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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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재미가 있다. 깊은 뜻을 생각하기 전에 우선 재미있다. 클레어 키건의 작품을 두 편 읽었지만, 비록 번역으로 읽었다고는 하지만 소설을 이끌어가는 글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결코 길지 않은 문장들. 그리고 어둠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어떤 빛이 비쳐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 내용들.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단편이지만 더 짧다고 할 수 있는 소설들이다. 그런데도 내용은 무거운 소설이 많다. 특히 첫 작품인 '작별 선물'은 어떻게 보면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저런 인간을 어떻게 두고 볼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인물도 등장한다.


자식들을 자기 노예처럼 부리는 아빠. 성적 희롱까지 하는 아빠. 그럼에도 한 소리도 하지 못하는 엄마. 집을 떠나는 자식을 끝까지 희롱하려는 아빠. 참, 현대의 도덕으로는 용서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덤덤하게 그려낸다. 이 덤덤함이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딸은 집을 벗어나고 있으니,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전에 읽었던 두 소설에 비해서는 좀 어둡다. 두 소설은 어둠보다는 빛이 더 강했다고 한다면,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빛보다는 어둠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빛을 포기할 수 없게 하는 요소들이 있으니...


현실을 그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현실은 결코 빛으로만 차 있지 않으니. 가부장적인 사회의 모습.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일들은 결코 만만치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작가는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보다는 남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시의 현실을 보여준다. 


'푸른 들판을 걷다, 검은 말, 삼림 관리인의 딸, 물가 가까이, 굴복'은 남성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주로 어긋남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자꾸 어긋나는 관계를 소설은 보여준다. 사실, 어긋날 수밖에 없다.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남을 중심에 놓고, 남과 나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에 놓고 남을 자신에게 끌어오려고만 하는 남성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찌 어긋나지 않을 수가 있으랴. 이런 관계를 어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은 어둠도 있지만 빛이 더 강하다. 당연히 어긋남이 있지만 이 어긋남은 어둠 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빛 쪽으로 향하는 어긋남이다. 빛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둠과 어긋나야 한다. 그 어긋남을 인식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인물들. '작별 선물, 퀴큰 나무 숲의 밤'이 그렇다.


특히 '퀴큰 나무 숲의 밤'은 여성이 자신의 삶을 옭아매던 남자(신부)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아일랜드 설화를 차용해서 소설을 이끌어가는데, 여성이 삶의 주체로 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과정에 남성은 보조자로서 등장한다. 첫번째 남성과 두번째 남성 모두 여성과 어긋나지만, 첫번째는 여성에게 어둠으로, 두번째는 빛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이 소설은 [맡겨진 소녀]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처럼 빛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완전한 빛이 아닐지라도 최소한 빛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짧은 소설들을 엮은 이 소설집에 주로 나타나는 관계가 '어긋남'이지만, 이러한 어긋남 속에서도 '빛'이 보이게 하고 있으니, 우리 삶에도 수많은 어긋남과 어둠이 있을 테지만, 그러한 삶에도 빛이 있음을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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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연합 0장 위픽
한정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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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장'이란 말을 생각했다. 1장도 아니도 0장이라니. 그러면 시작을 하기 전이라는 말인가? 시작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 그렇게 0장이라는 말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이제 시작을 위한 준비일 것이다. 길고 긴 여정을 알리는 소설. 무엇을 위한 여정일까? 0장이라는 말 앞에 있는 '사랑과 연합'이 그 여정을 알려준다.


사랑을 찾아가기 위한 연합, 어떤 사랑을 찾아갈까? 소설은 세 존재를 등장시킨다. 우선 유한한 수명을 지닌 인간. 요정이라고 할 수 있는 엘프와 교배해서 태어나게 된 하프엘프, 드래곤(용)과 교배해서 태어난 하프드래곤.


인물들을 보면 환상 소설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프엘프들의 수명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길고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엘프들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하프드래곤들은 그야말로 용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드래곤 길들이기'라는 영화가 떠오를 수도 있다)


인간과는 다른 존재들을 등장시킴으로써 현실을 벗어난 듯하지만, 작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인간의 이야기를 다른 존재들의 관점에서 이야기함으로써 다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준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 한정현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기 소수자와 역사라면,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다른 존재를 등장시킨 이유도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고립된 지역인 게토에서 살아가는 하프엘프 루비로부터 시작한다. 루비(淚悲)라는 이름은 '눈물 흘리는 슬픔(73쪽)'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인 비소(悲小) 역시 작은 슬픔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이 소설에 등장하는 하프엘프들은 슬픔을 지닌 존재들이다.


어떤 슬픔인가? 그것은 자신들의 삶에 대한 슬픔이기도 하겠지만 자신들이 오랜 시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존재들에 대한 슬픔이기도 하겠다. 그러한 슬픔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겠고.


다른 존재들의 사랑에서 나오는 슬픔. 그 슬픔을 넘어서는 것이 사랑일 텐데, 소설은 할머니 비소와 인간 '안'의 사랑을 암시하는 메모에서부터 시작한다. 루비가 자신을 찾아온 인간 '명'과 하프드래곤과 함께 메모의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마음을 품게 하는 역할을 이 메모가 한다.


인간의 언어를 쓸 줄 아는 루비라는 설정은 루비로 하여금 인간의 삶을 기록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과거의 사건을 추적하면서 겪게 되는 일, 만나게 되고 알게 되는 일들이 앞으로 펼쳐질 일들일 것이다.


그래서 '0장'인데, 이제 소설은 1장, 2장 이렇게 뻗어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역사 속에서 펼쳐졌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의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함께 하는 존재들은 자신들을 '사랑과 연합'이라고 지칭한다.


이제 이 '사랑과 연합' 팀은 역사 속으로, 현실 속으로 사랑을 찾아 떠날 것이다. 그 사랑의 모험이 어떻게 이루질지를 기대하게 한다. 아마도 1장 이후에서는 한정현 소설 속에 나타난 '역사'와 역사 속 '소수자'를 만나게 되겠지. 어떠한 역사, 어떠한 인물들이 등장할지를 기대하면서 다음 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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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글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련다. 빅이슈가 늘 해왔던 일들을 알리는 글들이 많으니.


  물론 지금 언급하는 글도 마찬가지지만, 6월 3일 대통령 선거일이 공표되었으니, 선거에 관한 이야기 좀 하자.


  [빅이슈]와 선거는 전혀 연결이 안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선거가 무엇인가? 국민의 대표를 뽑는 행위 아닌가. 국민의 대표라고 할 때 국민에는 모두가 속한다. 적어도 투표권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빅이슈]가 가장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사회적 취약계층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사람으로 따지면 그렇고, 지구와 우주적 차원에서 보면 약한 고리에 속해 있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 대표라면, 지구와 우주를 대표한다고 하지 않고 그냥 그 나라 국민들만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국한시키더라도, 그런 사람을 뽑는 선거라면 어떠해야 할까?


누가 대표 자격이 있을까? 어떤 사람을 대표로 뽑아야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나? 모두가 행복해지는 사회가 유토피아(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곳)라고 한다면, 차선을 추구해야 하지 않나. 공리주의?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만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면, 그 나라에서 다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살펴야 한다.


몇몇 부자들, 권력층들, 법조인들, 경영자들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보다 소위 중산층이라고 하는 사람들, 그리고 차상위계층부터 시작하여 빈곤층에 속한 사람들, 이들이 다수이지 않나. 그렇다면 이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을 대표로 뽑아야 하지 않나.


이것을 어떻게 판단하지? 답은 간단하다. 이 말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이 방법은 가장 확실하다. 아니 이 방법을 제외하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거짓이거나 잘 몰라서 하는 주장이 된다.


그 주장은 바로 세금을 올리자다. 세금을 올리자고 하면 국민적 저항에 부딪친다고 생각한다. (국민저항권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면 안 되는데...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것이 세금과 죽음이라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세금만큼은 피할 수 있는 길이 많다)


하지만 사회적 기반 시설을 만들려고 해도 돈이 필요한데, 이 돈은 세금으로 마련될 수밖에 없는데, 세금을 깎아주면서 행복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면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자본주의 사회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국가의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복지 정책이고 뭐고 펼칠 수가 없다. 국가의 재정은 대부분 세금으로 마련될 수밖에 없고.


그런데도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겠다고 해도 중산층이나 그 이하 사람들이 반대를 한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상위 1%정도의 극소수 부유층에게 종합부동산세다 뭐다 해서 세금을 올리면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도 반대를 한다. 왜 그럴까?


나라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선택하고 있는 세금제도가 바로 누진세 아니던가. 많이 벌면 그만큼 더 내고, 덜 벌면 덜 내는 제도. 그러니 세금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부여되어야 하고 (이때 공평은 똑같은 액수가 아니다. 누진세가 그야말로 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 자체가 차별일 수 있겠지만, 능력주의에서 말하는 능력이 바로 개인의 능력만을 의미할 수는 없다고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하고 있으니... 우선은 누진세가 공평, 공정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적절한 수준의 세금을 걷어야 한다.


감세, 감세 정책으로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그러니 이번 호에서 오후가 쓴 '투표, 이렇게 하세요 - 정치와 세금의 상관관계'에 동의한다.


'우리 모두 세금을 걷겠다는 후보를 찍자. 아무리 인물이 훌륭하고 공약이 좋아도 유권자들이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사람에게는 표를 주지 말자.'(57쪽)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제 우리나라 대표를 뽑는 선거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예비 선거를 거쳐 몇 명으로 정리된 후보들이 나올 것이다. 그들이 온갖 공약을 내걸 것이고. 지금까지 많은 후보들이 내건 공약이 그야말로 공약(空約-빈 약속)이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경험했지 않은가.


그러니 이제는 좋은 공약만 보지 말자. 우리들을 불편하게 하는 공약을 내거는 후보들에게 관심을 갖자. 아마 세금이 잘 걷힌다면 [빅이슈]가 하는 일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추가하면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살펴야 한다. 내가 낸 세금이 모두를 위한 행복에 이바지 한다면 누가 세금을 반대하겠는가. 오히려 더 내겠다고 나서지 않겠는가. 


세금 인상에 우리나라 국민들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까닭은 그동안 세금이 제대로 쓰이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결코 세금이 많아서가 아니라, 내가 낸 세금이 엉뚱하게 쓰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점을 국민을 대표한다는 사람들은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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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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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이 실려 있다. 소설이라고 하기보단 작가의 에세이라고 하는 글도 있고. 그렇지만 작가와 작품을 꼭 일치시킬 필요는 없으니, 그런 작품도 그냥 소설로 읽자. (물론 옮긴이의 말에서는 두 편의 에세이-171쪽-를 포함시켰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에세이를 소설집에 싣는다면 맨 뒤로 뺐으면 좋았을 것을, 원래 판본이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로 받아들이고)


첫작품부터 충격을 준다. '신앙'이다. 신념보다 더 종교적인 쪽으로 나아간 마음 상태. 신앙에는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대기가 힘들다. 아무리 객관적인 증거를 들이대어도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에겐 증거가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신앙과 신앙이 아닌 것을 어떻게 구분할까? 이를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로 생각을 바꾸면, 내가 알고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소설 속 인물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속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43쪽)'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미 속고 있는데, 자신만은 안 속고 있다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사이비 종교로 돈을 벌겠다고 하는 것을 비웃지만, 무엇이 사이비인가? 사이비를 판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비싼 물건을 사면서 만족하면서 사는 것과 자신만의 믿음을 지니고 사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니 자신은 하나하나 원가를 따지면서 소비한다고 하는 것이 과연 진실된 삶일까? 그것이 현실에 발붙인 삶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삶은 그만큼 이렇다라고 하나로 정의하기 힘들다. 삶 속에는 다양한 진실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 모습을 두 번째 실린 '생존'이란 소설에서 알 수 있다. 다양함을 잃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떤지... 생존율을 계산해서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내 눈 앞에 생존율이 떡하니 보이는데, 어떻게 생존율을 높이려 하지 않을까? 그러나 모두가 생존율을 높이려고 하면 그 생존율은 변하지 않는다. 상대적인 비율이 그대로 존속하기 때문에... 어쩌면 상대평가로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나라 수험생들의 모습이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 단지 대학에 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생존율에 목숨 걸고 살아야 하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를 거부할 수는 없을까?


거부할 수도 있겠지. 거부를 통해 자신만의 삶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사회에서 '야생'이 될 수밖에 없다. '야생'이란 소설에서 '난 야생으로 돌아갈 거야.(86쪽)'라고 외치는 인물에게서 그런 점을 발견한다. 그냥 예측불가능한 삶으로 자신을 끌고 가는 것. 어쩌면 우리 삶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정해져 있지 않기에 자신의 삶을 자신이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정해져 있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이고, 예술은 사람을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전시회'라는 소설이 그렇다. 바로 예술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에 눈을 뜨면 마음을 지배당하고 말아요. ...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이 되고 맙니다(165쪽)'라고 전시회를 여는 사람을 죽이러 온 존재는 말한다. 즉, 다양한 사고를 억압하는 사회에서는 예술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지배는 '균일' 속에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함이 존재하는 사회는 견딜 수 없는 사회가 된다. '컬쳐쇼크'라는 소설을 보면 그 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런 소설들을 통해 작가는 하나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균일'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양념 식으로 '다양성'을 외치지만 이 '다양성'은 '균일'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인정된다. 또 다양성을 '균일'을 유지하기 위한 놀잇감으로 삼기도 한다. 


'기분 좋음이라는 죄'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내성적인 작가의 모습. 그래서 학교 생활이 힘들었던 모습. '그들의 혹성에 돌아가는 일'이라는 글에도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는데,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것은 '다름이나 다양성'이 '균일'의 틀 안에서만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하는데... 우리 사회 역시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개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개성이나 다양성은 사회적 용인의 틀 안에서, 즉 정해진 범주 안에 있어야만 인정하고 있지 않나. 이 틀을 벗어났을 때는 가차 없는 비판과 배제가 따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다시 첫소설 '신앙'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신앙'을 지니고 있는지도, 그 '신앙' 때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지닌 '신앙'을 볼 수 있을 때, 그때서야 '신앙'은 '균일'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짧은 소설들, 경쾌한 문장들, 그리고 참신한 발상, 재미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들을 우리에게 전해준 소설집이다.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그런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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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이 그림이 된다. 문자도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그와 다르다. 낱말을 가지고 그림을 만든다. 그림이 시가 된다. 글자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되는 시들. 그런 시들을 모아 놓았다.


  한글을 가지고 디자인을 한 옷들과 다른 상품들도 있고, 또 시에 한글 그림을 시도하기도 했는데...


  이번엔 약간 다르다. 시집을 펼치면 두 쪽이 하나의 시를 이룬다.

  왼쪽 면에는 시인이 평소에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구절이, 오른쪽 면에는 그 구절과 통하는 그림이, 그림 밑에는 짧은 시나 제목이 있다.


타이포그래피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것과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냥 오른쪽 면만 보면서 제목을 추측하는 재미도 있다. 그리고 제목과 그림에 쓰인 글자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도 좋고.


  이 시집 제목이 된 시는 이렇다. 왼쪽에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 그리고 그림에는 쌍둥이로 추정되는 사람이. 하지만 같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시간은 다르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가 이런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림과 시가 하나가 된 시집이라는 것.


  왼쪽에 나온 구절들의 출처를 찾아봐도 좋고. 그것들은 우리가 곱씹을 수 있는 말들이니까.


무엇보다도 한글을 여러모로 다양하게 쓰고 있다는 점이 좋다. 한글이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한 시집이다.


앞으로도 이런 작품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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