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수분이 되어야 하는


   써도 써도 쓸 것이 있는 화수분. 주고 주고 또 주어도 더 주어야 하는 교사. 줄 게 없어서 못 주는 것이 아니라, 받을 사람이, 받고자 하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 그가 화수분이 아니라면, 바닥을 보인 것도 모자라 삼년 가뭄에 쩍- 쩍- 갈라진 논처럼 마른 정신을 지닐 뿐.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맑은 샘물, 교사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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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벗

           -아내에게


머나먼 천축국으로

함께 가고 있는 그대.

그대가 삼장이라면

나는 손오공.

제 흥을 이기지 못해

때로는 어긋나고

때로는 날뛰기도 하나

그대의 주문 한 마디에

그대 곁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

함께 가는 길

요정도 만나고

요괴도 만나고

다른 길벗들도 만나며

웃고 울며

가는 길

해탈에 이르기까지

함께 가는,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길벗.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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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세밑 양과 원숭이의 대화

  - 을미(乙未) 년이 가고 병신(丙申) 년이 오니


젖 주고,

털 주고,

가죽 주고

고기까지 주었지만

돌아온 것은

죽어야만 벗어나는

내 몸을 옥죄는 울타리

좁은 틀에서 시키는 대로

주는 대로만 살아온 삶

넓은 초원을, 높은 산악을

자유롭게 노닐던 산양조차

그들의 삶터가 울타리에 갇힌

순종적으로 보내야만 하는

그런 삶,

자네는 살지 말게


우리는 울타리를 넘어

자유를 꿈꾸는 존재

젖도, 털도, 가죽도,

고기도 주지 않지

간혹 잡혀 갇히기도 하고,

심지어는 골을 파먹히기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자유롭게

숲속을 거닐고,

훨훨 나무 위를 날아다니리

울타리로 우릴 가둘 수는 없어.

우리의 자유를 받아

닭이 새벽을 노래하는 울음을 울겠지

이제는 자유로운 시대가 왔다고

더 이상 울타리는 필요없다고,

자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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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벨이 성전(聖殿)에게


들을 귀 있는 자는 듣고,

볼 눈이 있는 자는 볼지어니,

내 실패를 문자로 남긴 까닭을.


하늘에 다가갈수록 하느님과 멀어지고

위로 솟아오를수록 지옥으로 내려가고

외양이 웅장할수록 영혼은 초라해지고

내가 살찔수록 백성은 수척해지니

하느님과 소통하고자 하던 나 자신이

백성들과의 소통을 막는 장벽이 되었으니.


낮은 데로 임하소서

하늘은 저 높은 곳에 있어

우리가 올라야 할 곳이 아니라

저 낮은 곳에 있어

우리가 내려가야 할 곳이라는 걸.


오를수록 나를 잃고

내릴수록 나를 찾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저 높은 곳에서

말을 잃고서야 깨닫게 되었으니.


귀 있는 자는 듣고.

눈 있는 자는 보아라.

내 실패가 문자로 남은 까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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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석

-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에게


   저 너머 세상은 좋은 세상일 거라고, 더 빨리 가는 것이 좋다고 편하게 빠르게 산길을 가고 있는데, 작은 돌덩이들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습니다. 저쯤이야, 차 바퀴로 통통 튕기며 다른 세상으로 질주하고 있었습니다. 산을 다 넘을 거라, 이제 곧 저 너머에 도착하리라 생각하고 있던 그 때, 커다란 바위가 떡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차로 밀 수도 없고, 지금껏 온 길을 되돌아가자니 너무도 억울하고, 어찌해야 하나 앞이 막막했습니다. 저 너머로 너무 편하게 다른 것에 의지해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 때, 하나 둘,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우리 힘으로 힘들더라도 우리가 직접 해야겠다고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바위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밀어 버리면 쉬우나 또 다른 무엇이 다칠지도 모르고, 제 자리에 갖다 놓아도 좋으련만 그 자리는 너무도 높아 언제 다시 이리로 굴러 올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우리만 편해서야 되겠나, 한 마음이 된 사람들은 이 바위를 낮고 평평한 곳으로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젠 더 굴러 남 앞길을 막을 수 없게요. 바위가 제 자리를 잡자 사람들은 저 너머를 바라보며, 서로 서로 환하게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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