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고양이 -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대가'
어슐러 K. 르 귄.닐 게이먼 지음, 이재경 옮김 / 에이치비프레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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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요즘 도시 주변에서는 길고양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밖에서 생활하는 고양이들. 이들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들까지. 이제는 비둘기와 더불어 도시 풍경의 하나로 자리잡은 고양이들.


고양이에 관한 소설하면 포우가 쓴 '검은 고양이'가 먼저 떠오른다. 음습한 분위기. 무언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 결코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그러다 르 귄이 쓴 '날고양이들'이 떠오른다. 밝은 분위기 소설. 이렇게 같은 고양이가 나오더라도 분위기는 천차만별이다.


이 소설집은 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르 귄의 소설과 게이먼의 소설. 내용도 다르다. 하지만 고양이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유명한 말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상자를 열기 전까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즉 살아 있기도 하고 죽어 있기도 한 고양이. 이렇게 고양이는 삶과 죽음 어느 한 편에 속해 있지 않다. 어느 편에 속해 있다고 하기보다는 경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쪽 저쪽 명확히 나누고 사는 것 같지만, 사실 이도 저도 아닌 경계에 머물 때가 더 많다. 또한 내가 한쪽에 명확히 섰다고 여기더라도 더 큰 관점에서 보면 어느 쪽이라고 말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더욱 확장해 가면 그렇다. 차원이 중첩되고, 나는 이곳에 속하기도 하고 저곳에 속하기도 한다. 르 귄 작품은 이 점을 고양이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게이먼의 소설은 '대가'라고 하는데, 보상이라는 말, 또는 보은이라는 말로 바꿀 수도 있다. 새로운 존재가 침범해 올 때 고양이가 맞서 싸워 막아주고 있는 모습. 오래 전에 본 영화 '고양이의 보은'이 떠오르기도 하는데...고양이의보은 포스터.jpg


  여기서도 고양이는 경계에 있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있으면서 도움을 준다. 그런 고양이들을 대상으로 쓴 소설. 어쩌면 우리 인생도 그렇다는 점을 말하는 소설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명확히 편을 가르기 좋아하지만, 편가르기가 그리 쉽지 않다고. 이쪽 저쪽 경계에서 양쪽을 다 아우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조금 더 넓게, 깊게, 차원을 다르게 생각하면 그 점을 알 수 있다고.


  아주 짧은 소설 두 편. 전혀 다른 고양이들이 등장하지만 고양이와 어우러지는 삶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소설들이다.


더불어 김중미가 쓴 '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는 작품도 생각나게 하고. 이 작품 역시 마음을 따스하게 보듬는 그런 소설이었는데...


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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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솔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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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공통점을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겠지만, 한 편 한 편이 자기만의 세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이 시대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다고 봐야 하는데, 짧은 단편 소설들 모음이지만 소설 속에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서수진이 쓴 '골드러시'를 보면 한국에서 살기보다는 외국에서 살기를 선택한 사람 이야기가 나온다. 한때 이민을 가려고 하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헬조선'이라는 말로 우리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하던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꿈꾸었던 골드러시가 실현되었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골드러시는 환상으로 끝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고통과 환멸만 남겨놓은. 그럼에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 소설은 그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멜라가 쓴 '저녁놀'은 발상이 재미있다. 딜도가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한다. 성소수자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들이 살아가기에는 녹록치 않은 현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소설은 남성 중심의 서사를 뒤집는다.


딜도가 다른 쓸모를 얻게 되는 과정에서, 함께 살아가는 두 사람의 마음이 따스하게 다가온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 함께 하려는 마음. 그럼에도 세상은 참 살기 힘든.


새로운 관점에서 성소수자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어떤 비장감을 느끼지 않아서 좋은 소설이다.


이 소설과 다른 쪽에서 김지연이 쓴 '공원에서'를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은 비장하다. 자기의 언어를 갖기 힘든 상태가 나온다. '저녁놀'에서는 성소수자인 그들은 그들만의 언어를 지니고 살아간다.


그렇다. 자기 언어를 지니고 있느냐 없느냐는 살아가는데 무척 중요하다.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자기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 지금은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성소수자들은 여전히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못한다. '저녁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기들 이야기를 남에게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 평온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 이유는, 이들은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 쓰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모텔을 이들은 도서관이라고 부른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를 책을 읽는 행위로 치환하고, 그렇게 부르고 있기 때문에 소설은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한다.


반면에 '공원에서'의 주인공은 자신의 말을 하지 못한다. 사회적 통념에서 자기 말을 했다가는 오히려 피해자에서 비난을 받을 행동을 한 사람으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의 모습이기도 한데... 이런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피해자는 자신의 언어를 지니고, 자기 이야기를 하기 힘들다. 그에게는 자체 검열 기제가 작동한다.


그래서 '공원에서'의 주인공이 자신의 감정을 발산할 때 쓰는 말은 비명일 수밖에 없다. 언어로 정제되지 않고 나오는 비명, 이 비명은 절박함에서 나오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가 닿지는 않는다.


'공원에서' 결말 부분에서 주인공은 다른 존재에게서 위로를 받기는 하지만, 그 위로가 삶을 바꿀 수 있게 되고, 자신의 언어를 지니게 될지는 모른다. 아직도 진행 중이다. 약한 사람들의 자기 언어 갖고 말하기는.


나머지 네 편의 소설들에서는 '쓰기'를 발견한다. 쓰기. 언어로 남기기라고 할 수 있는 행위. 이 쓰기에는 주술적인 면도 있다. 언어에 주술이 담겨 있듯이... 


임솔아가 쓴 '초파리 돌보기'에서 소설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가와 사람의 건강이 연결이 되고, 김병운이 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에서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고, 김혜진의 '미애'에서는 삶을 위해서 포기할 수 없을 때 편지를 쓰게 되는 장면으로 소설이 끝난다. 서이체가 쓴 '두개골의 안과 밖'에서는 살처분되는 광경을 언어로 어떻게 남겨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나타나기도 하고.


모두 쓰기의 효용성을 다루고 있는데, 쓰기는 바로 자기 언어로 자신의 삶을 남기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쓰기를 통해서 증인이 되기도 하고, 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기도 하며, 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기도 한다.


이렇게 쓰기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언어를 지녀야 한다. 언어, 우리 삶을 다른 삶과 연결시켜주는 역할도 하지만,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게도 한다.


'골드러시'에서 영주권을 얻게 되는 과정에서 영어라는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그 언어로 인해서 삶이 어떻게 뒤틀리는지도 만나게 되고, '초파리 돌보기'에서는 산업재해를 다룬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쓰기를 통해서 사람이 치유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만큼 언어, 쓰기의 역할이 잘 드러난다고 할 수있다. 


그러므로 이번 수상작품집을 읽으면서 언어와 쓰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져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 편 한 편 흥미 있는 소재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주고 있어서 좋았던 작품집이다. 다음 작품집도 기대하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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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 환상문학전집 23
크리스타 볼프 지음, 김재영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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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이아를 아는가? 들어본 사람도 있겠지만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겠다. 그렇다면 아리아드네는? 아리아드네를 모르면 아리아드네의 실 또는 끈은 들어본 적이 있지 않을까? 이들은 신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어느 순간 사라지게 된다.


그만큼 그리스-로마 신화 속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적다. 있어도 금방 사라지거나 악역을 맡거나 한다.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잘 알려진 오디세우스의 모험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꽤 있는데, 이 여성들은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부각시키는 역할에 그치고 만다. 그들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한다.


오디세우스와 관련 있는 여성들만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면, 우선 그의 아내 페넬로페, 마녀로 나오는 키르케, 칼립소, 또 세이렌들, 그리고 나우시카.


이 중에 오디세우스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이 있을까 이들은 모두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방해하거나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신화 속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자리를 비켜주게 되는데...


아르고호를 타고 모험에 나선 사람들, 그 배의 선장인 이아손. 그리고 이아손을 도와 그가 황금양털을 가지고 가게 하는 메데이아. 그렇다. 메데이아는 이 장면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아손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그와 함께 길을 떠난다.


마법이 힘을 지녔다고 나오고, 마법으로 이아손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동생을 죽이고, 왕을 죽이고, 공주를 죽이고, 심지어 자식들까지 죽인 마녀로 낙인찍힌다.


이아손 신화에서 메데이아는 악녀로, 마녀로 나온다. 그보다 악독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모가 키르케라고 하고, 마법의 힘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과연 그럴까?


이아손은 메데이가가 없었다면 황금양털을 가지고 갈 수 없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을 내지 않는다. 메데이아는 쫓겨나고, 이아손 역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왜 메데이아가 자의식이 강한, 주체적인 삶을 살려고 한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메데이아의 이야기를 이렇게 신화 속에서만 만나면, 그냥 그렇게 사악한 존재로 메데이아를 인식하고 만다. 다른 이야기는 없을까? 


이 소설이 바로 메데이아를 다른 관점에서 판단하고 썼다. 이아손과 메데이아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읽으면 그 이야기가 이 소설에서 어떻게 변형이 되었는지를 비교할 수 있다.


차이점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이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데... 작품은 철저하게 메데이아를 옹호하는 쪽으로, 당당한 삶의 주체로 서술하고 있다.


여성이 주체로 살아가는 모습을 참지 못하는 사회, 그 사회에 동조하는 세력들. 그런 세력들에 의해서 쫓겨나는 메데이아. 


그런 메데이아의 모습을 소설은 메데이아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이아손과 다른 인물들의 관점을 빌려서 이야기한다. 서술자로 '메데이아-이아손-아가메다-메데이아-아카마스-글라우케-로이콘-메데이아-이아손-로이콘-메데이아'가 나온다. 메데이아가 4번, 이아손이 2번, 로이콘이 2번 나온다. 이들이 서술하는 비중이 크다고 하겠는데, 당연히 주인공인 메데이아가 제일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어떻게 남성들에 의해서 메데이아가 악녀로 변해가는지를 서술하기 위해,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얻기 위해 다른 인물들, 즉 메데이아에게 호감을 지닌 인물 로이콘을 2번 등장시킨다. 자신이 메데이아를 구하지는 못하지만, 메데이아를 파멸시키는 역겨운 음모에 가담하지 않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전달해주는 역할.


또 신화 속에서는 메데이아에게 살해당하는 쪽으로 나오는 글라우케 역시 메데이아에게 인정받는 처지로 나온다. 그리고 메데이아를 옹호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이런 인물들의 말을 통해서 메데이아의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가 있다. 신화와는 전혀 딴판인 메데이아를 만나게 해준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악녀로 또는 마녀로 낙인찍힌 여성 이야기를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다 탄압을 받고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재탄생된 이야기를 통해서 알려진 이야기의 이면을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이런 이야기의 재구성을 통해서 우리 역시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소설은 메데이아 이야기의 재구성을 통해서 지금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것, 또는 전해내려온 이야기의 가려진 면, 보이지 않던 면을 보아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진실은 어쩌면 감춰진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강자의 언어가 살아남지만, 강자의 언어 속에 숨겨져 있는 약자의 언어를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메데이아, 악녀로만 알고 있던 인물을 여러 목소리를 통해서 다른 면이 있을 수도 있음을 생각하라고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덧글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가 미로에 들어가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을 퇴치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끈을 이용해 나오는 방법을 알려준 크레타 섬의 공주다. 테세우스와 결혼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와 함께 가는 도중에 섬에 버려지게 된다. 디오니소스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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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8-07 18: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 변신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메데이야야 말로 잔혹하다는 생각 또 다시 했는데
이 소설을 먼저 읽었더라면 다른 관점에서 그녀를 볼 수도 있었겠어요...

kinye91 2022-08-07 19:25   좋아요 0 | URL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메데이아와 이 소설에서 이야기하는 메데이아는 너무 달라요. 먼저 변신이야기를 읽으셨다면 이 소설도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내가 살아 낸 희망은 불구가 아니었으므로' ('대입 면접'에서. 124쪽)


  시집 한 권이 하나의 이야기다. 한 편의 삶이다. 학창시절을 살아낸 사람의 이야기. 


  읽으면서 가슴이 찡한 장면이 한둘이 아니다. 그랬다. 학생으로 살아간다는 일도 힘든 일인데, 장애를 지닌 학생으로, 그것도 가난한 집안 형편인 학생의 이야기. 그렇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자신이 할 말은 다하는 학생의 이야기.


  시집 전체로 보면 주인공은 저시력 장애를 지닌 학생이다. 시집을 읽다보면 저시력 장애를 지닌 학생은 남학생이다. 그는 교과서를 잘 읽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시력을 상실하지도 않았다. 이런 상태라서 남들에게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특히 교사들에게...'너 이 자식, 일부러 안 보이는 척하는 거 아니야?'('선생님, 꼭 안과에 가 보세요' 중에서. 17쪽), '그림이 이게 뭐니 / 나뭇잎은 이런 색이 아니야 / 줄기도 그렇고 / 이렇게 얼룩덜룩하게 그리면 어떡하니'('색약' 중에서. 31쪽) 라고 말하는 교사들.


학생 한명 한명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고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교사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자세를 지니지 않은 교사들이 이 시집에 등장한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대학을 아예 포기하라고 엄마에게 말하는 교사. 세상에, 아직도 이런 교사가 있나? 시적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교사들을 등장시켰다고 하더라도, 학생을 성추행하는 교사까지 등장하는 이 시집에서, 교사들이 읽으면 아마도 분노하리라. 


그런 교사들이 어디 있냐고 하면서. 하지만 여전히 그런 교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것을 보면 교사들 사회를 흐리는 미꾸라지 교사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미꾸라지 교사들이 물을 흐리지 않게 교사들이 먼저 행동해야 하고.


저시력 장애를 지닌 이 아이는 뇌전증을 앓는 아이를 도와주기도 하고, 또 성추행을 당하는 아이를 도와주기도 한다. 그렇다. 이들은 그렇게 우정을 쌓아간다. 비록 상황은 힘겨울지라도 그들은 이미 세상에 맞설 마음을 지니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뇌전증을 앓는 진솔이는 성추행을 당하는 소미를 도와주고, 뇌전증이라고 진솔이를 뒤에서 헐뜯는 아이들에게 소미는 진솔이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옹호하고, 성적이 많이 오른 화자를 커닝했다고 수군거리는 아이들에게 '눈이 나쁜 친구가 시험을 잘 봤으면 / 대단하다고 해야지 / 커닝했다고 수군거리는 게 잘하는 거라고 생각하냐 / 너희들 저런 시력으로 커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 한번 해 봐 / 말이 되는지'('커닝이라니' 중에서. 115-116쪽)라고 하는 진수.


이렇게 서로를 돕는 친구들. 그러니 시의 화자에게 희망은 불구가 아닐 수밖에 없다. 그런 희망으로 이들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런 그들을 응원하는 일, 우리 몫이다. 시집 전체가 한 편의 이야기를 입학부터 졸업까지 아우르고 있어서 어느 시 한 편을 인용하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이 시집의 첫번째, '입학식'에서 아직은 밑바닥에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면으로 떠오르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입학식


교문에서 중앙 현관까지 계단 없음

중앙 현관에는 계단이 넷

오르면 일 층이다

건물은 총 오 층이라는데


일 층에서 반 층 내려가 후문으로 가는 문

그 아래 계단이 반 개

하나 같지 않은 얕은 계단이라

반 개


나는 중심을 잃고 휘청한다

고개를 낮추고 인사를 나눈다


이제 괜찮다 두려울 것 없다

오늘은 이렇게 낯설어도

계단 수를 외우면

건물은 친구가 된다


입학이다.


김학중, 포기를 모르는 잠수함. 창비교육. 2020년. 10-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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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 안의 소녀 소설의 첫 만남 15
김초엽 지음, 근하 그림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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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고 맨 뒤에 실린 작가의 말. 가슴을 때린다. 그래, 이런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겠지. 온갖 최첨단 기술로만 이루어진 사회보다는. 


"반짝반짝 빛나는 미래 세계도 좋지만, 그보다 아무도 외롭지 않은 미래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많은 과학 업적들이 우연을 통해서 발견이 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우연히 공기오염을 줄이는 기술을 발견한다. 분진형 나노봇, 에어로이드. 공기를 정화시키는 아주 작은 로봇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것이 일상에서 쓰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는다. 그러면 되었나?


아니다. 부작용이 있다. 어떤 기술도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만족시키지 못한다. 이렇게 공기 오염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서 하필이면 그 기술에 이상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 나타난다. 소설 속 주인공 지유가 그렇다.


많은 사람이 기술발전으로 행복한 삶을 살지만, 지유는 오히려 통 안에 갇혀 살아야 한다. 이는 남들과 함께 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지유가 기껏 통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때는 비가 내릴 때. 비가 내려서 에어로이드가 녹아내릴 때.


남들은 우산을 쓰고 다니지만, 이때만큼 지유는 우산 없이, 통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거닐 수 있다. 남들이 우산 없이 다닐 때는 통 안에 있어야 하고, 남들이 우산을 쓸 때 지유는 우산 없이 거닐고 싶어한다.


이렇게 지유는 다른 사람과 함께 걸을 수가 없다. 함께 할 수 없는 신체조건이다. 자, 이런 사회에서 지유는 행복할까? 생명을 이어가겠지만, 지유는 남들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를 과학 소외라고 하면 어떨까? 또는 기술 소외라고... 온갖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거기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소외되는 사람들. 그러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수의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소수의 불편함, 어려움은 무시되기 일쑤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치 시혜를 베풀듯이 지유에게 통을 선물하는 업체도 있지만, 이는 그들의 기술을 알리는 목적도 있고, 또 함께가 아니라 당신도 살 수 있는 세상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지유에게 다른 존재가 다가온다. 노아. 복제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는 존재다. 노아 역시 갇혀 있다. 이런 노아와 지유가 함께 산책할 수 있을까?


"이 동네를 너랑 같이 산책해도 재밌을 텐데. 그렇지?" (54쪽)


남들과 함께 하지 못한 지유의 마음이 잘 드러난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함께 산책할 수 없다. 둘 다 소외되어 있지만, 다른 사람들 시선에 노출되어 살아가도 괜찮은 지유와 다른 사람들 눈에 띠면 안 되는 노아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시대에 둘 다 소외되어 있기는 하지만, 소외의 정도는 다르다. 그렇게 소외되는 사람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이 차이가 그들을 함께 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함께 하는 순간, 어느 한 존재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철저하게 배제되기 때문이다.


소설은 그 점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둘은 다른 방법으로 함께 한다. 지유는 노아에게, 노아는 지유에게 선물을 준다. 그 선물이 비록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함께 있지는 못해도 그들이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소외된 존재들의 연대. 그것이 그들을 견디게 해주는 힘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주 짧은 이 소설은 미래 사회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생각해 보라고. 지금 기후 위기가 심각하다. 위기가 아니라 재앙임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자, 이 재난을 소설에서처럼 과학기술로 해결하려고만 하면 될까? 


그런 방법이 다시 지유나 노아와 같은 존재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그런 세상이 과연 바람직할까. 그래서 작가의 말이 가슴에 더 와닿는다.


"반짝반짝 빛나는 미래 세계도 좋지만, 그보다 아무도 외롭지 않은 미래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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