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은 너무 더웠다. 폭염 일수뿐만이 아니라 열대야 일수에서도 다른 해를 넘어섰다.


  단지 폭염과 열대야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더위였다. 추석이 지났어도 더위는 한풀 꺾이지 않았으니...


  처서부터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모기도 기승을 부릴 때가 지났는데, 여전히 덥고, 모기도 많다. 이제야 조금 수그러들었다.


  기후가 변해도 너무 변했는데, 이러다가는 매해 올해가 가장 시원했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나 하는 두려움도 있다.


더이상 남 일이 아닌, 기후 변화, 기후 재앙이다. 폭염이나 열대야가 심해지면 더욱 고통받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더위, 생명을 유지하기 힘든 더위일수도 있다. 이럴 때 이들을 지키는 것이 무엇일까?


경제? 아니다. 정치다. 정치는 그래서 중요하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아닌가.


민주주의가 정착한 나라에서는 가난하다고 해서, 없다고 해서 더위나 추위에 목숨 걱정하는 일은 없다. 아예 그런 환경을 만들지 않는다. 그런 환경을 만들지 않고, 서로가 함께 살아가고자 실시하는 정치가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거꾸로 적용해보면 가난때문에 기후 변화로 인해 목숨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는 공동체라는 기반이 해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민주주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기후 재앙을 해결하는 것도 '정치'이고, 기후 재앙으로 인해 생명에 위협을 받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도 '정치'이며,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는 것도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초고령사회가 되어 노인문제가 불거짐에도 걱정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정치'고, 후쿠시마 오염수를 비롯한 핵발전 문제도 '정치'고 점점 고사되어 가고 있는 농촌 문제를 살리는 것도 '정치'다. 그러니 [녹색평론] 이번 호에 실린 글들은 모두 '정치'와 관련이 되어 있다. 


하긴 사람이 살아가면서 '정치'와 관련되지 않은 일이 어디 있을까마는... '정치'라고 하면 '민주주의'를 떠올린다. 민주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니, 이는 우리가 동의하고 있는 정치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가 제대로 작동해야지만 기후, 전쟁, 초고령 사회 등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과연 그런가? 어떤 형태의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하는가? 지금처럼 '대의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녹색평론]의 답은 '아니다'다.


'대의'는 대신한다는 의미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주인이 된다는,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의미지, 자신의 권력을 남에게 양도한다는, 그래서 양도받은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여 이번 호에서 다시 '시민의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숙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또는 쉽게 말해서 '추첨'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제도에 대해서 말이다.


일명 '제비뽑기'라고 하는데, 무작위로 뽑힌 사람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다양한 의견을 들은 다음, 서로 토론을 통해 논의를 좁혀가고 의견을 최종 결정하는 과정을 거치자는 것. 시간이 걸리고, 논쟁이 길어질 수도 있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결정을 하고 집행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기후' 문제에 대해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결정이 나올 수 없고,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전쟁을 찬성하는 결정이 나올 수 없다. 마찬가지로 노인이나 농촌 문제를 어느 지역, 어느 세대의 이익을 위하는 쪽으로 의견을 정해질 수도 없다.


그러니 '시민의회' 또는 '숙의, 추첨 민주주의'를 도입, 시행해야 한다고 한다. '정치'가 바로 서야 다른 문제들에 바른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다. 


어떤 정치여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도 숙의가 필요하겠지... 그런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녹색평론]이고.


이번 호를 읽으면서 농촌, 또 초고령사회라는 문제에 대해서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늘봄 학교'라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저녁 7시 정도까지 머무르게 하는 정책이 실시 중인데, 이것보다는 오히려 부모들이 일찍 퇴근할 수 있게 노동시간을 조정하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과 비슷하게, 농산어촌에 폐교들이 많은데, 이 폐교들을 마을 사람들이 언제든지 와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


농산어촌에 주로 노인들이 많이 사는데, 폐교를 그냥 방치하지 말고, 여기에 진료소를 마련하고, 또 각종 시설을 만들면, 가령 운동장에는 텃밭, 기술실에는 목공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는 재료들, 가사실에는 요리를 할 수 있는 재료들, 도서실에는 책을, 또 빈 교실에는 각종 놀이 기구들을 갖추고, 간단한 카페나 음식점을 만들어 여기에 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고용해 늘 그곳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게 하면, 언제든 노인이든 아이들이든 청년들이든 학교에 들러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한다면, 노인들이 갇혀 지내는 삶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아이들은 노인들과 함께 지내니 돌봄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고, 청년들도 할 일이 있으니 농산어촌에 머무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여기에 간호법이든 의료법이든 바꿔서 간단한 진료 및 처방은 학교 진료소에서 할 수 있게 한다면 더 좋지 않을까. 의약분업이 되기 전에 가벼운 질환은 약국에서 진단받고 처방을 받았듯이, 학교 진료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한다면 일차 진료는 마을에서 해결할 수 있고, 또 마을 돌봄(노인과 아이들)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대도시 집중을 막고, 농산어촌도 살리고, 초고령사회에서 발생하는 노인 문제, 돌봄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고, 의료 문제도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 물론 가야할 길이 너무도 멀지만...


농산어촌에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사회-문화-경제 기반 환경도 마련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지만, 적어도 폐교가 된 학교를 마을의 생활-문화 중심지로 만들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모아 정책을 마련하는 '정치', 그런 정치를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아닐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르시시즘의 고통 - 우리는 왜 경쟁적인 사회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가
이졸데 카림 지음, 신동화 옮김 / 민음사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르시즘을 자아 도취로 보지 않고, 자기 이상을 향한 추구로 본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나르시스트가 된다. 자기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므로.


하지만 자기 이상이 무엇일지, 자기 이상의 옳고 그름은 어떻게 판단할지가 문제가 된다. 자기 이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준거가 외부에서 온다면, 그 외부에서 오는 준거는 무엇일까?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이 한방에 해결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외부에서 오는 준거는 없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틀은 자신의 내부에서 와야 한다. 자신의 내부에서 온 틀을 가지고 자기 이상을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 이상은 보편적일까? 사람이 저마다 개성이 있지만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이상이 있을 수 있는가? 있다면 그것을 보편성이라고 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고, 추구하는 이상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하여 보편성을 제외하고 개별성에 적용되는 특수성을 이야기한다면, 그런 특수성들은 다른 특수성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다. 이 특수성들을 인식하게 되면 나라는 존재 외부에 있는 외적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그런 외적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이상을 정하게 된다.


어렵다. 나는 나로만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의 이상은 나의 이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이상이기에. 그러므로 나르시스트라고 해도 남을 배제할 수 없다.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볼 수는 없다.


즉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이 자신이 외적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설정한 또다른 자신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상을 실현하기는 쉽지 않다. 하여 나르시즘을 실현하는 사다리로 저자는 '성공과 공동체'를 든다.


'성공'은 자기 이상을 실현했음을 의미하겠지. 그런데 자기 이상이 나만의 것이 아니니까, 이 성공이라는 말에는 남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 남이 끼어든다면 이는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나의 준거와 남의 준거가 함께 맞물려 있기 때문에...


여기에 공동체를 이야기하면 사람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나르시스트조차도 홀로가 아닌 남과의 관계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공동체적 이상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자발적 복종이라고 해도 좋고, 동일시라고 해도 좋겠다.


이러한 공동체 속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이해한다면 나르시즘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가령 우리 사회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 사회에서 주요 화두로 작동하는 가치가 '공정'이다. 공정을 자신의 이상으로 삼으면 공정을 실현하려 한다. 그런데 이 공정에는 남을 배제할 수가 없다. 공정은 나만의 행위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공정에는 공동체가, 남이 반드시 함께 해야 한다.


자, 내가 공정이라는 이상을 실현하려 하지만 공정이라는 이상은 내가 한 발짝 다가가면 또 반 발짝 멀어진다. 나는 공정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아가지만, 공정은 거리는 좁혀지지만 닿지는 않게 된다. 


하지만 공정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것이 자기 이상이고, 나르시스트는 결코 자신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정을 향한 무한한 내디딤. 하지만 결코 공정에 도달하지 못함. 그러한 공정이라는 가치에 자신을 복종시킨다. 자발적 복종이 된다. 나르시스트는 자발적 복종을 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책임을 완수해야 하므로.


우리가 이러한 '공정'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기 이상을 삼았지만, 그 이상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있다. 그런 외적 모습에 혹해 진실을 살피지 않고 그의 '공정' 실현이 우리의 '공정 실현'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시간이 지난 뒤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자기 이상을 실현하려 하지만 한번 틀어진 길, 다시 나아가기가 더 힘들다. 지금이 그런 상황 아닐까.


이 책은 우리 내면의 이상을 '나르시즘'이라는 이름으로 고찰하고 있다. 그것이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준거라는 것을. 우리는 그것을 추구하고 실현하려고 하고 있음을. 또 그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이것이 잘못되면 자발적 복종으로 나아갈 수도 있음을. 그것을 조심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알아야 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모든 것
도브 왁스만 지음, 장정문 옮김 / 소우주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AI가 곧 다가올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AI에 전쟁을 맡기는 시대는 아니겠지만, 그와 비슷한 드론이나 미사일을 이용한 공격은 비일비재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왜 AI시대를 추구하는가?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아닌가? 서로가 협력하면서 더 큰 꿈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자, 이 지구, 태양계를 벗어나 광활한 우주로 나아가고자 AI를 개발하고 그런 시대를 앞당기려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지구라는 좁은 행성에서 한정된 자원을 나눠먹기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도 우주로 보면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데, 지구에서도 중동의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서는 여전히 분쟁(전쟁이라고 할 수도 없다. 무력에서 크게 차이가 나 일방적인 공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이 일어나고 있다.


세상에 AI시대에 소아마비 백신을 접종하지 못해 소아마비에 걸리는 아이들이 생기게 된다는 가자지구. 그런 의약품조차 반입이 되지 않도록 막고 있는 이스라엘 정권.


오랜 갈등이다. 인간의 역사로 보면 얼마 되지 않은 근대에 들어와서 발생한 갈등이지만, 여전히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힘의 균형이 맞춰지지 않아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현실은 여전하다. (물론 팔레스타인의 테러로 이스라엘도 피해를 입긴 하지만, 그 규모는 비교할 필요가 없다. 인명 피해에 대해서 규모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지만)


이런 분쟁이 어떻게 발생했고, 어떤 과정을 거쳤으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살펴본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간략간략하게 제목을 달고 그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저자의 의견을 정리하고 있다. 가령 결론을 보면 이렇다. '두 국가 해법, 가능한가?'라고 제목을 달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팔레스타인은 지금의 이스라엘을 유대국가로 인정하고,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그리고 동예루살렘 지역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많이 논의되어 왔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왜냐하면 팔레스타인도 통일이 되어 있지 않으며, 늘 안보를 우선시하는 이스라엘이 적대국이 될지도 모르는 국가를 바로 곁에 두고 싶어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


그렇다면 '한 국가 해법은 가능한가?'라고 다음 대안을 검토한다. 지금까지의 갈등, 그리고 종족과 종교가 다른 집단이 한 국가에서 공존할 수 있을까? 서로를 존중하고 민주적 사회가 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또 복잡한 절차를 거칠 필요도 없다. 그냥 같은 국민으로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으면 되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었을 경우 주변에서 너무도 쉽게 발생할 수 있는 테러는? 이런 생각으로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이런 해법은 불가능하다. 양쪽 모두에게 불가능한 해법일 수 있다.


둘 다 안 되면 '두 가지 해결책이 모두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갈등을 해결하거나 줄일 수 있을까?'라고 질문하고 답을 찾으려 한다. 연방제를 도입하면 어떨까 한다. 이것도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하겠지만...


이렇게 해서 결론은 좀 암담하다. 저자 역시 '안타깝게도 분쟁과 점령, 폭력은 계속될 것 같고, 평화는 먼 미래의 일처럼 보일 뿐이다'(380쪽)고 한다.


맞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다. 주로 가자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이번엔 레바논에 있는 헤즈볼라와의 분쟁도 점점 심화되고 있다. 이 책은 왜 헤즈볼라와도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들의 분쟁 역사. 이 책은 간략하고 명료하게 잘 살피고 있다.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객관적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우리에게 알리려고 하고 있다.


왜 아직도 이들은 이렇게 분쟁 중일까를 궁금해 한다면 이 책을 읽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대치 중인 우리나라의 경우에 어떻게 해야할지, 갈등, 분쟁이 얼마나 소모적이고 국민들을 힘겹게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저자가 책의 뒷부분에서 한 말, 우리에게도 적용이 되는 말이다. 명심하자.


어떤 해법이든 양측 모두 수용할 수 있고 실제로 평화가 이루어지려면 대중의 태도와 인식이 변해야 하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긍정적인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374쪽)


이스라엘 국민의 약 21%는 아랍인이다.(총 180만 명) - 생각하지 않았던 인구 분포! - P36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의 유대인과 아랍인은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다른 학교에 다니며, 서로 거의 교류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분열은 이스라엘 내에서 가장 골이 깊은 사회적 분열이다. - P38

이스라엘에서는 유대인이 비유대인과 법적으로 결혼할 수 없다. - P41

팔레스타인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구성된 아랍 공동체 아에 있는 별개의 민족이다. - P50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이 땅, 또는 적어도 이 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민족적 열망을 실현하고 나아가 민족의 생존을 보장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 P53

팔레스타인의 자유에 대한 욕구와 이스라엘의 안보에 대한 욕구를 조화시키는 것이 이 장기적인 분쟁을 해결하는 열쇠일 것이다. - P55

이스라엘 자체가 경상북도보다 약간 큰 정도의 작은 나라라면, 서안지구는 경기도의 절반 크기이고 가자지구는 강화도와 거의 같은 크기다. 따라서 이 땅조차 모두 가지려는 이스라엘의 욕심에서 비롯된 영토 요구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이 보기에는 서안지구에 건설되는 이스라엘 정착촌이 가뜩이나 빈약한 영토를 계속 잠식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P64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대부부느이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은 유전자가 상당 부분 겹치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두 민족이 유전적으로 서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 침략과 점령, 정착과 이주의 오랜 역사와 그에 수반된 인구 혼합을 고려할 때 누가 진짜 원주민이고 이 따이 누구의 소유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양측 모두 이 땅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 P68

1882년부터 시작된 유대인 이민자들의 팔레스타인 유입이 바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 1946년이 되자 이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했다. - P75

시온주의는 19세기 유럽에서 당시 유럽 유대인이 직면한 두 가지 문제, 즉 반유대주의와 동화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 전자는 유대인의 물리적 생존을 위협했고, 후자는 문화적 생존을 위협했다. ... 시온주의의 부상은 반유대주의, 민족주의, 세속주의라는 세 가지 주요 사상이 합쳐진 결과다. 그중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반유대주의였다. - P86

아랍인의 눈에 유대인 정착민은 역사에 기록된 수많은 외부 침략자 중 가장 최근에 등장한 존재이자, 19세기와 20세기 초에 걸쳐 중동에서 벌어진 유럽 제국주의의 일부일 뿐이었다. - P97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 유대인에게 일종의 집단적 트라우마로 작용했고, 이는 이스라엘의 위협에 대한 인식, 외교 및 안보 정책, 심지어 이스라엘 방위군의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홀로코스트가 있기 훨씬 전에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P119

아랍 국가는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고자 연합을 이루었으나 비조직적으로 행동했다. - P132

전쟁이 끝나자 이 분쟁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와,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태에서 여기저기 흩어진 무국적 민족과의 갈등이 되었다. - P137

팔레스타인인 추방에 대한 정치적 지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식적인 종족 청소 정책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 P143

1948년 6월부터 이스라엘 정부는 난민 귀환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버려진 마을 수백 곳을 완전히 파괴하고 그들의 집과 땅을 빼앗았다. - P144

1967년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더욱 악화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팔레스타인의 테러와 이스라엘의 팽창주의도 그 중 하나다. - P163

이스라엘의 영토 점령(동예루살렘과 서안지구, 가자지구)과 정착촌 확장은 1967년 이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 P165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가 붕괴된 이유는 극단주의자들의 폭력과 대중의 불신, 그리고 정치권의 관리 부실과 악행이 모두 작용한 탓이었다. - P230

포괄적인 평화 협정에 도달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네 가지 주요 이슈는...

(1) 분쟁 도시인 예루살렘의 미래 (2) 팔레스타인 난민의 운명 (3) 미래 팔레스타인 국가의 국경 (4)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국가 간의 안보 협정 ... 그리고 물 공유... - P231

2013년 유엔 인권이사회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정착촌의 존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권리에 큰 타격을 입혔다.

자결의 자유, 차별 금지, 이동의 자유, 평등, 정당한 법적 절차, 공정한 재판, 자의적 구금 금지, 신체의 자유와 안전, 표현의 자유, 예배 장소에 대한 접근권, 교육, 물, 주거, 적절한 생활 수준, 재산권, 천연자원 접근 및 문제 사항 개선에 대한 이들의 권리는 지속적으로, 그리고 일상적으로 참해당하고 있다. - P301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을 유대 국가로 인정하거나, 이스라엘이 나크바 및 팔레스타인 난민의 고통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보상을 제공한다면 평화 협정을 지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도자들이 어떻게든 평화 협정을 체결한다면 대중이 이를 지지할 가능성은 높다 하겠다. 그러나 양측 모두 영토 타협과 관련된 모든 합의를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소수(약 3분의 1)가 있다. - P356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팔레스타인을 위한 또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 기존의 ‘한 국가 현실‘을 바꾸려 하는 대신, 사실상 이스라엘의 통치하에 살고 있는 모든 팔레스타인인(특히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가자지구 거주자)에게 이스라엘 국민과 동일한 권리(특히 이스라엘 총선 투표권)를 부여하는 것이 훨씬 더 간단하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이스라엘 주권하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시민권, 동등한 권리, 민주적 대표성을 부여하면 평화적으로 한 국가 해법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 시나리오에서는 평화협정도 필요하지 않다. - P3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퓨즈만이 희망이다 - 디스토피아 시대, 우리에게 던지는 어떤 위로
신영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퓨즈만이 희망이다. 왜 퓨즈인가? 전기에 과부하가 걸리면 끊어져 전기가 통하지 않게 하는 장치가 퓨즈다. 즉 무엇인가 힘든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당하는 존재, 그래서 위험을 알려주는 존재가 퓨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퓨즈에 해당하는 존재들은 누구인가? 사회적 약자들이다. 감염병이 돌아도, 자연 재해가 나도 가장 먼저, 또 가장 심각하게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들이다. 이렇게 사회적 약자들이 힘든 지경에 처하면 그 사회 역시 위험하게 된다.


그러니 퓨즈에 해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그래야 전기가 계속 통할 것 아닌가? 사회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약자들에 대한 관심, 배려, 정책이 있어야 한다. 


그런 퓨즈들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퓨즈, 사회적 약자라는 말이 거슬린다면 이웃이라고 하자. 사람은 홀로 살기 힘드니, 이웃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이 있으니, 이웃 사랑은 곧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이렇게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다면 퓨즈가 끊길 일이 없을 것이다.


퓨즈가 끊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은 사회비평 에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주로 의료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저자가 예방의학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경제-환경적으로 힘들어지면 사회적 약자들의 건강에 문제가 먼저 생기기 때문이다.


어떤 의료가 필요한가? 지금 의대 정원 증원을 가지고 의사가 되겠다는 의대생들은 휴학을 하고 있기도 하고, 전공의들은 사직서를 내고 나간 상황이고, 교수들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고 있는 상황. 응급실에 가지 못하고 소위 뺑뺑이를 돌다가 치료를 제 때 받지 못해 사망에 이르는 경우까지 있는 지금, 이런 위급 상황에서 누가 먼저, 심각하게 피해를 보는가?


말할 것도 없이 사회적 약자들이다. 그들의 퓨즈가 먼저 끊어진다.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공공의료다. 공공의료를 살리기 위한 정책이 나와야 한다. 의료 민영화가 아니라(민영화라는 말보다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유화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공공의료기관을 확충해야 한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공공의료 기관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다. 코로나-19 때 공공의료기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으면서 여전히 공공의료기관을 확충하지 못했다.


또한 건강보험으로 모든 치료를 받을 수가 없다. 자기 부담이 상당한 경우도 있고, 그래서 전국민이 건강보험에 가입되어 있고, 그 때문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기도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다고 한다. 


한 해 치료비를 100만 원으로 한정하자는 공약도 나왔었다고 하는데, 지켜지지 않은 상황. 저자는 그런 상황을 답답해 하고 있다. 공공의료기관을 확충해도 모자랄 판국에 의료 민영화를 하고, 민간의료보험이 확대되도록 하는 정책을 펴는 것에 대해 쓴소리를 하고 있다.


조금 오래된 내용도 있지만, 그 내용들이 현재도 진행 중이니 그의 말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특히 지금처럼 의료 대란을 겪고 있을 때, 의료개혁에 대해 근본에서부터 다시 접근해야 한다.


공공의료기관의 확충, 건강보험으로 치료받을 수 있게, 무상의료까지는 아니더라도 의료비가 없어 치료를 못 받는 사람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


다른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이라 대체로 짧다. 그렇지만 공공의료에 관한 생각은 결코 짧지 않다. 아직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긴 시간 계속 제자리 걸음을 하거나 뒤로 간 의료 정책들을 비판하고, 우리가 이웃들과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의료 개혁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저자의 마음이 강하게 느껴지는 책이다.


그래, 저자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퓨즈만이 희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 호 특집 기사가 '결심했다, 소비와 멀어지기로'다. 소비는 자본주의의 꽃이다. 소비가 있어야 생산이 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자본주의는 반대다.


  생산이 소비를 촉발한다. 소비를 유도하기 위한 온갖 광고들을 보라. 수요를 창출해내는 생산. 이것이 자본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니 좀 생경한 언어를 쓰면, 자본주의는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더 중요한 사회다.


  그러니 주식도 하고, 가상화폐(블록체인)도 나온다. 생산품을 받고 그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하나의 생산품이 된다. 돈이 돈을 낳는 세상이 된다.


이런 세상은 소비 진작이 기본이다. 소비가 축소되면 경제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소비를 권장한다. 교환가치가 계속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만은 없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필요한 소비를 해야 한다. 그것은 생존에, 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다. 그런 소비에 그치지 않고 소비를 위한 소비를 하는 것은 아닌지, 내게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소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기회를 준 것이 이번 호 특집 기사다.


소비를 줄이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나타나는데, 이 중에는 주식을 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으니, 참조할 만하다. 단순히 소비를 줄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줄인 소비를 다른 곳에 투자를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투자를 해도 되고, 환경에 투자를 해도 되고, 방법은 다양하다. 그런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도 이제는 많이 나오고 있다. 그 점을 [빅이슈]가 보여주고 있다.


이 특집 기사 말고 생각해 볼 글이 바로 '집'에 관한 기사다. '핀란드에서 홈리스가 줄어든 이유'라는 글이 읽을 만하다. 아니 읽어야 한다.


집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정책을 추진했다는 핀란드. 이들에게 홈리스(노숙인)들은 내쳐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주거공간을 마련해주는 정책을 마련하는 것은 당연한 일.


전세 사기를 당해 오갈데가 없어진 사람들, 피해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나라는 언감생심 홈리스에 대한 주거 정책을 입에 올리지도 못한다.


내 돈으로 간신히 마련한 전세집조차도 사기를 당해 전세금을 날리고 갈 곳이 없어진 사람들도 구제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능력이 없다고, 집에서 생활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집을 구해주는 정책을 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길일까? 아니다. 홈리스들도 자신들의 집에서 생활할 수 있을 때 사회는 더 풍요로워지고 사회적 비용도 감소한다. 즉 사회에서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줄기 때문에 사회적 행복도는 높아질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우리나라 주택 정책에 시사점을 준다.


이밖에도 읽을 만한 많은 글들이 있다. 특히 문화적인 면에서 (음악, 영화, 전시 등)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준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을 수 있는 이번 327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