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츠와프의 쥐들 : 카오스 브로츠와프의 쥐들
로베르트 J. 슈미트 지음, 정보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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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8월 9일 금요일 19시 50분. 폴란드 브로츠와프의 한 격리병동에서 사건은 시작된다. 폴란드에 출혈성 천연두가 유행하게 되고, 정부는 환자들을 격리하게 된다. 격리를 통해서 전염병을 차단한다는 발상, 이거 몇 해 전에 전 세계에서 일어났던 코로나19 팬데믹 때 우리 역시 겪었던 일이다.


격리로 일정 시간이 지나 전염병이 잡히면 좋겠는데, 여기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변이가 생긴다. 사람들이 죽어도 죽지 않는 상태로 변하게 된 것. 단지 그런 상태로 변했다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이렇게 변한 존재들은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다.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격리병동에서 시작된 이 재난은 브로츠와프 전체로 번져나가게 된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는 사람들, 하지만 곧 변한 존재, 처음에는 변질자라고 하지만 나중에 좀비로 이들에 대한 규정이 확정이 된다. 그런 존재를 눈으로 목격하고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채게 된다.


팔다리가 분리되어도 죽지 않고 그 팔다리가 따로 움직이면서 공격을 하고, 머리가 짓이겨져도 움직이면서 공격하는, 총알이 몸을 뚫어도 죽일 수가 없는 그런 존재들. 살아있는 사람들을 무차별로 공격해서 그들과 같이 만들어버리는 좀비들.


그렇다. 수많은 좀비 영화, 소설들이 그렇듯이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된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팔다리가 따로따로 움직이는 좀비는 없었는데... 


경찰이 대응을 하다가, 군인이 출동을 하고, 전염병 전문의들의 조언으로, 이들을 고온에서 태워버리고자 한다. 화장, 말이 좋아 화장이지, 그냥 소각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즉, 과거에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사람이 아니라 위험물이 된 존재들이니 아무런 거리낌없이 소각하려 한다. 한데, 소설은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이들을 태우는 연기 속에 전염 요소가 들어 있는 것. 바람을 타고 급속도로 번지는 전염. 


연기를 마신 사람들도 좀비가 된다. 이제는 군인이나 경찰로도 이들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니까. 아직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대책은 없는데 전염은 계속 되고, 이때 해결하려 나서야 할 정부는 자신들의 안위만을 생각한다. 국민들이 어떻게 되든, 군인들이 어떻게 되든 그들은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들만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생각을 한다.


그런 목적으로 군인과 경찰을 이용하는데, 이는 부패한 정권이라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제대로 된 정부를 갖지 못한 나라에서 위기 상황이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폴란드는 소련의 위성국가라고 할 수 있는데, 폴란드의 권력자들은 소련의 눈치를 보고, 국민들의 안전은 뒷전으로 여기는 모습이 소설에서 나타난다고 하겠다. 이게 어디 폴란드만의 문제였겠는가.


책임감 없는 자가 권력을 쥐고 있을 때 재난, 위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되는지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가. 자신들만 피란을 가고, 한강 다리를 끊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작자들. 이런 지도자연하는 작자들이 이 소설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도시 하나를 폭탄으로 완전히 날려보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이것이 부패한 권력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때 전염병이 브로츠와프만이 아니라 폴란드 전역에, 아니 전세계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부패한 권력자들 역시 좀비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런 권력자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시키는 역할을 하니, 사라지는 것이 문제 해결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작가는 그런 권력자들은 재난 상황에서 필요없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 사태를 진정시킬 사람은 누구인가? 소설은 여러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 인물들이 대부분은 죽는다. 많은 인물들 중에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누구일까? 이들은 과연 이 재난을 해결할 수 있을까? 전개가 급박하게 이루어진다. 그야말로 눈 하나 깜빡 안하고 사람을 죽인다고나 할까. 수많은 인물들이 죽어나가는데, 그 죽음의 잔혹함이 말로 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계속 살아남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작품을 이끌어가게 될 것인데...


소설의 전개로 보건대 군인들과 경찰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 그리고 전염병 전문가, 일반 시민들 몇몇들이 다음 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이다. 아직까지 이들은 쫓기고 있고, 구석으로 몰리고 있지만, 이제 어떻게 반격할 것인가. 아니 어떤 해결책을 찾을 것인가. 그 점을 다음 권에 넘기고 있다.


첫권이 75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인데, 겨우 12시간이 지났다. 브로츠와프 전역이 혼란에 휩싸이고 있다. 이제 부패한 지도부는 없다. 이들은 좀비에게 당했다. 그렇다면 이 재난을 해결할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이 점을 찾아가는 것이 폐쇄된 사회였던 1960년대의 폴란드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작가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과정일 것이다. 군인이라도 같은 군인이 아니듯이, 경찰도 마찬가지다. 국민을 위하는 군대, 경찰이 있다면, 국민들 위에 군림하려는 군대, 경찰도 있다.


여기에 전후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명령에만 따르는 자들, 또 다른 사람들을 가학적으로 다루는 인물들, 그런 인물들이 재난 상황에서 얼마나 위험한지, 그들로 인해 위험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심각한 상황으로 번져가게 되는지를 몇몇 인물들이 벌이는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렇게 첫권은 1963년 8월 10일 토요일 07시 50분에서 끝난다. 딱 12시간이 지났다. 이 12시간의 사건이 750쪽에 담겼다. 브로츠와프와 그 외곽지대에서 벌어진 일들로... 긴박하게 전개되는 사건들, 급속도로 퍼지는 좀비들.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 다음 권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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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춘이라는 시인]을 읽고, 서정춘 시인의 시집이 그리 많지 않으니, 다 읽어봐야지 하는 마음을 먹다.


  짧은 시, 또 적은 편수의 시들이 실려 있는 시집. 그러나 짧은 시에서 깊은 감정을 느끼게 되니, 참 진한 서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소장하고 있는 몇 권의 시집에 다른 시집을 구하려 했더니, 이런 절판이란다.


  이 시집도 그렇다. 알라딘에서 책을 검색해보면 이렇게 나온다. 품절이라고... 그리고 이유가 '출판사/제작사 유통이 중단되어 구할 수 없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시집들이 절판이 되어 구하기 힘든 상태. 운이 좋게 여러 도서관을 찾아보니, 있다. 오래 전에, 15년 전에 발간된 (이제 16년 전이라고 해야겠지. 2010년에 발간된 시집이니) 시집이라 몇몇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아주 못 구해 읽을 시집은 아니다.


하지만 소장은 할 수 없다. 헌책방을 뒤져 운 좋게 구하면 모를까, 품절은 곧 절판과 같은 뜻이고, 이는 더이상 책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니까.


아쉽다.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 구할 수 있는 시집을 구해서 잘 읽을 수밖에. 이 시집, 읽으면서 짧음의 미학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시란 짧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짧게 표현하기 위해서 잘라낸 말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 잘라낸 말들을 시로 살아난 말들을 통해서 찾아야 하는데...


이 시집에서 서정춘은 한 쪽을 넘기는 길이의 시를 쓰지 않았다. 시들이 모두 한 쪽에 한 편씩 들어가 있다. '새벽', '돛'이라는 시는 두 줄이다. 그 두 줄에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새벽이라는 시간을 우리는 주로 시각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시인은 이를 청각과 시각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시를 보면 '흰 꼬리 고양이 울음소리가 / 문지방에 희미하게 걸렸습니다'(31쪽)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새벽이다. 이런 시들... 이토록 진한 서정이라니... 그냥 읽으면서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 한번 더 마음 속으로 음미하고, 눈을 감고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시들.


좋다. 이 시집의 제목은 '빨랫줄'이란 시에서 가져왔다. 그 시를 보자. 빨랫줄.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예전에 마당 있는 집에서는, 또는 옥상이 있는 집에서는 빨랫줄이 있었다. 그런 빨랫줄을 보고 시인이 표현한 것을 보자. 이렇게 진한 서정이 시에 담겨 있다.


  빨랫줄


그것은, 하늘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 줄 같다

그것은,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당겨주는 힘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 뿐이다


서정춘, 물방울은 즐겁다. 천년의시작. 2010년. 15쪽.


다음에는 서정춘의 절판된 시집인 [귀]를 찾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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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내린다. 

  겨울이면 당연히 눈이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겨우내 눈이 한번도 오지 않으면 이상하고 섭섭하다.

  눈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도 하지만, 눈은 다른 식물들에게도 물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흔히 강수량이라고 하는데, 이 강수량이 부족하면 우리뿐 아니라 자연도 고통을 겪는다. 강수량은 강우량과 강설량을 합쳐 부르는 말이니까, 겨울엔 눈이 와야 한다.


  그런데 눈이 오면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계에 지장을 받는 사람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생계에 큰 지장은 없더라도 출퇴근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동할 때 미끄러질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싫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눈이 오면 마냥 좋았다. 많은 것을 눈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눈싸움, 눈사람 만들기, 눈썰매 타기 등등. 또 하얀 눈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는 일은 또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남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가기도 하고. 이렇게 어린 시절의 눈은 싫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시간의 문제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 무엇을 급하게 할 이유가 없다. 눈이 오면 그냥 놀면 된다. 바쁘게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 어린 시절은 시간이 느리게 간다. 시간이 많다. 그러니 급할 일도 없다. 


여유있게 느리게 시간을 즐기니 눈이 오든 비가 오든 해가 쨍하든 날이 흐리든 어떻게든 놀거리를 찾아낸다. 그리고 논다. 이것은 바로 여유에서, 느림에서 왔다. 그 느림이 나이들어가면서 점점 빨라진다. 여유는 줄고, 시간은 빨라진다. 더 빨리 하기 위해 길은 도로가 되고 꼬부랑길은 쭉 뻗은 직선 도로가 된다. 길을 가는 존재가 사람이라면, 도로를 가는 존재는 자동차다. 


자동차는 느리게 갈 수가 없다. 최근에 많은 도시에서 최고속도를 시속 50킬로미터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빠름이 사고를 많이 일으키니 조금 느리게 가면 여유가 생기니 사고가 줄지 않을까 해 펼치는 정책. 실제로 사고율이 많이 낮아졌다고도 하고. 특히 어린이 보호구역, 노인 보호구역에서는 그 속도를 더 늦추기도 하니까. 이런 속도를 다들 지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실제로 도로에 나가보면 그 제한속도를 지키는 차들은 별로 없다. 물론 단속카메라 앞에서는 잘도 지킨다. 빠른 시대에도 범칙금(과태료 등등)을 내지 않고 빠르게 가려고 하니까. 시내 도로도 그런데 고속도로로 가보면, 제한속도 카메라 앞에서만 지키는 차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잘못 알고 있다면 그건 참 좋은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느리게-상대적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이는 빠름이 대세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눈은 반갑지 않다. 느리게 가게 할 뿐만 아니라 사고를 유발하기도 하기 때문인데... 그런데 이런 사고가 꼭 눈 때문일까? 눈이 오면 더 천천히 가라고 그렇게 경고를 하지 않는가. 천천히, 느림을 받아들이면 사고를 줄일 수 있는데... 그런 느림을 참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 아닌가. 그러니 책임을 눈에게 지우지 말자. 


눈이 내리면 잠시 쉬라는 거구나, 조금 늦게 여유있게 가라는(하라는) 거구나 하면 되는데, 현대인의 생활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유홍준의 시집을 읽다가 '눈'을 떠올리고, 느림과 여유<->빠름과 조급함을 생각했다. 바로 이 시가 그런 생각을 하게 했는데, 발상이 기가 막히다.


  아스팔트 속의 거북


이 아스팔트 밑에 거북이 산다

분명하다 갑골의 등짝처럼 딱딱한 이 길바닥이

저렇게 쩍쩍 금이 간 것은

원칙을 지키지 않은 공사 탓이

아니다 짧고뭉툭한 발목에 질끈 힘을 주고

끙차, 아스팔트 속의 거북이 등짝을 밀어올렸기 때문

확실하다 초과적재한 저 화물차의 중량 탓이

아니다 저 균열, 거북의 등을 보라

이 비루먹은 길들을 다 갈아엎을 심산으로

해안이 가까운 남해나 거제

해남이나 진도의 캄캄한 밤에

아스팔트 속으로 제 대가리를 밀어넣었을 거북!

이 망할놈의 나라 도로 곳곳을

오늘도 롤러를 단 공사용 차량이 다진다

갈라 터진 길바닥에 새 아스콘을 붓고 다진다

아스팔트 속의 거북 수천 마리가 떼죽음, 압사를 당한다


유홍준, 나는, 웃는다. 창비. 2007년 초판 3쇄. 56쪽.


논바닥이 가뭄에 말라 땅이 갈라지면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다고 하는 표현은 봤지만, 도로 위 아스팔트가 갈라진 것을 거북이 등으로 표현하다니... 도로, 빠름의 대명사. 거북, 느림의 대명사. 둘의 기묘한 대조. 우리의 생활이 느림을 용납하지 못함을 이렇게 '거북 수천 마리가 떼죽음' 당한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이것이 현대인의 생활이지 않을까. 도로의 이런 상황을 부실공사, 과적으로만 보지 말자고, 그것은 빠름을 추구하는 우리 생활이 일으킨 문제라고. 이런 상황이니 '눈'도 좋을 리가 없다. 하여 유홍준의 이 시를 읽다가 눈을 생각하고, 내 생활이 너무 빠름과 조급함으로 치우치지 않았는가 반성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이 시집을 읽으면서 '그의 흉터''문 열어주는 사람'이 묘한 짝이구나 했는데, 이 두 시를 통해 시인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꽁꽁 감추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것 또는 갇혀 있는 것을 드러내고 꺼내주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기에 마음이 포근해지는 '천국 가는 길'이란 시도 좋았고, '아교'라는 시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벌레 잡는 책'을 읽으면서는 낄낄거리기도 했고, '북천'이란 시를 읽으며 왜 서정주의 '동천'이란 시가 떠오르지, 나중에 두 시를 연결해 봐야지 하는 생각도 했으니.


여러모로 읽기에도 좋고 생각도 할 수 있는 그런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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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나날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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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이 중에 읽은 소설은 소설집의 제목이 된 '가만한 나날'이다. 2018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읽었는데... 


가만한 나날이라는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가만하다'가 무슨 뜻이지? 가만 있어처럼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 대책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고 쓸 때처럼 속수무책일 때, 또는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의미도 있다고 하는데...


이 세 가지 뜻이 모두 소설에 들어있지 않은가. 사회에 갓 발을 들여놓았을 때, 자신이 하는 일을 깊게 살피기 보다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럴 때 바로 능동적이지 않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 자리를 잡기 위해서 상사들의 지시에 어떤 토를 달지 못하는 상태. 그렇다. 가부장제가 사라졌다고 하지만, 위계를 따지는 문화가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니 직장에서도 자신의 말을 하지 못하고 남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상사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하기에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정말 가만히 있는 나날들이 연속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의 인물 역시 마찬가지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하지만 세 번째 의미는 좀 다르다.


조용하고 은은하다는 의미는 격정적인 순간을 넘어서서 이제 자신의 삶을 찾았다는 의미, 그래서 외부의 힘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쪽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만한 나날이라는 말에서는 남에게 휘둘리는 삶에서 자신의 삶으로 나아간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만한 나날'에서 주인공은 자의든 타의든 그 회사를 다닐 수 없게 되었고,(회사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해 떠났다고 하지만, 아마 그 회사가 계속 잘나갔더라도 주인공은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 회사에 다닌 것을 바탕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들이 이 소설집에 많이 등장한다. 함께 살고 있지만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혼인신고를 했지만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사람, 직장에서 만난 상사를 통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달은 사람 등등.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나이가 모두 20대에서 30대 초반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제 사회에 갓 발을 들인 사람들이다. 이들이 겪는 일들을 통해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어떻게 사회에 발을 들여놓는지, 그 시작이 얼마나 힘든지를 소설의 인물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소위 흙수저라고 하는 사람들.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그렇지만 녹록치 않은 사회. 그 속에서 시행착오를 겪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이야기.


하여 그들의 삶이 평온하다는 의미를 지닌 가만한 나날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게 하고, 그렇지 않은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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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다시 읽기
권진관 외 지음 / 돌베개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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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부동(和而不同)‘은 곧 ‘관계‘를 어떻게 맺을까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의 실천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가는 여행임을 이 책, 신영복 다시 읽기를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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