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에 관한 책을 읽다가 집에 김춘수의 시집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교과서에서 배운 김춘수는 그야말로 난해시의 대명사였는데... 그가 주장한 '무의미시''의미'로 해석해 내는 것이 바로 학교 국어교육이었으니,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그런데 이 시집을 읽으니 그다지 어렵지 않다. 꼭 '무의미시'라고 할 필요가 없다. 이상하게 '의미'가 잡힌다. 세월이 흘러서인가. 아니면 학교를 넘어서인가.

 

이 중에 '나의 하나님'이라는 시... 요즘 세태와 관련지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줄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문학세계사. 1993년 초판 1쇄. 59쪽.

 

만약 신이 있다면, 신자들에게는 이런 불경스런 질문이겠지만, 신이 있다면 이 세상이 지금처럼 굴러갈 수 있을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는데, 지금은 음식이 냉장고에서 썩어가고, 먹다 남은 음식들을 버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어디에선가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상태.

 

농사를 짓고도 남은 것이 없어 작물을 키울수록, 팔수록 더더 손해가 나 결국 눈물을 머금고 작물을 엎어버리는 농민들이 있는데, 몸에 좋은 것이라고 외국의 것을 굳이 들여와 먹는 사람들이 있는 상태.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정말로 신이 있을까? 나는 기독교 신자들이 쓰는 '하나님'이라는 말보다는 '하느님' 또는 '신'이라는 말이 더 좋은데...

 

이 시에 나오는 하나님은 '늙은 비애, 푸줏간의 살점, 놋쇠 항아리, 어린 순결, 연둣빛 바람'이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개념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아니다. 긍정적이다.  '늙은'이라는 얘기는 '낡은, 오래된, 쓸모없는'이라는 말을 연상시키고, 비애는 슬픔을 뜻한다. 결코 긍정적으로 해석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늙은'은 '오래된'이고, '비애'는 '슬픔, 연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 '늙은 비애'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닌 '오래된 연민'이라고 보면 긍정적이 된다.

 

모두를 긍정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오랜 연민을 지니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라는 표현을 통해, 특히 '커다란'이라는 표현을 통해, 넉넉하게 모두가 먹고 살 수 있게 음식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음식을 담아둘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한데, 신은 역시 이를 외면하지 않았으니, '놋쇠 항아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먹을 것을 준 신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세 단계의 변화'라는 글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어리디 어린 순결''아이'의 단계에 해당한다. 거침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 거리낌이 없이 행동할 수 있다.

 

자, 이런 신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비록 보지 못하더라도 늘 우리 곁에서 '연둣빛 바람'처럼 우리들을 싱그럽게 해주고 있다.

 

그랬으면 좋겠다. 신은 이렇게 우리들의 삶을 풍요롭게, 행복하게 해주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신은 인간이 자신의 뜻에 거스를 때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한다. 바로 이런 신이 지금 우리 인간들의 현실을 본다면 '바벨탑'을 무너뜨린 신처럼, 인간의 타락에 분노해서 '대홍수'를 일으킨 신처럼, 불의를 저지른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신처럼... 분노하지 않을까.

 

무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까. 정말로 신이 이 시의 '나의 하나님'처럼 존재한다면...

 

불경이라 해도 좋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니, 창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우리 인간세상을 굽어보고 있다면, 지금의 세상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 많은 신자들, 기독교인, 천주교인, 불교인, 이슬람인, 기타 다른 종교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또는 하느님, 신'은 어떤 존재인가. 한 번 생각해 보고, 자신들이 믿는 신의 뜻을 인간 세상에서 행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시다.

 

'무의미시'라고 하는 김춘수의 시를 읽으며 이렇게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제대로 시를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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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맛 - 시에 담긴 음식, 음식에 담긴 마음
소래섭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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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40대가 넘은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리라.

 

그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된 것이 1990년대니, 그 이전에 고등학교를 다닌 40대들은 그를 알기가 힘들다. 사실, 백석만큼 정지용을 모르는 40들도 많으니 무어라 할 말은 없지만.

 

정지용이나 백석은 모두 90년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언급할 수가 없는 시인이었다. 그들은 월북을 했든, 납북을 당했든, 아니면 그냥 북한에 머물렀던 재북이든, 모두 이념의 희생양이 되어 우리 문학사에서 사라져 있었다.

 

아니, 몇몇 학자들에 의해서는 정00, 백0 등으로 언급이 간혹 되기도 하였지만,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학자들에게도 그럴 정도니, 입시에 찌들어 사는 중고등학생들에게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시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격세지감.

 

어느 새 백석은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시인이 되었다.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의 시를 교과서에 다뤄주고 있기는 하고, 또 '길상사'와 관련해 체험학습도 하곤 하니, 이제는 많이 알려진 시인이 되었다.

 

많이 알려졌음에도 그의 시는 어렵다. 아니 시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에 쓰인 말이 어렵다. 사투리, 많이 알려진 사투리라면 정감있게 읽을 수 있겠으나, 함경도 평안도 사투리, 전혀 뜻도 모르는 너무도 생소한 사투리가 쓰였으므로. 읽기가 쉽지 않다.

 

이런 언어가 백석을 청소년들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우선 글자가 눈에 들어오고 입에 들러붙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탁 막히니, 백석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한들, 누가 선뜻 그의 시를 읽으려 하겠는가.

 

한 번 시집을 펼치고는 닫아버리기 일쑤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미 발표한 백석의 시를 다시 고쳐 쓸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백석 시에 친숙하게 다가가게 할 수 있을까.

 

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또 시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라면, 여기에 백석의 시를 좋아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다 이 책을 발견했다. 살까 말까 많이 망설이다 "알라딘 온라린 중고"에서 구입한 책이다. 백석의 시를 음식을 중심으로 접근한 책.

 

먹는 것, 이것은 누구나 좋아하지 않나. 게다가 백석의 시에는 음식이 너무도 많이 나오니, 음식과 백석의 시를 연결지으면 백석의 시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도 굳이 이런 목표를 정하지는 않았겠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청소년들을 비롯해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수정·보완' (8쪽)했다고 하니, 백석 시에 쉽게 다가가게 하는 일종의 안내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각 장의 처음에 백석의 시를 소개하는데, 그 소개시의 표기를 고형진의 "정본 백석 시집"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가능하면 원어를 살리되, 현대 표기에 맞게 했고, 어려운 사투리는 밑에 주석으로 처리를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당부한다.

 

'작품을 읽을 때 처음 한 번은 가급적 주석을 보지 않고 읽어보기를 바란다.'(7쪽)

 

왜냐하면 시는 의미해석도 중요하지만 입에 감기는 말의 맛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는 음악과 친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의미 해석에 막혀 시의 맛을 느끼지도 못하고 접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백석의 시를 소개하고, 그의 시에 나오는 음식을 중심으로 백석 시에 접근해 간다. 그 저근이 상세하고 설득력이 있다. 학위 논문을 수정한 것 답게 나같은 사람이 읽어도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니 청소년들이 읽어도 별 무리가 없겠다 싶다. 여기에 백석에 관한 이야기와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부록처럼 수록해 놓고 있어서, 시만이 아니라, 백석 당시의 사회 모습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백석 시의 의미를 갖고 끙끙댈 필요가 없다는 것, 음식이 왜 백석 시에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할까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을 읽고 백석에게 흥미가 생겼다면 그의 시집을 사서 읽으면 될 일이다. 아니면 음식이 갖는 사회 · 문화 · 역사 · 정신적 의미에 관심이 생겼다면 음식에 관한 더 많은 책을 찾아서 읽어도 좋고.

 

덧글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26쪽. 그는 85세인 1995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66쪽. 1995년(84세) 사망한 것으로 언론에 추정 보도됨.

 

그렇다면 아주 단순한 오타인데... 그래도... 그가 1912년생이라고 하니, 26쪽을 84세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249쪽. 백석의 시가 노래가 된다면

이 책이 2009년판인데, 언제인지 모르지만 백창우, 김현성 등에 의해서 백석 시에 곡이 붙여져 노래로 불려지고 있다. 비록 많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관심있는 사람들은 백창우나 김현성을 찾아서 들어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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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세상을 바꾸다 - 세상을 움직이는 미술의 힘
이태호 지음 / 미술문화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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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근대에 들어서 소수의 집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지금도 미술은 전문가들만이 하는 것인양,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고 있다.

 

솔직히 우리나라에서 미술하면 몇몇 대학이 생각나고, 그 대학에 가기 위해서 초중고 때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를 하는가.

 

다양한 공부를 하면서 미술에 대한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대학에 가기 위한 기술 연마에 몰두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교육을 받아 미술대학에 가고, 미술대학을 나와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미술이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사회로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향유되는 것이 아닌,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술은 어느덧 소술의 예술이 되었다.

 

그러나 미술은 소수의 예술이 아니다. 옛날에 미술은 집 안에 있는 것이 아닌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공의 장소에 있었다. 함께 생활하는 곳에 함께 존재했다. 생활과 함께 하던 미술...

 

이제 미술은 사회 속으로 나와야 한다. 소수가 아닌 많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지내야 한다. 우리나라도 공공미술과 벽화그리기 등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요즘이지만, 아직도 미술은 소수의 손에 있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소수의 미술이 아닌, 우리 모두의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미술이 세상도 바꿀 수 있음을 세계 각지의 사례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미술은 사진도 포함이 되는데, 처음 시작을 사진으로 시작한다. 사진으로 우범 지역의 아이들에게 희망을 준 사람, 그들이 찍은 사진으로 그들의 모습을 보게 한 사람, 그래서 자신들의 삶이 마냥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사람, '슈팅 백 프로젝트'로 시작한다.

 

여기에 이어 브라질의 벽화그리기를 통한 함께 함을, 낙서화라고 불리는 그라피티로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 뱅크시를, 미술 교육의 방법을 바꾸어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한 사람, 할렘가에 직접 들어가 살며 그들을 작품으로 만들어낸 사람 등등,

 

2부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차별에 저항하거나, 진실을 드러내거나, 68혁명과 같은 문화적 변혁 시기에 미술로 참여한 사람들 이야기, 이어 3부에서는 그 시대에 드러난 미술, 우리 미술이 가야할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미술이 사회 속에 있어야 함을, 그래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변화시켰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여 이 책을 읽으면 미술은 집 안에 고이 모셔놓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 속으로 나와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미술이 순수미술과 더불어 계속 존재해 왔고, 우리나라 역시 그런 전통이 있음을 알게 된다. 다만, 형식적으로 흐르는 벽화그리기나 공공미술 운동은 경계해야 한다고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미술, 이제는 사회 속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 모두와 함께 해야 한다. 미술이 사회 속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해 준 책이다.

 

덧글

 

부끄럽게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인데... 서울대 문양이나 연세대 문양에 대한 글이 이 책에 실려 있다.

 

이럴 수가?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서울대 문양이 서양의 문양을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니...게다가 연세대의 경우 프린스턴 대학의 문양과 왜 이리 비슷한지... 연세대야 선교사가 세웠다 해도, 서울대는 해방이 되고 나서 국립대학으로 출발하지 않았나.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것이 문양에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다니... 이 책을 읽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어느 정도 비슷한지 궁금하다면 이 책 251쪽부터 257쪽을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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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금서였었지. 이름으로만 들었던 마르크스란 이름과 그가 지었다는 책, 자본론.

 

  이 책을 읽기 위해서 일본어를 공부했던 사람도 있고,직접 원어로 읽고 싶다고 독어나 영어를 공부했던 사람도 있고.

 

  이론과실천이라는 출판사에서 '자본'이란 이름으로 번역본이 나왔는데... 그게 80년대 후반이던가.

 

참 읽기 불편했었다. 사실, 자본론이란 책 자체가 쉽다고 할 수 없는 책인데... 경제학도 알아야 하지만 철학도 알아야 하는 책이라고 해서, 외국에서는 '자본론 읽기'에 관한 많은 책이 나와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러한 책들이 많이 번역되었는데...

 

그러다가 책도 두껍고 겉표지도 양장지인 누가 봐도 있어뵈는 "자본론"이 나왔다.

 

고 김수행 교수의 "자본론"이다. 그는 서울대 최초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되었고, 그로 인해서 우리나라 경제학의 학문적 다양성이 확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가 정년 퇴임한 다음에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지 못해 그런 학문의 다양성이 서울대에서는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그가 제도권 교육에 마르크스 경제학자로서 참여한 공은 무시할 수 없다고 하겠다.

 

비록 지금은 사회주의권이 모두 무너졌고,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고 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이 전세계적인 지배력을 지니고 있는 이 때, 자본이 어떻게 인간을 구속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그런 "자본론"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좌와 우가 함께 존재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면, 고 김수행 교수는 그런 모습을 제도권 교육에서 보여줬던 사람이기에 우리 학문에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가 7월 31일 세상을 떴다는 기사를 봤다. 그 기사를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990년부터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마르크스란 이름은 서서히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지만...

 

그가 서울대에서 정년퇴임하면서 후임이 다른 전공자가 왔을 때, 다시 한 번 시대가 기울어 감을 느꼈지만, 이제 그의 죽음으로, 제도권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이름을 드러낼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는 생각.

 

한 시대가 완전히 기울었구나. 이제는 정말 다른 시대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번역본 "자본론"을 읽기 전에 그가 쓴 "자본론 연구1"(한길사)을 먼저 읽곤 했었는데...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가버린 시절이고, 그런 시대를 풍미했던 학자의 죽음으로, 어쩌면 이제는 역사 속에서나 존재할 시대가 되었나 싶은 마음이다.

 

고 김수행 교수. 삼가 명복을 빕니다. 그곳에서는 마음껏 공부하시고, 후학도 양성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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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시를 읽는 방법 - 현상학적 해석과 치유시학적 읽기 크리티카& 2
김성리 지음 / 산지니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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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는 주술적 힘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믿어 왔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생겼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다.

 

그냥 미신이려니 했는데... 일본의 과학자가 펴낸 책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 의하면 말은 사람을 변하게도 한다고 하니, 우리들이 말에는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말의 힘을 바탕으로 '시치유'가 이루어진다. 시를 읽으며 자신의 감정을 읽고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극복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마음을 치유하는 활동이다.

 

가끔 마음이 외로울 때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시를 떠올리는 것도 일종의 치유 행위인데, 시나 노래는 짧은 언어 속에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잘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시들이 치유에 좋을까? 이 책의 저자는 김춘수의 시를 꼽고 있다. 자신이 왜 김춘수 시를 좋아했는지 모르지만 김춘수 시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공부를 하다 보니, 김춘수 시의 치유 효과를 실감할 수 있었고, 그래서 본인이 김춘수 시에 그렇게 매력을 느꼈구나 하는 이야기를 '머리말'에서 하고 있다.

 

시가 발휘할 수 있는 치유의 힘은 어느 시라고 갖고 있겠지만, 저자는 김춘수 시 전반에 걸쳐 그의 시가 지닌 치유의 힘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다.

 

초기 시부터 후기 시까지, 김춘수 시 전체를 아우르는 연구를 하고, 그를 통해 김춘수 시의 치유력을 보여주고 있는 셈인데...

 

김춘수는 삶의 의미를 추구했고, 그것을 시를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의 시를 무의미시라고 하지만, 결국 무의미라는 것은 의미로 규정되는 좁은 이성의 세계를 넘어,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에까지 인식을 확장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점.

 

그는 무의식의 세계를 넘어 정치세계에 환멸을 느끼고 아나키즘에 경도되기도 하고(시에서 단재 신채호를 만나는 장면이 표현되기도 하는데...단재는 말년에 아나키즘 사상가로 변모한다), 천사에 집착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그는 외적인 제한을 넘어 자신의 내면 세계를 끝까지 밀고 나가려 하는데, 이런 과정에서 치열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그것을 언어를 넘어선 언어로 표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김춘수의 시를 읽으면 이해는 못하더라도 가슴 속에서 무언가 울림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의 시를 계속 들여다보다 보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넘어서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김춘수 시의 치유효과다. 그냥 "꽃"의 시인으로만 알았던 김춘수,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정도만 알고 있어서,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순수시인으로만 그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니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인간 본질을 대면하려고 했다. 본질을 대면하고 그를 통해 자신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런 몸부림을 시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순수시라는 것이 현실도피의 시가 아님을 어쩌면 그가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춘수의 시를 천천히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간에 배워온 편견을 놓아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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