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 - 인디언에게 배우는 자유, 자치, 자연의 정치
박홍규 지음 / 홍성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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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놀랍고, 이럴 수가! 하는 생각이 들고, 설마? 하다가, 그럴 수도 있겠지... 수긍도 하다가, 그래도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야, 하다가, 아냐, 내가 모르는 사실이 있어, 하면서도, 그래도? 뭔가 미심쩍어 하면서 읽었는데...

 

민주주의의 원형을 우리는 흔히 고대 그리스에서 찾았는데, 이 책에서 박홍규는 민주주의의 원형은 인디언 사회에 있다고 한다.

 

인디언들이 아시아 대륙에서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많고, 그들의 피부색과 우리들의 피부색이 비슷해서 우리는 어쩌면 같은 종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도 수긍을 하지만, 서양의 민주주의, 특히 미국의 민주주의가 영국이나 유럽의 민주주의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라, 인디언에게서 배운 것이라니...

 

이렇게 파격적인 주장을 할 수가 있나,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생각으로 읽어 갔다. 인디언들에 대해서 재조명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이제는 어느 정도 그들에 대한 생각이 완성되었다고 보고 있는데, 이렇게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그들에게서 연원했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보아서 흥미도 있었지만 반신반의 하면서 읽었다.

 

그런데... 읽어가면서 책 내용에 점점 더 빠져들어가게 된다.

 

법학자답게 근거를 들어서, 특히 사회계약이라든지 법률 쪽에서 논리적으로 잘 설명을 하고 있어서 읽다 보면 정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책을 읽어가면서 기존 지식이 무장해제된다. 기존에 내가 지니고 있던 생각이 서양의 교육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시 이래서 교육은 중요하다.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하여 지도자라고 하여도 개인의 자유를 침범할 수 없으며, 지도자이기 때문에 개인의 재산이나 권력을 축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사회였고, 그래서 그들은 작은 집단끼리 자치적인 삶을 살았으며, 이러한 자치를 바탕으로 하여 서로 연합하는 연맹체의 제도를 마련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지리상의 발견이라고 하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상륙은 사실은 침략에 다름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있으며, 이들의 침략으로 몇 천 년 동안 이어져 오던 자유롭게 자치했던 인디언 사회가 멸망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한 번은 들어보았던 이름, 라스카사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줘 같은 서양인이지만 인디언을 대하는 태도가 콜럼버스와 라스카사스가 어떻게 다른지, 우리는 이방인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이 라스카사스는 영화 '미션'의 모델이라고 보면 된다. 주인공과 신부 둘 다 합친)

 

이들이 이렇게 자유와 자치를 중심으로 자연과 함께 하는, 그렇다고 자연에 매몰된 삶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 그리고 남녀 평등이 먼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유럽의 법률에도 인디언 사회의 제도가 많이 반영이 되었다고 법률적 조항들을 예로 들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특히 인디언 사회에서 이루어졌던 자유ㅡ자치의 모습인 '호데소노니 연방회의'는 가장 적절한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미국의 연방 헌법이 이 '호데소노니 연방회의' 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저자는 미국의 헌법 학자들은 이를 믿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만, 그는 페인, 제퍼슨, 프랭클린의 예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쳐가고 있다.

 

미국의 연방 헌법이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보다는 그것이 표방하고 있는 방향이 중요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 이 책에 나오는 인디언들의 '호데소노니 연방 회의'는 참으로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미국의 초기 학자들, 정치가들이 인디언들과도 잦은 접촉을 했을테니, 이를 몰랐을 리 없고, 영국으로부터 독림하여 자신들의 헌법을 만들 때 참조했을 가능성은 높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과거의 영향력에 대해 그렇다 아니다 하는 것보다 지금, 우리는 여기에서 이들이 이미 오래 전에 실시했던 그러한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이 책을 다 읽고 미국 대통령이었던 케네디의 연설문이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특히 이 구절, 정말 지겹도록 외웠던, 그러나 잘못 생각하면 국가주의로 머물 수만 있는 그런 구절인데.. 이 구절을 아니키 민주주의에 맞게 해석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네디가 워낙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있는 대통령이고, 그의 연설문은 영어로 또 번역본으로 많이 읽히고 있으니...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my fellow citizens of the world; ask not what America will do for you, but what together we can do for the freedom of man.

(친애하는 미국 국민 여러분,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먼저 물어 주십시오.

친애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묻지 말고, 우리가 다 같이 인류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 주십시오.)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먼저 물으라는 얘기는 국가만 바라보면서 국가가 국민들을 위해서 어떻게 복지정책을 펼치를 바라만 보지 말고, 우리가 진정 원하는 사회를 위해서 우리 각자가 자유롭게 노력해서 국가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한다는 말로 바꿀 수가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오로지 중앙정부만 바라보면서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보다는 우리 자신들의 삶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우리 스스로 자율적으로, 자치적으로 만들어가는 삶을 살아가자고 하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이게 바로 우리가 요즘 말하는 풀뿌리 민주주의다.

 

그러니 이것은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는 대통령제를 옹호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자율, 자치, 협동의 삶을 만들어가도록 해야 한다는 말, 이것이 아직은 국가를 없애기는 힘들지만 국가와 함께 잘 지내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디언에게 배우는 민주적 아나키즘이란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국가를 위해라는 말에서 국가란 존재하는 실체라고 보기보다는 자치적인 삶들의 총합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케네디가 이런 뜻으로 말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국가는 개인들 위에 군림하는 리바이어던이 되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라는 말은 개인적이고 자치적인, 자율적인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먼저 고민하라는 말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뒷구절은 그대로다, 강대국을 바라보지 말자. 세계의 시민들은 각자가 인류의 자유를 위해, 그것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먼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실천을 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이럴 때 세계 연합이 성립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국제 관계가 형성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G2니 뭐니 하면서 강대국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가고 있는데, 그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아나키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또 자치적인 집단들의 연합, 이것이 오래 전부터 인디언들이 실천해왔던 일이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아나키 민주주의라는 점.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아나키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이미 실현되었던 오래된 미래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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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결에 시를 베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226
손세실리아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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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하다.

 

시에는 잘난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에서 밀쳐지고 떨쳐진 사람들이 나온다. 제주도 조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 외국에서 온 사람들, 시인들, 그리고 가족들...그들이 이 시에 나오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따스해진다.

 

시집을 읽으며 이게 뭔 소리야 하지 않고, 내용이 머리 속에 쏙쏙 들어오고, 더불어 마음 역시 따스해진다.

 

그러나 가끔 이런 시들도 있다. 우리를 따스하게 해주고 있지만, 따끔하게 우리의 정신을 깨우는 시.

 

수능 정답 발표가 난 오늘. 수능과 관련지어 이 시를 읽어보면 도대체 "수능 대박 나세요"란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60만 명이 넘는 학생 모두 대박이 나면 그것은 대박이 아니니...

 

명진스님 왈

 

요즘 절마다

합격기원 백일법회로 분주합니다

입시생 자녀를 둔 보살님들이

백배를 올리고 시주도 하는데요

그 지극함이 숙연하면서도

한편으론 딱하기도 합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기도한 사람 자식만 합격시켜준다면

이거야말로 부정입학이며

특혜 아니겠습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원을 들어달라니

부처님도 참 폭폭할 노릇일 겝니다

 

손세실리아, 꿈결에 시를 베다. 실천문학사. 2014년. 72쪽

 

이 시집. 첫장을 펼치자 다른 쪽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나를 잡는 시가 있다. 아니 첫시가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여기서 끝이다. 여기서 시작이다. 바로 이것이 이 시집이다. 너무도 짠한... 마음 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더불어 다른 시까지 연상시키는... 흑백으로 떠오르는 그림.

 

진경(珍景)

 

북한산 백화사 굽잇길

오랜 노역으로 활처럼 휜 등

명아주 지팡이에 떠받치고

무쇠 걸음 중인 노파 뒤를

발목 잘린 유기견이

묵묵히 따르고 있습니다

 

가쁜 생의 고비

혼자 건너게 할 수 없다며

눈에 밟힌다며

 

절룩절룩

쩔뚝쩔뚝

 

손세실리아, 꿈결에 시를 베다. 실천문학사. 2014년. 11쪽

 

이 시를 읽으면서 한 편의 동양화가 떠올랐으니, 특정한 화가가 그린 동양화가 아니라 그냥 동양화처럼 수수하고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맛을 지닌 그런 그림이 떠올랐다고나 할까.

 

김종삼의 묵화란 시가 떠오르고, 두 시가 하나의 그림으로 겹쳐지는 상상.

 

   묵화(墨畵)

               - 김종삼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보라. 세상의 신산을 모두 겪고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그래서 세상을 견딜 수 있는 그런 모습.

 

이런 모습이 우리를 따스하게 한다. 정말로 세상이 살만한 세상이 되는 것은 이렇게 서로 힘든 존재들끼리 어깨를 겯고 함께 할 때다.

 

할머니를 따라가는 유기견이나 힘들게 일한 소에게 손을 얹는 할머니... 이 두 그림은 다르지 않다. 이 그림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내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그래서 세상의 온도가 조금은 더 올라간다.

 

이거면 됐다. 이 시집은 이 시 하나로도 날 편안하게 한다. 날 따스하게 한다. 다른 시들을 읽어도 역시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스해지기는 하지만...

 

그래, 가을이 깊어 겨울로 접어들고 있다. 아니, 세상은 겨울이다. 이 겨울에 마음의 온도를 높이는 시. 이런 시를 읽어 보자.

 

우리에게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는 손세실리아의 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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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에게 고함 - 130여 년 전 한 아나키스트의 외침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홍세화 옮김, 하승우 해설 / 낮은산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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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년 전에 나온 글이라고 한다.

 

'상호부조론'으로 잘 알려진 크로포트킨이 당시의 청년들에게 당부하는 말이다. 짧막한 글이지만 한 세기도 더 전의 글이라고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지금 우리나라 현실에도 맞는다.

 

'오늘 나는 청년에게 말을 건네려고 합니다. 마음과 정신이 이미 늙어 버린 나이 든 분은 이 소책자를 읽으며 눈을 피로하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들에게는 제가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29쪽)

 

이 말로 시작하는데, 이 시작 부분을 보면서 과연 우리나라의 청년들 중에서 이 책을 읽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 책을 읽으려고 할 정도로 우리나라 청년들이 사회에 관심이 있을까? 이건 크로포트킨이 생각하는 것 하고는 다른데, 그는 사람들을 믿었는데, 그 믿음으로 협동, 상호성, 자치를 이야기했는데...

 

왜 나는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했을까?

 

아마도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 발간되기 전에(일제시대에는 일본어로 발간이 됐을 거라고 추측을 하는데... 이 책의 앞부분에 홍세화의 글에서 본인의 아버지가 일본어로 된 이 글을 읽지 않았을까 추측을 하고, 일제시대에 크로포트킨이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가 되었으니) 우석훈이라는 경제학자가 유행시킨 책 "88만원 세대"에서 '그는 청년들이여, 토플 책을 버리고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고 했는데, 그 반향이 미미했으며, 그 다음에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인 노혁명가인 스테판 에셀의 책 '분노하라'가 출판되어 엄청나게 읽혔음에도 변화는 없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신자유주의(나는 이게 자유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말이 더 맞다고 생각하는데)의 광풍에서 청년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임에도 서로 단결하기보다는 각자 살길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능 수시시험장 풍경을 보라. 대학에 입학하려는, 이제 성인이 되려는 학생들이 대학에 시험을 보러 오는데 대다수의 학생들이 부모와 함께 온다는 사실. 그래서 수시 시험날이 되면 학생 반 부모 반인 풍경이 펼쳐지는 우리나라 대학가 풍경.

 

도대체 성인으로서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할 십대의 끝에서 그들은 아직도 부모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청년들은 늙었다기 보다는 어리다고 해야 하나?

 

아니다. 이미 그들은 충분히 늙었다. 대학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믿음에, 그 불안한 마음에 부모를 대동하고 시험장에 오는 모습, 그것은 젊은이의 모습이 아니라 실패는 곧 끝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모험을 하지 않는 늙은이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직 그들은 학교에서 이런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학교나 가정에서 들은 소리는 대학 가야 살 수 있다는 말이 전부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라온 환경이 그랬기에 그들의 늙음을 탓하기 전에 그렇게 만든 우리를 반성해야한다. 또 소수이긴 해도 수능을 거부하는 학생들도 있고, 대학에 입학했음에도 대학을 거부하고 그만두는 학생들도 있다.

 

이런 청년들은 이미 크로포트킨이 하려는 말을 실천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 소수의 행동을 돌출행동으로 보지 않고 청년들이 당연히 지녀야 할 자세라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연이 당연이 아닌 돌출이 되어 버린 사회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 이 책에서 크로포트킨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앞에 놓은 첫 질문은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입니다.'(29쪽)

 

'그동안 쌓아 올린 지성이나 능력과 학식을 활용하여 오늘날 비참과 무지의 나락에 떨어져 신음하는 사람들을 도울 날을 꿈꾸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덕으로 타락한 탓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0쪽)

 

그렇다. 이것이 바로 청년의 의무이자 권리다. 이런 꿈을 꿀 수 있는 권리,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할 의무.

 

이 다음에 그는 의사가 되려는 청년, 법조인이 되려는 청년, 엔지니어가 되려는 청년, 교육자가 되려는 청년, 학문에 전념하려는 청년, 노동자가 된 청년, 노동자의 가족인 사람들에게 당부의 말을 한다.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에게는 그 위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되어야 바람직한지, 개인의 이기심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공부를 하게 해준 사회 각처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노고를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지낼 생각을 하라고 당부한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일, 그것은 이 글을 시작할 때 홍세화가 자신이 평생동안 다짐했던 것 중에서 지켜왔다는 '장교가 되기 보다는 사병이 되자'는 말. 남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자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크로포트킨이 당부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남보다 좋은 조건에서 태어나고 성장해서 남보다 좋은 위치에 올라 남들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되기 보다는 도대체 무엇이 올바른 길인가? 무엇이 함께 사는 길인가?를 고민하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자는 그의 당부.

 

이것이 어찌 130년 전만의 일이겠는가. 이런 당부는 지금 우리의 청년들에게 더 절실하게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크로포트민의 글이 워낙 짧은 글이라 책으로 내기 위해서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부분에 홍세화의 글. 이것은 우리나라 상황과 또 그가 겪은 상황과 연결지어 읽으면 더 좋고,

 

그 다음에 크로포트킨의 글... 많이 생각하면서 읽으면 되고, 이것이 단지 신체적 나이의 청년들이 아닌, 세상이 올바르게 바뀌기를 꿈꾸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모두 청년들이라 할 수 있으니, 마음이 늙지 않은, 아직도 좋은 세상을 꿈꾸는 그런 사람들이 읽어도 좋을 것이고, 특히 교육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꼭 읽고 적어도 이런 글이 있다는 얘기를 중고등학생에게 해줬으면 좋겠다.

 

마지막 부분은 하승우의 크로포트킨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으니,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은 이 부분을 먼저 읽어도 좋으리라.

 

이런 외침을 들은 청년들이 정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

 

여기에 나 역시 늙지 않기 위해 계속 고민하고, 내가 설 자리를 잘 찾아야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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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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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야기라고 하지만, 사실은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림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읽고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끊임없이 되묻고 있다.

 

서경식은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이산이라고 해석이 되기도 하는, 이방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말.

 

그는 일본에 살고 있다. 국적은 한국이다. 그의 형 둘은(서승과 서준식이다) 우리나라에 유학왔다가 고문을 받고 감옥 생활을 오래 했다.

 

조국에 공부하러 왔다가 간첩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몇십 년동안 한 것. 그러니 이런 형들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뿌리뽑힘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뿌리뽑힌 사람이라는 생각이 어쩌면 그를 미술에 관심을 두게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미술 중에서도 특히 현실의 모습을 느끼게 해주는 그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책은 주로 독일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뒷부분에 가면 고흐도 나오고, 살라사르라는 과테말라 사진가도 나오지만, 주요 부분은 독일의 작가들이 그린 그림을 찾아가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독일의 작가들 중에서도 당시의 현실을 그린 작가를 그는 좋아하는데, 그가 말하는 좋은 예술이란 아름다운 예술이 아니라 현실을 끊임없이 환기시켜 나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는 미술비평가들이 좋다고 하는 작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현실과 나를 발견하게 하는 작품들을 찾아 다닌다. 그런 그림에서 그는 자신을 보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식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

 

그가 찾은 작가들을 보자. 그는 1부에서 독일 작가, 그 중에서도 통일이 되기 전의 독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작가를 찾아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에밀 놀데'다.

 

나치 독일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독일 내에서 망명 생활을 한 사람. 끝까지 자신의 그림을 그린 사람. 그의 그림을 찾아가는 것을 시작으로 전쟁의 참화를 그린 '오토 딕스'라는 작가를 찾아가고, 그 다음에는 나치에 의해 학살된 '펠릭스 누스바움'을 찾아간다.

 

이들은 모두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낙인찍힌 작가들이 되고, 이 낙인은 우리나라로 바꾼다면 독립운동을 고취한 그림을 그린 불령선인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림의 미학적인 면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들에 나와 있는 현실과 사상, 그리고 서경식이라는 개인에게 다가오는 의미가 이들을 찾아가게 하고, 그 그림들에서 떠날 수 없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그림들은 단지 서경식만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국가보안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분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의미있게 다가온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 나와 있는 몇몇 그림들만으로도 아직도 우리에게는 진행 중인 일이 이 그림들에 나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이런 점에서 좋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고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아도르노의 그 유명한 말을 빌려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과연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그럼에도 시는 쓰여져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술을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겉보기에 아름다운 작품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마음에 충격을 주는 작품, 삶과 작품이 일치하는 작품, 그런 작품들이 좋은 작품이 아닐까?

 

그러므로 서경식은 사람됨과 작품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에게 작품은 곧 사람됨이다. 그런 작품들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되는 '고뇌의 원근법'은 결국 자신의 삶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남길 수밖에 없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그래서 고흐에 관한 대담이 이 책에 실린 것이리라. 원근법을 끝까지 밀고 나가 원근법을 넘어선 사람이 고흐라면, 고흐의 그림은 고흐의 전생애가 담긴 그림이라는 얘기가 되겠다.

 

그러니 고흐의 특별한 생애가 그의 그림에 관심을 끌게 한다기보다는 그의 치열한 삶의 모습이 그림 속에 나타날 수밖에 없음이, 그 고뇌가 나타나고 있음에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그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 수밖에 없으리라. 요즘 일본 사회의 모습을 보면.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도 변하지 않았으니, 그가 독일 미술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그 미술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치열하게 세상을 직시하면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개척해 나갔던 작가들. 우리에겐 좀 낯설지만 에밀 놀데, 오토 딕스, 펠릭스 누스바움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책이 나에게는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민중미술이 역사화되었다(6쪽. 책을 펴내며에서)고 서경식은 말하고 있지만, 아니다. 우리에게도 민중미술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 책에 나온 세 명의 독일 작가가 겪었던 일들을 아직도 우리 민중미술계에서는 겪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도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할 아름다움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이 세 형제의 책은 적어도 한 권씩은 다 읽었다. 모두 다 좋은 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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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시선 229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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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집을 펼치고 몇몇 시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든 생각.

 

'몸시'라는 시를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하면서 검색을 해보니, '몸시' 연작을 정진규가 썼다. 아예 몸시1, 몸시2...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몸과 늘 함께 살면서도 우리 몸에 대해서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몸은 우리와 상관없는 대상으로만 존재하다가 아프기 시작하는 순간, 몸이 나구나 하는 절실함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몸은 우리와 가장 가깝지만 가장 먼 존재이기도 하고, 우리 시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너무도 뻔한 내용이 되기도 한다.

 

김선우의 이 시집에 나온 시들은 직접적으로 '몸시'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읽으면 머리 속에서 '몸'이 자꾸 떠오른다. 몸이 생각난다.

 

원초적 생명으로서의 몸이 이 시집에서 퍼득이고 있다.

 

봐라, 이것이 바로 우리 몸이다. 몸이 생명이다. 몸이 활력이다. 이런 살아있는 몸 내음새가 시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아니, 어느 시를 읽어도 몸냄새가 난다. 때론 싱그런, 때론 비릿한 그러한 몸냄새가 시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그런 몸에서는 온갖 소리들이 난다. 살아있는 생명의 소리, 살아가고자 하는 소리.

 

그 소리들이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 몸으로 인해 우리는 살아있다. 살아있는 몸이 풍기는 냄새들, 소리들. 그 생명의 살아있음이 이 시집에서 살아 움직인다.

 

그런데 그 많은 생명들, 살아 있음을 제치고, 예전에 본 시가 바로 이 시집에 있었다니, 바로 이것이 생명이거니 하는 시가 있다.

 

단단한 고요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병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맷돌 속에서 껍질 타지며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근대며 어루만져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 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인사 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김선우, 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 2014년 초판 10쇄. 10쪽.

 

 

보라.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이, 그 소리들이 하나로 뭉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그런 모습. 도토리묵에서 세상의 생명들이 살아있는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시인.

 

그런 시. 이것이 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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