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역사 1 - 성경 속의 유대인들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 살림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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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분쟁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갈등이 일어나는 곳. 엄밀히 말하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면서 그곳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특정 지역에만 거주하도록 한 곳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동을 하더라도 목숨에 위협을 느끼면서 이동해야 하고, 수천 년 동안 살아온 곳에서 쫓겨나 살고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의 역사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다. 왜 그들은 그들도 엄청난 박해를 받았으면서 다른 민족을 박해할까?


자신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인식한다면 다른 민족들이 그러한 일을 겪었을 때 어떠한 심정이었을지 이해할 수 있을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대인의 역사를 알게 된다면 그들이 그렇게 하는 까닭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첫권은 성경 속 유대인들 이야기다. 성경 속 유대인 하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스라엘), 요셉을 비롯해서 모세를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으며, 모세 이후에 여호수아, 또 다윗, 솔로몬을 다루고 있다.


유대인 왕국을 건설하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들이 멸망해 가는 과정을 성경 속 인물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데, 여기에 기독교, 이슬람의 탄생과 유대인의 탄압을 첫권에서 다루고 있다.


유대 종교과 기독교가 양립할 수 없음을, 그리고 로마시대에 기독교가 국가 공인 종교가 되면서 유대인들을 탄압하게 되는 과정이 나와 있는데...


이렇게 유대인은 아주 오래 전부터 서양 사회에서 박해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을 박해한 역사가 근대에 이르러서 시작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까지가 첫권의 전개인데, 이들을 보면 그들 역시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하기 위해서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아랍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로마인들에 의해서 멸망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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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숲 - 사람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도시의 자연 순간들
피터 S. 알레고나 지음, 김지원 옮김 / 이케이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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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숲'


이 '어쩌다'란 말에서 숲이 아닌데, 숲이 되어버렸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다면, 어디가 숲이 되었을까? 바로 도시다.


도시, 삭막한 공간이라고만 생각하기 쉬운데, 이 도시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다. 인간만이 아니라. 


도시는 철저하게 인간을 위한 공간이다. 인간이 자신들의 편리를 위해서 만들어낸 공간이고, 자신들의 생활이 최적화 되도록 설계한 공간이다. 그래서 도시는 인간에게 좋지 않다고 여겨지는 생물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다.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도로들이 그런 통로를 막는다.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죽임을 당했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소위 로드킬이라고 불리는 죽임들.


그럼에도 도시에는 동물들이 살아간다. 반려동물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야생동물들도 도시에서 살아가려 하고 있다.


비둘기와 같은 새들이야 이제는 친숙해졌고, 길고양이들도 익숙해졌으나, 멧돼지는 아직도 친숙해지지 않았다.


가끔 언론에 도심에 멧돼지가 출몰했다는 뉴스가 나오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도시는 멧돼지가 나타나서는 안 되는 지역인가 보다.


멧돼지만으로도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데, 만약 멧돼지보다도 더 무섭다고 여겨지는 동물들이 도시에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까?


이 책은 그런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야생에 살던 동물들이 도시로 오게 된 모습을, 미국 도시의 상황을 통해서.


저자는 보브캣을 보았을 때로 이 책을 시작한다. 야생에 있는 동물을 도심에서 봤을 때의 놀라움, 신기함. 그러다가 자세히 살펴보니 더 많은 동물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다람쥐, 흰꼬리사슴, 캘리포니아모기잡이, 코요테, 흑곰, 흰머리수리, 퓨마, 박쥐, 땅다람쥐, 참새, 바다사자 등을 언급한다.


이 중에 참새는 우리에게도 친숙하니까 빼자. 다만 저자는 그 많던 참새가 도시에서 줄어든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참새가 많았다가 많이 줄지 않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활 방식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얼마 전에 언론에서 '가마우지'를 다뤘다. 본래 철새였던 가마우지가 거의 텃새가 되어 양식장의 송어들을 먹어치우고 있다는 뉴스.


이 책에서 다룬 것과 비슷한 이야기다. 야생동물들이 자신들의 먹이를 찾아 인간에게 점점 더 다가오는 것. 동물들도 살기 위해서, 인간이 살고 있는 도시로 올 수밖에 없음을 다루고 있는 이 책에서 공존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는 고라니나 멧돼지가 농작물을 파헤쳤다는 기사, 가마우지가 송어를 잡아먹어 양식업에 피해를 주고 있다는 기사 등등을 접하면서 그 동물들을 어떻게 퇴치할까를 이야기한다.


퇴치가 아니라 공생이어야 한다.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들을 퇴치할 생물로만 여길 때 결국 피해는 인간에게도 오게 된다.


그러니 여러 동물들과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가마우지나 멧돼지, 고라니 등이 왜 인간 근처로 자꾸 오겠는가. 그들이 살아갈 생태계가 파괴되어 먹이를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들도 살아가야 하므로.


아마 이대로 가면 지리산에 방사된 반달곰들도 미국의 흑곰들처럼 도심으로 내려올지도 모른다. 그들이 살아갈 생태계를 자꾸 잠식해 들어가면.


저자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이 자연을 바꿀 수 있다 해도 완전히 통제할 힘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자연과 상호작용하고, 자연을 키우고, 우리의 공통된 미래를 계획하는 방식을 좀더 의도적으로 이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연을 지배하고 조작하고 소소한 것까지 전부 통제하려 하는 옛날 방식에 집착하거나 단편적인 해결책으로 전체적인 문제를 계속 풀려고 하면, 도시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사람과 야생동물 사이에 공존 같은 건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공존에는 통제가 아니라 보살핌이 필요하다. 응징이 아니라 호혜가 필요하다. 상황이 항상 계획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하는 겸손함을 갖고서 상호 번성을 위한 배경을 만들어야 한다.' (357쪽)


도시로 내려오는 야생동물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이런 야생동물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책은 야생동물을 보호하자는 관점에서 쓰였다고 보면 된다.


우리 역시 해마다 겨울철에 철새들을 위해서 많은 곡식을 논에 뿌리는 일을 하기도 하지 않는가. 이런 일을 하면서도 도심에 나타나는 동물들, 또 인간의 일에 피해를 주는 동물을 퇴치하라고도 한다.


인간은 지구에서 최고의 포식자다. 다른 생물들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 결과로 예측할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공존을 생각할 때다. 최종 포식자로서 인간이 계속 존속하려면 생태계의 다양성 유지가 필요하다. 그런 다양성 유지에 도시로 오게 되는 동물들과 공존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답은 없다. 그 답을 찾아가야 한다. 저자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미국 도시에 나타나는 수많은 야생동물들, 단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여러모로 참조할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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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이는 물결 - 작가, 독자, 상상력에 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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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이 쓴 에세이 선집이다. 많은 글들이 있다. 글 한편 한편을 읽으며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만큼 글에 깊이가 있다. 깊이 내려가 글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제목에 대해 생각에 본다. 마음에 이는 물결이라? 참 마음에 드는 제목이다. 글은 마음에 이는 물결이어야 한다. 마음을 일게 하지 않으면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마음을 일게 한다는 마음을 울린다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을 울리는 글은 내 마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도 울리는 글이고, 그런 글들이 마음과 마음을 울림으로 연결시켜준다.  좋은 글이다.


마음을 울린다는 면에서 보면 르 귄이 쓴 소설도 좋지만, 에세이도 좋다. 여러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그 중에 이 책의 제목과 연결되는 글들이 후반부에 나온다. 아니, 후반부뿐만이 아니라 도처에서 나온다. 그것이 르 귄이 글을 쓰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목이 된 말은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따왔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몇몇 작가의 작품을 꼭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중에는 이미 읽은 책도 있지만, 다시 읽고 싶어진다. 또 뒤로 미뤄두었던 소설들을 찾아 읽고 싶어지기도 하고. 그만큼 르 귄이 쓴 이 책은 마음을 울린다. 다른 책들과 공명(共鳴)하게 한다.


우선 작가를 중심에 두면 작가가 어떻게 글을 쓰는가에서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가 말하는 '길들이기'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 길들이기가 무엇인가. 바로 기다림이다. 상대에게 곧장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천천히 스며드는 것. 그리고 책임지는 것. 


울프는 이를 마음에 이는 물결이라고 했다고 한다. 마음에 이는 물결을 통해 단어가 나오고, 그 단어들을 통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서둘러서는 안된다. 또 다른 '길들이기'다. 르 귄의 말을 인용한다.


'기억과 경험 아래에, 상상과 창조 아래에, 울프의 말처럼 단어 아래에 리듬이 있고, 기억과 상상력과 단어는 모두 그 리듬에 맞춰 움직인다. 작가가 할 일은 그 리듬이 느껴질 만큼 깊이 내려가서 리듬을 찾아 거기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다. 그 리듬이 기억과 상상력을 움직여 단어를 찾아내게 가만히 가두는 것이다. ...울프는 그것을 마음에 이는 물결이라고 부른다.' (462쪽)


'울프의 이미지는.... 그녀가 생각한 물결은 파도다. 조용하고 매끄럽게 바다 위를 1천 킬로미터 넘게 가로질러 와서 해안에 철썩 부서지는 파도. 파도가 부서져 날아오르면서 단어라는 거품이 된다. 그러니 그 파도, 일정한 박자의 충격은 단어 이전에 존재하며, "단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작가가 할 일은 그 파도를 알아보는 것이다. 저 멀리 바다에서, 마음이라는 대양 저편에서 조용히 부풀어 오르는 파도를 알아보고 해안까지 따라오는 것이다. 해안에서 파도는 단어를 변화시키거나 스스로 단어가 되어 품고 있던 이야기를 내려놓고, 자신의 이미지를 토해내고, 비밀을 쏟아낼 수 있다. 그러고는 이야기의 대양으로 스르르 다시 물러간다.' (462-463쪽)


산문과 시, 모든 예술, 음악, 춤은 우리 몸, 우리 존재, 이 세상의 몸과 존재가 지닌 심오한 리듬에서 솟아나 그 리듬과 함께 움직인다. 물리학자가 읽는 우주는 아주 다양한 진폭의 진동,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술은 그 리듬을 따라가며 표현한다. 일단 올바른 박자를 찾기만 하면, 우리의 아이디어와 단어가 그 리듬에 맞춰 춤춘다. 누구나 합류해서 춤출 수 있는 윤무(輪舞)다. 그러면 나는 당신이 되고 장벽이 내려간다. 잠시 동안.' (463-464쪽)


인용한 글들, 참 아름답다. 작품이 이렇게 탄생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지 않을 수 없다. 서로 마음을 열고 함께 춤출 수 있다. 


이런 글들은 편견에 머물지 않는다. 편견을 깨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그래서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편견도 깨지만, 다른 사람의 편견을 깨는 역할도 한다. 그것이 바로 작가다. 


그렇게 편견을 깨기 위해서는 기다림, 적절한 단어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많은 작품이 언급되지만, 꼭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작품들을 마음 속에 담게 한다. 그 작품들은 마음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마음껏 읽고 함께 춤출 때까지는.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 톨킨의 [반지의 제왕]. 그리고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핀의 모험], 세상에 내가 아는 허클베리핀의 모험이 그런 소설이었어? 다시 읽어봐야겠네 라는 생각이 들게 한 이 에세이집이다.('작가와 등장인물',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가설들' 387-410쪽)


무엇보다도 이 에세이집은 르 귄의 소설을 읽을 때 도움이 된다. 물론 이 책에서 르 귄은 자신의 경험과 소설은 큰 상관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많은 도움이 된다.


르 귄이 말했듯이 독자 역시 이 글을 읽으면서 글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또 르 귄 소설을 읽을 때 이 글들을 떠올리는 것은 독자의 몫이니... 작가도 이해할 것이다. 왜 자신의 소설을 읽는데 이 글들이 도움이 된다고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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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7-23 22: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음의 물결, 작가가 할일은 마음에 이는 파도를 알아보는 것! 넘 멋있는 표현이네요. 뭉클한 느낌!

kinye91 2023-07-24 06:02   좋아요 2 | URL
르 귄의 글(소설도 에세이도)을 읽으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아요.
 

  글쎄, 이번 호를 읽으면서 무엇을 느꼈지?


  편집자는 편집자의 말에서 귀여움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표지는 확실히 귀엽다.


  귀여움은 마음을 풀게 한다. 마음을 열게 한다. 상대를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니 귀여움은 상대와 잘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한다.


  빅이슈 역시 딱딱한 잡지가 아니다. 빅이슈에 소개되는 달달한 디저트들이 얼마나 많은가? 꼭 음식점 이야기가 아니다. 소개되는 디저트들도 달달하지만, 한 꼭지 한 꼭지에 달달한 이야기들이 많다.


어떨 때는 쓴맛을 느끼게 하는 글들도 있지만, 그 글들이 지닌 쓴맛은 결국 우리 모두가 단맛을 느끼며 살게 하기 위한 애피타이저다. 전채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단맛은 무엇일까?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가는 것일까?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간다와 자신'만'의 인생을 잘 살아간다는 것은, 단 한 글자 '만'때문에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빅이슈는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가게 하고자 하지만, 자신'만'의 인생을 잘 살아가게 하는 잡지는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을 잘 살아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번 호에서 편집자가 말하는 '귀여움'을 이렇게 해석했다. 우리의 우리 인생을 달달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 인생이 달달해질 수 있을까?


'만'자를 떼어버리면 된다. '만'자를 떼어버리려면 바로 이런 자세...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 자기의 길만큼이나 상대의 길도 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영화 속 관장의 말처럼 "재능은 없지만 인간적인 기량이 있"는 "정직하고 솔직하고 아주 좋은" 사람들.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들. (정지혜. '자기의 길을 만들어가는 힘'에서. 17쪽)


바로 이렇게, 자기만큼 다른 사람도 귀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나만 최고가 아니라는 생각, 모두가 최고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면 된다.


어떻게 인정할까? 우선 알아야 한다. 알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 노력 중에 책이 있다. 책은 인간 문명이 발생한 이래 우리와 함께 해오지 않았던가. 전자기기로 손쉽게 읽을 수 있게 된 지금도 종이 책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종이 책이 지닌 물질성 때문이다. 


읽으면서 손에 감촉을 느끼고, 그 읽는 시간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시간. 또 그 시간을 통해서 책 속에 있는 글자들이 글자들이 아니라 인생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느끼는 순간.


세계 명화라고 하는 그림 중에 책 읽는 그림들이 있다. 그 그림들을 귀엽다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그림들. 


그렇다고 아무 책이나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역할을 하는 책. 세상을 바꿀 희망을 주는 책들.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이야기가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꿈을 꾸게 하고 싶어요. 희망 없는 시대일지라도 책은 분명 긍정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정규환, '베스트셀러가 되고 싶어-김수인 출판 마케터'35쪽)


책이 간접 경험을 준다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 대화를 하면서 서로 마음을 열어야 잘 살 수 있다. 어떻게 마음을 열까? 앞에 나온 이야기처럼 상대를 인정하면 된다. 인정하는 방법을 모르겠다면 이번 호에 나온 이 방식을 써보면 좋겠다.


경상도식 화법은 제게 반면교사로 사용됩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일 때는 뭐든 그와 반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남이가?'에서 시작되는 말하기를 '우리는 남이다. 그러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로...(정문정, '충격 요법의 언어에서 친절한 언어로 나아가기'에서. 47쪽)


즉, 직설적인 말하기가 필요할 때도 있지만, 상대를 존중하는 말하기를 하는 것, 직설적이라도 상대와 교감이 되면 별 문제가 없지만, 그런 교감이 있는 상대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통할 수가 있으니, 굳이 말하는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말하기 방법을 고민할 때는 나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다. 다른 관점을 지닌 사람과 이야기할 때 위에 나온 방법을 사용하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이런 자세를 지니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을 때 몸과 몸이 교류를 하고, 마음과 마음이 교류를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브레이킹이라고 '브레이크 댄스'가 교육과정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탱고'를 비롯한 춤들도(학교 체육시간에 배운 무용과는 다른 의미로) 들어와야 한단 이 말... 춤을 배우는 아이들. 모습을 상상하니 귀엽다.


다른 성별과 교류하고 관계 맺으며 서로에 대한 존중을 학습하게끔 하는 것,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는 하나의 방법 아닐까? 몸과 마음의 균형을 찾게 하고 관계 속에서의 균형을 배우게 돕는 탱고를 공교육 과정에 두는 일 역시 그런 노력의 일환이 될 수 있겠다. (최서윤, '탱고 공교육을 꿈꾼다'에서 59쪽)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춤은 최서윤의 말처럼 작용한다. 내 중학교 시절, 남녀공학, 합반이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교장 선생님이 남녀 간, 또 학생 간 서먹함을 없애야 한다고 도입한 교육방법이 '포크댄스'였다. 어떤 종류의 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파트너를 바꾸며 추는 춤이었음은 기억나는데...


수업을 오전에 마치고 오후에는 일주일 동안 각 반에서 포크댄스를 추도록 했다. 무려 일주일이나! 지금은 아주 짧은 시간 같지만 당시는 아주 긴 시간이었고, 수업을 하지 않고 오후 2시간 정도를 포크댄스를 추면서 남녀가 또는 남남이 손을 마주잡고 움직인 그 시간은 우리들에게 서로를 어색해 하지 않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것이 꼭 포크댄스가 아니어도 괜찮을 터. 탱고든, 살사든, 아니면 다른 스포츠댄스든 함께 하는 활동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활동들이 서로 마음을 열게 하지 않을까? 서로에게 귀여움을 발견하는 시간을 갖게 하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귀여움을 발견하게 되면, 그 자체로 이미 마음이 열려 있고, 서로를 존중하고 함께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니, 다른 교육적 효과보다 좋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빅이슈가 우리의 삶을 달달하게 만들어주는 '전채 요리(애피타이저)' 역할과, 삶의 달달함을 끝까지 느끼게 해주는 '디저트(후식 요리라고 해야 하나?)' 역할까지 해주고 있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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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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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이제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기계 문명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고 해야 한다. 디지털이 이제는 우리 삶 곳곳에 들어와 있다. 이런 일들 가운데 하나인 챗지피티라는 말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어서 '복제'라는 말은 쏙 들어가 버린 듯하다.


한때는 '복제'란 말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복제'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 언론에서 다루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는 말인지...


하긴 '배양육'이 우리 식단에 들어오는 현실이니, '복제'라는 말은 이제 일상에서 쓰이는 언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인간복제에 대해서는 수긍하기 힘들다.


인간을 복제한 클론이 과연 인간일까? 라는 질문을 할 수가 있는데, 그들에 대해서 과연 우리가 알 수 있을까?


클론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알 수가 없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다. 그 사람의 내밀한 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자신도 자신을 모르는데... 그렇다면 클론의 마음을 인간이 알 수 있을까?


자신을 복제한 클론을 마주친 인간이 클론이 자신과 똑같다고 여길까? 자신이 클론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가 오만 아닐까?


신이 있다고 가정하자.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신은 창조한 인간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을까? 신은 전지전능하니까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과연 그럴까?


신이 인간을 창조했고, 신의 뜻대로 인간이 살아간다면 인간의 '자율성'은 어디에 있는가? 아니, 그때 자율성이 있다고 말할 수가 있나?


그렇다면 지금까지 인간이 이룬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복제까지도 만들어낼, 생물 복제만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이용해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존재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지금, 인간은 여전히 신의 뜻대로 움직인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 라고 답할 수 있다면, 클론을 우리 역시 다 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신의 뜻대로 살게 되듯이 클론 역시 인간의 뜻대로 살게 된다. 어떤 어긋남도 없어야 한다. 어긋남 역시 계산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만약,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면? 이때는 인간 복제는 해서는 안 된다. 아니, 해도 된다. 다만 복제된 클론이 자율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이 뜻대로 해서는 안 될 자율적 존재라고 인정을 한다면.


이렇게 되면 클론을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만들어낸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클론 역시 인간의 한 부류이므로. 우리가 인종이나 민족으로 인간을 구분하듯이, 여기에 클론이라는 또 하나의 부류가 첨가된다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지나친가?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클론이 생각할 수 있다고? 그들은 그냥 주입된 것을 표출할 뿐이라고? 어떻게 아는가? 클론의 뇌 속으로 들어가 보았는가? 뇌의 조직, 기능을 다 안다고 해도 생각이 어떤지 정확히 맞출 수 있는가? 없다. 뇌라는 보이는 형태와 뇌가 작동해 일으키는 생각은 같지 않다. 


그러니 클론이 인간의 복제라면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말이 된다. 이들을 단지 인간의 병치료를 위해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소설은 이런 클론의 문제를 클론의 처지에서 서술하고 있다. 캐시를 서술자로 선정하고 있다. 소설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캐시의 성장소설로 읽을 수 있다. 캐시의 학창시절부터 어른이 된 후까지가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다보면 곳곳에서 캐시가 보통 인간과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된다. 기증자, 근원자라는 말이 나오고, 조금 읽다보면 캐시가 복제인간이라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읽으면서 복제인간인 캐시의 관점으로 사건을 따라가게 된다. 인간과 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캐시를 보면서, 그런 캐시가 결국은 자신의 일부를 기증하는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알게 된다.


캐시와 루스, 그리고 토미. 이 셋의 애증관계, 성장관계. 그렇지만 여기에 얽힌 복제인간에 대한 관계. 그들이 자란 헤일셤이라는 곳은 복제인간을 인간답게(?) 가르치는 곳. 어차피 장기기증으로 죽어갈 그들에게도 인간다운(?) 생활을 하고, 교육을 받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곳.


이곳은 기부자의 기금으로 운용이 되고, 이들 목표는 클론 역시 교양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 그러나 이들은 외부에 의존해서 운영하려고 했고, 또 클론을 자신과 함께 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이 한시적으로 시혜를 베풀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고 운영했다.


철저히 인간의 관점에서, 시혜를 준다는 관점으로, 그러니 클론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는 루시 같은 선생은 떠날 수밖에 없다.


클론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정확히 알리지 않고 최대한 시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입장과 클론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입장의 차이. 작가는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지만, 작중 인물인 토미가 "루시 선생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 에밀리 선생님 생각이 아니라 말이야."(374쪽)라는 말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복제인간이라고 해도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즉, 복제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한다.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신의 복제인간이라 해도 또다른 자율적 존재임을, 존중해야 할 존재임을, 결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됨을 알아야 한다.


작가는 복제인간을 서술자로 택함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고민하고 성장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복제인간에 대한 문제에 대해 간접적으로 답을 하고 있다.


생물학에서 시도하는 복제인간을 넘어서서 이제는 컴퓨터과학기술로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아니, 벌써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인공지능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런 인공지능의 흐름에 밀려서 복제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은데, 인간 '복제', 이렇게 묻혀서는 안 될 주제다. 특히 지금처럼 마음만 먹으면 '인간' 복제가 가능한 시대에서는.


이 소설을 읽으며 문학의 힘을 생각해 본다. 왜 과학자가 될 사람들이 어린(젊은) 시절에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지... 아니, 그들에게 영재교육이 아니라 문학작품을 읽혀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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