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호다. 녹색 세상을 향해라는 편집자의 말이 있다. 그렇다. 녹색. 우리를 평안하게 해주는 색이다. 녹색을 자연의 색이라고 한다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녹음이 짙어가는 여름이지만, 과연 우리 세상은 녹색 세상일까? 삶창은 그런 세상을 꿈꾸면서 우리가 그런 세상에 살기를 바라고 있지만, 현재 우리 사회는 녹색과 멀어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이번 호에도 실렸지만 대구에 있는 팔현습지에 대한 글을 읽어보면 그나마 있는 녹색을 우리는 없애려고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표지 그림이 금호강에 서식하고 있는 말조개라는데, 이 말조개도 금호강변에 즉 팔현습지에 탐방로가 생기면 살기 힘들어질 것이다.


금호강과 팔현습지에 살고 있는 다른 생물들도 마찬가지고. 인간들의 편리를 위해서 다른 생물들의 생존을 위협해야 하는 시대가 과연 녹색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굳이 이러한 자연 환경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우리는 한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고 있다.


강약약강(强弱弱强)의 세상. 힘 없는 사람의 죽음은 무시로 점철하면서 힘 있는 자의 잘못은 잘못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는 이 세상. 녹색 세상과는 거리가 먼 세상이다.


그럼에도 이번 호에 나와 있는 것처럼 녹색 세상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다. 함께 살아가자고, 사람들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들, 무생물들 모두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그래서 꿀벌의 천적인 말벌에게도 측은지심을 느끼는 글도 있고, (최병찬, 천적은 적이 아니더라) 지리산과 그 산에 존재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알려주는 글도 있고(김인호, 섬진강 편지), 기후 재앙의 최전방에 있는 몽골의 아름다움을 알려주는 글도 있다.(김영언, 몽골 기행)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들만을 믿는 사회에서 서로가 불신하는 이 시대에 그래도 사람들로 인해 치유받았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글은 많은 울림을 준다.(김양미, 내 인생의 고마운 남자들)


그래, 아직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음을, 녹색 세상이 사라진 것은 아님을, 삶이보이는창, 이번 호를 읽으면서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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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신장판 3 - 듄의 아이들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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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이다. 이제 아이들의 시대다. 레토와 가니마. 그리고 폴의 여동생은 알리아가 벌이는 사건들.


폴에 의해 확립된 제국은 폴이 사라지면서 알리아가 섭정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있던 소리에 잠식당한 알리아는 폴이 원하던 방향으로 나아간다.


듄이라 불리는 아라키스 행성도 마찬가지다. 이 행성에 물과 식물, 동물들이 돌아오고 있었지만, 지금 지구의 모습으로 말한다면 황폐한 사막이 숲으로 바뀌고 있는 상황인데, 그렇다면 좋아해야겠지만, 이 행성에는 사막이 없어지면 모래벌레들이 사라지고, 그렇게 되면 스파이스가 더이상 나오지 않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또한 풍요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이 변해가고 있고, 정치는 점점 전제정치로 가고, 경제는 스파이스를 독점한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2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절대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이제 절대권력이 된 알리아는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한다. 절대권력자가 지니고 있는 불안감이 그의 내면 속에 존재하는 사악한 존재에게 자신을 맡기게 하고.


이번 권은 2권이 발표된 지 약 7년이 되어 발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책에 1976년 출간이라고 되어 있으니. 그러니 작가는 2권에서 남겨두었던 일들을 3권에서 다루기 위해 많은 세월을 고심했으리라.


우리는 지구가 사막으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아라키스 행성은 사막이 숲으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것은 바로 이 행성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또 스파이스가 나오지 않았을 때는 우주의 질서가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라키스 행성을 지구로 생각하면 안 될 일. 이를 지금 우리 상황에 빗댄다면 차라리 무분별한 화석연료의 채취로 그것이 고갈되는 상황을 상정하면 될 것. 인류 문명이 의지하고 있는 많은 연료들이 사라진다면 지금의 인류는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기본적인 지구 생태계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한데...


아라키스 행성도 마찬가지다. 알리아의 통치 기간에 다른 행성에 사는 존재들이 모래벌레가 된다는 모래 송어를 유출하려고 하고, 더 많은 스파이스를 채취하려고 하며, 아라키스는 점점 사막이 줄어들게 된다. 이는 모래벌레가 점점 사라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스파이스를 만들어내는 모래벌레들이 사라진다면 프레멘들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방어막이 사라진다는 말.


여기에 다시 폴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가 발생하고, 이것을 깨뜨리려는 설교자가 등장한다. 무엇이든지 하나가 되었을 때의 위험. 그것을 소설은 계속 제시하면서 결정론을 깨뜨리려고 한다.


폴의 아이들인 레토와 가니마가 하고자 하는 일도 그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이들에게도 알리아와 같은 과거의 존재들이 내부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과거의 존재들을 통제할 수 없다면 이들 역시 알리아와 같은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하여 이들은 자신들만의 길을 걷기로 하고, 레토는 죽음을 가장한 채 자신의 길을 간다. 마찬가지로 가니마 역시 남아서 자신의 길을 가고, 나중에 만나기로 한다.


레토의 각성을 통해 지금까지의 체제를 뒤집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 그것이 또 제국을 위험에 빠뜨리는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전복을 시켜야지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폴은 지하드의 전쟁을 보았지만 레토는 그보다 더한 전쟁을 본다. 그리고 그 전쟁이 제국을 파괴할 거라는 것도 한다. 이 파괴가 있어야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그 길을 가려는 레토.


파괴한 다음에 건설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과 결심이 필요하다. 가야만 할 길이기에 레토는 그 길을 선택한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존재들을 이겨내고.

 

폴의 제국을 이어받을 존재가 되는 레토. 하지만 레토는 초인적인 힘을 얻는다. 이는 인간의 범위를 벗어났다는 것. 소설은 여기서 끝나지만 인간이 아닌 레토가 제국을 계속 다스릴 수는 없는 일일테고.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 내면에 있는 수많은 소리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또한 인간이 미래를 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여기에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존재들을 보여주어서, 이 소설과 많은 다른 문화예술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권은 1권만큼 흥미진진하다. 2권의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고 느껴졌다면.


이렇게 소설은 4권으로 넘어간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들을 아래에 적는다.

미래는 분명하게 아는 것은 그 미래의 덫에 절대적으로 갇히는 것. - P166

무지에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습니다. 뜻밖의 일들로 가득찬 우주가 바로 제가 바라는 거에요. - P167

어떤 일은 끝이 있을 뿐 시작이 없습니다. 시작만 있고 끝은 없는 일도 있죠. 그건 모두 그 일을 바라보는 관찰자가 어디에 서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P180

자기기만의 교훈을 지나치게 잘 배운 자들은 그 기만때문에 사멸할 것이다. - P191

통치자에게 필요한 것은 감수성 뿐이오..... 훌륭한 정부는 법률이나 선례가 아니라 누구든 그 정부를 다스리는 사람의 개인적인 자질에 달려 있소.

- P 203

인간의 정신을 본뜬 기계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 P250

확실성이 절대적인 미래를 절대적으로 아는 것이라면 그것은 변장한 죽음을 뿐이다! 그런 미래는 ‘지금‘이 된다. - P402

절대적인 지식을 주장하는 것은 괴물이 되는 것이오. - P478

지식은 불확실성의 가장자리에 있는 끝없는 모험이오. 인생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현실이오. - P479

나를 통해서 너희와 그들은 혼돈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을 찾게 될 것이다. 그 길은 ‘살아감으로써 이해하는 것‘이다. - P499

훌륭한 신민들은 반드시 죄책감을 느껴야 하지. 죄책감은 자신이 실패했다는 감정으로 시작되오. 뛰어난 독재자는 민중들이 실패할 기회를 많이 제공해준다오. - P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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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신장판 2 - 듄의 메시아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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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이다. 폴이 황제가 되었다. 그를 숭배하는 종교가 생겨났다. 종교와 정치가 결합되어 다른 행성들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선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제국주의의 침략의 역사를 듄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절대 권력이 필요하다.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다. 


폴이 원한 세상이 이것이었을까? 프레멘들과 함께 하코넨과 황제를 물리칠 때 폴이 보았던 미래가 이것이었을까? 소설에서는 지하드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폴은 이런 지하드를 멈추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주가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절대 권력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종교라는 수레바퀴에 타고 더 빨리, 더 멀리 가려고 한다. 그렇게 지하드는 멈출 줄을 모른다.


반대로 절대 권력에 도전하는 세력이 나타난다. 그 권력은 너무도 달콤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차지하고 싶어진다. 따라서 2권은 절대 권력자가 된 폴과 그를 떠받치는 종교적 힘을 상징하는 누이 동생 알리야가 한 축에 있고, 그에게서 권력을 탈취하려는 세력이 한 축에 있다.


한 권력에서 다른 권력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그것은 평화가 아니다. 또다른 전쟁을 유발할 뿐이다. 자신의 권력을 내놓을 수 있는 폴이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는 전쟁이라는 우주의 폭력이 무한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폴은 안다.


그는 이러한 폭력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그것을 행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가? 폴은 미래를 통해 자신의 죽음을 본다. 그 죽음을 통해 우주의 평화를 이끌기를 원하지만, 예지를 통해 본 미래가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미래로 가는 길에는 수많은 불확정성들이 존재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이 우주의 미래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꿀 수 있는 미래를 현재가 선택할 수는 없다. 폴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죽음과 사랑하는 챠니의 죽음을 볼 수 있었음에도 그는 그것을 회피하지 않는다. 또하 챠니를 되돌릴 수 있는 기술을 지닌 자들과 거래도 하지 않는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폴은 사랑하는 챠니와 함께 사라질 뿐이다. 직접적으로 폴의 죽음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예견할 수는 있다. 눈 먼 자들은 사막으로 보내지는 프레멘들의 관습에 따라 폴도 사막으로 나아가니까.


하지만 사랑은, 현재에 충실한 사랑은 남는다. 그러한 사랑에 예지력은 필요없다. 그냥 사랑으로 존재하기만 된다. 폴과 챠니의 사랑이 바로 그렇다.


2권은 그래서 종교와 결합된 정치의 절대 권력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이 거부하려 해도 주위에서 그러한 권력을 만들어내고 이용하는 모습도. 


아주 많은 요소들이 나오고, 하코넨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이 또다른 억압을 낳는 현실도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악마와 싸우는 자는 자신이 악마가 되지 않으려고 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절대 권력을 타도하는 사람이 절대 권력이 되는 현실,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든 일임을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60년대에 쓰인 소설임에도, 우주에 있는 아라키스라는 행성을 중심으로 사건이 펼쳐짐에도 지구에서 우리가 겪는 권력들의 모습, 그리고 그러한 권력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절대 권력에 취하지 않으려면 얼마나 힘든 노력을 해야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폴의 최후가 마음 아프게 다가오지만,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는 폴의 모습이 쓸쓸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이형기 시인의 낙화 한 구절을 떠올리는 장면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이제 폴의 시대는 끝났다. 알리아의 시대가 올 것인지, 챠니가 나은 두 아이의 시대가 올 것인지, 또 그런 시대는 어떤 모습일지 3권으로 넘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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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 신장판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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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나왔지만, 영화는 보지 못한 상태.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으면 소설에서 느낄 수 있었던 상상의 재미가 줄어들까 하는 생각.


소설을 먼저 읽어야지 했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면 내 상상과 감독의 상상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을테니.


그래서 듄 신장판을 읽기 시작. 1권. 시작하자마자 분량에 압도당한다. 900쪽이 가깝다. 신장판이 6권이던데, 1권이 거의 900쪽이라니...부록까지 하면 900쪽이 넘는다.


와, 완전 벽돌 책이네... 베개로 쓸 수 있겠다. 손에 들고 읽자니 너무 무겁다. 세상에 책을 읽다가 손목이 나가는 경험을 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신장판이 아니라면 아마 이 1권도 듄 1부라고 해서 3권으로 분책을 해도 되었으리라. 그렇게 1권만으로도 듄의 세계에 충분히 들어갔으리라.


듄은 바로 아라키스 행성을 가리킨다. 사람이 살기 힘든, 사막으로 이루어진 곳. 물이 거의 없는 곳. 프레멘이라는 정체를 알기 힘든 부족들이 살아가는 곳. 그러나 이 아라키스 행성에서도 암투는 벌어진다.


이 행성을 다스렸던 하코넨 남작이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황제의 직속부대들도 개입하고. 결국 아버지를 잃은 폴. 


폴은 쫓겨서 사막 한 가운데 떨어지게 된다.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여기서 우여곡절 끝에 그는 프레멘들에게 받아들여지고, 그들의 지도자가 된다. 지도자가 되어 복수를 하는 폴. 하지만 폴은 자신에게 주어진 예지력으로 지하드(성전)이 벌어질 것을 염려한다. 성전이 벌어지는 일을 막으려는 폴.


1권은 여기까지다. 황제가 되는 폴까지. 아라키스라는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방대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사막인 이곳을 식물들과 동물들, 인간들이 함께 사는 곳으로 만들려는 프레멘들의 모습이 밝혀지는 과정. 폴이 예지력을 지니고 그들을 지도하는 과정이 펼쳐지는데...


무엇보다도 권력을 쥔 자들의 허상과 진정한 권력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소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세상을 지탱하는 것은 네 가지. 현자의 지식, 위대한 자의 정의, 올바른 자의 기도, 용감한 자의  용맹' (56쪽)


하여 소설에서는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그들과 함께하는 폴의 모습도. 그렇다면 지도자는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소설에서 지도자란 이래야 한다고 알려주고있다.


'통치자는 강요하는 법이 아니라 설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58쪽)


그렇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다. 강요는 결코 오래갈 수가 없다. 충성을 이끌어낼 수도 없다. 그냥 힘에 눌려 따를 뿐이다. 그러나 설득은 내부로부터의 충성을 이끌어낸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가 할 일이다. 권력을 쥔 자들이 지녀야 할 자세다.


이렇게 아라키스 행성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통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을 되돌아보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오래된 소설이지만 현재를 살펴보고, 미래를 고민하게 하는 진정 '오래된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아무리 예지력을 지녔다고 해도, 예지력 대로 세상이 돌아가지는 않는다. 바로 불확정성의 원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지금-여기에서 한 행동, 한 말들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 그 점을 폴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으니, 정해진 미래란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폴이 무앗딥이 되는 과정을 통해 종교의 모습도 보이지만, 바로 종교가 보여주는 천년 왕국을 소설은 추구하지만 그것이 결정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인간들이 지금-여기에서 만들어가는 곳이어야 한다.


이게 이 소설의 장점이 아닐까 한다. 그 단적인 예로 폴이 전통을 바꾸어가는 모습이 있다. 전통은 그냥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맞게 변용되어야 한다. 그래야 전통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이 미래로 이어지고, 미래에 또 변용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장면이 바뀔 때마다 이룰란 공주가 쓴 글을 앞에 제시하고 있다. 이 글이 그 장의 내용을 예측하게 해주는데,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도 든다. 여기에 또 이 이룰란 공주는 형식적으로 폴과 결혼을 해서 폴이 황제가 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룰란 공주의 글 중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만한 몇 구절을 인용한다. 이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구절이다.


'자신이 배울 수 있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 그리고 배우는 것이 어렵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22쪽)


'그대가 경멸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를 통해 그대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425쪽)


이렇게 마음에 새겨둘 만한 구절들 이외에도 기록해두고 싶은 구절들이 많은데, 무엇보다도 소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지금-여기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다는 점이 좋은 소설이다.


다음 편들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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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온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줄 줄 아는 사람이 된다고 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낀 사람은 사랑을 잃지 않는다. 미움보다 증오보다 사랑을 간직하고 그렇게 살아가려 한다.


  미움과 증오가 넘치는 세상에서 '사랑'만큼 소중한 가치는 없다. 세상에 나온 성인들이 모두 '사랑'을 외치지 않았던가. 그 '사랑'이란 이름이 다르게 쓰이기는 했지만 모두가 '사랑'임은 분명하다.


  '사랑'을 좋음, 착함 등으로 바꿔도 좋다. '사랑'은 그런 가치들을 포함하고 있으니까.


이 시집에는 그대도 나오고, 사랑도 나오고, 또 자연도 나오고, 사람들의 삶도 나온다. 분노보다는, 미음보다는 사랑이 더 많이 나온다. 그렇게 사랑은 한 사람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넘치게 된다.


박두규 시인의 시집 [두텁나루 숲, 그대]를 읽으면서 그런 사랑을 생각했다. 물론 '사랑'이란 제목을 지니고 있는 아주 짧은 시도 있다.


             사랑


단 한 번의 기억으로 한 생(生)을 버티게 하는 것.


박두규, 두텁나루 숲, 그대, 문학들. 2013년 초판 2쇄. 28쪽.


이 '사랑'을 무슨 성인들이나 베풀 수 있는 행위로 인식하지는 말자. 우리는 모두 우리 삶에서 이런 '사랑'을 베풀고 또 받기도 하니까. 그런 사랑이 우리의 삶을 버티게 하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온전한 '사랑'을 받은 적이 있음을 기억한다면... 아니 그렇게 누군가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만 있더라도.


이 시집에 실린 시 중에 '호모 엠파티쿠스'(84쪽)라는 시도 그렇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인가. '공감'이란 바로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누군가의 어려움을 알고 함께 하려는 마음. 그것이 공감이고 사랑이다. 성인(聖人)들은 더 '큰사랑(솔직히 사랑에는 큰사랑, 작은사랑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모두에 대한 사랑일 수 있음을 생각하니까... 여기서 이기적인이라는 의미가 담긴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을 베풀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살면서 이렇게라도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척'하는 것은 어떨까? '척'한다는 것은 무엇이 옳은지를 안다는 말 아닌가. 자신의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척'한다는 것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척'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척'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뻔뻔하게 너무도 뻔뻔하게 다른 사람들을 폄훼하고, 괴롭히면서도, 자신의 잘못이 뻔히 보이는 데도,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척'조차 하지 못하는, 않는 사람. 이들이 과연 '사랑'을 받은 적이, '사랑'을 한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들에게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감각이 없나 보다. 그냥 자신에게 좋은 것이면 다 '사랑'이라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여기나 보다.


그러니 '척'할 필요조차 없지. 그냥 그렇게 '사랑'이 뭔지 모르니 '척'할 수도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안쓰러워 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다.


박두규 시인의 시 중에 '척'이라는 시가 있다. 지금 우리 눈에 자주 띄는 유명한 사람들, 제발 '척'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무엇이 옳은지, 좋은지는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척

          

말죽거리 시장에서 골라, 골라 외치며

왼쪽 다리를 떠는 장사꾼인 척

자신의 등에 비수를 꽂은 원수의 손을 잡는 성자인 척

사형수가 되어 감옥에서 깨알 같은 사랑의 편지를 쓰는 지아비인 척

남북국 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쓴 영웅인 척

건국 이후 멈추었던 민주주의를 재가동한 투사인 척

동인 서인의 당쟁에 쓸려 다니며 외줄을 타는 정치구단인 척

세상의 진실을 좇아 양심에 의해 행동하는 지성인인 척

그렇게 척하며 산다고 미워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은 그가 죽은 뒤에도 죽은 척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죽은 척이 죽음을 흉내 내는 것처럼

행동하는 양심인 척하는 것은

그 양심을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하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대통령 되면 이거 다 한 번에 해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대통령 병 환자가 될 만도 하다

하지만 명환자가 있어서 명의사가 나오는 것처럼

그를 척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는 이미 척에 이른 사람이다

문제는 이르지 못한 자들의 이르지 못한 말들이다

하지 않으려는 자는 할 수 없는 자의 초상이고

척에 이른 자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행하는 자일 뿐이다.

꽃은 향기로 비우고 나비는 춤으로 비울 뿐이다.


박두규, 두텁나루 숲, 그대, 문학들. 2013년 초판 2쇄. 94-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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