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제7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장민 외 지음 / 허블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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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편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과학문학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과학적인 내용을 가미한 소설들이다. 영어로 SF소설이라고 해도 좋겠다. 최근에 이런 경향의 작품들이 많이 읽히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공상이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겠다고 생각하던 일들이 현실에서도 가능해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작품을 통해서 경험하게 해준다. 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작가가 만들어낸 세상은 그냥 허구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세상은 현실 속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 삶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니 이러한 소설들을 허무맹랑한 소설이라고만 생각하지 말자. 처음에 실린 작품 '우리의 손이 닿는 거리'를 보면, 인간이 우주를 개척하기 위해서 거대한 로봇을 만들어낸다. 이 로봇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중추신경계와 연결되어 인간의 몸을 확장한다.


즉 우리는 확장된 몸으로 우주에 나가게 된다. 무려 18미터 짜리 로봇(몸)이다. 18미터의 몸을 지니고 있으면 우리의 행동은 어떻게 될까? 거기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물론 진화를 생각하면 수천 년 또는 수만 년이 걸리겠지만, 그러한 유전적 진화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조건에 맞게 신체 활동을 조절하게 된다.


커다란 유기체가 된 인간. 그런 인간은 본래 인간의 몸과 같은 행동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그들이 로봇 옷을 벗었을 때 자꾸 부딪히게 된다. 그들의 감각은 로봇을 입었을 때의 감각과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치면 괜찮겠지만 시간이 달라진다. 


보통 인간의 몸으로 겪는 시간과 거대 로봇을 입고 행동하는 인간의 몸으로 겪는 시간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단위가 달라진다고 해야 하나. 이것이 문제가 된다. 인간의 욕망이 더 거대한 로봇을 원하게 되고, 인간의 시간은 점점 길어진다.


즉, 수명의 연장이 자연스레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축복일까? 재앙일까? 과연 이러한 거대 로봇과 인간의 신경이 연결될 필요가 있을까? 소설은 이 점에서 할 수 있으니까 한다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과연 인간은 할 수 있으면 다 해야 하는가? 그것이 거대 로봇을 계속 키워서 인간 신경망의 속도로를 늦추는 쪽으로 발전한 소설의 결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바람직한가? 우리는 할 수 있는 일과 가치의 균형을 생각해야 하지 않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두 번째 소설 '개인의 우주'를 읽으면 더 잘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 백 년이라고 잡아도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너무도 짧다. 그럼에도 인간은 저 먼 우주를 탐구하려 한다. 비록 자신이 결과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후대가 결과를 만날 수 있을 테니.


개인이라는 인간에서 인류라는 종으로 넘어가면 인간은 할 수 있는 일을 무한히 할 수 있다. 당장의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더욱더 '가치'의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다. '가치'를 윤리라고 해도 되리라. 첫번째 소설에서 계속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과학기술과 윤리 아니겠는가.


이런 균형이 깨질 때의 모습을 '하늘의 공백'에서 만나볼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집에 수록된 소설들이 일관된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현재의 과학기술을 반영하는 작품이라면 어느 정도는 공통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로봇이 주인공인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만 결말의 반전이 기가 막히다. 과연 그런 세상이 행복한 세상일까? 읽어봐야 반전의 묘미를 알 수 있으니, 더이상 언급은 하지 않겠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들이 어떻게 분류되고 억압받는지를 '피폭'이라는 소설에서 만날 수 있으니, 일종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소설인 '피폭'을 읽어보면 좋겠다.


마지막 작품인 '달은 차고 소는 비어간다'는 다중우주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인간이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물론 다중우주가 있다면, 거기에 개입하는 순간 우주가 달라질테니...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겠지만.


다섯 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할 수 있으니 해야 한다'는 신념을 고수해야 하는가? 할 수 있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해버려서 위기에 빠진 적은 없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좋은 생각거리가 된다. 다른 세상을 만나고, 그 세상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미리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을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소설은 준다. 이 작품집들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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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춘(立春)이 지났다. 이제 봄이 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겨울이다. 입춘 즈음에 입춘 추위가 찾아왔다. 강추위다. 온몸을 움츠리게 한다. 그러나 이 추위는 물러가리라.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을 테니.


  눈이 내렸다. 세상을 하얗게 하얗게 덮었다. 온갖 더러운 것들이 한때나마 눈 속으로 사라졌다. 눈 덮인 서울의 모습이 표지 사진이다.


  더러움이라고는 없는 세상 같다. 하지만 눈은 곧 녹으리라. 눈이 녹으면 추한 것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리라. 그 추한 것들을 잠시 가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아예 없애야 한다.


  눈으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치워야 한다. 어떤 상태에서도 보이지 않도록.


  비상계엄으로 인한 겨울이었다. 봄을 향해 가는 겨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봄을 시샘하듯이 그렇게 찾아온 겨울은 그러나 오래 가지 않으리라. 오래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삶창을 이번 호를 읽으면서 비상계엄으로 인해 당혹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음을. 그런 일은 엄벌에 처해 다시는 생각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함을.


그런데 여전히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아직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수 없다고 버티고 있는 추위. 하지만 버티려야 버틸 수 없을 텐데. 봄은 이미 오고 있으니. 입춘이 지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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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매트리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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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트우드 소설집이다. 무언가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을 쓴 작가라는 생각에, 작품이 나오면 읽어보려고 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이번 작품집에는 9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그 중 앞부분에 실린 '알핀랜드, 돌아온 자, 다크 레이디'는 내용이 통한다. 작중 인물이 겹치기 때문이기도 한데, 주로 세월이 흐른 뒤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젊은 시절 겪었던 격정을 이제는 잊은 나이. 그럼에도 과거의 격정을 기억하는 나이. 그때 겪은 일들을 용서도 하고, 때로는 여전히 상처를 지니며 살아가는 인물들 이야기.


그렇지만 이 소설들에서 중심은 알핀랜드라는 창조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인물들이 갈등을 겪지만 그들의 모습이 소설 속 알핀랜드에서 다시 구현되고 있고, 그러한 알핀랜드로 인해서 현실 속에서는 더 심한 갈등, 심지어 살인까지도 가능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다.


문학이 하는 역할. 자신의 삶을 새로운 장소에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소설들이다.


나머지 소설들은 서로 관련이 없는데, 그럼에도 공통점을 찾으라면 젊은 나이의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인공은 나이든 사람들이다. 이제 애트우드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동년배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이 들어서 과거를 회상하고, 과거의 치열했던 갈등들이 어느 정도 무마가 되는, 또는 생각하지 못했던 반전이 일어나는 소설들이다.


물론 과거의 상처를 잊지 못하고 보복을 하는 소설도 있다. '스톤 매트리스'가 그렇다. 살인 사건을 다룬다. 발견되지 않는 살인 사건. 그러나 이 살인에는 동기가 있다.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성과 그 남성으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여성이 나온다.


나이들어 만나게 된 둘. 남성은 물론 여성을 알아보지 못한다. 어린 시절 여성은 그 남성의 성적 노리개에 불과했을 뿐이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은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만이 중요했고, 욕망을 채운 뒤에는 거기에 따른 책임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 오히려 자기 욕망의 결과를 여성에게 뒤집어 씌우기만 했을 뿐.


이는 남성우월주의 세상,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던 시대에 벌어진 일이다. 그런 일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표면적으로는 그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퍼져 있으니.


시대가 변했다. 그렇다면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가? 그가 반성을 하고, 자신의 행동을 고쳤다면 아마도 여성은 그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 사회분위기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일. 그러나 자신의 과오를 깨우치고 고쳤다면 용서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남성은 여전히 과거에 매여 있다. 그는 자기 욕망 충족 욕구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자신 외의 여성들은 모두 욕망의 대상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은 바뀐 시대를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니 그에겐 죽음이 다가올 수밖에. 


이러한 살인을 다룬 소설도 노년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좀 낯선 소설이 있다. 노년의 삶이 좀더 이해의 폭이 넓은 사회를 이루어야 하는데, 마지막에 실린 작품인 '먼지 더미 불태우기'는 살벌하다.


노인들을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진다. 노인들은 먼지 더미에 불과하다. 그들이 살아온 삶 전부가 부정당한다. 그들은 짐조차 되지 않고, 털어버려야 할 먼지 더미에 불과해진다. 그것도 젊은 이들에 의해서. 소설 속에서는 아기 가면을 쓴 인물들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행위에 경찰 등을 비롯한 국가권력이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


이는 노년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사회 현실을 꼬집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세대 갈등을 넘어, 그것을 해결해야 할 사회가 손을 놓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우화가 아닌가 한다. 노인들은 과거의 행위로 안락하게 살고 있는데, 젊은이들은 직업을 갖지 못해 힘들게 살고 있으니, 그 노인들을 치워야 젊은이들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잘못된 믿음. 잘못된 행위. 그러나 이를 개인의 갈등으로 몰아가고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공권력. 


그렇다. 어쩌면 세대 갈등을 공권력이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코 세대들끼리 갈등이 일어나서는 안 될 상황임에도 이를 조장하고, 조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런 모습이 애트우드의 소설에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다른 소설들도 있지만, 모두 노년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을 통해 소설은 과거의 신산한 삶을 넘어 조금은 여유로워진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들의 삶도 이렇게 노년에 조금 여유럽고, 이해심이 많아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세대갈등이 일어나게 그냥 내버려두어서도 안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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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5-02-07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독들이고 있는 책이였어요. ^^

kinye91 2025-02-07 16:50   좋아요 0 | URL
애트우드 글에 실망한 적이 별로 없어서 좋아요.
 
언어는 자유의 마지막 보루다 - 프랑크푸르트대학교 문예창작이론 강의
하인리히 뵐 지음, 안인길 옮김 / 미래의창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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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래된 책이다. 문학이론이야 원래 어렵지만, 이 책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샀던가? 왜 구입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작년에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만,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들에 대한 경외심을 지니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인리히 뵐 역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니까.


짧은 글들이 실려 있다. 문학에 관한 그의 생각. 전후 독일문학에 대한 생각 등등. 밑줄을 칠만한 구절은 꽤 있지만, 그럼에도 마음에 콕 박히지는 않는다.


이미 시간이 꽤 흐른 문학이론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독일 문학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일까. 그러니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겠단 생각이 들지만... 몇몇 마음에 드는 구절.


'좋은 눈은 작가의 연장 중의 하나이다.' (15쪽)


그래 작가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겠지. 그것도 편향되지 않은, 사람을 위하는 쪽을 볼 수 있는 눈. 권력을 향한 눈이 아니라 약자들을 위한 눈. 자신이 창조하는 세상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겠지. 그래서 이 말을 뵐은 이렇게 부연하고 있다.


'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만 사물이 똑똑히 보인다. 그가 사물을 똑똑히 보게 마련이다. 사물은 언어를 매개로 똑똑히 보고 들여다볼 수 있다. 작가의 눈은 인간적이고 절조가 있다.' (19쪽)


'다른 선택이 없다는 건 위대한 말이다. ... 나쁜 걸 만들었다고 예술가이기를 포기하는 게 아니다. 모험을 무서워하는 순간에 예술가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25쪽)


어떤 작가들은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도저히 쓰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기 때문에 썼다고. 그렇다. 뵐의 이 말은 쓰는 수밖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고, 자신은 예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이다. 이럴 때 모험은 필수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모험. 그것이 예술이다. 


그는 작가의 역할을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작가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작가가 권력자에게 굴복하고 심지어 비위를 맞추려고 하면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절도 이상의 죄를 짓는 것이다. 살인 이상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33쪽)


그렇기에 작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는 자신이 써야할 것들을 쓸 수밖에 없다. 이때 권력은 고려 사항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작가다. 이런 작가에게 누가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절망의 시기에 문학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말. 아도르노가 비슷하게 말했다고 하는데... 그런데 뵐은 절망의 시대이기 때문에 문학이 존재해야 한다고 한다.


문학은 절망을 받아들이고, 절망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단지 보여주기만 해서는 안 된다. 


'절망이 문학에서 표명되면 그것도 질적 차이점이 있다. 절망은 세로의 y축만으로는 값어치가 없다. 가로의 x축인 책임을 합쳐야 비로소 가치를 얻게 된다. 소설가의 책임이란 크나큰 말이다.' (63쪽)


아마도 여기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작가를 고르라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아닌가 한다. 물론 다른 작가들도 많다. 최인훈, 황석영 등등. 그렇지만 노벨문학상을 받았음에도 논란이 된 한강의 작품들이 있으니... 바로 우리는 그 작품들을 통해서 절망의 y축과 x축이 만나는 점을, 아니 그들이 속한 사분면을 만나게 된다. 소설가의 책임을 다한 작가가 바로 한강 아닌가 한다.


이러한 작가는 개인이기도 하지만 사회 속 개인, 역사 속 개인이기도 하다. 그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나를 한 개인으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시대와 그 시대의 사람, 한 세대가 경험하고 체험했던 일 그리고 보고 들었던 것과 연결되어 있다.' (80쪽)


이러니 작가의 책임은 클 수밖에 없다. 앞의 말을 좀더 구체적으로 '문학이 에로와 섹스 그리고 종교와 사회 문제를 떠맡아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정치가 실패하고 패배하는 곳에서는 바로 작가들의 책임 있는 말이 필요하다.'(87쪽)고 하고 있다. 


'작가는 현실을 쓰는 것이 아니다. 있는 현실로 다른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다.'(108쪽)는 말,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다른 현실을 만나게 된다. 그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작가는 저항을 많이 할수록 더 잘 쓸 수 있다.'(152쪽) 이때 저항을 권력에 대한 저항만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관습, 틀, 고정관념 등 그러려니 하는 것들에 저항하는 것이다. 있는 것 뒤에 있는 것을 보는 눈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작가의 저항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작가는 저항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몇몇 구절들은 기록하고 기억하고 싶다. 그것이면 됐다.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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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5-02-07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췌한 문장들이 힘이 넘치네요. 관심가는 책 추가하며~ 감사합니다. ^^

kinye91 2025-02-07 16:49   좋아요 0 | URL
마음에 드는 말들이 많아요. 우리 사회도 하인리히 뵐이 말하는 작가들이 있어 그의 말이 잘 다가왔어요.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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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된 소설에서 '빛'을 생각한다. 그냥 빛이 아니라 희미한 빛이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나는 너무도 멀고 작아서 희미하게 보이는 빛, 또 하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희미해져버린 빛. 둘 다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현재 그 빛은 내게서 멀어져 버렸다는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최은영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을 하나로 관통하는 주제가 바로 이러한 '희미한 빛'이 아닌가 한다. 제목이 된 소설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라서 빛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몫, 일 년, 답신, 파종, 이모에게,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는 이러한 빛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마지막 소설인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에서는 빛을 연상할 수도 있겠다. 빛은 사라지기도 하지만 우리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도 않으니 말이다.


왜 서로 다른 매체에 발표된 단편소설들에서 공통점을 발견했을까? 그것은 이 소설들에서 '빛'이 '볕'이 되는 순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 눈 앞에 보이는 빛이 볕이 되어 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준 순간이 있었음을,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 모두에서 느낄 수 있었기 때문. 소설들에 나온 어떤 인물들에게서 이러한 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빛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크지도 않다. 위대한 빛, 누구나를 다 비추는 그러한 빛이 아니다. 희미한 빛이다. 내게 다가온, 나를 이끌어준, 그래서 어둠에서도 내가 포기하지 않게 해준 빛이다. 나를 이끌어준 빛이라서 개인적인, 사소한 빛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네 삶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 삶은 모두 개인적이다. 개개인의 삶들이 모여 사회를 이룬다. 그렇기에 개인의 삶은 개인에게서만 그치지 않는다. 세상에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가 겪는 기쁨, 고통도 다 사회와 관련이 되어 있다. 즉 나를 이끈 희미한 빛은 이 사회 속에서 온전하게 나를 살아가게 하는 존재가 된다. 이는 사회가 어두울 때 더욱 나를 이끌어준다. 어둠 속에 묻혀 좌절하지 않고 나아가게 하는 빛. 그 빛은 희미한 빛일지라도 나를 포기하게 하지 않는다. 계속 가게 한다.


그리고 그런 희미한 빛으로 인해 우리는 사회 속에서 보이지 않던 존재들을 깨닫게 된다. 보이지 않는 억압을 발견하게 되고, 그런 억압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존재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 존재들로 인해 사회가 조금씩 발전해 왔음을. 개인이 어둠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음을.


이런 빛은 볕이다. 온기를 지니고 있는. 단지 밝음만이 아니라 온기를 지니고 있는 따스함이다. 이 따스함은 나를 감싸준다. 따스함에 감싸인 나, 남을 감쌀 수 있다. 그렇게 빛이 볕이 되는 순간, 세상은 조금 더 따스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수 있게 된다. 기댈 수 있는 존재가 한때라도 있었다는 사실. 그것이 고통스러운 삶을 버틸 수 있게 해준다.


그 과정이 결코 녹록치 않음은 물론이지만,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따스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 나를 이끌뿐만 아니라 포근하게 감싸주는 존재들이 우리 삶에 있었음을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그러면서 나는 누군가에게 희미한 빛이 되어준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에게 따스한 볕이 되어준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아직까지 그러한 존재가 되어준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고... 소설을 통해 다짐을 한다.


굳이 드러낼 필요가 없다. 소설 속 인물들 중에 자신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빛이 되고자 하는 존재는 없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남에게 곁을 내어주는 존재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들이 마음에 남아 계속 볕의 온기를 지속시킨다.


여전히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또 그러한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고, 빛이 볕이 되어 온기를 전달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는 사람들이 이는 한 세상은 어둠으로만 차 있지는 않게 된다.


최은영의 소설을 읽으면서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라도 빛나는 빛들, 앞을 보게 만들어주는 빛을 생각했고, 그 빛들이 우리에게 전달에 주는 별의 온기를 생각했다.


세상은 차갑고 어두운데, 최은영의 소설은 차가움 속에 따스함을, 어두움 속에 밝음을 지니고 있다. 짧지만 이러한 빛과 볕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파종'이라는 소설에 나온 '삼촌' -소설 속 화자에게는 오빠-이 아닌가 한다. 곁에 있어주면서 삶의 자세를 보여준 존재. 바로 이 존재에게서 빛과 볕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다른 소설들에서도 이런 역할을 하는 존재를 만나게 되지만.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 실린 소설들을 읽으면서 이렇게 빛과 볕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 누구일까 찾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게 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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