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우어
천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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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 소설을 읽을 때 늘 기대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따스함. 따스함으로 인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모난 마음이 둥글어지면서, 다른 존재들에 대한 공감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천선란의 소설을 읽는 일은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일이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 속, 인물들의 삶을 통해 내 삶을 바라볼 수 있는데, 그것이 분노나 증오, 또는 몰이해가 아니라 사랑과 포용, 이해로 다가오면 소설을 읽는 일은 즐겁다. 결말이 비록 비극으로 끝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비극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 따스함이라는 씨앗을 남겼으니까. 그 씨앗이 언젠가는 싹이 틀 테니까.


여러 편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공통점은 역시 따스함이다. 이 따스함이 천선란 소설을 계속 읽게 만든다. 또한 이러한 따스함은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에게서도 이 따스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따스함은 다른 존재들에게로 퍼져나간다.


공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서로의 마음이 함께 울리는 상태. 그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뼈의 기록'이다. 


로봇이 등장하는데, 이 로봇이 하는 일이 장례지도사다. 세상에 사람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하는 로봇이라니... 반려 동물을 넘어서 반려 로봇이 나오는 세상이지만,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삶의 끝자락을 로봇에게 맡기다니...


로봇이 함께한다고 해서 사람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나? 오히려 로봇보다도 못한 인간들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로봇을 보면 인간 이외의 존재에게 편견을 지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례를 치르고 휴식 시간에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 청소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로봇. 그 사람과 마음이 통하는 로봇. 그 사람이 죽자 평소에 뜨거운 것을 싫어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주로 관을 보내려는 로봇. 규칙을 어긴 로봇을 폐기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그 로봇을 옹호하고 도와주는 사람들. 이것이 바로 공감이고 공명이다.


그렇다. 우리가 관계를 맺는 존재들을 어떠하다라는 인간의 관점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고정불변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 인간들이 변해가듯 다른 존재들도 변할 수 있음을. 그것이 비록 로봇일지라도.


이렇게 천선란의 소설에는 다른 존재들이 나오지만, 그 존재들을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는다. 공존하는 모습. 아니, 공존해야만 하는 모습을 천선란의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과도 공명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인간끼리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 공명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서프 비트'에서 만날 수 있다. 인간치고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태어난다.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영웅처럼,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여겨야 할까. 아니면 우리와 함께 살아가지만 다른 모습을 지닌 존재로 봐야 할까? 


영화 [X맨]을 보면 돌연변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간들의 다른 반응이 나온다. 또한 돌연변이들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나오고. 그 영화와 연결이 될 수도 있지만, 천선란의 소설은 그들을 영웅시 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능력을 아직 다 깨닫지 못한 인물을 내세워서 그렇겠지만,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냥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이들과의 공감, 공명이 바로 우리 삶을 더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서프 비트'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 이들은 그 다른 능력을 우리들의 삶에서 소소하다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해결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물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인물은 물 속 쓰레기를 치우는 일에, 밤에도 낮만큼 잘 보이는 눈을 지닌 인물은 길 잃은, 또는 위험에 처한 동물을 구해주는 등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내지 않고... 이러한 존재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는데...


그러니 우리 상대를 나와 다른 너로 선을 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겹치는 경계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어떤 존재들과도 겹치는 경계가 있음을, 그 경계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공감, 공명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음을 천선란의 이번 소설집 [모우어]를 통해 생각한다.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했다는 것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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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자연의 재발명 Philos Feminism 4
도나 J.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임옥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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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면 참 답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이 '인간'이라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인간들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인간'의 범주를 확정하기도 힘든데,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의 범주에 들지 못했던 존재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들이었다.


우선 여성은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종속된 존재였다. 과학 연구를 한다고 해도, 여성의 관점이 아닌 남성의 관점에서 연구가 된 경우가 많았고, 이는 '여성'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던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해러웨이의 이 책은 영장류를 연구하는 학문에서 여성이 어떻게 배제되어 있었는지, 그러한 연구에 여성들이 참여하면서 어떤 변화가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의 앞부분에 실린 내용이다.


과학은 객관적인 것 같지만 아니다. 과학은 투쟁의 장이다. 여러 논쟁들이 겹치는 장이 바로 과학이다. 따라서 과학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한다. 어떤 관점으로 연구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결과가 도출되기도 하니까.


여성도 남성과 더불어 '인간'이라는 관점이 자리잡게 되지만, 여기에 다시 '여성'의 범주에서 비켜간 존재들이 있다. 바로 '유색인' 여성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범주에도 '여성'의 범주에서도 소외되었다.


이제는 수많은 투쟁을 통해서 유색인 여성들도 '여성'의 범주에 들게 되었다. 그것을 부정하는 현대인은 없다. 그렇다면 유색인 여성도 이제는 '인간'의 범주에 들게 되었는데... 여기에 다시 '성소수자'들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 역시 '인간'의 범주에 들어야 하지만, 아직까지 거부당하는 경우도 있다.


'성소수자'들이 그렇다면 사이보그는 어떤가? 사이보그는 '인간'의 범주에 들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김초엽, 김원영이 함께 쓴 [사이보그다 되다]란 책을 생각하게도 되는데... '인간'의 범주를 확장하는 것이 바로 해러웨이의 작업이다. 그의 '사이보그 선언문'에 이런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여전히 개념이 확실히 잡히지는 않지만, 인간을 확장하는데 '사이보그' 역시 한몫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해러웨이의 책은 '인간'에 대해 질문하고, '인간'의 범주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 가능한,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계속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경계가 확정된 것이 아니라, 경계 속에서 유동하는, 끊임없이 그 경계가 바뀌고 있는 그런 상황. 그 상황에서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있다.


물론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페미니즘'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니,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인간'에 대해 지니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도록 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그동안 서구에서 연구되었던 결과들과 많은 문학작품들을 통해서 해러웨이는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이 책이 1991년에 나왔다고 하니, 지금은 이 논의에 더 많은 것을 덧붙여야겠지만, 그럼에도 방향은 의미가 있다. 


해러웨이의 글들이 결국은 '인간'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그 '인간'에 사람 형상을 하고 있는 존재만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광활한 우주로 우리의 시야를 넓히기도 해야 하지만, 우리 몸이라는 우주 속으로 더 깊게도 들어가야 함을... 이러한 과정이 모두 '인간'에 대한 이야기임을 해러웨이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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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말을 생각한다. '어느 쪽'이라는 말.


  이 말을 읽는 순간, 이청준의 '소문의 벽'을 떠올렸다. 나는 상대방을 볼 수 없는데, 상대는 나를 볼 수 있으면서, 나에게 넌 어느 쪽이냐고 물을 때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대답을 하는 쪽이 아니라면 죽을 수 있는 상황. 그런 극한의 상황. 그것은 바로 전쟁 때의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 쪽?'은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상대를 제거하기 위한 질문이다. 그렇다면 대답을 하지 않으면? 어느 쪽도 아니라고 하면 양 쪽에서 모두 핍박을 받을 수 있다. 세상에 중립만큼 힘든 것은 없다.


그런데 전쟁 때도 아닌데 "어느 쪽?"이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편 가르기를 통해 다른 편을 배제하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배제는 민주주의가 반하는 행동이다. 민주주의는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하는 사회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라고 묻더라도, 그래서 그런 생각을, 그런 행동을 하는구나, 

그렇지만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행동할 수도 있지 않나, 이것에 대해서 우리 이야기하자. 더 좋은 생각, 행동을 함께 만들어가자고 해야 그것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아닌가.


[빅이슈]란 잡지에 '어느 쪽'이라고 묻는 답에 편집자는 현명한 답을 하고 있다. 우문현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어느 쪽'이라는 질문은 '우문(愚問)'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이 질문에는 이미 배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배제가 포함되지 않고, 함께함이 포함된 '어느 쪽'은 좋은 질문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정작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지 않은 상태라고 할까. 편집자의 말을 인용한다. 현명한 답이다. 


'저는 추위 속에서 판매원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서 잡지를 구매해준 당신의 편입니다. 빅이슈가 어려우니 얼마 안 되지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먼저 연락을 해준 필자, 작은 도움이라도 판매원에게 주고 싶다고 빅돔을 자처한 배우의 편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밤중에 여의도에 달려가고, 주말마다 광장으로 달려나가고, 더위와 추위 때문에 열악한 쪽방에서 홈리스가 혼자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살피는 사람들의 편입니다. 우리가 다 함께 지금보다는 더 따뜻하고 밝은 쪽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사람들의 편입니다.' (8쪽)


빅이슈에게 어느 쪽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현명한 대답이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어느 쪽에 서야 하는지를 이보다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대답이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빅이슈는 이번 호에도 집에서 쉽게 나오지 못하는 청년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단체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고, 우리가 함께해야 할 자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며, 추운 겨울날을 보내야 하는 홈리스들에 대해서도, 다양한 문화들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


한 쪽으로 몰아가지 않고 우리의 따뜻한 시선이 필요한 곳을 두루두루 살피고 

있다. 이보다 더 '어느 쪽'인지를 잘 보여주는 잡지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따스한 시선이 무도한 행동을 막는 행동을 부르고, 그런 행동들이 다른 실천들을 불러 서로가 손에 손을 잡고 따뜻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쪽, 그런 편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이청준의 '소문의 벽'을 생각한다. 이제는 그런 질문을 멈춰야 한다. 아니 사람이 다 같을 수는 없기에 서로의 편이 있을 수는 있다. 그렇다면 질문에 내포된 의미를 바꿔야 한다. 자신이 편견에 빠져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게 하는 '어느 쪽'


다른 '어느 쪽'의 주장을, 나 또는 우리 행동을 참고하고 더 나은 쪽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질문으로... 상대를 배제하는 질문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하려는 질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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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진 2025-02-12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빅이슈 표지가 바뀐거죠? 연예인들의 기부로 만들어지는 잡지로 알고 있었거든요

kinye91 2025-02-12 13:06   좋아요 0 | URL
지금도 연예인들이 표지로 등장하는 호가 있어요. 연예인들의 기부도 있지만 호에 따라서 표지는 다양하게 편집되고 있어요.

구름모모 2025-02-12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2024 제7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장민 외 지음 / 허블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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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편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과학문학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과학적인 내용을 가미한 소설들이다. 영어로 SF소설이라고 해도 좋겠다. 최근에 이런 경향의 작품들이 많이 읽히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공상이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겠다고 생각하던 일들이 현실에서도 가능해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작품을 통해서 경험하게 해준다. 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작가가 만들어낸 세상은 그냥 허구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세상은 현실 속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 삶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니 이러한 소설들을 허무맹랑한 소설이라고만 생각하지 말자. 처음에 실린 작품 '우리의 손이 닿는 거리'를 보면, 인간이 우주를 개척하기 위해서 거대한 로봇을 만들어낸다. 이 로봇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중추신경계와 연결되어 인간의 몸을 확장한다.


즉 우리는 확장된 몸으로 우주에 나가게 된다. 무려 18미터 짜리 로봇(몸)이다. 18미터의 몸을 지니고 있으면 우리의 행동은 어떻게 될까? 거기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물론 진화를 생각하면 수천 년 또는 수만 년이 걸리겠지만, 그러한 유전적 진화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조건에 맞게 신체 활동을 조절하게 된다.


커다란 유기체가 된 인간. 그런 인간은 본래 인간의 몸과 같은 행동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그들이 로봇 옷을 벗었을 때 자꾸 부딪히게 된다. 그들의 감각은 로봇을 입었을 때의 감각과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치면 괜찮겠지만 시간이 달라진다. 


보통 인간의 몸으로 겪는 시간과 거대 로봇을 입고 행동하는 인간의 몸으로 겪는 시간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단위가 달라진다고 해야 하나. 이것이 문제가 된다. 인간의 욕망이 더 거대한 로봇을 원하게 되고, 인간의 시간은 점점 길어진다.


즉, 수명의 연장이 자연스레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축복일까? 재앙일까? 과연 이러한 거대 로봇과 인간의 신경이 연결될 필요가 있을까? 소설은 이 점에서 할 수 있으니까 한다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과연 인간은 할 수 있으면 다 해야 하는가? 그것이 거대 로봇을 계속 키워서 인간 신경망의 속도로를 늦추는 쪽으로 발전한 소설의 결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바람직한가? 우리는 할 수 있는 일과 가치의 균형을 생각해야 하지 않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두 번째 소설 '개인의 우주'를 읽으면 더 잘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 백 년이라고 잡아도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너무도 짧다. 그럼에도 인간은 저 먼 우주를 탐구하려 한다. 비록 자신이 결과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후대가 결과를 만날 수 있을 테니.


개인이라는 인간에서 인류라는 종으로 넘어가면 인간은 할 수 있는 일을 무한히 할 수 있다. 당장의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더욱더 '가치'의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다. '가치'를 윤리라고 해도 되리라. 첫번째 소설에서 계속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과학기술과 윤리 아니겠는가.


이런 균형이 깨질 때의 모습을 '하늘의 공백'에서 만나볼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집에 수록된 소설들이 일관된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현재의 과학기술을 반영하는 작품이라면 어느 정도는 공통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로봇이 주인공인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만 결말의 반전이 기가 막히다. 과연 그런 세상이 행복한 세상일까? 읽어봐야 반전의 묘미를 알 수 있으니, 더이상 언급은 하지 않겠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들이 어떻게 분류되고 억압받는지를 '피폭'이라는 소설에서 만날 수 있으니, 일종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소설인 '피폭'을 읽어보면 좋겠다.


마지막 작품인 '달은 차고 소는 비어간다'는 다중우주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인간이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물론 다중우주가 있다면, 거기에 개입하는 순간 우주가 달라질테니...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겠지만.


다섯 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할 수 있으니 해야 한다'는 신념을 고수해야 하는가? 할 수 있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해버려서 위기에 빠진 적은 없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좋은 생각거리가 된다. 다른 세상을 만나고, 그 세상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미리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을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소설은 준다. 이 작품집들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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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춘(立春)이 지났다. 이제 봄이 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겨울이다. 입춘 즈음에 입춘 추위가 찾아왔다. 강추위다. 온몸을 움츠리게 한다. 그러나 이 추위는 물러가리라.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테니.


  눈이 내렸다. 세상을 하얗게 하얗게 덮었다. 온갖 더러운 것들이 한때나마 눈 속으로 사라졌다. 눈 덮인 서울의 모습이 표지 사진이다.


  더러움이라고는 없는 세상 같다. 하지만 눈은 곧 녹으리라. 눈이 녹으면 추한 것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 추한 것들을 잠시 가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아예 없애야 한다.


  눈으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치워야 한다. 어떤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도록.


  비상계엄으로 인한 겨울이었다. 봄을 향해 가는 겨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봄을 시샘하듯이 그렇게 찾아온 겨울은 그러나 오래 가지 않으리라. 오래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삶창을 이번 호를 읽으면서 비상계엄으로 인해 당혹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음을. 그런 일은 엄벌에 처해 다시는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함을.


그런데 여전히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아직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수 없다고 버티고 있는 추위. 하지만 버티려야 버틸 수 없을 텐데. 봄은 이미 오고 있으니. 입춘이 지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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