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아담 미친 아담 3부작 3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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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다. 제목은 미친 아담이다. 1권에 나왔던 게임의 이름이기도 한데, 멸종된 동물의 이름을 불러주는 집단, 또는 게임이었다.


아담1이 신의 정원사 집단을 이끌고, 2권에 등장했던 토비가 거기에 참여했다가 나오게 되는 과정, 그리고 그들이 인류가 절멸하는 해까지 오게 된 과정을 거쳐 이제는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서술하고 있다.


인류가 멸절되면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는데, 크레이크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다. 새로운 인류를 통해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인류를 창조하려고 했는데, 그들을 크레이커라고 부른다.


크레이커들은 평화주의자다. 그들은 육식을 하지 않는다. 또한 폭력을 모든다. 성욕에 휩싸이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들만 있느면 세상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자연과도 마찬가지다. 크레이크가 원했던 세상이 이런 세상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류는 신의 홍수에서도 살아남았다. 멸절되지 않았다. 노아는 자기 가족들과 살아남았지만, 크레이크가 일으킨 질병은 모두를 멸절시킬 수가 없었다.


신의 정원사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나 미친 아담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평화주의자니까, 그런 세상에 살아남아도 크레이커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범죄자들이 모두 없어지지 않았다면? 여기서 고통공 죄수들이 나온다. 토비를 괴롭혔던 인물도 들락날락했던 감옥. 이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에겐 인간성이란 없다.


그렇다. 이들은 살아남아서 사람들을 사냥한다. 동물들뿐만이 아니라. 또한 여자들을 강간한다. 강간하고 쓸모없다고 판단되는 여자들은 죽인다. 그런 욕망만 남아 있는 자들이다.


이제 살아남은 토비와 동료들, 또 크리이커들에게 그들은 커다란 위협이 된다.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 특히 폭력을 모르고, 거짓을 모르는 크레이커들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쉽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과 싸워야 한다. 그들을 물리쳐야 한다. 토비와 젭은 그렇게 그들을 물리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토비와 가까워진 블랙비어드라는 크레이커에게 글을 가르친다.


이제 이야기 전달자 토비가 사라지면 이야기는 블랙비어드가 이어받아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블랙비어드 역시 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이제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전환이 된다. 사람들은 다시 시작한다. 3권은 1,2권을 거쳐 대단원을 장식한다. 크레이크가 질병을 전파하기 전부터 있었던 일이 이번에는 젭을 통해서 전개된다. 젭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젭의 이야기는 토비를 거쳐서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크레이커들과 살아남은 사람들, 또 동물들이 협력하는 장면이 나온다.


새롭게 시작하는 지구다. 새롭게 탄생한 인류도 나온다. 기존 인류와 크레이커들의 혼종. 그렇게 세상은 다시 시작한다.


세 권을 합치면 1,700쪽이 넘는 방대한 양이지만, 읽기에 지루하지 않다. 게다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넘나들기에 여러 생각을 할 수가 있게 된다.


젭을 통해서 현대 컴퓨터 사회의 문제점을 알 수 있게 되고, 정보를 통제하는 자들이 어떤 권력을 누리는지, 그런 세상에 사는 것이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런 사회가 소설처럼 한 순간 붕괴되지는 않겠지만, 작가는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아야 하는지, 자연과 어떻게 관계맺어야 하는지, 또 다른 존재들과 맺는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이 3권은 소중하다. 새로운 삶들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나오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인류의 모습이.


그럼에도 작가는 완전한 유토피아는 없음을 젭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완전한 유토피아란 없다. 불완전한 세상을 살아갈 뿐이다. 다만, 그 불완전한 세상에서 우리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함을,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아주 흥미로운 미친 아담 시리즈.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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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의 해 미친 아담 3부작 2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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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와 크레이크]라는 제목으로 나온 '미친 아담 시리즈1권'에 이어 2권이다. 이제는 크레이크도 지미도 주인공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였다.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류에게 전염병을 퍼뜨린다. 인류는 절멸해야 한다.


성경에 신이 인간에게 분노해 인간을 멸하려고 할 때, 그럼에도 의로운 인간이 있어 모두를 멸하지는 못한다. 아무리 인류가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의인은 한두 명 꼭 있다.


이 소설은 25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신의 정원사라는 종교 집단이 결성되고, 전염병이 돌아 인류가 거의 멸종될 때까지의 시간. 홍수의 해는 바로 25년이다. 


물의 홍수가 아닌 물이 없는 홍수, 이것은 바로 전염병이다. 요즘 용어로 하면 '팬데믹'이다. 전세계를 3년 동안 공포에 떨게 했던 '코로나19'보다 더 치명률이 높은 전염병. 이를 만들어 퍼뜨린 사람은 크레이크다. 1권에 나온다. 그리고 2권에서도 렌의 회상 부분에서 크레이크가 등장한다. 


반면에 1권에서 주로 나왔던 오릭스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는다. 스쳐지나가는 인물이 된다. 다만 지미는 2권에서도 렌의 회상을 통해서 주요 등장인물이 된다.


2권은 토비와 렌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물론 각 장의 시작에는 아담1의 연설이 있고, '신의 정원사들이 즐겨 부르는 찬양집'에서라고 되어 있는 노래(시)가 실려 있다. 그리고 토비의 이야기와 렌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전개된다.


두 인물은 모두 신의 정원사 집단과 함께 생활한 경험이 있다. 여기에 나이가 많은 토비는 이브의 직책까지 올라간다. 물론 신의 존재를 완전히 믿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진 경험으로 토비는 그들의 생활방식을 긍정하게 된다.


이들의 생활방식은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동물들을 먹지 않는 채식 위주의 생활을 하면서, 인간이 다른 종들을 멸종시키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물이 없는 홍수의 해가 올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러니 토비의 이야기를 통해서 환경, 생태의 문제에 접근할 수가 있다. 우리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가 지금의 생활방식을 유지한다면 지구가 7개가 있어서 안 될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토비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렌 역시 마찬가지다. 렌은 다양한 경험을 한다. 아직 미래를 살아갈 세대다. 토비가 어느 정도 책임있는 세대라면, 렌은 그들이 만든 세상을 물려받아 살아가야 할 세대다. 그러니 렌은 약한 존재로 나올 수밖에 없다.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렌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존 세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생활을 바꿀 기존 세대들의 노력. 그것을 토비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왜 토비가 그런 역할을 맡아야 하는가? 그것은 토비가 신의 정원사들에 합류 전까지 겪었던 일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토비는 기존 사회에서 배제된 삶을 산, 폭력에 희생당하고 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사람에게든 자연에게든 폭력이 더 이상 주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토비는 이 소설에서 제목을 이루는 성인들처럼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주 인물이 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그것을 이겨내는 사람이었기에.


전염병이 퍼진 세계는 디스토피아다. 크레이크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그가 만든 세상은 디스토피아에 불과하다. 그가 창조한 인류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혼란한 디스토피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서로가 서로를 약탈하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존재는 남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존재가 아니라 남을 보듬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토비의 존재가 소중하다. 토비는 렌을 보호하고 살아남게 한다.


다른 세상을 만들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게 소설은 3권으로 넘어가게 된다.


소설이 방대하다. 방대한데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을 떼기가 힘들다. 오랜만에 2권을 읽었는데도 읽으면서 1권을 환기하게 된다. 1권에 나왔던 인물들이 2권에 토비나 렌과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토비와 렌이 위기를 헤쳐나가는 과정이 손에 땀을 쥐고 읽게 하고, 소설의 각 장에 나오는 날짜 이름이 된 사람들의 이름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몇몇은 쉽게 파악이 되는데, 이 소설에 나온 날짜 이름이 된 인물들을 한데 모아놓으면 환경, 생태 운동가들 열전이 되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3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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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아침. 


  길을 걷다가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을 하는 아이를 발견했다.

  무엇을 하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멈춰서서 살펴보니, 아이의 손에는 나뭇가지가 들려 있다.


  그 나뭇가지로 아이는 보도블록 위에서 무언가를 들어 화단으로 넘겨준다.


  무얼까? 무엇인지는 금방 알게 됐다. 비 온 다음날 보도블록으로 나온 지렁이들. 꿈틀꿈틀, 천천히 기어다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타는 듯한 햇볕에 타 버릴 지렁이들.


그런 지렁이를 징그럽다 하지 않고 조심스레 나뭇가지로 들어서 화단으로, 흙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고 있는 아이.


감동이었다. 이런 아이가 있구나! 이렇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가 있었구나! 세상에 동심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마음이 따스해졌다. 자연스레 동시가 떠오르기도 했고, [샬롯의 거미줄]이라는 동화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래, 이런 동심들이 글로 표현되어 많은 아이들이 읽으면 좋겠지. 아이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지.


이런 상황에서 '동시집' 읽게 되었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봄처럼 세상 만물을 따스히 감싸주는 손길은 되지 못할지라도 깜냥껏 제 몫을 다하고 싶습니다. 동시를 쓰는 일도 그런 몫 중의 하나라는 걸 잊지 않으려 합니다.'(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동시를 쓰는 시인과 지렁이를 화단으로 보내주는 아이의 마음이 통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모두가 잘되는 세상이 과연 문제가 있을까 하는 생각.


최근에 우리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수능 킬러 문제'에 관한 논란. 변별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아주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낼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 그런 문제는 사교육만 키운다고 하는 사람들. 아니, 문제가 쉬워지면 오히려 더 사교육이 는다고 하는 사람들.


여기에 '카르텔'이라는 말까지 나돌면서 이런 말 저런 말들이 우리 사회를 뒤덮었는데... 수능으로 등수를 나누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로 이야기가 진전되지는 않는다.


수능을 자격고사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는 하니, 논의가 좀 진전되고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이 동시집에서 '정말 그런 걸까?'라는 시를 보았다. 모두가 수능을 잘 보면 안 되나? 만점이 수두룩하게 나오면 안 되나? 그럼 교육이 망하나? 그런 생각.


       정말 그런 걸까?


     시골 사는 큰삼촌이

     양파 농사가 잘돼서 좋다더니

     이 마을도 양파 풍년

     저 마을도 양파 풍년

     너도나도 양파 풍년

     그래서 한꺼번에 모두 망했단다.


     내 친구들이 시험을 잘 봐서

     얘도 백 점

     쟤도 백 점

     너도나도 백 점

     그러면 학교도 망하게 될까?


    망하지 않게 하려고

    시험 문제를 어렵게 내는 걸까?


박일환, 토끼라서 고마워. 2023년. 60쪽.


이 질문에 무어라고 답할 것인가? 아니, 답할 수가 있나? 어떤 교사는 문제가 쉬워 아이들 점수가 높게 나오면 자존심이 상한다고도 한다던데... 아이들 점수가 잘 나오면 교사가 자랑스러워 해야 하지 않나, 내가 가르친 내용을 아이들이 잘 이해했구나 하면서...


오로지 등급을 나누기 위해서 변별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어려운 문제를 내는 것, 그것은 전제가 잘못 되지 않았나?


누구나 똑같은 농사를 지으면 잘 되면 잘 될수록 이익을 남길 수가 없다. 같은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농사를 지어야 하고, 그 농사들이 모두 잘 되면 다 좋을 수가 있다.


획일성을 벗어난 농사, 단작이 아닌 다작을 하는 농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1연에서는 다양한 농사가 필요함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면, 2연에서는 시험을 통해서 평가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아이들이 얼마나 시험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는지를... 시험은 배운 것을 평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등급을 매기기 위한 수단으로 쓰고 있는 현실을, 오히려 그런 시험으로 인해 학교(교육)가 망해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아이들이 너도나도 백점을 맞으면 그것이 서로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백점을 토대로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자신있게 찾아가게 된다는 것. 오히려 너도나도 백점이어야 학교가 산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너무도 어려운 문제로 백점을 맞기 힘든 시험이 계속되는 학교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이 과연 보도블록 위를 기어가다 바짝 말라 죽어가는 지렁이를 볼 수 있을까?


너도나도 백점을 맞아 시험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을수록 시험지만이 아닌 주변의 다른 존재들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갖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다.


조용히, 조심스레 지렁이를 살리려고 한 아이, 그런 아이들이 넘쳐나는 학교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학교를 꿈꾸어본다. 동시를 쓰고 읽는 이유도 바로 그런 따스함을 간직하기 위함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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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에서 - 간호사가 들여다본 것들
김수련 지음 / 글항아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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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노동'


꼭 필요한 일이다. 사회를 유지하는데, 또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노동이다. 그런데 이 '돌봄 노동'은 '그림자 노동'이 된다.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여서는 안 된다. 그냥 당연한 듯이 존재해야 한다. 그들이 눈에 보이는 순간, 고마움을 표하기보다는 이상하게 비난이 앞서기도 한다.


왜냐고? 그들이 눈에 보일 때는 바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때이기 때문이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이대로는 돌봄이 지속될 수 없겠다고 느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한다. 


아니다. 자신들의 권리가 아니라 '제대로 돌볼 수 있는 권리'라고 해야 한다. 그들의 권리가 침해당할수록 돌볼 수 있는 권리가 침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보일 때 그들을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그동안 한 '그림자 노동'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아도 온몸으로 느꼈을텐데 그것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을 찾아보려 하지 않는다. 그냥 당장 자신의 불편함만 볼 뿐이다.


그래서 돌봄 노동은 역설적이게도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돌봄 받지 못하는 돌봄 노동 중에서 간호사의 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 그것도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의 상황을 자신의 경험이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너무도 바쁘고, 정신없고, 힘들고, 정신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힘든 그런 상황인데도 처우는 개선되지 않는 현실.


중환자실에 간호사 한 명 당 환자 2명인 경우가 복받은 경우라고 하는데, 한 환자에게 일이 생겼을 경우엔 간호사 한 명으로는 치료할 수가 없어서 최소 3-4명의 간호사가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그런데 만약 2명에게 문제가 생기면, 중환자실에 있는 간호사들이 또 투입되어야 하고, 나머지 중환자들을 돌볼 수 있는 인력에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좋다고 하는 병원에서도 이런데 한 명의 간호사 당 중환자 3명이상이면 어떻게 될까? 제대로 된 치료가 가능할까? 또 간호사들의 업무를 이렇게 극한까지 끌어올린다면 과연 제대로 된 돌봄이 가능할까?


간호사들이 건강하고 편해야 환자들도 건강하고 편해질 수 있다. 세상에 돌봄을 하는 사람이 먼저 쓰러지는 경우가 생긴다면 어떻게 돌봄을 받는 사람이 치유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지...


간호사를 더 많이 고용하면 병원 운영이 지장을 준다? 글쎄? 병원이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존재하는지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환자를 돈을 물어오는 고객으로 생각한다면(물론 영리병원은 그런 목적으로 존재할테다. 영리병원 이야기는 이제 남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이 과연 의료기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운영에 필요한 이익은 거두어야 한다. 우리나라 모든 병원들이 '장기려' 박사와 같은 사람들이 운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공공의료기관은 확충해야 한다. 이제 겨우 5%정도가 공공병원이라고 하는데(210쪽 참조), 이는 적어도 너무 적다. 이를 확충해야 한다. 여기에 간호사들의 근무 환경이 개선되어야 한다. 10년을 근무하지 않고 퇴직하는 간호사가 속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간호대학을 나온 사람은 많은데 정작 일선에서 간호사는 부족한 현실. 그래서 외국인 간호사를 고용하겠다는 말도 나오는데, 예전에 독일로 파견간 간호사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파견 간호사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는데 격세지감을 느낀다.


왜 간호사들은 많은데 실제로 일하는 간호사들은 적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문제를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낼 수 있다.


이 책에서 김수련 간호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책임간호사나 선배가 챙겨주지 않아도 밥 먹고 물 마실 수 있고 선배가 관대하지 않아도 실수 때문에 비난받지 않아야 한다. 설령 괴롭힘을 당하면 공식적인 문제 제기를 할 때 두려움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위험한 인력 구조를 방치하게 해서는 안 된다. 충원을 요구해야 한다. 강력한 처벌 조항을 가진 간호사 대 환자 비율 법안을, 간호인력인권법을 통과시켜야 한다. 공공 병원을 더 세워야 한고, 안전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247쪽)


이것이 무리한 요구일까? 돌봄을 제대로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인데 아직도 실현이 안 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돌봄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누군가의 희생으로 받는 돌봄이 의미가 있을까?


돌보는 주체도 돌봄을 받는 사람도 모두 자신의 권리를 누리면서 지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간호사들의 열악한 환경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 책이기도 하고... 요즘 '보건의료노조'에서 파업을 하고 있다. 최소한 그들의 요구를 살펴보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누구나 간호사들과 관계를 맺고 살 수밖에 없으므로.


돌봄 노동자가 돌봄을 받지 못하는 현실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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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사진이 여름을 생각하게 한다. 아, 여름이 되었구나!


  '빙수' 사진이다. 더운 여름에 먹는 빙수는 시원함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런 시원함이 더위를 잊게 하기도 하고, 더위를 이겨내게도 한다.


  단지 시원함만일까? 더위의 맞은 편이 있다는 점을 알려주기 때문 아닐까? 즉, 더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원함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빙수가 한다는 생각을 한다.


  [빅이슈]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편집자의 말에서 '힘들 때 돌아갈 곳이 사회 어딘가에 하나쯤 있다는 것도 좋은 일 아닐까요'(08쪽)한다.


더위에도 시원한 곳이 있듯이, 힘들어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어쩌면 [빅이슈]는 그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의 10년만에 다시 빅판으로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가 이번 호에 나오니, 그런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한 여성 홈리스들의 자립을 돕는 곳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런 자활 활동도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마냥 함께 할 수 없음을, 그럼에도 그들은 자활 활동을 통해 얻은 힘으로 자신들의 삶을 다시 살아나가고 있음을 [빅이슈]를 통해 만나게 된다.


이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 더위만큼이나 빅판들에게는 장마도 힘들테다. 아무래도 장마 기간에는 판매하기가 힘들테니.


하지만 그럼에도 더위와 장마는 언젠가는 끝난다. 그 끝남이 있음을 알고 이 여름 이겨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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