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이 과거를 살피는 학문이라면 고현학은 현재를 보여주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학문이라고 하지 않아도 좋다. 이 용어를 만든 사람은 일본 사람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문학비평을 하면서, 김윤식 교수가 박태원의 작품을 설명할 때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박태원이 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라든가 [천변풍경]은 그야말로 일제시대 조선의 모습을 잘 드러낸 소설이고, 이 소설들이 바로 현실을 재현해내고 있기 때문에 고현학이라는 이름으로 비평을 했다.


  일본인이 사용한 용어보다는 김윤식 교수가 사용한 용어로 내게 친숙해진 단어인데, 시집에 고현학이라는 말이 나왔다. 반갑기도 하다.


  시인은 현실과 동떨어진, 언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시인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현실을 자신만의 언어로 구현해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시인은 고현학자라고 해도 좋겠다.


그렇다고 시가 그 당대에만 의미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시의 고현학은 시대를 아울러 존재한다. 즉 시는 시를 읽는 현재에서 그 시대를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그것이 시의 고현학이 아닌가 하는데...


이민호 시집을 읽으면서 고현학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우리나라 현실이 어느 정도는 형상화되어 있겠지 했다. 당연히 시에서 현실을 찾으려면 충분히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


이 시집에서는 이 시를 읽고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 우리 사회, 어쩌면 시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다. '외발로 서 있는 詩(시)'라는 시다.


외발이라는 말에서 소외되었다는 의미를 발견하는데, 이 시대의 시는 이렇게 외발로 서 있지 않을까, 외발로 서서 사람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한다. 단지 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삶들이 이렇게 외발로 서 있는 시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


이 시를 읽으면 장면을 그려낼 수 있다. 그 장면 속에서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무언가를 알려주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외발로 서 있는 詩


해저물녘 연립주택 공사판 여기 저기

삽들이 나뒹굴고 있다

파산했으리라

몇 놈은 드러누워 무딘 삽날을 뒤척이며 불꽃을 일으키고

또 몇 놈은 엎어져 맨 땅에 이마를 뭉개고

신음도 없이 피 흘리지 않으며

모두들 내팽개쳐져 있다

그런 나날 속에서


손목 부러진 삽자루를 가만히 일으켜

흙무덤에 꽂아 주었다


이민호, 피의 고현학, 애지. 2011년.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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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다정하진 않지만 - 카렐 차페크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영국 여행기 흄세 에세이 5
카렐 차페크 지음, 박아람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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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를 왜 읽을까?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다른 사람이 가본 다음에 그곳에 대해 알려주기 때문일까? 단지 가보지 못한 곳을 알려준다는 이유로 여행기를 읽기도 하겠지만, 여행기를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려고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처럼 여행기는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한다.


거울에 나를 비추면 내가 보인다. 그런데 그 내가 진짜 나일까? 내 모습을 대칭되게 보여주는 것이 거울 아니던가. 그렇다면 여행기는 나를 살펴보게 하되, 다른 모습의 나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차페크가 영국 여행을 하면서 썼던 글이라고 하는데, 단지 영국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역할만 하지는 않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차페크는 영국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다른 무엇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여행기의 목적이기도 하겠다.


차페크 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유머가 이 책에도 어김없이 담겨 있다. 또한 풍자와 해학도 넘쳐나고. 여행기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한데, 무엇보다도 지금의 영국과는 엄청나게 다른 과거의 영국, 무려 100년 전의 영국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우리가 맞아, 영국은 그래, 하는 것들을 만나볼 수 있어서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압도적인 느낌에 휩싸이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발견할 때, 그리고 아주 익숙한 무언가를 발견할 때죠.' (10쪽)


이것이 바로 여행기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고, 여행기에 이런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무엇인가가 없다면 그다지 흥미롭지 않을 것이다.


제목을 '대놓고 다정하지 않지만'이라고 붙인 이유는 영국인들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는 차페크의 내용에서 따왔다고 할 수 있다. 기차 여행 내내 아무 말도 없이, 눈길 한번 주지 않고 함께 가는데, 내릴 때 키가 작아 짐칸에서 짐을 내리는데 어려움을 겪으면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 짐을 그냥 내려주는 영국 사람들 이야기... 대놓고 다정하지는 않지만 그들에겐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을 차페크는 그러한 예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단순하게 영국 여행기라고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영국인들의 특성을 드러내는 제목을 붙인 것은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다정한 표현을 하지 않는 영국 사람들의 모습과 더불어 거리의 모습을 '런던의 거리는 그저 삶이라는 물줄기가 집에 닿기 위해 거쳐가는 홈통 같은 곳입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삶을 살지 않거든요. 무언가를 보거나 얘기하거나 서 있거나 앉아 있지 않아요.'(22쪽)라고 비판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대놓고 다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서로 무언가를 만들어가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반대로 광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연히 들르게 된 하이드 파크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여러 활동들을 한다. 즉, 우연한 장소에서는 서로 관계를 맺지 않지만 광장에서는 활발한 관계들이 맺어지고 있는 것이다. 광장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다고 해야 하나...


이 두 장면을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역시 길거리에서 무언가를 할 수 없다. 그러나 광장에서는 무언가가 일어난다. 이 광장에서 차페크가 본 영국의 하이드 파크에서 일어난 일처럼 수시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또 다른 활동을 하는 많은 집단들이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광장을 잘 활용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 아닌가 하고...


차페크가 런던의 거리를 보면서 천편일률적인 집들에 놀라는 장면(13쪽)이 있는데, 아마도 그가 서울에 오면 사각에 하늘 높이 뻗은 형태의 건물들만 즐비한 모습에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물론 빌딩 숲 사이로 고궁들과 한옥이 남아 있는 서울의 모습을 보고 다른 표현을 하기도 하겠지만.


그는 근대 예술과 과거의 활동들을 보면서 예술에서 '발전이라는 건 없습니다. '전진'과 '퇴보'가 아니라 끝없이 새로운 창작이 이어질 뿐이죠. 역사와 다양한 문화, 수집품, 세계 각지의 보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것뿐입니다.'(47쪽)라고 하면서 예술에서 등급을 매기거나 발전, 전진, 퇴보라는 평가를 하는 것이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 예술에서 어찌 우월을 따질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생각에 공감한다.


이처럼 차페크는 영국 여행을 하면서 영국의 특성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니 이 여행기가 거울의 역할을 하고, 앞에서 인용했듯이 다름과 비슷함을 통해서 충격을 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영국인들은 어디서나 영국인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자신들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영국인들을 비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영국은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세계라고 생각하는지 차페크가 우려했던 것들을 '브렉시트'를 통해 유럽연합에서 탈퇴하면서 다시금 반복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가 길지 않은 영국 여행임에도 영국의 특성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러한 영국의 모습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조국인 체코에서 반복하지 않게 하자는 마음을 담아 이 여행기를 썼다고 할 수 있다. 


차페크 글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유머를 보자. 영국 음식은 맛없기로 유명한데, 우리나라 출신으로 영국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장하준 역시 그 점은 언급하고 있으니... 그런데 그 맛없음을 차페크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음식이 그들의 성향과 이렇게 연결이 될 수 있다니... 그의 표현으로 이 글을 맺는다.


'훌륭한 영국 요리는 한마디로 프랑스 요리입니다. 보통의 영국인을 위한 보통 호텔의 보통 요리를 맛보면 영국의 우울함과 과묵함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죠. 압축한 소고기에 맛없는 머스터드를 발라 씹어 먹으면서 어느 누가 환하게 웃고 떠들 수 있겠어요? 이에 붙은 타피오카 푸딩을 떼어내면서 어느 누가 큰 소리로 기뻐할 수 있을까요? 분홍빛 덱스트린에 담근 연어를 먹다 보면 누구든 지독하게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죠. 살아 있을 때는 물고기였다가 식용이라는 우울한 상태가 되면 '신발 밑창 튀김'으로 돌변하는 것을 아침과 점심, 저녁으로 먹고, 가죽을 우린 듯 시커먼 홍차로 하루 세 번 위를 그슬리고, 칙칙한 데다 미지근하기까지 한 맥주를 마시고, 특색 없는 만능 소스와 절인 채소, 커스터드와 양고기를 먹으며 살아왔다면 보통의 영국인에게 주어진 육체적 쾌락은 다 누린 셈이니 이제는 과묵함과 진지함, 엄격한 도덕성을 포용하기 시작합니다.'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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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3-06 1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페크 님이 남긴 글이 새로 나왔으면 찾아봐야겠습니다

kinye91 2025-03-06 14:14   좋아요 0 | URL
저도 차페크 작품들을 찾아 읽고 있어요.
 
모든 순간의 물리학 -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물리학의 대답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현주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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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을 읽었다. 과학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가 우주에 관해 서술하는 방식이 (그것이 비록 번역을 통해서였지만) 너무도 아름답다고 느꼈을 뿐이다. 이렇게 쉽고 읽기 편하게 과학 내용을 설명할 수가 있을까. 어려운 수식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 과학책이라니... 


물론 로벨리는 과학전문가를 위한 책이 아니라고 과학에 무지한 사람도 읽을 수 있게 하는 책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과학 교육을 충실히 받은 사람이라면 과학에 대해서는 수학과 마찬가지로 어렵다는 관념을 먼저 깔게 된다. 시험을 위한 과학, 시험을 위한 수학. 말로는 삶을 위한 과학, 수학이라고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던가.


그래서 이 책 역시 제목을 보는 순간 읽기를 포기할 가능성이 많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이라니... 과학하면 손사래를 치는 사람이 많은데 모든 순간이 물리학이라니, 이런 무슨 터무니 없는 말을.


하지만 우리가 과학없이는 살 수 없다. 비록 과학이론을 몰라도 우리 삶에 과학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럴 때 과학에 흥미를 불어넣어주는 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은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와, 과학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한번 공부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책.


'이 책에 소개된 강의들은 현대 과학에 대해 아예 모르거나 아는 게 별로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9쪽)라고 시작하며에서 로벨리는 말하고 있다. 


그가 소개하는 내용은 과학의 여러 공식들, 수식들이 아니다. 어떻게 과학이 우리 삶에 들어왔고, 우리가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처음 시작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시작하지만, 상대성이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줄 뿐이다.


상대성이론이 나타나기 전까지 인간이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을 간단히 살펴본다. 그러면서 그것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상대성이론이 우주를 어떻게 바라보게 했는지를 알려준다. 이런 과정에서 전문적인 지식은 필요 없다고... '아인슈타인의 예측에서든 리만의 이론에서든 그 속에 감춰진 아름다움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만 인정할 줄 알면 됩니다'(29쪽)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전문적인 지식은 과학자에게 맡겨도 된다. 다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학과 떨어져 있지 않음을, 과학은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해 준다는 점을 명심하면 된다. 그러면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과학이 하는 역할이 그것이다. 좁은 시야를 넓혀주며 하나의 시각만을 고집하지 않도록 하는 것.


이런 면을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의 관계를 통해 잘 보여준다. 서로 다른 이론을 주장하지만 상대의 주장을 경청하면서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던 두 과학자. 양자역학에 관한 장에서 이들을 등장시킨다. 뭐, 양자역학이야 워낙 어렵다고 하니 말할 것이 없겠지만, 한가지 불확정성이라는 말은 기억이 난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 수많은 계기들이 어떤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나,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어떻게 될지 모르고 있는 상태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다.


이렇게 과학이론을 설명하는데, 편하게 읽게 만든다. 그냥, 과학이 아름답구나 하는 느낌을 받도록 한다. 그러면서 이 책의 마지막을 인간으로 맺는다. 바로 과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전문적인 과학지식을 추구하는 것도, 그토록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도 바로 우리 인간의 존재를 밝히기 위해서 아니겠는가. 우주를 탐험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에게로 돌아오기 위해서니까.


로벨리가 말하고 있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호기심은 자연에 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을 향한 것이지요.'(133쪽)라는 말. 그러면서 그는 지금 우리 시대를 걱정하기도 한다. 


'아마 지구상에서 개인의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종은 우리 인간뿐일 것입니다. 나는 조만간 우리가 만든 문명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 역시 진정으로 멸종에 이르는 모습을 의식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종이 될까 봐 두렵습니다.'(134-135쪽)


과학을 하는 이유도, 우리가 과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자연에 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와 한계를 알아야 하니까. 그가 과학지식을 우리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며 그러한 다양성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우리들의 삶을 이룬다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음을, 그래서 다 안다는 착각을 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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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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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의 마지막 글이라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책으로 엮어 나온 글들이다.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 나치의 광기를 피해 라틴아메리카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그러나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츠바이크다.


참으로 어두운 시대, 그 어두운 시대에서도 빛을 발견하려고 했던 사람이니 그의 글을 읽으면 어떤 위로를 받는다. 지금 시대에 그의 글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이 시대 역시 어두운 시대임을 반증하겠지만.


나치의 광기가 그가 살았던 시대를 어둡게 만들었다면 지금 우리 시대를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대두하는 신나치들... 이와는 다르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이 우리들 생활을 잠식해서 자본으로 인한 무역전쟁과 국가간의 전쟁까지 일으키려 하는 모습, 그리고 여전한 종교 갈등. 당시에는 유대인이 약자였다면 지금은 유대인이 강자가 된 세상. 강자와 약자의 처지는 바뀌었지만 어두운 시대는 사라지지 않았으니...


처음에 실린 글은 자본주의 시대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글이다. 물론 이 글은 대놓고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가? 자신의 필요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안톤이라는 사람을 통해 츠바이크는 이런 세상을 꿈꾼다.


'모든 사람이 이런 상호 신뢰의 비결을 배운다면, 경찰도 법원도 교도소도 돈도 필요 없을 거라고. 필요한 만큼만 대가를 받고 능력이 닿는 한 힘껏 돕는 이 청년처럼 모두가 산다면, 부조리가 반복되어 '사회문제'가 되는 우리의 복잡한 경제 시스템도 어쩌면 해결될지 모른다.' (22쪽)


처음에 만나는 글부터 따스하게 다가온다. 어둠보다는 밝음이 먼저 우리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다 다음 글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필요한 건 오직 용기뿐!'이라는 글이다.


용기, 이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고, 사회를 바꿀 수도 있다.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는 용기, 잘못을 잘못이라고, 잘못이 아님을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다. 나중에가 아니라 바로 그때에.


그런 용기가 한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를 바꿀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 어두운 시절에'라는 글이다. 어두운 시절이 그때만이 아니고 지금도 어두운데, 여기서 우리는 별을 찾아야 한다. 그 별을 찾아 보여주고, 별과 같은 삶,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용기이기도 하다.


'영원한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려면, 먼저 어두워져야 합니다. 몸과 숨을 분리할 수 없듯이 영혼과 자유를 분리할 수 없음을 인식하기 위해 먼저 어둠의 시간이, 아마도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간이 우리에게 닥쳐야 했습니다.' (116쪽)


어둡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빛나는 별을 보고 자신의 삶을 그쪽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는 말. 명심해야 한다.


짧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어느 글 하나 버릴 것이 없다. 특히 마지막 글은 작가가 작품을 통하여 미래를 선취하고 있음을, 그래서 작품을 읽으면서 그런 미래를 방지하려는 노력을 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가 언급한 빈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가 쓴 [묵시록의 네 기사]를 읽지는 않았지만, 츠바이크의 설명에 의하면 그 소설에 등장한 하르트로트라는 인물이 히틀러의 전신임을 보여주면서 '작가가 정치학 교수보다 당대와 미래를 더 잘 이해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보여주었다'(130쪽)고 하고 있으니,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현실의 세상을 바꿔갈 수 있음을 생각한다.


이처럼 이 책은 어두운 시대 빛을 보여주는 츠바이크의 글들을 모아놓아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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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키스슈타인
지넷 윈터슨 지음, 아밀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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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괴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그 괴물이라 불리는 존재를 창조한 사람 이름임에도. 마찬가지로 그 소설을 쓴 사람이 메리 셸리라는 사실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작품을 알아도 작가를 모르는 경우도 많으므로.


이 소설은 신의 능력에 도전하는 인간과 그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해서, 또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등등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과연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모든 것을 다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하지만 인류는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하지 않았던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가 하지 않았던가. 그것에 따른 책임은 별개로 하고 말이다.


이렇게 소설은 먼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경우 일어나는 일들, 책임지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들이 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고 일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은 어떻게 추진되고 있을까? 그것은 인공지능-로봇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지금 엄청나게 발전된 기술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있지 않은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장밋빛 미래를 상상할 뿐이다.


[프랭키스슈타인]은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 소설이다.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시체를 가지고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려 했다면 이 소설에서는 현대 과학이 이미 실행 중인 냉동인간을 이용해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려 한다.


즉 뇌를 스캔해, 그 뇌를 이식한다는 발상이다. 인간의 뇌를 이식할 수 있다면, 그 뇌를 이용해 다른 몸을 사용하는 것은 더 간단한 문제라고 할 수 있으니...


그렇다면 인간의 뇌를 이식한다면 그간 몸을 이용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사람은 존재하게 될까? 그는 더이상 인간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뇌로만 남은 인간이 과연 인간일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는 계속 될 것인데...


그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그러한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의 발전을 이룰까? 아니면 특정한 집단의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지 않을까? 이에 대한 답을 작가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다만 이 소설은 그러한 질문을 넘어서 재미있다. 이미 [프랑켄슈타인]을 읽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여기에 [메리와 메리]를 읽은 사람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소설에서는 메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는 과정이 나오고, 그 과정에서 어울리는 사람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메리, 메리의 남편인 셸리, 바이런, 클레어, 그리고 의사인 폴리도리)


여기에 현재로 돌아오면 그들의 환생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나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생명체를 탄생하는 과정과 중첩이 되게 소설이 진행된다. 물론 처음에는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로봇을 보여주지만 이것은 시작점에 불과하다. 남성의 욕망만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 즉 불멸하고자 하는 욕망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식된 뇌는 어떤 몸이든 옮겨갈 수가 있으므로 불멸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


아직은 진행형이지만 냉동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현실에서 이미 실행되고 있는 일이기도 한데, 이러한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인간의 행위를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인물과 병치되는 이 소설 속 인물은 메리라고 할 수 있는 라이, 셸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메리가 사랑했던 사람이 셸리니, 이 소설에서 라이가 사랑하는 사람인 빅터를 셸리로 치자. 그리고 빅터는 메리가 쓴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박사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지칭하기도 한다.


둘 다 메리의 사랑이라고 보면 되지만 빅터는 [프랑켄슈타인]의 빅터와 같다고 보는 편이 더 좋겠다. 메리의 사랑을 받는 셸리의 특성을 지닌 빅터라고 하자. 그는 소설 속 인물과 같이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바이런이라 할 수 있는 론. 그가 섹스봇 판매자로 나오는 이유는 명확하다. 과거 바이런 역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고 하니... 클레어는 바이런의 정부이자 메리의 이복동생인데, 역시 론과 함께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폴리도리는 좀 다르게 나오지만 이름이 비슷한 폴리 D로 나오니,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을 중첩해서 읽는 재미도 좋은 소설이다.


결국 빅터는 성공했을까? 그 성공의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이 과연 인류를 위한 사랑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하지만 우선 재미있게 읽자. 읽으면서 마음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보자.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이 소설에 나온 세상보다 더 많은 변화가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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