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빈말로라도 마음에 없으면 밥 한번 먹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스치듯 우연히 만나는 사이가 다음에 밥 한번 같이 먹을 일이 일어나는 건 드물다. 그래서 그런 빈말에 마음을 두지 말자고 다짐하면서, 내가 먼저 꺼내지 않는 말이 되어버렸다. 언제였던가. 서른 즈음에 중학교 동창을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같은 동네에 살아서인지 자주는 아니어도 그렇게 어쩌다 한번, 몇 달에 한 번 정도 우연히 마주치곤 했다. 그때마다 웃으면서 인사하고 지내는 정도. 어느 날 그 친구를 우연히 만났는데, 그 친구가 나한테 언제 시원한 생맥주나 한잔하자고 그러면서 인사하고 지나갔다. 그 친구가 느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때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인사하고 지나갔다. 그 친구의 제안이 씁쓸했던 건 빈말이라는 걸 고스란히 드러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언제 한 번 시원한 생맥주 한잔하자고 하면서 내 연락처를 묻지 않고 갔다. 몇 년 동안 몇 번을 지나치며 인사했어도 그 친구와 나는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그런 상대에게 내가 '다음에'라는 가정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술 한 잔'이라는 '다음에' 역시 기대하지 않았던 거다.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에 '다음에'가 있을 수 없을 거, 아닌가

 

전작들을 꾸준히 챙겨 읽고, 개정판 특별판 한정판 등등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기존 출간작도 관심 두게 하는, 인터넷서점의 출간 알림을 설정해놓은, 나에게 이도우는 그런 작가다. 6년 만에 출간되었다는 이번 작품 소식이 반갑다. 느려터진 내가 다행히도 선착순 사인본을 놓치지 않았다. 힘들었던 건, 받아놓고도 바로 읽지 못하고, 이제 좀 읽어보려고 하니 폭염에 책을 손에 들 수 없었다는 거. 힘들지만, 읽어냈다. 사람을 읽고, 이야기를 읽고, 그들이 전하는 삶의 모습들을 읽었다. 아마도 특별한, 아주 특별한 뭔가를 기대하고 읽었다면 밋밋하고 재미없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이런 기대를 한 독자가 있겠지? 솔직히 말하면, 나도 조금 기대했다. ^^) 이야기는 평범했고, 잔잔했다. 사람에 치이고 세상에 치이던 여자가 어렸을 적 자랐던 곳으로 돌아왔다는, 그곳에서 고교 동창이 작은 독립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다는,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싶던 순간에 시골 동네의 작은 서점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에게 문을 활짝 열어주었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듣는 시간 때문에, 오래전 해묵은 상처부터 기억 속에서 잊으려고 애쓰던 상처까지 같이 찾아오고야 말았던, 하지만 이곳에서 다시 찾은 것들 때문에 상처는 비워지고 마음이 채워진다다는 내용

 

 

 

 

 

 

 

 

 

듣고 보니, 별거 없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이야기의 전체 흐름에서 높낮이가 심한 감정을 읽는다거나 사건의 출렁임을 자주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잔잔한 흐름에서 발견하는 사람들의 한마디, 의외의 장면에서 삶의 뭉클함을 찾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아아, 속이 시원하다."

이제 해원은 추운 것도 못 느꼈다. 실내복에 맨발엔 은섭의 슬리퍼만 꿰신고 나왔는데도 몸에서 이상하게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명여가 통쾌하게 외쳤다.

"그래, 다 망가져버려라! 내가 망가지는데 집이 멀쩡하면 되겠니, 같이 고장 나야지!"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145페이지)

명여 이모의 낡은 펜션으로 찾아온 해원은 이모가 왜 펜션을 방치하는지 몰랐다. 이 장면을 읽고 있던 나도 몰랐다. 그러나 명여가 통쾌하게 외치는 그 순간의 감정은 알 것 같았다. 답답함이 폭발하듯, 본인은 닫아두고 꼭꼭 눌러두면서 그 감정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단속하고 살아온 것 같은데, 고장이 난 수도가 폭발하듯 분수처럼 튀어 오르는 순간, 명여의 마음도 폭발했으리라. 아무리 단속을 한다고 해도 감정은 작은 틈새로라도 새어 나오기 마련이다. 이건 뭐, 새어 나오는 수준이 아니라 폭발했으니 얼마나 거대했을까. 이렇게 소리치고 싶던 순간이 명여에게 얼마나 많았을까? 담고 있자니 아프고 답답하고, 쏟아내자니 그게 감당이 안 될 테니까.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라고 속으로 되뇌면서 자책의 순간을 조금은 더 끌어안고 있었으리라. (명여가 왜 자책하면서 15년을 살아왔는지는 소설의 후반부에 나온다) 이 장면을 읽는데, 몇 문장 안 되는 명의 외침을 듣는데, 갑자기 뭔가 확 터지는 것 같은 기분에 은근슬쩍 개운함마저 들었다. , 한파에 수도는 터지고, 물은 분수처럼 튀어 올라온 집을 얼음 왕국으로 만들었지만, 명여의 속은 시원했을 것만 같다. 그러면서 감정이 이입된다. 누구나 그런 순간 담고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닌가, 싶은... 차마 꺼내놓을 수 없는 말에 혼자서 감당해야만 하는 일들, 어디 대나무 숲에라도 가서 외치고 싶은데 그래서도 안 될 일들, 그게 담아두고 있던 일을 없던 일로 만들어주는 건 아니니까.

 

이게 시작이었나 보다. 서울 생활이 지친 해원이 강원도 시골의 이모 집을 찾아든 이유도 명여 이모가 외치던 이유와 비슷할 것 같다. 시원하게 쏟아냈으니, 이제 회복의 길로 들어서야 하는 거다. 이야기는 그 길을 참 천천히 걷게 한다. 당장 뭔가를 전환하는 게 아니라 서서히 걷는 길을 여는 것만 같다. 고장이 난 수도 때문에 펜션 호두하우스의 수리 기간은 열흘 정도 걸린다고 했다. 수리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명여 이모는 친구 수정의 집으로, 해원은 은섭의 집으로 임시 피난처로 삼는다. 그리고 서서히 상처를 비우고 마음을 담는 시간을 연다. 해원은 은섭의 서점 굿나잇책방에서 일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은섭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서점 일에 몰두하면서 피곤했던 서울에서의 시간을 잊는다. 일주일에 한 번 독서 모임에 참여하면서 사람들과 친해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섞이는 법도 익숙해진다. 그리고 얼음 왕국이 되어 흉가처럼 보이던 호두하우스는 일주일의 시한부였지만 굿나잇책방의 이벤트 상품으로 활용된다

 

소설 곳곳에서 묘사되는 장면들이 눈앞에 그대로 그려진다. 언젠가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독립서점의 분위기를 그리면서 읽게 되기도 하지만, 그 공간에 모여든 나이 성별 불문한 책모임 사람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작고 허름한 기와집의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펼쳐질 작은 서점 내부, 여름 내내 푸르게 자랐던 벼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겨울 논의 스케이트장,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 리어카의 뒷자리에 앉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승호, 뭔가를 계속 만들면서 손을 놓지 않는 소녀 감성 수정 씨, 엘이디 전구로 바꾸라며 영업에 열을 올리지만 그래도 책이 좋아서 책방을 찾는 거라고 믿고 싶은 근상 씨, 반항하는 이미지 뒤로 속이 꽉 찬 아마추어 래퍼 현지. 그중에서도 명여 이모의 표정을 계속 그리면서 읽게 되는데, 내가 바라보는 명여 이모의 얼굴은 항상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그 말을 하지 못하는 나날들 때문에 명여 이모는 단 하루도 편한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해원의 인생에 책임까지 느끼지는 않았을까? 상당히 복잡한 표정의 명여 이모를 계속 생각하고 있다. 한밤에 창으로 비친 달빛에 의지해서라도 뭔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 할 말이 너무 많지만 할 수 없어서 곧 죽어도 계속 써 내려가야만 하는 사람, 그렇게까지 했건만 다 쏟아내지 못한 사람의 얼굴을...

 

전에 이모가 했던 말을 생각해봤어. 날씨가 좋으면 만나자는 건 너무나 기약이 없다는 거. 그러게, 좀 더 때가 되면, 상황이 좋아지면차일피일 미루게 되는 일들이 내게도 있었어. 이젠 조금 다르게 살 수 있을까?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401페이지)

 

어쩌면 우리에게 화해나 용서, 상처를 덜어내는 순간은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말처럼, 무게가 없는 말들이 그 순간을 만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잔뜩 날 선 마음을 둔해지게 하기 싫었나? 나를 방어하기 위해 계속 뾰족하게 있어야 했던 걸까? 이유가 무엇이든, 이제 더는 안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 소설의 제목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다는 말은, 다음에 밥 한번 먹자는 말과 같다고 명여 이모가 그랬다. 그건 만나지 말자는 말이라고. 그랬다. 그런 빈말들. '다음에'라며 약속 시각을 못 박지 않고 흐지부지 잊어주기를 바라는 의미를 담은 말. 해원이 보영에게 지금은 너무 춥다면서 날씨가 좋으면 만나자는 말을 했을 때, 아마도 해원은 미루고 싶었던 것 같다. 기억 속 상처를 들추는 시간을, 그 상처를 다시 꺼냈을 때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을, 어쩌면 영원히 기억에서만 머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지. 그런데 그런 상처들이 안에서 머물기만 한다고 좋은 걸까? 그대로 있어도 괜찮을 걸까? 아니다. 괜찮지 않으니까 우리는 매번 그 상처를 조금씩 들추고, 싸우고 화해하고, 괜찮아지려고 노력하는 거 아닐까. 그 괜찮아지는 시간은 자기가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하는 건가 싶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갈 게 아니라, 먼저 찾아가서 그날 날씨를 좋은 날로 기억하라는 듯이. 결국은 그 상처도 치유도 내 안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거겠지. '너에게 너무 미안했지만 그때는 하지 못했던 말이, 세월이 흐르니까 이렇게 용기를 내게 하기도 하는구나' 싶은 조금은 늦어버린 안심. 그래도 괜찮다. 이제는 손을 내밀어야 하는 순간을 만드는 사람이 누구여야 하는지를, 날씨가 좋은 순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되었으니까. '언제 밥 한번 먹자'는 것으로 시작한 빈말(?)'우리가 같이 밥을 먹은 그 날은 날씨가 참 좋았다'는 마음 가득한 말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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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20 0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20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란장미 2018-07-26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빈말말고 꽉찬 말로..... 우리도 밥 한번 먹어요.ㅎㅎㅎㅎㅎ
완전 진심!

구단씨 2018-07-28 00:11   좋아요 0 | URL
속을 꽉 채울 수 있는 음식을 골라봐야겠어요~!! ^^

다락방 2020-02-2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티비 채널 돌리다 이 드라마를 하는 걸 알게 됐어요. 어? 이건 이도우 작가 책인데?! 저는 읽지 않은 책이지만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고, 오, 이거 분명 구단씨 님의 리뷰 있을거다! 하고 찾아왔어요. 역시 있었습니다! 헤헷 :)

구단씨 2020-02-28 15:38   좋아요 0 | URL
아... ^^
언젠가부터 드라마 방영 시작 예고도 많이 하더라고요.
알면서도 드라마는 못 봤는데, 반응은 궁금합니다. ^^
 

 

어린이 책을 좋아하는데, 예전만큼 어린이 책을 많이 읽지는 못한다.

아무래도 조카가 분가한 뒤로 조카랑 함께 책을 읽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전히 책 읽기가 게으른 탓이기도 하고,

요즘에는 어떤 책이 나왔는지 먼지 찾아볼 기회가 줄어들어서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작년에, 페미니즘 검색하다가 발견한 이 동화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서 다시 꺼내본다.

<아기돼지 삼형제>는 제목부터 익숙한 이야기가 굳이 다시 읽을 필요를 못 느끼고,

그냥 지나쳐도 좋을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 <아기돼지 세 자매>는 <아기돼지 삼 형제>인줄 알고 그냥 지나칠 뻔하다가 읽게 된 책이다.

 

아기돼지 세 자매는 아주 깔끔했다. 엄마 돼지한테 가정교육도 아주 잘 받았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목과 다른 아기돼지의 연령이다. 아기돼지 세 자매는 사실 아기가 아니다.

결혼할 나이가 된 어른 여자 돼지다. 어느 날, 엄마 돼지는 세 자매 돼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들아, 너희도 이제 통통하게 살이 잘 오른 예쁜 돼지 아가씨가 되었구나.

자, 이 금화 주머니를 하나씩 받아라. 가서 가장 좋은 신랑감을 찾아보도록 하거라……."

 

엄마돼지는 아기돼지들에게 자기만의 인생을 찾아 떠나라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신랑을 찾아 떠나라고 한 거다.

 

 

 

 

엄마돼지에게 돈주머니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세 자매는 헤어진다.

(같이 떠날 줄 알았는데) 서로 다른 길을 찾아서 떠났다.

 

 

여기서부터 『아기돼지 삼 형제』와 다른 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길을 떠날 때 엄마 돼지는 금화 주머니를 준다.

원작이 무작정 길을 떠난 돼지 삼 형제가 집 지을 재료를 얻어 집을 지었던 것에 비하면 돼지 세 자매는 금화를 들고 떠난다.

그렇게 받은 금화로 집을 짓는 게 아니라 이미 지어진 집을 사는 거다. (오~ 이 방법이 더 간단하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다.)

이 부분을 보니 어느 정도는 변화해가는 사회에 맞게 구성된 게 아닐까 싶다.

돈이 없으면 뭘 못하잖아. 누가 집 지을 재료를 그렇게 준다고?

그렇게 길을 떠난 돼지 세 자매의 행보가 기가 막힌다.

 

편안한 걸 좋아하는 첫째 돼지는 가진 금화 모두 털어서 커다란 벽돌집을 산다.

어느 날 아침, 첫째 돼지가 창밖을 내다보니 멋지게 차려입은 돼지 한 마리가 청혼하는 거였다.

"아리따운 아가씨, 문 좀 열어 주세요. 제가 귀부인이 되게 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돼지는 문을 열어주면서 생각했다. 예의 바르고, 돈도 있는 것 같고, 마음에 드니까 저 정도면 좋은 신랑감이라고.

그러나 그 돼지는, 돼지의 탈을 쓴 늑대였다. 첫째 돼지는 늑대에게 잡아먹히고 말았지.

 

둘째 돼지는 가진 금화 반만 들여서 나무로 된 예쁜 집을 샀다.

첫째 돼지 때와 마찬가지로 멋진 돼지의 청혼을 받는다.

잘생기고 힘도 세어 보이고, 겨울에 땔나무 걱정은 없겠다는 판단에 그 돼지를 좋은 신랑감이라고 생각한다. 그

러나 역시 돼지의 탈을 쓴 늑대에게 잡아먹혔다는 결론.

 

이제 셋째 돼지가 궁금하겠지?

 

늑대는 돼지 가면을 쓴 채로 보리수나무 그늘에 누워 쉬고 있었다.

돼지 두 마리로 포식하고 나니 배가 불러서 좀 쉬어야겠다. 소화도 시키고 낮잠도 좀 자려고.

그런 돼지를 지켜보는 늑대 한 마리가 있었으니, 굉장히 사나워 보인다. 상황이 역전된 거다.

'돼지 가면을 쓴 늑대'는 '늑대 가면을 쓴 돼지'에게 자기가 사실은 돼지가 아니라 늑대라고 설명하느라 애를 쓰는데,

그에 '늑대 가면을 쓴 돼지'가 말한다.

"그래? 저기 가서 지푸라기로 만든 집에 숨어 있는 셋째 돼지를 잡아먹으면 네 말을 믿어 주지."

'돼지 가면을 쓴 늑대'는 지푸라기 집으로 뛰어들면서 셋째 돼지를 후식으로 먹을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어디 셋째 돼지 캐릭터가 그렇게 쉽게 잡아먹히는 것이더냐.

지푸라기 집은 셋째 돼지가 늑대를 잡기 위해 놓은 덫이었다.

그렇게 늑대를 포획한 셋째 돼지는 늑대를 사로잡았다는 소문이 퍼진다.

그래서인지 셋째 돼지와 결혼하겠다는 돼지들이 줄을 섰다는 후문이... ^^

하지만 셋째 돼지가 가장 좋은 신랑감을 찾았다고 나오지는 않는다. 그 후의 이야기는 아무도 모른다.

솔직히 『아기돼지 삼 형제』보다 <아기돼지 세 자매>가 훨씬 재밌게 읽힌다. 글로 보면 A4 종이의 절반이나 채워질까 하는 정도의 분량인데, 그 흐름이 통쾌해서다. 독립하라고 집에서 내보냈던 돼지 삼 형제와는 아주 다르다. 돼지 세 자매에게 신랑감을 구하러 내보낸다는 설정은 참 구닥다리 같지만, 그 여정에서 보이는 돼지 세 자매의 태도는 현실에 적응하며 사는 방법을 알려준다.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적나라하게 비춘다. 외모나 태도로만 판단한 첫째 돼지와 둘째 돼지는 늑대에게 잡아먹힌다. 이 정도면 뭐, 하는 계산이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거다. 돼지의 탈을 쓴 늑대였으니, 늑대의 손이나 발만 보았어도 돼지가 아님을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좀 더 신중하고 세세하게 상대를 살펴볼 생각을 못 한 거다. 반명 셋째 돼지는 늑대가 쓴 가면을 똑같이 이용한다. 늑대가 돼지 가면을 쓰고 돼지를 잡아먹었으니, 돼지도 늑대 가면을 쓰고 늑대를 잡아먹어야지!

 

 

 

 

(늑대를 포획하고 난 후의 셋째 돼지 표정 좀 봐라. 저렇게 좋을 수가 없다!)

 

 

돼지 자매 두 명은 죽었지만, 신랑감을 구하려는 목적으로 길을 떠난 돼지 세 자매가 얻은 교훈은 당당하게 살아남았다.

아마도 그건 당하지 않고 세상을 사는 법이 아니었을까.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내 손으로 내가 똑바로 서서 사는 방법을 가르쳐준 동화였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먼저 잡아먹어야 한다는 것 역시.(이 부분은 경쟁 사회에서 필요한 자세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의 적당함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마지막 반전은 참 대단했다.

신랑감을 구하러 떠났던 여자 돼지에게 좋은 신랑감을 찾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 않나.

원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처음 길을 떠난 이유 따위는 필요 없었다는 거다.

신랑감을 구하러 떠난 것 자체가 의미 없다.

신랑, 결혼이라는 것은 삶을 차지하는 많은 의미 중의 하나라는 것이니까.

여자의 행복이 결혼만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나, 어떤 남자를 선택하느냐에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이나

요즘 세상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개념은 아니니까.

사실 이건 여자 남자 따로 놓고 볼 일은 아닌데 말이다.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행복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결혼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

그건 여자에게만 적용되는 인생의 법칙이 아니라는 거다.

 

『아기돼지 삼 형제』보다 훨씬 현실적이어서 파고드는 메시지가 강하고,

통쾌한 결말에 큰소리로 웃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던 이야기다.

이 짧은 동화 한 편으로 요즘 시대의 많은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뭔가를 해결하고 찾아가는 느낌이 좋다.

 

 

페미니즘 동화를 검색하다가 같이 발견한 몇 권의 책을 더 읽었는데,

당당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 주인공들이 멋있어서 아직은 코딱지만한 조카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책들이다.

그동안 우리가 만났던 동화 속 공주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색다른 캐릭터들, 21세기를 사는 여성들에게 여자 어린이들에게 필독서로 보여주고 싶은,

굳이 어린이가 아니어도, 엄마가 아니어도, 만나보면 좋을 책들이다.

 

 

 

 

 

 

 

특히 <종이 봉지 공주>는 마지막 페이지가 압권이다. 너무 멋있었던 사이다 공주 때문에 박수를 막 쳐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린이(청소년) 책을 고르거나 읽을 때 참고하면 좋을 책 한권 더.

 

 

 

 

 

 

 

아이들 책을 바라본 최윤정 작가의 평론집인데, 어린이 문학을 보는 우리의 시선과

책 속의 구절에서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감정들, 실수들, 웃음들을 함께 볼 수 있다.

몇 가지 주제를 정해서 골라놓은 책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굳이 부모가 아니어도 어른이 된 우리가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아이들에게 보여야 할 태도, 말 같은 것을 배우는 또 하나의 기회를 만들어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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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8-06-27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흥미롭네요!!

구단씨 2018-06-29 10:08   좋아요 0 | URL
재밌습니다. 읽고 저도 많이 웃었습니다. ^^
 

 

가끔 그런 시댁을 본 적이 있다(사실 너무 많이 봤지만...) 아들과 결혼한 며느리를 무임금 노예 한 명 들인 것으로 여기고 함부로 대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아들 뒤치다꺼리하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혹은 시댁의 많은 일을 처리하는 사람쯤으로 여기는... 아니, 사람으로 생각하면 그런 짓(?) 못 하는 건데, 왜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지 모르겠는 상황들. 하아...

 

미혼인 내가 결혼도 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 몰랐다. 누군가를 만나서 좋아하면 되고, 혹시 헤어지지 않는다면 결혼도 할 수 있지, 라고만 생각했던 어린 나이를 지나고 나니 많은 것이 보인다. 나의 자매들, 친구들, 지인들의 평균 결혼생활은 15년 정도 된다. 그러다 보니 옆에서 직접 보게 되는 상황들도 있고, 속상하다면서 하는 얘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TV 일일 드라마의 막장 스토리가 단지 드라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며느리를 내 아들과 똑같은 인격으로 대하지 않는 시댁 사람들을 보면, 그럴 거면 죽을 때까지 아들 끼고 살지 왜 결혼하게 내버려 두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화가 날 때가 많다. 신수지의 <며느라기>를 보면서도 한숨만 푹푹 나왔다. 며느라기. '시댁 식구에게 예쁨 받고 칭찬받고 싶은 시기'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실제 그런 단어가 있고 정의가 있는 건지, 이 웹툰에서 만든 신조어인지는 모르겠다. 어디서 만들어진 말인지 중요하지는 않다. 그 시기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 공감이 먼저 다가오니 '며느라기'라는 단어가 실제로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큰 문제로 다가오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을 보니 다들 그런 시기를 겪었다는 것만 알겠더라.

 

주인공 민사린은 동갑내기 무구영과 결혼했다. 이 사람과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결혼했겠지. 사랑하는 남편과 같이 눈 뜨는 아침이 행복이라고 여겼다. 동시에 아내이자 며느리가 된 그녀가 해야 할 역할도 같이 추가된 거다. 잘하고 싶었다. 예쁨 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무리하게 잘하려 애쓴다. 시간이 안 되는데도 회사 일에 지장을 주면서 시댁 일을 챙기고, 시어머니의 첫 생일 아침상을 차려주겠다고 전날부터 시댁으로 향한다. 시누이는 미리 전화해서 자기 엄마가 좋아하는 미역국 스타일도 말해주고 말이다. 어쨌든, 시작은 잘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고 싶기는 하다. 이제 가족(?)이 되었으니 서로 잘하고 싶은 마음 모르지 않는다. 문제는 그 '잘하고 싶은' 마음이 쌍방인가 아닌가 하는 거다.

 

미묘하게 던지는 말에 담긴 감정들이 가슴에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알까? 웃긴 건 시어머니도 시누이도 며느리였다는 거다. 웹툰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감춰진 상황이 드러나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에게 공감과 동지애를 느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잘되지 않았다. 아직은 며느리인 사린에게만 감정 이입이 되는가 보다. 한편으로는 같은 여자인 입장에서,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모습까지 보니까, 이건 '며느라기'의 시기에 관한 문제를 넘어서서 여자가 겪는 문제까지 아우르는 것 같다. 명절 끝에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의 아내를 배려하지 않고, '간단하게 집에서 밥을 먹자'는 시아버지의 말을 보면 한마디 하고 싶다. 그 '간단한 밥상'을 당신이 한번 차려보고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이 책 읽다가 TV 파일럿 프로그램인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를 같이 보게 되었는데, 하아, 한숨과 답답함이 밀려와서 죽을 뻔했다. 일인다역을 하는 며느리에게 왜 빨리 식당으로 출근하지 않으냐며 전화로 닦달하는 시어머니, 아이가 방바닥에 엎지른 것을 보면서도 느긋하게 다가오는 남편, 결혼 후 처음 시댁 방문에 안절부절못하는 며느리, 그런 아내를 방치(?)하고 거실에서 시댁 어른들과 다과 하며 앉아있는 남편, 명절에 만삭의 몸으로 혼자 아이를 데리고 시댁을 향하는 며느리, 마치 며느리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대용량의 명절 음식 준비물을 내놓는 시어머니, 주방에서 두 여자가 열심히 차례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도 거실에서 TV를 보고 계시는 시아버지, 명절 전날부터 몰려오는 시댁 식구들, 차례 지내고도 바로 친정에 가지 못하는 며느리, 며느리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데 굳이 손주 아이큐 운운하며 자연분만을 언급하는 시아버지... 말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다. 눈물과 어이없음으로 공감하면서도 보던 이 프로그램에서 그나마 건진 건, 남자 MC의 한마디였다. 평소에는 그 안에 섞여 있느라 몰랐는데, 명절의 모습을 이렇게 한발 떨어져서 보고 있으니까 안 보이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정말 미묘하다. 말 한마디가 건네져 오는데 그 미묘함 때문에 감정이 상한다. 이제 한 가족이 되었다고, 며느리도 자식이라고 쉽게 말하기도 하면서 하는 말이나 행동은 아들과 다르게 대한다. 분명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바뀌지 않은 것들이 아프게 한다. 남자와 여자, 시댁과 친정,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을 구분해서 편 가르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가족이라고 하면서 가족이 되지 못하는 사람, 자기가 편하다고 아내도 편할 거로 생각하는 착각, 내 아들 좋아하는 것을 차려놓고 며느리도 좋아할 거라고 단정하는 일... 웹툰 <며느라기>에서 나오는 사린의 동서가 차라리 현명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싫고 좋고 분명히 표현하는 일이 자기 안위를 위해서 필요하다. 정이 없다고, 냉정하다고, 며느리인데 왜 안 하느냐고 욕먹기도 하겠지만, '걔는 원래 그래' 하는 인식이 장착되니 더는 그 며느리에게 뭔가 요구하거나 희생하는 일을 강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 사린의 동서 같은 며느리가 되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며느라기>나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를 보면 공통으로 드는 생각이 있다. 바로 남편의 역할. 시댁과 아내의 중간에서 남편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바로 보인다. 내 아내가 시댁에서 어떻게 지낼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남편에게는 '자기 집'이었겠지만, 아내에게는 쉽게 다리도 뻗을 수 없는 '아직은 남의 집'일 거라는 것을. 악의가 없다고 하지만 시댁 사람들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하는 집안 일들에 여성들은 힘들어한다는 것을. '간단하게 먹자'는 상차림의 준비는 절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나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계속 생각한다. 어른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어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거슬리면 그만하시라는 말도 한다. 그래서 저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느낌의 상황들을 가만히 참고 지켜보기만 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아마 가만히 있지는 못할 것 같다. 요즘 많이 하는 연습이 거절하는 거니까. 싫으면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연습을 계속하고 있다. 싫다고 말하지 못해서 끙끙 가슴앓이하면서 위경련을 앓는 것보다 한번 싫다고 말하고 상대에게 나쁜 사람 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혹시라도 내가 누군가와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과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나는 '며느라기'의 시기를 만들지 않아야겠다고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선에서, 새로운 가족과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하는 정도만 내 손을 내밀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에는 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그 거리를 너무 가까이 만들려고 노력하다가 부작용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그 거리를 너무 멀리하려고 해도 서운해지는 일이 생기겠지만...) 사린이, 대한민국의 며느리가 시댁 식구들에게 예쁨 받으려고 칭찬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가능한 정도만 하면 된다. 때로는 싫다고 말하는 게, 솔직한 거절이, 서로가 잘 지낼 방법이 되기도 한다.

 

이 웹툰이 계속 연재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른 남편들, 남자들이 같이 봐주었으면 더 좋겠다. 내 아내가, 내 어머니가 어떤 일상과 시댁이라는 관계 속에서 있는지 보면서 이해와 공감의 시선을 보내주기를. 일방적으로 여자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결정으로 만난 인연들이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위한 시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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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웃는 아이였다. 그 웃는 모습 때문에, 눈웃음친다고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 웃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웃지 못 할 이유도 없었다. 그냥 웃고 싶은 일에 웃는 게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커가면서 점점 웃음은 줄어들었다. 웃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계산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럴 이유가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웃음에 인색해졌다는 것밖에는... 웃음이 줄어들었던 그때, 같이 줄어든 게 있었다. 웃는 것만큼이나 우는 일도 많지 않았다. 슬프고 아프면 울어도 되는 거였는데, 점점 그 울음마저도 자유롭지 못했다. 울면 안 되는 순간이 많아진 거다. 남들이 볼까 봐, 혹시 그 눈물에 계산이 있다고 생각할까 봐, 자존심이 상해서. 혼자 참 많이도 계산했다. 계산기를 마구 두드려보니 울면 안 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더해진 건, 감각이 둔해져서이기도 하다. ‘그게 울 일인가?’ 하는 생각이 감정에 파고들었을 때, 울음은 약해지고 사라졌다. 울 여유가 없다고 여겼던 거다. 사는 일에 치여서 눈물 따윈 사치처럼 여겨지기도 했던 날들. 어떤 이유로든,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눈물은, 일상에서 그리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런 눈물이 그리워지는, 한번 울고 나면 속이 좀 풀리고 시원해질 것 같은 날이 있다. 습관이란 게 무섭기도 하지. 이상하게도 그런 날마저 눈물은 잘 나지 않더라는. 그럴 때는 눈물도 감정도 너무 메말라버린 삶에 괜히 화가 나기도 했다. 어느 순간을 버티고 넘어가는 일에 눈물이 답은 아니지만, 눈물이 풀어주는 게 분명 있다는 걸 아는데도 울지 못하는 것도 답답하고, 우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일상이 마냥 아쉬워서... 그런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서였나. 『아주, 조금 울었다』의 저자 권미선은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본 듯, 아니, 어쩌면 그 누군가와 같을 수밖에 없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것처럼 눈물이 필요한 순간을 풀어냈다. ‘누군가와 함께’가 아닌 ‘오롯이 혼자’일 때 꺼내놓을 수 있는 마음을 들려준다. 혼자여도, 뭐가 잘 맞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어느 순간 외로워질 때 같은, 이대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순간의 마음을 드러낸다. 밀려오는 감정이 모두 외로움이라는 종착역으로 가 닿으려고만 애쓰는 것 같아서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하나도 안 괜찮은 마음으로 남아있을 때. ‘어떻게 하지?’ 라는 물음에 터져버린 답.

 

 

그냥 혼자여도 괜찮았는데,

누군가를 찾았을 때 대답이 없다는 건,

외로워지는 일이다.

그땐 진짜 혼자라는 생각이 드니까.

그럼, 원래부터 혼자인 존재는 외롭지 않을까? (아주, 조금 울었다 15페이지)

 

 

말들이 아무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거든.

우리는 잘 모를 때 말을 더 많이 하게 돼.

잘 모르니까 애쓰는 거야.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아주, 조금 울었다 32페이지)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울고 싶을 때, 울어야만 하는 때를 그대로 확인하는 기분이 들어서 순간순간 울컥해지는 문장들이 담겼다. 안 되는 거 아는데도 쉽게 포기가 안 될 때, 헤어졌다는 걸 인지하는데도 문득 생각나서 힘들 때, 일상이 버거워서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때,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어서 계속 아플 때. 일부러 찾지 않아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그리움, 외로움의 시간이 콕콕 파고드는 순간들이 덩어리가 되어 올 때. 오지 말라고 해서 안 올 감정도 아니고, 머물지 말라고 해서 떠날 감정도 아닌 것들을 해결할 방법이 되기도 하는. 애써 참았던,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순간을 버리면서 느슨해지는 일이 필요할 때 ‘조금’이 아니라 ‘많이’, ‘펑펑’ 울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혼자인 시간에, 혼자이기 때문에 울어도 되는 거 아니었나? 꼭꼭 닫아두지 말고 문고리 하나 살짝 풀었더니 쏟아지는 건 자동. 차마 다른 사람 앞에서 꺼내지 못한 진심이, 나와 마주하게 된 순간에 고백처럼 토해져 나오고야 마는, 그렇게 울어도 되는 일이었던 것을 왜 몰랐을까. 내가 봐주면 되는 거였는데 말이지.

 

 

그녀는 펴지지 않는 우산을 손에 들고,

길 한복판에 서서 그렇게 울었다.

사람들이 흘깃거리며 그녀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살다 보면, 그렇게 울음이 터질 때가 있다.

그럴 땐 그냥 울어야 한다.

운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울지라도 못하면 도대체,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울고 나면, 그리고 비가 그치고 나면

그녀의 인생에도 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아주, 조금 울었다 161페이지)

 

 

참아야 하는 게 많아지는 인생에서, 어느 순간 눈물도 참아야 할 목록에 담아져버렸다. 누가 참으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참다 보니, 뭔가 자꾸 쌓였다.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가슴 속에 쌓이기만 했다.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전에, 미처 꺼내놓지 못한 진심을 마주하고 싶을 때 울어도 좋겠다고, 아마도 작가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짧은 문장들에서 번져 나오는 건 깊은 곳에서 끌어낸 마음들이었다. 누구에게나 그 마음이 읽힌다는 건, 누구에게나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거, 아닌가? 들어달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마음 때문에 공감하는 거니까. 눈물 섞인, 물기 가득 촉촉한 문장으로 마음을 읽는 시간을, 이렇게 풀어놓는다. 울어도 좋은 거니까, 안심하고 둑 터지듯 실컷 울어보라고...

 

 

이런 부족의 이야기가 있다.

카리브 해에 산다는 그 부족은 여자가 남자를 선택한다고 한다.

그리고 여자는 언제든 새로운 남자와 함께 살 수도 있다.

만약 새로 살고 싶은 남자가 생기면,

여자는 지금 함께 사는 남자의 짐을 싸서 문 앞에 놓아둔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남자는 그 보따리를 보고 안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걸, 그래서 떠나야 한다는 걸.

그럼 남자는 보따리를 안고 울면서 어머니 집으로 되돌아간다.

 

속수무책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이별의 순간들이 있다.

 

그녀의 마음에는 이제 그가 없었고,

그래서 그는 울면서 떠나고 있었다. (아주, 조금 울었다 108~10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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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장미 2018-01-25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바껴서 또 사고 싶어지는 간사한 마음이;;;;

구단씨 2018-01-26 17:17   좋아요 0 | URL
아, 표지가 바뀐 건가요? 저는 원래 표지가 이런줄 알았어요.
도서관에서 읽어서 원래의 표지 디자인을 몰랐네요. ^^;;;
 

 

 

 

 

 

 

 

 

 

“사람이 말이디… 제 나이 서른을 넘으면, 고쳐서 쓸 수가 없는 거이다. 고쳐디디 않아요.”

진솔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보태서 써야 한다. 내래, 저 사람을 보태서 쓴다… 이렇게 생각하라우. 저눔이 못 갖고 있는 부분을 내래 보태줘서리 쓴다… 이렇게 말이디.”

“…네.”

어쩐지 눈물이 핑 돌아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노인은 진솔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보태서 쓴다는 게 가능할까? 그렇게 보태서 쓰기까지 어느 정도의 인내와 시간이 필요한 걸까? 좋아하는 소설 속 구절을 항상 마음에 담고 살아보려고 하는데, 사실 잘 안 된다. 애인이든 친구든 동료든, 어떤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가족 관계에서도 어려워서 관계를 끊기도 하는 일이 새삼스럽지 않다. 매번 불편하고 힘든 그 관계를 정리하고, 또 다른 인연을 시작하고 또 정리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시간에서 항상 줄다리기하는 기분이다. 처음부터 이 사람을 보태서 쓴다고 생각하면 만날 수나 있을까? 만나다 보니 도저히 안 되겠어서 헤어지기도 하겠지. 정말 이필관 옹의 말처럼 보태서라도 쓰고 싶은 애정이 남아 있을 때 계속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거겠지. 다만,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머릿속의 수많은 갈등이 끝나지 않는다는 게 힘들다는 거다. 그러면 관계의 정리 여부를 선택을 하는 시기는 또 언제가 되어야만 한다는 말인가.

 

시간이 필요한 일이 있다. 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고 느끼게 되지만, 그 순간에는 잘 알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알게 되는, 미처 다 배우지 못한 관계의 한 부분이 그러했다. 어떤 일에 익숙해지고 누군가와 친해지는 일. 혹은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어도 체하지 않게, 불편하지 않게 소화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일들.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무릎 나온 추리닝을 입고 마주해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의 편안함은,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야 가능할까 계속 생각했다. 같은 집에 태어나서 같이 자라고 사는 가족이어야만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그저 오직 한 가지, 시간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도 가능한 관계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상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관계를 유지하는 일을 앞에 두고 매번 이런 게 어려웠다. 편해지기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측정해야 하는지를.

 

누군가를 알아가고, 그렇게 알아가는 과정에서 민낯을 드러내고, 어떤 힘듦과 괴로움으로 속이 상하는지 말하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건 정석이다. 누구나 다 알듯이, 겪어보니 그렇더라. 이런 방식은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고, 그대로 진행되었을 때에만 결과로 보여주었다. ‘이 정도면 우리 친하지 않아?’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으로 알게 된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너와 친해지기 위해 내가 이런 노력을 계속해왔구나, 하는 확인과 안도 같은 감정까지도. 그래서인지, 나이를 계속 먹어갈수록 누군가와 친해지는 게 힘들었다. 처세술처럼, 어느 순간을 통과하기 위해 가면 하나를 쓰고 사는 날이 많았다. 상대방(들)과 굳이 친해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다시 안 볼 사이가 될지도 모르고, 계속 보게 된다고 해도 또 그 순간을 넘어갈 대응을 보이면 되는 거였다. 어른들을 만나도, 또래를 만나도, 언젠가부터 그랬다. 적당한 예의로 상대방을 무시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며 상대방과 연관된 어떤 일을 하기만 하면 되곤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면서...

 

 

지난 주말에 집안일 때문에 어떤 분을 만나게 됐다. 잠깐 인사만 하고 나오면 충분할 자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그분과 차를 한 잔 마시게 됐고, 별거 아닌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자리가 아니었는데, 인사하고 뒤돌아서서 나오면 되는 자리였는데, 어쩌다가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한 속내를 털어놓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불편한 자리였고, 불편한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혹시 보게 된다면 불편할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혹시 눈물이 나오더라도 꾹 참아야 할 자리에서 나는 추하게 눈물을 보이고 말았는데, 그분은 나에게 울지 말라는 말도 안 했다.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다가, 괜히 울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전부였다. 나보다 인생 더 살아온 사람이니 분명 더 많이 쌓아온 게 있을 터였다. 그분 역시 세상 쉽게 살아오지는 않았겠지. 어떤 관계로 정의할 수 없는 사이였는데, 상담자와 내담자로 만난 기분이었다. 그게 끝이었으면 좋았을까. 정의하기 모호한 관계가 되었고, 불편한 것을 아닌 척하며 한 번 더 만날 일이 생겼다. 싸우자는 자세로 나갔는데, 오히려 미안한 일을 더 보태고 와버렸다. 원하지도 않은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들은 여전했고, 그들은 자기들의 오지랖이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할 것처럼 기뻐했다. 그게 다른 사람들을 오해하고 싸우고 화나게 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결국은 그들의 오지랖을 내가 정리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걱정에 머리를 싸매고 두통을 이고 사는 날들이다. 남들이 펼쳐놓은 이 문제를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게 화가 나고,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만 쌓이고, 가능하면 누구라도 상처를 덜 받게(아주 상처를 받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하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요즘의 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인생 뭐가 이렇게 어렵냐 싶은 투정을 부리고 싶은데, 또 누구에게 투정 부리면서 민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은 이 모순적인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나. 남들이 펴놓은 장기판 위에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장기 말이 된 것만 같아서 너무 아프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다독이고 위로하며 건너갈 수 있을까 하던 중에 보게 된 이웃님의 리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한 문장 때문에, 완전하게는 아니어도 마음을 추스르게 된다.

 

 

 

 

 

 

 

 

 

우리는 딱 장편소설은 아니야. 그가 찾고 있는 비유에 거의 다가간 것 같다. 우리는 딱 단편소설은 아니야, 그러고 보니 그의 인생이 그 말과 가장 가까운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단편집이야. (섬에 있는 서점, 301페이지)

 

우리는 단편집이야. 우리는 단편집이야.. 우리는 단편집이야... 그러네. 살아오는 순간순간들의 단편이 모여서 단편집으로 만들어지는 게 우리 인생이었네. 기다란 장편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말이 안 될 건 없겠지만, 우리가 단편집이라는 저 문장을 보자마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위로를 받은 것만 같았다. 내가 지금 어렵다고 징징거리고, 왜 남이 만들어놓은 힘든 일의 정리를 책임져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화를 내는 일도, 짧은 단편처럼 금방 읽고 덮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해졌다. 이 순간을 넘어가는 일도 인생의 한 부분이겠거니, 그 마무리가 더 고통스러운 일로 변할지 몰라도 단편 하나의 마지막 페이지이겠거니, 하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만 같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워질 일들이 인생이겠구나 싶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과 이렇게라도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거라면, 받아들여야지 별수 있나. 가끔은 슬프고, 아프고, 힘들겠지만, 이 순간이 단편소설이 되어 넘어갈 거로 생각하면 참지 못할 게 뭐가 있나 싶은, 보살 같은 마음으로 지금은 건너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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