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순 전집 : 시.희곡 한국문학의 재발견 작고문인선집
맹문재 엮음 / 현대문학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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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순, 내게는 친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머리 속에는 남아 있는 이름이다. 긍정보다는 부정 쪽으로. 


이 이름이 부정 쪽으로 남게 된 이유는 김동인이 쓴 [김연실전]이 큰 몫을 했다. 그 소설에서 신여성으로 나오는 김연실이 김명순과 다른 여성 예술인들의 모델이라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남성 작가에 의해서 표현된 김연실로 대표되는 신여성은 부도덕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하는데, 나혜석이 최근에 와서 집중 조명된 반면 김명순에 대해서는 그리 조명이 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된 김명순 전집(시,희곡)이 다시 희미하게 남아 있던 김명순을 생각하게 했는데...


시는 그리 기억에 남는 작품이 없다. 1925년 즈음에 쓰인 시들이 대부분인데, 이때는 남녀를 불문하고 우리나라 시의 초창기 아니던가. 김소월이라는 뛰어난 시인, 이상화라는 시인들이 등장하고, 서양 근대문학을 받아들여 우리나라 근대문학이 시작되던 시기.


이렇게만 알고 있으면 엄청난 착각이라는 사실이, 그토록 김동인이 자랑스러워 하던 [창조] 동인에 김명순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과 비슷하게 작품활동을 했다는 사실. 또한 시 경향 역시 그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전집을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남성 중심의 문학사 서술이 여성을 문학사에서 가리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시가 우리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김명순이 자신의 이름으로 문학활동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하는 점은 [김연실전]을 읽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니, 꼭 남성 작가의 작품을 읽을 필요는 없다. [김연실전]은 초창기 우리나라 여성 작가들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지니게 하는 작품 아니던가. 그러니 [김연실전]이 아닌 여성 작가들이 (작가들을 성으로 구분하는 일은 이제는 없어야 한다. 요즘은 여류 소설가란 말을 쓰지 않는다, 당시 상황에서는 여성이라는 성 구분이 앞에 꼭 들어갔으니, 그때 구분법을 따라서 잠시 쓴다) 쓴 작품을 읽으면 좋다.


그 중에서 이 작품집에 실린 1막 4장 짜리 '두 애인'이란 작품이 당시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 하는 여인이 어떤 핍박 속에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는지를 이 작품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그냥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는 여인이 여러 폭력으로 죽어가게 되는 과정이 잘 나와 있다.


남들로부터 폭행을 당해 다리를 다치고, 머리를 다치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남성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다해도 남들에게 폭행을 당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그들은 하지만, 여성들은 그리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문란하다는, 또는 속된 말로 꼬리를 친다는 오해를 받고 폭행을 당하게 된다.


아마도 김명순도 이러한 일을 많이 겪었으리라. 그런 경험이 '두 애인'이라는 각본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그런 삶의 고단함이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시 '유언' 마지막 구절. 95쪽)라고 당시 조선을 표현하고, '옛날의 왕자와 같이 / 유리관 속에서 춤추면 살 줄 알고 / 일하고 공부하고 사랑하면 / 재미나게 살 수 있다기에 / 미덥지 않은 세상에 살아왔었다. / 지금 이 뵈는 듯 마는 듯한 설움 속에 / 생장(生葬)되는 이 답답함을 어찌하랴 / 미련한 나! 미련한 나!'(시 유리관 속에'에서 끝부분. 96쪽)라고 하고 있다.


지금은 김명순이 살던 시대에서 얼마나 나아졌을까? 여전히 '사나운 곳'에서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노력하는 그런 '미련한 나'라고 자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김명순 전집을 읽으면서 김동인이 쓴 [김연실전]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는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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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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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소가 있다. 이 장소와 직접 관계맺은 사람은 둘이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그러나 이 장소에는 또다른 인물이 관계를 맺고 있다. 빌렘, 뮈텔 신부. 


소설은 이렇게 세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감정이 철저하게 절제된, 건조한 문체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감정을 실을 수가 없다.


안중근이 이토를 쏘기까지의 과정이 긴박감이 느껴지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거기에 안중근이 느끼는 부담감 등이 서술되기를 기대했다가는 실망하기 쉽다. 소설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는다. 


신문기사보다도 더 건조하게, 담담하게 사건이 진행된다.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이 사람을 그 자리에 데려다 놓은 듯하다.


그냥 운명대로 흘러갔다고 하는 편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 그렇게 소설은 감정이 배제된 서술로 전개된다. 이토도 마찬가지, 안중근도, 가끔 나오는 우덕순 역시 그렇다. 그나마 감정이 좀 드러나는 사람들은 프랑스 신부인 뮈텔과 빌렘이다.


이들은 종교와 국가 사이에서 철저하게 종교 쪽에 선다. 자신들은 강대국의 국민으로, 그런 갈등을 겪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인지, 특히 뮈텔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위해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소설 속에서 그는 황사영과 안중근을 비교하는데, 황사영은 종교를 위해서 나라를 없애도 된다는 쪽이었다면(그는 편지를 통해 서양 군대를 요청했다. 조선에...), 안중근은 종교보다는 나라를 위한 쪽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신부들은 당연히 나라보다는 종교쪽이었고, 그들은 애국심이라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선교가 제약되지 않기를 바랐다. 마찬가지로 조선이 빨리 근대화되기도 바라지 않았을 터. 


그들에게 중요한 일은 선교지, 선교할 나라의 발전, 그 나라 사람들의 독립, 민주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건조하게 진행되는 소설에서도 이런 관점에 대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뮈텔은 신앙과 문명을 군함에 실어서 세계에 전하는 조국 프랑스와 프랑스 왕과 프랑스 군대와 프랑스 교회를 위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도 뮈텔의 날들은 경건했다.' (251쪽)


이들의 종교는 무력에 의한 종교다. 무력이 없었다면, 그들의 선교는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힘센 나라에 다른 힘으로(그것도 아주 약한 무력, 개인의 무력?으로 저항하는 일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들에게는) 저항하는 일은 종교를 벗어나는 일이다. 아니, 종교의 교리에 반하는 일이다.


이미 이루어진 일, '권위에 복종하라'는 말이 되는지, 종교는 철저하게 식민지가 될 나라와 구분되어야 한다.


소설 속에서 이러한 관점이 비판적으로 제시된다. 안중근이나 이토에게 나오지 않는 감정 서술이 서양 신부들에게는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세계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선이고, 강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뮈텔이 말했다. 조선에 대학교는 가당치 않다. 조선인은 우선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조선인이 학문을 배우면 신심을 해치게 된다. 좋지 않다. 다시는 이런 말을 꺼내지 마라.' (184쪽)


이것이 본질이다. 그러니 안중근이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가지고 있다고 그것을 먼저 이야기하는 일은 1909년 하얼빈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데 문제가 있다.


하얼빈에서의 일은 종교와 상관없는 정치의 일이다. 철저하게 정치적인 문제고, 세계 정치에서 힘이 없는 약소국의 국민이 어떻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말이 막힌 사회다. 말은 강자들에게서 나온다. 그리고 강자들의 귀에 익숙해지고, 약자들에게는 명령으로만 존재한다. 약자들의 말은 강자에게 가 닿지 못한다. 그들의 말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다른 존재에게 가 닿지 못하는 말, 그 말은 말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말이 기능을 상실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설은 그 점을 파고든다. 안중근의 거사는 말이다. 그는 이토를 왜 죽여야 하는지, 이토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이토에게 너는 이래서 잘못했어라고 말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토에게 말할 방법이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말은 결국 폭력을 통해서 주목을 받은 상태에서야 가능해진다. 이토 살해. 재판정에서의 말. 그러나 그 말도 결국은 강자에 의해 왜곡된다. 가려진다. 약자의 말. 그 말하기... 지금도 그렇다. 말은 늘 강한 사람에게서 나온다. 강한 사람의 말이 퍼뜨려진다.


약자의 말은 가려진다. 왜곡된다. 곳곳에서 약자들의 말이 들리기 위해서 그들이 하는 일을 보라. 안중근이 자신의 말을 하기 위해서 한 일을 생각하라. 그 말들을 종교가 어떻게 막았는지도 생각해 보라.


소설은 그 점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다시 하얼빈. 이 장소에는 안중근과 이토가 있다. 그러나 이 장소에는 말들이 있다. 제국주의의 말, 식민지를 벗어나려는 말. 이미 제국주의를 실현하고 그를 종교로 덮어버리는 말.


안중근을 도마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제국주의를 실어나르는 종교가 아니라, 식민지를 위해서 존재하는 종교. 그 종교에 귀의한 안중근. 그렇게 가야 한다.


김훈 소설, 하얼빈. 감정을 쏙 빼고, 하얼빈이라는 장소에 얽힌 두 인물,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그러나 여기에 프랑스인 신부들인 뮈텔과 빌렘이 등장해 말이 어떻게 가려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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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피아드 -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세계신화총서 2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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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모양처 하면? 우리나라는 신사임당, 외국에서는 페넬로페를 든다.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 20년이나 집을 떠나 있는 오디세우스를 기다리며, 구혼자들의 압박을 물리친 여자. 정숙함의 대명사.


그렇게만 알고 있다. 오디세우스에서 페넬로페는 그렇게 간단하게만 언급된다. 주요 역할을 맡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의 모험에서 그가 만난 수많은 여성, 여신들처럼, 그냥 지나가는 인물로만 나올 뿐이다. 


그럼에도 페넬로페를 정숙함, 현모양처의 전범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바로 남자들의 욕망이다. 여성이란 자고로 남성을 기다리면서 정숙함을 지키는 절개를 지닌 여인이어야 한다고. 정숙함을 지키지 못하면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오디세우스에서 하녀들이 그렇다. 하녀들은 구혼자들과 놀아났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다. 아무 힘도 없는 하녀들. 귀족이나 왕족들이 하녀들을 건드리면 과연 하녀들이 거부할 수 있었을까? 거부는 곧 죽음이었을텐데...


애트우드가 쓴 이 소설은 오디세우스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에서 가려졌던 페넬로페와 하녀들을 중심에 세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페넬로페가 주요 화자로 나오지만, 악극 형식으로 하녀들 역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억울한 죽음.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삶들. 그러나 그들 역시 사람이었음을.


페넬로페 역시 마찬가지다. 남자에게 예속된 삶이 아니라 당당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가 애트우드에 의해서 펼쳐진다.


이야기 전개가 빠르다. 술술 읽힌다. 그러면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흥미가 생긴다.


여성의 입장에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풀어간다면 이렇게 풀어갈 수 있겠구나, 어쩌면 하녀들의 모습은 애트우드가 예전에 쓴 소설인 [시녀 이야기]와 연결이 되는구나.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예속된 존재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목숨조차도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한, 그런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사람됨을 입혀주고 있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페넬로페 역시 마찬가지다. 주체로 살아가려 하지만, 그 시대에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 오히려 남자들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산 사람은 헬레네가 아닐까 하는 생각.


페넬로페와 반대로 나오는 헬레네는 이 소설에서도 시종일관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방종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헬레네는 당당하다. 그냥 남성들에게 빌붙은 삶이 아닌 그들이 자신을 추종하게 하는 삶을 살고 있다.


페넬로페는 이와 반대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오디세우스의 삶 속에 녹아들어가려 한다. 아니 녹아들어간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아직은 주체로 나서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 시대의 한계로.


그러나 이 소설 속에서 시대를 넘나들면서 페넬로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여성이 살아온 삶, 또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함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신화 속 인물을 재해석한 이야기. 현모양처라는 틀에 가두지 않고, 가부장제 사회에서도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려 한 사람으로 페넬로페를 불러낸다.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 페넬로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 소설은 또다른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다른 관점에서 오디세우스 이야기를 해석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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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2-29 1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애트우드의 이런 책이 있었군요. 내용에 관심이 가네요.

kinye91 2022-12-29 18:59   좋아요 1 | URL
신화의 재해석. 어쩌면 페미니스트적인 글이라고 해야겠네요. 애트우드 다른 작품만큼 이 작품도 좋았어요.

yamoo 2022-12-29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있는데, 재미없을 거 같아서 처분할 목록에 넣어뒀는데....재밌으면 재고를 해 봐야 겠어요~

kinye91 2022-12-29 19:00   좋아요 0 | URL
저는 오디세우스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서 좋고 재미 있었어요.
 
프랑스식 세탁소 - 정미경 소설집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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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에 결코 편한 소설이 아니다. 읽으면서 무언가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이 든다. 소설 내용도 그렇다. 명확하게 무어라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 저것 사이에 있는 무엇이 바로 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악인인가 하면 아니다라고 할 수 있고, 착한 사람인가 하면 그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그만큼 인간이 단면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여러 면을 지닌 복합적인 존재임을 보여준다.


하나의 삶이 옳다고 또는 그르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그런 삶, 즉 겉으로 보이는 삶을 추구하다 보면 잃는 삶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남들의 눈에 보이는 삶, 남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고자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첫소설부터 그렇다. '남쪽 절'

미술전시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전시관에 들어가는 주인공. 세속적인 성공을 향해 비난받을만한 작가에게 출판을 의뢰하는 주인공. 그 과정에서 용산참사가 분명한 그 장소를 지나면서도 그들의 삶을 외면하려고만 하는 주인공.


출판이란 무엇인가? 과연 그늘진 삶을 외면하고 자신의 밥벌이에 충실하려는 출판이 바람직한가? 그것은 어쩌면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이런 길잃음이 '파견 근무'에서 더 잘 나타난다. 판사라는 자리. 지방 판사. 유지 중의 유지. 그러나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는 자리. 누구보다 올곧아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지만, 카지노에도 하고, 피의자가 흘린 정보에도 눈을 돌리게 된다.


그에게 정의보다는 현실이, 자신의 감정이 더 앞선다. 자, 이런 세상에 정의는 어디 있는가? 우리는 법조인들이 마냥 정의로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판결은 또 공정할 거라 생각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은 판결이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건이 얼마나 많은지, 결국 삶은 이것과 저것으로 명확히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이 소설의 주인공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쪽 절'과 '파견 근무'를 연결지어 보면 바람직한 삶은 무엇이라 정의내릴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삶은 미술의 '스푸마토' 기법처럼 뭉개져서 경계가 흐릿하다고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하긴 우리들 삶이 어떻게 무엇이다고 단순하게 정의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인물들이 지닌 복합성을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에 실린, 소설집의 제목이 된 '프랑스식 세탁소'를 보면 그렇게 이것이다라고 편가르기 힘든 삶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두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현실의 인물과 잡지 속의 인물. 잡지 속의 인물을 통해 현실의 인물이 자신의 삶에서 감춰져 있던 면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도 깨닫게 된다.


남들이 보면 성공적인 삶,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인물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 있는 좋지 않은 모습드을 소설은 드러내고 있는데...


최선을 다해서 요리를 했던 요리사는 미슐랭에서 별 두 개를 받자 자살을 한다(이런 결말을 보여주지 않지만, 그렇게 짐작이 된다). 그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졌고,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다른 평가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식 세탁소'에서는 두 죽음이 나온다. 소설 속 이야기에 나오는 죽음과 소설에서의 죽음. 소설 속 이야기에서는 당사자가 죽음을 선택한다면,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주변 인물이 죽음을 선택한다.


하나는 자신의 자부심을 위해,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렇다면 이 죽음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 죽음은 드러내기 위한 죽음이다. 최선을 다한 삶. 그런 삶을 드러내는 죽음이 소설 속 이야기의 죽음이라면, 소설 속 죽음은 감추기 위한 죽음이다.


주인공의 문제를 감추기 위한 죽음. 죽음으로써 주인공의 문제를 덮어버리는 그런 죽음. 결국 이 죽음은 최선의 삶이 아니라 보이는 삶, 보여주는 삶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소설 속 이야기가 주인공에게 다른 죽음을 계속 떠올리게 한다.


그 죽음이 주인공에게서 떠나지 않는 한 주인공은 감추기 위한, 보여주기 위한 삶만을 살 수는 없으리라.


그래서 정미경 소설은 삶은 이거다 저거다로 나눌 수 없고, 무엇이 정의고, 정의가 아닌지 말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다른 삶들이 있음을, 그것을 인정하고 거기서 나아가야 함을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소설을 읽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런 생각이 서서히 올라온다. 이게 편하게 읽히지 않는 정미경 소설의 특징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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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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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가는 작가다. 존 버거는. 그의 작품을 헌책방에서 만나면 우선 구입하고 본다.. 읽느냐 읽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언젠가는 읽게 되기 때문에.


이 작품은 소설이다. 편지로 씌어진 소설이라고 한다. 편지라는 매체가 지닌 속성은 허구보다는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읽으면서 이것이 과연 소설일까? 사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존 버거의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내용은 단순하다. 이중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있는 남자에게 밖에 있는 여자가 보내는 편지 형식이다. 편지를 통해서 바깥 소식을 전하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밖에 있는 여자가 약국에서 일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약국에서 일하는 사람. 다친 사람을 치유해 주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다친 사람은? 그 사람들은 바로 세계에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자기의 주거지에서 쫓겨난 사람들,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 폭격으로 집도 가족도 잃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주인공인 아이다는 보살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한다. 그렇게 연대하는 모습을 편지를 통해서 감옥에 있는 사비에르에게 보낸다.


세상 약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연대밖에 없다. 그들은 폭력에 호소하지 않는다. 인간띠를 만들어 헬기나 탱크의 폭력에 맞서는 힘. 그것은 바로 평화를 사랑하는 의지밖에 없다.


아이다가 편지에 쓴 이 구절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지금 우리의 삶은 끝없는 불규칙성에 빠져 버렸어요. 그런 삶을 강요한 자들이 오히려 우리의 불규칙성을 두려워하고 있죠. 그래서 그들은 우리를 몰아내기 위해 담장을 세워요. 하지만 모든 걸 막을 수 있을 만큼 긴 담장은 불가능하고, 어떻게든 돌아가는 길은 있기 마련이죠. 위로든 아래로든.' (216쪽)


이중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비에르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편지의 내용을 보면 사비에르는 약자들과 연대했을 것이다. 그러한 죄로 감옥에 갇혔을테고. 


그런 그의 모습은 편지에 있는 그가 적어놓은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신자유주의에 분명 반대하고 있다. 또한 약자들의 편에서 서서 그들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 그런 죄로 감옥에 갇힌다.


하지만 아이다로 인해서, 그는 갇혀 있다고 할 수 없다. 아이다는 약국을 통해서 약자들을 보듬어준다. 


이 소설이 과연 소설로만 그칠까? 우리 역시 기다란 담장에 갇혀 있지 않나? 담장을 만들고 있는 족속들이 있지 않나? 담장을 통해서 눈과 귀를 가리고 저들이 원하는 대로만 하려고 하지 않나? 하지만 다 가릴 수는 없다. 어디선가 새어나온다. 아이다의 말처럼.


우리 역시 위로든 아래로든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래, 눈 앞의 길이 장벽으로 막히면 돌아가면 된다.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존 버거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소설에서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일들이 현재진행형임을 생각한다. 우리에게도 진실과 사랑을 가둘 수 있는 장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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