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나고, 우수도 지나고, 이제는 봄이 다가와야 하건만, 계절은 어김없이 봄을 향해 가고 있단 믿음이 있는데, 그럼에도 순간 순간 닥쳐오는 추위에는 어쩔 수가 없다.


  아직 완연한 봄은 아니구나. 봄이 이처럼 쉽게 오지는 않는구나. 순환하는 계절도 이렇게 한차례씩 또는 몇차례씩 고통을 동반하면서 오는구나.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도 편하게 오는 계절은 우리에게 감흥을 주지 못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자연은 그래도 조금 늦거나 빠르거나 또는 혹독하거나 부드럽거나 제 철을 보내주고, 우린 제 철을 맞이하게 되는데, 정치는 아니다.


어쩌면 선거는 우리에게 또다른 봄을 맞이하게 해줄 기회이기도 하지만, 겨울로 되돌아가게 할 위기가 될 수도 있다.


겨울철 칼바람만큼이나 살벌한 말들이 난무하고, 그 말들로 인해 몸과 마음은 더 추워지고 있는 상황.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 말로는 우리들에게 봄을 선사하겠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서는 겨울로 우릴 끌고 가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춥다. 정치판에서 나오는 찬바람들에... 이럴 때 따스한 바람, 부드러운 바람, 우리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줄 바람을 쐬고 싶다. 이런 마음이 있을 때 [빅이슈] 269호가 왔다. 표지가 초록바탕에 반려견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탠져린즈'들이 있다.


반려견들, 요즘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지만, 반려견이 되지 못한 개들 역시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반려견들은 귀엽다, 예쁘다, 사랑스럽다 등등의 말들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함께 지내지만 어느 순간 반려견의 지위를 잃은 개들은 무섭다, 더럽다, 위험하다 등등의 부정적인 말들과 함께 사람들에게서 멀어져야 할, 또는 안락사를 시켜야할 존재로 전락하기도 한다.


반려견과 비반려견의 차이가 무엇일까? 단순히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이유로 나누고 차별을 한다면, 과연 그것이 타당할까? 이번호에서 제주 탠져린즈를 다룬 글에서는 그러한 반려견/비반려견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우리 생명이 소중하듯이, 우리 존재가 모두 하나하나 온전한 존재이듯이, 이들 역시 온전한 존재라는 사실, 존중받아야 할 생명이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여기에 더불어 무거운(?) 주제를 다룬 글들이 있다. (성현석-조용한 궁리: 한니발은 왜 승리를 활용할 줄 몰랐을까?와 녹색빛: 기후 대선을 위한 선택)


무겁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우리에게 봄이 오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에 대한 글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오늘만 살지 않고,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미래를 현재에 불러오면서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는 삶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 눈 앞의 이익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눈 앞의 이익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는 눈을 갖추고 또 지금 당장은 필요없게 여겨질지라도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준비해야 할 일들은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고, 인류가 오랫동안 생존해 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한니발은 왜 승리를 활용할 줄 몰랐을까?'란 글에서 지금 우리에게 다가올 선거를 생각하게 된다. 한니발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미래를 책임질 정치에 대해서, 우리에게 봄을 가져올 정치가 어떤 정치여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기후위기, 또는 기후재앙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기후 면에서는 혹독한 겨울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겨울에서 봄이 오게 하려면 우리가 행동해야 한다. 행동하기 위해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후위기 역시 정치와 떨어져 있지 않다. 기후위기를 해결하도록 나설 정치가 되도록 하는 일, 역시 시민의 몫이다. 그러니 이번 호는 봄을 앞두고 마냥 기다리지만 말고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적어도 우리들이 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그래야 봄이 올 수 있다고 하는 듯하다.


뭇생명들에 봄을, 우리 정치에도 봄을, 그래서 우리들 삶에도 봄이 깃들기를... [빅이슈] 269호를 읽으며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장 좋을 때 그때를 있게 만든 존재를 잊기 쉽다. 그냥 지금에 취해서 마냥 그랬다는 듯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좋음에는 좋지 않음이 반드시 있고, 좋지 않음에는 좋음이 따를 수 있다.

 

  활짝 핀 꽃을 보면서 그 꽃이 피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보태준 존재들이 있기에 꽃이 필 수 있다는 사실.

 

  마찬가지로 내 성공은 나만의 성공이 아니다. 누군가의 도움, 그것이 비록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수많은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지금 내 성공이 있게 된 것이다.

 

그 점을 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지금 막 피어난 꽃에게 시인은 이렇게 당부한다.

 

 꽃이 피는 너에게

 

사랑의 시체가 말했다

 

가장 잘 자란 나무 밑에는

가장 잘 썩은 시체가 누워 있다고

 

가장 큰 사랑의 눈에는

가장 깊은 슬픔의 눈동자가 있다고

 

봄나무에게서 꽃이 피는 너에게

 

김수복, 외박, 창비. 2012년. 14쪽.

 

성공이 오로지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이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래, 지금 화려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건 너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들 덕이라고... 그 점을 명심하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로나19로 배달시키는 일이 많아졌다. 도로 곳곳에서 배달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다. 

  

  속도, 속도, 빠르게 빠르게... 조금만 늦어도 배상을 해야 하는 상황. 무조건 빨라야 한다. 배달 사정은 고려하지 않는다. 도로 상황이 어떻든, 교통 규칙을 지켜야 하든 말든, 오로지 빠르게 제 시간에 배달이 되어야 한다. 그게 규칙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빠를 수 있나? 빛보다 빠를 수 있나? 빨리 빨리를 외치다 제 삶의 여유를 잃고 오로지 빠름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현재 느리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여유가 있다. 그렇게 빨리 빨리를 외칠 필요가 없는데도 그들은 이윤을 위해서 빨리 빨리를 외친다. 자기가 아니라 남에게. 빨리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가 힘든 사람들에게 자기 이익을 더 남기기 위해서 또는 자기가 좀더 편하기 위해서.


그래서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은 더 빨리 움직여야 하고, 먹고 사는 것이 남아 도는 사람들은 더 남아돌게 하기 위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빨리 움직이게 한다. 자신은 느긋하게 있으면서.


빨리 움직여야 살 수 있는 사람과 느리게 움직여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같은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서로가 만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을까? 배달 음식을 시켜도 직접 얼굴을 마주 보면서 받는 경우보다는 이제는 배달 음식이 왔다는 문자만 남기고 문 앞에다 놓고 가게 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계산이야 예전에는 직접 배달하는 사람에게 주었지만, 지금은 배달을 시키는 순간, 배달료까지 다 계산이 되니, 얼굴을 마주 볼 일이 없다.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들.


주창윤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특히 1부'너무 늦었다 역으로 가는 쿠팡 트럭' 속에 있는 시들을 읽으며. 줄여서 '배민'이라고 부르는 '배달의 민족'이라는 배송 업체,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배민 라이더'에 대한 이야기들과, 로켓 배송이라고 자랑하는 쿠팡에 속한 배달하는 사람들 이야기.


그들은 배달하는 사람, 빨리 움직여야만 살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배달 받는 사람들은 느리게 움직여도 되는 사람. 같은 나라에 살고 있지만 살고 있는 세계가 다른, 그들이 처한 세계는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안드로메다로 배달을 나간다. 갈 수 있을까? 안드로메다가 우리 은하에서 가장 가까운 은하로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빛의 속도로도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250만 광년이 걸린다고 한다. 시속 1만 광년으로 달려도 250년이 걸리는 곳. 그런 곳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이들이 집으로 돌아와 편안히 쉴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들이 안드로메다에 배달을 빠르게 해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배달해야 하는 저쪽과 쉴 수 있는 이쪽의 거리. 안드로메다와 지구의 거리... 그 거리에서 빠르게, 빠르게, 삶을 소진해야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집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특히 제목이 된,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와 '안드로메다에서 오는 배민 라이더'를 읽으면 마음 한 켠이 찡해 온다.)


결국 안드로메다는 그들이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된다. 다른 존재들이 살고 있는 다른 곳. 결코 지금처럼 살아서는 갈 수 없는 곳. 이만큼 사람들 사이에 거리가 있다. 그래서 주창윤의 이 시를 읽으면서 빠르게 배달하는 사람들의 고충도 읽혔지만, 거기에 더해 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삶이 있음을, 그런 삶은 개인의 노력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음을. 



사회의 노력이 함께 해야만 안드로메다와 여기의 거리가 좁혀지고, 안드로메다가 갈 수 없는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갈 수 있는 세계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누구는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자기 삶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고, 누구는 가만히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빨리 움직이게 하는 세상. 그들의 빠름으로 자기 안락을 추구하는 세상이 바람직한 세상은 아니고 그것이 개인의 책임은 아니니까, 


제목이 된 시를 감상하면 더 좋다. 이 시에 나오는 기계인간 테레사가 한 말이 실현되지 않도록 하려면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사회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책임을 지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 은하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삶들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머나먼 길이다 청량리역에서 안드로메다까지,

별의 여왕에게 영원히 배고프지 않는 마법의 라면을 배달하러

페가수스 별자리를 향해 일만 광년의 속도로 질주한다.


나보다 더 빨리 달리는 외계인 폭주족들,

향하는 곳이 암흑성운인 줄도 모르고

무한대로 들어간다 큰 코끼리 별과 반딧불 별 사이

스타벅스 커피숍을 지나면

낙태된 자매 별들이 무중력 상태로 떠다닌다.


소행성 벨트를 따라 흘러나오는 미세먼지와

서울에서 뿜어낸 가스가 모여 잉태한

신성新星들 사이에 있는 분식점 은하정에서

라면 한 개와 이천 원짜리 김밥 한 줄을

나는 성급히 먹는다.


천공의 성 라퓨타 계단 아래서 마구 떨어지는 운석들이

우주 아래에 하얗게 쌓인다

기계인간 테레사가

"내 별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 별도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는군요"라고 말할 때,


나는 이미 밤이 없는 행성을 지나

낮이 없는 행성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주창윤, 안드로메다로 가는 배민 라이더. 한국문연. 2021년. 18-19쪽.



이 시뿐만이 아니다. 2부에 있는 '펀치 머신, 헐歇!' 시들. 3부에 있는 '사우나 출애굽기'에 시들도 좋다. 한 시집에 이렇게 마음에 드는 시들이 많기도 드문데, 이 시집에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듯이 보여주는 그런 시들이 많아서 마음 속에 콕콕 박힌다.


펀치 머신에서는 이리저리 치이는 현대인의 삶을, 그리고 지친 몸을 싼 값에 쉬게 할 수 있는 사우나 풍경을 통해서 빠름 속에서도 쉼이 있어야 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이렇듯 지금 우리 사회 현대인의 모습이 이 시집에 오롯이 들어 있다.


이 시집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의 삶이 어디에 있도록 해야 하는가? 삶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물을 수 있는가? 개인의 삶에는 사회의 책임이 따라야 하지 않는가? 내 빠름, 내 편안함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더 빠름을, 더 힘듦을 요구하는 사회가 바람직한가?  


덧글


너무 감사하게도 시인에게서 이 시집을 받았다. 


시인이 시인의 말에서 한 말 


'언어의 안개를 명징하게 걷어내고 싶었다. / 날 것을 명쾌하게, / 표면적으로, / 그냥 입에 녹듯이,'라고 하고 있듯이 내게 명쾌하게 다가온 시집이다. 


선물을 받은 시집이지만, 시에 대한 감상은 오로지 내 몫이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많은 이론보다 이 시 하나가 페미니즘에 대하여 잘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시집 제목이 된 '여왕코끼리의 힘'도 페미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여성성을 강조하고 있고, 그러한 여성성을 부드러움과 일치시키고, 그것이 다시 비어있음과 포용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 시집에서도 그러한 여성성에 대해서 다룬 시들이 많다.


  강함을 추구하는 사회는 배제를 전제로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약한 것들을 배제하고, 또는 드러나지 않게 하는 사회. 그래서 강함은 딱딱함과 연결이 되고, 딱딱함은 포용성 없음으로, 다양성보다는 단일성, 획일화를 추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도덕경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단단함은 곧 죽음이라고. 이걸 우리 생각에 연결시키면 사고의 경직성은 생각의 죽음이니,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잡으면 그 사회는 다양성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가 된다고. 그리고 이런 사회는 여성성을 추구하는 사회와는 다른 사회라고.


이 시집에 실린 '연금로(練金爐)'라는 시를 보면 여성성이 추구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그러한 여성성이 실현되지 않는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이론서보다도 더 명확하게 이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를 보자.


     연금로(練金爐)


여자가 여자에게로 면면히 물려주는 유품입니다


티라노사우루스의 이빨이 들어갑니다

칭기즈칸의 창, 나폴레옹의 칼,

히틀러의 전자포, 루스벨트의 핵폭탄,

식민지에 복제 인간을 대량 사육하고 싶은

남자의 채찍이 들어갑니다


수천만 년 불뚝이는 육식성 근육질들

무쇠 가마 안에서 물엿 끓듯 오래 달여져

펄죽펄죽, 퍽, 퍽,

연금로 안에서 공기 방울을 터트립니다

뎅글뎅글한 헷살들이 터져 나옵니다


붉은 해저궁 같은 연금실 공간에

순금 노을이 햇살을 굴리며 여울질 때


거름망을 통과한 사내아이들이 걸어 나옵니다

순한 쌍떡잎 언뜻언뜻 비치며


......................................그럼에도

역사는 전환점에 다다르지 못한 것 같고,


들춰 보면 늘 고통의 벽화입니다

퉁겨져 나올 듯 어깨뼈가 불거진 아프간 아이들

조막손이로 줄줄이 태어나는 체르노빌 아이들

철조망을 붙잡고 사라진 지평선을 내다보는

킬링 필드의 아이들,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아이들


나는

연금술 이론 자체를 엎어 버릴까, 말까, 생각합니다

이미 내벽이 얇아지고 군데군데 헐어 버린

오래된 연금로를 깃털 업는 어깨 위로 치켜들고


조명, 여왕코끼리의 힘. 민음사. 2008년 1판 2쇄. 40-41쪽.  


'연금술 이론 자체를 엎어 버릴까, 말까, 생각합니다'라고 절규하는 시인의 목소리. 이는 아직도 세상은 이 시의 앞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그래서 이렇게 힘들고 혼란스럽다고...


하지만 이 연금로가 완벽하게 작동하지 않는다고, '내벽이 얇아지고 군데군데 헐어 버'렸다고 버려서는 안 된다. 고쳐야 한다. 이런 연금로 없는 세상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세상이 될 수밖에 없으므로.


시인도 그 점을 안다. 그러니 이 시집 제목이 바로 힘센 남성성을 거느리고 평화를 유지하려 한다는 내용을 담은 '여왕코끼리의 힘'이지 않겠는가.


다만, 아직도 강함과 배제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연금로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들이 연금로를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버리게 했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보라고...


시 앞부분에서 제시했던 엄청난 폭력성들을 계속 겪을 것이냐고, 우리 후손들에게 그런 세상을 물려줄 것이냐고?  시인의 이 시는 어떤 이론보다도 더 단순하고 명확하게 우리에게 '여성성'이 중요함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이때 여성성은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니라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여성성을 생각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목이 어둡다. 암흑향이라니... 암흑이라면 캄캄함이고, 향이라는 한자어는 마을, 고향이라는 한자어니까, 제목을 풀어쓰면 캄캄한 마을 정도가 되겠다.


  표지 디자인 역시 검은 테두리에 하얀 바탕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암흑이라고 해서 전부 까맣지는 않으니... 암흑은 빛을 예비하고, 빛은 다시 암흑을 예비하니...


  우리가 알고 있는 빛들은 어둠 없이는 우리에게 올 수 없지 않은가. 빛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어둠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시 제목인 암흑향은 어두운 마을이라는 의미보다는, 이 어두움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집에 실린 시들이 하나같이 어려워서, 또 한자도 많아서, 그리고 고대신화(우리나라나 서양의)들이 맥락없이 (시인에게는 맥락이 있을지 몰라도 내게는 맥락이 없다. 단지 그러한 사건들, 사람들, 존재들, 이야기들을 뒤섞어놓은 듯한 느낌만 있을 뿐) 섞여 있어서, 시집 자체가 암흑향이다. 내겐 조연호 이 시집이 아주 어두운 마을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더듬더듬 나아가야 하는, 한 줄기 빛을 애원하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한다.


이 암흑향인 시집에서 어떤 빛을 찾을까? 찾으려고 노력하면 찾을 수 있을까? 이 시집에 유난히 적()이라는 한자어 제목을 단 시가 네 번 나오는데, 이 '적()'이라는 한자어는 부적이라는 뜻이다.


부적, 귀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지니고 있거나 집에 붙이거나 하는 물건 아닌가. 즉 부적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귀신과 재앙을 늘 의식하고 산다는 얘기다. 그러니 그런 세상에서는 귀신과 사람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시집 첫 시인 '적()'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죽어 또 귀신이 된 너와 만나 즐거웠다' (9쪽) 

그렇게 시는 귀신과 함께 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어둠이 빛과 함께 할 수밖에 없음을 같은 시에서 '더러운 얼굴로만 깨끗한 얼굴을 닦을 수 있다는 걸 거기서 배웠다'(9쪽)고 하고 있다.


조연호의 시는 독자에게 어떤 애교도 없다. '시'라는 시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시는 / 애교가 없어 불행하다'(12쪽)


이렇게 조연호 시는 애교가 없어 불행하다. 애교가 없는 시를 다른 말로 하면 독자들의 마음에 드는 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독자를 위해서 쓴 시가 아니라 시인이 쓸 수밖에 없는 시를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 시인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또는 무의식 저변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을 잡아 시라는 형식으로 표현해내고 있을 뿐이다. 그 시를 읽는 우리는 그 시에서 또다른 암흑을 느낄 뿐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어디 암흑향인 곳이 이 시집만이랴. 더 많은 암흑향들이 있고, 그럼에도 우리는 그 암흑향에서도 아주 작은 빛을 찾아 삶을 꾸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이 시집을 읽으면서 '마크 로스코'의 그림이 떠올랐다. 특히 검은색 계열로 칠해진 그림들. 그 그림들에서 암흑향을 보는데, 마냥 암흑만은 아니라는 느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2-15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스코!
그의 그림에서도 향기가 날까요?
세계가 거기에 담겨있다고 하니!
오랜 응시는 감동을 자아낸다던데 여행자는 그럴 시간이 없죠 ㅠ

kinye91 2022-02-15 11:00   좋아요 1 | URL
저도 그림은 잘 몰라서요. 다만 오랜 응시를 통해 감동을 받을 순 있을텐데...저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네요.

초란공 2022-02-15 1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와 함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 같네요.~ 잘 읽었습니다!

kinye91 2022-02-15 14: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