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라닌 -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하승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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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자신이 뭘 가졌는지 몰라." (264쪽)


소설 속 인물인 재일이 다른 아이들에게 한 말이다. 이 말이 나올 때까지, 자신이 뭘 가졌는지 모르는 아이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냥 자신들은 농담으로 또는 아무런 생각 없이, 또는 남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했겠지.


자신들의 말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상처를 주는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렇게 자신이 가진 것을 알 필요가 없는 사람은 자신을 살필 기회를 갖지 않는다. 


하지만 없는 사람은?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을 의식한다. 자신이 뭘 가졌는지 모르는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말이나 행동이 이런 사람에게는 상처로 다가오게 된다.


재일이도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자신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불행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니.. 어디를 가도 자신은 눈에 띌 수밖에 없으니...


파란색 피부를 갖고 태어난 아이. 그 자체로도 놀림감이 되기 쉽다. 어린 시절에 철 모르는 아이들은 분명 스머프니 슈렉이니 하면서 놀렸으리라. 이런 놀림이 자라면서 차별로 변해간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고. 


같은 행동을 해도 다르게 해석되기도 하면서 이 아이에 대한 편견은 점점 더 쌓여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이 쌓여갈수록 이 아이에게는 자신감, 자존감은 점점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주변의 편견과 자존감은 반비례한다. 그러니 소설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 말이 깊은 울림을 줄 수밖에 없다.


'내 피부는 파랗고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다. 어느 쪽이 더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7쪽)


우선 엄마가 베트남 사람이라는 것이 왜 문제인가를 살피면, 베트남에 살고 있는 베트남 국적의 사람이면 상관이 없다. 그런데 이 말이 차별적인 말이 될 때 그것은 베트남 사람이 이주해서 다른 나라로 갔을 때다. 그것도 같은 동남아시아 나라가 아닌,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나라에 갔을 때.


가령 한국같은 나라에 왔을 때 베트남 사람이라는 말은 차별을 받을 요소로 작동한다. 그러면 안 되는데.. 국적을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바꿔도 베트남 사람이라는 것은 바뀌기 않는다. 그런 인식이 죽 이어진다.


그런데 엄마가 베트남 사람인데 피부색이 파랗다. 과연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국에서 살기 힘들다고 아빠는 미국으로 이민을 결심한다. 이민을 가면, 다민족 다인종 (요즘은 인종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국가인 미국이 한국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가족이 다 같이 가기로 했지만 여기서도 차별이 작동한다. 엄마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엄마는 처음에 자리잡은 한국에 있고 싶어한다. 아니면 자신의 엄마가 있는 베트남에 사는 것도. 그러나 아빠는 엄마의 의견은 고려하지 않는다. 결국 엄마와 동생은 베트남으로 가고, 아빠와만 미국에 온 재일.


이곳에서도 파란 피부는 차별의 요소로 작동한다. 거기에 아시아 사람이라는 것이 더해지고... 무엇에 무엇이 더해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 차별을 받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일을 겪으면 그것을 이겨내기 쉽지 않다.


무력하게 지내는 재일이에게 힘이 되어주는 친구들이 생긴다. 같은 피부색을 지닌 클로이, 차별을 반대하는 셸마와 함께 잘 지내지만, 곧 어려운 일이 닥치고, 이민온 재일이 가족에게도 힘든 일이 생긴다.


우여곡절을 보낸 재일이가 결국은 베트남으로 가면서 소설은 끝나게 되는데...


이 소설에 나온 이런 편견, 차별이 지금 사라졌을까? 아니다. 여전히 이러한 차별은 공고하게 남아 있다. 재일이가 앞으로도 계속 몸부림치면서 이런 차별을 겪고, 차별을 이겨내려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이 대사, 명심해야 한다.


'사실 차별은 곳곳에 놓인 지뢰밭 같은 거야. 딱 한 번의 폭발에도 우린 불구가 된다고.'(185쪽)


그렇다. 이렇게 지뢰를 설치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뢰를 놓았다는 사실도 모른다. 마치 재일이가 너희들은 자신이 뭘 가졌는지 몰라라고 한 것처럼.


읽으면서 답답하기도 했다. 그 답답함은 재일이의 무력함과 연결이 되기도 했는데, 재일이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무슨 재일이가 슈렉같은 괴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이민온 아이아계 피부가 파란 힘없는 아이일 뿐인데... 그런 재일이게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그가 고꾸라지지 않았을 뿐. 그렇게 그나마 버티었던 재일이가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사람으로 성장했음을 알게 되는데...


그 성장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았겠지만... 지금도 여전히 재일이와 같이 차별받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래서 그들이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손을 내밀어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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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홀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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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에 대해서는 이름은 들어봤다. 그냥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라고. 우주에 블랙홀들이 있고, 이 블랙홀들이 다른 별들도 빨아들인다고. 그렇다면 블랙홀에 들어가면 종말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블랙홀이 수많은 별들을 빨아들인다면 그 크기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 아닌가 하는 생각. 하지만 블랙홀이 있다면 화이트홀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블랙홀로 들어가 화이트홀로 나온다라는 상상만 했을 뿐이다.


진짜 화이트홀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화이트홀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고 봐야 하는데...


과학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다. 과학 중에서도 천문학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방대한 우주 또는 광활한 우주라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별을 보면 마음이 좋아지듯이 천문학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하고 있는데...


이 책은 화이트홀에 대한 책이다. 그런데 화이트홀에 대한 책이지만 블랙홀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블랙홀과 화이트홀, 내 상상에서는 입구와 출구라고 방향이 정해진, 서로 다른 곳을 향하는 존재였는데, 이 책을 읽어보면 방향은 반대이지만 블랙홀의 입구가 화이트홀의 출구가 되니, 두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진행이 되는 방향이 달라지는.


이 책에 의하면 블랙홀과 화이트홀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화이트홀일 때는 화이트홀이고, 블랙홀일 때는 블랙홀이어야 한다. 방향은 두 방향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은 불가역적이다. 이 방향 저 방향이 될 수 없다.


또한 특정한 크기 이상으로 작아질 수 없고, 또 커질 수도 없다. 블랙홀의 크기보다 화이트홀의 크기가 작다. 블랙홀에서 화이트홀이 되는 순간 열로 에너지가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주에는 블랙홀도 있지만 화이트홀도 있다. 적어도 이 책에 의하면 그렇다. 그리고 이런 블랙홀과 화이트홀 내부를 우리는 볼 수 없다. 우리는 지평선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 지평선을 가지고 블랙홀과 화이트홀 모두를 안다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우주에는 우리가 모르는 물질들이 있는데, 이를 지금은 암흑 물질이라고 하는데, 저자는 이 암흑 물질이 어쩌면 화이트홀이지 않을까 하는 가정을 하고 있다.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데... 그렇다면 우주의 빅뱅은 블랙홀에서 화이트홀로 바뀌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데...


'암흑 물질의 일부는 어쩌면 수십억 개의 작고 섬세한 화이트홀로 이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블랙홀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잠자리들처럼 우주를 가볍게 떠다닐 화이트홀 말입니다.' (181쪽)


전문적인 용어보다는 쉽게, 문학적으로 논지를 풀어가고 있어서,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과학책을 이렇게 문학적으로 써도 되나 싶을 정도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데, 구체적인 수학 공식같은 것을 배제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읽어도 여전히 블랙홀과 화이트홀의 존재를 알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주라는 미지의 세계를 맛보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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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추워지고 있다. 최근 서울역에 간 적이 있었다. 서울역 지하보도에 노숙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많이 추울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들에게는 여전히 자신의 집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더 쓸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자신이 머물 주거공간이 없다는 것. 인간이 생활하는데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의, 식, 주' 중에 벌써 하나가 없다는 것은 생활의 결핍이다. 그런데 집이 없다는 것에서 그칠까?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레 앞의 두 가지도 따라다닌다.


  먹을거리를 장만하기 힘들다. 무료 급식소를 찾아가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음식을 찾아먹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주거 문제는 곧 식생활 문화와 연결이 된다.


집이 없고, 먹을거리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옷은 어떤가? 옷 역시 그들에게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 된다. 옷도, 음식도, 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느 곳에서는 옷과 음식이 버려지고, 집을 수십 채 보유한 사람도 있다. 


사회적 양극화를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을 보면 체감할 수 있다. 몇 호 전부터 빅이슈에 옷을 나누는 캠페인 광고가 실리기 시작했다. 쓸모 있는 옷이지만 자신에게는 필요가 없는 옷을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자는 운동.


이런 운동으로 '의식주' 중에서 의를 어느 정도는 해결하려 하고 있다. 환경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고. 여러모로 바람직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호 [빅이슈]에서 다룬 흑백요리사,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이들의 음식 대결이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또 다양한 음식을 알 수 있는 기회도 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삐딱한 생각도 해본다. 이렇게 좋은 음식을 과연 노숙인들은 맛볼 수 있을까? 이런 화려한 요리 경연대회에 가려져 그런 음식에 대해 알아도 맛볼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떨까?


물론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소설을 보면, 또 [빵과 장미]를 보면 없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음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그런 기회를 줄 수 있다면...


그래서 이번 호에서 '흑백요리사'를 다룬 것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데, 이런 요리를 어떻게 하면 없는 사람들에게도 향유할 기회를 줄 수 있을까 하는 글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터무니 없는 상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흑백요리사들에게 무료급식소에서 그들이 경연에서 선보였던 음식을 돌아가면서 요리해 제공하는 봉사를 하게 하는 방법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방송에는 내보내면 안 되고, 조용히 자신들의 요리를 한번도 맛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맛볼 기회를 제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날이 추워지니 이런 엉뚱한 상상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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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SF게임 - 건너편의 세계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무튼 시리즈 69
김초엽 지음 / 위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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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나라에서 내가 관심 갖고 있는 작가는 김초엽과 천선란이다. 조금 다른 결의 소설을 쓰는 작가로는 한정현이고... 물론 다른 작가들에게도 관심이 있지만, 최근에 이들의 작품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천선란은 자신의 성장과 디지몬을 연결지어서 [아무튼, 디지몬]을 썼고, 김초엽은 SF게임과 관련지어 [아무튼, SF게임]을 썼다. 둘다 자신의 성장과 관련이 있는 대상을 골랐는데, 디지몬이 애니메이션이라면, SF게임은 그러한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분야에 속한다. 그럼에도 현실과 다른 세상을 만나게 해준다는 공통점은 있다.


SF게임이라고 했지만 그냥 게임이라고 해도 된다. 게임은 현실과 다른 세상에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를 현실에서 잠시 떼어놓고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 그 속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이 게임이다. 게임의 종류가 워낙 많아서 몇몇 종류로 딱딱 나눌 수는 없지만, 그 중에 SF게임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김초엽이 SF작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작가에 SF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는 없다.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이미 현실과는 다른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을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세상과 다른 세상, 내가 살지 못하는 삶을 다른 인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소설 속 세상이니, SF작가라고 해도 되겠지만, 그냥 작가라고 해도 된다. 많은 소설 중에 그러한 분야의 소설을 쓸 뿐이니...


그렇다면 SF게임은 무언가. 역시 다른 세계 속에서 활동한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에는 내가 개입할 수 없지만 게임에서는 내가 개입할 수 있다. 물론 게임 속 인물이 '나'는 아니지만, '나'를 대리한다. 그래서 '나'는 게임 속의 인물을 통해 다른 삶을 살아간다. 다른 행위를 한다.


그 행위를 통해서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다른 게임을 찾아 계속 나아가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래서 '게임 중독'이라는 말을 하고, 게임을 금지해야 한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게임은 스포츠가 되었다. 세계 대회도 있고, 게임을 전문적으로 하는 게이머들도 있는 세상이니.


또한 게임을 통해서 삶의 방향을 찾기도 한다. 그냥 게임 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소수다. 다수의 사람들은 소설이나 다른 책을 읽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듯이, 게임을 통해서도 무언가를 느끼고 배우게 된다.


김초엽 역시 그랬다. 성장하면서 게임 속에 빠졌던 자신의 시간이 결코 낭비가 아니었음을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지금도 게임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꼭 게임을 끝까지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끝을 봐야만 게임을 다 하는 것은 아니니... 이제 김초엽은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한다. 물론 선정적이고 지나치게 폭력적인 게임 (사회적 통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아동 성폭행 게임 같은 것. 그런 게임이 출시될 리가 없다는 사회적 합의는 있다고 보니)도 있기는 하지만, 그 게임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냥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다, 그러니 해서는 안 된다, 또 중독이 되어 다른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만두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사회적, 윤리적, 철학적 함의를 찾고 그것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요즘 게임을 분석하는 책도 나오고 있다고 하니, 게임을 하나의 사회 현상으로 분석하고 논의하고 함께하려는 모습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김초엽은 게임에서는 패자부활전이 있음을, 즉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그러한 점이 우리 인생에서도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을 담고 있다.


게임을 통해서 한번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가 아니라 다시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또다른 기회임을 생각할 수 있다면 게임은 삶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게임에 자신을 완전히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게임도 바깥에서 바라보는 자세를 지녀야 하겠지만.


즉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처럼 언젠가는 책 속에서 빠져나와야 하듯이, 게임 역시 빠져나와 바깥에서 볼 수 있는 관점, 그러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양한 게임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작가 김초엽의 생각, 삶이 함께 녹아 있어서 재미 있게도, 또 여러가지를 생각하면서 읽은 책이다. 


이 '아무튼' 시리즈를 빌려와 말하고자 한다. 아무튼 우리는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관점을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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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남북은 긴장 상태다. 정말로 유전이라는 것을 느낄 정도로, 서로를 적으로 여기고 있다.


  한때 긴장이 풀리기도 했었는데, 서로 교류도 됐었는데, 남한에서 개성으로 출근하기도 했고, 금강산에 수학여행을 가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때 만들어 놓았던 길도 다 파괴되어 버렸다고 하고, 남 나라 전쟁에 군대를 보낸다, 무기를 보낸다 하고 있으니...


  언제 이 긴장이 폭발할지,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데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런 긴장 폭발은 상상도 하지 않았는데, 이젠 불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니...


  한 민족이라고 하지 않나. 통역 없이 대화를 할 수 있지 않나. 남북은. 그러니 다시 대화를 해야 한다.


만남 만큼 긴장을 푸는 데 좋은 것은 없다. 자주 만나야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는 일을 막을 수가 있다. 


자주 만나야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고, 다른 점보다는 비슷한 점을 더 많이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래야 긴장보다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평화롭게 지내면 우리 마음 속 서정성이 회복된다. 서정성의 회복. 이것은 우리 마음을 평화롭게 하기도 한다.


북한은 사회주의 문학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사람의 마음을 노래하는 시들이 없을 수가 없다.


이 시집은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북한에서 발표된 시들 중에서 서정성을 드러낸 시들을 엮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서정성이 없을 수가 없으니, 북한의 문학에서도 짙은 서정을 노래한 시들이 있고, 이 시집을 통해서 그러한 정서를 만날 수가 있다.


무엇보다 번역 없이 시를 만날 수 있으니, 시의 의미가 곡해될 일이 별로 없다. (물론 낱말이 다르게 쓰이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이것이 대화를, 또 시를 이해하는데 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이 시를 보자. 어디에서 누가 발표했는지 가리고 보면 남북 어느 시인이 썼는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서정은 남북 모두에 공통된다.


   사람이 나이들면서

                        - 송명근


사람은 나이들면서

자주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보게 된다

이마의 주름들속에 묻힌

회억(회상, 회고)의 갈피를 펼쳐

아마도 남은 나이라도 서둘러

잃은 것 봉창하려는(보상하다) 몸부림 아니라

한창나이 젊은 시절

피끓어 일 많이 하던 시절

자주 뒤돌아보며 채찍질했더라면

한생에 얼마나 더 멀리 왔으랴

때늦은 후회는 지나간 밤의 꿈과 같다지만

때맞춤한 자책은 인생의 지름길 안내자라네


김철학 엮음, 북한의 대표적 서정시. 한빛. 1996년.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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