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차일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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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기발하다는 표현을 하면, 누구나 생각할 수 없고, 특별한 사람만이 생각할 수 있다는 쪽으로 여겨질 수 있다.


특히 작가들의 상상력에 대해서는 작가라서 지닌 상상력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렇기에 이런 상상력은 작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현실에 충실하자는 쪽으로 가기도 한다.


그런가? 상상력이 작가에게만 필요한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자기만의 상상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것을 글로 옮겨 남에게 읽히는 사람이 작가일 뿐이다.


옥타비아 버틀러 소설을 몇 권 읽었다. [킨]을 비롯하여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이번 작품은 단편소설집이다.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렸다. 모두 다른 내용이지만,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단지 가상의 세계라고만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또는 우리가 겪지 않았으면 하는 세계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


첫작품인 '블러드 차일드'부터 그렇다. 테란이 틀릭의 숙주가 된다. 숙주가 되어 아이를 낳게 된다. 그것도 여성은 인간의 아이를 낳아야 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남성이 숙주가 되어 다른 생명체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


이런 세상. 보호자가 필요한 세상이고, 수술을 통해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는 현실임에도 누군가는 해야한다는, 그래야 테란이 보호를 받고 종족을 유지할 수가 있다. 즉 누군가의 희생으로 종족이 유지되는 세상이다.


테란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틀릭을 외계 생명체로 바꾼다면, 외계 생명체가 인간을 보호하면서 자신들의 종족을 재생산하는 대상으로 인간을 이용하는 세상? 어쩌면 외계 생명체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는 일들이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음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외계 생명체와 인간의 갈등과 공생을 다룬 소설이 하나 더 있는데, '특사'라는 소설이다.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온다면 침공일까? 그들과 공생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처음에는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아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겠지만, 소통하려는 노력 속에서 서로가 타협할 수는 없을까?


'특사'라는 소설은 외계 생명체와 공생하는 인간의 존재를 보여준다. 앞으로 우주 시대라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최근에 감염병이 창궐하는데, 감염병으로 인류가 글을 읽는 능력을 잃거나 말을 하는 능력을 잃은 사회를 그리고 있는 '말과 소리'라는 소설은 섬뜩하다.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도구인 말과 글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넘어갈까?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다 그럴 수는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되고 인류는 혼란에 빠지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말과 글을 기억할 수 있다. 기억한다는 것이 질투를 유발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들로 인해서 희망은 남아 있게 된다. 이 소설은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소설로 읽힌다.


이 소설집에서 무엇보다도 소설의 역할이 무엇인지,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마사의 책'이다. 신이 마사에게 인류를 구원할 능력을 주고 한 가지를 하라고 한다. 마사는 무엇을 선택할까? 그리고 마사는 자신의 선택을 기억하기를 원할까?


어쩌면 작가는 인류를 위해서 무언가 한 가지를 하는 사람이다. 작가의 책이 바로 그렇다. 인간에게 꿈을 주는 역할을 작품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야기, 또 작품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이야기하는 소설로 읽을 수가 있다.


소설 외에 두 편의 수필이 실려 있는데, 한 편은 버틀러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짤막하게 쓴 글이다. 비록 짧지만 버틀러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좋은 글이고, 한 편은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재능이나 영감을 잊으라는 말, 오로지 습관에 기대라고 하는 말. 그렇다. 버틀러의 말대로 '습관은 실제로 나타나는 집요함이다'(279쪽)


이런 습관이 버틀러를 유명한 작가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버틀러를 흔히 SF작가로 분류한다. SF작가든 아니든, SF소설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버틀러의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과거, 미래, 현재에 대한 SF의 사고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대안적인 사고와 행동을 경고하거나 고려하는 SF의 경향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과학과 기술, 혹은 사회 조직과 정치 방향이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SF의 탐구는 무슨 쓸모가 있을까? 기껏해야 SF는 상상력과 창조력을 자극할 뿐이다. SF는 독자와 작가를 다져진 길 밖으로, '모두'가 말하고 행하고 생각하는 좁고 좁은 오솔길 밖으로 끌어낸다. 지금 그 '모두'가 누구든 간에 말이다.' (274쪽)


이게 어디인가? 버틀러의 소설이 바로 이렇게 '좁고 좁은 오솔길 밖'으로 우리를 끌어내고 있으니... 주어진 길에서 벗어나는 즐거움. 새로운 길을 걷는 즐거움. 버틀러 소설에서 느낄 수 있다. 그것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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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 기획은 서울'이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 옛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서울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자석과도 같은 도시다.


  누구나 '서울!서울!' 하면서 서울로 올라오기 때문이다. 하긴 서울에 없는 것이 있을까? 하다못해 현지에서 생산되는 물품들도(공산품이든 농산품이든 수산품이든) 서울이 더 싸다고 하는 말도 있으니...


  의료, 교육, 정치, 경제, 연예 등등 대부분이 서울로 집중되어 있다.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이런 서울중심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 지역에 정부 청사를 이전하는 방법도 시도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서울은 모든 것들의 중심이다.


이런 상황이니 [빅이슈]를 판매하는 도시도 서울과 부산 뿐이라고 하고, 이번 호 뒷면에 있는 빅이슈 판매처를 살펴보니 서울 지하철 역이 24군데(물론 판매하는 곳의 출구가 다른 곳도 있으니 판매처는 24군데보다 많다고 해야 한다)이고 부산은 두 군데뿐이다.


유동인구가 서울이 훨씬 많고 빅이슈를 판매하는 곳이 아무래도 지하철(전철) 역 근처이다 보니 이런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을텐데...


이렇게 서울서울 하지만 과연 서울을 제대로 알고 있을까? 이번 호는 그래서 피상적으로 보는 서울이 아니라 서울을 경험한(살았던 또는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만난 서울에 대한 글을 실었다.


  관광지로서의 서울이 아닌 역사와 삶이 담겨 있는 서울. 급속도로 변해가는 서울이고, 한없이 복잡한 서울이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고 또 단순한 서울이기도 한 서울에 대한 글들.


  다른 도시에 대한 글들도 싣겠다고 했으니, 우리나라 다양한 도시(또는 마을)에 대한 소개가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이번 호에 나온 서울에 대한 글들을 읽었다.


  내가 생각하는 서울하고 이번 호에 실린 글에 나오는 서울하고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고.  

 

  하긴 똑같은 공간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느낄테니, 이번 호에 실린 서울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서울에 대한 다른 느낌을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참고로 이번 호 표지가 두 개인데, 내가 받은 표지는 B형이다. A형은 서울타워(흔히들 남산타워라고 한다)가 B형은 대형건물들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런 사진말고 서울하면 떠오르는 자신만의 사진을 생각하는 것도 이번 호 '서울'을 생각하는 다른 방법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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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의태어의 발견
박일환 지음 / 사람in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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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모양을 흉내낸(?) 말을 의성의태어라고 한다. 어떤 말들은 명확히 소리를 흉내내었고, 또 모습을 흉내냈다고 구분할 수 있지만, 소리를 흉내내었는지, 모습을 흉내내었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딱 의성어, 의태어로 구분하기 힘들다.


하긴 어떤 모습이나 동작에서 소리가 날 때도 있고 안 날 때도 있으니 의태어라고 해서 소리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의성어라고 해서 모습이나 동작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의성어, 의태어를 굳이 구분하기보다는 그냥 의성의태어로 하자.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세분해도 좋고.


박제천이 쓴 시 '통사론'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역사는 주어와 서술어만으로도 이루어지지만 / 시는 부사어를 사랑한다'


그렇다.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니라 감정을 담아서 전달하려면 부사어가 필요하다. 꾸며주는 말, 일명 수식언이라고 하는 말들이 말에 어떤 느낌을 더해준다.


그 중 부사어는 가장 쓰임이 많은데, 부사어를 이루는 말 중에 의성의태어는 표현을 더욱 생동감 있게 해준다.


건조한 말이 아니라 무언가 톡톡 튀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말, 그런 역할을 바로 의성의태어가 한다. 이 책은 이런 의성의태어에 관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


동작, 태도, 말과소리, 동물과 식물에 관한 의성의태어를 소개하고 있고, 그 말들의 어원에 대해서도 잘 설명하고 있다.


그 말이 어떤 상황에서 쓰이는지, 또한 어떤 느낌을 주는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말들이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의성의태어뿐만이 아니라 우리 말을 어떻게 쓰면 더욱 효과적일지도 생각하게 해준다.


여기에 기존 사전(주로 표준국어대사전과 고려대한국어대사전, 우리말 샘을 참조했다고 한다)에서 다루고 있는 방식도 비교해주고 있어서 같은 말이라도 사전 편찬자에 따라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알 수 있다.


사전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많이 쓰는 언어들은 사전에 표제어로 수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사전이 더욱 풍부하게 그 말의 어원 및 쓰임들을 각종 예를 들어서 수록해주었으면 한다.


요즘은 종이책으로 사전이 발간되기보다는 인터넷으로 다 찾아볼 수 있지 않나? 그러니 사전의 수정 작업도 예전에 비해서는 빨라질 수 있고, 또 용량에 제한받지 않고 수록할 수도 있으니 사전을 보면 그 말의 다양한 쓰임에 대해서 알 수 있게 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의성의태어를 사전에서 찾아 그 말들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이 책, 읽으면서 그냥 단순한 사실 전달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담은 말을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의미를 담은 어휘를 알 필요가 있다는 점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박제천 시인의 말처럼 꼭 시에서만 부사어를 사랑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에서 부사어를 사랑해야 한다. 그 부사어에 속하는 말 중에 의성의태어는 말맛을 살리는데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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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사람책'이라는 말을 다시 떠올렸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일은 당연한 일.


  그 영향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좋은 책이든 좋지 않은 책이든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영향을 받듯이 사람과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그냥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으면서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기에 누구의 삶도 소중하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겨우'라는 말을 쓴다. 시인이 국립국어원에서 낸 표준국어대사전을 공부하고, 그에 대해서 책도 냈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뜻풀이를 그대로 가져와 본다.


'어렵게 힘들여, 기껏해야 고작'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그렇다면 시인의 말에서 하는 '겨우'는 무엇일까? 둘 다에 해당하겠다. 


'젊어서는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굴리려고 했다 /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돌아보니 / 겨우 옆으로 살짝 밀어놨을 뿐이다'


여기서는 '기껏해야 고작'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다음 구절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 겨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그런 겨우를 위해 당신이나 나나 참 애쓰면서 여기까지 왔다 // 앞으로 겨우를 갸륵하게 여기기로 했다 / 그런 겨우를 위해 당신이나 나나 참 애쓰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하고 있으니, '기껏해야 고작'인 인생을 위해서 '어렵게 힘들여' 살아왔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 '겨우'를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힘들여 살아왔던가. 그러니 겨우라고 비관하지 말자. 삶은 겨우 '여기'까지 왔을 뿐이니까.


그러니 이 '겨우'를 찾아내는 일. 이것이 바로 삶이고, 우리가 사람책을 읽는 이유 아닌가 싶다. 어떤 사람에게도 '귀를 접'을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는 일.


시인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존재를 보고 우리에게 알려주듯이,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의 삶에서 '겨우' 이룬 것들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귀를 접다


   책을 읽다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으면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위쪽 귀를 조금 접어둔다


   삶은 읽으면서 동시에 쓰는 거라는 걸

   앞서간 이들로부터 진작 배우긴 했으나

   책을 읽다 귀를 접는 건

   읽는 힘이 쓰는 힘을 불러오기 때문이겠다


   돌아보면 내가 써 내려간 글들은

   비문투성이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되고

   표지를 덮듯 관 뚜껑을 덮고 사라졌을 때


   누군가 나라는 책을 들추다

   살짝 귀를 접는 페이지들이 있을까?


   내 귀는 잘 접히지 않아

   늘 소란이 들끓는 시간을 살며

   우물쭈물 여기까지 왔다


   접히지 않는 귀를 지그시 눌러본다

   바깥 소리 대신 내 안의 소리를 담아

   제대로 된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겠다


박일환, 귀를 접다. 청색종이. 2023년. 124-125쪽.


이렇게 시인의 시를 읽다보니 내 삶에서도 귀를 접는 부분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나를 읽는다면, '겨우' 이렇게 살아온 내 삶에서도 귀를 접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삶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도 그런 삶을 살도록 '더 많은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책 역할을 하고, 그들에게서 귀를 접을 부분을 발견하고 내 삶에 옮겨오려고 노력하듯이, 내 삶도 누군가에게는 귀를 접고 옮기려고 노력하게 만들 수 있다면, '겨우'인 내 삶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시가 이렇게 내 삶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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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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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 이우, 점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 섬으로 돌아온 남자 정모, 듣고 말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말하지 못하게 되어 남들에게 듣지도 못한다는 소리를 듣는 아이 판도. 판도를 데려다 키운 이삐 할미.


섬에 사는 주요 인물 넷이다. 이 중에 소설을 이끌어가는 서술자로 등장하는 인물은 이삐 할미를 빼고는 셋. 


섬과 연결된 뭍에 사는 사람으로는 정모의 친구이지만 사업가 아버지를 둔 태원이 있고, 이우를 정모에게 맡긴 이우의 엄마 연수가 있다. 


태원이 간혹 서술자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는 섬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대비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그가 사는 삶은 섬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과는 반대의 삶, 즉 아버지 아래에서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모는 모든 일을 접고 섬에 들어온다. 그가 하려는 도서관 만드는 일은 서울에서 하는 활동과는 상관 없다. 그는 섬에서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마찬가지로 소위 문제아라는 소리를 듣는 이우도 마찬가지다. 


이우가 어긋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누구에게도 이해를 얻지 못한 이우는 사고로 인해 섬으로 보내진다. 그간 살아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 


판도는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아예 어린 시절에 혼자가 되어 이삐 할미의 손에서 자랐기 때문에 전의 삶과 지금의 삶을 비교할 수 없지만, 그가 말을 잃게 된 과정을 보면, 판도 역시 다른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정모, 이우, 판도는 섬에서 다른 삶을 산다. 이때 삶은 그동안 살아왔던 삶과 비교하면 긍정적인 쪽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태원 역시 다른 삶이긴 하지만 그 삶은 부정적인 쪽으로다. 정모의 말을 빌리면 학창 시절에 말썽피우던 태원에게서 느낄 수 없던 거리감을 돌아온 태원에게서 느껴진다고 했으니... 이는 돈만 아는 아버지 영도를 닮아간다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섬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뭍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긍정적인 쪽으로 변화를 이끌어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섬에서 사는 사람들은 각자 섬이기도 하지만 또 연결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상처를 알아도 그 상처를 더 덧내지 않고 감싸 안아주는 생활들.


특히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는 이우의 변화가 바로 '섬'의 긍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낸다. 이우가 점점 변해가는 모습.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 그러면서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모습 속에서 소설은 '섬'이라는 장소가 주는 긍정성을 보여준다.


제목은 '당신의 아주 먼 섬'이지만, 갈 수 없는 섬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가 닿은 섬도 아니지만, 열려 있는 섬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섬'이라는 제목을 지닌 정현종과 함민복의 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이 두 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정현종 시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그 섬에 가고 싶다'이고 함민복 시는 '물 울타리를 둘렀다 / 울타리가 가장 낮다 /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모두 짧은 시다. 하긴 섬이 은 뭍에 비하면 작으니, 섬에 관한 시도 짧아야 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시보다는 길어야 하겠지. 이 시들이 하고 싶은 말을 정미경의 이 소설에서 다 하고 있다고 본다.


서정적 자아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통해 소설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 그리고 그 섬을 어느 정도 엿본 사람들의 이야기, 모두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지만, 울타리가 길이 될 수 있는 사람들 관계.


우리는 모두 독립된 존재이기도 하지만 연결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사실을 이 시들이 보여주고 있다면, 정미경은 세 인물을 통해서 닫힌 존재들이 조금씩 열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다.


이렇듯 작가는 '섬'이라는 장소를 통해서 사람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닫혀 있는 듯하면서도 열려 있는, 그렇다고 쉽게는 갈 수 없는 그런 섬,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관계임을.


당신은 이해하기 힘든 존재이지만 아주 먼 섬이 갈 수 없는 섬은 아니니, 당신에게 갈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는, 당신이라는 섬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지만 그 울타리는 길이기도 함을, 이 소설을 통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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