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 (리커버)
정보라 지음 / 아작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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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행복한 결말이 없는 시대의 소설


고전소설은 권선징악이다. 행복한 결말이다. 그래서 잘 먹고 잘살았다더라로 끝난다. 그러니 너희도 잘살아야 한다. 교훈을 주려고 한다. 도덕을 이야기를 통해서 주입시키는 경우가 많다.


악은 반드시 처벌된다. 선은 복을 받는다. 현실이 힘들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언젠간 복이 찾아올테니. 


고전소설들은 이런 틀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대소설에 들어와서는 이런 틀이 많이 깨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행복한 결말이 아니더라도, 권선징악 정도는 지키려고 한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아니 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시대에도 법은 힘센 자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힘없는 사람에겐 거대한 힘으로 다가온다. 이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소설이 감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서도 안 된다. 그러면 소설이 무슨 필요가 있나? 그냥 사건 기사를 쓰면 되지. 아니면 르포르타쥬라고 하는 형식으로 글을 쓰면 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리얼리즘 소설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만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런 장치들이 없을 때 소설은 소설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권선징악을 쉽게 말할 수 없는 시대에 소설은 어떻게 쓰여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표현한다면 누구도 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도 팍팍한데, 소설까지 그렇게 팍팍하다면 누가 읽겠는가? 그러니 소설은 여러 장치들이 필요하다. 이 소설집, [저주토끼]는 바로 이렇게 팍팍한 현실을 소설 장치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복수가 성공해도 시원하지가 않다. 다른 불행이 따른다. 친구를 위해서 저주를 걸어둔 저주토끼를 만든 할아버지. 저주토끼는 성공하지만, 할아버지 역시 저주의 업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저주는 받는 사람에게만 걸리지 않는다. 거는 사람도 걸린다.


물고 물리는 사회에서 어떻게 한쪽이 일방적으로 성공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기계와의 관계에도 적용이 된다. 소설에'안녕, 내 사랑'이라는 소설을 보면 자신이 만든 첫로봇과의 기억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하는 사람, 그리고 로봇에 저장되어 있는 기억들을 계속해서 저장하는 새로운 로봇들.


쓸모없어진 로봇을 폐기하려고 할 때, 로봇들이 인간을 해치고 사라지는 모습. 결국 일방은 없다. '머리'라는 소설은 그래서 더욱 섬뜩하다. 자신의 배설물이 만든 존재가 결국 자신을 배설물의 자리로 돌려보낸다는 설정.


여기서 환경오염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내가 알게모르게 누군가에게 해를 끼쳤을 수도 있고, 그 업보를 받을 수도 있다는 쪽으로 생각해도 된다.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을 때 그 잘못이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모습을 '덫'에서 만날 수 있다.


환상적이고, 기괴한 설정으로 소설을 이끌어가지만, 그런 소설적 장치들을 통해서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삶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삶을 힘들게 하는 존재가 괴물이라는 단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그가 원했던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최소한 이런 복수는 원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마을 전체가 '그것'의 존재에 기대어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229쪽. '흉터'에서)는 서술처럼 그런 괴물을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흉터'란 소설. 그리고 인간이 자신의 욕심으로 파탄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즐거운 나의 집'이나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라는 소설.


읽으면서 기괴하다는 생각. 이렇게 행복한 결말하고 먼 소설이 있을까 하는 생각. 그렇지만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소설. 읽고나서 자꾸만 전혀 현실성이 없는 소설들임에도 (변기에서 머리가 나온다든지, 귀신이나 유령이 나타나고 보인다든지, 여우의 몸에서 금이 나온다든지 등등) 현실을 생각하게 하고 있는 소설집이다.


이런 느낌, 작가의 말에서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의 말이 아마도 이 소설집을 읽고 난 느낌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와 독자는 엄연히 다르게 소설을 읽을 수 있음을 알고는 있지만.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방식을 통해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 제각각 고군분투하는 쓸쓸하고 외로운 독자에게 위안이 되고 싶었다.

 그것이 조그만 희망이다.' (326쪽. 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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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은퇴합니다 소설Q
박서련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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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


예전 만화에서나 들을 법한 이름. 그런데 소설에 마법소녀가 등장했다. 환타지 소설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했더니,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다.


물론 마법을 부린다. 미래를 보는,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거대하게 변하는 등등의 마법을 부리는 소녀.


그런데 왜 소녀일까? 한때 만화영화 중에 '세일러문'이 있었는데, 그와 비슷한가? 아니면 닥터 스트레인지처럼 시공간을 자유롭게 다닐 수가 있나?


물론 소설에서 마법소녀들은 자신만의 마법을 행사할 수 있다. 모두가 그러지는 않는다. 마법을 각성한 소녀들. 그리고 그들은 자신만의 마법 기물을 가지고 다닌다.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다고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 앞에 마법소녀가 나타나, 당신이 시간의 마법소녀라고 말한다. 시간을 조종할 수 있는 소녀. 얼마나 매력적인가. 게다가 막강한 힘을 발휘해서 지구가 겪고 있는 기후 재앙을 해결할 수가 있단다.


기후 재앙으로 지구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힘들어질 때 그를 시간의 마법소녀가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 그렇다. 위기에서는 늘 영웅이 나타난다.


지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벤져스'가 나타나지 않던가. 어릴 적 보았던 마징가Z나 태권V, 또는 세일러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위기를 다른 존재를 통해서 극복하고자 한다. 그런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초한 위기를 특정한 영웅에게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마법 기물, 주인공은 자신이 마법소녀라는 사실도 잘 믿지 않지만, 또한 기물(소설에서는 '마구'라고 나온다)로 받은 것이 신용카드와 비슷하다는 데서 실망하기도 한다. 게다가 자신은 변신도 잘 못하고.


마법소녀들의 일에 관객으로 참여하기도 하니, 참... 그러다 자신이 시간의 마법소녀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렇게 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 진짜 시간의 마법소녀가 인류를 멸망시키려 한다.


그 마법소녀에게 인류는 지구의 악이다. 척결해야 할 존재다. 어차피 망해가는 인류, 그 시간을 좀더 앞당기려 한다. 그러다 주인공을 비롯한 마법소녀들과 대결하게 되고... 주인공이 어찌어찌해서 시간의 마법소녀를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마법소녀에서 은퇴한다.


참, 환상적인데... 가만히 보면 현실을 담고 있는 장면이 있다. 우선 '마구'로 나오는 마법 기물이 신용카드와 비슷하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읽다가 소설의 끝부분에 가면 왜 그렇게 설정했는지 알게 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제로섬 게임이다.


누군가의 이익이 누군가의 손해가 될 수 있다. 어떤 일에도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신용카드, 눈에 돈이 안 보이지만 쓰는 순간 어디에선가 돈이 빠져나간다. 결국 공짜는 없다. 지구에 기후 재앙이 몰아닥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한 행동이 그런 결과를 이끌어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힘의 집중과 분배를 생각할 수도 있다. 제로섬 게임, 총량이 같다고 가정하면 누군가가 지닌 막강한 힘은 다른 사람들은 힘이 약화되었단 얘기다. 반대로 누군가가 지녔던 막강한 힘이 소멸된다면 그 힘이 소멸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그 점을 이야기한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한 사람이 아니다. 영웅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에도 공짜는 없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세상을 바꿨다가는 그 대가를 다시 치러야 한다.


그러니 마법소녀는 은퇴해야 한다. 마법소녀가 마법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세상을 바꾸려 해야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특히 소설의 끝부분으로 갈수록 그 점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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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환상문학전집 10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안정희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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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이다. 세계 SF소설의 3대 거장 중 한 사람이란다. 하인라인이라는 사람. 지금까지 읽은 작품은 없다. 아시모프나 클라크는 읽어봤는데. 그러니, 이번 참에 한번 읽어보자 하고 고른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공간적 배경은 달이다. 시간적 배경은 SF소설들이 택하고 있듯이 미래다. 그런데 이 소설이 쓰인 때로부터 100년 정도 뒤로 설정을 했다. 가까운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지금 그 미래를 앞두고 있음에도 소설 속에서 실현된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이제야 다시 달 개척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으니.


하지만 소설의 배경을 지구로 갖고 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SF소설들이 택하고 있는 시간, 공간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로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혁명에 관한 소설이다. 혁명을 조직하고, 이끌고, 혁명이 완수된 다음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달은 지구 식민지와 비슷하다. 식민지라기보다는 지구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유형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달에서 독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SF소설답게(? 그런 말이 통용될지 모르지만) 인간과 대화를 하는 컴퓨터가 등장한다. 우월한 능력을 지닌 컴퓨터. 이 컴퓨터와 대화를 하는 사람들.


이야기 진행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슈퍼컴퓨터의 등장 -> 컴퓨터와 인간의 교류 -> 독립을 꿈꾸는 사람들의 만남 -> 그들과 컴퓨터의 연대 -> 혁명의 조직 및 시작 -> 전쟁 -> 승리


이것이다. 달이 지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까지의 과정이 긴박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결국 승리한다. 승리한 다음에는 혁명의 주역들은 빠져야 한다.


혁명의 주역이 남아 있으면, 그들에게 권력이 집중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소설은 컴퓨터는 인간과 교류를 하지 않으며, 가장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던 혁명세력인 교수는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에 서술자로 등장하는 사람 역시 정치에서 멀어진다.


이것이 혁명이다. 혁명의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과 혁명 이후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달라져야 한다. 게다가 컴퓨터는 과정에만 존재해야지, 혁명 이후에도 존재한다면, 인간의 삶이 기계에 종속되기 쉽다.


인간적인 컴퓨터의 등장,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가족 형태의 다양성, 그리고 독립.


독립해서 사는 삶.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를 이루면서 사는 삶. 이것은 지구 여러 나라들이 지켜야 할 모습이기도 하고, 그것이 정치에서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


일방적인 힘의 논리로(그것도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관계여선 안 된다. 하인라인은 냉전 시대에 이 소설을 썼다. 미국의 독립을 빗대어 달이 독립을 선언하는 날을 7월 4일로 잡았지만, 러시아 혁명을 빗대어 혁명가들의 조직과 그들의 비밀 결사, 또 실행을 보여주고 있다.


혁명과정에서는 비도덕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온갖 음모가 발생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어야 함을, 그리고 한 나라가 한 나라를 지배하는 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달세계를 통해서 보여준다.


압도적인 무력 차이에도 굴복하지 않고 독립을 이뤄내는 달세계 사람들의 모습에서 세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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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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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색깔을 합치면 검정이 된다. 여러 빛을 합치면 하양이 된다. 검정을, 하양을 하나라고 할 수 있을까?


검정 속에는 수많은 색들이 들어 있다. 하양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단순히 검정을 보면서 참 단순하다고 할 수는 없다. 


색을 인생으로 바꾸면 마찬가지 말이 성립된다. 삶을 거친 많은 일들을 합치면 하나의 인생이 된다. 참으로 평범한 인생이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한다. 한 사람이 죽는다. 죽은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 글을 남긴다. 그 글을 읽는다. 글 속에서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가 죽 펼쳐진다. 별것 없다. 그것이 다다. 그런데, 소설이 중간을 넘어서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면서 문득 이야기가 다양하게 분화된다.


평범한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보이는 삶 속에 보이지 않는 삶들이, 기록된 삶 속에 기록되지 않은 삶들이, 실현된 삶 속에 실현되지 않는 삶들이 무수히 많다. 그 많은 삶들이 이게 바로 나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글을 쓰면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면서 자신은 평범한 삶이라고, 남들에게 무난하게 보이는 삶을 삶이라고 여겼던 것과 더불어 너무도 다양한 삶을 살았음을 깨닫게 된다.


별다른 감흥 없이 흘러가던 소설이 중반을 넘어서면서, 글의 필체가 단정함에서 흐트러진 모습으로 변해가면서, 하나의 논조로 흘러가던 인생 이야기가 여러 이야기가 겹쳐서 나오면서 흥미로워진다.


인생을 어느 정도 산 사람에게는 "맞아, 이게 인생이었어. 나도 이래."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평범한 삶을 산 내가 있고,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가 있고, 또 우울한 내가 있다. 단지 세 인생? 


아니다. 더 많은 인생이 있다. 소설에서는 여덟가지 인생이 있다고 하는데, 더 많다. 이런 인생 말고도 내 안에는 다른 존재들이 함께 있다. 그러니 이 평범한 인생에는 수많은 인생이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인생은 여러 상이하고 가능한 삶들의 집합이며, 그중에서 단지 하나 또는 몇 개만이 실현되는 반면, 다른 삶들은 단편으로서나 가끔 발현되든지. 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213쪽)


소설 속 주인공이 자신의 인생 이야기에서 쓴 말이다. 무난한 삶과 격동적인 삶, 그리고 자신만의 공간으로 도피하고자 하는 삶, 여기에 순간 모든 것을 내던지는 삶, 또 마음 속에 꼭꼭 감추어야 두어야만 했던 일탈에의 추구 등등.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 마음들이 소설 후반에 드러나면서, 평범함 속에 감추어져 있던 많은 인생들이 드러나면서 그렇게 우리 인생은 단순하지 않음을 소설은 보여준다.


그럼에도 죽음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면 평범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많은 인생들이 합쳐져 하나의 인생이 되기 때문이다. 죽음 앞의 삶은 영웅이라고, 천재라도, 기인이라도 모두 평범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마치 많은 색들이 하나로 합쳐져 하나의 색이 되듯이. 


소설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누구도 삶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남의 삶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눈에 보이는 삶말고도 더 많은 삶들이 그 사람의 삶이기 때문이다.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 결코 평범하지 않은, 우리 모두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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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순양함 무적호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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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니스와프 렘이 쓴 소설 읽기, 세 번째. 이번에는 우주 전함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이다. 우주를 가로지르는 모험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렇지는 않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라는 제목만으로 보면 항공모함을 연상하게 하고, 우주를 가로지르면서 위용을 자랑하는 그런 소설일 거라 생각했는데,(제대로 보지는 않았지만 마치 스타트렉의 우주선처럼) 한 행성에서 실종된 또다른 우주선을 찾아가서 겪게 되는 내용이다.


즉, 낯선 행성에서 만나는 모험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행성에서 만나는 존재가 생명체라 아니라는데 이 소설의 특이점이 있다.


우주에서 우리는 진화는 생명들이 한다고 알고 있다. 무생물들은 진화를 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지금 연구하고 있는 로봇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인공지능이 스스로 학습에서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로봇들은 진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기계에도 있다고 한다면, 그때 세상은 어떤 세상이겠는가?


만약 그 기계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존재들을 없애고, 자신들만의 행성을 만들었다면? 그 행성에 인간이 가서 개입하는 것이 옳은가?


이 소설은 그런 점을 생각하게 한다. 60년대에 기계가 진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점도 놀랍지만, 그런 기계도 하나의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는 작가의 생각이 놀랍기도 하다. 


지금도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종속된 존재로만 여기는 사람도 많은데... 인공지능이 아니더라도 복제인간을 어떻게 여길 것인가에 대한 논쟁도 많은데, 이 소설을 읽으면 인공지능이든 복제인간이든 인간의 손을 떠나서 자신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다면, 거기에 인간이 개입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일들을 그 행성에서 겪은 뒤, 주인공은 로한은 이렇게 생각한다.


'과학자들 중 누구도 자신과 공감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제 로한은 실종자들의 비극을 알리기 위해서, 더불어 이 행성을 지금 상태 그대로 놓아두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함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든 것이, 모든 장소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야. 그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316쪽)


어떤 행성이든 인간의 지배 아래 둘 수는 없다. 그 행성들은 행성들 나름대로 존재할 의미가 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또다른 식민지로 다른 행성을 삼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여러 행성을 지구에 있는 다른 지역으로 바꾸어 말하면 지구에서 살아가는 각 존재들은 자신들의 삶을 꾸릴 권리가 있으므로, 그들의 삶을 자신들의 삶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거나 또 자신들의 삶에 맞추려고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성이 없는 기계가 진화해서 자신들의 행성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설정, 그리고 그 행성이 인간이 침입했을 때 벌어지는 일들. 그런 일들을 겪으며 인간이 깨달아 가는 과정. 이 과정이 이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 속에 나타나는 알갱이와 같은 기계들, 그들은 하나의 개체로서는 약하지만 함께 뭉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집단지성의 모습이기도 하고, 진화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쪽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이 존재들이 영화 '빅 히어로'에 나오는 작은 자석같은 금속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들도 하나의 개체는 독립적이지만 약한 존재인데, 결합하면 어떤 형태로든 변신이 가능하고 또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알갱이들도 그러하다. 마치 구름처럼 몰려다니며 위력을 발휘하는 존재들.


하여 60년대 상상력이 현대에 영화에도 반영이 되고,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그런 점보다도 인간 우선주의를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이 소설에서 읽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점이 바로 인용한 로한의 생각에 담겨 있다고 본다. 로한의 생각처럼 과학자들은 공감하지 않겠지만. 아니, 공감하는 과학자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 속 과학자들과는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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