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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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나는 시간대는 셋. 하나는 만엔 원년이라고 할 수 있는 1860년. 이때 농민봉기가 일어난다. 폭력이다. 둘은 패전 직후. 우리나라로 치면 해방직후다. 이때는 조선인 부락을 습격하는 일본인들의 모습. 또다른 폭력이다. 셋은 1960년. 미국과 안보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 이것 역시 폭력 시위다.


소설은 1960년대로부터 시작한다. 주인공이 거쳐온 시대를 거쳐 그는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니, 그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못하는 지식인의 부끄러움 - 해설에서는 수치심이라고도 하는데 -이 나타나 있다.


전후 일본, 이제 경제발전이 되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본이지만 지식인들은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고 느끼고, 또한 과거 자신들이 벌인 전쟁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지니고 있었으리라. 그것이 그들을 수치심 속에 살게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패배시킨 나라에 의존하는 모습. 그러한 수치심을 만엔 원년에 일어났던 농민봉기와 연결짓는다. 농민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일으킨 봉기. 폭력이긴 하지만, 농민들을 누르고 있었던 것 또한 폭력 아니던가. 커다란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 여기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농민들. 학살당하는 농민들. 그들을 지도했던 서술자의 증조부의 동생은 행방불명이 된다. 홀로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여 그 후손들은 수치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패전 직후 제자리를 잡아가는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는 골짜기 일본 사람들. 이들에 의해 조선인 한 명이 죽게 된다. 과연 정당한 폭력인가? 자신들의 패전에도 잘살아가는 조선인들에게 증오심을 품는 것은 그간 자신들이 조선인들에게 가했던 폭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하여 서술자의 형 S는 두번째 습격에서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다. 그는 폭력을 폭력으로 이어가는 것에 반대했던 것이다.


첫번째 조상은 폭력 저항을 주도하다 사라지고, 두번째로 형은 폭력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다. 이에 다시 세월이 흘러 1960년대 동생 다카시는 마을 청년들을 선동해서 조선인이 운영하는 슈퍼마켓을 습격한다. 또다른 폭력이다. 이 폭력은 양쪽으로부터 자신을 몰아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겠다는 동생 다카시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런 폭력을 추적하면서 서술자는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사실. 그런 폭력이 아니라 폭력을 끊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대에 동생 다카시에 의해 벌어진 폭력은 더이상 다른 폭력을 부르지 않는다. 조선인 주인은 그 일을 무마하고 자신이 할 일을 한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던 둘째 형도 마찬가지다. 그 형 역시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양쪽 어디에 서지 않고 폭력의 한 가운데에 자신을 놓아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농민 폭동, 아니 혁명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을 주도했던 증조부의 동생은 어떤가?그는 폭력을 통해서 얻은 것도 있었지만, 많은 농민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거기에 대한 책임. 결국 지하 골방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으로 참회를 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참회가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그는 글을 통해 누구도 죽지 않는 혁명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이는 오에겐자부로가 폭력이 아닌 평화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 그이기에 일본의 재무장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오키나와 노트]나 [히로시마 노트]와 같은 폭력으로 인해 피해를 본 장소를 찾고 그런 민중들에게 지지를 보내게 된다.


만엔 원년의 폭동이 정당한 폭력이었는지의 여부를 떠나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점, 혁명은 어떠해야 하는가, 혁명을 이끄는 사람을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행동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결국 고민하고 번뇌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끝까지 민중을 책임진다는 것이 자신의 죽음으로 책임을 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죽음은 자신의 두려움, 책무를 똑바로 들여다보고 자신이 행한 결과이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남들에게는 그러한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에 나온 친구의 자살 모습이 바로 그런 점을 보여주지 않을까.


진실을 말한다는 것, 진실을 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것이 어떠한 폭력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 어쩌면 진실은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보다 더 힘든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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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평전 - 솥에서 난 성자
김형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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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원불교 대종사 소태산 박중빈. 어렸을 때 이름은 박진섭, 그 다음 이름은 박처화, 그 다음이 박중빈. 오랜 구도 끝에 진리를 발견한 사람. 발견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알린 사람.


하지만 그가 살던 시대는 일제시대. 민족이 억압을 받던 시대. 민중을 구원한다는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민족 구원? 아니다. 민족이라는 한계를 정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원하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지 않는다. 조선인, 일본인, 그리고 세계인을 구원하려는 목표를 세운다. 이것이 종교다.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는. 지금은 특정 집단에 국한되어 다른 집단을 배제하고 있지만, 종교의 처음이 그랬을까?


배제가 아니라 포용 아니었던가. 누구나 나와 같은 존재라는 인식. 그래서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 나만이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깨우치는 세상. 그렇다고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강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도록 이끌어주는 과정. 이것이 종교의 본질이다.


소태산! 한자어로 살필 필요가 없다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를 많이 쓰던 시대였고, 호(號)라든지 자(字)라든지 본명 외에 다른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로 한자를 썼으니, 박중빈 역시 자신의 호를 한자로 음차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솥에 산'이라고 부른다. 솥을 생각한다. 솥이 무엇인가.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로 바뀌는 공간 아닌가. 그렇게 바뀌기 위해서는 그냥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열기와 습기 등을 견뎌내야 한다. 그것을 견뎌내면 다른 존재로 바뀌게 된다. 그것을 하는 존재가 바로 솥이다.


쌀과 물을 넣고 끓이면 밥이 되듯이 솥은 하나의 세상에서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솥에 산'이라는 이름에는 이미 다른 존재로 변한 자신을 말해주고 있으며,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변하게 한다는, 함께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솥에는 어떤 존재들이 들어갈까? 소위 귀하다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 들어갈까? 아니다. 솥에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얻을 수 있는 존재들이 들어간다. 그냥 보통 존재들. 그것들이 솥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살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 나온다. 그렇다고 솥에 보통 것들, 귀하지 않은 것들만 들어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솥에는 귀한 존재들도 들어간다. 당시 귀하던 고기도 솥에 들어가 삶아지지 않던가. 그러면 다른 음식이 되어 나온다.


즉 '솥에 산'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있다. 약한 하층민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권층도 포함한 모두를 아우르는 진리. 그것을 설파하고 함께하겠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 맞게 소태산은 약한 사람들이 더 힘들어지지 않는 삶을 살게 한다. 간척사업을 해서 식량난을 해결하고 자금을 확보하려든지, 당시 가장 약한 층에 속했던 여성들도 동등한 대우를 받고, 동등한 활동을 하게 한다든지, 일제 순사 출신까지도 포용을 하며, 일본인인 경찰 고위 관료조차도 함께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다양한 종교를 아우른다. 진리의 길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 사람을 배척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끌어들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도록 할 뿐이다. 그 사람이 스스로 깨치지 못하면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도 강조한다.


지금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소태산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엄혹한 일제시대, 어떤 사람들은 소태산이 더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3.1운동 당시 제자들의 태도에서도 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소태산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때가 오지 않았다는 판단도 있고, 종교를 민족의 한계로 국한시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있다.


이런 소태산의 모습에서 예수나 부처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들 역시 민족적 요구와 진리 추구 사이에서 민족의 입장에 서라는 요청을 받지 않았던가. 하지만 민족의 경계 내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적인 종교로 설 수 있지 않았을까.


즉, 종교는 경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허무는 것이기 때문에, 민족이라는 경계를 나눌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핍박을 받고 있지만, 핍박하는 사람들이 다른 민족 전체는 아니니, 다른 민족의 성원들과 함께 그러한 억압을 떨쳐내고 진리의 길에 들어서려고 하지 않았을까.


솥은 자신에게 들어온 존재들을 가리지 않는다. 그 각각 다른 존재들이 솥 안에서 하나가 된다. 여럿이 하나가 되는 일, 내가 어거지로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만법귀일(萬法歸一)이다. 소태산은 그런 일을 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하나가 된 법은 어디로 갈까? 일귀하처(一歸何處)라고 묻는다고 한다.


어디로 가긴. 다시 만법(萬法)으로 가지. 그 만법은 예전과 같은 만법이 아닌 변한 만법. 즉 만이지만 하나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솥에서 다른 존재로 하나가 된 존재는 다시 여럿에게로 돌아간다. 여럿에게로 돌아가는 하나. 그 만법과 하나가 바로 원이다. 일원이다. 돌고돈다.


하여 원불교의 상징이 원이다. 돌고 돎. 엄혹한 시대를 살았던 소태산 박중빈. 그가 당시 사람들에게 남겼던 진리의 길. 그것은 희망의 길이자 행복의 길이었을 것이다. 솥 속에서 다른 존재로 변한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소태산이 우리에게 보여준 진리의 길일 것이다.


참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평전이었는데,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에서 만법귀일이 아니라 만법이 만법으로,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를 만들고 더 높고 튼튼하게 쌓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나와 다른 너는 몰아내야 할 존재가 아니라 함께해야 할 존재라는 것. 솥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뜨거운 열기를 함께 견뎌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다른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그 뜨거움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서로가 서로를 안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소태산의 사상이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종교를 떠나서 한 사람의 일생을, 고민을, 그가 한 실천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로 이 책은 큰 의미를 지닌다. 많은 사람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부처님 오신 날. 소태산 그의 사상과 실천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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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라 - 2024 제7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작
김아인 지음 / 허블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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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전세계가 팬데믹을 겪었다. 아마도 이러한 질병이 코로나19로만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한다. 암울한 현실이 반복될 수도 있다. 이것이 인간과 다른 존재들의 거리가 무너진 데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거리의 붕괴는 바로 인간이 추구한 과학기술에 있다.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 예측하지 못하는 질병을 유발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을 옥죄게 된다.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자 하는 일들이 인간을 더 힘들게 하는 역설. 그럼에도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


이제는 인공지능이다. 이보다 더한 기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지금도 쓰이고 있는 기술을 더욱 밀어붙이고 있다. 인간 냉동기술.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


예로부터 있었다. 영생을 추구하기 위한 많은 방편들, 약물들을 발견 또는 개발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런데도 모두 실패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니까. 아니, 유한해야 하니까. 그것을 깨뜨렸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없다.


이 지구에 죽지 않은 인간들이 계속 태어나고 살아간다면? 과연 지구가 버틸 수 있을까? 우주를 개척하면 된다고? 하지만 우주 역시 무한하지 않다. 죽음이 없는 존재는 무한증식할 수밖에 없다. 그들을 채울 공간이 있을까? 


이런 상상은 하지 않는다. 육체를 지닌 인간이 무한하다면 문제가 되니, 소설은 육체를 소멸시키고 영혼(정신)만 남긴다. 인간을 데이터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유한한 공간에 무한을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뇌 또는 영혼, 정신이 데이터로 남아 있다고 살아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하지 말자. 그렇게라도 인류를 살아남게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라는 질문은 윤리, 철학과 연결되는 질문이다.


소설은 그 질문은 독자에게 남겨두고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육체와 분리된 정신이 아니라 육체까지도 보존하는 기술이 있다면? 지금 냉동기술이 사실 그러한데, 지금보다 발전한 모습이 무엇이냐면, 이 소설에서는 냉동된 육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정신은 데이터화되어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세대에 전염병을 치유할 수 있는 치료제가 나오면 육체를 깨어나게 해서 계속 살아가게 하면 된다. 여기까지가 소설에서 나온 과학기술의 발전이다.


이런 과학기술을 토대로 운영되는 집단은 권력을 지닌다. 인간에게 신과 같은 위치에 선다. 과학기술이 신이라면 이를 다 받아들일까? 세상에서 신을 섬기는 자들 중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학기술을 파괴하는 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집단들. 


또한 과학기술이 이윤으로만 쓰이는 것을 막고, 많은 사람을 구하는 쪽으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본래 추구했던 목표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고 여기는 집단도 있다. 그리고 인간의 유한한 생명을 받아들이고, 무한을 추구하는 행위가 잘못되었으니 그러한 과학기술은 파괴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자, 당신은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소설 속 인물인 페이, 하라바야시 가스미, 황신부는 이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자신이 어떤 입장에 설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웨이쉬안이 있다. 거대 기술 회사에서 장의사로 일하는(장의사라고 하기보다는 정신이 추출된 나머지 육체를 처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 웨이쉬안. 그가 페이의 죽음 이후에 겪게 되는 일들이 바로 이 다양한 관점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엮이면서 겪게 되는 일이다.


소설은 어떤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페이도, 가스미도. 다만 웨이쉬안 스스로 결정한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은 어떤 세상을 살아가려 하는지를...


그는 자신의 선택과 같이 남들에 의해서 다른 사람의 삶도 선택되어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한다. 스스로 결정하도록. 거대과학기술 회사인 AE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던 페이의 삶, 육체를 보존하면서 정신과 연결시키는 기술을 개발한 가스미, 그러한 기술은 파괴되어야 한다고 하는 황신부. 이들 역시 자신들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웨이쉬안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길을 놓아두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내가 내 삶을 결정하듯이,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삶을 결정해야 한다는. 결국 세상은 더욱 발전할 것이고, 온갖 과학기술이 나올 것이다.


그러한 세상에서 선택은 온전히 내 몫이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온전한 내 몫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고, 어떤 집단의 이익에만 종사해서도 안 되며,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인류가 대처할 수 없는 감염병이 유행하는 디스토피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현실에서 상용되고 있는 기술들도 있으니, 그것이 꼭 먼 미래의 일은 아니라는 생각. 그래서 더더욱 선택의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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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빈·송규 -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창비 한국사상선 20
박중빈.송규 지음, 허석 편저 / 창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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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다. 박중빈은 들어봤는데, 송규는 처음이었다. 하긴 원불교 신자도 아니고,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니, 원불교를 창시한(?) 사람이 박중빈이라는 사실은 역사 시간을 통해서 알고 있었지만, 그 다음을 이은 사람까지야.


종교 지도자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를 이끌어온 사상가로도 볼 수 있다. 사상가로 이들을 보면 굳이 종교라는 틀에 가둘 필요가 없다. 이 책에 실린 박중빈의 [대종경]을 보아도, 특정 종교로 국한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근본은 하나이기 때문에, 많은 종교들이 나왔지만, 그것은 방편에 불과하고, 그 종교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같다는 것이 박중빈의 말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이비 종교는 뺀다. 박중빈 역시 당시 유행하던 사이비 종교에 대해서는 종교나 사상으로 보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이들의 사상이 무엇일까?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사상 아니던가. 그 행복이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적 부를 뜻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권력을 뜻할 수도 있겠지만, 사상가들이 말하는 행복이란 진리를 깨우치고, 진리를 실천하면서, 그 진리를 후대에 전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행복 추구를 모든 사람들이 한다면 그 사회는 조화를 이룬 사회가 될 터이다. 그런 사회를 추구하는 사상가니, 어떤 특정한 종교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이 책에는 [정전]과 [대종경]이 수록되어 있고, 정산 송규가 쓴 [정산종사법어] 중 일부와 천부경 해설이 실려 있다.


무릇 모든 종교의 경전이 그렇듯이 좋은 말, 경청해야 할 말, 실천해야 할 말들이 실려 있다. 박중빈이나 송규가 말하듯이 말보다는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 그럴 듯한 말만 늘어놓아서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쉬운 말로 표현을 하고 있어서 이해하기가 쉽다. 이해하는 데서 그치면 안 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실천해야 하는데,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누누이 이야기하고 있으니 더 부연할 것도 없고...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하고는, 정말 우리가 명심하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말이구나 했다.


'세상에 세가지 제도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나니, 하나는 마음에 어른이 없는 사람이요, 둘은 모든 일에 염치가 없는 사람이요, 셋은 악을 범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는 사람이니라.' (288쪽. 대종경, 요훈품 38)


햐, 이 구절, 누구에게 딱 맞는 구절 아닌가. 자기가 제일이라고 생각해서, 자기를 훈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뻔뻔하게 잘못을 하고도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 그러니 그것이 악인 줄도 모르고, 혹 악인 줄은 알지만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인지 알만한 사람은 알리라. 그만이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여기에 해당하니, 이들을 어떻게 제도(교육)할 수 있단 말인가. 박중빈 같은 사람도 힘들다고 했는데... 참.


그러니 요훈품에 나오는, 특별히 잘나지 않은 나같은 사람에게는 이 말이 다가온다. 보통 사람이라고 공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그 사람에게 특별한 수행법이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고 하니.


'대중 가운데 처하여 비록 특별한 선과 특별한 기술은 없다 할지라도 오래 평범을 지키면서 꾸준한 공을 쌓는 사람은 특별한 인물이니, 그가 도리어 큰 성공을 보게 되리라.'(288쪽. 대종경, 요훈품 40. )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일, 박중빈은 도를 닦기 위해 특별히 출가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모든 곳에서, 모든 시간에서 수행을 할 수 있다고 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것을 꾸준히 하는 것, 다만 그것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이 책을 읽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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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5-03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악을 범하고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는 사람....새기고 또 새깁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되지 않아야할텐데요...ㅠㅠ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kinye91 2025-05-03 12:0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러려먼 잘 들을 수 있는 귀와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지녀야겠지요.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포르노랜드 열다 페미니즘 총서 5
게일 다인스 지음, 신혜빈 옮김 / 열다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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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뜩하다. 아직도 이러한 현실이 바뀌지 않았으니까. 여전히 포르노는 우리 사회를 장악하고 있으니까. 


가장 단순하게 인터넷 천국이 되면서, 스마트폰 시대가 되면서 누구나 쉽게 포르노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남아들이 포르노에 접하는 나이가 11세라고 나오지만, 지금은 더 빨라졌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합법이든 불법이든 별 상관이 없다. 인터넷에는 온갖 자료들이 나돌아다니니까. 또한 법망을 피해 외국에 서버를 두거나 또는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는 포르노 자체가 불법이니까 더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럼에도 포르노 유통은 거의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엔 딥페이크가 문제가 되는데,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상하게 상대를, 특히 여성을 농락하는 쪽으로 쉽게 쓰이고 있으니, 포르노 역시 마찬가지다.


포르노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남성들의 자위용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일대일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저자에 따르면 상관관계는 분명 있으며, 포르노에서 다루는 내용이 여성들을 같은 사람으로서 다루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한다.


여기에 알게모르게 나이어린 소녀들에게까지 포르노에서 나온 의상들이 유행하기도 한다는데, 이렇게 사회 전반에 포르노 문화가 퍼져 있으니, 그를 포르노랜드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포르노랜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른 성을 착취하면서도 그것이 착취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문화가 형성된다는 것. 그것을 자신의 생활에 적용하려는 욕구가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 또한 포르노도 그냥 성적 욕구만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포르노 자체에서도 온갖 차별이 발생한다는 것. 특히 인종 차별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포르노라는 것.


무엇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수단으로 보고,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포르노라고 하니, 이것은 인권에도 반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섬뜩한 마음이 들고, 끔찍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심각한데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삼는 모습을 자명하게 보여주는 포르노는 그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되지만, 이것이 우리 문화에 스며들어 우리들의 의식을 조정할 수도 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 점에 대해서 여러 사례를 들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표현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포르노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서 사실을 그대로 적시했다고 하지만, 그 사실도 하나의 흥미로만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도 좀 생각해 보면 좋지 않았을까? 물론 직설적으로 표현된 이 책의 내용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토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표현한 의미가 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냥 포르노는 현실이 아니야, 연출된 거야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기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다. 포르노에 나오는 영상들이 연출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게 학대하고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이 연출이 아니라 사실이고, 그것 자체가 범죄가 될 수 있음도 보여주고 있으니...


개인의 노력과 사회의 노력이 함께가야만 포르노랜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데, 너무도 자유로운 인터넷 세상, 어떤 한계를 정해야 할지 논의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포르노랜드'라는 직설적인 제목을 붙인 이 책은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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