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페스토 Manifesto - ChatGPT와의 협업으로 완성한 'SF 앤솔러지'
김달영 외 지음 / 네오북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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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지피티. 이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인공지능. 사람들은 거부하지 못하리라. 왜냐? 편리하니까. 그런데 이 편리함이 우리의 불편함을 없애준다는 장점을 넘어,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불편함을 참지 못한다는 말을 조금 바꾸면 길게 생각하기를 싫어한다는 뜻이 될 테니, 생각을 하지 않음은 그냥 빠르게 빠르게 주어진 대로 결정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주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편리함이 과연 우리를 좋은 쪽으로만 이끌어갈까?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모든 정보가 한 곳에 집중이 되고, 언제든지 돈만 내면 그런 정보를 받아보고, 그것도 내가 검색하지 않고 몇 명령어만 치면 컴퓨터가 검색해서 알려주는 시대에, 그 정보에 대한 판단을 어떻게 하지? 판단도 인공지능에 맡기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여기에 인공지능이 대부분 영어로 작동이 된다면? 지금도 사라지고 있는 언어들이 많은데, 몇 언어만 남고 나머지 언어들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챗지피티도 영어로 명령어를 칠 때 더 자연스럽게 더 많은 정보를 잘 정리해 주고 있다는데, 이 책에서도 작가들이 챗지피티와 소설 작업을 하면서 영어로 명령어를 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발전은 언어의 다양성도 파괴하는 것이 아닐까?


영어로 많은 자료가 집적되어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영어에 지지 않기 위해 한글로 된 자료도 많이 집적하자고 주장하기는 좀 그렇고... 참, 여러 생각이 드는 책이다. 아니 소설이다. 


이 소설에 인공지능이 많이 등장하고, 그것들이 지닌 한계와 성과가 은연 중에 드러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챗지피티를 이용해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새롭기는 하지만, 이렇게 쓰인 소설이 과연 감동을 주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다.


아직은 소설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수필을 읽는다는 느낌. 그냥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고만 있을 뿐, 소설이 주는 인물들 간의 갈등이나 반전 등은 그리 새롭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작가가 여러 번 수정을 하기도 했지만, 이 책의 기본 방침은 챗지피티가 쓴 내용을 작가가 완전히 바꾸지는 않는다였을 테니.


소설을 읽으면서 그냥 무난하다는,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긴장감 같은 것이 없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는 아직 한글로 된 자료가 많이 집적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영어로 쓴 것을 다시 번역기를 통해 한글로 번역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나온 소설들이 다 집적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을 단순히 짜깁기한 것이 소설은 아닐테니...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아직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챗지피티가 더 많은 소설들을 집적해서 명령어만 입력하면 한 편의 소설이 나온다고 한다면 작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챗지피티에게 어떤 명령을 내릴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그것에 그치는가? 그러면 작가는 누구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원하는 방향인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챗지피티를 이용해 작업을 한다고 하는데, 이런 작업이 보편화되면 시간을 두고 생각하고 고치는 과정이 명령어를 입력하는 과정으로 대체되고, 그러한 명령어 입력이 나름대로 고심의 시간을 갖게는 하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구상하고 쓰고 고치는 과정을 거치는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짧은 시간일 것이다.


빠르고 짧은 시간에 완성품을 내놓는 것. 그런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게 될 수많은 일들을 압축해서 경험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감정이입을 하면서, 때로는 공감을 하면서 곱씹고 곱씹어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챗지피티와 협업을 통해 소설을 쓴다는 발상, 그러한 작업을 책으로 내었다는 데서 이 책은 의미가 있는데, 인간이 홀로 할 수 있는 일을 인공지능과 함께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삐딱한 생각도 한다.


정말,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이러한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우리가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가가 합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어뿐만이 아니라 인간적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정의가 바뀔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점에서 이 소설집이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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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의 해가 지나갔다. 용! 우리나라에서 왕을 상징하는 동물 아니던가. 같은 얼굴이라고 해도 왕의 얼굴은 용안이라고 했고, 왕이 입는 옷은 용포라고 했으니... 용은 그야말로 다른 사람들과 구별짓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용의 해 끄트머리. 왕이 되고 싶었던 한 사나이가 있었다. 지금 시대에 군주정 시대도 아닌데 왕이 되겠다고 하는 모습도 우습지만, 마치 이문열의 소설 [황제를 위하여]를 연상시키듯이, 예전에 손바닥에 당당하게 왕(王)자를 써서 보여주었던 그 사나이가 용의 해가 가지 전에 무엇이 아쉬웠는지, 정말 왕처럼 해보고 싶었는지... '짐은 국가다'. 무슨 절대 왕정 시대의 말과 행동도 아니고...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내 말을 안 듣는 집단은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집단이다라니... 자신이 국가라고 생각하는 용의 해가 가는 것을 너무도 아쉬워해서 왕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는지...


거의 모든 사람이 손에 개인 방송기기를 들고 있어서 빼도박도 못하는 증거가 그 자리에서 실시간으로 수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횡설수설 하고 있었는데...


그때 정신이 똑바로 박힌 국민들이 지금 시대에 무슨 왕? 하면서 민의를 대변한다는 국회로 몰려갔으니... 용의 해는 자칭 왕의 몰락으로 이어졌으니...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자의 최후가 어떠해야 할지를 분명히 보여줘야 하는데... [빅이슈] 이번 호에서도 놀란 가슴을 함께하는 행동으로 다스린 사람들이 이야기가 나왔으니... 비록 그들이 국민들을 무시했지만, 국민들은 물과 같아서 자칭 왕이라는 배를 엎어버릴 수 있음을 다시 보여주었으니... 


이번 [빅이슈]에도 그러한 물의 역할을 하는 국민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어서 좋았다. 그렇다. 평소에 잔잔한 물줄기 역할을 하던 잡지가 [빅이슈] 아니었던가.


어려운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살 수 있도록, 그들이 숨쉴 수 있도록 장소를 마련해주고, 또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려고 노력하는 잡지 아니었던가.


이런 잡지가 자칭 왕 노릇을 하려는 자를 어떻게 가만히 놔둘 수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용의 해가 가고 뱀의 해가 되었다. 푸른 뱀의 해라고 한다. 우리는 용꼬리가 되지 말고 뱀머리가 되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우리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뱀의 머리 역할을 하는 올해가 되었으면 좋겠고, [빅이슈] 역시 그러한 사람들이 뱀머리로 살아갈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좋은 의미에서 뱀머리다. 사악함을 뜻하는 뱀이 아니다. 또다시 지난 해 용처럼 사악한 뱀처럼 행동한다면 그 뱀머리는 싹뚝 잘라버려야 한다. 국민의 '힘'이 아니라 국민의 '짐'이 되는 뱀들은 뱀머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용꼬리다. 그것도 하늘을 날지 못하는 용의 꼬리... 이미 지나간 용꼬리에 들러붙은 존재들. 그것은 '짐'이다. 우리 국민들의 '짐'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힘, 힘!' 외치지만, 그것이 국민들에게는, 정말 푸른 뱀의 머리 역할을 하는 국민들에게는 그들은 이미 지닌 용꼬리에 불과하고, 그들의 '힘' 소리가 '짐' 소리로 들리고 마니...


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런 귀가 있다면 지금과 같은 소리를 내지도 않겠지만... 이들, 정말 추위 속에서도 따스함을 나누는 [빅이슈]를 한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을까? 아니, 읽지는 않더라도 사본 적은 있을까? 아니다. [빅이슈]라는 잡지의 존재를 하는 여당 국회의원이 몇 명이나 될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국민을 대변한다면서, 국민의 힘이 되겠다면서, 정작 힘을 주어야 할 존재들의 존재를 알지도 못한다면 그야말로 '힘'이 아니라 '짐'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자신들이 용꼬리에 불과함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런 용꼬리는 이제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는데...


이번 호를 읽으면서 용과 왕, 뱀을 생각한다. 우리는 상서로운 푸른 뱀의 머리가 되는 해로, 그렇게 한 해를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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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 오징어 - 독서의 탄생부터 난독증까지, 책 읽는 뇌에 관한 모든 것
매리언 울프 지음, 이희수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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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독서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책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프랑스 소설가인 프루스트와 바다 생물인 오징어가 묶여 있다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는 생각만 든다.


그러다 이 책 앞부분을 읽으면 왜 제목을 이렇게 붙였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둘 다 독서와 관련이 있음을... 


'나는 독서의 상이한 두 가지 측면을 묘사하기 위해 프랑스의 유명한 소설가 마르셸 프루스트를 메타포로, 하등동물로 과소평가되어 있는 오징어를 유추적으로 사용한다. 프루스트는 독서를 일종의 지성의 '성역'으로 보았다. ... 1950년대 과학자들은 뉴런이 서로 어떻게 발화하고 전송하는지, 그리고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어떤 식으로 회복 및 재생되는지 이해하기 위해 소심하지만 정교한 오징어의 기다란 중앙 축삭돌기를 사용했다.' (33쪽)


이 문장에 제목을 이렇게 단 이유가 나와 있다. 하나는 독서는 우리 삶을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옮겨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하나는 독서를 어려워하는 사람의 뇌가 독서를 하기 위해 어떻게 다른 뇌를 발전시키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물론 저자는 독서는 유전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에게 독서 유전자는 없다고 한다. 그렇겠지. 유전자가 없다면 독서는 순전히 후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역할을 담당한 뇌가 있음은 명확하다.


언어와 관련된 뇌를 우리는 흔히 브로카, 베르니케 영역이라고 하니, 뇌에서 언어를 담당하는 뇌, 그리고 책을 읽을 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있음은 명확하다. 요즘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독서를 할 때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 알 수 있게 되었고, 책을 읽을 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단지 브로카, 베르니케 영역 뿐이 아니라 뇌의 전반적인 부분에 걸쳐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좌뇌 부위가 활성화되는데, 난독증에 걸린 사람은 우뇌도 활성화되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이는 좌뇌가 더 활성화되어 유창하게 독서를 하는 사람들에 비해 우뇌가 활성화된 사람들은 조금 느릴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이들의 이런 뇌 작용을 안다면 난독증을 치유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 뇌의 일부분이 다른 사람에 비해 적게 작동이 되더라도 뇌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다른 부위를 활성화한다는 것. 이것을 오징어에 비유했다고 보면, 제목에 오징어가 왜 들어갔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독서는 우리 인간을 한 차원 높게 만들어준다. 과거를 이어받아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할 수 있게 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고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준비를 하게 해준다.


즉, 독서를 성역에 비유한 프루스트를 제목에 끌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음성언어에서 문자언어로 중심이 넘어갈 때 소크라테스가 했던 우려를 지금 다시 하고 있다. 우리는 다시 문자언어에서 인터넷언어라고 할 수 있는 각종 매체로 삶의 중심이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음성언어에서 토론을 통해, 스승과의 대화를 통해 진리를 추구했던 시대에서 문자가 득세를 하면 이러한 토론이 없어지고, 깊은 사고와 토론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던 모습이 사라질 거라고 우려했던 소크라테스지만, 문자언어 역시 자신과의 대화, 또 책과의 대화를 통해 진리의 세계로 다가갈 수 있음을 인류의 역사가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문자언어 시대에서 인터넷 시대로 넘어가는 지금, 우리는 똑같은 우려를 한다. 사고의 깊이, 반대 의견에 대한 고려 등이 사라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알고리즘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만 계속 보게 만드는 시대... 확증편향이 강화되는 시대. 이러한 시대에 깊은 사고, 다양한 사고를 통한 진리추구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질문이 우려로 끝나게 하기 위해서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알고리즘을 수정해야 한다.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도록 다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만약 알고리즘에 빠져 있다면 다른 관점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한다. 헤엄치지 못하는 오징어가 다른 촉수를 이용하여 헤엄을 치는데, 알고리즘은 아예 다른 촉수를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 자신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생각의 편협함. 고정된 사고의 변화 없음.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하는 자세.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독선, 독단. 여기에 빠지기 쉽다. 이것을 보충하는데 독서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독서는 빠르게 읽기도 하지만 대부분 인터넷에 비해서는 느리게 읽기 때문이다. 이 느림이 다른 생각들이 끼어들 여지를 마련해 준다. 그리고 책은 보통 자기 주장을 하기 위해서 반대 주장을 끌어들인다. 주장-반론-주장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적어도 다른 주장을 만날 수는 있다.


그리고 자신의 속도로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중간중간 멈추고 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인간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게 된다. 이것이 독서의 힘이다. 그러니 인터넷에만 빠져 있지 말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래, 책을 읽자. 적어도 누구처럼 편협하게 유튜브만 보고, 그것만이 옳은 것인 양 주장하고 행동하지 않도록. 특히 학교에서는 더더욱 독서 교육이 필요함을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게 된다. '전자'와 관련된 교과서, 수업도 좋지만, 학교란 무엇인가? 빠른 시대에 빠름을 제어할 수 있는 느림을 시도하고, 그 느림을 통해서 오히려 빠름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장소 아닌가. 그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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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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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죽었다.' 


뜻하지 않게. 너무 일찍.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엄마와 갓 화해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느끼는 상실감을 말로 할 수 있을까?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듣자마자 미셸은 엄마에게 달려간다. 자신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그동안 엄마가 자신의 일생에 사사건건 간섭했다고, 엄마에게서 벗어나야 한다고, 반항도 하면서 엄마의 기대에 어긋난 행동도 하면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려 했던 미셸에게 엄마의 암은 충격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 엄마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의 차원에서 다가온다. 자신의 모든 것이 얼마나 엄마에게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엄마가 예전처럼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깨닫게 된다.


할 수 있는 일. 엄마 곁에 있는 일. 엄마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하는 일. 잊혔던 한국의 감성을 살리려 하지만 미셸은 미국인이지 한국인이 아니다. 아니, 사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셸은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니다. 


엄마와 이별하기 전 미셸은 미국인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힘들어했다.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이제는 한국인이 되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워지기 시작한다.


엄마의 상실 속에서 미셸은 자기만의 애도 시간을 갖는다. 충분한 애도 시간이 없으면 상실의 아픔을 견딜 수가 없다. 


먼저 미셸은 회피하려고 한다. 엄마의 상실에서 다른 일로 관심을 돌리려 아빠와 함께 베트남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베트남 여행이 치유를 해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상실의 아픔을 외면한다고 해서 마음 속에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이 미셸의 꿈 속에서 엄마가 항상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엄마를 잃는 꿈으로 나타난다. 미셸은 상심 속에서 지내며 심리치료를 받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치유가 되지 않는다. 상실의 아픔은 충분한 애도를 통해서 치유될 수밖에 없다.


하여 미셸은 엄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고 엄마와 관련 있는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우리 식으로 하면 유튜브를 보면서 음식 만들기를 따라하는 것. 잣죽부터 김치까지... 그러면서 차츰 미셸은 자신이 치유되어감을 느끼게 된다.


엄마 상실의 아픔을 담은 곡들을 쓰고 앨범을 내기도 하는데, 이 앨범이 나중에 유명해져서 미셸을 한국에서 공연까지 하게 한다.


이렇게 미셸은 자신의 인생에서 거의 전부였던 (엄마의 말에 따르면 항상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 말고 10%정도는 남겨두어야 한다고 했다고 하니, 엄마 역시 미셸에게 10%정도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를 잃고 엄마와의 일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인생을 찾아간다.


극심한 상실의 고통, 그러나 그 고통을 이겨나가면서 자신의 세계를 갖춰가는 미셸의 모습이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무엇보다도 엄마와 딸이 겪는 갈등과 이해,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깨달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읽으면서 마음에 커다란 울림이 생기는데, 상실의 아픔을 회피가 아니라 직접 대면하면서, 공통의 경험을 다시 체험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가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게 된다.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미셸이 엄마의 죽음 이전의 미셸이었다면, 이제는 한국인으로도 미국인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미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엄마에 대한 충분한 애도. 그런 애도의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기에 이런 경험은 우리 모두가 한번은 겪어야 하기에, 미셸을 통해서 미리 경험한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감동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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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향모를 땋으며 - 토착민의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 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니콜 나이트하르트 그림, 이채현 옮김, 모니크 그레이 스미스 각색 / 북스토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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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을 생각한다. 학교 교육이 자연과 얼마나 가까운가? 아니,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학교 교육은 자연에서 얼마나 멀어졌는가?


자연은 격리가 아니라 함께함이다. 함께하면서 주고받는 관계, 그것이 자연이다. 또한 자연은 다 다름이다. 달라야 한다. 똑같은 것들이 모여 있으면 지속하기 힘들다. 그래서 자연은 서로 다른 종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룬다. 하나라고 하지만 하나가 아닌 여럿이 모여 있는 하나, 그것이 자연이다.


그렇담 학교는 어떤가? 자연에서 떨어져 있다. 학교는 격리되어 있다. 담장과 교문으로. 특히 우리나라는 학부모들의 민원으로 인해 이제는 '학교방문예약제'도 실시하고 있다. 교육의 3주체를 학생-학부모-교사라고 하면서(이에 대해서는 많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주체가 학교에 들어오려면 특정한 절차를 밟게 만들고 있다. 자신들의 주장과도 어울리지 않는 제도이지만, 이런 제도로 인해 학교는 더더욱 격리되어 있다.


또다른 주체인 학생과 교사를 보자. 이들 역시 학교라는 공간에 들어오면 정해진 시간이 되지 않으면 나갈 수가 없다. 나가려면 특정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자유롭게 왔다갔다 할 수 없는 공간이 바로 학교다. 세상에 어떤 자연에 이런 경계, 격리가 있단 말인가.


더 심하게는 학교 안에서도 격리가 이루어진다. 구획이 있어서 서로 단절되어 있다. 교실과 교실, 특별실과 특별실, 또 교무실도 교무실 별로 격리되어 있다. 격리가 일상인 공간이 바로 학교다. 여기에 자연과의 격리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학교는 자연과 동떨어진 학교다.


말로는 자연에서 배우라고 하면서, 자연 속에서 지내야 한다고 하면서 자연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지닌 학교에서 정반대로 교육하고 있는 곳이 학교인데... 다름이 어디 있는가? 판에 박은 듯 같은 모습의 학생들을 양산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곳이 학교 아닌가.


창의성, 개성 운운하지만 사실은 공통성을 기반으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 창의성과 개성 아닌가. 아직도 교복을 입히고 온갖 규칙을 적용하고 있는 곳이 학교니까.


왜 학교가 생각났을까? 바로 이 책이 학교이기 대문이다. 토착민의 지혜가 담긴 교과서이자 그 지혜를 배우고 실천할 수 있게 하는 학교.


아메리카 대륙의 토착민인 저자가 사라진 토착민의 지혜를 찾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찾으며 지금 현대인들의 생활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생활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향모'를 매개로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과 하나되어 사는 삶. 그것은 결코 빈곤한 삶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풍요로운 삶이다. 우리는 풍요를 추구하지만 풍요를 추구하는 소비 속에서 오히려 더 빈곤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선물이 아니라 상품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상품으로 받아들이면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서로 주고받는 호혜성이 사라지고 일방적인 개발로 인해 파괴만이 남는 현실, 그런 현실을 벗어나는 방법은 토착민의 지혜에서 찾아야 한다고.


이것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비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의 생활이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음을 저자는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냥 미신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공생의 과학임을.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풍요라는 말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우리가 풍요를 다르게 받아들어야 한다. 넘치는 것이 풍요가 아니다. 필요에 맞게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풍요다. 이런 풍요는 자연과 동떨어져서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할 때 이룰 수 있다.


  저자가 말해주는 '섬기는 수확'을 보자. 지금은 남기기 위해서 즉 이윤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잉여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결국 부족을 초래할 수밖에 없음을, 수많은 개발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음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섬기는 수확'은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섬기는 수확에는 상품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개념이 우선한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결정하고, 사고가 행동을 유발한다면, 선물이라는 말과 상품이라는 말은 엄청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수확'을 얻음이라고 한다면 현대인들 중 누가 '섬긴다'는 말을 하겠는가.


  하지만 섬긴다는 말을 하면 그때 얻는 것은 상품이 아니다. 선물이다.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고, 또 감사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갚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받은 만큼 갚는다는 행위. 이미 생명 자체가 다른 생명 또 다른 존재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말이니, 그 빚을 갚으려고 노력해야 우리 생명이 가치 있게 된다는 생각. 그것이 전통 토착민의 지혜라고 한다면, 그런 지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지구라는 곳에서 우리 모두는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함께 삶이 이 책에 다양한 식물들,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물론 죽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생명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그 점을 명심하고 생명을 취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이 해야 할 행동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학교에서 교재로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부터, 아니 교사들부터 이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할 수 있는 방안을 토론했으면 좋겠다. 인공지능 교과서가 아니라 획일적인 교과서가 아니라, 자연과 격리된 학교가 아니라 이렇게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이런 책을 교과서로, 함께, 학교 밖으로도 나가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그런 학교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그런 학교에서 이런 책으로 교육을 받는다면 지금처럼 감수성이 메마른 존재들이 사회의 윗층을 차지하고 있어도 그들의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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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1-12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학교는 집이 모인 마을에 세웁니다.
오늘날 ˝집이 모인 마을˝은 하나같이 도시입니다.
오늘날 도시는 ˝들숲바다를 삽질로 밀어서 세운 잿더미˝입니다.
그러니 학교교육에 ‘숲‘이 없을 만합니다.

이미 ‘학교‘에 앞서 ‘집‘과 ‘마을‘부터 숲하고 한참 멀기에
˝감수성 메마른 아이어른˝이 가득하니,
이런 모습을 그대로 둔 채
학교교육만 바꿀 수 없다고 느낍니다.

kinye91 2025-01-12 08:37   좋아요 0 | URL
저도 숲노래 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지금 집들은 자연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자연과 담을 쌓고 있지요. 아파트들은 물론이고, 단독주택이라고 하는 곳도 자신의 집에 자연을 흉내내고 있을 뿐, 자연과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직 집과 마을이 자연과 이어져 함께 어우러지는 장소도 있기는 하지만, 도시는 자연과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감수성 메마른 아이어른들˝이 가득하겠지요. 우리의 이러한 삶을 다시 생각할 때, 학교교육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