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과 대상이(대상이 사람이건 물건이건, 자연이건 상관없이) 우연히 한 장소에서 만난다.

 

따라서 장소는 우연이 필연이 되는 곳이고, 무의미가 의미가 되는 순간이다.

 

비록 그 상황을, 그 필연을 언어로 설명하지 못할지라도.

 

이 시집 역시 마찬가지다. 우연한 기회에 길을 걷다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대부분은 헌책방에서 만나거나 서점 또는 도서관에서 만나게 되는데, 길거리에서 그것도 다른 잡다한 물건들을 내어놓고 판매하는 벼룩시장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눈을 여러 곳으로 돌리다가 시집이 몇 권 놓여 있는 가판을 보게 되었다. 어, 시집이 있네... 모두가 '문학과지성사'판 시집들이다. 한 예닐곱 권 있었나 보다. 읽은 시집과 읽지 않은 시집을 분리하다가, 모두가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시집이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고 누구의 마음에도 들어가지 않고 길거리로 나앉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그것도 시 하면 알아주는 '문학과지성사' 시집들이.

 

어떤 시집들은 이미 내가 읽은 시집이기도 했지만, 어떤 시집들은 도대체 외면당해도 이렇게 외면당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먼지를 켜켜히 쌓아놓고 있는, 퇴색의 흔적들만 남은 시집들이었다.

 

그런 시집을 제해놓고, 먼지가 덜 쌓인, 그래도 세월의 힘을 덜 묵은 시집을 두 권 골랐다. 그 중의 한 시집이 바로 하재연의 '라디오 데이즈'

 

시인의 이름도 처음 듣거니와 제목도 신선해서 골랐다. 라이오의 날들이라니... 웬지 아날로그적 감성이 있을 것 같아서, 내 지난 날의 향수를 자극할 것 같아서 골랐는데...

 

이런, 참... 시가 어렵긴 하지만, 이토록 시의 내용이 인과성을 배반하고 의미를 삭제해 버렸을 줄이야.

 

인과성 없음. 의미 없음. 내 말은 나와 상관없음. 유체이탈 화법이 춤추는 시대를 미리 경험한 것도 아닐텐데, 그런 지금의 모습이 이 시집에 고스란히 나와 있다니...

 

내가 해석 못할 내용을 이렇게 유체이탈 화법이 난무하는 시대를 먼저 전유해낸 시인의 시집이라는 말로 나를 위로하고자 하는데...

 

그래도 마음이 편치는 않다. 좀 이해되게 시를 쓰면 안되나? 시가 마음 속에 들어와 그 속에 머물러, 언제든 내가 원할 때 내 마음을 울리게 하면 안 되나?

 

현대가 이렇다고 해서, 이미 너무도 많은 시인들이 시를 써서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해도 그래도, 언어의 기본 의미는 의미 전달 아닌가.

 

'무의미 시'라는 말도 있지만 적어도 그런 시는 소수였으면 좋겠다. 시는 의미를 지니고, 읽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마음을 울렸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이다. 아무리 나와 세상은 상관 없다는 태도를 지닌 말들이, 말과 행동이 겉도는 그런 세상이라 할지라도.

 

이 시집에서 내가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시가 없다. 시집 뒤의 해설을 읽어도 그럴까 하는 생각만 들뿐, 마음에는 와 닿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차례 읽은 시가 있었으니, 그 시는 바로, '아마도 내일은' 이라는 시다.

 

아마도 내일은

 

아마도 내일은

오래된 눈

 

누군가 장례식장으로 가는 차를 몰고

그대는 죽지 않고 나는 살아 있네

 

눈은 날리고 날리는 눈은

유리창에 부딪혀 녹아 없어지네

 

그대의 검은 머리에 내려앉고

내 검은 눈동자를 비껴 나가던

 

오래된 눈 창에 얼룩을 남기고

나는 얼룩을 지우네

 

누군가 흰 꽃을 던지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네

 

노래는 끝을 알 수 없이 희미해져

그대는 죽지 않고 나는 살아 있네

 

아마도 내일은

그대와 나와 오래된 눈

 

하재연, 라디오 데이즈, 문학과지성사, 2012년 초판 4쇄.  26-27쪽.

 

내용은 몰라도 같은 시구들이 반복되어, 또 행의 끝구절이 같은 음절로 끝나 운율을 형성하고 있다. 각 2행으로 이루어진 연들이 서로 짝을 이뤄 자연스레 형성하고 있는 운율은 이 시를 읽기에 좋게 하고 있다.

 

그냥 입 안에서 웅얼웅얼 읽기에 좋다. 그래서인지 자꾸 눈길이 가고 읽게 된다.

 

세 대상, 눈, 그대, 나... 이들은 모두 내일에 살아 있을 것이다. 그 살아 있음을, 이렇게 생기없게 노래할 수도 있다니... 살아 있음이 마치 오래된 눈.... 눈은 내리면 금방 녹는다. 그런데, 오래된 눈은 깨끗한 하얌을 잃고 더러운 검음을 유지한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존재를 순간에서 지속으로 바꾸어 놓는다. 세월의 힘이 켜켜히 쌓인 눈. 그것이 오래된 눈이다.

 

그럼 이런 오래된 눈은 누구인가? 나는 자꾸 그것이 바로 사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대의 머리에 내리는 눈은 세월의 힘으로 하얗게 변해가는 머리로 해석을 할 수 있고, 내 검은 눈을 비껴가던이라는 눈은 내가 애써 외면하던 늙음이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장례식장에 가서 남의 스러짐을, 사라짐을 흰 꽃으로 애도하지만, 정작 우리는 살아 있다.

 

삶의 영욕을 모두 안은채... 그래서 젊은날 환희에 찼던 '노래는 끝을 알 수 없이 희미해지지'만 삶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젊음의 생기가 사라지는 '아마도 내일은' 그러나 그 내일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내일이 되어야 하리라.  

 

그렇다면 늙음은 사라짐이 아니니, 늙음이 생기로 존재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늙음은 젊은 시절의 노래를 이어부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노래를, 늙음에 맞는 노래를 만들어 불러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아마도 내일은' 젊음은 젊음답게, 늙음은 늙음답게 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상태가 되어야 유체이탈의 화법이 사라지지 않을까. 자신의 세대에 맞는 언어를, 자신의 상태에 맞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런 곡해 아닌 곡해, 굳이 의미를 찾지 않아도 될 시에서 굳이 의미를 찾는 그런 나. 아직은 언어와 의미가 일치한다고 믿고 있는 나를 이 시집에서 애써 찾고 있었다.

 

이게 이 시집과 나의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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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 작은숲 청소년 10
강물 지음 / 작은숲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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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갈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루카치는 그의 소설의 이론에서 말하고 있다.

 

그런 시대를 우리는 서사시의 시대라고 한다. 영웅이 등장해서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기록한 문학만이 존재하던 시대.

 

사람들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하늘에 주어진 별의 인도에 따르면 된다. 별이 너무 멀다면 자신의 시대에 살았던 영웅들을 따르면 된다. 그러면 인간다운 삶은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행복한 시대이긴 하지만, 고민이 없던 시대.

 

이런 시대를 넘어 문제적인 인간들이 등장하는 근대가 된다. 근대에는 신이 사멸하고 인간만이 존재하게 된다. 온갖 욕망을 지닌 인간들의 욕망과 욕망이 부딪혀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이런 근대의 시대, 문제적 인간의 시대에 등장한 문학이 바로 소설이다.

 

하여 소설에는 문제적 인간이 등장한다. 문제적 인간이란 보통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사시의 시대처럼 아무런 고민없이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문제적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평범하지만 무언가 문제를 지닌 인간, 그래서 문제를 일으키는 인간이 소설의 주인공이 된다. 그런 주인공들이 작품 속에서 삶을 펼쳐가면서 보여주는 온갖 문제들이 우리들에게 삶의 방향을 알려주고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그래서 소설은 읽기에 불편하지만, 읽고 나서는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집도 마찬가지다. 갈래를 구분하라면 주인공들이 모두 학생들이라는 점에서 '청소년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니, 무슨 프랙탈 이론이니 뭐니 하지 않아도,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 학교에서도 일어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학생들이 주인공이지만, 단지 젊은시절을 보낸 학창시절의 이야기로 이 소설을 끝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학생들을 청년들로, 어른들로 바꿔도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성립한다.

 

학교 또는 학생이라는 배경을 지닌 문제적 개인이 나오면 우선 읽기에 불편하다. 좋은 얘기를 들어도 시원찮을 꿈많은 청춘 시기에 안 좋은 얘기들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미래의 가능성을 이야기해도 부족할 판인데, 현실의 끔찍함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치 교육이론서를 펴내는 출판사 중에 '교육불가능성'을 내걸고 책을 내는 출판사의 책 내용들이 현실을 적확하게 짚어내기에 한 편 수긍이 가면서도 읽기에는 몹시 불편하듯이, 이런 소설들은 그렇지 하면서도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생산적 불편함이다. 나를 돌아보고, 내 길을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도 마찬가지다. 학교 또는 학생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꼽아 보자.

 

가출, 폭력, 핸드폰, 성 등등

 

가출,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음을 둘 곳이 없는 아이들은 가출을 감행한다. 그런 가출이 어떤 결과에 이를지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를 생각하기보다는 지금 있는 현실이 지긋지긋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선택'이라는 소설과 '염소의 꿈'이라는 소설에 이런 일을 감행한 문제적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잘 담겨 있다.

 

책의 순서대로 하면 '선택'이 먼저고, '염소의 꿈'이 뒤에 실려 있지만, 가출을 중심으로 소설을 읽는다면 '염소의 꿈'을 먼저 읽고, '선택'을 읽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어디로 가지 못하게 매여 있는 상태, 줄에 묶여 있는 염소와 같은 처지라고 느끼는 여학생이 바다를 보고 싶다는 마음에 혼자 바닷가로 온다. 일명 가출이다. 그는 단순한 꿈을 지니고 있지만, 그 꿈조차 이룰 수 없을 정도로 현실은 각박하다.

 

끈을 끊고 나온 염소는 자유를 찾기 보다는 죽음에 한 발 더 다가갈 수밖에 없다. 제 힘으로 살아보지 못했음으로. 

 

하지만 끈을 풀고 나왔다고 해서 모두 죽음으로 가진 않는다. '선택'에서는 온갖 방황을 하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가지만, 결국 제 자리로 돌아온다. 그 돌아온 자리는 예전의 그 자리가 아니다. 나선형 발전을 이야기하고, 변증법 운운 할 필요도 없이 이미 자신이 온몸으로 일을 겪고 돌아온 자리는 예전의 자리일 수밖에 없다.

 

삶도 예전처럼 펼쳐지지 않는다. 그것은 '선택'이다. 강요된 선택이든, 자발적인 선택이든... 어쨋든 살아가야 함은 선택해야 함이니. 이렇듯 두 소설은 여학생의 가출에 대해서 문제적 개인을 등장시켜 우리에게 그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용감한 형제'는 사춘기 남학생의 성에 대한 문제적 개인을 등장시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나는 형과 공부에 찌들려 지내다 결국 형과 같은 길을 가는 동생,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위 행위밖에 없다.

 

동물적 욕망 배출... 도서실에서 자위를 하다 걸린 형이나 수업시간에 자위를 하다 걸린 동생이나 그들의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는 동물적 감각만 남아 맹목적인 감정 방출을 할 수밖에 없다.

 

왕성한 성에 대한 욕구를 억압만 하고 있는데, 이런 성적 욕구를 긍정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지, 용감한 형제를 통해서 생각하게 하고 있다.

 

내용이 상당히 심각할 수 있음에도 형의 관점을 빌려서 소설을 전개하고 있기에 오히려 유쾌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경쾌하게 진행이 되어, 청소년의 성적 욕구에 대해서 미소를 지으며 읽을 수 있다.

 

이 정도쯤이야? 빌헬름 라이히는 청소년들에게도 성생활을 할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했고, 경제학자 우석훈도 "88만원 세대"에서 청소년들에게도 섹스를 허하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성적 욕구를 억압하면 그것은 파시즘으로 갈 확률이 높다고 라이히는 주장했는데, 파시즘까지는 아니더라도 프로이트의 말을 빌리면 왜곡된 성의식으로 전이될 수도 있지 않은가.

 

가볍게 웃으며 읽을 수 있는 소설이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그런 '용감한 형제'다.    

 

'스캔''니는 지는'은 남학생과 여학생의 학교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소설이다.

 

'스캔'은 마동탁이라는 나의 관점으로 그 반의 학생들을 관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말 그대로 스캔이다. 학교 생활 스캔. 특히 남학생들, 요즘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생활하는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스캔했다고 보면 된다. 이것은 거의 남학생들에게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여기에 약간의 추리까지 가미해서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에 대해서 잘 스캔해서 보여주고 있다.

 

반대로 '니는 지는'은 여학생들의 생활 모습을 스캔한 것이다. 화장, 청소년 화장, 우리가 아무리 그것의 문제점을 이야기해도 여학생들에겐 먹히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경쾌한 문체로 잘 표현하고 있다.

 

왜 이 아이들이 화장에 집착하는지, 사회문화적 상태까지 가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자신을 갖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가 있다. 왜 그렇게까지 제 얼굴에 덕지덕지 화장품을 발라대는가. 어른들에겐 덕지덕지지만 아이들에겐 자존감을 회복하는 행위다. 그것은 곧 자기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이런 몸부림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문제적 개인들, 그것이 바로 '니는 지는'에 나오는 주인공들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읽기에 힘들었던 소설, 어쩌면 어른들이라면, 특히 교사라면 이 소설은 읽는 내내 불편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졸업'이다. 한 시기를 끝내고 새로운 시기로 나아가는 행사, 그것이 바로 졸업인데... 이 소설은 졸업을 하지 못한다. 그 졸업은 또다시 같은 생활을 반복해야 하는 곳으로 가게 하는 절차일 뿐이기 때문이다.

 

교문을 나서며 나는 이제 이곳을 졸업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거쳐야 할 학교가 남아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캄캄해졌다. 234-235쪽

 

이런 생각을 한 주인공은 학교에서는 모범생이라고 불리는 학생이다. 학급 회장도 하고, 교사에 대해서도 우호적이다. 나름 생각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있는 학급에서 일어난 갈등에 대해서는 해결할 능력도 해결할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냥 방관자일 뿐이다. 이런 방관의 자세는 한 번도 학교에서 교육의 주체가 되어 본 경험이 없는 학생들이 지닐 수밖에 없는 자세다.

 

소위 민주교사라고 하는 담임과 학교 폭력의 우두머리인 수미 사이에서 그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아니, 담임에게 수미의 문제를 말했다가, 담임의 민주적 해결(?) 앞에서 마음을 닫아 버린다. 나설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이 소설집의 해설에서 해설자의 말을 빌리면 민주교사는 전교조로 대표될 수 있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전교조가 합법화되고 해직되었던 교사들이 학교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자마자 벽에 부딪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벽은 교육관료들이 아니라 학생들이었다. 학부모들이었다. 그들은 민주적인 교사라는 이유로, 학급을 민주적으로 운영하려는 그들의 방침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주어진 것을 잘하고, 폭력에 길들여진 학생들에게 그들은 낯선 존재일 뿐이었다.

 

'졸업'에서 담임이 아이들에게 배척당하는 과정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너무도 깊게 박혀 있는 폭력의 상동성을, 힘이 센 학생에게 꼼짝 못하고, 더 힘센 학생부장에게 설설기는 그런 폭력의 위계를 민주교사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서히 이들은 아이들에게서 멀어져 간다. 그래서 이들이 멀어져 감과 동시에 학교도 '교육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이 읽기 힘든 이유다. 우리나라는 중학교까지가 의무교육인데, 학교에서 교육이 불가능함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렇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그것을 이 소설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내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이름 붙이기 어려운 교사였다. 잘 알려지고 편한 방법을 버리는 대신 자신만의 방법을 고집하고, 자신의 실패조차도 우리가 배우도록 한 교사였다. 그러기에 그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까? 234쪽

 

나는 여기서 실패를 찾지 못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는 한 그 교사는 성공한 것이다. 교육의 성패는 짧은 시일 안에 판명나지 않는다. 교육은 학생들 마음 속에서 삭고 삭고 곰삭아 언젠가 한 번 나타난다. 나타나지 않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을 수도 있다.

 

하여 자신이 하고자 하는 교육을 끝까지 밀고나간 소위 민주교사는 실패한 교사가 아니다. 비록 성공했다 하기 힘들지라도, 소설 속에서 수미가 담임의 병원을 서술자에게 묻고 있을 때, 비록 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교육은 계속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졸업'에서 문제적 개인은 교사다. 그는 새로 생긴 벽에 좌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그런 모습에서 우리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소설의 시대, 별을 보고 길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문제적 개인을 보고 자기의 길을 돌아볼 수는 있다. 이게 바로 소설의 힘이다.

 

하나하나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면 좋은 소설들이다. 최근에 읽는 이야기 문학교육에 자료로 써도 좋을 그런 작품들... 불편하지만 즐거운 소설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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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모험놀이
방승호 지음 / 이지스에듀(이지스퍼블리싱)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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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왜 학교의 교장들은 학교에서 가장 큰 방을 쓸까? 그렇게 큰 방을 쓰면서도 그들은 학생들과 만나는 시간이 가장 적다. 가장 적은 정도가 아니라 교장의 얼굴을 모르는 학생들이 태반이다.

 

학생들만이 그러하겠는가. 교사들도 교장과 이야기를 나눠보지 못한 사람이 많으리라. 그만큼 교장이라는 자리는 권위적이고, 또 남들과 떨어져 있다.

 

외국의 교육관련 책들을 읽으면 교사는 수업에 전념하고, 학생 생활지도에 문제가 생기면 교장에게 의뢰를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교장은 학생들을, 그것도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학생들을 수시로 만나고, 그들을 지도하는 책임을 진다. 그런 그들에게는 큰 방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 학생들과 만나고 학생들과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교사들이 수업을 하는 공간만큼 큰 공간을 교장에게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외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 교장들에게 큰 방을 주는 일은 무언가 좀 아쉽다. 공간의 낭비로 흐르기 쉽다. 기껏해야 부장교사와 같은 특정교사들의 회의 때나 교장실을 쓰니 말이다.

 

교장에게 학생 상담의 의무를 주어 그 큰 방을 활용하게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 책을 쓴 방승호 교장에게는 더 큰 방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만큼 학생들을 자주 만나며, 자신의 방에서 학생 상담을 하기 때문이다. 그냥 앉아서 하는 상담이 아닌, 몸을 움직이는 상담.

 

어쩌면 교장의 바람직한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여러 책에서 만난 방 교장은 학생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3집까지 음반을 낸 가수이기도 하다는 사실, 교장이라는 행정가의 업무뿐만이 아니라 모험상담가로 활발한 상담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매체를 통해서 접할 수 있어서 이런 교장이 학교에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 책은 가정에서 또는 학교에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모험놀이를 소개하고 있다.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고, 모험놀이 방법을 소개하고 있어서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비록 제목에 '우리집'이라고 하여 가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중심으로, 또 부모에게 권하는 내용으로 책이 짜여져 있지만, 교사들이 상담이 필요한 학생을 데리고 할 수도 있다.

 

부모나 교사에게 모두 유용한 책인데... 문제는 시간이과 공간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학교에서 무슨 문제를 지닌 학생들은 가정에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이 대다수다. 대부분은 가정에서 인정을 못받아 애착관계가 형성이 되어 있지 않거나, 부모의 폭력적인 모습으로 상처를 받은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의 문제는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부모의 문제다. 그런데 이런 부모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할뿐더러 안다고 하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할 시간이 없다.

 

먹고 살기 바빠서, 정신없이 일하고 와 집에 와서는 고꾸라지기 일쑤인 사람들이다. 맞벌이도 그렇지만, 맞벌이가 아닌 부부는 어느 한 쪽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잘 고쳐지지 않는다. 부부싸움의 대다수가 돈때문이라고 하듯이 가정이 힘든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대부분 돈이다.

 

돈이 없으니, 시간의 여유가 없고, 시간의 여유가 없으니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시간을 확보해주어야 한다. 가정은 집이라는 공간이 있으니, 공간 확보에는 문제가 없지만 시간 확보에 이렇듯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학교는 공간이 부족하다. 상담실이라고 있지만, 그곳은 대부분 앉아서 할 수 있는 공간이고, 수업을 마친 교실에서는 책걸상이 문제가 된다. 그렇다면 다른 유휴공간은? 그런 공간은 방과후다, 동아리다 하여 다른 학생들이 이미 사용하고 있다.

 

가장 여유 있는 공간은 교장실인데... 누가 교장실을 상담하는 장소로 이용하겠는가. 도대체 어느 교사가, 교장이 있는데... 또 교사들은 이런 저런 일로 바쁘다. 절대적인 시간도 부족하다.

 

학생들 상담은 이렇듯 학교와 가정에서만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가 여유로운 사회로 가야 한다. 어느 정치인의 말대로 '저녁 있는 삶'이 구현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 문제도 제대로 접근할 수 있다.

 

학교에서는 방 교장과 같이 교장실을 상담실로 쓸 수 있는 교장들이 나와야 하고, 가정에서는 아이들과 몸을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사회가 그런 식으로 변화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가 살고, 부모가 살고, 사회가 산다. 우리나라가 산다.

 

문제가 있는 학생이 있는 가정이 아니더라도 부모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일테니, 아이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교사들도 이 책을 읽으면 좋다. 적어도 한두 개쯤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과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이나 시간은 교사들의 의지가 있다면 힘들어도 마련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러면 학생과 더 좋아진 관계를 맺고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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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

       -짝사랑

 

무더위에 지친 몸을

씻어주는,

대기를 청정하게 하는,

마음을 맺어주는,

너무도 아름다운

열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순 · 간 

이젠

내 곁에 있지 않는

내 맘 속에만 남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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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문학 도덕교육 - 이론과 실제
도홍찬 지음 / 인간사랑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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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교육'을 강조하고 있는 지금, 따로 인성교육을 왜 하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별 생각이 없었는데, 우리나라 학교 교과과정에 도덕이라는 교과목이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미 도덕 교과목이 있는데, 학교에서 인성교육을 실시하라고 하니, 그럼 기존에 존재하는 도덕 교과는 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

 

도덕은 윤리고, 삶의 자세이고, 철학인데... 그렇다면 도덕이라는 교과목 자체가 인성 교과목일텐데... 왜  있는데 없는 것처럼 말하고 법률을 제정하고 그러지.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 하도 오래 돼서 학교 교육과정을 모두 잊었나 보다. 역시 우리나라 학교 교육은 대학 입시까지만 의미가 있고, 대학에 들어가면 다 잊어버린다더니, 국회의원이나 행정부의 고위 관료들도 여기서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인성을 학교에서 가르치라 마라 하지 않아도 이미 교육이라는 말에는 인성이 포함되어 있다. 학교에서 교육을 하는데 인성을 제외하고 누가 지식만을 가르친단 말인가?

 

예전 교사들이 흔히 하던 말이 지식만을 배울 생각이면 왜 학교에 오냐고, 그냥 학원(결코 학원 강사들을 무시해서가 아님. 예전엔 분명 이렇게 말하는 교사들이많았음)이나 학교 바깥에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찾으면 된다였다.

 

그만큼 학교에서는 인성을 기본으로 깔고 있었다는 얘기다.(사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학교에서 제대로 된 인성을 배운 학생이 얼마나 될까? 여기에 대한 통렬한 반론은 유하의 시 '학교에서 배운 것'에 나와 있다.) 인성을 다른 말로 하면 도덕이고, 이 도덕이라는 말에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라는 것들이 모두 들어 있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도덕교육은 어떻게 할까? 아니, 어떻게 해왔을까? 궁금증이 인다. 이 책은 그런 궁금증에 대한 답을 해주고 있다.

 

도덕교육을 직설적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레 학생들의 마음에 스며들게 한다. 도덕은 스며들어 배어나와야 한다.

 

이야기는 도덕을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이야기 속에 담고 있다. 이야기를 읽거나 들으면서 자연스레 도덕을 마음 속에 받아들인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익히게 된다.

 

이런 이야기가 하나의 갈래로 굳어지면 그것은 문학이 된다. 하여 도덕 교육에 문학이 들어오게 된다.

 

앞 부분은 전문적인 내용이다. 그러니 도덕교육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읽지 않아도 된다. 김정운의 말처럼 굳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뒷부분, 문학으로 직접 도덕교육을 한 사례는 읽을 만하다. 재미도 있고, 이렇게 도덕 교육을 했구나 할 수도 있고, 문학과 도덕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알 수도 있고, 또 학생들이 직접 문학 작품을 읽고 도덕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쓴 글을 읽을 수도 있으니... 여러가지로 괜찮다.

 

작품들도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에게는 친숙한 작품들이 많이 나온다. 고등학교 교육까지 받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읽었을짐한 '감자, 광장, 어린왕자, 동백꽃, 나무를 심은 사람, 치숙, 자전거 도둑, 모래톱 이야기 등등'

 

그래서 아이를 둔 부모라면 이 작품들을 아이에게 읽히고 이 책에 나와 있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책을 좀더 깊이 있게 읽게 하는 방법으로, 또 인성을 지니게 하는 방법으로. 일석이조다.

 

하여 이 책을 읽다보면 '인성교육' 운운하면서 마치 새로운 교육을 한다는 듯이 호들갑 떠는 교육관료들과 정치권들이 한심하게 보인다. 

 

이미 이렇게 하고 있는데, 충분히 하고 있는데, 여기에 뭘 더 더하려는지...

 

이 책은 도덕교사들만이 아니라 학교에서 교육하는 모든 교사들에게도 의미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요즘은 통섭, 융합 이런 말들이 유행하고 있다. 교과도 자신의 교과만으로 수업하는 것이 아닌, 여러 교과들이 함께 수업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유학기제 또한 이런 방향 아니던가. 그렇다면 문학을 가운데 두고 많은 교과들이 모여 공통된 수업을 할 수 있다.

 

"따로 또 같이, 같이 또 따로"

 

가령 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를 놓고 보면 국어, 도덕, 사회, 역사, 과학, 기술 교과목이 함께 수업할 수 있다.

 

문학 작품의 이해는 국어에서, 작품에 나오는 도덕 관련 쟁점은 도덕에서, 당시 사회의 모습은 사회와 역사에서, 홍수 방지 또는 보 등에 대해서는 과학과 기술에서 다룰 수 있다.

 

그러니 문학을 두고 자연스레 통합교육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문학을 도덕 교육의 도구로 삼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단지 도덕교과를 공부하는 사람만이 아닌, 여러 교과의 교사들도 참조할 만한 책이 되는 것이다. 물론 아이들에게 책을 깊이 있게 또는 도덕적인 품성을 기르기 위할 목적으로 책을 읽히는 부모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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