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나는 한글 우리말글문화 총서 1
김슬옹 지음 / 마리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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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자랑스레 내놓을 수 있는 우리 문자. 한글. 


세계에서 만든 사람과 방법이 알려져 있는 문자, 한글.


하지만 한글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니 질문을 바꾸자. 우리는 한글을 얼마나 자랑스레 여기며 잘쓰고 있는가?


말로는 과학적이고 창의적이며 편리한 문자라고 하면서도 지금 우리나라 곳곳을 둘러보면 과연 우리가 한글을 잘쓰고 있는지 살펴보면 아니다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길거리에 보이는 간판들은 외국어가 많으며 (외래어가 아니다. 외래어는 외국에서 들어온 말이지만 우리말이 된 말이니) 하다못해 공공기관 이름들까지도 외국어를 사용하고 있는 형편이니 말이다.


대표적으로 공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곳 몇군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한국통신은 KT가 되었으며 담배인삼공사는 KT&G가 되었고, 국민은행은 KB라고 하고, 한국방송공사는 KBS, 문화방송은 MBC라고 하는 형편이니, 무슨 한글 사랑이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이런 현실에서 한글의 소중함을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다. 나라에서조차 한글을 외국어로 바꾸고 있는 형편이니 말이다. 국경일에서 제외됐다가 다시 국경일이 된 지도 몇 해 되지 않았고... 


하지만 그럼에도 한글은 우리 문자다. 우리들의 생각을 효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문자다. 사라져서는 안될 문자이기도 하고.


이 책은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한글 관련 유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한글길부터 시작해서 한글박물관, 한글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의 유적 등등을 소개하고 있다.


참 많은 곳에 한글을 기념하는 유적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 이토록 많은 한글 유산이 있었는데, 그냥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서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 있으니, 어디서든 한글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한다.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한글 유적들을 자세히 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또 저자인 김슬옹이 이야기하듯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훈민정음을 제대로 읽고 배우는 과정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보편 교양을 가르친다는 중등교육에서 훈민정음 해례 언해본을 강독하는 과정은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그래야 한글이 왜 좋은 문자인가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테니까.


훈민정음만이 아니라 한글의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한글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질 수 있을 테니까.


한글, 다시 한번 우리가 쓰고 있는 문자를 생각하고, 한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준 책이다.   


덧글


한글에 대한 역사와 정보를 알려주는 책인데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아마도 오타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144쪽에 '신숙주는 훈민정음 관련 모든 저술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라고 되어 있는데...

145쪽에 (성삼문은) '신숙주와 마찬가지로 <<운회>> 번역을 제외하고는 훈민정음 관련 저술에  모두 참여했다'라고 나온다. 

이 문장이 모호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신숙주도 <<운회>> 번역에 참여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성삼문만 빠진 것인지... 

차라리 문장 순서를 '<<운회>> 번역을 제외하고는 신숙주와 마찬가지로 훈민정음 저술에 모두 관여했다'라고 했으면 명확하지 않았을까.


여기에 더해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 관련된 작업을 요약하면서 147쪽에 성삼문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운회>>를 언문으로 번역'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명백한 실수다. 빼야 한다. 분명 성삼문은 <<운회>> 번역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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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 극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04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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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작가가 있지? 거의 백 년 전에 쓴 작품인데, 지금 시대에도 맞는 이야기 같지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라니... 정말 대단한 작가다.


희곡인데, 연극으로 보아도 재미있겠지만, 책으로 읽어도 재미있는 그런 작품들. 차페크 작품이 지닌 풍자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지금 읽으면서 우리 사회나 또는 지구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과 비교할 수도 있으니... 그저 감탄할 수밖에.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가다.


세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곤충 극장, 마크로풀로스의 비밀, 하얀 역병'


다른 주제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 전쟁에 대한 부정이 공통적으로 드러나 있다. 


'곤충 극장'은 곤충들을 등장시켜서 인간이 지닌 욕망과 허위들, 그렇지만 삶에 대한 의지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곤충(나비)은 자유로운 성과 문학에 대한 조소를, 어떤 곤충(쇠똥구리)은 물질적 부에 대한 욕구를, 또 어떤 곤충들(귀뚜라미와 맵시벌)은 약육강식의 세상을, 어떤 곤충(개미)은 전쟁에 대한 욕구와 그로 인한 파괴를, 어떤 곤충(하루살이)은 삶에 대한 욕구와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곤충을 통해서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고, 물질만의 풍요로움이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단 하루를 산다고 하루살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 짧은 기간 동안에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이 다른 욕망들로 인해 삶의 환희, 삶의 목적을 잃고 있지는 않은지를 생각하게 한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민달팽이들이 '삶은 달콤하다'(100쪽)와 '중요한 건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거지'(101쪽)라는 장면에서 누구나의 삶이 소중함을, 그런 소중한 삶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차페크가 바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인간의 생명을 무한으로 늘리면 좋을까? 그것은 아니라고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에서 말하고 있다. 삼백 년을 넘게 산 에밀리아라는 인물을 통해서, 비록 겉보기에는 무척 매력적이지만 가까이 만나면 너무도 차가운 존재인 그녀를 통해 과연 우리의 삶을 어디까지 연장하는 것이 좋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연금술과 비교할 수 있는 인간 생명의 연장은 과연 축복일까? 지금도 죽음을 인간에게서 떨쳐내려는 연구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 작품의 끝에 삼백 년을 살아갈 수 있는 비법을 적은 종이(양피지)를 태우는 인물들의 행위를 통해서 차페크는 유한한 생명 속에서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유한한 생명. 그래서 누구에게나 소중한 생명. 이 생명을 다른 사람이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선동에 의해서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또는 버리라는 명령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상태. 전쟁뿐만 아니라 각종 테러 등 폭력 행위들이 벌어지고 있고, 드러나지 않은 폭력들도 얼마나 많은 시대인지.


그래서 평화는 전쟁 중에 잠시 오는 아주 짧은 기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하는데, '하얀 역병'에서는 전염병과 전쟁, 그리고 평화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차페크가 1930년대에 죽었는데, 전세계를 휩쓰는 역병을 생각해내고, 그 역병과 전쟁을 같은 위치에 놓고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물론 역병에는 지역 이름이 붙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일은 최근에 금지되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19가 처음 발생했을 때 별 생각도 없이 또는 공격과 더불어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특정 지역 이름을 붙여 '00 바이러스'라고 붙인 경우를 생각하면, 이 희곡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에, 이것이 꼭 현재만의 문제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강대국들이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있음을, 그래서 전염병은 병 자체로도 위험하지만 병이 지닌 이름으로도 또다른 편견을 조장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지역 이름을 붙이는 일을 금지한 것이 마땅함을 깨닫게 된다.


이 희곡에서는 역병의 백신을 발견한 의사가 나온다. 이 의사의 조건은 단 하나다. 나라끼리 평화협정을 맺어라. 그러면 백신을 제공하겠다. 하지만 독재자는 그런 평화 요구를 거절한다. 전쟁만이 살 길이라고... 사람들을 전쟁의 광기에 쓸려가게 한다.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 이들은 역병에 걸린 것과 같다. 역병에 걸려도 수많은 사람이 죽는데, 전쟁 역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다. 


이 희곡에 나온 총사령관과 의사는 같은 전장에 있었지만 다른 곳을 본다. 총사령관은 자신과 더불어 전쟁에서 이기고 살아온 사람들을, 그래서 전쟁의 영광을 보는 반면에 의사는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전쟁의 참상을 본다.


같은 전쟁이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쟁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다. 의사는 백신을 개발하고, 이를 이용해 평화를 이루려고 한다. 전쟁을 막으려고 한다. 그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없는 사람들을 치료한다. 무료로. 왜냐하면 그에게 백신은 인간을 살리는 도구이고, 평화를 이루려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총사령관을 비롯한 권력자들은 전쟁을 포기하지 못하기에 평화를 이끌어올 백신을 거부한다. 그들은 전쟁을 해야 한다. 사람들을 전쟁으로 몰아가려 한다. 그런 세상, 그런 모습이 적나라하게 이 희곡에 나와 있으니...


집단 광기... 폭력에 도취된 사람들은 어느 것도 보지 못하고, 전쟁을, 폭력을 선동하는 지도자를 비판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세상을 차페크는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에 위협을 느낀 차페크가 작품을 통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지금 우리 시대에도 이 경고는 유효하다.


전세계를 팬데믹으로 이끈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평화보다는 전쟁으로 치달았기 때문이고, 전쟁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집단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여 이 희곡집을 읽으면서 과거가 아닌 현재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이 유한한 삶을 평화롭게 유지하게 하는 사회 속에 있는가, 아니면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가를.


'하얀 역병'의 마지막 장면... 사람을 살리는, 세계의 평화를 추구하는 의사가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슬프면서도 섬뜩한 결말. 그러나 이것이 현실임을 자각하게 하고 있으니, 이 희곡을 읽으면서 머리가 쭈뼛해지는 것은 나만일까? 


한번 읽어보라. 이 희곡을... 어쩌면 우리는 총사령관의 선동에 끌려다니는 군중에 불과한 것 아닐까,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을 발 아래 깔아뭉개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그가 이 희곡집에서 표현했던 일들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 차페크, 읽을 수록 매력이 더해지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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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봄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길거리에서 밤을 새우는 분들도 조금은 지내기 편해질 수 있겠지.


  계절로 인해 편해지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이 분들이 자신의 생활을 꾸려갈 수 있도록 제반 환경을 제공하는 쪽으로 바뀌는 것이 더 좋겠지만, 아직은 그런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그래도 이번 호에는 연예인 엄태구 씨가 나와 빅이슈 판매 도우미로 활동했다는 기사, 특히 자신을 돋보이게 하지 않고 추운 날씨에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니, 더욱 훈훈해졌고.


읽다가 2024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가 올해의 단어로 '뇌 썩음(brain rot)'이란 단어를 선정했다는 기사를 발견했다. (63쪽)


좀 무서운 단어지만, 뇌가 썩는다는 말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니, 이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편협함에 갇힌 사고방식으로 해석한다면, 알고리즘이라는 말과 '뇌 썩음'이라는 말을 연결시킬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알고리즘이 무엇인가? 자신의 성향, 취향에 맞는 것들을 연이어 제시해서 그것들을 계속 보게 만들고,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질 틈을 주지 않는 것 아닌가.


다른 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만 그것도 콘텐츠(내용이라고 해야 하나)만 달리해서 계속 본다면, 편향적 사고를 지닐 수밖에 없다. 편향적 사고는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니 그것이야말로 '뇌 썩음'에 해당하리라.


그런 점에서 이번 호에 실린 젊은 정치인이 한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특히 누구는... (96-101쪽 참조)


'고도화된 다툼의 방식이 정치라 생각한다. 폭력적으로 싸우는 방식은 옳지 않지만, 싸움이 정치의 본질인 것이다.'(100쪽)


정책들의 싸움, 그것이 정치다. 고로 정치는 언어로 하는 싸움이다. 언어를 통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싸움이 바로 정치다. 언어가 아닌 폭력의 수단이 동원되는 순간 정치가 아니라 전쟁이 된다.


그러니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배제시키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주장이 없다면 정치는 없다. 다른 주장들이 언어를 통해 오고가고, 그러면서 자신의 주변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 과정, 언어들의 싸움... 아니 주장들의 싸움, 이것이 정치다. 그러니 고도화된 다툼의 방식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 말을 잘못 해석해서 고도화된 정치 행위로 폭력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던데, 그건 고도화된 정치 행위가 아니라, 국민을 어려움으로 빠뜨리는 헌법을 지키지 않는 행위에 불과하다. 즉 고도화된 다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치를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정치를 하면 '뇌 썩음'으로 나아간다. 알고리즘에 빠진다.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주변을 볼 수 있는 눈이 사라진다.


오로지 자신에게 좋은 것들로만 주변을 채운다. 이런 존재에게 공동체란 존재하기 힘들다. 공동체에 온갖 존재들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뇌 썩음'과 가장 거리가 먼 잡지가 바로 [빅이슈]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빅이슈]는 다양한 글들을 싣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공동체를 이루는 소수자를 외면하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글들도 좋았지만 '뇌 썩음'이란 단어로 '알고리즘'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정말 정치인들은 이런 '뇌 썩음'을 경계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젊은 정치인의 말을 다시 새기자. 뇌 썩음을 방지하는 길은 고도화된 다툼의 방식이 정치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다른 무엇보다 다양한 책을 읽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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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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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족이 해체되면서 핵가족이 대세가 된 지가 꽤 오래 되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핵가족이라는 말보다는 핵개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이 책의 주장이 나왔다.


기존의 가족 개념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시대가 변하면 언어가 변하고, 그 언어의 변화를 잘 따라가야 한다고, 그래서 제목이 시대예보인데, 일기 예보처럼 시대를 예보하고자 하는 글이니만큼, 앞으로의 사회는 우리가 알던 가족의 개념이 달라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주장에서 '정상 가족'이라는 말은 설 자리가 없다. 가족에서 '족(族)'을 빼려고 하는 시대에 가족의 형태를 놓고, 정상이다 아니다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핵개인이라는 말을 쓴다. 자유로운 개인이 자유로운 개인을 만나 살아가는 세상. 그런 세상은 기존의 가족 개념과 같을 수가 없으므로, 우리 사회를 핵가족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난 일이 된 것이다.


핵개인의 시대는 많은 것이 변한 시대이다. 기존에 고수하던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한다.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받아들여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판단을 조직이, 가족이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유로운 개인이 해야 한다.


혼자 하기 힘들다면 자신처럼 자유로운 개인들과 연결해서 하면 된다. 그 연결이 바로 핵개인 시대의 핵심이기도 하다. 핵개인이라는 말에서 홀로인 개인을 생각하면 안 된다. 핵개인은 자유로운 존재지만 다른 존재와 연결된 '네트워크'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다만, 이 네트워크가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평생 직장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그런 말이 통하지도 않는다. 언제든 직장을 옮길 수 있어야 하고, 여러 직장을 옮기면서 소위 말하는 '스펙'을 쌓는다고도 한다. 그렇게 직장을 옮길 수 있으려면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그만둘 수 있음은 무기가 된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권위를 부여하기도 한다.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만의 전문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남에게 의존하는 전문성이 아닌 스스로 서는 전문성, 이것이 핵개인이 지녀야 하는 기본 요소가 된다.


따라서 핵개인의 시대에는 과거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정서가 깔려 있다. 새로운 권위, 자기에게서 나온 권위가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직책이 높다는 이유로, 돈이 많다는 이유로는 권위가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이지만, 새로운 세대에게는 무시당하기 쉬운 인정 욕구에 불과하다. 소위 '꼰대' 소리를 듣는 권위다.


사회, 직장, 가족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 사회가 변화에 처한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그러한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지녀야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눈 감고 있다고 사회의 변화가 멈추지는 않으니, 변화를 직시하고, 그 변화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읽으면서 명심할 말들이 많았다. 나를 돌아보기도 했고. 나는 핵개인의 시대에 과연 핵개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가?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미정산 세대'에 속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미정산 세대로서 더 할일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가 말하는 미정산 세대는 '앞으로는 다 돌려받지 못하거나 원하는 만큼 다 돌려받지 못했다고 스스로 느끼는 세대'(306쪽)라고 한다.


소위 '낀 세대'라고도 할 수 있는데, 변화는 이런 '미정산 세대-낀 세대'로부터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변화의 중심에 있는 세대니까. 그러니 새로운 세대를 우리와 다르다고만 하지 말고, 과거 세대와 새로운 세대를 이을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양성은 형평성과 포용성을 바탕으로 맺은 열매입니다. - P64

어떤 것도 반드시 지킬 것은 없다는 사실을, 모든 것은 우리가 지금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명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 P77

언어에는 바뀐 세계의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 P78

언어 표현은 현행화를 게을리 하면 다음 세대의 혐오를 받습니다. 세상을 타자화시키지 않도록 계속 사유해야 합니다. - P85

로봇의 핵심은 물리적, 정서적 행위의 자동화입니다. AI의 핵심은 지능적, 창조적 활동의 자동화입니다. 결국 인간은 창조적 활동, 지능적 활동,, 육체적 활동, 정서적 활동 그 모든 영역에서 로봇, AI와 함께하게 될 운명입니다. - P104

모든 산업 분야에서 부가가치 상승의 수준은 비슷합니다. 첫 번째 전제가 연결성, 두 번째 전제는 지능화입니다. - P129

앞으로 일을 잘하는 사람은 일을 열심히 하거나 숙련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없애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그의 직업이 일을 없애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본인은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이냐는 모순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 P145

앞으로의 과업은 지금의 일을 지켜내는 데에 있지 않고, 새로운 기술을 발판으로 파괴적 혁신을 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정하고 변화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 P146

권위 빅뱅으로 탄생한 핵개인은 자기 삶의 결정권을 가진 성인입니다. ~ 자체 역량 강화가 가능한 시대에 스승은 유튜브이고, 그것을 돕는 조교는 AI입니다. - P175

하이엔드(가격에 대한 고려없이 만든 최고의 디자인, 성질, 품질을 지닌 상품)는 개별성과 고유성이 교차되는 장소입니다. ~ 소량을 만들고, 단가는 높이고, 세계로 가는 것이 옳습니다. - P197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이연된 보상‘입니다. ~ 연공 서열과 기수 문화 모두 이런 이연된 보상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 P223

인구집단의 유지와 번성을 위해서라도 생로병사에 필요한 비용과 노동을 ‘공적 시스템‘으로 세밀하게 설계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 시대의 어려움으로 인해 자립의 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사회가 지원과 협력의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 P237

나이듦을 판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가 바로 완고함입니다. - P240

돌봄의 끝은 자립이고, 자립의 끝은 ‘내가 나의 삶을 잘 사는 것‘입니다. 각자 잘 사는 사람들이 예의를 지키며 교류할 때 의무는 경감되고 우리의 삶은 더 다채로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현명해지고 함께 도움을 줄 수 있는 각자 ‘나‘를 가질 수 있는 핵개인들의 사회를 꿈꿔봅니다.
- P 263

핵개인의 시대, ‘가(家)‘는 있지만 ‘족(族)‘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 P285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은 ‘서사(narrative)‘입니다. 각자의 서사는 권위의 증거이자 원료입니다. 성장과 좌절이 진실하게 누적된 나의 기록은 유일무이한 나만의 서사입니다. - P286

탁월한 사람은 그렇게 매일 자신을 선배의 자리, 권위자의 자리가 아니라, ‘신인(新人)의 자리‘에 세우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 P289

세계의 누구도 하지 않은 고민을 계속하면 적어도 그 누구보다 앞에 선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결국 인정의 정점에는 나 자신으로부터의 인정이 있습니다. - P297

이 전선의 앞에 서기 위해서는 희귀함을 추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희귀함이 쌓이면 고유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고유성이 진정성까지 가기 위해서는 축적의 시간이 다시 요구될 수 있습니다. 고유함은 나의 주장이고, 진정성은 타인의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 P 299

앞으로는 다 돌려받지 못하거나 원하는 만큼 다 돌려받지 못했다고 스스로 느끼는 세대가 나올 것입니다. 이들을 ‘미정산 세대‘라 부르고자 합니다. - P306

미정산 세대는 본인 몫을 미래 세대에게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준비하는 새로운 핵개인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 P307

권위자와의 직거래가 가능해진 것이 바로 달라진 세계의 특징입니다. - P313

지금 세대에게 더욱 필요해진 능력은 ‘리터러시literacy‘, 다시 말해 문해력입니다. ~ 새로운 시대의 문해력은 문자에만 머무르지 않고 숫자, 이미지, 영상을 포괄한 디지털에 대한 이해로 확장됩니다.

- P314

이런 핵개인의 시대에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네트워크‘입니다. ~ 협업이 전제가 됩니다. 그리고 협업에 있어 충분한 자기 위치와 역할을 찾아가려면 연결성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 역량을 확보하고 있어야 합니다. - P315

그만두어서 평등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만둘 수 있기 때문에 대등해지는 것입니다.

- P320

이기려는 경쟁에서 내려오고 보여지는 것의 구속을 벗어던질 때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권위를 자신 있게 인정하는 사회로의 변화를 꿈꿔 봅니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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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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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생전에 인정을 받은 작가들도 있지만, 살아 있을 때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거나 또는 엄청난 혹평에 시달린 작가들이 있다. 그들은 예술에 새로움을 불러와 그 시대의 사람들과 불화한다. 


이를 쿤데라는 '어떤 예술 작품의 본질적인 것은 그 새로움(새로운 형식, 새로운 문체,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에 있으며, 몰이해에 맞닥뜨리는 것은 당연히 바로, 이 새로움인 것이다. (365쪽)'라 하고 있다.


새로움, 그냥 낯섬이 아니라 낯섬 속에서 무언가를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작품들. 이 작품들은 언제든 우리 곁으로 온다. 우리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품, 작가들도 있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작가들도 있다.


잘 알려진 작가로 화가 고흐가 있지 않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상이 있다고 하면 될 테고. 유렵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이상과 같은 작가로 카프카를 꼽으면 카프카에 대한 실례가 될까? 그가 이상보다는 먼저 나고 먼저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니까, 이상을 한국의 카프카라고 하면 될 수도 있겠다.


이상이 죽고 김기림은 쥬피터(제우스)에 이상을 빗대어 표현한 시를 썼는데(쥬피타의 추방-이상의 영전에 바침), 이상이 죽은 뒤 우리나라 시단이 반 세기나 뒤로 갔다고 아쉬워하는 김기림. 그런 김기림에 빗댈 수 있는 사람이 카프카의 유언을 배신하고 그가 남긴 글들을 출판한 막스 브로트 아닌가 한다.


카프카를 거의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브로트. 하지만 쿤레라는 이 책에서 카프카를 그렇게 규정지은 브로트를 비판하고 있다. 브로트가 처음으로 카프카를 한정지었기 때문에 후속 연구자들도 거기서 벗어나기 힘들었다고.


브로트는 카프카를 세계문학에 위치시키기보다는 아주 작고 협소한 부분으로 후퇴시켰다고 쿤데라는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다. 배신당한 유언으로 카프카를 우리가 알게 되었지만, 카프카가 남긴 유산을 더 추적하고자 하는 욕구를 제한당하고 있다는 비판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쿤데라의 말을 직접 살펴보자.


'헤르만 브로흐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스베보와 호프만슈탈과 함께 소(小) 맥락 속에 넣는 것에 항의했었다. 가엾은 카프카, 그에게는 이 소맥락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에 대해 얘기할 때 사람들은 호프만슈탈도, 만도, 무질도, 브로흐도 돌이켜 보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에게 남겨 둔 유일한 맥락은 펠리체, 아버지, 밀레나, 도라라는 맥락뿐이다. 그는 소설사와 동떨어진, 예술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자신의 전기라는 소-소-소-맥락 속으로 되돌려 보내진 것이다.' (400쪽)


이게 아니다. 소설은 작가의 자서전이 아니다. 그러니 소설 속에서 작가를 찾으려고 너무 애써선 안 된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그것이 혹 작가 자신이라 해도, 작가가 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쿤데라가 우려하는 '타인의 사생활을 유포하는 것, 이것이 습관이 되고 규칙이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과연 개인이 생존할 것이냐 멸할 것이냐가 중대 관건이 되는 그런 시대로 들어서게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387쪽)' 이런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작가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금 우리는 이런 위험, 위협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다른 매체들에 의해서. 조심해야 한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을 작가의 사생활과 연결시키는 것도 위험한데, 그냥 개인의 사생활을 파헤쳐 까발리려 하는 행위는, 인간이 인간에게 수치심을 주는 가장 지독한 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작품을 남겨 우리에게 물려준 것은 공에 해당하지만, 카프카가 굳이 출판하고 싶지 않았던 글들까지 출판한 것은 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과(잘못)보다는 공이 더 많다고 생각하지만.


문학, 예술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이 책이지만, 문학과 예술이 무엇인가? 결국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 아닌가. 그러므로 쿤데라의 이 책에서는 작가를 대하는 태도도 나와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짧은 글들의 모음. 그러나 연결이 되는 글들. 소설로 치면 연작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들은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죽은 뒤에 그들의 작품이 어떻게 평가되고 향유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2023년에 세상을 뜬 쿤데라, 노벨 문학상이 놓친 또 한 명의 작가로 이름을 올리게 된 작가. 이렇게 내가 이야기하는 것도 쿤데라에게는 실례일 수 있겠다. 그는 결코 그런 평가를 바라지 않았을테니.


기억할 만한 구절들도 많아, 아래에 남겨둔다.

~라블레의 책은 전적으로,그리고 근본적으로 소설이 된다.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 말이다. - P14

도덕적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 그것은 소설의 부도덕이 아니라 바로 소설의 도덕이다. 즉각적으로, 끊임없이 판단을 하려 드는, 이해하기에 앞서 대뜸 판단해 버리려고 하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인간 행위에 대립하는 도덕 말이다. 이 맹렬한 판단 성향은 소설의 지혜라는 관점에서 보면 더없이 고약한 어리석음이요 다른 무엇보다 해로운 악이다.
- P15

웃음이 소설의 공기 속에 보이지 않게 퍼져 있다는 점에서, 소설적 세속화야말로 다른 무엇보다도 해롭다. 그래서 종교와 유머는 사실 양립할 수 없다. - P18

소설은 ~ 다른 법칙에 토대를 둔 다른 세계다. 유일 진리가 맥을 못 추는 곳, 악마적 모호성이 모든 확실성을 수수께끼로 만들어 버리는 지옥 같은 곳이다.
- P 42

유머란 이 세계의 도덕적 모호성을 드러내는,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신성한 빛이다. 유머란 인간사의 상대성이 대한 도취요, 확실한 건 없다는 확신에서 오는 기이한 즐거움이다. - P50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것이 뭔지도 모르는 채 죽는 것이다. - P190

서정, 서정화, 서정적 담론, 서정적 열정은 흔히 전체주의라 불리는 세계의 구성 요소다. 전체주의 세계는 그냥 굴라그가 아니라 사방의 담이 시로 수놓인, 그리고 사람들이 그 앞에서 춤을 추는 그런 굴라그인 것이다. - P234

곡의 구성(곡 전체의 건축적 편성)을 작곡가가 자신의 창의력으로 채우기 위해 빌리는, 그런 미리부터 존재하는 하나의 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구성 자체가 하나의 발명, 작곡가의 독창성 전체가 투영되는 그런 발명이어야 한다. - P256

진정으로 소설적 사유(라블레 이후 소설이 알게 된 사유)는 언제나 체계와 규율에 반한다. - P259

신념이란 게 무엇인가? 정지된 사유, 굳어버린 사유요, ‘신념을 가진 사람‘이란 곧 한정된 사람이다. 실험적 사유는 설득을 하려는 게 아니라 영감을 주고자 한다. 어떤 다른 사유에 영감을 주고, 사유 행위 자체를 자극하고자 한다. 그래서 소설가는 자신의 사유를 철저하게 탈 체계화해야 하고, 그 자신이 자기 아이디어들의 주위에 세운 바리케이드에 발길질을 가해야 한다. - P260

인간은 안개 속을 나아가는 자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뒤돌아볼 때는 그들의 길 위에서 어떤 안개도 보지 못한다. 그들의 먼 미래였던 그의 현재에서는 그들의 길이 아주 선명하게 보이고,펼쳐진 길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뒤돌아볼 때, 인간은 길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잘못을 본다. 안개가 더는 거기에 없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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