전세 버스 타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무리는 

트럭도 막아서고

지팡이도 막아서고

우는 아기 막아선 줄도 모르고

널어놓은 깨를 툭툭 치며

즐거워한다

이젠 심부름 갈 때

올레길은 돌아서 간다


허유미. 우리 어멍은 해녀. 창비교육 2020년 초판 2쇄. 75쪽,


이런 제주도의 모습, 우리가 원하는 모습 아니던가. 올레길이 무엇인가. 그 지방의 모습을 체험하면서 걷는 길 아닌가. 그러니 그곳의 풍습을 해치지 않고 걸어야 하는데, 걸으면서 자신들 멋대로 행동하면 어떻겠는가.


그렇게 하면 '온몸에 힘을 주고'(80-81쪽)이란 시에 나오는 문어와 같이 제주도를 대하는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다.


'갯바위에 달라붙은 문어를' 맨 손으로 떼려는 사람들. 하이힐로 문어 다리를 찍는 사람들, 문어에게 돌멩이를 던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제주도를 제대로 여행하지 않는 사람들 아닌가.


청소년시집을 통해서 여행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가 자주 가고 또 가고 싶어하는 제주도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하는 시이기도 하다.


어쩌면 제주도는 지금 이 시에 나오는 '다리가 너덜너덜해지도록 관광객을 받아 낸 문어 / 바다 한 귀퉁이도 너덜너덜하다'(81쪽)는 표현처럼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제주도 여행을 가려고 하는 사람, 이 시집을 한번 읽고 가면 좋겠다. 제주도이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처럼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지 않고, 가려져 있는 제주도를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시집이 바로 이 시집이다.


꼭 제주도만이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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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7-23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계속 올려주시는 청소년시집 참고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kinye91 2022-07-24 07:4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청소년시집을 통해 잊고 또는 잃고 있었던 마음을 다시 찾기도 해요.
 

  "으르렁, 으르렁"


  이성의 통제를 받지 않고 나오는 소리다. 자신의 감정을 충실히 담은 소리다. 머리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심장에서 나온 소리다.


  가식이 없다. 꾸밈이 없으니, 솔직하다. 솔직하기 때문에 한 순간에 불꽃이 일기도 하고, 금방 식어버리기도 한다.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


  특히 사랑에서는 더욱 그렇다. 감정을 따른다. 아니, 감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내 심장이, 내 몸을 움직인다. 


시집에 첫번째로 실린 시 '심장으로 걸어 볼래'에서 말하고 있다. '오늘부턴 좀 멋지게 걸어 볼래'라고... 멋지게 걷는 일, 그것은 바로 심장으로 걷는 일이다. 그래서 '심장으로 걸어 볼래'라 하고 있다.


이런 사랑은 자신의 모두를 걸고 있다. 그때는 전부다. 그것 말고는 없다. 그러므로 무엇을 해도 사랑을 벗어날 수 없다. 이 시집에 단 한 번 '춘향'이가 나오는데, 그 춘향이가 햄버거와 함께 나오는 점이 현대시라고 할 수 있지만, 춘향이가 누군가.


사랑에 전존재를 건 사람 아닌가.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로지 사랑으로, 사랑에게 전력질주한 여인 아니던가. 그런 춘향이가 바로 청소년 아닌가. 이팔청춘.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춘향이의 사랑은 죄일 수 있다. 특히 변사또처럼 기득권을 대변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은 죄다.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사랑은 더더구나. 


과연 사랑이 죄일까? 청소년의 사랑이 죄일까? 죄가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를 인용하자. 사람이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죄다. 원죄다. 우리는 원죄를 안고 태어났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불교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윤회의 업에서 벗어나야 한다. 


삶 자체가 죄라면, 사랑은 당연히 죄다. 그런데 이 사랑은 죄를 벗어나게 해주는 죄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사랑이라는 죄를 지어야 한다. 사랑이라는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득시글한 사회. 행복한 사회가 아니라 불행한 사회다.


청소년시집이라고 하지만, 이 시집에는 그야말로 '사랑'의 난장판이 펼쳐지고 있다. 시집 곳곳에서 '으르렁, 으르렁' 소리가 들리고 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는 그런 소리들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죄의 발견'이란 시.


죄의 발견


열일곱 살이 되고 나니 / 놀라운 일이 한두 가지가 / 아니다 가장 놀라운 일은

사랑을 발견하는 일, 그깟 일이 / 뭐라고 하면서 거들먹거리는 / 너는 누구나 인생은 초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 아마추어 / 참 놀라운 일이다 / 사랑을 발견하는 일이 

곧 죄의 발견과 맞물려 있다는 / 사실 그러니까 그 애를 / 사랑하게 된 뒤 알았다 나는

괴물이 되었다는 걸 다행이라면 / 아름다운 괴물이란 사실 / 한순간 사랑이 바닥났다는 걸

열부 났네, 하고 비웃는 / 너 또한 아마추어 / 그 애에게 다 주고 남은

사랑이 없는 나는 걸핏하면 / 으르렁대지 선생님도 / 눈에 뵈질 않지 / 고아였으면 싶었지

그러니까 나도 / 아마추어 / 그러나 나는 결심했지 / 프로가 되기로, 그 애에게

몽땅 바친 사랑을 누룽지처럼 / 조금씩 훔치기로 했지 / 부모님과 선생님께 조금씩

나눠 주고 옆집 개에게도 / 아량을 베풀기로 했지 / 참 놀라운 일이다

사랑을 꺼내는 열쇠가 / 죄라는 건 죄를 꺼내는 열쇠가 / 사랑이라는 거짓말 같은

사실은,


김륭. 사랑이 으르렁, 창비교육. 2019년. 113-115쪽.

 

이 시를 읽어보라. 청소년에게 사랑을 하라고 하고 싶지 않은가. 청소년들이 사랑에 자신을 걸어봐야 그 사랑이 다른 사람, 다른 존재에게도 갈 수 있다.


온몸, 온마음을 바쳐 사랑에 빠진 경험이 없는 사람, 아마추어다. 그 사랑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만 하는 사람도 아마추어다.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한 사람에게만 빠져보았던 죄를 경험했던 사람이 프로가 된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도 청소년기에는 '심장으로 걸어' 봐야 하고, 사랑이라는 죄에 빠져봐야 한다. 


그래, 우리 청소년들이 마음껏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 그것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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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7-23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몹시 관심이 가는 시집이예요
읽어봐야겠어요.^^

kinye91 2022-07-24 07:44   좋아요 0 | URL
마음에 와 닿는 시들이 많아서 좋아요. 청소년들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성공한 사람 - 교유서가 소설
김종광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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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소설 하면 이문구가 떠오른다. 충청도 농촌을 배경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던 작가. 그런데 지금 농촌이라고 하는 곳이 있을까? 이문구가 소설로 쓴 농촌은 이미 해체되기 시작한 농촌이었다.


산업화라는 명목으로,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우리나라 농촌은 농촌으로 남아서는 안 되었다. 농촌은 도시를 지탱해주는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곳, 그것도 값싼 외국산 농산물에 밀려 돈이 되는 몇몇 작물, 축산업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논농사를 지어도 수익이 남지 않는, 쌀값이 터무니없이 낮아진 상태로 수십 년을 지내와야 하는 곳으로 남았다.


이런 상황에서 농민들은 갈수록 줄었고, 소농이라는 개념은 전문서적에나 존재하는 말이 되었다. 기업농이 존재하기엔 농토가 적었고, 소농들이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기엔 농사를 짓는 사람도 적었고,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돈이 되는, 소위 환금작물을 재배해도 때에 따라서 흥망이 갈리곤 했으니, 농촌은 농촌의 특징을 살린 채 존재하기는 힘들어졌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보상을 해준다는, 소위 농사짓지 말라는 정책이 실시되기도 했으니...


농촌소설이라는 말도 존재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이문구가 소설로 썼던 농촌은 이제 과거의 농촌이다. 하지만 농촌이 아주 없어지지는 않았다. 휴대전화 없이는 살 수 있어도(적어도 목숨을 잃지는 않는다) 식량 없이는 살 수는 없다. 식량 안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없어져서는 안 될 곳이 농촌이지만, 여전히 농촌은 사라져가고 있다. 아이들 울음 소리를 듣지 못한 농촌이 많다고 하니 말이다. 농촌이라는 말로 시골을 대표했다면, 이젠 농촌이든, 어촌이든, 산촌이든 다 시골이라는 말로 통용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시골이다. 도시가 아닌 곳. 사람들이 떠나가는 곳. 돌아오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이 많은 곳. 귀촌이라고 하지만, 소수일뿐이고, 대부분은 도시로, 도시로 나간다. 태어나는 사람보다 죽는 사람이 월등히 많은 곳. 그곳이 바로 시골이다. 


김종광은 바로 이런 시골을 배경으로, 시골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다. 그는 농촌소설이라고 하지 않고, 시골소설이라고 한다. (350쪽)


농촌이라는 말로 국한시키기보다는 농촌, 어촌, 산촌을 아우르는 말로 시골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리라. 그리고 도시 사람들에게 도시가 아닌 모든 곳은 다 시골이다. 


시골소설이란 표현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시골소설에 11편의 소설이 실렸다. 읽다보면 등장인물들이 겹치곤 한다. 하긴 시골에 사람들이 많지도 않으니, 소설 속에서 이 인물들이 다양한 사건을 일으킬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에도 시골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퇴색적인 분위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소설의 배경인 시골은 낙후되어 있다. 노인들만 득시글댄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보일러를 설치하면서, 제대로 수리도 하지 않는 모습도 나타나고, 종합병원이라고 있어도 노인들 건강을 세심하게 살피지 않고, 그냥 하루하루를 버티는 모습도 나타난다.


조류독감이다 구제역이다 하면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가축들을 도살하라는 판에 박힌 정책도 나와 우리 사회를 풍자하고 있는 장면이 제법 있어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시골소설에서 순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미소를 띨 수도 있지만, 이들의 신산한 삶, 그리고 조만간 사라질 삶들이 무겁게 다가오기도 한다. 


물론 전체적으로 이 소설집은 무겁지 않다. 무거운 분위기도 가볍게, 웃음을 유발하는 해학적인 장면이 많다. 이장 선거를 주요 사건으로 삼고 있는 '여성 이장 탄생기'를 보면 웃음이 나온다.


우리나라 정치 현장을 풍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골마을에서도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살아야 하는 까닭'에서는 시골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는 교육이 얼마나 형식적이고 가식적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정작 시골 사람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하지도 못하고(할 수도 없다. 시골 사람들이 면사무소, 또는 군청, 시청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교육해야 한다. 그들은 시골살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농사도 모르는 사람들이 공문에 의거해서 농사 교육을 한다? 우스운 꼴이다), 형식적인 교육으로 서류만 채우는 모습. 그런 형식에 갇힌 공무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어른들이 돌아가시면 시골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자연으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으리라. 살려고 오는 사람이 없으니... 기껏해야 별장을 짓고 가끔 쉬러 오는 곳이 될 수도 있으니.


그런에도 그렇게 되기까지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서 산다. 그들은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한다. 몸이 아파도 일을 한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서로 부대끼면서 살아간다.


그런 시골 사람들의 모습, 이 소설집에 잘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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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이 청소년시집은 이야기가 있다. 인물이 있고, 갈등, 사건, 그리고 해결이 있다. 해결? 물론 해결은 안 된다. 그냥 넘어갈 뿐이다.


  많은 일들이 일어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역설. 학교란 사건이 일어나도 이상하게 별다른 일이 없이 굴러간다. 이 시집에 나오는 탐정 역할을 맡은 화자도 그렇게 느낀다. 또한 사건 당사자로 나오는 인물들 역시 그렇다.


  모두들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이 해결되면 좋겠지만, 사연은 사연으로 그들 가슴 속에 묻혀 있을 뿐. 그 사연을 끄집어내 풀어내게 하는 어른들이 없다.


  교사도 부모도 하지 못하고 있다. 오로지 할 수 있는 사람은 친구들뿐.


교실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난다. 범인으로 지목되는 학생은 정해져 있다. 의심이 가는 상황. 방범 카메라를 돌려보니 빈 시간에 교실에 들어간 학생은 두 명. 한 명은 모범생이라 할 수 있고, 한 명은 문제아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범인으로 지목당할까? 보나마나 뻔하다. 물어보지 않아도 범인으로 누가 지목될지 알 수 있다. 또 그렇게 처벌이 이루어진다. 


이런 과정이 시를 통해 나온다. 한 편의 시가 아니라 여러 편의 시가 이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서 소설을 읽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학교에서 일어난 절도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하는 점도 볼 수 있고. 그럼에도 이 청소년시집에서는 공부라는 틀에 갇힌 학생을 만날 수 있다.


자유롭게, 자신만의 꽃을 피우고 싶지만 꽃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화단 밖에 핀 꽃') 상태에 머무는 학생들도 많다.


그래서는 안 된다. 화단 밖에 있다고 꽃이 아닌가. 꽃은 꽃일 뿐이다. 이 시집 처음에 실린 시. 마음을 때린다. 부모가 자녀에게 해야 할 일은 자녀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찾아가게 하는 일이다.


제목과 내용이 역설적으로 연결된 이 시... 이렇게 하지 말기를 바라며.


  친절한 엄마


엄마는 나를 위해

발품을 팔아 새장을 사고

새장에 어울리는 그네를 사고

삼 년 치 모이를 사고

새장을 걸려고 이곳저곳에 못을 박았지


아침이면 새장에서

새소리가 아닌 고양이 소리가 나는데도

엄마는 새소리가 아름답다며

삐뚤어진 새장을 바로 걸어 놓았지


나를 위해 엄마는

아무나 기웃거리지 못하게 한다며

새장 문에 자물쇠를 달고

열쇠는 강물에 던져 버렸지


김현서, 탐정동아리 사건일지, 창비교육. 2019년. 10쪽.


삼 년만 친절해도 미칠 지경인데, 6년도 모자라 12년, 아니 대학까지 16년을 새장 속에 넣어두는 부모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과연 친절일까? 생각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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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높이뛰기 - 신지영 교수의 언어 감수성 향상 프로젝트
신지영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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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는 속담이 있고, [말이 칼이 될 때]라는 책도 있듯이 말은 중요하다. 특히 관계를 맺고 유지해 가는데 말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만큼 말에는 사회성이 있다. 자기만의 말을 만들 수는 있어도,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는 없다. 그러니 사회에서 쓰이는 말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때 사회에서 쓰이는 말을 안다는 말은, 곧 사회에서 어떤 말이 차별 언어이고, 써서는 안될 말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언어가 사회성을 지닌다는 말은 소통한다는 의미와 더불어서 불통의 의미도 있다. 즉, 언어는 배제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배제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언어, 이런 언어는 혐오 표현이라고 하고, 차별을 유발하는,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냥 사회에서 누구나 쓰니까 나도 쓴다고, 그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그런 말까지 쓰지 못하게 하냐고. 그건 너무 한 것 아니냐고. 그것까지 조심하라고 하면 그건 바로 '프로 불편러' 아니냐고 항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언어가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그 사회에서 그 언어가 과거와 달리 혐오나 차별의 언어로 쓰인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는 현상은, 언어가 변해야 한다는 의미다. 즉, 사회성이 다른 쪽으로 발현되어야 한다. 


과거 언어에만 매여 있다간 언어의 사회성을 놓치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언어에 대해서, 우리가 쓰는 언어에 대해서 고민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다양한 언어를 통해서 보여주는데, 말을 하기 전에 그 말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는 마음을 언어 감수성이라고 하고, 언어 감수성을 예민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열 개의 강의로 되어 있는데, 첫번째 강의는 존댓말이다. 이 존댓말은 지위와 나이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는 말하는 사람들이 어떤 표현을 하느냐에 따라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만나면 꼭 나이를 묻곤 한다. 직업을 묻는 경우도 있고, 직책을 묻는 경우도 있다. 그에 따라서 상대를 부르는 말이 달라지고, 말을 끝내는 말이 달라진다. 소위 존댓말을 쓰느냐 반말을 하느냐가 결정된다.


하지만, 사람을 이렇게 나이로 줄 세울 수 있을까? 사람을 나이로 높이거나 낮출 수 있을까? 이 강의는 다섯번째 강의인 '너와 당신'이라는 호칭과 연결이 된다. 우리는 2인칭인 '너'를 높이는 말로 '당신'이라는 말을 쓰는데, 과연 당사자 앞에서 '당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직접 대면해서 쓰는 '당신'은 높임 표현이 아니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표현 아닌가.


이것은 공손성을 이유로 이인칭 대명사를 기피하는 언어 유형에 우리말이 속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이야기할 때 '당신'은 이인칭 높임 표현이 되겠지만, 직접 대면해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역시 존잿말에 관한 문제인데, 이젠 시대가 변했으니 존댓말에 대한 관점, 표현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제기를 첫번째, 다섯번째 강의에서 하고 있다.


두번째 강의는 '민낯'이란 말이다. '맨얼굴'이라고 할 수 있고, 한때 유행했던 말인 '쌩(생)얼'이라는 말로도 대체할 수 있는 말. 그런데 민낯이란 꾸미지 않은 본래 얼굴이라는 뜻이니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게 어때서? 아니다. '민낯이 드러났다'는 표현처럼 부정적일 때 많이 쓰고 있는 말인데, 화장은 요즘은 남성도 많이 한다고 하지만 주로 여성에게 관련되어 이야기되고 있으니, 부정적인 어감과 여성이 연결되는 경우라고 하겠다.


이는 네번째 강의인 '여사'와도 연결이 된다. '씨'와 '여사'의 논쟁이 있었지만, '여사'라는 말도 여성에게만 해당한다. 남성을 따로 지칭하는 호칭이 없다. 남성은 지위나 직업으로 말해지는데, 여성에게는 지위나 직업보다는 '여사'라는 말을 쓰는 경우가 많으니, 이도 역시 언어에서 나타나는 성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에 나타나는 성차별은 여섯번째 강의인 '가족 호칭'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남성 중심의 호칭들. 시대가 변했음에도 변하지 않고 있는 이런 호칭은 가정 내에서 남녀의 위계를 유발하기도 한다. 


성차별만이 아니다. 외국인을 향한 차별 역시 언어에 나타나고 있다. 별다른 의식 없이 쓰고 있는 언어에서 그런 차별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문제다. 일곱번째 강의인 '외국인'에 대한 글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관광안내소에 비치된 관광안내 책자. 별로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관광안내소에 '내국인과 for foreigner'(164쪽 등)라고 분류해 놓았다고 하는데, 그냥 언어별로 분류해 놓으면 될 것을 이렇게 분류해 놓았다니...


국적으로 관광안내를 하나? 이는 고쳐야 할 점이다. 이것에 더해서 공손성이 너무 과해서 사물에까지 존대를 하는 현상, 이는 소비자가 서비스를 받을 때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하는데, 문법에 어긋난 표현을 쓴다고 하기 전에 왜 그런 표현이 유행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지적, 받아들여야 한다.


몇 가지 강의가 더 있는데, 언어에는 권력이 작용한다는 사실. 그래서 외국어가 언론에 너무 많이 쓰이고 있고, 전문적인 용어가 가감없이 언론에 사용된다는 점, 전문용어를 우리말로 바꾸려는 노력보다는 그냥 외국어를 가져다 쓰려는 모습에 대한 비판이 '당선자와 당선인'이라는 말과 '코로나 19 시대'와 연관지어 이 책에 나와 있다.


읽다보면 언어 감수성이 왜 중요한지,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과연 적절한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그야말로 읽으면서 언어 감수성의 필요성과 언어 감수성을 키울 수 있게 된다.


말은 사람 사이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말의 속성 중에 사회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성 만큼 중요한 언어의 특징은 역사성이다. 언어는 사회가 변하는 변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사회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과거의 언어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지킬 필요는 없다.


사회의 변화에 맞춰 언어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언어 감수성이고, 언어를 언어답게 사용하는 길이다. 사람들 간의 소통을 더 잘하게 되는 길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이 책의 저자가 말한 것처럼 '프로 불편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언어 감수성이 살아있는 사회일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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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7-19 18: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동의합니다.
인권은 언어감수성에서!
저도 가끔 아이들에게 지적받을 때 있어요.
제 용어가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kinye91 2022-07-19 20:09   좋아요 3 | URL
저도 무심코 나온 말 때문에 지적을 받을 때가 있어요. 조심하고 한번 더 생각하고 말해야겠단 생각을 해요. 언어감수성을 키워야겠어요.

얄라알라 2022-07-19 23: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신지영 교수님 전작 넘 재밌게 읽었는데, 다음 책이 나오도록 몰랐네요^^ 덕분에 챙겨보겠습니다 kinye님

kinye91 2022-07-20 11:05   좋아요 3 | URL
읽어서 후회 안 할 책이네요.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요즘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해요.

얄라알라 2022-07-20 11: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사/민낯 사례로.들어주신.몇.단어만.보아도 꿀잼책! 가족호칭 !바뀌어간다고는.해도 여전히.그렇죠?^^;;

kinye91 2022-07-20 11:56   좋아요 2 | URL
맞아요. 가족호칭뿐만 아니라 많은 호칭들...많은 생각들이 필요함을 이 책이 잘 보여주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