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들이 순할 수 있을까? 가만 생각해 보니, 먼지들은 순하다. 그냥 가라앉아 있을 뿐이다. 누군가 건드리지 않으면 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


  먼지들은 움직임보다는 멈춤과 친하다. 변화보다는 안정과 친하다. 그냥 조용히 그 자리에 쌓이고 싶어한다. 쌓이면서 세월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먼지들은 이리저리 날리기 시작한다. 우리를 힘들게 한다. 순한 먼지가 아니라 독한 먼지가 된다. 이때 먼지는 우리가 피해야 할 대상이 된다. 이때문에 먼지가 쌓였다는 말을 좋은 쪽으로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시인을 빼면. 


  시인은 먼지를 다른 각도에서 본다. 다르게 판단하고 우리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집 제목도 그렇다. '순한 먼지들의 책방'이라니.


순한 먼지라는 말에서 고요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고요하다는 느낌을 넘어서 첫행을 읽으면서 정착했다는 느낌, 이리저리 떠밀리다 드디어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 이제 격동의 시기를 지나 안정의 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그런 안정이 오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화자가 후배에게 먼지를 보낸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순한 먼지들이 쌓인 책방은 슴슴함과 비슷하다. 심심함. 이것은 안정이다. 이러한 안정된 상태에서는 야릇한 지루함도 느껴 변화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안정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이다.


슴슴한(심심한) 상태. 먼지가 쌓이는 상태. 우리의 삶에 이런 나날들이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 민주주의가 정착한 사회는 대체로 이런 슴슴한 상태, 먼지가 쌓일 정도로 안정되고 오래 지속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람이 휙 불어오면 고요히 제 자리를 지키던 먼지들이 확 날리게 된다. 우리 삶을 힘들게 한다. 이런 고요, 이런 안정을 깨는 폭탄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일들, 말들이 있다.


이 시집을 읽으며 두 시가 마음으로 들어온 이유가 그것이다. '순한 먼지들의 책방'과 '천하무적'


세상에 천하무적이라니... 이런 존재가 있을까? 없어야 한다. 천하에 적이 없는 존재라니, 없어야 하는데 시를 읽다보니 우리 사회에는 이런 천하무적의 존재가 있구나 하게 된다. 먼지처럼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빅뱅에 준하는, 한 사람의 삶을, 사회를 뒤집어엎을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는 말.  


그 말이 얼마 전에 누구의 입에서 나왔다. 우리는 먼지처럼 고요히 쌓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누구에게는 이 말이 천하무적의 말이었구나, 이 말로 우리 사회를 뒤흔들어놓으려고 했구나, 참... 그냥 순하게 쌓여 있어도 좋을 말이었을텐데... 아니, 이제는 그냥 순한 먼지처럼 쌓여 있는 말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북한을 비롯한 외부의 주권 침탈 세력들과 우리 사회 내부의 반국가세력이 연계하여, 국가안보와 계속성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나서 우리 사회에 불러온 파장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우리에게 천하무적으로 통한다고 생각하는 말이 있다고, 이 말을 하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냥 순한 먼지처럼 이제는 역사 속에 쌓여 있던 말이 된 줄 알았는데... 생각이 정리가 안 된다. 저 말이 슴슴한 내 삶을 휘저어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시인의 슴슴한 삶을 순식간에 소름끼치게 했듯이.


정우영의 시 두 편을 읽어보자. 그리고 다시 천하무적의 말이 순한 먼지가 되기를 지켜보자. 


  순한 먼지들의 책방


  여기저기 떠다니던 후배가 책방을 열었어.

  가지 못한 나는 먼지를 보냈지.

  먼지는 가서 거기 오래 묵을 거야.


  머물면서 사람들 남기고 가는 숨결과 손때와 놀람과 같은 것들 섞어서 책장에 쌓고는, 돈이나 설움이나 차별이나 이런 것들은 걷어내겠지. 대신에, 너와 내가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지구와 함께 오늘 여기를 느끼면서, 나누는 세상 모든 것과의 대화는 얼마나 좋아, 이런 속엣말들 끌어모아 바닥이든 모서리든 책으로 펼쳐놓겠지.


  그려보기만 해도 뿌듯하잖아.

  지상 어디에도 없을,

  순한 먼지들의 책방.


(혹시라도 기역아 먼지라니, 곧 망하라는 뜻이냐고 언짢을 것도 같아 살짝 귀띔하는데. 우리가 먼지의 기세를 몰라서 그래. 우주도 본래 먼지로부터 팽창하고 있다고 하지 않던.)


정우영, 순한 먼지들의 책방. 창비. 2024년. 22쪽





천하무적


  슴슴하다, 말하자

  너와 내 관계가 슴슴해졌다.


  음식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슴슴이 뭔지도 몰랐던 주변의 사물들이 돌연 슴슴함 속으로 잠겨들었다. 슴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라디오와 책이, 의자와 액자가 슴슴함 쪽으로 다가와서 쪼그라들었다.세상은 이제 슴슴함과 그렇지 않은 것의 이분법으로 정해졌다는 듯이.


  지금까지는 슴슴하지 않은 것들이 대세였으나

  내가 섣불리 슴슴하다 내뱉는 바람에

  다들 슴슴함을 뒤집어쓰게 생겼다.


  나는 곧 슴슴하지 않다고 말해야지 결심했는데, 어쩔끄나, 말릴 새도 없이 슴슴함이 순식간에 내 몸을 장악했다. 생강을 달여 마시면 달아날까, 이 슴슴함. 속으로 대증요법을 떠올리며 난감해하던 차, 남쪽에선 사라지고 북쪽에서만 살아남은 말, 사전이 내 귀에 속삭인다.


  소름이 온몸을 좌악 훑더니

  슴슴함이 홀라당 빠져나간다.

  슴슴함도 불온만큼은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정우영, 순한 먼지들의 책방. 창비. 2024년. 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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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고양이를 키웁니다 - 체코 대표작가의 반려동물 에세이
카렐 차페크.요세프 차페크 지음, 신소희 옮김 / 유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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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살맞다. 재미있다. 웃으면서 읽고, 맞다, 맞다 맞장구를 치고,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구나 하기도 한다.


차페크 글이다. [정원가의 열두 달]을 무척 재미 있게 읽어서 이번엔 반려동물 이야기야? 하면서 읽게 된 책.


개와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들과 함께한 이야기를 능청스럽게 펼쳐보이고 있다. 가끔은 개나 고양이가 말하듯이 표현하기도 하고...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는 내용도 있지만, 차페크가 살았던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하자. 지금 생명을 대하는 잣대로 과거를 재단할 수는 없으니. 다만 현재에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해야함은 명심하고.


키우던 개가 강아지를 낳았을 때 차페크가 한 행동은 지금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다. 물론 그가 직접 실행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게했지만 그렇다고 정당화될 수는 없다. 강아지들을 죽이게 한 것.


지금이야 중성화 수술이다 뭐다 해서 개체수를 어느 정도 조절을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시도를 할 수 없었으니, 태어나는 많은 생명들을 어떻게 했는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 개에 관한 이야기에서 차페크 역시 많은 강아지들로 인해 자신이 한 행위를 서술하지만, 그런 행위가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는 개를 반려동물로 여기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애견이라고 하기보다는 함께사는 생명체로 인식하고 있음은 뒷부분에 나오는 고양이 이야기로 알 수 있다. 그러니 그가 행한 잘못은 잘못으로 인식하고 그가 반려동물과 어떻게 지냈는지를 중심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개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차페크가 만든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왜 개 꼬리가 짧아졌는지, 왜 개가 땅을 파는지, 어째서 풀밭을 세 바퀴 도는지, 개의 품종에 따른 몸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지어내 개에게 들려준다. 그것을 우리가 듣고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고양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많은 고양이 새끼들을 죽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과 함께하던 고양이가 죽어가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그리고 고양이 새끼들을 분양하기 위해 모임에 참여할까도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모습이 분명 진지했을 텐데, 읽는 내내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렇게 반려동물들과 함께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개와 고양이 이야기를 하다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에게 돌아온다. 인간의 이야기를 한다. 차페크가 살았던 시대는 인간 불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때였으니... 다행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차페크는 2차대전 전에 세상을 떠서 학살을 면했지만 형인 요제프는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하니...


그는 개와 고양이에 관한 글을 쓰다가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을 한다.


'야생동물이란 믿음을 모르는 짐승이며, 길들여짐이란 그저 서로를 믿는 상태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결국 우리 인간도 서로를 믿는 만큼만 야생동물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206쪽) ... 신뢰가 없는 상태는 야만의 제1단계이며, 불신은 정글의 법칙이다. 불신을 부추기는 정치는 야만의 정치다. 사람을 믿지 않는 고양이는 사람을 인간이 아니라 야생동물로 본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믿지 않는 인간 또한 상대를 야생동물로 보는 것이다. 상호 신뢰는 인류 문명보다 오래된 체제이며 그로 인해 인류는 인류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신뢰 상태를 깨뜨린다면 인류가 만든 세상은 야생동물의 세계가 되고 말리라. (207쪽)


익살스러운 표현을 하지만 그것은 바로 반려동물과 지내는 생활에 믿음이 있었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것이 동물과 동물,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도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는 차페크의 마음이 이렇게 글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세계는 과연 차페크가 말하는 믿음이 있는 세계일까? 반려동물들의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인간끼리는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재미있게 낄낄거리면서 읽다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 생명과 함께 사는 일은 다른 생명들과의 관계도 살피게 만든다는 것을 다시금 깨우쳐준 차페크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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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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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예측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제목에서 보면 하나만을 강요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과일은 오렌지말고도 여러가지가 있으니까.


소설의 각 장들은 성경에서 따왔는데, 창세기부터 룻기로 끝난다. 시작에서 방랑으로 끝난다고 봐야 하는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입양된 아이가 그 신앙으로 키워진다. 그런데 어디 부모의 뜻대로 성장하겠는가. 아이는 학교에서도 계속 성경과 관련된 이야기만 해 교사들의 걱정을 받지만, 엄마는 막무가내다. 그것을 오히려 더 바람직해 한다.


성경대로 살아가는 아이를 바라는 부모. 그런데 아이는 성장하면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동성애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엄마에게는 재앙이다. 사탄이 아이의 몸으로 들어간 것처럼 여긴다. 목사 역시 마찬가지고.


이것을 견디지 못한 아이는 집을 나오지만, 그렇다고 부모와 연결된 끈이 아주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는 부모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작가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인데... 여기서 과연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부모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종교가 사람을 획일적으로 만든다면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종교가 아니라 그 종교를 전파하는 사람들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 그들의 말이 과연 성경과 또는 신과 합치하는가. 그들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면 이단이라고, 사탄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종교인가?


하나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견뎌낼 수가 없다. 그것은 광신도들을 양산할 뿐이다. 그러한 광신도들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름은 곧 잘못이고, 잘못은 신과 반대되는 사탄의 행위일 뿐이다. 그것은 배제되어야 한다.


그런 주장이 소설 속에서 이런 대사로 나타난다.


"오렌지야말로 유일한 과일이지."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56쪽)


그 많은 과일 중에 오렌지만이 과일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을,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신만이 유일하다는 주장. 그 신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는 것. 그러니 여기서 다른 행위를 하는 또는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은 자신들의 신념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떠나야 한다.


하지만 나중에 어머니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앞의 말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는 철학적으로 말했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니까." (285쪽)


이 말에 다른 과일을 모두 인정한다는 마음이 들어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오렌지에서 다른 과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냥 자신들이 과일이라고 하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 다름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바뀐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획일성을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아이의 이야기다. 자신의 특성을 알게되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아이의 모습.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종교는, 부모는 어찌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남들도 그대로 따르게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나와 우리와 다른 생각, 다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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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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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하라고 한다. 낯선 곳으로 가서 낯익은 자신과 결별하는 경험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늘 가던 장소만 가지 말고 다른 장소에 가보는 일. 자신을 고정된 삶에서 변화 있는 삶으로 바꿔가는 일. 습관적으로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기 전에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이다. 여행은 그러한 경험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솔닛의 이 책은 여행에 관한 책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행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솔닛이 가보았던 낯선 장소에서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그런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 잃기 안내서]는 '길 찾기 안내서'다. 우리는 길을 잃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가고 있던 길을 다르게 본다. 그때서야 의식한다. 의식을 하면 되돌아보게 되고, 앞을 살피고 좌우를 살피게 된다. 또한 빠르게에서 느리게로 바뀌게 된다. 살펴야 하니까.


길을 잃는 일은 길을 찾는 일의 시작이다. 그러니 길을 잃지 않으면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여기서 잃는다는 것의 의미를 솔닛의 말을 빌려 정의하고자 한다.


'잃는다는 것에는 사실 전혀 다른 두 의미가 있다. 사물을 잃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차츰 사라지는 일이지만,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 길을 잃을 때는 다르다. 그때는 세상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 커진 셈이다.' (42쪽)


자, 여기서 잃는다는 것은 상실이 아니다. 찾음이다. 그것도 이전에 있는 것에 무언가를 더 보태는 일. 그것이 바로 '길을 잃는다'가 지니는 의미다.


인생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실수와 실패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인생에서 실수와 실패가 없을 수 있는가? 우리는 누구나 실수와 실패를 한다. 그런데 그때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서 다음 인생이 달라진다.


길을 잃었다고 주저앉으면 더 나아갈 수가 없다. 그곳이 자신의 마지막 장소가 된다. 하지만 길을 잃었기에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면 그곳은 마지막 장소가 아니라 시작하는 장소가 된다. 새로운 시작, 그것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실수와 실패가 마지막 장소가 되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면 누구나 실수나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남들이 이미 닦아놓은 길로 가려고 한다. 그냥 그렇게...


여기에서 솔닛의 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실수를 두려워하는 태도는 그 자체 크나큰 실수일 수 있다.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실수일 수 있다. 삶은 늘 위험한 법이니,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삶은 이미 무언가를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154쪽)


이런 점에서 솔닛의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길을 잃으라고, 실수를 해보아야 한다고, 실패도 겪어보아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실수와 실패가 용인이 되고 또다른 시도를 할 수 있는 사회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하여 솔닛의 이런 주장은 개인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사회를 변화시키야 한다고, 그런 일들은 이미 길을 잃어본 사람들이 먼저 해야 한다는 주장이 된다. 이런 주장을 솔닛은 글쓰기를 통해서 하고 있다.


'글쓰기는 즉각적인 대답이나 상응하는 대답이 영원히 묵묵부답일 수도 있는 대화, 아니면 긴 시간이 흘러서 글쓴이가 사라진 뒤에야 진행될 수도 있는 대화를 먼저 시작하는 일이다.' (186쪽)


이렇게 먼저 대화를 시작한 솔닛. 우리는 그 대화를 이어받아 계속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가 길을 잃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래서 길 잃기가 여행이 되도록 해야 한다. 길 잃기가 나를 주저앉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무언가를 더 보태어서 돌아오게 하는 여행. 그것이 바로 솔닛이 말한 길 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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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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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고생이 두부 손상으로 죽었다. 범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소설은 이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세 명의 서술자가 등장한다. 죽은 여고생의 동생인 다언, 다언과 같은 동아리 소속이자 죽은 여고생과 같은 반이었던 상희, 그리고 역시 같은 반이었던 태림.


서술자는' 다언-상희-다언-태림-다언-태림-상희-다언' 순으로 나온다. 사건의 전모는 태림이 서술자로 나와 상담사에게 전하는 말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상희가 서술자로 나오는 부분에서 다언의 모습은 달라져 있는데, 한번은 아직도 상처에서 허덕이고 있는 모습이고, 한번은 어떤 식이든 상처에서 나온 모습이다. 그러니, 상희의 서술을 통해서 다언이 자기 나름대로의 해법을 실행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다언이 서술자로 나오는 부분은? 언니의 죽음을 충격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수렁 속에서 헤매던 다언이 서서히 복수를 다짐한다. 언제까지 그냥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그때 다언은 계란 노른자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노란 천사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레몬,이라고 나는 의미 없이 중얼거렸다. 복수의 주문처럼 레몬, 레몬, 레몬이라고.' (97쪽)


언니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옷은 노란색, 계란 노른자도 노란색, 그리고 레몬 역시 노란색. 노란색이라는 것이 서로를 연상시키고 있다. 언니가 입었던 노란색 옷은 죽음의 옷이고, 잊고 싶은 색깔이었다면, 달걀 노른자의 노란색은 그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이젠 행동해야 할 때라는 것을, 자신을 추스리고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리는 색깔이라면 레몬의 노란색은 무엇인가. 


레몬의 신맛, 인생의 신맛. 이런 것을 생각하게 하는가. 자, 나는 이제껏 인생의 힘듦을 겪었다. 이젠 너희 차례다.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아니면 신맛으로 인해 긴장을 잃지 않고 자신을 행동으로 이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하여간 레몬이 주문처럼 등장하고...


이제 서술자들의 서술을 통해서 또다른 사건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다언의 복수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여기에 매개가 되는 인물이 한만우라는 인물이다. 한만우라는 이름 때문에 붙은 별명이 소설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민요의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안만우우'(11쪽)이라고 부른다는 서술이 그렇다.


평온한 세상이 아니라 한 많은 세상인데, 그런 세상살이를 하는 인물이 바로 한만우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해서. 그것이 바로 인생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여 다언은 이런 생각을 한다.


'혹시라도 살아 있다는 것, 희열과 공포가 교차하고 평온과 위험이 뒤섞이는 생명 속에 있다는 것, 그것 자체가 의미일 수는 없을까.'(198쪽)

'찰나에 불과한 그 순간순간들이 삶의 의미일 수는 없을까'(199쪽)


결국 세상은 평온하지 않지만, 그것이 바로 인생이고 삶의 의미라는 생각. 자신에게 닥친 일을 직접 대면하겠다는 의지이지 않나 싶다.


명확하게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지는 않고, 또다른 사건도 묻힌 듯이 보이지만 두 사건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 읽으면서 그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작가가 서술하고 있는데...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들 역시 우리 삶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좋은 면을 보여주지 않고 뜻하지 않게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들이닥친 문제들이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다언의 서술에 나타난 한만우 가족의 삶을 통해서 다시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소설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이 순간이 바로 삶의 의미일 수도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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