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서 - 홍세화와 이송희일의 대화
홍세화.이송희일 지음 / 삼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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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세상을 떠난 홍세화 선생과 이송희일 영화감독이 만나 대담을 한 책이다. 총 여섯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논의를 했다. 두 사람 모두 진보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진보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때 말하는 진보는 정치권을 진보와 보수로 나눌 때 쓰는 말과는 좀 다르다. 두 사람 모두 우리나라에서 진보 쪽이라고 불리는 민주당을 진보라고 하지 않으니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어야 한다.


탈성장, 차별과 혐오, 죽음의 행렬, 한국 진보정치, 교육, 언론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를 읽어갈수록 마음은 답답해졌다.


이 책이 나온 것이 2022년인데 그동안 홍세화 선생은 돌아가셨고, 코로나는 끝났으며, 이 책에서 언급한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어 우리나라 정치를 몇십 년 뒤로 돌려버리고 만 사건까지 일어났으니...


이들이 다룬 내용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즉 진보하지 않고 오히려 퇴보하고 만 현실에 씁쓸한 마음을 거둘 수가 없다.


홍세화 선생이 한 이 말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지 않나 한다. 비상 시국에 나돈 말들이 다 이런 선동의 말이지 않나 싶었으니 말이다.


'저는 한국 사회가 선동은 가능하지만 설득은 무척 어려운 사회라고 봅니다.' (227쪽)


설득을 하려면 우선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한다. 자신을 객관화 하고, 다른 사람도 역시 객관화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득을 하기 전에 자기 주장만을 펼치는 선동을 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설득을 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있는가? 교육은 오히려 일방적인 생각을 주입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어 오지 않았던가. 자신의 생각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찾아 써야 하는 그런 형식. 


이런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내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그것도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의 답을 찾고, 그것을 받아들여 남에게 강요하는 형태로 결정되지 않을까 한다.


이것이 바로 선동이 난무하는 사회다. 교육과 마찬가지로 언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우리나라 언론이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오죽하면 '기레기'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이런 기레기라는 오명을 벗으려면 언론이 진실을 보도해야 하는데,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서는 선동이 아닌 설득이 필요하다. 자신들에 대한 비난도 참고 견디면서 다른 사람들을 진실에 다가가게 설득하는 일, 그것이 언론이 할 일인데... 언론이 이 역할을 하지 못하면 사회는 그야말로 선동에 휩싸이게 된다. 이 선동에 의해 진실은 가려지고, 설득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따라서 두 사람의 대담에서 우리나라 정치 지형을 진보와 보수로 규정하지 않고, 홍세화는 이렇게 규정한다.


'우리는 두 정치세력에 포박당해 있는데, 하나는 '하면 안 되는 행위를 주로 저지르는 정치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해야 할 일을 거의 하지 않는 정치세력'이라는 생각이요.'(324쪽)


'하면 안 되는 행위를 주로 저지른 정치세력'이 어느 정당인지는 이 책을 읽어보지 않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정당은 달랑 둘이다. 원내 교섭단체를 결성할 수 있는 정당이 둘이니... 둘 중 하나겠지. 그러면 나머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정치세력'이 어느 정당인지도 알 수 있다.


꼭 이 구분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타당한 구분이다. 진보와 보수로 구분하는 것보다는 현실에 더 다가간 구분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전히 하루에도 몇 명씩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는 이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 표현이 스스럼 없이 발화되고 있는 이 현실에서, 성장 성장, 오로지 경제 성장이 목표라는 듯이 성장우선주의를 외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이 현실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정당이 바로 진보 정당이다. 그런 진보 정당이 있는가? 질문을 해야 한다.


진보 정치에 대한 대담이 이 책에 실려 있는데, 아마 읽기 불편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양 거대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들의 대담이 쓴 약이 아니라 헛소리, 구름 따먹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정치란 무엇인가? 나하고 생각이 같은 사람들하고만 하는 것이 정치가 아니다.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정치다.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지 명확하지 않은가. 바로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이때 다른 사람들을 다른 정당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다. 꼭 정당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시민들, 다양한 의견을 가진 시민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에 맞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대의민주주의다.


공론장을 형성하고, 공공성을 추구하는 의견을 따르는 것, 대의란 바로 이것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민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포퓰리즘이라고 폄하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의견만을 밀어붙이는 정치인, 그들을 소환할 방법이 없다. 시민들의 뜻과 다른 정치를 하는 정치인을 소환할 수 없는데 어떻게 '대의 민주주의'가 되지? 우리들 의견을 대신하지 않고 제 의견만 고집하는 정치인을 견제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공론장을 형성하지 못하고, 공공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사회가 될 뿐이다. 대의 민주주의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이 책에서 홍세화 선생이 말한 '국민은 자기 수준의 정부를 가진다.'(327쪽. 19세기 반동적 보수주의자 조제프 드 매스트르가 한 말이라고 한다)는 말, 명심해야 한다. 


즉 국민이 정부를 견제하고 견인할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부가 하는 대로 자신들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은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


제대로 국민의 뜻을 대의할 수 있는 정부, 그런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이 대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데, 특히 내가 지니고 있었던 관점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준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서로 다른 많은 생각들, 그 생각들이 부딪히고 부딪쳐 서로의 생각을 모아가는 과정, 그것이 공론장의 형성이고, 이러한 공론장은 공공성을 실현하는데 이바지할 것이다. 지금은 이런 공론장을 만들어야 할 때다. 두 사람의 대담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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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12-25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kinye91 2024-12-25 13:07   좋아요 1 | URL
다른 관점을 만나게 해주는 책이었어요. 그래서 제게는 의미 있는 책이기도 했고요.

숲노래 2024-12-25 16: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지 말라는 짓을 하는 무리 하나와, 하라는 일을 안 하는 무리는, 둘 다 왼오른도 아니고 진보보수도 아니지만, 둘이 왼오른이나 진보보수인 척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 눈높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잣대이지 싶어요. 그래서 이 슬픈 우리 눈높이부터 고스란히 받아들여서, 우리 삶자리부터 스스로 바꾸어 가는 일을 여는 하루부터 이 나라를 바꿀 만하리라고 느낍니다.

kinye91 2024-12-25 17:01   좋아요 0 | URL
숲노래 님의 댓글을 읽으니 자신을 사람에 비춰보라는 경어인이란 말이 생각나네요. 그들 무리를 우리가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우리 삶자리부터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겠지요.
 

  청소년들이 시를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시적인 사회, 얼마나 멋있는 말인가. 청소년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시를 읽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다른 사회보다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있으리라.


  시란 내 마음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기회를 주기 때문이니, 마음과 마음을 잇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면 그 사이에는 평화가 싹튼다. 평화는 존중을 바탕으로 하고, 존중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도 터득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시를 가까이하게 될까? 적어도 전국민이 한 편의 시라도 암송할 수 있는 사회는 어떻게 해야 만들어질까?


간단하다. 시를 좋아하게 하면 된다. 좋아하다보면 자연스레 읽게 되고, 읽다보면 외우고 싶은 시가 생기고, 그렇게 시를 외우는 사람이 많아지면 어, 나도 외워봐야지 하는 마음이 들고, 잔잔한 호수에 물결이 퍼져나가듯이 시가 사람들 마음에 번져나가게 될 것이다.


누구부터 시작해야 할까? 가능하면 어린 나이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린 시절에 좋아하던 것들, 어린 시절에 자주 만난 것들은 평생 그 사람에게 작용하기 때문에...


유초등 때 동시부터 시작해도 좋고, 초중고 때 다양한 시를 만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를 좋아하게 해야 한다. 좋아하게 하려면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나게 해야 한다. 


내 이야기. 우리들 이야기.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요즘 봇물 터지듯 나오는 청소년 시집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시집 역시 시인의 세 번째 청소년 시집이다. 시인은 두 권의 청소년 시집을 내고 '이만하면 청소년들에게 시로 들려줄 말은 웬만큼 풀어냈겠더 싶었다'(4쪽)고 했다. 그럼에도 또 청소년 시집을 내게 된 것은 아직도 청소년들이 시인의 마음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청소년들은 서로 같으면서 달랐습니다. 또래들이 지니고 있을 법한 고민을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개성이 다채로운 빛깔을 뿜어내곤 했거든요,'(4쪽)라고... 그래서 그러한 다채로운 청소년들의 모습을 다시 시로 풀어내고 있다.


이렇게 시인은 청소년 시집을 통해서 다양한 청소년들의 모습을, 다채로운 그들의 생각과 고민과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결코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그런 청소년들의 삶을.


때로는 웃음을 머금게 하고, 어떤 시들은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기도 한다. 그러다 시집의 4부에 실린 시들은 여전히 마음을 아프게 한다. 지금도... 여전히... 계속... 그렇게... 남아 있는 마음의 빚. 슬픔을 시인은 끌어낸다. 끌어내 보여준다. 보여줌으로써 다시 그 슬픔을 안고, 그렇지만 이겨내고 살아가자고 한다. 읽어보면 안다. 어떤 시들인지...


       열리면 문이고 닫히면 벽이다


   자퇴서를 내고

   학교를 빠져나오던 날부터

   나에게 교문은 벽이 되었다.


   학생도 아니고 성인은 더욱 아닌 내가

   마음대로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많지 않았다.


   내가 학교를 버렸는지

   학교가 나를 버렸는지

   이제 와서 그런 건 따지고 싶지 않다.


   지금 내가 문밖에 서 있다는 것

   밀어도 꿈쩍 않는 벽들이 많다는 것


   길은 여러 갈래라지만

   그럴수록 고르기 어려운 법이어서

   어디로 발을 떼야 하나 고민할 때마다

   교문 안쪽의 세계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돌아볼수록 문은 멀여졌고

   어느새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된 나는

   내가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찾는 중이다.

   벽이 문이 될 때까지 두드려 보는 중이다.


   들리니? 들리세요? 들리십니까?


박일환, 우리들의 고민상담소. 단비. 2024년. 29-30쪽.


이 시에 나오는 문과 벽이 어디 청소년들, 학교에만 해당될까? 우리들 삶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 사회에 문이 많은가? 벽이 많은가? 어떨 때는 문조차도 벽으로 만들어버리는 사회 아닌가? 


그런 사회에서 청소년들에게 시를 읽으라고, 시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을 외치는 것과 같다.


"들리니? 들리세요? 들리십니까?"


들어야 한다. 들리게 해야 한다. 들려서 벽이 문이 될 때까지 두르려야 한다. 그렇게 청소년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벽을 문으로 만들어야 한다. 문들이 많이 생기게 해야 한다. 


문은 곧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니... 시를 사랑하게 하는 방법, 단순하다. 마음에 문을 만들고 그 문을 활짝 열고 서로의 마음이 이어질 수 있게 하면 된다. 그런 사회... 자연스레 시를 사랑하는 사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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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문학 선집 1 - 1898년~1920년대 중반 여성문학의 탄생 한국 여성문학 선집 1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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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여성문학의 탄생이라고 했지만, 사실 여성문학은 예전에도 있었다. 알려진 것만 해도 조선시대에 한시를 쓴 사람부터 가사 작품에는 여성이 쓴 작품들이 꽤 있었으니, 근대 여성문학의 탄생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여성문학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여성이라는 자각을 담은 문학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조선시대 문학에도 여성의 자의식을 담은, 여성이라서 겪는 어려움을 표현한 작품들이 꽤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남녀평등이라는 개념이 사회에서 통용이 되고, 실현이 되는 것은 근대에 들어서라고 할 수 있으니, 근대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등장으로 이제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것들이 서서히 여성들도 할 수 있는 일로 인식되고, 또 실제로 한 여성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책은 한국 여성문학 선집 7권 중에 첫번째 권이다. 근대 들어 여성들을 중심에 놓는 글쓰기를 다루고 있다. 처음부터 여성문학이라고 하지만 이 책에는 주장하는 글도 있고, 잡지의 창간사도 실렸다. 물론 소설과 시, 희곡도 실렸으니...


통상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라고 불리는 이광수의 [무정]이 1917년에 나왔는데, 여기에 결코 뒤처지지 않게 여성문학도 나왔다. 즉 근대 들어서는 남성과 여성의 활동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문학에 여성들이 뒤늦게 참여한 것이 아니라 근대문학에는 남녀가 거의 동시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성의 참여가 동시성이 있다고 해도 인정을 동등하게 받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단적인 예가 바로 김동인의 [김연실전]이다. 여기서 김동인은 당시 신여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비꼬고 있는데, 그만큼 여성들은 근대 들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비슷한 시기에 작품 활동을 했더라도 편견을 지닌 시각으로 판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편견을 딛고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이 있다. 이 책에서 다룬 김일엽, 김명순, 나혜석이 바로 그들이다. 나혜석이 쓴 [경희]만 하더라도 1918년에 쓰였다. 이는 [무정]과 별 차이가 나지 않게 발표되었다는 점이고, 여기서 신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경희의 고민과 결단이 잘 드러나 있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동등한 인간이라고... 남성 여성이기 전에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이들은 자신들의 글에서 주장하고 있다.


동등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으로 독립이 되어야 하나, 물질적 독립 이전에 먼저 정신적으로 독립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주체로 설 수 있는 마음, 정신을 지녀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각종 단체를 세우고, 다양한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김일엽이 쓴 '우리 신여자(新女子)의 요구와 주장'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믿습니다. 정신상의 굴복은 물질상의 굴복에 반(伴-따르는)하는 것임을. 그러기에 완전히 정신상의 자유를 얻고자 하면 반드시 또 물질상의 자유를 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질적 자유의 욕구는 먼저 정신적 자유의 동경으로 우리의 두뇌 중에 나타나는 것이로소이다. 그리고 열렬한 정신적 자유의 동경이 있은 연후에 진실한 물질적 자유의 욕구가 생기는 것이올시다. 하므로 우리는 신시대의 신여자로 모든 전설적, 인습적, 보수적, 반동적인 일정의 구사상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습니다.' (234쪽)


이러한 사상을 작품에 담아 활동하기 시작하는 때, 바로 근대다. 그리고 이 근대에 자신들의 문학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이 등장했다. 개화기(애국계몽기)에 자신의 이름이 아닌 무슨무슨 '소사(召史)'로 나오는 여성들이 있지만 곧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종속된 존재가 아닌 주체적인 존재로 서게 되었다는 의미고, 아직은 물질적 독립을 이루기 힘든 시기이기는 하지만 독립된 생활을 해야만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자각이 일어난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독립하려고 해도 앞선 여성들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그러한 여성들을 과거의 여성으로만 보려고 하는 남성들도 많고... 이런 현실이 김명순의 희곡 [두 애인]에 잘 나와 있다. 


같은 여성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동경했던 남성들에게는 버림받은 신여성의 모습. 그러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려는 모습이 이 희곡에 잘 나와 있다. 이제 이러한 여성들은 사회에서 당당한 주체로 서게 된다. 그 다음 시대에... 하여 1930년대에 가면 우리 문학사에서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여성들이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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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폭격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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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나? 제목이 맛집 폭격이라 경쾌하게 진행이 되는 소설이고, 음식과 관련이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읽으면서 그건 아니다라는 생각. 오히려 사회소설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맛집과 폭격을 연결지어서 생각하게 하는 소설.


전면적인 전쟁까지는 가지 않았다. 서로 미사일을 쏘아 폭격하고 있는 수준이다. 서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 이런 대응을 고민하는 조직으로 에스컬레이션 이원회가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듯이 폭격도 이런 수준의 대응을 하는 조직. 한번에 비약하지 않고 서로가 용납할 수 있는 수준까지 벌이는 폭격들.


그런데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맛집들이 폭격된다. 폭격 목표로는 별로 쓸모가 없는 곳인데, 그냥 무작위 폭격이었고, 거기에 우연히 맛집들이 속했다고 하면 될 일인데 무언가 이상하다.


주인공 민소의 사적인 경험과 얽힌 맛집들이 폭격 당한 것. 그렇다면 무언가가 있다. 그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이렇게 소설은 민소가 폭격의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과 그와 같이 합류한 윤희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결말까지 도대체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아니, 폭격으로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고, 그런 집단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들에 의해서 폭격은 멈추지 않는다. 자신들의 이권이 걸려 있기 때문에. 


하지만 에스컬레이트로만 폭격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어느 순간 더 강한 폭격이 일어날 수 있다. 그때면 전쟁이다. 이제는 작은 일에서 시작한 것이 전쟁으로 번진다. 국민들의 안위, 그것은 안중에 없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면 될 뿐.


이상하게 낯익은 이야기 아닌가? 죽어나가는 것은 국민들이지만 위에 있는 힘 있는 자들은 오히려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거기다 별것 아닌 아주 사소한 갈등이 전면적인 전쟁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다는 현실이...


그런 과정을 소설은 맛집 폭격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민소와 윤희나가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을 우리에게 순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럼에도 결말은 보여주지 않는다. 무언가 더 큰일이 일어났다는 것만 짐작하게 할 뿐이다.


결국 작은 일에서 시작한 폭격이 더 큰 전쟁으로 이어지고, 이렇게 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 파국으로 치닫게 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정부고, 정부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면 국민들은 살 터전을 잃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격을 작가가 예상하고 있지는 못했겠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이나 레바논에 미사일을 날리고, 반대로 하마스나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을 향해 미사일을 날리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런 모습은 정부(헤즈볼라나 하마스도 일종의 정부라고 보면)가 어느 정도 통제를 하고 있어서 부분적인 폭격으로 끝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정부는 끄떡도 하지 않고 있으니, 이 소설에 나오는 정부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전쟁으로까지 확대하지 말고도 이 소설은 작은 일이 큰일이 되는 과정을 우리 정치에 비춰보면 된다. 이 소설에 거울상이 나오는데, 이는 같은 존재라는 말이다. 즉 너는 나의 거울이다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힘과 속도를 조절해서 대응을 해야 한다. 에스컬레이션 위원회처럼 어느 정도 대응을 할 수 있는 방안을 실천해야 하는데... 


어느 순간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강력한 대응을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뀌고 만다. 그렇게 되면 파국이다. 되돌릴 수 없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소설에서는 에스컬레이션 위원회지만 이 위원회가 소설 속에서 과연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들도 정부의 조직 중 하나에 불과하다. 결국 결정은 권력자가 내리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조직의 의견을 무시하다가는 소설에서처럼 파국이 일어날 수 있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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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배명훈 지음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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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이라는 책이 있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100명으로 축소해놓고 한 눈에 알아보기 쉽게 분류를 한 책이었다. 이렇게 축소를 해 놓고 보면 우리 세계의 분포를 쉽게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는데...


배명훈의 [타워]는 오래 전에 나온 소설이다. 2009년에 출간이 되었는데, 2020년에 새로운 신판이 나왔다. 나는 구판으로 읽었지만, 목차를 살펴보니 달라진 것이 없으니, 구할 수 있는 책으로 읽으면 될 듯하다. 물론 내용을 개작했는지는 살펴보지 못했다. 최인훈 작가 같은 경우는 [광장]을 수차례 개작했는데...


개작 여부를 떠나서 구판을 읽어도 지금 현실을 대입할 수가 있다. 이럴 수가.. 이 소설집이 SF소설로 분류가 되니, 다른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소설이 시대를 넘어 계속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6편의 단편소설이 묶여 있다. 다 '빈스토크'라는 타워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빈스토크가 무엇인가?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하늘까지 솟은 콩줄기에서 따온 이름으로, 674층 높이에 50만 인구가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이 타워에 대한 설명을 좀더 보자.


첫작품인 '동원 박사 세 사람-개를 포함한 경우'에 나오는데, '1층부터 12층까지는 층 구분이 없는 커다란 정원이었다. 그 위로는 백화점이나 쇼핑몰, 영화관 같은 상업 시설이 21층까지 이어졌는데 거기까지는 외국인도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중간지대이면서 또한 비무장지대였다. 그리고 22층에서 25층까지가 경비실 구역이었는데 말하자면 빈스토크 육군 이천이백 명 중 이천여 명이 주둔한 국경지대인 동시에 여섯 개의 출입국 사무소가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30쪽)라고 설명이 된다.


26층부터 여러 시설들이 있는데, 각 층이 수평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없고, 다양한 높낮이로 건설되어 있어서, 엘리베이터가 꼭대기층까지 한 번에 올라갈 수는 없다고 한다. 수직과 수평이 교차하면서 연결이 되니, 각 층은 빈스토크라는 한 국가에 속한 지역들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 이 [타워]에는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축소되어 나타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 중에서 사람들의 삶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정치와 노동, 사상이 이 소설에 나타나고 있는데...


권력의 위선, 노동자들의 힘든 삶, 윗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기계적으로 일하는 중간 관리자들의 모습, 시위와 시위를 진압하는 사람들, 다른 나라와의 전쟁 또는 갈등, 비정규직 문제 등등이 이 이 [타워]에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소설 [타워]는 우리 사회를 한 건물로 축소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읽으면서 우리 현실을 계속 반추하게 되는데, 꼭 우리나라만이 아니라도 이 지구를 축소해놓은 모습까지도 발견하게 되니, 특히 '서리아에 부합하는'이라는 소설이 그렇다.


지금까지도 종교로 인한 분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고, 종교가 아니더라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곳이 있으며, 비정규직들은 죽음조차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주해 가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도 만만치 않으니,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점을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럼에도 [타워]에는 사랑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사랑으로, 상대에 대한 인정, 존중으로 함께하고 있음을 이 소설집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데... 자살폭탄테러를 연상하게 하는 '샤리아에 부합하는'이라는 소설에서도 이 사랑은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작동을 한다.


마찬가지로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인간의 사랑이 서로를 결속시켜주고 결국 삶을 지속하게 해줄 수 있음을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에서도, '엘리베이터 기동연습'에서도 만나게 된다.


그렇다.'빈스토크'처럼 외부와 차단된 건물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서로가 서로에게 온기가 되어주고 있음을, 그것이 그들을 무너져버린 바벨탑이 아닌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임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이 빈스토크를 우리나라로, 또 지구로 확장을 하자. 확장을 한다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권력? 돈?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자신의 온기를 나누어주는 삶. 그런 자세들이다. 그것이 우리를 이곳에서 계속 살아가게 한다.


삭막할 것만 같았던 [타워]의 삶이 따스한 인간의 온기를 느끼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이다. 사랑은 별 것 아니다. 자신의 온기를 남에게 조금 나누어주는 것. 아니 자신의 온기와 다른 사람의 온기가 함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 온기를 나눌 줄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이 권력의 정점에 서는 사회는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이미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사회, 그것이 사랑이고 자비, 인(仁)이 아니겠는가.


SF소설이라는 이 [타워]를 통해, 아니 소설 속 '빈스토크' 사람들을 통해 이 온기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부록에 실린 '엘리베이터 기동연습'에 나오는 책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는, '카페 빈스토킹-[520층 연구] 서문 중에서'를 꼭 읽자.


온기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우리는 그런 장소를 갖고 있는지, 그런 장소의 상실이 우리를 온기 잃은 인간으로, 즉 삭막한 인간으로 만들어내고 있음을 명심하자. 이건 소설이지만 소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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