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침. 


  길을 걷다가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을 하는 아이를 발견했다.

  무엇을 하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멈춰서서 살펴보니, 아이의 손에는 나뭇가지가 들려 있다.


  그 나뭇가지로 아이는 보도블록 위에서 무언가를 들어 화단으로 넘겨준다.


  무얼까? 무엇인지는 금방 알게 됐다. 비 온 다음날 보도블록으로 나온 지렁이들. 꿈틀꿈틀, 천천히 기어다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타는 듯한 햇볕에 타 버릴 지렁이들.


그런 지렁이를 징그럽다 하지 않고 조심스레 나뭇가지로 들어서 화단으로, 흙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고 있는 아이.


감동이었다. 이런 아이가 있구나! 이렇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가 있었구나! 세상에 동심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마음이 따스해졌다. 자연스레 동시가 떠오르기도 했고, [샬롯의 거미줄]이라는 동화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래, 이런 동심들이 글로 표현되어 많은 아이들이 읽으면 좋겠지. 아이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지.


이런 상황에서 '동시집' 읽게 되었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봄처럼 세상 만물을 따스히 감싸주는 손길은 되지 못할지라도 깜냥껏 제 몫을 다하고 싶습니다. 동시를 쓰는 일도 그런 몫 중의 하나라는 걸 잊지 않으려 합니다.'(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동시를 쓰는 시인과 지렁이를 화단으로 보내주는 아이의 마음이 통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모두가 잘되는 세상이 과연 문제가 있을까 하는 생각.


최근에 우리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수능 킬러 문제'에 관한 논란. 변별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아주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낼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 그런 문제는 사교육만 키운다고 하는 사람들. 아니, 문제가 쉬워지면 오히려 더 사교육이 는다고 하는 사람들.


여기에 '카르텔'이라는 말까지 나돌면서 이런 말 저런 말들이 우리 사회를 뒤덮었는데... 수능으로 등수를 나누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로 이야기가 진전되지는 않는다.


수능을 자격고사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는 하니, 논의가 좀 진전되고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이 동시집에서 '정말 그런 걸까?'라는 시를 보았다. 모두가 수능을 잘 보면 안 되나? 만점이 수두룩하게 나오면 안 되나? 그럼 교육이 망하나? 그런 생각.


       정말 그런 걸까?


     시골 사는 큰삼촌이

     양파 농사가 잘돼서 좋다더니

     이 마을도 양파 풍년

     저 마을도 양파 풍년

     너도나도 양파 풍년

     그래서 한꺼번에 모두 망했단다.


     내 친구들이 시험을 잘 봐서

     얘도 백 점

     쟤도 백 점

     너도나도 백 점

     그러면 학교도 망하게 될까?


    망하지 않게 하려고

    시험 문제를 어렵게 내는 걸까?


박일환, 토끼라서 고마워. 2023년. 60쪽.


이 질문에 무어라고 답할 것인가? 아니, 답할 수가 있나? 어떤 교사는 문제가 쉬워 아이들 점수가 높게 나오면 자존심이 상한다고도 한다던데... 아이들 점수가 잘 나오면 교사가 자랑스러워 해야 하지 않나, 내가 가르친 내용을 아이들이 잘 이해했구나 하면서...


오로지 등급을 나누기 위해서 변별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어려운 문제를 내는 것, 그것은 전제가 잘못 되지 않았나?


누구나 똑같은 농사를 지으면 잘 되면 잘 될수록 이익을 남길 수가 없다. 같은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농사를 지어야 하고, 그 농사들이 모두 잘 되면 다 좋을 수가 있다.


획일성을 벗어난 농사, 단작이 아닌 다작을 하는 농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1연에서는 다양한 농사가 필요함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면, 2연에서는 시험을 통해서 평가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아이들이 얼마나 시험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는지를... 시험은 배운 것을 평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등급을 매기기 위한 수단으로 쓰고 있는 현실을, 오히려 그런 시험으로 인해 학교(교육)가 망해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아이들이 너도나도 백점을 맞으면 그것이 서로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백점을 토대로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자신있게 찾아가게 된다는 것. 오히려 너도나도 백점이어야 학교가 산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너무도 어려운 문제로 백점을 맞기 힘든 시험이 계속되는 학교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이 과연 보도블록 위를 기어가다 바짝 말라 죽어가는 지렁이를 볼 수 있을까?


너도나도 백점을 맞아 시험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을수록 시험지만이 아닌 주변의 다른 존재들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갖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다.


조용히, 조심스레 지렁이를 살리려고 한 아이, 그런 아이들이 넘쳐나는 학교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학교를 꿈꾸어본다. 동시를 쓰고 읽는 이유도 바로 그런 따스함을 간직하기 위함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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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에서 - 간호사가 들여다본 것들
김수련 지음 / 글항아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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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노동'


꼭 필요한 일이다. 사회를 유지하는데, 또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노동이다. 그런데 이 '돌봄 노동'은 '그림자 노동'이 된다.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여서는 안 된다. 그냥 당연한 듯이 존재해야 한다. 그들이 눈에 보이는 순간, 고마움을 표하기보다는 이상하게 비난이 앞서기도 한다.


왜냐고? 그들이 눈에 보일 때는 바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때이기 때문이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이대로는 돌봄이 지속될 수 없겠다고 느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한다. 


아니다. 자신들의 권리가 아니라 '제대로 돌볼 수 있는 권리'라고 해야 한다. 그들의 권리가 침해당할수록 돌볼 수 있는 권리가 침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보일 때 그들을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그동안 한 '그림자 노동'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아도 온몸으로 느꼈을텐데 그것을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을 찾아보려 하지 않는다. 그냥 당장 자신의 불편함만 볼 뿐이다.


그래서 돌봄 노동은 역설적이게도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돌봄 받지 못하는 돌봄 노동 중에서 간호사의 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 그것도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들의 상황을 자신의 경험이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너무도 바쁘고, 정신없고, 힘들고, 정신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힘든 그런 상황인데도 처우는 개선되지 않는 현실.


중환자실에 간호사 한 명 당 환자 2명인 경우가 복받은 경우라고 하는데, 한 환자에게 일이 생겼을 경우엔 간호사 한 명으로는 치료할 수가 없어서 최소 3-4명의 간호사가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이라고, 그런데 만약 2명에게 문제가 생기면, 중환자실에 있는 간호사들이 또 투입되어야 하고, 나머지 중환자들을 돌볼 수 있는 인력에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좋다고 하는 병원에서도 이런데 한 명의 간호사 당 중환자 3명이상이면 어떻게 될까? 제대로 된 치료가 가능할까? 또 간호사들의 업무를 이렇게 극한까지 끌어올린다면 과연 제대로 된 돌봄이 가능할까?


간호사들이 건강하고 편해야 환자들도 건강하고 편해질 수 있다. 세상에 돌봄을 하는 사람이 먼저 쓰러지는 경우가 생긴다면 어떻게 돌봄을 받는 사람이 치유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지...


간호사를 더 많이 고용하면 병원 운영이 지장을 준다? 글쎄? 병원이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존재하는지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환자를 돈을 물어오는 고객으로 생각한다면(물론 영리병원은 그런 목적으로 존재할테다. 영리병원 이야기는 이제 남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이 과연 의료기관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운영에 필요한 이익은 거두어야 한다. 우리나라 모든 병원들이 '장기려' 박사와 같은 사람들이 운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공공의료기관은 확충해야 한다. 이제 겨우 5%정도가 공공병원이라고 하는데(210쪽 참조), 이는 적어도 너무 적다. 이를 확충해야 한다. 여기에 간호사들의 근무 환경이 개선되어야 한다. 10년을 근무하지 않고 퇴직하는 간호사가 속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간호대학을 나온 사람은 많은데 정작 일선에서 간호사는 부족한 현실. 그래서 외국인 간호사를 고용하겠다는 말도 나오는데, 예전에 독일로 파견간 간호사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파견 간호사를 받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는데 격세지감을 느낀다.


왜 간호사들은 많은데 실제로 일하는 간호사들은 적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문제를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해결책을 낼 수 있다.


이 책에서 김수련 간호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책임간호사나 선배가 챙겨주지 않아도 밥 먹고 물 마실 수 있고 선배가 관대하지 않아도 실수 때문에 비난받지 않아야 한다. 설령 괴롭힘을 당하면 공식적인 문제 제기를 할 때 두려움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위험한 인력 구조를 방치하게 해서는 안 된다. 충원을 요구해야 한다. 강력한 처벌 조항을 가진 간호사 대 환자 비율 법안을, 간호인력인권법을 통과시켜야 한다. 공공 병원을 더 세워야 한고, 안전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247쪽)


이것이 무리한 요구일까? 돌봄을 제대로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인데 아직도 실현이 안 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돌봄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누군가의 희생으로 받는 돌봄이 의미가 있을까?


돌보는 주체도 돌봄을 받는 사람도 모두 자신의 권리를 누리면서 지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간호사들의 열악한 환경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 책이기도 하고... 요즘 '보건의료노조'에서 파업을 하고 있다. 최소한 그들의 요구를 살펴보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누구나 간호사들과 관계를 맺고 살 수밖에 없으므로.


돌봄 노동자가 돌봄을 받지 못하는 현실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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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사진이 여름을 생각하게 한다. 아, 여름이 되었구나!


  '빙수' 사진이다. 더운 여름에 먹는 빙수는 시원함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런 시원함이 더위를 잊게 하기도 하고, 더위를 이겨내게도 한다.


  단지 시원함만일까? 더위의 맞은 편이 있다는 점을 알려주기 때문 아닐까? 즉, 더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원함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빙수가 한다는 생각을 한다.


  [빅이슈]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편집자의 말에서 '힘들 때 돌아갈 곳이 사회 어딘가에 하나쯤 있다는 것도 좋은 일 아닐까요'(08쪽)한다.


더위에도 시원한 곳이 있듯이, 힘들어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이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어쩌면 [빅이슈]는 그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의 10년만에 다시 빅판으로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가 이번 호에 나오니, 그런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한 여성 홈리스들의 자립을 돕는 곳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런 자활 활동도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마냥 함께 할 수 없음을, 그럼에도 그들은 자활 활동을 통해 얻은 힘으로 자신들의 삶을 다시 살아나가고 있음을 [빅이슈]를 통해 만나게 된다.


이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 더위만큼이나 빅판들에게는 장마도 힘들테다. 아무래도 장마 기간에는 판매하기가 힘들테니.


하지만 그럼에도 더위와 장마는 언젠가는 끝난다. 그 끝남이 있음을 알고 이 여름 이겨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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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 3 - 홀로코스트와 시오니즘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 살림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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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은 홀로코스트에 이어 나라를 건설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시온주의라고 나라를 건설하자는 움직임이 처음부터 힘을 발휘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들이 나라를 건설할 때도 종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른 관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들은 이제 그들의 나라를 원하게 된다. 그들이 더 이상 학살을 당하지 않게 할 그런 나라.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관점들이 있었음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홀로코스트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건국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음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나서 문제가 해결되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물론 이제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량 학살은 일어날 수가 없다. (그렇게 믿고 싶다. 여전히 세계 여러 곳에서 홀로코스트까지는 아니어도 증오 범죄들이 일어나고, 테러는 빈번하니)


하지만 반-유대주의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세계는 여전히 서로를 인정하는 관용과 포용보다는 밀어내는 배제와 배척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건국한 이스라엘이 아랍국가들과 전쟁을 벌여 자신들의 영토를 더욱 확장해 간 사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영토를 많이 확장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이 지역에서 평화가 정착되지 않은 이유를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이 지내온 역사에서 저자는 찾고 있다.


아랍인들이 쉽게 유대인들의 국가를 받아들이고 평화협정을 맺지 않았던 이유가 그들이 수천 년 동안 정복국가로서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말, 여러모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 이유보다는 수천 년 동안 살아온 곳에서 쫓겨난 사람들에게 그 땅을 넘겨주는 것이 평화라고 하면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이런 관점에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전쟁을 바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홀로코스트가 벌어질 때 유럽 각국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가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이런 반-유대주의를 집약해서 불을 붙인 사람이 히틀러라고 할 수 있고, 히틀러까지는 가지 않았어도 러시아에서의 반-유대주의도 심각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반-유대주의를 넘어 이스라엘은 건국되었지만, 그럼에도 세계 각지에는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형성해 살고 있다고 한다.


나라가 있다고 모두가 그 나라로 가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당연한 일인데,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은 세계는 여전히 반-유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제는 인류가 평화공존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데, 그런 평화로운 세계에 대해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대인의 역사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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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역사 2 - 유럽의 역사를 바꾸다
폴 존슨 지음, 김한성 옮김 / 살림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2권은 방대한 역사를 다룬다. 유대 왕국이 멸망한 다음에 도처에 흩어져 살게 되는 유대인의 역사.


1차 세계대전 전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각 나라에서 유대인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그들이 겪은 고난과 성공은 어떠했는지를 다룬다.


유대인들도 유대교를 벗어나 다른 종교로 개종하기도 하는데, 이들이 개종을 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개종하는 유대인과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는 유대인. 크게 보면 유대인의 역사는 둘로 나눌 수 있는데, 개종했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그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않았음을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때 어떻게 유대인을 구분하지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들의 역사에서도 유대인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을테다. 수천년 동안 동화된 유대인들이 있었을테니.


하지만 동화되지 않은 유대인이 그들의 종교를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었고, 이들은 쉽게 탄압의 대상이 된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박해를 받는 유대인들, 거주지 제한부터 시작해서, 재산 몰수는 물론이고 생명을 잃는 일까지 수시로 겪게 된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 결실이 나중에 시온주의라는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운동으로까지 나아간다.


시온주의 하면 모든 유대인이 찬성하고 동조했을 것 같은데, 이 책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유대인 중에서도 상류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시온주의를 반대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런대로 다른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로 오면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이 그리 빈번하게(?러시아나 그밖의 나라에서는 수시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모든 서양 나라에서 유대인을 학살하지는 않았다. 특히 영국에서는 유대인들이 보호를 받고 나름 자유롭게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일어나지는 않게 된다.


빈번하지는 않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언제든 학살이 일어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있었을테고, 드레퓌스 사건을 중심으로 시온주의가 대두되고, 유대국가의 건설이 논의된다. 이 논의의 중심에 영국이 있고.


유대인들도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보면 안 된다. 그들도 다양한 분파가 형성되었으며, 그 분파에 따라서 다른 의견과 행동 양식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 분파의 다양성, 그리고 그들이 서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한 선택들. 2권은 그것을 다뤄주고 있다. 여기에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름들이 몇 나오는데... 유대인들이 그 사회에 적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거금을 지닌 재산가로서 유명하고, 디즈레일리라는 이름은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둘 다 유대인이다.)


이렇게 자리잡은 유대인들이 각 분야에서 큰 활약을 펼치게 되는 것이 바로 근대인데... 2권에서는 이런 인물들을 다뤄주고 있다. (세계를 바꾼 인물로 프로이트와 아인쉬타인을 들 수 있으니) 그리고 이제 홀로코스트로 넘어가게 된다. 3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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