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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시간 ㅣ 틂 창작문고 14
김숨 지음 / 문학실험실 / 2021년 4월
평점 :
며칠 전에 위안부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다. '정의기억연대'에 따르면 이제 생존자는 8명이라고 한다. 거의 십만 명에 가깝게 끌려갔던 위안부 중에 생존자가 이제 한 자리 숫자가 되었다. 그런데, 한자리 숫자로 생존자가 남을 때까지 과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었던가?
어떤 사람이 그랬다. '위안부'라는 명칭을 쓰지 말자고.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위로와 편안함을 주었단 말인가?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대가로? 아니다. 이들은 위안을 준 사람들이 아니라 성 착취를 당한 '성노예'였다.
근대에 들어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으니, 현대판 성노예라는 말에는 자발성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위안부라는 말에는 자발성이 어느 정도 들어설 여지가 있어서 오해를 살 여지가 있고. 가끔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갔기에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이유가 어쩌면 '위안부'라는 용어를 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예는 자신의 의지를 빼앗긴, 다른 존재에 의해서 강제로 부림을 당하는 존재다.
노예제도가 없는데 노예로 살아간다면 그 치욕과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입으로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 말을 할 때마다 그 고통이 떠오를 테니.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으니...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보아도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 특히 가족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말을 하지 않고 침묵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자신들의 상황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있어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역사적 비극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했고, 세계 곳곳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워 잊지 말자고,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들의 말을 제대로 들었을까? 아니 제대로 들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작 힘있는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미 끝난 일이라고 했다. 또 자발적으로 그 일을 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 사람 중에서도.
세상에, 노예라는 말에 자발성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그들의 말하기는 정말 '듣기' 능력이 영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밖에는 안 된다.
이들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들으려고 해도 말을 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은 말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없는 상황, 김숨의 소설에 드러나 있다. 증언을 녹취하기 위해 황 할머니를 만나러 간 화자는 할머니 앞에 녹음기를 놓고 할머니 말을 들으려 하지만 할머니의 긴 침묵, 그리고 여동생의 반대에 부딪치고 만다.
할머니가 말을 하게 하려 하지만 할머니는 말을 하지 않는다. 침묵, 침묵... 이 침묵이 고스란히 녹음기에 담긴다. 그렇다. 침묵 속에 있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녹취를 하려는 화자는 그 침묵 속에서 말을 찾아내고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지만, 그 결과는 녹취록으로 나올 수가 없다. 할머니가 한 말은 단 몇 마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가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할머니는 온몸으로 말을 한 것이 아닐까? 할머니의 침묵 속에 얼마나 많은 말이 담겨 있는가? 화자는 그 점을 안다. 그래서 기다린다. 기다리고 기다리지만 하루 동안 할머니는 몇 마디 말만 할 뿐,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듣기는 어떠해야 하는가? 침묵 속에서 발화되지 않은 말들을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 말을 들어야 비로소 제대로 들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꼭 입을 통해 음성으로 발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통해 나오는 그 말들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녀야 하지 않나.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는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인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인지, 아니면 환청인지'(163쪽) 모르는 소리를 듣는다. 온몸으로 듣기 위해서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몸을 다 가져갔어……
그래서 …… 몸이 없지 ……
다 가져가서……
죽지도 못해 …… 몸이 없어서……
피는 나……
피는 눈에서 나는 거니까……
거기…… 굴 속에……
눈을 감아도 피가 흘러…… (163-164쪽)
이제 생존자는 8명이라고, 평균 연령은 94세를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들을 시간이 별로 없다. 그 점을 알고 제대로 들어야 한다.
김숨의 이 소설 [듣기 시간], 바로 우리가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올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것들을 드러내주는, 잘 듣기를 통한 표현이 이루어진 작품들이 있다. 김숨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 그래서 더욱 잘 들어야 하는 일들을 작가는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