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서사시다. 시인이 십여 년을 환경파괴에 맞서 싸운 기록이다. 한편 한편이 독립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연결이 된다.


  자연을 파괴하려는 자들에 맞서는 시인의 마음이 이 시집에 온전히 들어가 있다.


  말이 필요없다. 그냥 읽으면 된다. 그러면 자연을 보호하자는, 환경을 파괴하지 말자는 구호보다 더 마음에 와닿게 된다.


  자연스레 자연에 마음이 쏠리고 환경을 보호해야 함을, 그것이 바로 우리를 또한 우리 미래 세대를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집을 읽으면 시인의 말에서 한 '문학의 원사(原絲)는 '비애'입니다'(16-17쪽)라고 한 말이 가슴에 들어박힌다.


비애... 그렇다. 슬픔이다. 무엇에 대한 슬픔인가. 나를 둘러싼 또다른 '나'가 파괴되는 것에 대한 슬픔, 아픔이다. 이런 아픔을 무시하지 못하고 나서게 되는 것이 바로 시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시인은 시로써 나서기도 하지만 행동으로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행동이 행동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행동은 다시 시로 나타난다.


자연과 함께 했던 일들이, 보금자리를 골프장에 빼앗기고 쫓겨나게 될 운명에 처한 뱀을 보고도 징그럽다고 하지 않는다. 시인은 그러한 뱀을 보고도 슬픔을 느낀다.


       허물


골프장 쪽 둔덕을 내려온 초록색 뱀은

내 오른손 검지를 스쳐

오엽딸기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산길에 떨어진 골프공을 줍던 나도 놀라고 비탈을 흐르던 저도 놀라고

야생이 스쳐간 손에 뱀 비린내가 돋아

슬픔이 독처럼 몸에 퍼졌다


조정, 마법사의 제자들아 껍질을 깨고 나오라. 이소노미아. 2023년. 42쪽.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쫓아내야 하는지... 그 생명 중에 사람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까? 골프장이 들어서면 동네 사람들이 골프장을 이용할까? 골프장으로 더 편리한 생활을 할까?


아니다. 골프장을 관리하기 위해서 밀어버린 산, 새로 만든 웅덩이, 잔디, 이를 보호하기 위해 뿌리는 온갖 제초제들... 그리고 수시로 날아오는 골프공.


동네 사람이 아닌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마을 사람은 물론이고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던 동물들이 집을 잃고 떠나야 한다. 한 순간에...그러니 시인이 마음에 '슬픔이 독처럼 퍼질' 수밖에 없다.


그런 슬픔을 마냥 안고 살아갈 수 없기에 시인은 슬픔을 털기로 한다. 슬픔을 이겨내기로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자연을 지키는 일이다. 산황산을 지키는 일. 골프장이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시인이 살고 있는 곳에서 그렇다면 이는 전국으로 확대될 수가 있다. 개발 광풍으로 사라지는 자연ㅡ생명에 시인은 마음을 줄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시인의 마음, 행동이 시집 전체에 펼쳐져 있다. 그러니 이 시집은 하나하나의 서정시이면서도 서사시다.


자연을 파괴하려는 사람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장대한 서사시.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다. 자연을, 새싹들을 '마법사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시인. 이런 마법사의 제자들을 우리가 막으면 되겠는가. 마법사의 제자들은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그들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듣기 시간 틂 창작문고 14
김숨 지음 / 문학실험실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며칠 전에 위안부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다. '정의기억연대'에 따르면 이제 생존자는 8명이라고 한다. 거의 십만 명에 가깝게 끌려갔던 위안부 중에 생존자가 이제 한 자리 숫자가 되었다. 그런데, 한자리 숫자로 생존자가 남을 때까지 과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었던가?


어떤 사람이 그랬다. '위안부'라는 명칭을 쓰지 말자고.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위로와 편안함을 주었단 말인가?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대가로? 아니다. 이들은 위안을 준 사람들이 아니라 성 착취를 당한 '성노예'였다.


근대에 들어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으니, 현대판 성노예라는 말에는 자발성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위안부라는 말에는 자발성이 어느 정도 들어설 여지가 있어서 오해를 살 여지가 있고. 가끔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갔기에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이유가 어쩌면 '위안부'라는 용어를 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예는 자신의 의지를 빼앗긴, 다른 존재에 의해서 강제로 부림을 당하는 존재다. 


노예제도가 없는데 노예로 살아간다면 그 치욕과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입으로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 말을 할 때마다 그 고통이 떠오를 테니.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으니...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보아도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 특히 가족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말을 하지 않고 침묵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자신들의 상황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있어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역사적 비극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했고, 세계 곳곳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워 잊지 말자고,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들의 말을 제대로 들었을까? 아니 제대로 들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작 힘있는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미 끝난 일이라고 했다. 또 자발적으로 그 일을 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 사람 중에서도. 


세상에, 노예라는 말에 자발성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그들의 말하기는 정말 '듣기' 능력이 영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밖에는 안 된다.


이들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들으려고 해도 말을 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은 말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없는 상황, 김숨의 소설에 드러나 있다. 증언을 녹취하기 위해 황 할머니를 만나러 간 화자는 할머니 앞에 녹음기를 놓고 할머니 말을 들으려 하지만 할머니의 긴 침묵, 그리고 여동생의 반대에 부딪치고 만다. 


할머니가 말을 하게 하려 하지만 할머니는 말을 하지 않는다. 침묵, 침묵... 이 침묵이 고스란히 녹음기에 담긴다. 그렇다. 침묵 속에 있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녹취를 하려는 화자는 그 침묵 속에서 말을 찾아내고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지만, 그 결과는 녹취록으로 나올 수가 없다. 할머니가 한 말은 단 몇 마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가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할머니는 온몸으로 말을 한 것이 아닐까? 할머니의 침묵 속에 얼마나 많은 말이 담겨 있는가? 화자는 그 점을 안다. 그래서 기다린다. 기다리고 기다리지만 하루 동안 할머니는 몇 마디 말만 할 뿐,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듣기는 어떠해야 하는가? 침묵 속에서 발화되지 않은 말들을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 말을 들어야 비로소 제대로 들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꼭 입을 통해 음성으로 발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통해 나오는 그 말들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녀야 하지 않나.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는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인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인지, 아니면 환청인지'(163쪽) 모르는 소리를 듣는다. 온몸으로 듣기 위해서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몸을 다 가져갔어……

그래서 ……  몸이 없지 ……

다 가져가서……

죽지도 못해 …… 몸이 없어서……

피는 나……

피는 눈에서 나는 거니까……

거기…… 굴 속에……

눈을 감아도 피가 흘러……  (163-164쪽)


이제 생존자는 8명이라고, 평균 연령은 94세를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들을 시간이 별로 없다. 그 점을 알고 제대로 들어야 한다. 


김숨의 이 소설 [듣기 시간], 바로 우리가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올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것들을 드러내주는, 잘 듣기를 통한 표현이 이루어진 작품들이 있다. 김숨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 그래서 더욱 잘 들어야 하는 일들을 작가는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한국을 말하다
장강명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1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을 소설로 표현하기 위해서. 아주 짧은 소설로. 4000자 안팎의 소설이라고 한다. 21명이 참여했는데도 두꺼운 소설집이 아닌 얇은 소설집이 되었으니, 각 작가가 쓴 분량이 어느 정도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량이 짧다고 내용도 짧은 것은 아니다. 짧은 형식 속에 긴 내용이 들어 있다. 우리 사회가 보이고 있는 모습들 중에 하나하나씩을 잡아 소설로 표현하고 있으니까.


지금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모습들이 어떨까? 아니 작가들은 어떤 모습을 포착했을까? 21개의 주제라고 할 수 있지만 첫작품은 소설집의 방향이나 내용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주제는 20개라고 보면 된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AI에 대해서는, 이미 인공지능이 소설도 시도 쓰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작가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즘, 곽재식은 '제42회 문장 생성사 자격면허 시험'이라는 소설로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실행'하는 자격증을 인간에게만 주면 되는 일. 이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을 작가라고 하면 될 일. 즉 일은 인공지능이 하지만 열매는 인간이 먹어야 한다고 지금 현실을 조금 비틀고 있다.


구병모의 '상자를 열지 마세요' 역시 요즘 넘쳐나는 콘텐츠를 다루고 있다. 너무도 많은 콘텐츠들로 인해 우리는 사유를 하지 않는다. 사유 기능을 상실하는 인간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를 풍자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점점 가난해지는 삶을 비판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서수의 '우리들의 방'은 절약이라는 이름은 사실 가난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음을 해학적인 표현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이기호의 '너희는 자라서'는 사교육이 판치는 우리나라 현실을, 김화진의 '빨강의 자서전'은 일에 치여 번아웃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경란이 쓴 '금요일'은 가족을, 김영민의 '변기가 질주하오'는 현대적 삶과 예술을, 김멜라의 '마감 사냥꾼'은 고물가를, 정보라의 '낙인'은 타투를, 구효서의 '산도깨비'는 은퇴 후 자연에 돌아가 살고 싶어하는 자연인을 꿈꾸지만 그것이 꿈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손원평의 '그 아이'는 현대판 소비를, 이경란의 '덕질 삼대'는 팬심을, 천선란의 '새벽 속'은 새벽 배송으로 힘들어하는 배달노동자들을, 백가흠의 '빈의 두 번째 설날'은 이주 노동자의 문제를, 정이현의 '남겨진 것'은 반려동물을, 정진영의 '가족끼리 왜 이래'는 섹스리스를 주제로 한다고 하지만 육아와 일에 치인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서도 멀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김혜진의 '사람의 일'은 노동을, 강화길의 '화원의 주인'은 마약이나 이런 중독만이 중독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기 만족적인 중독이 있음을, 김동식의 '그분의 목숨을 구하다'는 돈을, 최진영의 '삶은 계란'은 식단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20개의 주제가 가볍게 펼쳐지는데, 읽으면서 마음은 절대로 가볍지 않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이고, 우리 다음 세대들도 역시 겪을 일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을 통해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며, 그것들을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그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지도 생각할 수 있다.


이 소설집에 실린 20개 주제에 들어가지 않지만 여기에 정치를 풍자하는 소설이 하나 정도 들어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주제가 바로 '정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적어도 [소설, 한국을 말하다]라고 했으면 정치를 다루는 풍자 소설 한 편은 실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 한국 사회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소설집이다.


무겁지 않게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 문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러한 소설집이니 한편한편 천천히 읽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도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마치 예정조화설처럼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인간의 삶은 행복보다는 불행 쪽으로 가지 않을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 어떤 행동을 해도 정해진 대로 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그러니 자신의 운명을 아는 것이 꼭 행복한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즉 정해진 것처럼 보이는 운명도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면? 그렇다면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점쳐보지 않을까?


알고 고칠 수 있고, 또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으니, 그때 운명은 나에게 행복으로 다가올 수 있다. 즉 바꿀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바꿀 수 있는 운명. 그것은 운명을 알고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운명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우선 자신의 성격을 알아보는 MBTI(16개의 성격유형이 있으니)가 있고, 9개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 애니어그램이 있고, 점과 비슷하게 타로 점이 있고, 그리고 우리나라 점, 또 주역이 있다. 


이보다 더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많이 알려진 방법들인데, 최근에 사주 보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설마 저번 대선의 영향은 아니겠지...


사주를 고정된, 불변의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것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를 생각한다면 사주, 좋다. 그것을 맹신하지만 않는다면.


왜냐하면 사주를 본다는 것은 그것에 자신을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빠져 있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거울을 추가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 지금 내가 이래서 이런 상황에 처해 있구나.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그것이 사주의 의미다. 즉 사주는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같은 사주라도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이 하는 행위나 마음가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석이 달라지면 운명도 달라진다. 그것이 요즘 사주보는 사람들, 또는 자신의 사주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지닌 자세다.


그 점을 이번 호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사주를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판단하는 또 하나의 거울로 사주를 보고 해석하는 것. 그것은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사주를 미신의 영역이나 맹신의 영역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행동하는 영역으로 옮겨놓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것이 이번 호, 사주에 대한 글들이다.


또 이번 호에서 많이 생각해야 할 문제를 오후 작가가 제시하고 있다. '값비싼 치료, 국가는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나'라는 글에서.


의료 문제가 붉어진 한국 사회에서 의사 문제도 문제지만, 의약품 문제도 문제다. 건강보험으로 모든 치료를 보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너무도 비싼 약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국가에서 건강보험으로 모두 보전해주면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반가운 일이겠지만,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므로, 무한정 국가가 나설 수는 없는 일.


세상에 약값이 28억 원이나 되다니... 이것을 건강보험이 보전해줘서 600만 원에 투약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런 약들이 계속 개발이 된다면, 돈이 많은 환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겠지만, 그 비용을 충당할 수 없는 환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더 상실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런 약들은 국가가 지원해줘야 하는데, 마냥 할 수도 없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개발한 제약회사의 이윤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그러니 그러한 인간의 생명에 관련된 연구는 세계적인 협업으로, 세계정부 차원에서(유엔이라고 해야 하나) 해야 하지 않을까. 이윤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우선한다면, 세계 각국에서 차등적으로 비용을 충당해 그런 연구를 지속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헛된 생각도 품어보는데...


이게 아직 안 되고 있으니, 오후 작가의 말인 '의학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과거에도 건강은 부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제 결정적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하나뿐이다. 부디 건강 잘 챙기시길.'(81쪽)이라는 말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런 현실이 아니길... 부가 건강에 어느 정도 영향은 끼치겠지만 결정적 영향은 끼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그런 사회를 꿈꾸는 것이 [빅이슈] 아니던가. 그래서 이런 잡지가 계속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나. 우린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I 이후의 세계 - 챗GPT는 시작일 뿐이다, 세계질서 대전환에 대비하라
헨리 A. 키신저 외 지음, 김고명 옮김 / 윌북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인공지능 시대. 이 책은 작년에 출간이 되었다. 작년. 겨우 한 해가 지났을 뿐인데,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에서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만큼 인공지능 부분은 급속도로 발전해 왔다는 얘기다.


일년 전에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그 전부터 준비를 했을테니, 인공지능에 대한 책을 쓰면서 출판은 인공지능 이전 식으로 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지난 이야기를 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그 예로 이 책에는 챗지피티-3이 나온다. 지금은 3이 아니라 4, 그리고 그 이상의 버전이 나왔다고 한다. 예상할 수 없는 분야로, 대답으로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 인공지능이라면 인공지능의 발달 역시 우리의 예측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이 책은 생각할거리를 제공한다. 바로 우리 인간에게 인공지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질문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도 통하는데, 여기에는 사유가 필요하고 인류의 삶을 이끌어내는 철학이 필요하다는 저자들의 주장에 동감한다.


세계의 관계자들 또 지식인들, 정치인들이 모여서 인공지능에 어떤 한계를 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제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윤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대에 그러한 제안은 낭만적으로(제안은 좋지만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의미로) 들린다.


인공지능을 군사력에 도입하면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세계의 정치가들이 모여 인공지능의 쓰임에 한계를 정하는, 과거 핵무기 사용에 관한 협정과 같은 협정을 맺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아직까지 인공지능은 군사 분야보다는 다른 분야에서 쓰이고 있으며, 그러한 인공지능의 사용이 인간에게 편리함과 자본가들에게는 이윤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마 알게 모르게 인공지능을 군사력과 결부시키는 나라들이 있을테지만, 대놓고는 하지 않고 있다고 보는데, 이제 곧 대부분의 나라 군사력에 인공지능은 결합이 될 것이다. 결합이 된 다음에 대책이 나오면 인류를 파멸로 이끌 무기를 만들어놓고 사용하지 말자는 것과 같은 말이 되는데, 이미 만들어진 것에 한계를 두자고 하면, 그 협정을 누가 깨는 순간 인류는 되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어서게 되니... 이것도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고.


그런 만큼 이 책에서는 인공지능의 발달을 살피고,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알아보고 있으며, 앞으로의 세계에서 인공지능을 어떻게 대해야 또는 이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중요한 문제고, 인류의 생존에도 인공지능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토론의 장을 만들고, 인공지능에 대한 한계를 정할 수 있을까? 아직 인공지능이 어떻게 발달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인공지능의 사용에 대한 협정이 맺어질 가능성이 있을까?


이 책의 저자들은 그래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 세계에서 인공지능의 개발을 몇 달(6개월이던가?) 늦추고 논의를 하자는 말도 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한 편에서는 계속 인공지능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 않은가. 


왜냐하면 늦으면 이윤을 확보할 수 없으니까. 따라갈 수 없으니까. 그러니 인류의 생존 또는 생활이라는 목표를 놓고 토의를 하자는 제안은 공염불로 그칠 공산이 크다. 오히려 예전 핵무기 협정과 비슷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자들도 이러한 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하고 있지만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미 대세가 된 인공지능 시대라는 생각. 이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아직 오지도 않은 세상을 미리 걱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때가 오면 늦었을테니, 미리미리 걱정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인류의 삶에 대한 철학을 정립하고, 그 철학에 의해서 인공지능 시대의 방향을 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무튼 인공지능은 이제 거불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보에 맥락이 더해질 때 지식이 된다. 그리고 지식에 소신이 더해지면 지혜가 된다. 역자적으로 볼 때 소신이 생기려면 홀로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터넷은 이용자에게 수천, 수만, 수억 명의 의견을 쏟아부으며 혼자 있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홀로 생각할 시간이 줄어들면 용기가 위축된다. 용기는 소신을 기르고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하며 특히 새로운 길, 그래서 대체로 외로운 길을 걸을 때 중요하다. 인간은 소신과 지혜를 갖출 때만 새로운 지평을 탐색할 수 있다. - P89

AI는 비정밀하고, 역동적이고, 창발적이며, ‘학습‘이 가능하다. AI는 데이터를 소비하여 ‘학습‘하고, 데이터를 토대로 관찰하며 결론을 도출한다.

- P95

AI가 결과물을 생성하면 연구자가 됐든 평가자가 됐든 인간이 그 결과물을 당초 목표에 부합하는지 검사해야 한다. - P115

AI는 자신의 발견을 반추하지 못한다. - P116

AI는 반추하지 못하므로 그 행동의 의의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따라서 인간이 AI를 규제하고 관리해야 한다.

- P116

이 글을 쓰는 현재 AI는 세 가지 차원에서 코드의 통제를 받는다. 첫째,코드에 AI가 수행할 수 있는 행동의 매개변수가 지정된다. 둘째, AI는 최적화 대상을 정의하고 지정하는 목적함수로 통제된다. 셋째, 당연한 말이지만 AI는 원래 인식하고 분석하도록 지정된 입력만 처리할 수 있다. - P122

심각한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정부, 네트워크 플랫폼 운영자, 이용자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본질적으로 무엇이고, 어떤 전제와 한계 내에서 상호작용할 것이며, 어떠한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지 따져야 한다. - P135

AI 무기를 설계할 때와 배치할 때 그것이 수행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를 잘 설정해서, 인간이 시스템을 관리하고 시스템이 본래 목적에서 이탈할 시 가동을 중단하거나 교정하게 해야 한다.

- P205

AI의 ‘학습‘ 능력과 ‘목표물 설정‘ 능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제한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 P212

개인과 사회가 삶의 어떤 측면을 인간지능의 몫으로 남기고 어떤 측면을 AI에게, 혹은 인간과 AI의 협업체계에 맡길지 결정해야 한다. - P225

설명이 가능할 때 의미와 목적이 생기고, 대중이 도덕원리를 인정하고 실천할 때 정의가 구현된다. 하지만 알고리즘은 제 결론을 인간의 경험에 근거하여 대중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 P227

AI 기반의 맞춤형 교육이 도입되면 인간의 평균적 능력이 향상될 가능성과 손상될 위험성이 공존한다. - P234

우리 시대의 모순은 디지털화로 인간이 이용하는 정보가 계속 늘어나지만 진중한 사색에 필요한 공간은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범람하는 콘텐츠 때문에 사유의 비용이 증가함에 따라 사유의 빈도는 감소한다. 자극을 원하는 인간의 욕구에 맞춰 알고리즘이 우리에게 추천하는 콘텐츠나 경험은 대체로 극적이고, 충격적이고, 감정적이다. 이런 환경에서 진지하게 생각할 공간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도 진득한 사유에 그리 도움이 안 된다. - P235

특히 AGI가 신과 같은 지능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그 구조와 안에 내포된 가능성을 직감하는 초인적 존재로 여겨질 수 있다. ... AI 시대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시대의 지침이 될 윤리체계를 확립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P2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