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라고 당당히 말해요 - 자유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외침 라임 틴틴 스쿨 15
다니엘레 아리스타르코 지음, 니콜로 펠리존 그림, 이현경 옮김 / 라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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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다는 것을. 사회를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그런 사람들을 허균의 말을 인용하면 호민이다. 앞서 가는 이. 이들이 앞서 갔기에 후대 사람들이 조금더 좋아진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호민들. 나중에 역사 책이나 전기에서 보면 그들이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 역시 그렇게 행동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는지도 알아야 한다.

 

그냥 고민없이 행동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어떤 행동을 할 때 그에 따르는 불이익이 엄청나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행동하면 많은 사람들이 따른다.

 

이 책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짧은 분량으로 그 사람들이 한 일을 정리해주고 있어서 청소년들이 읽기에 좋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일들을 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어서 좋다. 또한 그 행동을 한 시기도 나와 있어서 역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도 있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 인간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하면 이들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한다.

 

체사레 베카리아(사형 제도에 반대한 사람), 에멀린 팽크허스트(여성에게 참정권을 위해 노력한 사람), 나짐 히크메트(글 쓸 자유를 위해 감옥에서도 시를 외부로 내보낸 터키 사람), 지몬 비젠탈(나치 범죄자들을 추적한 사람), 프랑카 비올라(성폭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몸 권리를 지킨 사람), 마바쉬 사베트(종교의 자유를 위해 포기하지 않은 사람) 등등.

 

이들의 행동에 대해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이다. 행동해야 한다.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리고 교육은 지식을 넘어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적어도 배우는 공간에서 부당함을 느끼면 그것부터 고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 청소년들에게 이런 책을 읽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생각하는 인간, 주체로 설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인간 역사를 통해 호민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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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 - 우리가 ‘여신’ 칭송을 멈춰야 하는 이유
이충열 지음 / 한뼘책방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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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등장하는 그림이 많다. 특히 누드화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고 누드화에서 여성들은 서 있기보다는 (물론 서 있는 그림도 있지만 많은 그림에서 여성들은 옷을 벗은 상태에서 누워 있다) 누워 있는 그림이 많다.

 

왜 그럴까? 여성의 몸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시선으로 남성의 성적인 욕망을 극대화 하는 쪽으로 몸을 이리저리 뒤틀기 때문이다. 오로지 남성의 시선에 만족감을 주기 위한 구도.

 

많은 그림에서 누워 있는 누드화가 많다. 그것도 종교가 유럽을 지배하던 시대에는 여성의 나체를 그리기 힘들었지만 성서에 나오는 인물이나(유디트, 수산나) 신화에 나오는 인물(비너스,다나에 등)의 누드화는 가능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들을 남성 작가가 표현했을 때는 남성의 시선에 알맞게 표현했다는 것, 적장을 죽이는 유디트가 지나치게 연약하고 아름답게 표현이 되어 있다든지, 하녀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표현이 되었다는 것. 수산나 역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점이 잘 느껴지지 않게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르테미스라는 여성 화가에서는 주류 남성 화가들과는 다른 면을 볼 수 있기에 그 그림을 예로 들어서 왜곡된 시선으로 표현된 여성들을 설명하고 있다.

 

(한 가지를 더 덧붙이면 저자는 단지 남성의 시각에서 왜곡된 여성의 몸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그림이나 조각을 통해 주류의 시각이 어떻게 관철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남성-백인-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관점이 미술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음을)

 

신화에서 미의 여신이라는 비너스를 많이 그리는데, 어느 순간 누워 있는 비너스를 그리기 시작하고 그런 유형의 그림이 대세를 차지하게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성적 환상을 갈구하는 남성들의 시선에 부응하고자 하는 화가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한다.

 

'성적 대상화를 위해 곡선을 강조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균형 잡으며 서 있도록 그리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럴 때 문제를 쉽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었으니, 바로 비너스를 눕히는 것입니다.' (112쪽)

 

바로 이것이다. 비너스가 누운 이유는, 비정상적인 몸을 그릴 수 있는 방법, 그것이 바로 눕히는 것이다. 세계 명화라고 별 생각없이 보는 그림에도 이처럼 주류 시각이 담겨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비판적인 관점을 지니지 않으면 그런 관점을 자신의 관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의 뒷부분에서 저자가 만든 '충열 테스트'를 제시한다. 같은 나체 그림이라고 해도 남자의 시선에 복무하는 누드와 자연스럽게 그런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네이키드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충열 테스트'는 세 가지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필연적인 노출인가?

② 표정과 동작의 의도가 명확한가?

③ 직업, 나이, 성격, 등 개인적 특성을 알 수 있는가?

 

이 중에 아니오가 두 개 이상이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 '누드'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필연적이지 않고 의도도 명확하지 않고 개인적 특성을 알 수 없는 그림은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그림을 세계 명화라는 이름으로 어릴 적부터 보아 왔다.

 

그렇다면 이런 누드화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제시된 네이키드는 무엇인가. 말 그대로 벌거벗음인데, 그것은 자연스레 옷을 입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네이키드는 단지 옷을 입지 않은 몸의 상태입니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옷이라는 껍데기를 걸치지 않은 상태. 어떤 꾸밈 장치도 없는, 누군가에게 어떻게 보일지가 중요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몸을 바로 네이키드라고 정의하고자 합니다. 네이키드는 숨기거나 가리거나 치장하지 않기 때문에 삶의 흔적과 현재가 드러납니다.' (157쪽)

 

우리에게 필요한 그림은 바로 이런 성을 왜곡한 누드화가 아니라, 네이키드화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알아야 대응을 할 수 있다. 모르고 왜곡한 시선과 관점을 계속 지니고 있다고 면죄부가 발행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잘못이다.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어느 한 쪽 성이 다른 성들을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정한 성의 관점에서 다른 성들을 해석하고, 그들의 눈에 비치도록 미술 활동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특정 성의 관점을 포함하여 주류의 사고가 우리 세상을 왜곡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이 책은 미술 작품을 통하여 말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점을 명확히 드러낸다. 실전문제까지 제시하면서...

 

이 책을 읽기 전에 진단 테스트가 있는데 많이 알려진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에서 아담의 탄생이라는 부분이다. 이 그림을 제시하면서 저자는 이런 질문을 한다.

 

진단 테스트 1

 

  이 그림은 르네상스 '3대 천재' 중 하나로 불리는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 중 일부입니다.

 

1. 그림에서 하나님의 성별과 피부색, 연령대는 어떠한가요?

2. 성경에 하나님이 백인 노년 남성으로 정의되거나 묘사된 부분이 있나요?

3. 성경에 2번과 같은 묘사가 없다면, 미켈란젤로는 왜 하나님을 백인 노년 남성으로 그렸을까요?

(14-15쪽)

 

이렇게 그림을 다른 시각에서 보도록 알려주고 있다. 읽어보면서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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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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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모를 감염병이 창궐한다. 왜 나타났는지, 어떻게 전개될지, 누구에게 옮아갈지 알 수가 없다. 그럴 때 사람들은 공포에 빠진다. 공포에 빠지지만 이성은 마비된다. 이성이 마비되면 희생양이 필요해진다. 자신들의 공포를 분노로 대체하고 분노를 통해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일어난다.

 

결국 인간은 자신들의 인식 너머에 있는 것에 공포를 느끼며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희생물을 찾는다. 그런데 그 희생물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운 곳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지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도한 책임의식이 있는 사람은 어떨까? 남에게 책임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책임이 없음에도 그것이 자신의 책임인 양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원인 모를 감염볌에 대처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보다도 더 감염병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필립 로스의 소설 [네메시스]를 읽다가 네메시스는 보복의 여신, 복수의 여신인데, 왜 이 소설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을까 생각하게 됐다. 책임감이 강한 유대인 젊은이가 주인공인데,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나쁜 짓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더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했는데...

 

소설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첫번째와 세번째 부분의 서술자는 같다. 바로 주인공 캔터 선생이 놀이터 감독으로 있을 때 그곳에서 함께 있던 아이다. 그리고 두번째 부분의 서술자는 작가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첫번째 화자가 캔터 선생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두번째 부분에서 서술자가 바뀌고, 세번째 부분에서는 세월이 흐른 뒤에 캔터 선생을 만나게 되기 때문에 다시 첫부분의 서술자로 바뀐다.

 

그런데 서술자의 태도가 확 변한다. 물론 캔터 선생에 대한 애정에는 변함이 없지만, 어린 시절 자신들의 우상이었고, 몸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이탈리아 출신의 불량스런 아이들에게 대처를 잘하던 캔터 선생에 대한 이야기에서, 폴리오를 겪고 나서 장애인이 된 캔터 선생을 이야기할 때는 비판적인 시각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낼까? 자신에게 책임을 다하려던 젊은이에게 왜 네메시스는 나타났을까? 그것은 자신이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될 문제에 깊이 관여해서 자신의 정신과 몸을 갉아먹은 캔터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으면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책임을 지지 않으며, 애매한 사람이 희생당할 수가 있다. 캔터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결국 소설의 끝부부에서 서술자는 캔터 선생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신에게 맞서지 마세요. 지금 이대로도 세상에는 잔인한 일이 흘러넘쳐요.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말라고요" ((273쪽)

 

이 말 다음에 이런 말이 서술되고 있다.

 

'세상에서 망가진 착한 소년만큼 구원하기 힘든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자신만의 상황 감각을 키워왔기 때문에 - 또 간절하게 갖고 싶어했던 모든 것을 갖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 내 힘으로는 그가 자기 삶의 끔찍한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을 몰아낼 수도 없고 그와 그 사건의 관계를 바꾸어놓을 수도 없었다.' (273쪽)

 

'대신 가혹한 의무감에 시달리면서도 정신의 힘은 거의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 시간이 갈수록 그의 불행을 강화하고 치명적으로 확대하는 이야기에 아주 심각한 의미를 부여해 큰 대가를 치렀다.' (274쪽)

 

이것이 바로 네메시스가 캔터에게 나타난 결과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몰랐다. 즉, 자신이 어디까지 책임지고 나머지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기에 폴리오에 걸린 아이들을 자기 탓으로 돌렸다.

 

어떤 일에 대해서 이렇게 무한책임을 지는 사람이 선할 사람일까? 물론 이런 사람이 많다면 사회는 조금 더 갈등없이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 자신은 견딜 수 없게 된다. 자그마한 일에도 신경쓰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책임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문제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결국 책임이라는 가상의 덫에 빠져 현실의 세계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된다. 캔터는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었다. 결혼도 하고 남들처럼 살아갈 수도 있었다. 바로 이 소설의 서술자가 한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은 캔터는 자신에게 무한책임을 지는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보복을 하는 것이다. 네메시스!

 

폴리오에 감염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여기에 대처하는 모습이 달랐기에 이들의 삶도 달라진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말을 빌리면 캔터는 "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네메시스에게 걸려들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왜 하필이면 내게?'라고 생각하면 자꾸만 원인 규명으로 빠져들고, 자기 책임의 늪으로 끌려들어간다. 거기서 허우적거리다보면 현실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자신은 세상에서 도태되게 된다.

 

'왜?'라는 말대신 '어떻게?"로 사고를 전환해야 한다. 이미 벌어진 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면 자기 책임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늪에서 빠져나올 밧줄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충분히 벗어날 수가 있다.

 

캔터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왜?'에 매달린다. 그래서 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원망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과거로만 가고 있을 뿐이다. 현실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삶인데...

 

폴리오라는 소아마비로 알려진 병이 유행하던 때를 중심으로 소설은 펼쳐지지만, 감염병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것에 대처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그것도 감염병에 대해서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사람이 과도하게 지닌 책임감 때문에 파멸해 가는 모습을 그린 것.

 

그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음에도 공포에 잠식당한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자신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르는데도 끝내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바로 이럴 때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찾아오는 것 아니겠는가. 이 소설을 읽으며 폴리오는 주로 어린아이, 젊은이들을 공격했지만, 지금 코로나19는 나이 많은 사람, 병약한 사람에게 치명적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소설에서 격리나 공포, 또는 치료제 없음으로 인한 불안 등등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것도 문제지만, 모든 것을 원인을 규명하는 데로만 돌려 네 탓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으며, 일부 선량한 사람들이 혹 자신이 전파자가 아닐까 지나치게 우려하는 것도 - 물론 적당한 우려는 반드시 필요하다 -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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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 농사꾼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 시인이 추구하는 것은 도회적인 삶이 아니라 자연과 어울리는 삶이라는 것.

 

  그래서 시인은 농사꾼의 별이라는 말로 지구를,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은 농사는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지만, 농사꾼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상황.

 

  이 시집에서는 이러한 농촌, 산촌, 어촌 풍경이 잘 나타나 있다. 자연과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 수밖에 없는 것.

 

  어쩌면 우리들 삶을 자연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시인은 자연에 빗대어 삶을 이야기한다.

 

'봄나무'라는 시에서 보면 고난을 이겨내고 살아가는 사람을, 겨울을 이겨내고 잎을 내는 봄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그렇게 시인은 자연에서 삶을 발견하고 노래하고 있다.

 

'나무들도 살고 싶다'라는 시를 보면 '아이엠에프로 세상에서 솎여나온 사람들이 / 산에서 나무를 솎아내는데' (100쪽)이라고 하여 삶터를 잃은 존재로 실직자와 나무를 등치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시집의 장점은 따스함에 있다. 가족에 대한 애정, 그리고 자연에 대한 애정, 세상에 대한 애정을 시집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 중에 이 한 시... 어렵지만 그 어려움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거라는 것. 어려움 속에서도 그것을 이겨내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음을,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봄을 기다리며

 

겨울산에 가면

나무들의 밑동에

동그랗게 자리가 나 있는 걸 볼 수 있다

자신의 숨결로 눈을 녹인 것이다

저들은 겨우내 땅속 깊은 곳에서 물을 퍼올려

몸을 덥히고 있었던 것이다

좀더 가까이 가보면

모든 나무들이

잎이 있던 자리마다 창을 내고

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어디에선가 "봄이다!" 하는 소리만 났다 하면

뛰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겨울에 둘러싸인 달동네

멀리서 바라보면 고층빌딩 같은 불빛도

다 그런 것이다

 

이상국,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창비. 2005년. 104쪽.

 

지금, 우리 힘들다. 그러나 우리들 역시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비록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속에서 차분히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튀어나갈 때를 위해.

 

시인의 이 시가 어려운 시기에 있는 우리에게 힘을 준다. 희망을 준다. 그런 따스함이 바로 어려운 세상을 버티게 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이게 바로 시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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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쉬운 양자역학 수업 - 마윈의 과학 스승 리먀오 교수의 재미있는 양자역학 이야기
리먀오 지음, 고보혜 옮김 / 더숲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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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과학은 어렵다. 과학이라고 뭉뚱그려 말하지만, 특히 물리학은 어렵다.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고도의 수학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물리학은 더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가 위안을 받았다. 물리학자들이 다 수학을 잘한 것은 아니라는 것.

 

특히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장한 하이젠베르크는 수학을 다른 물리학자만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수학 계산을 하지 않고 자신의 직감으로 결과를 도출해내기도 했다고 하니, 수학을 못한다고 꼭 과학을 못한다는 법은 없나 보다.

 

유명한 물리학자들은 대부분 수학을 잘했지만 그는 수학을 잘하지 못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박사 시절 급류에 대해 연구했다. 센 강물이 소용돌이치는 현상 말이다. 급류를 연구하려면 매우 복잡한 방정식 하나를 풀어야 했는데, 수학을 잘 못했던 하이젠베르크는 이 문제를 풀 수가 없어 하마터면 졸업도 못할 뻔했다. 다행히 그에게는 물리적 직감이 매우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었다. 중간 과정은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과정을 뛰어넘어 최종 결과를 잘 찾아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방정식의 근삿값을 추측해내 박사학위를 받았다. 결과적으로는 졸업을 위해 추측해낸 답이었지만 수학자들이 증명해보니 놀랍게도 정답이었다. (70쪽)

 

물론 그가 수학을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다른 뛰어난(?) 물리학자에 비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그래도 그의 이런 이야기는 수학과 과학을 일대일로 연결시키는 사람들에게 그게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이야기들이 많다. 양자역학에 대해서 쉽게 설명하고 있다. 어려운 수식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양자역학이 과학자들의 실험실이나 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 실생활에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고전물리학(뉴턴을 중심으로 하는)에서 양자역학(아인슈타인을 비롯한 현대 과학자들)으로 나아가는 과정과 양자역학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물리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섞어 가면서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과학에, 그것도 어렵다는 양자역학에 관심을 갖게 한다. 그렇다. 모든 것은 호기심에서 시작한다. 흥미를 지녀야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불확정성의 원리를 학문하는 세계에 적용하면, 누구나 학문의 세계에 들어설 수도 있고, 들어서지 않을 수도 있다. 확률은 반반이다. 열려 있기도 하고 닫혀 있기도 한다. 그러니 경우의 수는 엄청나게 많다.

 

그것을 몇가지만으로 국한해서 제한하면 양자역학의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물리학에 무지한 사람들도 읽으면 야, 물리학이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 삶에서 과학이 나왔음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과학에 관한 몇몇 이론을 배우는 것보다 먼저 이렇게 과학이 우리 삶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또 21세기에 양자역학은 양자컴퓨터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갈 수도 있음을, 지금보다 더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음을 이 책에서 저자인 리먀오는 잘 보여주고 있다.

 

양자역학이 더 발전하면 소설 속에서 나오는 것처럼 우리들 뇌를 전이시켜 영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한다.저자 리먀오는 그 점에 대해서는 열어놓고 있다. 앞으로 어떠한 발전이 이루어질지 그것은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 우리들 삶 역시 불확정성의 세계에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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