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해자들에게 - 학교 폭력의 기억을 안고 어른이 된 그들과의 인터뷰
씨리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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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였던 어른들'이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올렸던 영상이 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봤다고 하는데, 이 책은 그 영상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 링크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CDtu1skdHIs (왕따였던 어른들 여자반)


https://www.youtube.com/watch?v=Kqv9BymmRuY (왕따였던 어른들 남자반)


'유튜브에 공개한 영상은 고작 20여 분이지만 우리가 인터뷰하고 서로 이야기 나눈 시간은 장장 5시간 4분이었다. 사전 인터뷰까지 합치면 8시간도 넘는다.'(7쪽)고... 그런 많은 이야기를 영상으로 내보낼 때는 영상 매체의 특성에 맞게 편집이 될 수밖에 없다.


영상에서 보지 못하는 더 많은 말들, 감정들이 있었을텐데, 이 책은 그렇게 영상에 담지 못했던 것들을 문자라는 매개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자신들의 경험, 왕따, 학교폭력. 그것은 한때로 끝나지 않는다. 피해자들의 몸에 생긴 상처들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수도 있지만,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오래도록 남는다. 아니, 평생 동안 남는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치유가 되더라도.


치유가 되었다고 마음의 상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이 왕따, 학교 폭력의 무서움이다. 그런데도 가해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너무도 쉽게 이야기한다. 그것은 철 모르던 때에 저질렀던 실수였어. 한때의 잘못이었어. 이런 말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해자였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자신에게는 어떠한 상처도 남기지 않은 일이었기에.


이것이 왕따와 학교 폭력의 무서움이다. 가해자들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피해자들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상처를 받으니까. 이것이 지나친 말이라고? 아니다. 이 책에 나오는 대담에 참여한 사람 중에 42살이 된 분이 있다.


나이 마흔둘이면 동양에서 흔히 말하듯 불혹의 나이다. 미혹함이 없는 나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나이다. 어린 시절, 또는 학창시절의 폭력 피해는 다 잊고 살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니다. 


이 책에 나오는 그 분은 42살까지도 그 상처를 지니고 있다. 더 나이를 먹어도 상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그분은, 또 이 대담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살아남았기에 자신들의 상처를 드러내는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살아남지 못한 분들도 있다. 그분들의 상처는 드러나지 않고, 그분들이 무덤으로 가져갔는데... 그래서 더욱 왕따나 학교 폭력의 무서움이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왕따였던 어른들'을 보면 어른이 되어서도 겪게 되는 그러한 상처들을 알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왕따나 학교 폭력이 얼마나 나쁜 짓인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가해자들에게 가 닿을까? 그들은 이런 말들을 들을 귀를 지니고 있을까? 그들은 귀를 막고 자신들의 입만 열고 살고 있지 않을까? 정말로 그들에게 학교 폭력 피해자들의 말이 가 닿아야 하는데...


그것이 기본인데... 하지만 그들에게 가 닿지 않더라도 이런 일은 의미가 있다. 우선 피해자들이 모여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들의 상처를 겉으로 드러낼 수 있게 된다. 겉으로 드러내기. 말하기. 이를 통해 상처를 보듬어 안기. 상처를 보듬어 안는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좀더 강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들은 이 대담을 통해서 자신들의 잘못이 아님을,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남아서 또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상처는 없애지 못하지만 이제 자신의 상처 속에 묻히지 않고, 그 상처를 통해 다른 삶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렇게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의 상처를 밖으로 드러낸 사람들. 이들을 통해 왕따와 학교 폭력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책일 것이다.


다만, 이 책이 폭력의 가해자들에게 가 닿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에게 가 닿을 때,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살필 태도를 지니게 될 때, 미래 사회는 왕따, 학교 폭력이 없는 사회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말이 가해자들에게 가 닿기를... 가해자 중에 한 명이라고 이 책을 읽었기를. 아니 책 읽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영상이라고 봤기를... 봐서 자신을 살폈을 것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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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42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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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한국어]에 이어 읽은 책이다. 연이어 읽어야 더 잘 이해가 된다. 작가의 삶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급 한국어]가 미국에서 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과정,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나타나 있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한국에 돌아와서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정이 나와 있다.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니 당연히 한국어는 초급에서 중급으로 올라가야 한다. 즉 글쓰기 실력이 달라진다. 또한 한국에서 주인공은 결혼을 한다. 이제 인생은 원가족과 자신이 살아왔던 것에서 다른 가족과 사람의 결합으로 나아간다. 


역시 이런 삶도 처음이라 초급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홀로 살 때와는 좀 다른 단계로 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인생도 이젠 중급에 다다랐다고 하자. 여기에 아이도 태어났으니...


초급인 삶이 중급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른 삶을 보아야 한다. 자신의 삶도 떨어뜨려 놓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방법이 무엇일까? 바로 자서전 쓰기다.


자신의 삶을 글로 써보는 것. 글로 쓰는 순간 자신의 삶을 바깥에서 볼 수 있게 된다. 조금 더 거리를 두고 내 삶을 바라볼 수 있으니, 이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삶과 또 다른 삶이 겹쳐지게 된다. 자연스레 초급에서 중급 인생으로 넘어간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결혼을 하기 전에는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았다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점과 선을 넘어 면이 되는, 어쩌면 입체에 이르는 삶을 살게 된다. 


내 삶에 다른 사람의 삶과 아이의 삶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설은 주인공이 대학에서 글쓰기를 강의하는 내용과 자신의 가족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중첩되면서 전개된다. 


글쓰기 강의가 삶과 연결이 되고, 자신의 삶이 글쓰기와도 연결이 된다. 그렇게 소설은 주인공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다른 인생을 보여준다.


그 인생을 통해 우리는 초급 인생에서 중급 인생으로 넘어갈 수 있다. 자서전을 쓰지 않더라도 소설이라는 다른 인생을 통해서 다른 삶을 엿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소설에서는 [초급 한국어]에서 작품집을 내지 못했던 주인공이 작품집을 내게 된다. 그의 글쓰기 역시 초급에서 중급으로 넘어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저런 어쩌면 작가 이력에 나와 있는 작품 제목과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작품 제목을 비교하면서 와, 이 작가는 정말 자신의 삶에서 소재를 따와 이렇게 소설을 썼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가령 [체이서]라는 작품은 [체이싱 유]라는 작품으로 나오고, [사자와의 이틀 밤]은 [호랑이와의 하룻밤]으로 나온다. 그래서 작가의 사생활을 엿보는 듯한 느낌도 주기 때문에 더욱 쉽고 편하게 읽히기도 한다.  


아무튼 [초급 한국어]와 [중급 한국어]를 연달아 읽으면 더 소설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따로 따로 읽어도 괜찮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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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13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중급 단계이시군요 ㅋㅋ

kinye91 2024-11-13 16:55   좋아요 1 | URL
하하. 이 중급이 더 재밌더라고요.
 
초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30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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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처음 살아간다. 모든 이에게 이번 삶은 처음이니, 우리들은 모두 초급 인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세월이 흐른다고 초급에서 고급이 될까? 잘 모르겠다. 그 나이 때의 경험을 모두 처음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하는 인생에서 실패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세상에, 실패하지 않는 인생이 있을까? 오히려 그 실패들이 쌓이고 쌓여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지 않을까.


인생은 모두 초급이지만, 초급들이 쌓이고 쌓여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 그렇지만 초급답게 엉성하기도 하고, 예측을 잘 못하기도 하는, 아는 길임에도 헤맬 때가 있는데, 아예 알지 못하는 길에 들어섰다는 느낌.


소설은 그러한 인생을 빗대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초급에서도 모두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초급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이름은 작가와 같다. 작가와 같은 등장인물이면 너무도 쉽게 작가와 동일시하게 된다. 그것을 의도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누구나 소설의 등장인물이 겪은 일들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작가가 되고 싶어하지만 많은 실패를 하게 되고, 미국에 유학을 왔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으며, 한국어 강사 자리를 얻지만 그것도 계약직이고 다음 계약을 맺지 못하게 되는 주인공. 미국에 있는 학생 20명에게 한국어를 가르치지만 그들에게 가르치는 한국어는 그야말로 '초급'


여기서 초급 한국어를 가르치는 내용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삶과 만나게 된다. 낯선 언어를 배울 때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인사말이 아닐까 한다.


인사말. 이는 관계를 맺는 언어이고, 나와 너를 연결시켜 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인간관계의 처음에는 인사말이 등장한다. 언어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고... 물론 모어는 엄마, 아빠와 같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 관한 말들부터 배우지만.


초급 한국어에서 배우는 인사말은 "안녕하세요"다. 자, 무엇이 안녕한가? 처음에 주인공은 'welcome'이라는 말 밑에 '안녕하세요'라는 말을 쓴다. 그런데 학생들이 정확한 뜻이 뭐냐고 물어보자, 영어로 번역하면서 'Are you in peace?'라는 말을 쓴다. 이것이 학생들의 웃음을 유발하는데, 학생들은 자신들이 본 영화 '스타워즈'에서 요다가 한 말을 떠올리면서 '평안하냐?'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왜 하필이면 안녕하세요이고, 그것이 영어 peace와 연결이 될까? 평화, 평안? 안녕하세요라는 말에는 그만큼 불안정한 사회의 현실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불안정 속에 던져졌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로의 불안정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관계를 맺게 되고, 이것이 평안으로 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 관계를 지나면 이제 다른 말들로 넘어가게 된다. 서로의 안녕을 확인했기에,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 것. 이렇게 초급 한국어는 다른 말들로 넘어간다. 그래봤자, 초급이다. 초급 한국어를 가르치는 과정과 더불어 등장인물이 겪어온 일들이 겹쳐지게 된다.


한 학기 동안 강의하는 과정에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겹쳐지는데... 학창시절, 가족관계, 그리고 유학와서 한 일들 등등.


마지막에 그는 기말시험을 본다. 그리고 그의 미국 생활도 초급으로 끝난다. 그는 재계약이 되지 않았기에 귀국해야 한다. 


귀국하기에 앞서 공항에서 그는 메시지를 확인하는데, 그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나는 내가 사랑했던 모국어의 단어 하나를 영원히 잃었음을 알게 되었다'(182쪽)고 한다. 


그 모국어의 단어 하나는 '엄마'로 추정이 되고, 이제 엄마를 잃었다는 말은 인생이 다른 단계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비록 모든 인생이 초급이라고 할 수 있지만, 10년 단위나 20년 혹은 30년 단위로 끊는다면 초급에서도 다른 단계가 있듯이, 인생도 그렇게 다른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짧게 짧게 끊어지는 장들과 문장들로 인해, 빠르게 읽힌다. 읽기에 속도가 붙는 만큼 주인공이 미국에서 생활하는 기간이 짧음을(3년 정도 머물렀다고 하는데, 인생에서 3년은 짧은 기간이다) 보여주고 있기도 하단 생각이 든다. 여기에 초급 한국어를 가르치고 배우는데 긴 문장은 소용이 없으니...


이렇게 짧은 초급 한국어, 인생도 초급, 하지만 그 짧음들이 이어지면, 모이면 길어지고, 커다란 덩이가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은 그것이 우리 인생임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의 인생에 빗댄다면 초급 한국어는 그가 작가가 되지 못하고 미국에 머둘러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역시 미국에서 가르친 학생들이 초급 한국어에 머물러 있듯이, 자신 역시 글쓰기에서 초급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다른 단계로 갈 차례다.


[중급 한국어]가 나왔던데, 어떻게 이야기가 이어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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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11-08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어 학습지인지 착각할듯요^^

kinye91 2024-11-09 04:5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처음에 책이름만 보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설명 읽고 소설이구나 했죠.
 
미술관 읽는 시간 - 도슨트 정우철과 거니는 한국의 미술관 7선
정우철 지음 / 쌤앤파커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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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잘 가게 되지 않는다. 마음은 있는데 몸이 잘 따라주지 않는 경우도 있고, 시간을 내기도 그리 쉽지 않기도 하다. 


사는 곳과 가까운 곳에 미술관이 있으면 그나마 갈 수 있겠지만, 대개는 사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미술관은 일부러 시간을 내야 한다. 여기에 미술에 대해서 내가 뭘 알아 하는 마음도 있고, 또 미술관에 가도 그 작가의 대표작을 보지 못할 때도 있으니, 여러모로 미술관은 우리들 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다.


하기만 그렇다고 미술이 우리와 동떨어져 있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미술은 우리 삶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도처에서, 하다못해 길거리 낙서라고 하는 것조차도 미술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만날 수 있는 것이 미술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건물을 지을 때 미술품을(조각) 설치하는 경우가 많으니 더더욱.


그래도 미술관만 하겠는가? 그 작가의 작품을 큐레이터가 정성들여 주제의식을 가지고 전시하는 미술관에 가면 좀더 집중적으로 미술을 감상할 수 있다. 미술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열리는 전시회와는 좀 다른 느낌으로 감상할 수도 있을테니, 미술관에 가보는 일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미술관을 우리 곁에 들여오기 위해서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일곱 개의 미술관(이중에 나혜석은 나혜석 미술관이라고 정식 이름이 붙어 있지는 않지만)을 소개하고 있다. 한번은 들어봄직한 작가들이기도 한데...


김환기, 장욱진, 김창열, 이중섭, 박수근, 나혜석, 이응노.


이 중에 내가 가본 미술관이 몇인가 하니, 참... 없다. 나중에 꼭 가봐야지 하는 마음을 먹으며, 이 책 뒤에 적힌 도슨트가 알려주는 미술관을 잘 관람하는 법을 머리 속에 저장해 두기로 한다.


도슨트 역할을 책에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술관에 가기를 내켜하지 않는 사람에게 미술관을 쉽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으니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각 미술관은 그 작가들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 그러니 이 책은 그 작가들에 대해서 알려주는 역할을 충실히 한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이 동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작가와 그림에 얽힌 주변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책은 그 점에서도 성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떻게 감상하면 좋은지를 알려주고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화가의 작품에 대한 열정, 치열함을 드러내주어서 좋다. 그림이 아니면 안 된다는 각오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 돈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그림이 아니면 지탱이 안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릴 수밖에 없었던 화가들.


이들은 고난에 처해서도 그림을 그린다. 그것이 고난을 이겨내는 한 방법이기도 했을 터였다. 김광섭의 죽음에서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나오고, 이중섭의 가족 그림은 헤어짐 또는 제주도의 피난 생활에서 나온 점, 장욱진의 '자화상'은 전쟁통에 화가의 소망을 담아 그렸다는 것, 김창열 화가는 '한국전쟁 후의 콱 막힌 비참과 절망을 안으로 응결시키는' (84쪽) 그림을, 나중에는 이를 물방울로 승화시켜 그렸으며, 박수근의 자신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우리네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여기에 정말로 치열한 삶을 살았던 나혜석은 어떤가. 


그리고 이응노의 '군상'. 누구나 소중한 한 존재로 함께하는 세상을 꿈꾸었던 화가의 그림. 이 '군상'에 들어있는 우리 역사. 소설가들이, 시인들이 소설로, 시로 우리 역사를 표현했다면 이응노는 그림으로 우리 역사를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역사인지는 궁금한 사람은 책을 보면 된다. 


<이응노, 군상. 이 책 206-207쪽>


이렇게 많은 작품들을 작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에 가지 않더라도 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게 해주었으니, 미술관에 가기 힘들다면 이 책을 통해서 가자. 그리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직접 미술관에 가자. 그러면 이 책은 제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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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24-11-07 15: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미술관 찾아가는 산책 느낌으로 거장들을 말해서 좋았어요.
애들과 성심당 빵집갔다가 들렀던 이응노 미술관이네요ㅎ 바로 옆 시립미술관에서 백남준 프렉탈거북선 기억도 나고요.

양주 장욱진 미술관은 넘 멀어서 갈 길이 요원하지만 넘 예뻐서 언젠가 가봐야지 했습니다 장욱진 까치 보고 싶어요;

kinye91 2024-11-07 16:14   좋아요 1 | URL
이 책에 소개된 미술관 한번씩 가보고 싶어요.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보면 책에서 보는 것과 다른 느낌을 받겠지요.
 
동물들의 위대한 법정 - 지구공동생활자를 위한 짧은 우화, 동물의 존재 이유를 묻는 우아한 공방
장 뤽 포르케 지음, 야체크 워즈니악 그림, 장한라 옮김 / 서해문집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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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동물이 소송을 건 경우가 있었다. 물론 동물이 직접 소송을 걸고 재판에 임한 것은 아니다. 동물을 대신해서 인간이 나서주었다. 왜? 동물은 한국어를 하지 못하니까. 자신들끼리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과는 소통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하지만 소송 결과는 동물들에게 그다지 이롭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각되었다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물에게 잠시 인간의 언어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재판을 한다면? 아니면 동물의 말을 알아듣고 동물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둘리틀 박사(휴 로프팅이 쓴 동화. 동물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둘리틀 박사다)와 같은 사람이 있어서 소송을 한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렇게 동물들에게 언어를 부여한다. 언어를 부여받은 동물들이 재판정에 출석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재판에 출석할 동물을 인간이 임의로 정했다. 자신들의 판단만으로.


재판에 참여한 동물 중에서 인간이 보호해야 할 동물을 선정하겠다는 의도로 재판을 연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재판에서 중요하다고 판단된 동물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은 보호에서 제외된다는 뜻이다. 보호라는 말이 인간 중심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지금 지구에서 최고 포식자는 인간이니, 인간의 뜻에 의해서 동물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현실을 감안하자.


이런 재판 역시 인간다운, 인간을 위한 재판일 뿐이다. 겉으로는 동물을 위한다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결국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요식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한 재판에 동물들은 참여한다. 비록 요식 행위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의견을 인간에게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수리부엉이, 담비, 갯지렁이, 유럽칼새, 멧돼지, 들북살모사, 붉은제독나비, 여우가 나온다. 각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자신들의 이익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살아온 터전이 인간에 의해 어떻게 침해당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자신들 역시 지구에서 귀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인간은 어떤가? 이들 중에서 또 경중을 나누려 한다.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종과 멸종시켜도 될 종을... 얼마나 인간중심적인가? 지구에서 늦게 출현한 인간이 그 전부터 지구에 살고 있던 종들을 없애려 하고 있다. 없애지 않으면 마치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인디언들을 쫓아내 인디언보호구역에 가두었듯이 그들을 보호라는 울타리로 가두려고 한다.


하지만 동물들은 인간의 놀음에 놀아나지 않는다. 재판정에 다른 동물들이 우르르 몰려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재판에 참여할 동물을 인간이 선정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이 우화의 마지막 부분이 잘 보여준다.


동물들은 각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다. 그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성토도 있지만, 결국 함께 살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어느 한 종이 멸종하면 그것은 다른 종에게도 큰 영향을 미침을 말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다. 그래서 동물들은 재판정에 서야 할 동물은 바로 인간이라고 말한다. 재판정에 들어온 개구리가 제일 먼저 한 이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이 재판을 받아야 하는 건 바로 인간이라는 겁니다. 인간이야말로, 오로지 인간이야말로 지구의 생활 환경을 맹목적으로 파괴하고 있으니까요." (173쪽)


인간이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깨닫고, 고쳐야 한다고... 그래야 지구에서 생물종들이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그것이 인간에게도 유리하다고.


이 작품의 마지막에 거북이가 한 말. 지금 우리가 명심해야 할 말이다.


"우리는 새로운 동맹을 맺고, 새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새로운 조약을 체결해야 합니다. 우리에겐 계약이 필요합니다.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쩌면 아예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생명이라는 이 기적을 공유하는 법을 말이죠.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이를 끊임없이 쇄신하며,조율하고 또다시 조율하는 법을요." (191쪽)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인간들끼리 먼저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울새가 말하듯이 인간 사이에 다툼이 끊이지 않는데 어떻게 협정을 맺을 수 있냐는 반문에 우리는 무어라고 답을 할 수 있을까? 같은 종끼리도 서로 죽이고 있는 현실에서 다른 종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러니 인간들끼리라도 먼저 공존하는, 함께 살아가는 조약, 협정을 맺었으면 좋겠다. 명목상의 협정이 아니라 진실로 우리가 지구에서 살아가려면 반드시 맺어야 할 협정이라는 생각으로.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는 데에서 시작해 다른 종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간다면 지구가 점점 살기 힘든 곳으로 변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말을 빌린 동물들의 말을 통해서 지금 우리에게 닥친 문제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생물다양성이 곧 인류의 생존임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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