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창이 오면 처음 삶창을 만났을 때를 생각한다. 아이엠에프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났지. 노동자들이 해고되어 삶이 힘들어졌을 때 그래도 그들의 삶에 희망을 주는 잡지를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땐 삶창이 격월간지였는데, 두 달에 한 번 나오면서 우리들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실렸었는데...


  그러다 삶창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는지, 아니 노동자 조직률이 계속 떨어지고,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 숫자가 계속 줄어들고, 노동자들의 삶이 더 나아지지 않고 있는 상황.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이 대다수 노동자가 된 시대에 삶창도 격월간지에서 계간지로 바뀌었다. 유지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단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데...


이번 호 표지를 보면서 삶창이 힘들어지는 것만큼 노동자들의 삶이 이렇게 흐릿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산업재해는 많고, 월급은 오르지 않고 있으며, 버젓한 직장을 갖지 못한 노동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삶창이 주려던 희망은 어디 있는가?


이번 호에서 노동을 다루고 있는데, 노동이 의무가 아니라 권리임을, 행복하게 노동을 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는데... 뒤에 실린 이인휘의 산문 '공장의 불빛'을 보면 또다시 좌절할 수밖에 없다.


여전한 노동현실. 노동자들을 이윤을 위한 도구로밖에는 여기지 않는 자본가들. 그들에게 그나마 직장을 잃으면 생계를 유지하기가 힘들기에 항의조차 제대로 못하는 노동자들.


아, 삶창을 보아온 지 이십 년이 넘었는데, 왜 노동현실은 이다지도 암울할까? 왜 노동자들은 여전히 먹고살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노동이 자아실현이라는 말은 교과서에나 존재하는지,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한 생계 수단으로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할 일이 되어버린 현실.


이번 호 표지에 나온 사람들, 노동자들, 그들이 이렇게 실루엣으로만 여겨지고 있는 사회라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만 든다.


코로나10로 가뜩이나 힘든데, 사람들이 이제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너나 없이 고통받고 있는데, 삶창을 읽으면서 받았던 위안이, 이번 호에는 우리 현실을 직시하게 하면서 도대체 무엇이 변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한다.


기본소득을 생각한다. 기본소득이라고 하지 말고, 기본배당이라고 하자.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배당. 노동자 없는 사장이 어디 있겠는가? 사회 구성원은 모두가 사회를 이루는 필수 요원이다. 그러니 그들은 그에 해당하는 배당을 받아야 한다.


그런 인식을 해야 한다. 그들이 기본배당을 받는다면 사장들이 저지르는 부당한 행위에 순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생계는 해결될테니. 그러니 기본배당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일하는 일터를 행복한 공간으로 바꾸기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적어도 기본배당이 실시된다면, 지금 코로나19를 맞이하여 재난지원금을 주는데, 88%에게만 준다는 이상한 정책은 나오지 않게 되겠지.


삶이보이는창 126호를 읽으며, 다음 호에서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이렇게 실루엣이 아닌 또렷한 모습으로 나오기를 기대한다. 우리들 삶이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받고, 그 위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여러 제도들이 갖춰지기를 기대하면서...


적어도 그런 논의가 사회적 논제로 자리잡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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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를 읽는 이유. 다른 세상,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

  코로나 19로 인해 사람들 간에 대면하기 더욱 힘들어졌는데, [빅이슈]를 통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빅이슈]가 아니라면 그냥 지나쳤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게 되고, 더불어 내 삶도 돌아볼 수 있어서 좋다.


  이번 호에는 다양한 사람들도 나와 좋지만, 무엇보다 점점 심해지는 열대야에 잠 못이루는 사람을 위해 숙면 취하는 법이라는 글을 실어주어서 더 좋다.


  잠을 설치면 하루가 피곤하다. 그만큼 열대야는 우리들에게 괴로운 존재가 되는데... 굳이 열대야뿐만이 아니더라도 잠을 설치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숙면을 취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글이 실려 있는데, 물론 그 글을 통해서 모두가 숙면을 취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여러 방법을 알려주어서 도움이 된다.


밤 잠이 낮 활동과 연관이 있다는 말 공감한다. '아침 산책이 수면에 끼치는 놀라운 영향'이라는 글을 읽어보면 우리는 잠을 밤과만 연관짓는데, 오히려 아침 산책이 잠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이 글, 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줬다.


그렇다. 낮에 충분히 햇빛을 받고 활동을 하면 그 여파(?)로 밤에 잠을 잘 잘 수 있다고 하니, 아침 산책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겠다.


그만큼 잠은 중요하기 때문인데, 잠이 휴식이고 재충전하는 시간이라면, 열대야는 그를 방해하는 요소. 이런 열대야가 우리 사회 곳곳에 있어서 우리들 건강을 위협하는 일이 많은데... 이렇게 사회 곳곳에서 열대야에 시다리는 사람에게 청량한 잠을 선사하는 잡지가 [빅이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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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7-23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들 지쳐가는 시기에, ‘빅이슈‘ 표지가 참 달콤하게 위안을 주네요.

kinye91 2021-07-23 16:03   좋아요 0 | URL
힘든 시기에 위안을 주는 잡지예요.
 

  청소년 주거권에 대한 글이 실렸다. 청소년 주거권. 생소하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청소년 주거권이란 그들이 부모에게서 나와 살아갈 때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 권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집을 나온다. 부모로부터 벗어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아주 단순하게 가출이라고 하고, 이들을 가출청소년이라고 말하면서 비행청소년이라는 말과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왜 이들이 부모로부터 나와 살아가려고 하는지를 살피지 않고,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개념을 상정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미성년자들을 '비행'이라는, 잘못된 행동이라는 틀에 가두어 두려 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부모로부터 벗어남이란 자신이 부모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는, 자기 삶을 스스로 살아내야 하는 목숨을 건 도약이라 할 수 있다.


부모와 함께 도무지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집을 나온 청소년들, 그들에게 어떤 집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가? 단지 비행청소년이라고 규정하고 떠나온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는가? [빅이슈]는 이 점에 대해서 짚어주고 있다.


그들에게도 주거권이 있음을, 그들이 가정으로부터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줘야 함이 사회가 지닌 책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 [빅이슈]에서 주장하는 '청소년에게 주거권을 허하라!'는 주장은 우리가 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


가족에 대한 개념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논의가 되고 있는데, 그와 연관지어서 청소년의 주거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도 좋을 듯하다.


[빅이슈]가 노숙인들이나 어려운 사람들이 자립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잡지라면 탈가족 청소년들에게 주거권을 마련해주는 문제 제기는 [빅이슈]의 취지와도 맞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호부터 연재되는 빅판의 생애 구술사는 더 의미가 있다.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생각을 하는데...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글이다. 계속 연재 된다니 기대가 된다.








 

이번 호 표지 인물은 차인표다. 참 반듯하게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을 읽어봐도 이처럼 반듯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얼굴 표정에서 차가운 느낌을 받았는데 글을 읽어보니 참 따뜻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사람. 자기만이 아니라 주변 존재들에게도 희망을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빅이슈]에 화보가 실렸다는 것을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빅이슈]에 애정이 간다.


여기에 또다른 배우 유승목이 있다. [빅이슈]를 구매하다가, 이제는 정기구독을 한다는 사람. 그의 가족이 [빅이슈]에 애정을 지니고 이 잡지가 많은 사람에게 읽혔으면 하는 내용도 좋았다.


그렇다. [빅이슈]는 많은 사람에게 읽혀야 한다. 당위로서가 아니라 읽으면 좋은 잡지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주제들로, 다양한 사람들 이야기가 실려 있어서 내 삶을 더욱 넓고 깊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책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표지 사진(그 표지 모델은 차인표와 그의 친구 김광수 씨다)과 다른 것을 나는 받았다. 차인표의 얼굴을 중심으로 찍은 사진. 둘 다 표지 사진으로 좋을 듯해서 함께 올린다. 


2주가 지나면 새로운 [빅이슈]가 온다. 설렘으로 늘 새로운 [빅이슈]를 기다린다. 기다림이 즐거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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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실체가 잡히지 않았다.


  막연한 불안감. 촛불이 타버리고, 촛농만 흘러 촛불을 켰던 사람들 손에 뜨거움만 남겨 놓은 상태.


  어둠을 밝히려고 촛불을 켰는데, 촛농으로 내게 뜨거움만 남기고, 초를 놓아버리게 만든 시간들.


  그것이 바로 불안감이 생긴 원인이었다. 촛불로 밝히려던 많은 일들이 밝혀지지 않고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는 생각.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쳇바퀴 위에서 열심히 달렸구나 하는 생각.


꼭 외부 요인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외부 요인이 강하게 다가오더라도 내부에서 고쳐나갈 의지가 있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터다.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 녹색평론179호를 읽으며 불안의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최병성, 탄소중립,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선진국으로 인정받았다고, 세계에 도움을 요청하는 나라에서 세계에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되었다고, 탄소중립으로 가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자화자찬하는 방송이 많았는데... 과연 그런가?


왜 도처에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숲을, 땅을 밀고 그 위에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고, 사람들은 여전히 아침에 나가 저녁에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많은데 '중대재해처벌법'조차 어정쩡하게 처리하고 있는지...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면서 숲에 있는 나무를, 그것도 30년이 넘은 나무는 탄소 흡수율이 떨어지니 베어내고 어린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하면서 베어내고 있으니...


재생에너지를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태양광, 풍력 발전을 위해 농토를 없애고, 산을 깎는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으니, 녹색평론 이번호를 읽지 않았으면 그냥 막연하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만 생각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태양광을 농토에 만들지 않고 고속도로를 둘러싸고 있는 방음벽, 철도 방음벽 등에, 또 고층 건물 외벽에 설치하면 될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 산촌에 건설해서 송전탑과 송전선을 만들어 전력을 이동시키는 정책은 환경 파괴 정책이지 환경 보호 정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지적.


나무로 문제를 국한시키더라도 이번 정부 정책에는 문제가 많다고 한다. 30년 이상된 나무가 탄소를 흡수하는 능력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탄소를 저장하는 능력은 훨씬 뛰어나다고 하니 방송에서 다루었던 우리나라 숲에 30년 이상된 나무들이 많아서 탄소 흡수율이 떨어지니 그 나무들을 베어내고 어린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말이 잘못된 주장이라고 한다.


'30살까지는 나이를 세기 어려울 만큼 나이테가 간격이 아주 촘촘했다. 그런데 30살이 넘어가자 나이테 간격이 폭발적으로 넓어졌다. 나무가 성장한다는 것은 탄소를 흡수하는 과정이다. 나이테가 더 넓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탄소를 흡수하여 몸에 저장한 것이다.' (최병성 글. 11쪽)


'나무 둥치는 나무가 대기 중의 탄소를 흡수하여 자기 몸에 저장한 것이다. 나무는 탄소덩어리 자체다.' (최병성 글. 13쪽)


이 글을 통해서 오래 된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는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탄소는 토양에도 많이 저장되기 때문에 나무를 베면서 토양을 훼손하는 일도 탄소중립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한다.


말로만 환경, 생태, 탄소중립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자연과 공생하면서 우리 인류의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점을 녹색평론 179호에서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탈핵으로 간다고 했으면서도 고준위핵폐기물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전 정권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앞에 내세우는 말과 실제로 하는 행동이 다른, 전 정권과 차이가 나는 정책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촛불이 결국 우리들 손만 데게 하고 있는 상태. (황대권, 고준위핵폐기물 투쟁의 전말)


하지만 이런 일들에 실망만 할 수 없다. 회의가 들고 그냥 포기하기엔 들었던 촛불이 아깝다. 초는 자신을 태워 불을 밝혔는데,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고 김종철 선생을 다루고 있다. 녹색평론을 만들고 우리들에게 생각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리 시대의 어른. 돌아가신지 1년이 넘었는데... 그분의 주장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됨을 깨닫게 하고 있다.


오래 걸리더라도 가야할 길이 있다면 가야만 한다. 그 길을 걸어가야 함을 김종철 선생이 잘 보여주었고, 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는 '김종철 선생 1주기를 맞으며'는 아직 우리에게 희망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 녹색평론이 여전히 발간되고 있음은 우리에게 아직도 희망이 있음을, 우리가 가야할 길이 있음을, 그렇게 그 길을 함께 가자고 결코 멈추지 말자는 독려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호에 실린 이문재의 문장을 마음에 새긴다.


'근대문명이 끝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이 끝이 끝나기 전에 (이 끝이 끝나는 순간 인류는 사라집니다), 끝을 시작으로 바꿔내야 합니다. 선생이 누차에 걸쳐 말했듯이 우리 안에 있는 '시의 마음'을 되찾는 것이 전환의 시작입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시의 마음으로 우리가 다시 만날 때, 우리 '전환의 전위'는 춤을 추게 될 겁니다. 샤먼의 영혼과 땅의 노래(시)가 어우러지는 춤이 '공생공락의 가난한 사회'를 만들어내는 맨 앞이 될 것입니다.' (153쪽)


"끝이 시작되었다. 춤을 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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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환이 낸 첫시집이다. 사실 첫시집인지도 모르고 샀다. 헌책방에서. 헌책방에서 이런 시집을 만날 수 있음은 행운이다. 행복이다.


  다만, 첫시집인데 97년 7쇄본이다. 초판본은 1982년에 발간되었고. 7쇄를 헌책방에서 구입할 수 있을 정도니, 이 시집은 제법 읽혔다고 봐야 한다.


  시인이 이 시집을 냈을 때는 전두환 정권의 독재가 기승을 부릴 때. 광주민주화 운동을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그러니 이 시집에는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절망 속에서만 허우적대지는 않는다.


  절망이란 희망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아님 고통스런 현실을 건너게 해주는 육교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후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담한 절망 속에서만 절실한 희망이, 진정한 쓰러짐이 있어야만 가슴을 치는 일어섬이 이룩될 수 있다는, 작지만 매운 진리를 나는 아직 포기하지 못한다. (147쪽)


82년, 83년, 84년...87년. 이렇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민주화를 이루지 않았던가. 적어도 이제는 독재가 자리를 잡을 수 없는 정치혁명은 이루지 않았던가.


이렇게 시인의 말처럼 우리는 참담한 절망도, 진정한 쓰러짐도 겪고 일어섰다. 그 소중한 경험. 이 시집에 실린 첫시는 제목이 된 '지울 수 없는 노래'다. 작은 제목이 '4·19 21주년 기념시'다. 


4·19 21주년이면 1981년이다. 이런 일이? 4·19혁명이 일어나고 바로 다음 해에 5·16군사쿠테타가 일어났는데, 1981년이면 80년 광주민주화 운동이 끝난 다음 해 아니던가. 이런 역사의 반복 속에서, 시인은 절망에 빠져 있기보다는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있다/그들의 뜨거움은 아직도 있다'(지울 수 없는 노래 부분)고 하고 있다.


절망의 순간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런 쓰러짐 속에서 다시 일어섬을 꿈꾸고 있다. 그렇게 시인이 바라는 대로 지금 우리는 다시 일어섰다.


이 시집에 실린 시 '육교를 건너며'를 본다. 이렇게 우리는 삶에서 수많은 육교를 만나며, 또 그 육교를 건넌다. 


육교를 건너며


육교를 건너며

나는 이렇게 사는 세상의 

끝이 있음을 믿는다

내 발바닥 밑에서 육교는 후들거리고

육교를 건너며 오늘도 이렇게 못다한 마음으로

나의 이 살아있음이 언젠가는 끝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고

또 사랑하는 것이다

육교는 지금도 내 발바닥 밑에서 몸을 떤다

견딘다는 것은 오로지 마음 떨리는 일.

끝이 있음으로 해서

완선됨이 있음으로 해서

오늘, 세상의 이 고통은 모두 아름답다

지는 해처럼

후들거리는 육교를 건너며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의심하며 살 것이며

내일도 후회없이

맡겨진 삶의 소름 떠는 잔칫밤을 치를 것이다

아아 흔들리는 육교를 건너며

나는 오늘도, 이렇게 저질러진 세상의

끝이 있음을 믿는다

나의 지치고 보잘것없는 이 발걸음들이

끝남으로, 완성될 때까지

나는 언제나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김정환, 지울 수 없는 노래. 창작과비평사. 1997년 7쇄. 114-115쪽. 


힘들고 지칠 때 이 시를 읽으면 솔로몬인지 다윗인지에게서 유래했다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생각난다. 이 말처럼 우리는 언제간 끝이 있음을 안다. 끝이 있으을 믿으면 과정에 충실하게 된다.


고통의 순간도 지나가고, 환희의 순간도 지나갈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이 순간 열심히 살아야 함을... 시의 '나는 언제나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결코 포기할 수 없음을, 지금은 흔들리고 있지만 우리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갈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 열심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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