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 관한 시가 많다. 


  '슬픔'


  이는 자신의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세상과 불화할 때, 또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할 때 찾아오는 감정 아닌가.


  무언가가 틀어져 있다는 마음. 그런 슬픔이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 이기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슬픔을 느끼는 주체가 자신이고, 이는 자신을 중심에 놓는 행위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모든 슬픔은 이기적인가? 아니다. 타인을 위한 슬픔이 있다. 연민이라고도 할까? 무릇 종교는 그러한 연민, 즉 남을 위한 슬픔에서 오지 않았던가. 나만이 아니라 남도 나와 같이 고뇌, 번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느끼는 마음, 슬픔.


시인은 '이기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남보다는 자신에게 무엇인가가 충족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제목과 비슷한, 접미사 '-들' 하나 차이인 시를 보자.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소리 없는 물만 먹는 꽃처럼

그것도 안 먹는 벽 위의 박수근처럼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봅니다


김경미,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창작과비평사, 1995년. 16쪽. 


이 시를 보면 어울리지 않으려 한다. 꽃은 생명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고, 물을 먹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데, 그것조차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슬픔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자신만이 지니고 있으려 한다. '벽 위의 박수근'은 박수근 그림을 의미할 텐데, 가난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박수근의 그림.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이 가난하고, 그 가난함이 슬픔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그러한 가난함을 이겨낼 마음은 없다는 것. 그렇기에 '이기적인' 슬픔이 된다.


오로지 자신만의 슬픔을 간직하겠다는 것. 이는 사회적인 관계를 떠나 자신의 세계 속에만 머무르겠다는 선언이 될 텐데... 그러한 슬픔은 정호승의 '슬픔'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정호승 시인이 말하는 슬픔은 그 힘으로 다른 존재들에게 다가가겠다는 것, 슬픔에 머무르지 않고 슬픔으로 치유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면, 김경미의 시에서 슬픔은 오로지 개인적인, 자신에게만 머무는, 그 슬픔을 벗어나고 싶지 않은 그러한 슬픔이다.


이러한 슬픔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면 자신을 유폐시킬 수밖에 없다. '굴원의 불빛'이란 시를 보면 이 점이 더 잘 드러난다. 세상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결국 자신 속에 빠져버리는 것. 그래서 시인은 '그냥 가만히 귀양갈까 해요'('굴원의 불빛' 중에서. 49쪽)라고 하는데, 아니다. 그래선 안 된다.


아마도 시인은 지독한 슬픔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나 보다. 그러한 슬픔을 이겨내는 시보다는 슬픔에 빠져 있는 그러한 시들이 많은 것을 보니. 하지만 우리는 시인의 슬픔에 빠져 함께 허우적 댈 수는 없다. 


시인과 더불어 슬픔에 푹 빠져버린 경험, 그 경험을 통해서 슬픔의 밖으로 나가겠다는 마음을 품는 것. 그것이 이 시집을 읽는 우리들이 지녀야 할 마음 아닐까? 어쩌면 시인은 자신의 이기적인 슬픔을 통하여 사람들이 슬픔에서 벗어나 홀로가 아닌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시인이 '아득히 가난해지길 기다려본다'고 한 것은 이제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고. 따라서 이기적인 슬픔은 나 자신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존재에게로 확장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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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 호모심비우스
최재천.팀최마존 지음 / 더클래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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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외면할 수 없고, 어차피 할 일이라면, 차라리 온몸으로 덤벼들자.'(20쪽)


이런 마음가짐, 행동이 바로 양심이고 양심의 실천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양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얼마나 큰 욕인가? 그럼에도 자신이 양심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 그런 사람들에게 양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런데 양심을 잊고, 또는 잃고 사는데 남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양심 없음은 사회를 어둠으로 몰아간다.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구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체들, 또 생명체가 아닌 존재들에게도 고통을 준다.


이처럼 양심이 없다는 말을 들어도 다 같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더 큰 해악을 끼치게 된다. 그러니 자신의 양심 없는 행동이, 말이 다른 존재에게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자신의 양심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재천 교수의 강연 중에 양심과 관련이 있는 강연을 모아 책으로 내었다. 총 7개의 강연이 실려 있는데, 영상으로 볼 수도 있게 큐알코드를 제공하고 있으니, 책을 읽고 또 영상을 찾아 봐도 좋겠다.


첫 강연은 서울대 졸업 축사로 시작한다. 서울대라는 이름이 지닌 가치를 우리 사회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들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서 권력을 누리고 사는지도 다 안다. 그렇게 큰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자신들의 말, 행동이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서기까지 다른 존재들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최재천 교수는 강연의 마지막에 '부디 혼자만 잘 살지 말고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이끌어주십시오'(40쪽)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사회에서 권력을 차지할 가능성이 가장 많은 집단이 서울대 출신들이라면, 그들은 그보다 더 남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그것이 그들이 지닌 양심일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를 보면 서울대 출신들도 그들 나름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지만.


다음은 복제한 반려견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복제한 반려견은 진짜 반려견일까라는 질문을 하는데, 여기서 진짜란 세상을 떠난 반려견과 똑같은 존재라는 의미다. 아니라는 것이 최재천 교수의 주장이다. 복제를 했다고 해도 똑같을 수는 없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독립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 세상을 떠난 반려견을 잊지 못해 복제 반려견을 들이려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한다고... 여기에 복제 인간에 대한 문제까지 더해지면 과연 우리는 복제를 어떻게 봐야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세 번째, 네 번째 강연은 수족관에 갇힌 동물 이야기다. 제돌이로 대표되는 돌고래와 롯데아쿠아리움에 있는 벨루가 이야기. 


대양을 누벼야 하는 그들이 수족관에 갇혀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인간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다른 존재의 생활과 환경을 제약하는 것이 지구라는 생태계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질문과 연결이 된다.


만물은 연결되어 있고, 자신들의 본성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데, 그것을 인간이 막고 있는 현실. 그래서 그들을 자신들이 본래 살던 환경으로 보내주자는 운동을 하고,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둔 이야기가 실려 있다. 물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기업 이야기도 있지만. 벨루가는 지금도 롯데아쿠아리움에 있으니.


다섯 번째, 여섯 번째는 과학자(연구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는 이유도 양심 때문일 것이고, 기초과학에 대한 연구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과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성과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고 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지금에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연구처럼 보이는 그러한 연구에 투자를 해야 한다는 주장.


진정 과학의 발전을 위한다면 기초 연구비를 꾸준히 오랫동안 지급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 역할은 국가가 해야 한다. 기업은 당장의 성과를 내는 연구에 지원할 수 있지만, 오랜 시간이 걸리는 연구에는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기에. 국가의 존재 이유가 바로 그러한 연구를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것에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고.


마지막 강연은 호주제 폐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제 우리나라는 호주제라는 제도는 없다. 호주제가 가부장제를 대표하는 남녀불평등을 상징하는 제도였기에 폐지는 당연하다 할 수 있는데... 문제는 호주제가 폐지되고 나서도 과연 남녀불평등이 완전히 해소되었느냐는 것이다. 아직은 아니라고 할 수밖에 없는데. 모든 것을 한번에 해결할 수는 없으니... 아우게이아스 왕의 외양간을 한번에 청소한 헤라클레스는 없다고 해야 할 테니... 이렇게 한발 한발 나아가는 것이 진화와도 어울린다면, 서두르지 말고 그렇게, 마치 기초과학 연구를 지원하듯이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는 것이 바로 '양심'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연구실에서 연구에만 전념하지 않고 사회를 향해, 권력자를 향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것도 바로 최재천 교수의 '양심'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처음에 인용한 말. 그것이 바로 양심이니, 그런 양심 버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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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년째 마음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분노라고 할 수 있다. 무엇에 대한 분노인가?


  정작 분노해야 할 것에는 분노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지... 김수영 시인의 '고궁을 나오면서'란 시에 보면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정작 분노해야 할 것에는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시집에는 이상하게도 앞을 보지 못하는, 또는 눈을 빼버린이라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눈이 없는, 있어도 보지 못하는 존재들이 많이 나오는 시집이다.  


  '시력을 잃은 눈동자가 씹힌다'('훔친 사과' 중에서 - 18쪽), '맹인 여자를 만났다'('사라지는 마을' 중에서-35쪽),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입을 막고' ('기차' 중에서-44쪽), '고양이의 노란 눈알이 떽떼구르르 굴러나왔어요'('고양이는 고양이일 뿐' 중에서-58쪽), '금방 어디론가 사라질 눈' ('좌절' 중에서-59쪽), 등등.


보지 못하는 눈과 보지 않는 눈은 어떻게 다를까? 보지 않으려 들면 보이지 않으니, 결국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어쩌면 우리는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입만 열고 산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작은 일에는 분노하지만, 특히 자신에게 관계된 일에는, 정작 분노해야 할 일에는 눈 감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을 하면 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반 년째, 눈 멀고 귀 닫고, 그러나 입은 열어 자기 소리만 내는 그런 존재들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에...


어떻게 그런 태도가 통하고 있는지... 아무리 사람이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하지만 적어도 옳고 그름은 판단해야 하지 않나. 옳고 그름조차도 생각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만 하고, 하고 싶은 행동만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런 사람이 눈에 띄지 않으면 좋으련만, 왜 이리 눈에 잘 띄는지...


하여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내 마음이 타 버린다. 분노는 불이다. 이 불을 마음의 평정이라는 물로 꺼야 하는데, 물이 불을 이기지 못할 때도 있으니, 그러면 안 된다. 분노를 잡아 멈추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마냥 분노에만 머무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나를 위해서도, 또 분노에 차 있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으므로, 사회적으로 가득 차 있는 분노들을 끌 수 있는 그런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과 반대가 되어야 한다. 귀를 열고, 눈을 뜨고, 그러나 입은 좀 다물고. 


윤진화 시집을 읽다가 6개월... 분노로 들끓던 내 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분노를 잡아챌 수 있기를 바라고.


     분노


육중한 무게의 분노가 헐떡인다

조금만 더 가면 저 분노를 낚아챌 수 있다

분노가 운동화 끈을 더 단단히 동여맨다

출발선에서 나와 함께 출발했던 분노,

언제부터인가 나보다 먼저

앞서간다

유유자적 신문을 꺼내 읽는다

  -저개발지역 철거민 참사, 연쇄살인범 강호순,

  주한미군 만취 상태 방화, 장애인 쇠사슬 감금

  ......

또박또박 큰 소리다

나이보다 커져가는 붙잡고 싶은 저 분노, 

뒤돌아서 웃는 아멸친 분노, 

비워둔 수신함에 쌓이는 스팸 메일만큼이나

지워버리고 싶은 분노가

다시 뛴다

속도를 낸다

분노가 내 손에 잡힐 듯 말 듯,

가까이 다가가 놈의 목을 감싸 넘어뜨린다

허방에서 뒹굴다 진흙이 묻은 분노,

고개를 서서히 꺾는다

분노가 입가의 피를 쓰윽 훔치더니

내 목을 짓누른다, 속삭인다

  -이제 그만 쉬고 싶다,

  나도 저 뒤에서 남들처럼 살고 싶다

분노의 눈물이 내 몸을 적신다


윤진화, 우리의 야생 소녀. 문학동네. 2011년. 70-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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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가족이라는 말이 광고에 쓰이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진짜 가족처럼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말을 이용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말로 그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은 조금 희생을 해도 그것이 가족이니까 하고 넘어가지 않나 하는 생각.


지나친 생각이다. 가족을 그렇게 이용하는 사람은 없다고 믿고 싶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남이가!" 라는 말이 포용보다는 배제를 전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이때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에 가족이라는 개념이, 그러니까 무조건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한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말은 나쁠 수가 없다. 빅이슈 이번 호를 보면 표지에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말이 있다.


이때 '가족'은 다름을 인정하되 함께하는, 즉 함께한다고 해서 모두 똑같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솔직히 가족 구성원들도 같지 않다. 다 다르지 않나, 그러니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살고 있지 않나. 똑같을 수 없는 존재, 그런 존재들이 이 지구에 모여 살면서 서로가 서로를 가족처럼 여긴다면 누가 누구를 배제하고, 또 누가 누구를 착취하는 그런 세상은 아니겠지.


그래서 가족이라는 말에 좋은 감정과 좋지 않은 감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 역시 말이란 어떤 맥락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달라짐을 생각하게 된다.


이번 호에서 이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가족이라는 말이 지닌 양가 감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많이 다르다. 이 젊은 정치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치를 싫어하지는 말되 정치인을 싫어하자고 말하고 싶다.'('정치는 당신의 삶에 관심이 있다'중에서 120쪽)


정치인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으련다. 다만, 그가 한 말. 그렇다. 정치는 우리의 생활이다. 하여 정치를 싫어하면 안 된다. 다만, 정치인은 싫어해도 된다. 어떤 정치인? 제대로 정치를 하지 않는 정치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나서는 정치인, 정작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정치인. 말만 앞세우는 정치인. 내 편 네 편을 갈라, 우리가 남이가를 몸소 실천하는 정치인, 혐오 표현을 혐오 표현인지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아니라고 우기는) 내뱉는 정치인 등등. 그런 정치인은 싫어해야 한다. 아니, 싫어해야 하는 것을 넘어서 그런 정치인이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가족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지 않을까 싶다. '가족'이라는 말이 서로에게 힘을 주는 쪽으로 쓰이는 그런 말이 될 수 있는 사회, 어쩌면 [빅이슈]가 추구하는 사회가 그런 사회가 아닐까 한다.


내가 읽는 [빅이슈] 335호는 아래 사진과 같은 표지였는데, 검색해보면 다른 표지 모델이 나온다. 두 표지가 함께나온 듯. 그렇지만 내가 본 책의 표지가 이것이고, 여기에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말이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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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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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을 먼저 읽었다. 작가의 말이 두 편이나 있다. 초판을 냈을 때 썼던 작가의 말과 신판을 냈을 때 작가의 말. 그런데 작가의 말이 많이 달라졌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기에, 작가의 말이 주는 울림은 그대로다. 이 책에 쓰인 작가의 말이 과거의 말, 그때는 그랬지라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초판 작가의 말에 있는 제목은 '생존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이 소설집의 내용을 잘 드러낸 제목이다. 제목이 된 '너의 유토피아'만 봐도 그렇다.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다. 기계문명이 모두 파괴된 세계.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여기서 살아가는 로봇의 이야기. 너의 유토피아. 


만족도 설문을 할 때 1에서 5까지의 숫자를 놓고 선택하라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0부터 10까지 중에서 선택한다. "너의 유토피아는?" 세상에 인간이 사라지고 황폐하게 변한 지구에서 유토피아 지수는 높을 수가 없다. 0이다. 그런 세상은.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있으면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지닐 수 있다.


지옥 속에서도 천국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루쉰의 말이 나오는 소설 '여행의 끝'에서도 희망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고, 결국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소설 역시 좀비(?)로 변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희망이 있으면 좋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인간이 인간을 먹는 그런 세상이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디스토피아.


'여행의 끝'이 유토피아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살 수 있는 곳이면 좋겠지만, 아니다.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관계만 남은 곳. 그런 곳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차별과 혐오를 없애야 한다.


차별과 혐오에 대한 이야기가 '그녀를 만나다'에 나온다. 왜 성적 지향을 가지고 혐오 표현을 남발하고 차별을 하나? 차별이 폭력으로 나아가기도 하는데, 자신이 폭력을 저질러 놓고도 "짜릿하지 않아요?"('그녀를 만나다'에서. 235쪽)라고 하는 인간. 그런 인간들이 존재하는 사회. 그 사회야말로 디스토피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직도 차별금지법은 제정이 되지 않고 있다.


하여 이 소설의 마지막은 유토피아다. 차별과 혐오가 발붙일 수 없는 사회니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지금 젊은 나이의 사람이 무려 100살이 넘은 나이가 된 시대. 평균 수명이 130세 정도인 시대. 그 시대에 군대에서도 성전환이 자유롭고, 군인들도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보장받는 사회. 그러한 사회에서 과거를 기억하는 인물이 마지막에 예전을 떠올린다.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변희수 하사를 기억합니다." ('그녀를 만나다'에서. 269쪽) 


기억이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작동해야 한다. 우리가 기억하자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억해야 변화 시킬 수 있다. 기억하는 사람이 많아야 변화의 힘이 더욱 세진다.


정보라는 '2020년은 무서운 해였다'(초판 작가의 말. 355)라고 했는데, 신판을 내면서 제목을 '계속 싸우는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2022년은 무서운 해였다'(신판 작가의 말. 364쪽)고 하고 있다.


2024년은 더 무서운 해였다. 비상계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짓으로 그 해를 마무리했으니... 깨어 있는 국민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디스토피아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렇다. 정보라가 계속 싸우는 이야기라고 한 것은,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쪽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기도 했고.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속 싸워야 한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계속 시위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다.


이렇게 계속 싸우는 이야기를 '씨앗'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자연을 정복했다고 여기는 인간들에게 씨앗들을 심어 싸움이 끝나지 않았음을, 자연은 스스로 생존 방식을 찾아가고 있음을, 당신들의 복제에 다양성으로 맞서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식물인 줄 알고 읽다가 어, 인간과 대화를 해, 그런데 인간이 복제 인간이야? 왜 똑같다고 표현을 하지? 식물은 유전자조작으로 인해 똑같은 또 씨앗으로 다음 대를 이을 수 없게 되었는데, 그런 사회가 인간인들 가만 놓아두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이렇게 작가가 설정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언급한 소설만이 아니다. 다른 소설들도 재미와 감동을 준다. 영어로 된 작품이 두 편 실려 있는데, 이 작품들은 '상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따스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One More Kiss, Dear라는 소설과 Maria, Gratia Plena라는 소설이다.)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가면서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눈 감고 듣지 않으려 했던 우리 사회의 암울한 모습들을 소설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발견, 이것은 다른 관점을 지니게 하고, 다른 관점은 다른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내딛게 한다. '여행의 끝'에서 루쉰의 말이 그렇게 긍정적으로 쓰이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작품집을 보면 희망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루쉰의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작가 역시 '생존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들이라고 했다가 계속 싸우는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한다. 그것이 상실에 맞서는 우리의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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