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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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많은 사람 중에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지정해준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고려할 수 없고 그냥 구해야만 한다면? 그 사람을 구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면? 그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우선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또 한 사람이라도 구했다는 안도감, 아니면 내가 구할 사람을 선택하지 못했다는 무력감. 어떤 마음이 들까?


이래도 저래도 마음은 확실히 편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살린 사람보다는 살리지 못한 사람이 많고, 살린 사람들이 모두 괜찮은(?)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단적으로 소설에서는 폭력범을 살리기도 하고, 사기꾼을 살리기도 한다. 정작 자신이 살리고 싶은 사람은 살릴 수 없으면서도.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누군가, 그것도 단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일까, 재앙일까? 여기에 대한 세 사람의 반응이 나온다. 아니 어쩌면 네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나중에 목화의 조카인 루나 역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참여하게 되니까.


임천자의 단 한 명은 기적.

장미수의 단 한 명은 겨우.

신목화의 단 한 명은, 단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다. (233쪽)


소설은 오 남매로부터 시작한다. 아니, 나무로부터 시작한다. 나무, 하늘과 땅을 잇는, 또는 하늘과 인간을 잇는 신목(神木)으로 일컬어지지 않았던가. 두 나무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서로 다르게 자란 두 나무는 뿌리를 연결해 결국 한 나무가 된다. 사람들이 베어버렸을지라도. 


이 이야기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준다. 나무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 단 한 사람만을. 그것을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할머니 임천자. 겨우 단 한 명을 살린다는 것에 좌절하는 엄마 장미수, 그리고 왜 자신이 사람을 살리는지 이유를 알려고 하는 신목화. 나중에 신목화는 단 한 사람이지만 그것은 전부인 한 사람임을 깨닫는다.


어떤 사람이건 생명은 소중한 것. 그는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인 것. 그러므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어떤 가치를 동반할 필요는 없다. 생명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똑같기 때문이다. 이 점을 알려주기 위해 작가는 이 가족의 셋째인 금화의 죽음을(? 명확하게 죽었다고는 나오지 않지만, 나중에 목화와 목수가 나무를 만들어 바다로 보내려는 것은, 금화의 죽음을 인정하고, 금화를 보내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설정한다.


자기 목숨을 대신 가져가라고 할 정도로 소중했던 사람을 살리지 못하지만, 단 한 사람, 바로 세상의 전부인 그 사람을 살리는 일을 인정하게 되는 목화. 그렇다. 우리가 누구를 살릴지 결정할 수 있다면 과연 그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 될까?


아닐 것이다. 선택할 수 없기에 누구의 생명이든 소중하다는 것,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생명임을 명심해야 한다. 삼대에 걸쳐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조카인 루나까지 하면 4대에 걸쳐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 


이들 4대에 걸친 사람들만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소설은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 있을 수도 있음을,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인식하게 한다. 바로 내가 그들이 살려낸 단 한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소설 속에 수많은 죽음이 나온다. 전혀 예기치 못한 죽음부터 예상하고 받아들이는 죽음까지 다양한 죽음들. 그러나 죽음은 삶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두 나무의 뿌리가 하나로 엮이듯이 하나일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삶과 죽음에서 단 한 사람을 삶의 길로 가게 만드는 것이 비극일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삶의 길은 자신이 걸어가야 한다. 삶의 길을 자신이 찾아야 한다. 자신이 찾을 수 있도록 다시 기회를 주는 일. 그것은 단 한 사람에게도 벅찬 일이다.


그 벅찬 일을 하는 사람. 그래서 더욱 괴로워하는 사람. 더 많은 생명을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 살리는 사람을 선택할 수 없다는 무력감. 하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더한 죄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다. 자신의 감정때문에 다른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따라서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일에도 무작위가 작동해야 한다. 구하고 그것으로 끝내야 한다. 삶의 길을 보여준 것으로... 그 길을 가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다. 거기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자.


세상은 온갖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으니까. 물론 좋은 사람만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그런가. 삶과 죽음이 공존하듯이 옳음과 그름도 공존하고, 선과 악도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다. 다만, 우리는 삶에 더 중점을 두듯이 옳음과 선 쪽에 더 강조점을 두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할 뿐이다.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다는 가정.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삶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혹시 아는가? 우리 역시 어느 순간 죽음에 직면했음에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남았을지. 우리가 그 단 한 사람일지. 그렇다면 삶의 길에 들어선 우리는 내 삶의 길에서 죽음의 길로 들어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내 삶은 나만의 삶이 아니다. 단 한 사람을 살렸지만, 그 단 한 사람의 생명에는 수많은 죽음이 함께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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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니, 이게 무슨 말? 내 얼굴이 내 몸과 떨어질 수가 있나? 나는 들어왔는데, 내 얼굴은 도착하지 않았다니... 그렇다면 얼굴이 지닌 뜻이 뭐지?


  얼굴, 그냥 생각하자. 우리는 얼굴이 자신을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얼굴은 내면을 드러내는 통로라고도 하고. 그렇다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본질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말이란 말인가.


  잘 모르겠다. 제목이 된 구절은 '붉은 달(24-26쪽)'이라는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집에 들어왔는데, '내 얼굴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26쪽)이라고 문득 깨달았다고 한다.


  여기에 '마트료시카(120쪽)'라는 시를 보면 '어제의 얼굴을 다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내가 밖에 나갔을 때는 얼굴이 함께 들어오지 않았고, 내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내 얼굴을 다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하는데...


얼굴이 나를 알려준다고 하면 나는 어떤 얼굴을 지녀야 할까? 이 구절을 읽으면서 문득 최인훈이 쓴 [가면고]가 생각났다. 가장 완벽한 얼굴을 찾아 다니는 다문고 왕자의 이야기. 그는 완벽한 얼굴을 찾았지만, 시인은 아직 완벽한 얼굴을 찾지 못했다. 그것은 이 사회가 이미 완전한 자신을 발견하기 힘들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을 찾기도 전에 생활에 치여 살아가고 있는지도... 그러니 나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여러 얼굴을 지니고 있고, 한 얼굴 속에 또 다른 얼굴이, 그 얼굴 속에 또 얼굴이, 얼굴이 계속 들어있는, 내 얼굴이지만, 내 얼굴이 아니기도 한. 내가 지니고 있는 얼굴이지만 새롭고, 또 놓고, 감추고 있는 얼굴일 수도 있는.


하여 나는 나를 찾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나'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은 그러한 '나'를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나의 얼굴만이 아니라 남의 얼굴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남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남의 얼굴을 통해서 나의 얼굴을 보기도 하니까.


  우리 사회에 다른 인물들인데 마트료시카와 같이 열어도 열어도 같은 얼굴이 나오는 인물들이 있다. 어쩜 이리도 비슷한지. 이들을 열지 않고 그냥 닫아두고 싶은데, 그런 같은 얼굴을 무슨 자랑이라고 계속 내미는 인간들이 있으니... 시와는 별 관계가 없지만 '마트료시카'라는 제목을 보고서 그런 인물들, 선한 마음, 인물들의 연속이 아니라, 안 보여야, 안 나와야 하는 인물들의 연속에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으니...


  남 얼굴 타령은 그만하고, 내 얼굴을 잘 찾아야지. 아니 지금껏 내가 지니고 있던 얼굴들을 부정하지 않고 그 얼굴들을 받아들이면서 조금은 다른 내 얼굴을 만들어가야지.


이 시집에는 '마트료시카'라는 제목을 가진 시가 두 편 있다. 똑같은 제목이지만 내용은 좀 다르다. 그렇지만 본질 찾기는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마트료시카


나는 몇 개의 거울을 들고서 달렸다 // 똑같은 것들이 슬퍼 보였다 // 죽은 지 오래된 얼굴들은 더 안쪽 깊은 곳에 있다


이설야,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창비. 2022년. 70쪽.



마트료시카


문을 열면 / 문이 있었다 // 그 문을 열면 / 또 문이 있었다 // 문의 문을 열면 / 내 얼굴들 쌓여 있고 / 문밖에는 똑같은 눈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 나는 문의 문을 계속 열고 나갔지만 // 어제의 얼굴을 다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이설야,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창비. 2022년.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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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 2025-03-18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 눌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kinye91님의 시와 소설 평론 글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를 좋아해서 혼자 문학 작품도 읽고 공부도 하고 있는데,
작품 속 아름다움들을 하나하나 면밀히 잘 짚어주시는 글을 보면서 저 또한 즐거워졌습니다.
자주 와서 읽고 문학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kinye91 2025-03-18 16:08   좋아요 1 | URL
제가 감사하죠. 책을 읽고 쓴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은 저의 또다른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절대제조공장 문학의 숲 27
카렐 차페크 지음, 요제프 차페크 그림, 김진언 옮김 / 현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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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는 '절대제조공장'이 무엇을 만들어내는 공장인지 알 수가 없다. '절대'라고 번역을 해서 그런가, 차라리 '완전'이라고 번역을 했으면 좀더 이해하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완전을 만들어내는 공장.


'절대'는 무엇인가? '신'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다면 신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라는 뜻인데, 과연 인간이 신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는 범신론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신은, 즉 절대는 모든 존재에 깃들여 있다. 이렇게 존재에 깃들여 있는 신을 존재를 완전히 연소시키면 신만 남게 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들을 완전 연소시킨다면 세상에는 신이 존재하게 된다. 그것도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간에나.


차페크는 이런 상황을 가정한다. 완전 연소시킬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한다. 발명자는 이 기계에서 나온 신의 존재를 알고 두려움에 차서 그것을 팔아버리려고 한다. 이것을 사는 사람은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자,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긴 사장은 이 기계를 만들어 세계 곳곳에 팔아넘긴다. 그 결과 세계에는 신들이 넘쳐나게 된다. 성령을 받았다고 신통력을 발휘하는 사람, 사랑이 넘쳐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 사장은 공장을 노동자들과 공유하고 등등.


또한 이 기계는 자신의 힘만으로 생산을 해낸다. 노동력이 필요없다. 세상엔 물건들이 넘쳐나게 된다. 이 풍요로움. 이 신성함.


이것으로 그쳤다면 차페크의 풍자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물건은 넘치지만 그 물건이 사람들의 필요와는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또한 물가는 엄청나게 오른다. 


필요를 생각하지 않는 생산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경제에만 국한된다면 사람들이 대책을 세울 수도 있겠지만, 종교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만들어진 '절대'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인간의 인식으로 '절대'를 인식할 수 있을까? 어쩌면 '절대'는 칸트가 말한 '물자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인식을 넘어서는, 인식의 한계 밖에 있는.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식한 '절대'를 '절대'라고 믿는다. 자신의 '절대'만이 '신'이 된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절대'는 '절대'가 아니다. '절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다음에 올 일들은 전쟁이다. 자신의 '절대'를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 강요와 강요가 말들과 말들의 다툼으로 끝날 수는 없다.


말들의 전쟁이 아니라 그야말로 생사를 건 전쟁이 벌어진다. 서로 죽고 죽이고... 또 죽고 죽이고... 이런 일들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전쟁은 끝난다. 이 기계들이 거의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인간의 시대가 돌아온다. '절대'를 인식할 수 없다는 인식이 생긴다.


내 '절대'로 다 파악하지 못했기에 남의 '절대' 역시 내가 판단할 수 없다. 이 '절대'가 사라진 자리에 인간이 와야 한다. 차페크는 그래서 인간이 인간을 믿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이런 '절대'에 대한 인식을 본디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 전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확신하기 위해서 타인을 살해하는 걸세. 알겠는가? 자신이 신 전체, 진리의 전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일세.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신, 다른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참지 못하는 걸세. 만약 그것을 용납한다면 자신이 신의 진리 가운데 겨우 몇 미터, 몇 리터, 몇 주머니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테니.'(285-286쪽)


다른 인물을 통해서 이러한 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는데,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훌륭한 신은 믿지만, 다른 사람의 것은 믿지 않아. 그 사람도 역시 무엇인가 선한 것을 믿고 있는데도.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믿지 않으면 안 돼.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깨닫게 될 거야.' (313쪽)


'알겠는가? 누군가가 가진 믿음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만큼 더 격렬하게 경멸하게 돼. 하지만 가장 커다란 믿음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거야.' (313-314쪽)


이렇게 '절대'를 제조하는 기계가 일으킨 일을 통해 인간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내가 믿는 신이 중요하다면 다른 사람이 믿는 신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신은 신의 일부밖에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자신이 신의 모든 것을 알고 신의 뜻대로 행한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으리라.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고, 그렇기에 서로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함께 지내고 있음을 차페크는 이 소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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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마지막 소송 - 카프카는 누구의 것인가
베냐민 발린트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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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유산은 누구의 것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다. 누구의 것이라는 말에는 '소유'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소유는 독점이라는 말과 통할 때가 많고, 독점은 이윤과 함께할 때가 많다. 즉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은 카프카의 유산을 통해 누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지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가 있다.


이런 질문을 위대한 작가의 유산에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한다면 그 작가는 누구의 것 또는 어느 나라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저작권이라는 이윤을 독점하는 권리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저작권조차도 특정한 기간이 지나면 소멸되는 것은, 지적 재산을 보호해서 작가나 그 계승자의 생활을 보장할 필요는 있지만, 영원히 이득을 취할 권리를 주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카프카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났으니,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저작권이 사라진 경우가 많다. 하지만 미발간 작품들은 어떤가? 그것들에 대한 권리는 어떻게 되는가? 후손들이 있다면 어느 정도의 보상은 필요하겠지만, 후손을 어느 범위까지 인정하느냐도 논쟁거리다. 특히 카프카처럼 자식이 없다고 알려진 사람에게는.


이 책은 이스라엘에서 벌어졌던 막스 브로트의 유산을 둘러싼 소송을 다루고 있다. 막스 브로트의 유산을 둘러싼 소송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막스 브로트가 가지고 있던 카프카의 유산에 대한 소송이라고 보면 된다.


이 소송이 벌어질 당시 막스 브로트는 문학계 또는 예술계에서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고, 또한 국가들이 그의 유산을 둘러싸고 소송을 벌일 만큼 위대한 작가라고 인정받고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막스 브로트의 유산을 놓고 이스라엘, 독일과 그것을 소유하고 있던 에바 호페라는 사람의 소송이 대법원까지 가게 된 이유는 카프카의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카프카. 유언을 집행하지 않고 오히려 카프카의 모든 글들을 모아 보관한 막스 브로트. 우리는 막스 브로트 덕분에 카프카의 작품을 만난다. 그가 인류의 문학에 공헌한 점은 바로 카프카의 작품을 보존하고 출판했다는 점이다.


이런 카프카의 유산을 막스 브로트는 생전에 자신의 비서였던 에스테르 호페(에바의 어머니)에게 카프카의 유산을 증여한다는 문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막스 브로트가 죽은 뒤 그의 유산은 모두 에스테르에게 넘어갔다. 막스 브로트의 유산 처분권을 맡긴다는 증서와 함께.


1974년에 첫재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판사는 막스 브로트의 유산을 평생 재량껏 처리할 권리를 갖는다고 판결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2010년대에 들어와 다시 소송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대대적인 소송이고, 이스라엘과 독일이 참여했다. 에스테르 호페가 살아 있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그녀의 죽음 이후에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그만큼 카프카는 세계적인 작가가 되어 있었고, 카프카의 작품이 경매에 나와 팔려 개인의 금고 속에 영원히 잠들어 있을 거라는 우려도 있었다. 자, 카프카의 작품은 누구의 것인가? 질문을 바꿔야 한다. 카프카의 작품은 누가 보관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명하다. 카프카를 가장 잘 연구할 수 있고, 연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존재가 보관하면 된다. 이렇게만 되면 얼마나 간단명료하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소송이 이루어지는 법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윤리보다도 명확한 것이 법이라고 하지만 법이 얼마나 애매모호한지는 카프카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이미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 [소송]을 읽어봐도 알 수 있고, 짧은 단편인 [법 앞에서],[법에 대한 의문], [유형지에서] 등을 읽어봐도 알 수 있다.


기나 긴 소송 끝에 이스라엘 법정은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렇지만 아직 스위스 금고에 보관되어 있는 카프카의 원고(취리히에 있는 호페 서류)는 반환 수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312쪽 주 참조)


소송은 종지부를 찍었지만 카프카의 작품은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자신의 작품을 다 태워버리라고 했던 작가의 유언은 어디 갔는가? 물론 후세인들은 작가의 유언을 다 지킬 필요는 없다. 작가의 유언과 달리 보존되어 인류의 문화를 풍성하게 만든 작품들이 많으니까. 카프카도 마찬가지고.


그렇지만 이런 소송을 통해서 문화 유산이 어디에 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보다는, 우리 인류는 어떻게 문화유산을 보존ㅡ활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 점을 생각나게 한다.


카프카 유산을 두고 벌어진 소송만이 아니라 막스 브로트의 생애, 그리고 그와 카프카가 살았던 시대, 카프카 작품이 어떤 경로를 거쳐 에바 호페에게 가게 되었는지의 과정 등을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카프카 사후에 벌어진 일들을 잘 살펴보게 한다.


여기에 작품을 두고 작가의 민족, 국가 또는 성향 등을 따지는 일과 작품을 보존하는 일이 어떻게 연결이 되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하고. 문화유산에 이윤이 개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보여주고 있으니...


카프카의 유산을 두고 벌어진 소송, 흥미롭기도 하지만 인류가 문화유산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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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미친 사람들 - 카렐 차페크의 무시무시하게 멋진 스페인 여행기 흄세 에세이 6
카렐 차페크 지음, 이리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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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스페인 여행기다. 그는 스페인으로 가는 여정에서 특급열차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한다. 지금은 기차 여행도 빠르다고 할 수 없지만, 그때만 해도 특급열차는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교통수단이었으리라. 그런 교통수단을 타면 사람이 주체가 되지 않고 객체가 됨을, 무엇을 할 수도 없이 그냥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게 되어 '관에 드러누운 시체처럼 잠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14쪽)고 한다.


그럼에도 특급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을 때는 그 나름의 묘미가 있다고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국경을 넘을 때, 다른 집들과 다른 언어, 다른 경찰들, 다른 색깔의 토양과 다른 풍경을 지닌 낯선 세계로 들어간다는 건 언제나 내게 새로운 기쁨으로 다가온다'(16쪽)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그는 체코를 떠나 독일, 프랑스를 거쳐 스페인에 도착하게 된다.


스페인에 도착해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데, 인물, 풍경, 풍속 등을 소개해주고 있다. 지금도 우리에게 낯익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으며(세르반테스,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고야 등등),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톨레도 등 많이 들어본 지역들도 등장한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벌어지는 투우 경기에 대한 소개도 하고 있으며, 플라멩코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투우는 동물학대로 요즘은 거부되고 있지만 한때 스페인에서 대유행했던 행사였으니 차페크가 그것을 보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차페크는 투우에 대해서는 양가 감정을 지닐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반려동물들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렇다고 투우를 그냥 거부하지는 않는다. 스페인이라는 나라가 지닌 고유한 풍습에 대한 인정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펼쳐나가고 있다.


영국 편처럼 날카로운 풍자는 없지만 스페인의 다양성에 대해서 잘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다양성이 필요함을, 그런 다양성이 우리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여행이 필요하고.


꼭 여행만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다양한 관점을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한다. 자신만의 관점에 빠져 있지 않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엘 그레코를 이야기하는 글에서 '눈이 자신의 비전에 열정적으로 고정된 사람은 모두 조금 미친다. 혹은 적어도 그는 비전의 소재와 형식을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자신에게서 가져오기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진다.'(55쪽)고 했다.


미쳤다는 것은 정신이 나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에 집중한다는 의미고, 그래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다는 것이 고정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당시에 대두되었던 예술의 흐름으로 매너리즘은 이상적인 형태와 조화에서 벗어나 주관적인 예술표현을 하는 경향이라고 하니, 바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차페크가 말하는 매너리즘은 자기 습관에 빠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라고 하는 우리가 흔히 쓰는 뜻과는 거리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다고 자신만의 세계에만 빠져서는 안 된다. 자신만의 세계가 중요하듯 다른 사람의 세계도 중요하다는 것. 즉 나만 옳다는 독선에 빠지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차페크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스페인의 다양한 지역, 다양한 사람들, 풍습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차페크의 이런 생각은 이 책 말미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지금도 우리가 명심해야 할 말이기도 하고. 여행을 하면 다름을 통해서 나를 다시 보고, 나를 더 풍요롭게 하듯이, 그만큼 다른 존재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지니게 된다. 그의 마지막 말로 스페인 여행기를 맺고자 한다.


'... 자신들만의 문명화된 모습이 받아들여져야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사랑에 대해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으니 다른 방식을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요? ... 우리가 이렇게 만나 기쁘니 국가들의 연맹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다만 주의할 점은, 그 나라들이 제각기 개성을 살려서 꾸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 나라는 저마다 다른 머리카락 색깔과 다른 언어를 가져야 하고, 그 나라만의 독특한 관습과 문화를 지녀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그 나라만의 신을 가질 권리도 있어야겠지요. 왜냐하면 모든 차이점을 그 자체로 소중히 여겨질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기에 우리 삶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우리를 구분 짓는 모든 것으로 우리를 하나되게 만들어봅시다!' (219쪽)


이런 혜안이라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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