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주의
J. M. 버거 지음, 김태한 옮김 / 필로소픽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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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주의'를 간단하게 정의하면 그야말로 극단주의가 된다. 극단이라는 것은 복잡한 무엇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한두 가지만 남기고, 그것으로 자신이 하는 행동의 근거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남은 그 무엇으로 다른 것들을 배제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그 무엇을 공고하게 만드는 것들만 받아들이는 것. 아마도 과학기술이 첨단으로 갈수록 극단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릴지도 모른다.


다양한 의견이 자유롭게 쏟아지는 현대사회에서 극단주의라니? 스마트폰으로 어떤 것이든 실시간으로 만날 수 있는데 어떻게 극단주의가? 할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극단주의는 더욱 쉽게 다가올 수도 있다.


수많은 정보 중에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정보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정보를 알고리즘을 통해서 계속 보내주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찾지 않아도 내 정서에 맞는 정보가 계속 나를 찾아오고 있는 상태에서, 굳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정보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 내 신념은 더욱 굳어지고, 다른 신념은 잘못된 것으로 치부되게 된다. 이런 것들이 안정된 사회라면 걸러지고 토론이 되며 발현이 안 될 수도 있는데, 불확실성이 사회에 대두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신념을 강화하는 행위가 강해지게 된다. 남을 밀어내고 나를 강화하는 것들만 받아들이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극단으로 가게 된다. 즉 다른 복잡한 것들을 덜어내고, 자신에게 맞는 것만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극단주의로 가는 길이 된다.


하지만 극단주의를 간단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워낙 다양한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저자의 정의를 따르면 '내집단의 성공이나 생존이 외집단을 겨냥한 적대 행위의 요구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신념'(165쪽)이다.


즉 극단주의는 자신의 반대 편에 다른 집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집단이 자신의 집단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위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집단을 없애야 한다고 여기는 신념, 이것이 극단주의를 이루고 있는 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신념에는 불안정성, 불확실성이 존재하게 되는데... 자신의 현재,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극단주의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이렇게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 사회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극단주의에 빠지지 않았는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 사회는 지금 불확실성을 지니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안정적으로 예측할 수가 없다. 


또한 양극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 이미 극단주의라고 할 수 있는 집단이 등장했다고도 할 수 있다. 맹목적으로 자기 주장만을 하는,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확고하게 할 수 있는 것들만 증거로 모은다. 그리고 그 증거들로 자신들의 이론을 정교하게 한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나중 문제다. 음모론에 쉽게 빠진다고 저자가 주장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 역시 음모론이 나돌고 있지 않은가.


또한 이들은 다른 집단을 포용하지 않는다. 다른 집단을 포용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무조건 배척한다. 그들은 무조건 잘못되었다. 그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 우리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음모론을 분쇄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집단이 있다.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뒷받침하는 온갖 인터넷방송들이 있다. 


백가쟁명의 시대가 아니라,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들만 취사선택해서 들어도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남들 주장에 귀를 기울일 시간도 없다.


극단주의는 이럴 때 발호한다. 그리고 한번 나타난 극단주의는 사라지게 하기가 매우 힘들다. 극단주의가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가 안정되어야 한다.


미래가 예측가능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내 생각을 돌아볼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지녀야 한다. 남을 포용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를 지니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경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경제를 해결하는 것은 경제만으로 안 된다. 정치가 개입되어야 한다.


정치가 손을 놓으면 경제에서 예측이 힘들어지고, 그렇게 되면 불확실성에 빠져 극단주의가 들어올 틈이 생기게 된다. 이 극단주의가 한번 들어오면 너무도 거세게 들어와 틈은 더욱 갈라지고 집단과 집단에 벽이 생기게 된다. 그 다음은? 생각하기 싫다.


이 책은 이러한 극단주의를 정의하려고 한 책이다. 물론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극단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극단주의의 작동 방식을 안다면 대처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도 찾을 수 있겠지. 


그것은 우선적으로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누구나 다 알고 있겠다 여기고 말은 하지 않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극단주의라 할 수 있는 집단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 우리 사회와 연관지어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더 많은 생각을 해야하기는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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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창녀의 노래 - 송기원 소설선집 송기원의 시와 소설 3
송기원 지음, 진형준 해설 / 살림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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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송기원 작가의 부음을 들었다. 1947년 7월 1일에 태어나 2024년 7월 31일에 세상을 떠난 작가. 내 젊은 시절, 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인도에 갔다는 얘기도 들려오고, 그 다음의 작품들은 내게는 관심 밖이었는데...


그럼에도 젊은 시절에 읽었던 작가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작품을 하나쯤은 곁에 두고 싶었다. 그의 작품 역시 지금의 나를 만드는 한 요소였기에.


어떤 책을 살까 하다가 읽어본 기억이 없는 제목인 '늙은 창녀의 노래'를 선택했다. 사실 지금은 어떤 작품을 읽었고 어떤 작품을 읽지 않았는지 가물가물하고, 구분도 잘 되지 않지만, 이 작품은 아주 생소하게 다가왔으니 분명 읽지 않았으리라.


'월행'이나 '아름다운 얼굴'은 읽은 기억이 있는데, 내용은 잘 생각이 나지 않고, 그래서 읽기로 하고 구입한 소설집.


읽으면서 역시 송기원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읽었던 소설과는 다른 울림을 준다고나 할까. 특히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상처를 입은 인물들이 나온다. 그 상처를 어떻게든 떨쳐내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일. 결국 상처를 받아들이게 되는, 자신의 상처와 화해하는 과정이 드러난 소설들이 실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상처일까? 시대의 아픔으로 인한 상처도 있을 것이고, 가족사로 인한 상처도 있을 것이고, 그밖에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상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상처가 자신을 한 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부끄러움. 그것을 감추고 싶지만, 잘 안 될 때, 사람은 위악의 모습을 지니게 된다.


부끄러움을 감추는 것. 해설에서는 그것을 상처와 자기혐오라고 하는데, 혐오라는 말이 강한 부정의 뜻을 지니고 있다면 부끄러움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을 혐오하는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혐오는 결국 부끄러움이라고 해야 한다.


부끄러움을 감추려고만 하면 그것이 상처가 되고, 그러한 상처가 자기 혐오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때 나타나는 것은 위악이다. 위악으로 똘똘 뭉친 사람. 강하게 나가지만 한없이 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런 인물들이다. 위악적인 모습을 보이는, 그러나 상처로 인해 자신 속으로 꽁꽁 숨어버리려 하는 인물들.


이런 인물들이 결국은 자신의 상처를 대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소설이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 치열한 자기 극복의 과정이 소설에 잘 드러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상처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 '다시 월문리에서'이고, '사람의 향기'이며 이 소설집의 제목이 된 '늙은 창녀의 노래'다. 


끝까지 가 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심연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발견하는 것.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소설로 표현한 송기원.


어쩌면 이들의 삶은, 아니 '늙은 창녀의 노래'에 나오는 늙은 창녀의 삶은 진흙 속의 연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밑바닥 인생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작가. 그 작가가 바로 송기원이다.


말이 필요없다. 읽어보면 안다. 사람을 끝없이 끌어내리는 상처가 그 상처로 인해 다시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도 있음을. 정말 오랜만에 읽은 송기원 소설. 


끝이 끝이 아님을, 끝이 시작이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집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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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페스토 Manifesto - ChatGPT와의 협업으로 완성한 'SF 앤솔러지'
김달영 외 지음 / 네오북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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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지피티. 이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인공지능. 사람들은 거부하지 못하리라. 왜냐? 편리하니까. 그런데 이 편리함이 우리의 불편함을 없애준다는 장점을 넘어,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불편함을 참지 못한다는 말을 조금 바꾸면 길게 생각하기를 싫어한다는 뜻이 될 테니, 생각을 하지 않음은 그냥 빠르게 빠르게 주어진 대로 결정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주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편리함이 과연 우리를 좋은 쪽으로만 이끌어갈까?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모든 정보가 한 곳에 집중이 되고, 언제든지 돈만 내면 그런 정보를 받아보고, 그것도 내가 검색하지 않고 몇 명령어만 치면 컴퓨터가 검색해서 알려주는 시대에, 그 정보에 대한 판단을 어떻게 하지? 판단도 인공지능에 맡기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여기에 인공지능이 대부분 영어로 작동이 된다면? 지금도 사라지고 있는 언어들이 많은데, 몇 언어만 남고 나머지 언어들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챗지피티도 영어로 명령어를 칠 때 더 자연스럽게 더 많은 정보를 잘 정리해 주고 있다는데, 이 책에서도 작가들이 챗지피티와 소설 작업을 하면서 영어로 명령어를 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발전은 언어의 다양성도 파괴하는 것이 아닐까?


영어로 많은 자료가 집적되어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영어에 지지 않기 위해 한글로 된 자료도 많이 집적하자고 주장하기는 좀 그렇고... 참, 여러 생각이 드는 책이다. 아니 소설이다. 


이 소설에 인공지능이 많이 등장하고, 그것들이 지닌 한계와 성과가 은연 중에 드러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챗지피티를 이용해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새롭기는 하지만, 이렇게 쓰인 소설이 과연 감동을 주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아직은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수필을 읽는다는 느낌. 그냥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고만 있을 뿐, 소설이 주는 인물들 간의 갈등이나 반전 등은 그리 새롭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작가가 여러 번 수정을 하기도 했지만, 이 책의 기본 방침은 챗지피티가 쓴 내용을 작가가 완전히 바꾸지는 않는다였을 테니.


소설을 읽으면서 그냥 무난하다는,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긴장감 같은 것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는 아직 한글로 된 자료가 많이 집적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영어로 쓴 것을 다시 번역기를 통해 한글로 번역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나온 소설들이 다 집적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을 단순히 짜깁기한 것이 소설은 아닐테니...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아직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챗지피티가 더 많은 소설들을 집적해서 명령어만 입력하면 한 편의 소설이 나온다고 한다면 작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챗지피티에게 어떤 명령을 내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그것에 그치는가? 그러면 작가는 누구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원하는 방향인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챗지피티를 이용해 작업을 한다고 하는데, 이런 작업이 보편화되면 시간을 두고 생각하고 고치는 과정이 명령어를 입력하는 과정으로 대체되고, 그러한 명령어 입력이 나름대로 고심의 시간을 갖게는 하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하고 쓰고 고치는 과정을 거치는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짧은 시간일 것이다.


빠르고 짧은 시간에 완성품을 내놓는 것. 그런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게 될 수많은 일들을 압축해서 경험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감정이입을 하면서, 때로는 공감을 하면서 곱씹고 곱씹어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챗지피티와 협업을 통해 소설을 쓴다는 발상, 그러한 작업을 책으로 내었다는 데서 이 책은 의미가 있는데, 인간이 홀로 할 수 있는 일을 인공지능과 함께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삐딱한 생각도 한다.


정말,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이러한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우리가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가가 합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어뿐만이 아니라 인간적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정의가 바뀔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점에서 이 소설집이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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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의 해가 지나갔다. 용! 우리나라에서 왕을 상징하는 동물 아니던가. 같은 얼굴이라고 해도 왕의 얼굴은 용안이라고 했고, 왕이 입는 옷은 용포라고 했으니... 용은 그야말로 다른 사람들과 구별짓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용의 해 끄트머리. 왕이 되고 싶었던 한 사나이가 있었다. 지금 시대에 군주정 시대도 아닌데 왕이 되겠다고 하는 모습도 우습지만, 마치 이문열의 소설 [황제를 위하여]를 연상시키듯이, 예전에 손바닥에 당당하게 왕(王)자를 써서 보여주었던 그 사나이가 용의 해가 가지 전에 무엇이 아쉬웠는지, 정말 왕처럼 해보고 싶었는지... '짐은 국가다'. 무슨 절대 왕정 시대의 말과 행동도 아니고...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내 말을 안 듣는 집단은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집단이다라니... 자신이 국가라고 생각하는 용의 해가 가는 것을 너무도 아쉬워해서 왕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는지...


거의 모든 사람이 손에 개인 방송기기를 들고 있어서 빼도박도 못하는 증거가 그 자리에서 실시간으로 수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횡설수설 하고 있었는데...


그때 정신이 똑바로 박힌 국민들이 지금 시대에 무슨 왕? 하면서 민의를 대변한다는 국회로 몰려갔으니... 용의 해는 자칭 왕의 몰락으로 이어졌으니...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자의 최후가 어떠해야 할지를 분명히 보여줘야 하는데... [빅이슈] 이번 호에서도 놀란 가슴을 함께하는 행동으로 다스린 사람들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비록 그들이 국민들을 무시했지만, 국민들은 물과 같아서 자칭 왕이라는 배를 엎어버릴 수 있음을 다시 보여주었으니... 


이번 [빅이슈]에도 그러한 물의 역할을 하는 국민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어서 좋았다. 그렇다. 평소에 잔잔한 물줄기 역할을 하던 잡지가 [빅이슈] 아니었던가.


어려운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살 수 있도록, 그들이 숨쉴 수 있도록 장소를 마련해주고, 또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려고 노력하는 잡지 아니었던가.


이런 잡지가 자칭 왕 노릇을 하려는 자를 어떻게 가만히 놔둘 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용의 해가 가고 뱀의 해가 되었다. 푸른 뱀의 해라고 한다. 우리는 용꼬리가 되지 말고 뱀머리가 되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우리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뱀의 머리 역할을 하는 올해가 되었으면 좋겠고, [빅이슈] 역시 그러한 사람들이 뱀머리로 살아갈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좋은 의미에서 뱀머리다. 사악함을 뜻하는 뱀이 아니다. 또다시 지난 해 용처럼 사악한 뱀처럼 행동한다면 그 뱀머리는 싹뚝 잘라버려야 한다. 국민의 '힘'이 아니라 국민의 '짐'이 되는 뱀들은 뱀머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용꼬리다. 그것도 하늘을 날지 못하는 용의 꼬리... 이미 지나간 용꼬리에 들러붙은 존재들. 그것은 '짐'이다. 우리 국민들의 '짐'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힘, 힘!' 외치지만, 그것이 국민들에게는, 정말 푸른 뱀의 머리 역할을 하는 국민들에게는 그들은 이미 지닌 용꼬리에 불과하고, 그들의 '힘' 소리가 '짐' 소리로 들리고 마니...


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런 귀가 있다면 지금과 같은 소리를 내지도 않겠지만... 이들, 정말 추위 속에서도 따스함을 나누는 [빅이슈]를 한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을까? 아니, 읽지는 않더라도 사본 적은 있을까? 아니다. [빅이슈]라는 잡지의 존재를 하는 여당 국회의원이 몇 명이나 될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국민을 대변한다면서, 국민의 힘이 되겠다면서, 정작 힘을 주어야 할 존재들의 존재를 알지도 못한다면 그야말로 '힘'이 아니라 '짐'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자신들이 용꼬리에 불과함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런 용꼬리는 이제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는데...


이번 호를 읽으면서 용과 왕, 뱀을 생각한다. 우리는 상서로운 푸른 뱀의 머리가 되는 해로, 그렇게 한 해를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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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 오징어 - 독서의 탄생부터 난독증까지, 책 읽는 뇌에 관한 모든 것
매리언 울프 지음, 이희수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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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독서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책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프랑스 소설가인 프루스트와 바다 생물인 오징어가 묶여 있다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는 생각만 든다.


그러다 이 책 앞부분을 읽으면 왜 제목을 이렇게 붙였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둘 다 독서와 관련이 있음을... 


'나는 독서의 상이한 두 가지 측면을 묘사하기 위해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 마르셸 프루스트를 메타포로, 하등동물로 과소평가되어 있는 오징어를 유추적으로 사용한다. 프루스트는 독서를 일종의 지성의 '성역'으로 보았다. ... 1950년대 과학자들은 뉴런이 서로 어떻게 발화하고 전송하는지,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어떤 식으로 회복 및 재생되는지 이해하기 위해 소심하지만 정교한 오징어의 기다란 중앙 축삭돌기를 사용했다.' (33쪽)


이 문장에 제목을 이렇게 단 이유가 나와 있다. 하나는 독서는 우리 삶을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옮겨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하나는 독서를 어려워하는 사람의 뇌가 독서를 하기 위해 어떻게 다른 뇌를 발전시키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물론 저자는 독서는 유전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에게 독서 유전자는 없다고 한다. 그렇겠지. 유전자가 없다면 독서는 순전히 후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역할을 담당한 뇌가 있음은 명확하다.


언어와 관련된 뇌를 우리는 흔히 브로카, 베르니케 영역이라고 하니, 뇌에서 언어를 담당하는 뇌, 그리고 책을 읽을 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있음은 명확하다. 요즘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독서를 할 때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 알 수 있게 되었고, 책을 읽을 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단지 브로카, 베르니케 영역 뿐이 아니라 뇌의 전반적인 부분에 걸쳐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좌뇌 부위가 활성화되는데, 난독증에 걸린 사람은 우뇌도 활성화되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이는 좌뇌가 더 활성화되어 유창하게 독서를 하는 사람들에 비해 우뇌가 활성화된 사람들은 조금 느릴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이들의 이런 뇌 작용을 안다면 난독증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 뇌의 일부분이 다른 사람에 비해 적게 작동이 되더라도 뇌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다른 부위를 활성화한다는 것. 이것을 오징어에 비유했다고 보면, 제목에 오징어가 왜 들어갔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독서는 우리 인간을 한 차원 높게 만들어준다. 과거를 이어받아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할 수 있게 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고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해준다.


즉, 독서를 성역에 비유한 프루스트를 제목에 끌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음성언어에서 문자언어로 중심이 넘어갈 때 소크라테스가 했던 우려를 지금 다시 하고 있다. 우리는 다시 문자언어에서 인터넷언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매체로 삶의 중심이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음성언어에서 토론을 통해, 스승과의 대화를 통해 진리를 추구했던 시대에서 문자가 득세를 하면 이러한 토론이 없어지고, 깊은 사고와 토론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던 모습이 사라질 거라고 우려했던 소크라테스지만, 문자언어 역시 자신과의 대화, 또 책과의 대화를 통해 진리의 세계로 다가갈 수 있음을 인류의 역사가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문자언어 시대에서 인터넷 시대로 넘어가는 지금, 우리는 똑같은 우려를 한다. 사고의 깊이, 반대 의견에 대한 고려 등이 사라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알고리즘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만 계속 보게 만드는 시대... 확증편향이 강화되는 시대. 이러한 시대에 깊은 사고, 다양한 사고를 통한 진리추구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질문이 우려로 끝나게 하기 위해서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알고리즘을 수정해야 한다.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도록 다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만약 알고리즘에 빠져 있다면 다른 관점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한다. 헤엄치지 못하는 오징어가 다른 촉수를 이용하여 헤엄을 치는데, 알고리즘은 아예 다른 촉수를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자신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생각의 편협함. 고정된 사고의 변화 없음.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하는 자세.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독선, 독단. 여기에 빠지기 쉽다. 이것을 보충하는데 독서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독서는 빠르게 읽기도 하지만 대부분 인터넷에 비해서는 느리게 읽기 때문이다. 이 느림이 다른 생각들이 끼어들 여지를 마련해 준다. 그리고 책은 보통 자기 주장을 하기 위해서 반대 주장을 끌어들인다. 주장-반론-주장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적어도 다른 주장을 만날 수는 있다.


그리고 자신의 속도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중간중간 멈추고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인간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게 된다. 이것이 독서의 힘이다. 그러니 인터넷에만 빠져 있지 말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래, 책을 읽자. 적어도 누구처럼 편협하게 유튜브만 보고, 그것만이 옳은 것인 양 주장하고 행동하지 않도록. 특히 학교에서는 더더욱 독서 교육이 필요함을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게 된다. '전자'와 관련된 교과서, 수업도 좋지만, 학교란 무엇인가? 빠른 시대에 빠름을 제어할 수 있는 느림을 시도하고, 그 느림을 통해서 오히려 빠름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장소 아닌가. 그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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