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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브레드위너 세트 - 전4권
데보라 엘리스 지음, 권혁정 옮김 / 나무처럼(알펍)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난 다시 평범한 아이가 되고 싶어. 학교와 집을 오가며, 다른 사람이 일해 번 음식을 먹고 싶고, 아버지가 계셨으면 좋겠고. 난 그냥 그렇게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 (데보라 엘리스, 브레드 위너, 첫번째 이야기. 나무처럼. 2020년 첫판 2쇄. 136쪽)
이런 것이 소망일 수 있을까? 소망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소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처연하고 슬프다. 누군가는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소원이 된다는 사실이. 그런 소원이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진행 중인 아프가니스탄의 이야기다.
소설은 몇년의 시간을 두고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소설이라고 하기보다는 현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르포나 다큐멘터리에서 다루기에는 너무도 처참해서 차마 다룰 수 없는 참담함. 비극을 소설은 다룰 수 있기에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겪는 참혹함을 이 소설보다 잘 드러낼 수는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소설이 무겁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어린 소녀가 주인공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소녀의 시선과 행동을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어둡고 무거운 현실 속에서도 희망이, 웃음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이 문학의 힘인지도 모른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라는 꽃을 피워내는.
총 4권이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브레드위너]라는 제목으로 3부작이 나왔고, 그 후의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4편을 썼다고 한다. 번역은 '소녀 파수꾼'으로 했지만, 영어 제목은 '내 이름은 파바나(My Name Is Parvana')'다. 이 소설의 주인공 파바나.
1권은 아버지가 잡혀간 다음, 남자 없이는 외출이 금지당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삶을 다룬다. 세상에 남자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없다니... 그럼 남자가 없는 집은 그냥 집 안에서 굶어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게 파바나가 남장을 하는 이유다. 파바나만이 아니다. 많은 소녀들이 남장을 하고 일을 하러 나온다.
당연한 일이다. 살아야 하기 때문에.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뒤, 외국 유학을 갔다온 아빠는 잡혀가고, 대학을 나온 엄마는 여자라는 이유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현실. 파바나를 통해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의 모습이 펼쳐진다.
2권은 엄마와 언니가 떠나고, 그들을 찾아 떠나는 파바나의 여정이 그려져 있다. 파바나가 엄마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아이들. 그 아이들 역시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아이들이다.
수많은 지뢰, 인간 대우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 특히 어린 여자들은 사람이 아닌 취급을 받는다. 그들은 재산일 뿐이다. 이것이 과연 사람 사는 세상인가? 우주로 인간을 보내려고 하는 이 시대에 그런 일이 용납된다는 사실 자체가 끔찍한 비극이다.
3권은 프랑스로 가고 싶어하지만 결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남아 일을 하게 되는 파바나의 친구 샤우지아의 이야기다. 개인의 행복을 찾아 떠나고 싶지만, 개인은 행복해질지 몰라도 아프가니스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여성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아니 여성들만의 삶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을 불문하고 많은 아이들이 지뢰로 발을 잃거나 죽임을 당한다. 또한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려는 남성들도 고난을 겪는다. 탈레반의 극단주의를 비판하는 지식인들 역시 고통을 받는다.
탈레반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사회, 그런 사회를 두고 개인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에펠탑에서 유럽의 풍경을, 안식을 누리고 있을 때 떠나온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샤우지아는 그래서 프랑스로 떠나지 못한다. 위라 아줌마를 도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하게 된다. 이렇게 탈레반 치하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녀들이 겪는 비극을 1,2,3권이 다루고 있다면 4권은 몇 년 뒤다.
그 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탈레반을 축출하는 미군이 등장하면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삶은 행복해질까? 아니다. 행복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마치 신동엽 시인이 노래한 '봄은'이라는 시처럼 말이다.
봄은 - 신동엽
봄은 /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 오지 않는다. // 너그럽고 / 빛나는 / 봄의 그 눈짓은, / 제주에서 두만까지 / 우리가 디딘 /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 겨울은, / 바다와 대륙 밖에서 /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 이제 올 /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 우리들 가슴 속에서 / 움트리라. // 움터서, /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 눈 녹이듯 흐물흐물 /녹여 버리겠지.
신동엽 전집, 창박과비평사. 1985년 3판. 71-72쪽.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내부에서 변화가 오기는 하지만, 아직은 너무도 미약한 변화이기 때문이다. 파바나의 엄마는 여학생을 위한 학교를 세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살해의 이유가 된다. 여전하다. 소련과의 전쟁이 끝나도, 탈레반의 통치가 끝나도, 그리고 미군이 들어와도...
미군이 들어오지만 과연 달라졌을까? 현실에서는 미국 역시 소련과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다시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의 통치를 받는다. 여성들은 여전히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남자의 예속물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 제목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해피엔딩이라도?'라는 제목. 그럴 수가 없다. 아무리 소설에서 희망을 주려 해도 희망의 처음이 보이지 않으니.
이 소설이 아프가니스탄이 아닌 외국 작가가 썼기 때문에 이렇게 적나라하게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표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에게 '봄'이 와야 하는데, 소련이나 미국과 같은 외부에서가 아니라 또 탈레반이 신봉하고 있는 종교라는 힘이 아니라, 아프가니스탄에서 살아온 사람들에 의해, 그들이 서로 존중하고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을 보일 때,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람임을 인정하고 함께 나아가려 할 때 '봄은' 그때 비로소 온다.
파바나나 샤우지아가 그런 봄을 촉발시킬 사람들이다. 그들은 비록 해피엔딩을 꿈꾸지 않지만 좌절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로 피해가지도 않는다. 자신들이 해야할 일을 해나갈 뿐이다. 봄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
파바나와 샤우지아. 그들에게는 아직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이 냉랭한 겨울이겠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봄이 와 있다. 남들과 함께 누릴 봄을 예비하고 있는 그들이다.
여기에 꼭 탈레반이 추종하는 이슬람 극단주의만이 아니더라도, 종교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사람이 종교를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서양의 역사를 보면 종교를 위해 사람이 존재해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등. 지금도 종교로 인해 일어나는 수많은 분쟁들.
이렇게 이 소설은 종교와 사람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도 한다. 4권으로 나뉘어 있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는 아주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