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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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죽었다.' 


뜻하지 않게. 너무 일찍.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엄마와 갓 화해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느끼는 상실감을 말로 할 수 있을까? 엄마가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듣자마자 미셸은 엄마에게 달려간다. 자신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그동안 엄마가 자신의 일생에 사사건건 간섭했다고, 엄마에게서 벗어나야 한다고, 반항도 하면서 엄마의 기대에 어긋난 행동도 하면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려 했던 미셸에게 엄마의 암은 충격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 엄마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의 차원에서 다가온다. 자신의 모든 것이 얼마나 엄마에게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엄마가 예전처럼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깨닫게 된다.


할 수 있는 일. 엄마 곁에 있는 일. 엄마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하는 일. 잊혔던 한국의 감성을 살리려 하지만 미셸은 미국인이지 한국인이 아니다. 아니, 사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셸은 미국인도 한국인도 아니다. 


엄마와 이별하기 전 미셸은 미국인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힘들어했다.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이제는 한국인이 되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워지기 시작한다.


엄마의 상실 속에서 미셸은 자기만의 애도 시간을 갖는다. 충분한 애도 시간이 없으면 상실의 아픔을 견딜 수가 없다. 


먼저 미셸은 회피하려고 한다. 엄마의 상실에서 다른 일로 관심을 돌리려 아빠와 함께 베트남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베트남 여행이 치유를 해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상실의 아픔을 외면한다고 해서 마음 속에 아픔이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이 미셸의 꿈 속에서 엄마가 항상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엄마를 잃는 꿈으로 나타난다. 미셸은 상심 속에서 지내며 심리치료를 받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치유가 되지 않는다. 상실의 아픔은 충분한 애도를 통해서 치유될 수밖에 없다.


하여 미셸은 엄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고 엄마와 관련 있는 음식을 만들기 시작한다. 우리 식으로 하면 유튜브를 보면서 음식 만들기를 따라하는 것. 잣죽부터 김치까지... 그러면서 차츰 미셸은 자신이 치유되어감을 느끼게 된다.


엄마 상실의 아픔을 담은 곡들을 쓰고 앨범을 내기도 하는데, 이 앨범이 나중에 유명해져서 미셸을 한국에서 공연까지 하게 한다.


이렇게 미셸은 자신의 인생에서 거의 전부였던 (엄마의 말에 따르면 항상 상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지 말고 10%정도는 남겨두어야 한다고 했다고 하니, 엄마 역시 미셸에게 10%정도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엄마를 잃고 엄마와의 일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인생을 찾아간다.


극심한 상실의 고통, 그러나 그 고통을 이겨나가면서 자신의 세계를 갖춰가는 미셸의 모습이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무엇보다도 엄마와 딸이 겪는 갈등과 이해,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깨달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읽으면서 마음에 커다란 울림이 생기는데, 상실의 아픔을 회피가 아니라 직접 대면하면서, 공통의 경험을 다시 체험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가는 모습에서 감동을 받게 된다.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미셸이 엄마의 죽음 이전의 미셸이었다면, 이제는 한국인으로도 미국인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미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엄마에 대한 충분한 애도. 그런 애도의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기에 이런 경험은 우리 모두가 한번은 겪어야 하기에, 미셸을 통해서 미리 경험한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감동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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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향모를 땋으며 - 토착민의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 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니콜 나이트하르트 그림, 이채현 옮김, 모니크 그레이 스미스 각색 / 북스토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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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을 생각한다. 학교 교육이 자연과 얼마나 가까운가? 아니,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학교 교육은 자연에서 얼마나 멀어졌는가?


자연은 격리가 아니라 함께함이다. 함께하면서 주고받는 관계, 그것이 자연이다. 또한 자연은 다 다름이다. 달라야 한다. 똑같은 것들이 모여 있으면 지속하기 힘들다. 그래서 자연은 서로 다른 종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룬다. 하나라고 하지만 하나가 아닌 여럿이 모여 있는 하나, 그것이 자연이다.


그렇담 학교는 어떤가? 자연에서 떨어져 있다. 학교는 격리되어 있다. 담장과 교문으로. 특히 우리나라는 학부모들의 민원으로 인해 이제는 '학교방문예약제'도 실시하고 있다. 교육의 3주체를 학생-학부모-교사라고 하면서(이에 대해서는 많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주체가 학교에 들어오려면 특정한 절차를 밟게 만들고 있다. 자신들의 주장과도 어울리지 않는 제도이지만, 이런 제도로 인해 학교는 더더욱 격리되어 있다.


또다른 주체인 학생과 교사를 보자. 이들 역시 학교라는 공간에 들어오면 정해진 시간이 되지 않으면 나갈 수가 없다. 나가려면 특정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자유롭게 왔다갔다 할 수 없는 공간이 바로 학교다. 세상에 어떤 자연에 이런 경계, 격리가 있단 말인가.


더 심하게는 학교 안에서도 격리가 이루어진다. 구획이 있어서 서로 단절되어 있다. 교실과 교실, 특별실과 특별실, 또 교무실도 교무실 별로 격리되어 있다. 격리가 일상인 공간이 바로 학교다. 여기에 자연과의 격리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학교는 자연과 동떨어진 학교다.


말로는 자연에서 배우라고 하면서, 자연 속에서 지내야 한다고 하면서 자연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지닌 학교에서 정반대로 교육하고 있는 곳이 학교인데... 다름이 어디 있는가? 판에 박은 듯 같은 모습의 학생들을 양산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곳이 학교 아닌가.


창의성, 개성 운운하지만 사실은 공통성을 기반으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 창의성과 개성 아닌가. 아직도 교복을 입히고 온갖 규칙을 적용하고 있는 곳이 학교니까.


왜 학교가 생각났을까? 바로 이 책이 학교이기 대문이다. 토착민의 지혜가 담긴 교과서이자 그 지혜를 배우고 실천할 수 있게 하는 학교.


아메리카 대륙의 토착민인 저자가 사라진 토착민의 지혜를 찾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찾으며 지금 현대인들의 생활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생활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향모'를 매개로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과 하나되어 사는 삶. 그것은 결코 빈곤한 삶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풍요로운 삶이다. 우리는 풍요를 추구하지만 풍요를 추구하는 소비 속에서 오히려 더 빈곤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선물이 아니라 상품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상품으로 받아들이면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서로 주고받는 호혜성이 사라지고 일방적인 개발로 인해 파괴만이 남는 현실, 그런 현실을 벗어나는 방법은 토착민의 지혜에서 찾아야 한다고.


이것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비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의 생활이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음을 저자는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냥 미신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공생의 과학임을.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풍요라는 말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우리가 풍요를 다르게 받아들어야 한다. 넘치는 것이 풍요가 아니다. 필요에 맞게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풍요다. 이런 풍요는 자연과 동떨어져서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할 때 이룰 수 있다.


  저자가 말해주는 '섬기는 수확'을 보자. 지금은 남기기 위해서 즉 이윤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잉여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결국 부족을 초래할 수밖에 없음을, 수많은 개발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음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섬기는 수확'은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섬기는 수확에는 상품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개념이 우선한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결정하고, 사고가 행동을 유발한다면, 선물이라는 말과 상품이라는 말은 엄청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수확'을 얻음이라고 한다면 현대인들 중 누가 '섬긴다'는 말을 하겠는가.


  하지만 섬긴다는 말을 하면 그때 얻는 것은 상품이 아니다. 선물이다.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고, 또 감사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갚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받은 만큼 갚는다는 행위. 이미 생명 자체가 다른 생명 또 다른 존재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말이니, 그 빚을 갚으려고 노력해야 우리 생명이 가치 있게 된다는 생각. 그것이 전통 토착민의 지혜라고 한다면, 그런 지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지구라는 곳에서 우리 모두는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함께 삶이 이 책에 다양한 식물들,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물론 죽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생명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그 점을 명심하고 생명을 취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이 해야 할 행동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학교에서 교재로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부터, 아니 교사들부터 이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할 수 있는 방안을 토론했으면 좋겠다. 인공지능 교과서가 아니라 획일적인 교과서가 아니라, 자연과 격리된 학교가 아니라 이렇게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이런 책을 교과서로, 함께, 학교 밖으로도 나가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그런 학교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그런 학교에서 이런 책으로 교육을 받는다면 지금처럼 감수성이 메마른 존재들이 사회의 윗층을 차지하고 있어도 그들의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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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1-12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학교는 집이 모인 마을에 세웁니다.
오늘날 ˝집이 모인 마을˝은 하나같이 도시입니다.
오늘날 도시는 ˝들숲바다를 삽질로 밀어서 세운 잿더미˝입니다.
그러니 학교교육에 ‘숲‘이 없을 만합니다.

이미 ‘학교‘에 앞서 ‘집‘과 ‘마을‘부터 숲하고 한참 멀기에
˝감수성 메마른 아이어른˝이 가득하니,
이런 모습을 그대로 둔 채
학교교육만 바꿀 수 없다고 느낍니다.

kinye91 2025-01-12 08:37   좋아요 0 | URL
저도 숲노래 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지금 집들은 자연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자연과 담을 쌓고 있지요. 아파트들은 물론이고, 단독주택이라고 하는 곳도 자신의 집에 자연을 흉내내고 있을 뿐, 자연과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직 집과 마을이 자연과 이어져 함께 어우러지는 장소도 있기는 하지만, 도시는 자연과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감수성 메마른 아이어른들˝이 가득하겠지요. 우리의 이러한 삶을 다시 생각할 때, 학교교육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식물 없는 세계에서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김주영 지음 / 우리학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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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기후 위기가 기후 재앙으로 넘어가고 있다. 해마다 겪게 되는 기후 재앙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지만, 여기에 대한 대응책은 서류에 그치고 말 뿐이다. 그나마 서로 합의된 사항도 정작 지켜야 할 나라들이 지키지 않고 있는 현실이고.


처음에는 발전이 덜 된 나라에서 피해가 더 심해지겠지. 그리고 이것이 점점 퍼져나가겠지. 그렇게 되면 지구에 인간을 위한 환경이 파괴되고, 인간은 자신들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 되겠지. 하긴 누군가는 화성으로 이주하면 된다고 하고 또 어떤 누군가는 바다에 자신의 피난처를 만들면 된다고 하니...


같은 재앙이라도 어떤 처지에 있느냐에 따라 반응이 다를 수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지금처럼 지속되는 성장 우선주의, 특히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사회는 극복할 수 없는 재난으로 다가올 것이다. 지구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럼에도 지구는 살아남겠지. 이 지구라는 별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니까. (아, 신이 인간을 위해서 지구를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통하지 않겠지만) 


자, 우리 인간을 지구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존재들 중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식물이다. 식물이 없으면 인간은 방독면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영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라. 방독면을 쓰고, 나무들이 독을 뿜어대는 그런 환경을.... 이것 역시 인간이 초래한 결과다. 그렇지만 이렇게 인간이 초래한 결과를 바꾸려 하는 존재 역시 인간이다.


이 소설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식물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죽였다고 자책하는 이언이라는 아이로부터.


환경이 파괴되고, 땅에서는 식물이 자라지 못한다. 온실 속에서 또는 수경 재배로 식물이 근근이 자랄 뿐이다. 이런 세계에서 식물을 자라게 하는 일은 사람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학교에서도 그런 교육을 하고 있고.


이런 재난 상황에서도 갈등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놓고도 의견이 갈라지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약탈로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도 있다.


소설은 이런 환경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어떻게 해야 식물 없는 세계에서 식물 있는 세계로 갈 것인가? 다시 땅에서 식물이 자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대립하던 것처럼 보이는 집단들이 실제적으로는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식물이 자라게 하려는 공동의 목표를 지니고 있고, 그런 목표를 실천하는 방법을 꼭 하나로 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으로, 함께 협력하는 것으로 소설은 전개되고 있는데...


이런 과정 속에서 식물을 잘 키우지 못하던 주인공을 중심으로 식물을 잘 키우는 능력을 지닌 두 인물과 이들을 가르치고 보살피는 두 할머니가 등장한다.


각자가 자신들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식물을 자라게 하려고 노력하는 사이, 약탈자들의 위협이 다가오고, 결국 약탈자들의 침입을 받은 그 공동체는 자신들의 수확물을 모두 빼앗기고 만다. 엄청난 재난 상황이다.


재난 상황에서 좌절하고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더 나아갈 것인가? 소설은 약탈자들의 침입에 대비한 두 집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의 방식이 다르지만 재난 상황을 헤쳐나가는 데는 둘 다 도움이 됨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재난 상황에서 협동하는 모습을 통해 재난 민주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의 잘못을 탓하고 네 탓이요, 네 탓이요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현명하게 해결할까를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재난 민주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다. 희망의 싹이 돋아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나고 있는데... 소설 속 재난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면 소설 속 상황이 현실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되겠지만.


앞이 예측될 때 준비를 해야 한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그 준비가 무엇일까? 우리 역시 식물을 심고 있지 않은가. 지구는 푸른 별이니 물의 푸름만이 아니라 식물의 푸름도 지구의 푸름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희망을 주는 소설. 특히 청소년이 주인공이 되어 그들이 살아갈 사회를 이끌어가려는 모습... 그렇게 이 소설은 희망을, 우리들에게 푸른 씨앗을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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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4년 겨울호 - 통권 188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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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侍民)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우리가 시민하면 떠올리는 그 시민(市民)이 아니라, 백성을 섬긴다는, 백성을 사람으로 바꿀 수 있으니 사람을 섬긴다는 그 말. 동학에서 쓰는 시민(侍民). 


동학에서 쓰는 시천주(侍天主)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이 아니다) 천주를 모신다는 말. 그런데 천주가 꼭 하느님이어야 하는가? 아니다. 하느님은 바로 곁에 있는 우리들이다. 사람들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다. 땅도 하늘도, 물도, 풀도, 동물도 모두 하느님이 된다.


그러니 시천주라는 말은 결국 시민이라는 말과 통하고 시민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섬긴다는 말과 통한다고 보면 된다.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고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다는 말, 결국 사람이나 동물들 또는 다른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하늘이 하늘을 먹는 삶이 곧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또다른 하늘을 내 속으로 받아들이는 일, 언제가는 나도 그들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면 어떤 생명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모두가 하늘이므로.


이런 정신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먹을거리가 남아돌아 어디서는 버리고, 어디서는 없어서 굶주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중한 생명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강제로 자신의 의지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남 역시 나일 테니까. 다른 존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경시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생명을 중시하는 삶, 그런 삶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평화로운 세상을 향해 가는 일, 그것이 바로 시천주고, 시민(侍民)이다. 이런 시민(侍民)의 자세를 지니고 있다면 자신의 권력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일을 할 수가 없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도한 짓을 하는 존재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다. 그는 시민(侍民)과는 반대에 있는 존재이므로, 하늘을 해치는 자이므로, 그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시민(侍民)을 하는 자세다. 의무다. 책임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무도한 자와 그를 비호하는 자들. 시민(侍民)이 뭔지 생각도 하지 않는 자들. 평화를 깨뜨리는 자들. 도무지 다른 존재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자들. 저들만 옳다고 생각하는 자들. 


이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무도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길은 시민(侍民)의 마음을 우리 마음속에 새기는 것이다. 시민(侍民)의 마음이 깃들었다면 이제 행동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시민(市民)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 시민(市民)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존재가 바로 시민(侍民)이므로.


예전 동학 혁명에서 그러했듯이. 그런 행동이 폭력으로 나타나는가? 아니다. 시민(侍民)은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기 때문에 평화로운 행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 평화가 권위를 지녀 무도한 자들이 어쩔 수 없게, 어찌할 수 없어 따를 수밖에, 그렇게 따르다 보면 어느 순간 회심의 순간이 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시위 현장이 돌이 날아다니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이 아니라 색색의 응원봉들이 펼쳐지고 있는 평화로운 현장. 이런 평화로운 시위야말로 시민(侍民)의 정신이다. 우리는 이미 시민(侍民)의 정신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니 평화로 무도함을 대체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평화가 지속되게 하기 위해서는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람만 갈아치우는 것이 아니라 제도로 정착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런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민(侍民)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공론장을 형성하고, 그것이 안착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시민(侍民)의 정신은 지금 지구가 처해 있는 기후 위기도 극복할 수 있게 할 것이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정치적 위기도 이겨내게 할 것이다.


[녹색평론] 188호를 읽으면서 이 시민(侍民)이라는 말이,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시민(市民)과 겹쳐졌다. 그렇다. 시민(市民)은 결국 시민(侍民)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侍民)들이 우리 사회를

평화롭게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는 '물'에 관한 글이나 '농업'에 관한 글, 그리고 영화 또는 영화 감독에 대한 이야기도 시민(侍民)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한다. 자연을 거스리는 물 관리법은 시민(侍民)이 아니다. 성장을 위한, 자본을 위한 농업 역시 시민(侍民)이 아니다. 단지 시간을 보내거나 또는 폭력이 난무하는 그런 영화 역시 시민(侍民)이 아니다. 


우리 삶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 문학, 예술이 시민(侍民)이고 자연의 흐름을 살리는 물 관리가 시민(侍民)이며, 성장이 아닌 모두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농업이 바로 시민(侍民)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


이름만 지방자치가 아니라 실질적인 지방자치가 되도록 해야 한다. 지역에 맞는 정책이 실행되어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또 지역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존재들을 고려하는 정책이 실시되어야 진정한 지방자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자치는 바로 시민(侍民)의 실현이 될 것이다.


[녹색평론] 188호에는 이런 점을 생각하게 하는 글들이 많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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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동규 시인의 시집을 읽다. 노년의 냄새가 풀풀 나는 시집이다. 이제는 죽음에 더 가까이 간 시인의 시들.


  그래서 이 시집에는 '맨땅'이라고 낮은 곳이 나오는가 하면 자신의 삶이 '조그만 포구'가 되었다고 읊조리는 시들이 있다.


  나이듦. 늙음.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시. 읽다가 이 시를 보면서 그래, 어쩌면 이것이 늙음이 삶을 지탱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창 때를 지나 이젠 꺾인 때. 그럼에도 자신이 꺾이기 전의 모습대로 살아가겠다고 아등바등 대는 것이 아니라, 꺾인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꺾인 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태도. 그런 삶.


그것은 죽음이 삶을 지탱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늙음이 젊음을 지탱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그러한 삶의 모습들. 젊음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하겠지만, 아니다. 늙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젊음이 젊음이다.


말이 필요없다.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면서 늙음이 삶을 지탱하는 모습을 생각해 본다.


  허리 꺾이고도


장맛비 갠 오후 짧은 산책 나갔다가

길가의 풀꽃 하나에 마음 빼앗긴 적이 있었다.

안과에 계속 다녀도 눈이 편치 않아

마음이 어디에고 자리 잡기 힘들어할 때

마을버스 종점 지나 서달산 가는 길에

뜻하지 않게 만난 씀바귀.

공사판에서 날라온 흙 조각에 맞았나

꽃대 가운데가 꺾이고도

땅으로 떨어지는 금빛 얼굴을 쳐들고 있었어.

흠집 하나가 얼굴 가운데 씨앗처럼 붙어 있었지.

자세히 보니 조그만 풍뎅이,

손 내밀어 날려버릴까 하다 그냥 놔뒀어.

그래, 벌 나비는 아니더라도

산 것에게 황금빛 쉴 자리 하나 마련해주는 게

허리 꺾이고도 얼굴 쳐든

한 꽃의 완성이 아니겠나.


황동규,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사. 2020년 초판 3쇄.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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