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실에서 읽은 시 담쟁이 교실 16
하상만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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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시.

 

지금 우리나라 교육현장에서 이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이 있을까 싶다.

 

과학을 좀 잘한다 하는 아이들은 시라면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고 진저리를 치고 있고, 시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과학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는 현실이니 말이다.

 

오죽하면 학교 교육 현장에서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곧 통폐합이 된다고 하는데, 이도 교과목 간의 의견 차이가 커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교육은 정권과 상관없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백년지대계는 커녕 십년지소계도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니, 원) 태양계와 안드로메다 성운과 같이 동떨어지게 교육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교육현장의 현실과는 다르게 자꾸 통합, 통섭, 융합이라고 하여 무슨 STEAM교육을 하라고 학교에 공문이 자꾸 내려오나본데, 세상에 과학과 시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지 않고, 그냥 하라고 하니, 제대로 될 턱이 없다. 그것도 대학입시에 목 매달고 있는 교육현실에서.

 

이 때 책이 나왔다. "과학실에서 읽은 시"

 

과학실에서 읽은 시라는 제목을 보고, 시와 과학을 접목시키려는 책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시에서 어떻게 과학 이야기를 풀어갈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사실 시와 과학이 동떨어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시와 과학은 우리 삶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시 따로, 과학 따로 생각하고, 교육하는 현실에서, 시를 좋아하는 아이는 과학을 멀리하고, 과학을 좋아하는 아이는 시를 멀리하는 이런 현실은 사라져야 하는데도, 그것이 쉽지 않다.

 

그 쉽지 않음에 이 책은 도전하고 있다. 시를 제시하고 그 시에서 과학을 발견해내고, 그것을 설명하면서 다시 시와 만나게 한다.

 

즉 시인은 감성으로 세상을 만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과학자는 이성으로 세상을 만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심장과 머리라고 표현한다면, 어떤 사람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머리에서 심장까지의 거리일 수도 있지만, 가장 가까운 거리가 심장에서 머리까지일 수도 있으니.

 

학교 수업시간에 시 한편을 놓고 과학교사와 국어교사가 함께 수업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얼마나 좋은가. 시를 통해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자극하는 그런 수업.

 

시를 읽으며 감성을 채우고, 감성을 통해 이성을 자극하고, 이성의 힘으로 분석하고 정리하고, 다시 이를 감성에 적용하는 그런 수업.

 

과학과 시는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그런 것임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지금 머리와 가슴(심장)까지의 거리를 가장 가깝게 해야만 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이 책, 시에서 찾아낸 과학. 비록 시인이 시를 통해 과학을 이야기해서 과학자가 보기엔 과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겠지만, 시와 과학이 만나는 접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자, 시 한 편을 보자.

 

이 시에서 찾아낼 수 있는 과학은. 또 그런 과학으로 다시 우리 가슴을 울릴 수 있는 내용은 무엇인지. 이 책에 나와 있는 내용 말고 더 많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연습. 지금 필요하다.

 

궁금하면 이 책을 읽어 보라.

 

 

내 목구멍 속에 걸린 영산강

                                          - 손택수

 

 

  두엄자리에서 지렁이가 운다. 지렁이 울면 낭창한 대 하나 꺾고 낚시를 가시던 할아버지.

 

  그날 붕어조림을 삼키면서 나는 붕어가 샄민 지렁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는데

 

  지렁이가 할아버지를 삼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할아버지가 삼킨 붕어와 붕어가 삼킨 지렁이 잘디잔 흙알갱이가 되어 지렁이 주둥이 속으로 빨려들 줄은 몰랐다.

 

  비 내린 뒤의 영산강변 할아버지 무덤가에 지렁이가 기어간다. 그래 지구상의 모든 흙은 한 번쯤 지렁이의 몸을 통과했다.

 

  머잖아 저 몸속에서 붕어를 삼킨 할아버지와 내가 머리 딱 부딪치며 우르릉 쾅쾅 천둥번개 치는 시간 있겠구나.

 

  주물럭주물럭 시간대를 마구 뒤섞는 장운동, 저 몸속으로 산맥 하나가 통째로 빨려 들어가고 말랑말랑한 반죽물 밭이랑 논이랑이 되어 꿈틀꿈틀 빠져나올 수도 있겠구나.

 

  강 주둥이에 아침부터 누가 철근을 박고 있다.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멘트를 퍼붓고 있다. 컥컥 헛구역질을 하며 강이 움찔거린다.

 

하상만 엮고 씀. 과학실에서 읽은 시. 실천문학사. 2014년 1판 5쇄. 4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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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

 

물리적인 추위보다 심리적인 추위가 더 견디기 힘들다.

 

힘든 세월. 그것을 우리는 겨울에 비유하는데, 그러나 겨울은 언젠가는 간다. 봄은 온다.

 

그 봄을 위하여 그렇게 혹독한 겨울도 우리는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다. 봄을 더 만끽하기 위해.

 

겨울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지만, 지금 당장 여기에서 겪고 있는 겨울은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봄을 생각하기 힘들어지기도 한다.

 

이 때 눈에 들어온 시 한 편.

 

그래, 나무를 보자. 나무는 땅 속에 뿌리를 박고, 땅 위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하늘을 향해 끝없이 자기를 성장시켜 나간다.

 

추운 날, 앙상한 가지만 있는 나무. 그러나 그 나무는 뿌리부터 봄을 준비한다. 다시 봄이 옴을 믿고...

 

겨울. 간다. 봄. 온다. 이것은 희망이 아니다. 이것은 진실이다.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몬이 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시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전국국어교사모임, 문학시간에 시읽기3. 나라말, 2008년 초판 8쇄. 174-175쪽

 

지금 혹독한 겨울을 겪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나에게 이 시가 마음 속에 절절하게 박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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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스님 초기경전 강의 - 한국 불자들의 공부 갈증을 채워주는 새로운 경전 읽기
미산 스님 지음 / 명진출판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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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종교로 생각해도 좋고, 철학으로 생각해도 좋다.

 

어떻게든 불교의 본질에만 들어간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가 바라는 바 아니겠는가.

 

고등학교 다닐 때 불교를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로 나눈다고 배웠는데, 그리고 우리나라는 대승불교 쪽이 강하다고 그렇게 배웠는데, 굳이 불교를 대승과 소승으로 나눈 이유가 개인의 해탈을 중시하느냐, 대중의 해탈을 중시하느냐라고 배운 기억이 있는데...

 

과연 그러한가? 개인의 해탈과 대중의 해탈이 다른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십우도, 또는 심우도를 보아도 개인의 해탈이 이루어진 뒤에는 반드시 다시 저잣거리로 나서지 않는가. 결국 해탈은 개인과 대중으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석가모니 당시의 언어였던 빨리어를 공부하고, 산스크리트어도 알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초기 경전을 공부한 미산 스님이 대중들에게 초기경전에 대해서 쉽게 강의한 내용을 펴낸 책이다.

 

미산 스님이 학승이라고 불릴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한 분이라는 것을 이 책의 첫부분에 스님 소개글에서 알 수 있는데, 학승과 선승을 나누는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스님의 자기 소개글을 읽고 알았으니, 공부와 참선이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것이 바로 불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8만대장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엄청나게 많은 경전이 있는데, 이를 초기 경전과 후기 경전(?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는데)으로 나누는데, 이를 소승경전과 대승경전으로 나누면 안된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 미산 스님이 잘 말해주고 있으니, 부처 당시의 언어, 그것도 생생한 구어로써의 언어로 기록한 빨리어 중심의 경전을 초기 경전이라고 하면...

 

초기 경전에는 부처의 사상이 생생하게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그 경전을 이렇게 구분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삼장이라고 하면 경장과 율장과 논장을 합쳐 삼장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 초기 경전에서 경장에 해당하는 것만 이야기하면, '디가 니까야, 맛지마 니까야, 상윳따 니까야, 앙굿따라 니까야, 꿋다까 니까야'러 다섯 부류로 구분한다고 한다. (50-52쪽 참조)

 

빨리어로 기록된 경전 이름이 이것이고, 이 경전들이 우리말로도 이미 번역이 되어 있으니, 우리도 우리 언어로 읽을 수 있다고 하는데, 한자어로 번역된 경전으로는 '아함경'이 있다고 한다. 즉 빨리어 경전과 아함경은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하여 서로가 서로를 보충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런 경전 설명에 이어, 초기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중심 내용들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 불교 교리에 대한, 이론에 대한 설명은 생략해도 될 듯한데...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불교의 교리를 몇 마디로 응축하라면(이것은 좀 위험한 발상이기는 하지만) '지혜와 자비'라고 할 수 있겠다.

 

세상에서 겪게 되는 일들에 대한 지혜와 그럼으로써 함께 사는 존재들에 대한 자비,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깨달음과 행함'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한데...

 

내가 나 혼자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지금의 나는 수많은 연들이 모여 이루어졌음을 아는 일, 그래서 선한 연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깨달음, 이러한 선한 연은 자비로써 이루어질 수 있음을, 초기 경전 강의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세상이 험할수록 더욱 자비가 필요하고, 자비가 필요한 세상에 대한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교 쪽 책에 마음이 가고 있는 이유가 세상이 하도 험악해서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불교의 인(因)과 연(緣), 그리고 과(果)를 생각한다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불교의 이 인연과는 현대 과학과도 통하는 면이 많으니, 오래 전의 종교이론이라고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도 부족하지 않은 것이 바로 이 인연과에 대한 불교의 이론이고, 또 이것이 사람들이 바른 살을 살도록 해주는 이론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교 경전에 대한 이야기라서 어렵다고, 또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멀리할 수 있는 책인데, 전혀 그렇지 않다.

 

종교를 떠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고, 많은 공부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스님답게 쉽게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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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 험난한 시대에.

 

역사는 진보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역사의 바퀴가 거꾸로 가고 있는지.

 

요즘은 기억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기억과 용서가 다른 개념임을, 용서는 해도 기억은 해야 함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에서 아무 것도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살까?

 

그 사람이 막 살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기억의 힘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기억을 해야 좋지 않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

 

부처가 생각났다. 그의 전생담을 담은 책, "본생경"

 

부처처럼 자신의 전생을 기억한다면, 어떻게 현생을 막 살 수 있겠는가.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이러한 기억에 대해서 명심한다면 자신들의 판단 하나하나에 신중할 수밖에 없을텐데...

 

부처의 삶을, 그의 사상을 생각하면서, 그처럼 이렇게 기억을 한다면 정말 시공을 초월해 세상을 위해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요즘, 기억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들이 기억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힘있는 사람들, 이 "본생담"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JATAKA

                 -出家는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하는 것이다.

 

옛날 자신의 삶을 모두 기억하는 사나이.

 

오늘의 나는 옛날의 나,

옛날의 나,

,

앞날의 나.

 

시공간을 초월해

나를 세상에 보내고

보내, 마침내

영원에 이른 사나이.

 

싯다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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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원 인생 -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안수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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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책을 부른다.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읽기 교육을 하는 "함께 읽기는 힘이 세다"를 읽다가 보게 된 책이다. 사실 이 책에 대해서는 예전에 알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때 한겨레21에 연재된 내용을 대충은 알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그냥 뭐 기자들이 한 달 동안 일터에 가서 노동자 체험을 한 책이네 하고 만 기억이 있다.

 

7-80년대에는 '농활'이라고 하여 대학생들이 여름방학이 되면 농촌에 가서 농사 체험을 하고, 또 나름대로 농민들과 함께 공부하기도 하는 활동이 있었고, 농활과 상대적으로 '공활'이라고 하여 공장에 들어가 노동체험을 하면서 노동자들과 함께 공부하는 활동도 있었다.

 

이런 '공활'체험만이 아니라 아예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공장으로 들어간 대학생들도 많았다. 이들을 일러 학출이라고 하였고, 이들 대부분은 위장취업으로 공장에 들어가 노조를 만드는데 힘을 썼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87민주화 투쟁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지고, 그 때 들불처럼 노동조합이 생겨났고, 노동자들의 의식도 강해지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이라는 한국노총에 상대가 되는 노동자 단체도 생겨났고...

 

그런데, 이와 반대로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던 많은 대학생들이 노동과 멀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제는 할 일을 다했다는 뜻이던가, 공장으로 들어갔던 많은 노동활동가들이 공장에서 나와 정치판에 뛰어들게 되었고, 이제는 학출이라는 말을 굳이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는 학출이라고 할 필요도 없이 청년들의 실업이 심각해 지고 있는데도 노동현장이 얼마나 열악한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대학 진학률이 80%가 넘는 나라에서 모두들 노동현장으로 떠나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노동현장을 자의적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타율적으로 떠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노동현장은 열악하기 때문이고, 노동에 대해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을 신성시 하는 사회적 분위기와는 배치되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노동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사회에서 내로라 하는 사람들은 노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런 그들에게 노동에 대해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는데... 사실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땅콩 회항' 사건만 하더라도, 아버지 잘 만나서 고생을 모르고, 노동현장의 힘듦에 대해서 한 번도 경험하지도,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드니...

 

노동이 힘들다, 노동현장이 열악하다 아무리 말을 해도 한 번 경험한 것만 못하다고, 기자들이 그런 현장을 자신들이 직접 체험해서 그 결과를 기사로 내보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생생한 노동현장의 어려움이, 그 현장에서 죽도록 일을 하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도대체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하지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그들은 노동이 생활이 아니라 생계일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이 책에 너무도 잘 나와 있다.

 

결국 기자들이 경험한 노동은 절대로 신성한 노동이 아니었다. 노동의 신성성은 책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었고, 이들이 경험한 노동은, 이들이 만난 노동자는 오로지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는, 아니 때우는, 그래서 다른 생각을 할 수조차 없는 그러한 일이었고, 사람들이었다.

 

이게 특정한 직업 이야기라고? 아니다. 이들이 어디에서 일했는지 책을 읽어보면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간다. 이들이 일한 곳은 우리가 주변에서 너무도 흔히 볼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 주변에서 늘 만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의 삶에 대해서 추상적인 인식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통해 기자들이 경험한 것과 같이 구체적인 노동현장, 살아있는 노동자들을 만나볼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는 음식점에서 일하기가 첫번째로 나온다. 음식점에서 일해봄으로써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지, 특히 여성들은 삼중고에 시달리고 있으니, 고용한 사람에게 당하는 무시, 손님들에게 당하는 무시, 그리고 일을 마치고도 집에 들어가 다시 집안일을 해야 하는 고통이 잘 나타나 있다.

 

자영업자들도 먹고 살기 힘들기 때문에 더 많은 식당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겠지만, 크나큰 홀 서빙을 단 한 명이서 하게 하는 그런 식당일, 게다가 주인의 사적인 일까지 시키는 식당의 모습이 단지 특이한 모습이 아니라 일반적인 모습이라니...

 

식당에 가서 재촉하지 말것, 느긋하게 기다려 줄 수 있을 것, 작지만 이것이 대안이라고 하니 그래, 거창한 사회구조 운운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엔 마트에서 일해보기, 마석 가구공단에서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노동해 보기, 난로 공장에서 일하기 등이 나오는데, 그 힘듦은 대동소이하다. 구구하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는데...

 

너무도 열악한 환경, 제대로 된 대우가 없는 점, 그들에게 주어지는 최저임금,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이 책이 나온 지 4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최저임금은 어느 정도나 올랐을까? 이 때에 비해 채 2000원도 오르지 않았다.

 

선진국에 들어선다고 광고하면서도 생계의 최전선에 있는 사람들이 생계를 걱정할 정도로 최저임금을 주고 있는 셈이다.

 

이 책에도 나오는데, 전태일이 분신할 즈음에는 근로기준법이 최대의 조건이었다면, 지금은 근로기준법이 최소의 기본적 조건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에 맞추려는 노동현장도 꽤 있다고 하니.. 이래저래 없는 사람들 살기 힘든 세상이다.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결정적인 대안은 없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하면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노동현장의 문제는 한 번에 해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를 안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노동현장이 보여주는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자, 문제가 이것이다. 문제를 정확히 보라. 이 책은 그것을 말하고 있다.

 

해결책은 우리 몫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

 

덧글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리 속에서는 '기본소득'이라는 말이 떠나지 않았다. 기본소득이 있다면 이들의 노동은 생계를 떠나 생활의 세계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물론 기본소득이 만병통치약은 아니겠지만, 예전에 근로기준법이 했던 역할을, 기본소득이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더 많은 고민이, 실천이 필요하겠지. 지금 기본소득 문제를 정책으로 밀고나갈 정당이 있을까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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