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와 예술 - 파리코뮌에서 베를린장벽의 붕괴까지
앨런 앤틀리프 지음, 신혜경 옮김 / 이학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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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경우 한 가지.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경우에 질서를 무시하는 혼동과 파괴를 추종하는 집단이라는 생각. 또 한 가지는 아나키스트는 테러리스트라서 테러를 맹종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제시대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바람에 많은 오해가 있었고, 또 그들이 테러활동을 한 바람에,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영화까지 만들어지는 바람에 그들은 폭력주의자로 낙인 찍히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나키즘이 잘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한 번도 권력을 잡은 적이 없다는 점이다.

 

권력을 부정하는 그들이 권력을 잡을 수는 없는 일. 권력 추구가 아니라 자율과 자치, 협동을 추구하는 그들이기에 정권을 잡고, 자신들의 생각을 강요한다는 일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직의 결정을 따르라는 말이 통할 수 없는 사상이 아나키즘이기에, 이들은 정치계에서 한 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그 결과가 권력을 쥔 집단에 의해 오해되거나 축출되거나 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 들어가는 길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 아나키스트가 얼마나 될까?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런 집단들, 그리고 아나키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아나키즘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예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자율, 자치, 협동은 예술의 기본이 아니던가. 예술은 그 본성상 아나키즘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특정한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화하려고 하며,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상들을 인정하고 공존하도록 하는, 또 작업을 할 때 혼자만이 하기도 하지만, 함께 하는 상호성이 중시되기도 하는 그런 활동, 그것이 바로 예술 아니던가.

 

이렇게 기본적으로 아나키즘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예술이 아나키즘 사상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살펴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서양에서 나온 책이라 우리나라 아나키즘과 예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이 책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아나키즘과 예술 관계를 유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은 아나키즘과 예술의 관계를 1871년 파리 코뮌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때 나오는 작가가 바로 쿠르베이다. 쿠르베를 중심으로 프루동과 졸라의 논의를 살펴보면서 아나키즘과 예술의 관계를 설명해 나가고 있다.

 

그 다음에는 신인상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미술에 관한 책을 보면서 신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점묘법을 드는데, 그 점묘법이 참 기발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나키즘과 관련성을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아, 했다.

 

점묘법. 독립된 각 점들이 주변의 점들과 관계를 맺을 때 자기 나름의 색을 띠게 되는 표현법. 그렇다. 아나키즘 역시 독립된 개인들이 자율적인 생활을 하지만, 그런 자율적 개인들의 연합으로 아나키 사회라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연결이 되는구나. 단지 예술가들이 아나키즘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또 아나키즘 사상으로 당대 사회를 표현했다를 떠나서, 미술 표현기법 자체가 아나키적 요소를 지니고 있음도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 이어서 러시아 혁명기와 공산당 독주체제의 예술을 이야기하는데, 결국 아나키즘은 러시아에서 사라지게 되고, 예술 역시 사라지게 된다.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아니키즘은 허용될 수 없는 다양성의 사상이었기 때문일테고, 자연스레 그러한 예술 역시 창작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공은 미국으로 넘어간다. 미국에서도 역시 아나키즘 사상이 꽃필 조건이 많았기 때문이다. 인종차별, 베트남 전쟁 반대 등으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상들이 난무할 때 역시 그 조류에 따른 예술도 나타나게 된다.

 

하여 미국에서 이루어진 6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는 과정에서 아나키즘과 예술이 어떻게 관련이 되는지를 이메일을 통한 인터뷰, 작품을 통한 소개 등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아나키적인 예술이 현재에도 계속될 수 있음을, 아니 계속되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나키즘이라는 말만 쓰지 않았을 뿐이지, 아나키적 예술이 많이 창작되었다.

 

가끔은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아나키적 예술은 사그러지지 않고 더 타오를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나키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억누르고 짓밟으려는 권력에 저항하는 사상, 그것이 아나키이고, 예술은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표현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 스스로 판단하여 표현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예술이고, 아나키적 예술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억압당한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을수록 아나키 예술은 더 활발히 이루어진다. 이미 충분히 자유로운 사회라면 아나키다 뭐다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압력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반발 역시 강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아나키적인 예술이 많이 나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얘기는 그 사회에 억압적인 요소가 많다는 얘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래서 아나키와 예술의 관계를 파리 코뮌부터 1990년대까지를 역사적으로 살피고 있지만, 지금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거울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할 수 있다.

 

한 번 주위를 살펴보자. 지금 우리 예술에서 이런 아나키적 예술이 얼마나 있는지.

 

덧글

 

이 책에서 예술이라고 했지만, 영어로는 Art이고, 또 주로 미술가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미술 관련 분야에서 아나키즘과의 관련은 잘 알 수 있지만, 다른 예술 분야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미술관련 이야기를 확장해서 다른 분야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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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97호 : 함께 아이 키우기

 

어린이집 폭행 사건이 연일 방송에 나오던 때, 아이를 저렇게 때릴 수도 있구나, 이렇게 우리 아이들이 커가고 있구나 하는 자괴감과 함께,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일을 막을 수 있나 하는 생각까지, 어른들의 마음을 착잡하게 하던 사건들.

 

여기에 정부가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고작 CCTV 설치를 확대하는 것이라니... 교사도 감시당하고, 아이들 역시 보호하는 이름으로 감시당하고, 여기에 아이들과 함께 하는 공간을 불신의 공간으로 만드는 정책을 대책이라고 내놓았으니...

 

어디에도 아이들을 잘 키우겠다는 정책은 없고, 오직 책임을 면하려는 정책만 난무하고 있으니,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만나 온전한 인간으로 자라나는 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고민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책임만 면하고 싶은 마음에 감시를 강화하는 그런 정책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해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 온몸이 오싹해진다.

 

며칠 전에 수명이 다한 월성 1호기의 재가동이 원자력안전위원회에서 결정되었다. 수명이 다했는데, 재가동을 해도 괜찮다고 원자력(사실 나는 핵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전" 위원회에서 결정했다고 한다.

 

이거와 어린이집 대책이 일맥상통하는 이유가 본질적인 대책 마련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현상태를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순간의 책임을 면하려는 어른들을 보고 그 속에서 보호라는 명목하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를 당하며 자란 아이들은 핵과 같은 중대 사안에서도 그 때의 책임만 면하면 된다는 생각, 누구도 장기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지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아이들이 중요하다.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말을 굳이 하지는 않으련다. 이 말은 워낙 많이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는 어른들이 늘 고민해야 할 문제이고,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 점에 대해서 민들레97호에서 특집으로 다루고 있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민들레에서는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주장하고 있기에, 내 아이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잘 자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는데, 이런 긍정적인 모습들을 적극 홍보해서 이들을 따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언론이나 다른 매체들에서도 어린이집의 부정적인 면보다는 잘 되고 있는 육아방식,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돌봄방식에 대해서 계속 홍보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민들레에서 이번에 특집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예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거나 또는 민들레라는 책을 통해서 비슷한 방식들을 이미 접한 사람들이 많지만 어린이집 사건을 통해서 일회적이고 책임을 면하려는 처방이 아닌, 정말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그런 돌봄 방식을 우리 사회에 알리기 위해서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키우는 방식에 유일한 정답은 없다. 아이가 자라고 있는 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이 이루어질 것이다. 다만, 기본적으로 아이가 행복하게 스스로 설 수 있게 돌보는 것을 공통으로 삼으면 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자세가 우리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는 기본 태도가 아닐까 한다.

 

' 내 자식을 위한 욕망이 아닐까 염려될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나름의 기준으로 '이것이 주변의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인가' 묻기로 한 것이.' (9쪽)

 

내 자식을 가장 잘 돌보는 방법은 내 자식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식들을 함께 위한다는 마음, 그리고 모든 아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돌봄 방식을 찾는 것이다.

 

그런 고민을 하는 부모의 이야기가 이번 호의 맨 앞에 나왔다. 결국 내 자식만이라는 이기심은 바람직한 돌봄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힘없는 사회적 약자의 아이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돌봄 방식,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 정책 당국자들이 명심해야 할 일이고, 또 시민단체나 교육단체에서 몸담고 있는 사람들 역시 명심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아이의 성장에 책임이 있으니, 이는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모든 아이들이, 특히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아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소외되거나 배제되지 않는 돌봄 방식을 사회가 마련하는 것 말이다.

 

그러려면 적어도 아이들에게 이런 환경만은 만들어주도록 하자.

 

'매일 하고 싶은 놀이를 찾아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간다. '자기주도적인 삶'은 가르친다고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놀이 속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본다. 친구들과 놀면서 서로 도와주고 양보하는 것도 배우고, 교사의 지시 없이도 질서를 알게 된다. 하늘을 지붕 삼아 자연의 조화를 가슴에 담으며 사계절 햇볕이 주는 유익을 매일 받아먹고 누린다.' (131쪽)

  

이번 호 참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있는데, 아이 키우기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더 많은 것들은 읽어보면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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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 나치 시대 독일인의 삶, 선한 사람들의 침묵이 만든 오욕의 역사
밀턴 마이어 지음,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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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일을 뽑으라고 하면 사람들은 아마도 망설이지 않고 2차세계대전 당시에 일어났던 유대인이나 공산주의자, 집시에 대한 나치의 학살을 이야기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는 점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잔혹한 점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여기에 언어의 조작을 통해 학살을 최종 해결이라고 한 점에서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그런데 이것이 나치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일까? 도대체 독일에 열성 나치 당원이 몇 명이나 될까? 이 책은 1955년에 씌여졌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열성 나치 당원을 1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고, 당시 독일의 인구를 약 7천만 명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100만 명이 6900만 명의 의사에 반해서 그러한 학살을 저질렀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여기서 출발한다.

 

이 책의 저자는 유대계 미국인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다음 1년 동안 독일(예전에는 서독이다)에 가서 살았다. 살면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교수라는 직함을 십분 활용하여 그 지역 주민들을 사귀게 된다.

 

그를 친구라고 하는데 다양한 직업군이 포함되어 있지만, 가장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교사(독일에서 교사는 우리나라 교수쯤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는다)이고, 재단사도 있고 빵집 주인도 있듯이 우리말로 장삼이사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물론 이들은 히틀러 집권 당시 나치에 가입한 나치 당원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은이는 이들을 '작은 자'라고 하는데, 이런 작은 자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나치 정권은 유지되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을 펼친다.

 

즉, 유대인 학살을 비롯한 전쟁이 소수의 전쟁광이나 학살광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수의 방관하는 사람들, 또는 암묵적 동의를 하는 사람들에 의지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얘기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이런 10명과의 만남이 잘 나와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은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당시의 행동을 그다지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때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뒤에 '아이히만 재판'에서 너무도 많이 나온 말 아닌가.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 아니던가.

 

그래서 이 책의 표지에 '나치 시대 독일인의 삶, 선한 사람들의 침묵이 만든 오욕의 역사'라고 되어 있는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선한 사람들의 침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내용을 잘 읽어보면 이들은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을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주어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날 날을 사는 사람에게 선하다는 말을 쓰면 안된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선하다는 표현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는 표현이 맞고 이들은 침묵한 것이 아니라, 어차피 앞날을 내다보며 현실을 파악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에 이들의 행동은 방조라고 해야 한다.

 

나서서 행동하지 않지만 적극적으로 막지는 않고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그러한 방조.

 

이들의 방조 덕에, 또 참여 덕에 나치는 정권을 잡을 수 있었고, 자신들의 행동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었다.

 

2부에서는 독일 국민성에 대해서 나오지만, 굳이 그것을 참조하지 않아도 될 거 같고, '악의 평범성'처럼 주어진 일에 생각을 하지 않고 충성을 다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니...

 

제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했을 뿐이다. 나는 내 삶을, 또는 내가 살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뿐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 않은가. 이는 커다란 광풍이 지나간 다음에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다. 세계 어디서나 이런 말을 들을 수가 있다. 굳이 전후의 독일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통일이 된 독일이고, 다시 무장도 되었고, 유럽연합의 일원이 되기도 한, 유럽에서는 강국 소리를 듣는 독일의 먼 과거 이야기에 불과한 이 책이 최근에 다시 우리나라에 번역된 이유는, 나치의 독일이 그냥 과거로만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자꾸 인식해야 한다. 이 책에서 미국인의 관점에서 독일을 비판했지만, 이렇게 독일을 비판했다면 저자는 당연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인종차별에 대해서, 또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에 대해서 비판했어야 한다.

 

남의 나라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다른 나라를 비판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나라를 제대로 보고, 같은 처지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 역시 나치 시대 독일 사람들 이야기를 읽는 이유는 그들과 같아지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 역시 방관하고 방조하고, 또는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는 얘기다.

 

아직도 우리는 남북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았고, 동서 문제도 완전히 해결이 되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인데, 이런 상태에서 그냥 넘어가거나 또는 편견을 부추길 수 있는 행동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가 소수의 정치권에게 이용당해 얼마나 큰 비극으로 치달았는지를 나치 독일이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라는 책을 우리는 우리에게 적용해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고 생각한다'고 바꾸어 보아야 한다.

 

생각한다가 정말로 자유로운지, 우리 역시 어떤 편견 속에 깊게 침윤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편견들을 방관, 방조,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것을 살펴야 한다.

 

그래야 나치 독일이 겪은 비극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다.

 

이미 한참 지난 과거라고만 치부하지 않을 그 무엇인가가 이 책에 있다. 읽으면서 계속 '지금의 나는?'이라고 나를 비춰보는 거울 역할을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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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많은 여유가 내게 들어와 다른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내 것을 버리고 비우고 비워 더 많은 것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아집을 버리고, 세상을 보는 눈이 더욱 커지고, 귀는 더 열리고, 마음은 더더 커져 마음의 통이 유연하게 늘어날 수 있어야 하는데...

 

세상이 점점 더 각박해져 가는 것을 세상 탓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잃어가는 나에게서 찾을 수도 있어야 하는데...

 

좀더 높은 자리, 좀더 힘센 자리에 있다면 더 여유가 있어서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 커야 하는데...

 

모든 것을 법으로, 법대로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간통죄를 위헌이라고 폐지한 것도 역시 법대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푸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니 법이라는 글자에 매여 판단한다기보다는 사람이 사람을, 또는 다른 것들을 융통성있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라는 사실을...

 

더 각박해져가고 있는 이 시대. 우리가 여유를 찾으려면 우리들 마음도 추스리고 다스려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먼저 더 높은, 더 힘센 자리에 있는 사람들부터 자신들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

 

온갖 비리가 관행으로 덮이지 않는 사회가 되게... 그것을 융통성이라는 이름으로 가리지 않게... 진짜 융통성은 그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자신보다 약자들을 품어안는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를.

 

남해에 여행갔다 왔다.

 

남해의 바람이 따뜻해서 봄이 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 사회에도 봄이 왔으면... 하는 바람도 지니고.

 

안차애의 시집을 읽다. 읽다가 이 시를 보고, 아, 사람도 이랬으면 하는 생각을 하다.

 

 가슴에 품어서 막아내다

 

이쪽에서 저쪽 풍경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제주 돌담

구멍 숭숭한 모공으로

얼기설기 쌓아둔 틈새로

연신 바람의 입질을 받아낸다

바람에게 속 반쯤 내주고

바람에게서 자유로워진다

아둥바둥 막으려고만 하다가는

옆구리에 심각한 골절상을 입는다는 것을

무심중에 알아

맞바람 모난 투정도 두루뭉실 달래주고

화 돋구지 않게 요리조리 숨구멍도 틔워주며

허허실실

서슬 시퍼런 풍촌(風村)에서도

찬 기운 막아내고

제 몸 다치지 않게 건사하더라.

 

안차애, 불꽃나무 한 그루, 문학아카데미. 2003년.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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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물고기 - 물고기에서 인간까지, 35억 년 진화의 비밀
닐 슈빈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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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물고기" 제목이 재미있다. 내 안에 물고기가 있다는 말로 들리는 이 말은 우리 몸에는 인류 진화의 역사가 오롯이 담겨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을 알기 위해서는 물고기를 알 필요가 있다는 말로도 해석이 되는데...

 

이 책의 제목으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은 이 책은 진화론에 관한 책이라는 거다. 인간은 진화했다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제목으로 알 수 있는데, 단지 진화론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화석학, 분자생물학 및 유전학까지 생물학 전반에 걸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얼핏 딱딱할 것 같은 책인데 읽어보면 무척 재미있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것은 이 책의 작가가 어류와 육지동물의 중간형태에 해당하는 화석을 발견하는 과정에 대한 글을 읽을 때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진화론에서 모든 생물이 진화한다면 그 연결고리들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는 '틱타알릭'이라고 이름 붙인 화석을 발견함으로써 유명해졌는데, 이 틱타알릭은 물에서 사는 어류와 뭍에 적응한 사지동물 사이의 전이단계로 여겨진다고 한다.

 

즉, 물고기에서 육지동물로 진화해 온 과정에 대한 연결고리를 찾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 화석으로 인해 진화론은 더욱 확고하게 굳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화석 찾기만이 아니라, 그는 우리의 신체기관을 물고기들과 비교하고 있다.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신체기관을 가장 단순화시키면 물고기들의 기관과 연결이 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을 과학발전으로 발견된 사실들을 예로 들어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 신체기관 중에서 머리와 손과 눈, 귀등을 통해 그것들이 어류와 양서류, 파충류 및 포유류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즉 가장 진화한(여기서 가장 진화했다는 말을 가장 우수한 이라고 이해하면 안된다. 지금까지 존재하는 생물들은 나름대로 환경에 최적화된 상태로 진화했을테니 말이다. 여기서 가장 진화했다는 말은 우리 인간을 생태계에서 가장 윗자리에 올려놓는 기존의 생각을 반영하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어차피 나 역시 인간이니까) 존재를 인간이라고 보면 우리 인간의 손은 물고기의 지느러미에 상응하고, 우리의 귀는 물고기의 아래턱뼈에 상응하고 하는 등등, 최신 과학 성과들을 동원하여 설명하고 있으니...

 

인간이 특별히 온전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주장에 반박할 근거들을 차곡차곡 쌓아둔 책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인간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고, 우리는 뇌의 발달로 인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게 되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존재니, 오로지 현재에 충실한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우리의 신체구조는 수억 년의 진화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는 점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이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라는 얘기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질병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것이 수억 년 동안 진화로 구성된 우리 몸이 겨우 몇백 년의 급속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해 생기는 병이라는 것.

 

즉, 우리 몸이 아직 변하지 않았는데 생활이 급변했음으로 사회변화를 몸이 따라가지 못해 병이 생기는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아간 것. 이것은 현대병이라고 하는 것들을 어떻게 방지할지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진화는 수백 수천 년이 지났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적어도 몇만 년은 지나야 할 터이니, 이렇게 진화론을 공부하면 과거를 알게 되기도 하지만 현재 우리 상태를 알 수 있게 되고 미래 인간에 대해서 예측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주 흥미진진하고 평이한 서술로 책이 이루어져 있어서 읽기에 힘들지도 않다. 한 번 읽으면서 내 안에 있는 물고기들을 찾는 여행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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