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다 미리가 말하는 아빠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는 아빠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40여 년을 아빠의 딸로 동거인으로 살아왔는데, 돌아가신 지 3년이 넘어가는데, 아빠에 대해 기억나는 건 한 가지다. 살아계시는 동안 가족들을 참 힘들게 했지. 아빠는 나에게 애틋한 기억보다 안 좋은 기억이 많은 존재로 남았다. 함께 외식을 한 적도, 서로 대화를 한 적도 거의 없다. 다른 친구들 아빠들을 보면 딸과 참 돈독하게 잘도 지내던데, 나에게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던가 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마스다 미리 역시 아버지와 친근하게 지내지는 않은 듯하지만, 우리가 보통(?)이라고 생각하며 보이는 부녀지간의 모습을 보인다. 읽는 동안, 서먹하고 다 이해하지 못한 존재로 여기면서도 결코 놓을 수 없는 가족의 한 자리에 있던 아빠를 기억하는 그녀가 너무 부러웠다.

 

아빠는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가까운 사람일 텐데 몹시 먼 사람 같기도 하다. 딸을 편하게 대하지 못할 때면 좀 안됐다는 생각도 든다. 관심과 애정을 자꾸 원하는데 자꾸 헛짚는달까, 애정 표현이 때때로 이상해서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아빠는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그래서 성가실 때도 있다. (아빠라는 남자, 4페이지)

 

저자가 들려주는 아빠의 에피소드 중 한 부분인데, 아빠는 딸의 운동회나 학예회, 졸업식 같은 행사에 참여하는 걸 거북스러워했다. 그런 아버지인데도 딸이 다닌 고등학교와 단기대학, 취직한 회사 주변은 훤히 알았다고 한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반드시 견학하러 갔단다. 내 딸이 다닐 학교와 일하는 곳의 환경이나 지리를 미리 파악하고 다니셨던 거다. 세상 어느 아빠가 이 정도의 애정을 뽐낼까 싶다. 딸의 공식적인 행사에 참석하는 건 어색해서 피하면서도, 내 딸의 안위를 위해서는 몸소 움직여 안전을 살피는 아빠라니. 어떤 때 보면 굉장히 고집스럽고 독단적이면서도 내가 지켜야 할 가족이라고,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그 고집스러운 면이 빛을 발하는 듯하다. 굳이 나서서 내 딸이 다닐 그 길을 살펴보는 아빠를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비록 아빠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고 모든 상황에서 100% 소통할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던 거다. 무뚝뚝하고 투박하지만, 그 마음이 그대로 보이는 걸 보면 이런 사랑이 또 있을까 싶다. 아빠의 그런 사랑은 소소한 기억에서 더 애틋해진다.

 

한없이 품이 넓은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도 천 엔짜리 라면에 흥분하는 아빠를 기억하는 모습은 불편하기도 하다. 값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공통으로 생각하는 건, 다음에 가족이 같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저자의 아빠 역시 그랬겠지. 하지만 그녀는 아빠와 외출하는 건 반기는 일이 아니었단다. 편하지 않았고, 아빠를 접대하는 시간으로 기억했다. 아빠의 기분을 맞춰주고 아빠가 화를 낼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였다고. 그러니 아빠가 기분 좋게 찾아낸 맛집을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선뜻 반길 수는 없었던 거지. 마음 편한 외출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결국 따라나선 시간은 어색하기만 하다. 아빠와 둘이서 라면을 먹는 상황이 겸연쩍어졌다고. ㅎㅎ 맛있다는 감탄사만 거듭하면서 그 불편한 시간을 견뎠나 보다. 문득 궁금해졌다. 딸보다 더 오랜 시간 아빠의 모습을 보며 살아왔을 엄마의 마음을 어땠을까 하고.

 

'엄마.'

혼자, 가만히 입 밖에 내어보면 어린 시절이 되살아난다.

'엄마.'

이것은 마법 같은 단어다. 푸근하고 아늑해지는……. (엄마라는 여자, 4~5페이지)

 

둥지에서 떨어진 쇠약한 새끼 제비를 엄마가 주워 온 적이 있었다. 수건으로 따듯하게 감싸고 모이를 먹였지만 끝내 살리지 못했다. 새끼 제비 한 마리 때문에 우는 엄마를 보면서,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묵직한 일인지 나는 천천히 배웠던 게 아닐까. (147페이지)

 

엄마의 인생 역시 다른 엄마들과 다르지 않았다. 소소한 기쁨을 맛보며 살아왔던 엄마의 시간이었고, 모든 아끼며 검소하게 가정을 꾸려왔다. 저자가 들려주는 엄마의 여러 가지 모습 중에서 전단을 이면지로 사용하는 것도 친근했고, 백화점 행사 매장에서 쇼핑하는 것도 익숙했다. 가정주부로 살면서 어떤 시간을 건너왔을지 상상이 된다. 소박한 수다에 사람의 정을 나누고, 별거 아닌 일에 까르르 웃으면서 일상을 견디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모든 순간이 '견디는' 세월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편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온 시간은 적응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고, 딸들을 키우면서 함께한 시간은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하게 했지 않았을까. 어쩌면 엄마 자신이 성장하는 시간을 떠올렸을 수도 있고, 엄마가 아니라 친구처럼 딸과 지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족이기에 같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성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해야 했을 거다. 저자가 고향에 갈 때마다 엄마의 살림에 못마땅한 것을 지적할 수 없는 것은, 자기만의 방식의 삶이 인정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엄마와 딸 사이라고 해도 말이다.

 

여행하는 엄마와 딸 이야기는 가장 뭉클하면서도 내가 가장 바라는 시간이었다. 뭐 이런 걸 다 챙기고 왔느냐는 핀잔에도 순박하게 웃으면서 그 필요성을 어필하는 엄마의 표정을 상상하며 읽었다. 아마 어디를 갔어도, 어떤 피곤함이 있어도 좋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의 외출에 들떠서 여행지의 택시 기사와 수다를 떨고, 눈에 보이는 곳곳에 감탄한다. 때로는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날리는 엄마이기도 하고, 마치 사랑하는 자식을 바라보듯 작은 동물들을 감싸고 돌보는 엄마를 보기도 한다. 엄마에게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며 놀라기도 하지만, 원래 엄마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미안해지기도 한다. 도대체 우리는 엄마에 관해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살아왔기에 엄마의 별것 아닌 모습에 낯섦을 발견하는 것일까. 그래도 딸이라고, 아들보다는 엄마를 더 잘 이해하고 안다고 자부했는데, 작은 에피소드 하나에서 끄덕일 때마다 내가 엄마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구나 싶었다.

 

우리는 엄마와 아빠를 부모라고 부르며, 그들과 모든 생애를 같이 한다. 아빠를 이상형으로 꼽으면서 우상으로 여기며 자라기도 하고, 같은 여자로 엄마의 인생을 이해하기도 하면서 가족 그 이상의 감정을 나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아빠와 엄마의 모습이 제각각의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걸 보면, 혹시 엄마 아빠의 고정적인 성향이라도 있는 것일까 싶지만, 아직 부모가 되어보지 못한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조금은 아는 그 감정을 흠뻑 느끼며 읽게 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였다. 아끼고 절약하는 게 습관이 되고, 마당 한쪽에 작은 꽃을 심어놓고 흐뭇하게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엄마의 표정을 떠올렸다. 엄마의 많은 부분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엄마가 해주시는 반찬 중에 하나도 못하는 나를 보면 '엄마'의 모든 것은 당연한 게 하나도 없었다. 일상의 소소함에서 느끼는 행복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그대로 보여주는 게 엄마였는데, 그걸 저자가 들려주는 엄마 이야기에서 또 확인하고 있다.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어서 유감이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아빠에 관해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만큼 다 알지 못한다. 어떤 특별한 감정이 떠오르지 않는 존재, 살아계시는 동안에도 서로 얼굴 마주하며 애틋했던 적이 없던 아빠를 떠올리는 게 익숙하다. 저자가 아빠에게 느꼈던 불편함과는 조금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마음 자체가 달라서 저자나 다른 사람이 아빠에게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저자가 말하는 아빠를 다 모르지 않기에, 다 드러내고 살아갈 수 없는 성격을 좀 알기에 이해해보고 싶다.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적어도 내 기억 속 아빠라는 존재가 미움으로만 가득하지 않기를 바란다. 두 권 모두, 많이 안다고 착각(?)하는 내 부모의 모습을 다시 보게 하는 이야기다. 자기 부모에 대해 솔직하게 쏟아내는 저자의 입담에 꽉 조인 뭔가를 풀어내는 기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벽 세 시’라는 말에 깜빡 속을 뻔했다. 깨어있다면 감성을 누리기에 충분한 시간 아니던가.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밤, 아니 아침으로 향해가는 새벽 시간에 뭔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시간. 책을 읽어도 좋고, 누군가 깨어있는 사람 또 없을까 싶은 마음으로 라디오를 켜놓고 있어도 좋다. 미뤄두었던 정리하지 못한 책을 꺼내놓고 이삿짐 싸듯 정리해도 괜찮겠지. 뭐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만으로 기꺼이 깨어 있어도 좋은 시간이다. 그 시간에 깨어있는 게 내 의지라면 말이다. 이 책에서 마주하는 ‘새벽 세 시’는 내가 생각했던 감성과는 거리가 먼, 책임과 부담이 먼저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여러 이유로 겪게 되는 우리 몸의 변화가 가장 날카롭게 지각되는 시간이라고 했다. ‘통증의 들쑤심에 속절없이 지새우는 밤의 새벽 세 시를, 쏟아지는 잠을 떨치며 지친 몸으로 아픈 이의 머리맡을 지키는 새벽 세 시를, 나이 들어가며 ’전 같지 않은‘ 몸을 마주하게 되는 새벽 세 시’(12페이지)를 떠올려 보라고 말한다. 듣고 보니 몸에 찰싹 달라붙어 떼어지지 않는 삶의 무게를 보는 듯하지 않은가?

 

이 책은 우리가 아프고 나이 들며 살아가고 죽어가는 몸으로 사는 일에 관해 말한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들려온다. 그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와 감당해야 할 일을 한 개인으로 몫으로, 가족의 일로 남겨둘 수 없다는 게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우리 모두 병명은 다를지라도 아픈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언젠가, 현재에, 앞으로의 어느 날에 그렇게 된다. 그래서 관심 두어야 할 문제들이다. 우리가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고통과 질병을 마주하고, 그 정면에서 부딪히는 장면에 질문한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아야 할 상황을 마주한다면, 당신이 그 돌봄을 수행해야 할 자리에 있게 된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 사회가 같이 안아야 할 본질적인 문제를 꺼낸다.

 

보호자는 불현듯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히지만, 동시에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차마 도망치지 못한다. 이 ‘차마’에 담긴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많이 아픈 사람들 곁에서 돌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의 사회가 ‘보호자’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마음은 어째서 수시로 진창이 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머물 수 있게 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지, 우리는 간병하는 이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고 ‘같이’ 배우지 않는다면 아무도 배우지 못한다.(131페이지)

 

돌봄의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했다. 가족의 일이니까 마음을 다해 보살피면 된다고 여기던 일에 위기는 찾아온다.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고 그 돌봄의 책임이 당연한 건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 때문인지 왜인지, 우리는 종종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가족같이’라는 말을 꺼낼 때가 많다. 서로 애틋하고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뜻일까? 이 말에 의미를 둔 적은 없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니 가족 같다는 말이 언제나 정이 넘치는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돌봄의 위기가 그 ‘가족’에서 시작되고, ‘독박’에서 찾아온다는 말이 너무 와닿았다. 나도 한마디 거들면서 경험해본 사람만이 아는 그 양가감정을 슬쩍 꺼내놓아 본다. 상황이 그러하니까, 가족이니까,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이런 이유로 누군가 독박 돌봄을 해야 한다면, 돌봄의 온전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지는 한 사람은 온전한 마음으로 환자를, 가족을 돌볼 수 없다. 그러다가 환자를 방치, 학대하는 일도 생긴다. 어느 순간 간병인에서 가해자가 된 이들의 마음을 누가 제대로 읽어줄 수 있을까.

 

성장하고 독립하면서 인생을 꾸려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배워왔는데, 우리는 다시 독립적이지 못한 몸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우리가 찾아가는 젊음이 독립이었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늙음은 의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의존의 상황은 두렵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묻는 말에 나오는 답은 늙고 병든 몸은 비용이고 짐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동하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육체가 버겁다고 여긴다. 자신에게 찾아온 질병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돌봄을 피할 수도 없다. 치욕이라 여기는 돌봄과 아픔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언제부터 돌봄이 이렇게 고역이 되었나. 이 책으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우리나라의 돌봄 구조였다. 앞서 말한 독박 돌봄의 불균형이 돌봄을 긍정의 이미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돌봄은 대개 가족 내 돌봄으로 이루어지고, 돌봄 노동자의 90% 이상이 여성이란다. 한국 사회가 만든 돌봄의 구조가 가족, 특히 여성에게 전가해온 현상이다. 그 안에서 돌봄은 고통과 희생이 되고, 때로는 학대와 방치에 가깝게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돌봄 경험은 여성의 주도가 되지 못하고 남성이 돌봄 경험으로 기록한 책들이 더 많다. 웃기게도 이건 육아와 비슷한 흐름으로 보인다. 남성의 돌봄은 기록으로 남겨져 남다른 지식과 경험이 되는 현상이다. 왜 누가 하면 당연하고 누가 하면 배워야 할 지식이 되는가? 이는 여성의 모성과 돌봄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뿌리 깊은 인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한다. 우리 몸의 아픔과 돌봄 문제에서 같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사회 문제이다.

 

저자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하는 말은, 돌봄이 가정 안에서 누군가의 부담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는 거다. ‘시민적 돌봄’을 강조한다. 누구나 아프고 죽어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간이라면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비슷하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 돌보고 돌봄을 받는 관계가 된다. 이는 각자가 겪는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시민으로 감당해야 할 ‘우리’의 일이라는 감각을 깨워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과 가정의 일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정책이 반영되어 이 문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절대 혼자 이룰 수 없는 집단이며,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공동의 부담이면서 ‘우리’가 되었을 때 받는 힘의 크기도 만만치 않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계속 말하고, 소통하며, 듣게 하는 이야기다.

 

부담인 줄 알면서도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에 다른 시선이 생긴다. 나는 환자로 누워있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보호자로 누워 있는 사람을 돌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가족의 일이었고, 누군가는 해야만 했던 일이 나의 일이 되었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간병인을 구할 수 없던 그때 꼬박 일주일을 환자 옆에 있던 어느 날, 자주 마주치던 수간호사 선생님이 나에게 빨리 간병인을 구하라고 했다. 장기전이 될 텐데, 지금 이러면 보호자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다고. 간병인이 구해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간병 비용 부담도 상당했다. 어쨌든 나중에는 간병인과 교대하면서 병상을 지켰지만, 책에서 언급한 ‘독박’이란 분노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온전히 내 몸을 챙기지도 못하면서 쌓여가는 감정적 육체적 피로는 또 다른 고통을 낳고 있었다. 아, 이래서 학대와 방치가 생길 수 있다고 하는 마음의 경험을 했다고 해야 하나. 저자들이 들려주는 많은 경험과 통계 자료들이 내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저자들은 한때, 그리고 지금 아픈 몸으로 살고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더 절실하고 생생하게 들려오는 이유다. 건강하다고 여기는 이 몸이 언젠가 돌봄을 받는 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모두 아프고 늙으며 살며 죽는다. 이 모든 삶의 순간들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돌봄에 의존한다. 또한 의존하면서 의존하는 다른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돌본다. 내용과 형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돌봄은 언제나 상호적이며 쌍방향적이다. 의존과 돌봄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큼 더 다양하고 세밀하게, 복합적으로 발화되고 청취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돌봄이 어떤 노동이고 어떤 윤리적 가치인가를 차이 속에서 보편적 합의로 구성해내는 것은 어렵지만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공통과제다. (21페이지)

 

이 모든 돌봄의 시간, 돌봄을 주고받았던 관계는 ‘나’의 일부다. 각자, 혼자 알아서 하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짐이고, 또한 힘이다. (80페이지)

 

우리는, 누구나 새벽 세 시의 몸이 된다. 우리 몸이 늙어간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신과 나, 모두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돌봄의 현실을 같이 마주해야 한다. 지금이 아니라고, 멀고 먼 일이라고 여길 텐가. 피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 마주침을 최대한으로 미루고 싶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시간은 내 계획대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이미 잘 안다. 어느 순간 우리 앞에 떡 하고 나타나 현실이 된다. 그러니 이 책의 저자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돌봄의 고립된 세상에 남겨지지 않았으면 한다. 누구나 혼자 부담하기에는 외롭고 힘든 시간이 될 간병에 힘이 되는 ‘토로’이자 ‘토론’의 이야기인 이 책이 조금은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심을 버리고 가면을 쓰는 거고. 그 가면을 벗기는 게우리 일이야. 거짓의 가면을 벗기면 진실한 얼굴이 나온다. 사람을 믿지 말고 원칙을 믿어라." (신데렐라 포장마차 2, 213페이지)

 

추리소설의 다양한 소재가 있겠지만, 음식이 추리에 끼어든다면 더 흥미진진해지는 건 왜일까. 추측이지만, 아무래도 음식은 우리의 일상에서 익숙한 것이고 그 익숙함 속에 녹아든 추리를 만나는 건 평범하면서도 흥미로운 사건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이상한 야간열차에 탄 것처럼, 이 소설은 밤에 한 시간 동안만 문을 여는 푸드 트럭이 장소가 된다. 그러니, 한 시간만 영업하는 그곳에서 무슨 음식이 등장하며 독자를 그들의 미스터리한 사건에 초대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1권에서 시작된 이 시리즈의 매력은 2권에서 좀 더 깊게 들어가는 듯하다. 이미 소개 글에서도 나와 있듯이 장편 시리즈라고 한다. (사실 1권 먼저 읽어야 하는데, 신간이니까 이 책을 먼저 읽어보고 싶다는 간절함에...) 등장인물은 똑같고, 그들에게 던져진 사건이 조금 더 깊이를 더한다. 뭔가 더 파고들어야만 확인되는 결정적인 단서를 만났다고 해야 할까.

 

유치장에 갇힌 프랑수아. 그는 한국에서 프랑스 요리 푸드트럭을 운영하는 셰프이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건의 단서를 쥔 인물이다. 그가 왜 유치장에 들어갔는지는 모른 채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유치장 밖에서 프랑수아를 기다리는 민간조사원 김 건과 프랑스식당의 수셰프 소주희. 그리고 이들의 기다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프랑수아를 가둔 채로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내고 싶은 형사 신영규. 프랑수아는 김 건과 소주희에게 푸드 트럭에 있는 엽서 한 장으로 무언가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갇힌 몸이라 어쩔 수 없으니, 또 과거는 모두 잊은 김 건이 현재의 기억력은 최고로 달리고 있으니 소주희와 콤비가 되어 조금씩 사건에 다가간다. 그 사이 김성기 전 장관이 방송 인터뷰 중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전 국민이 보고 있던 상태라 이 사건은 결코 가볍지 않다. 신영규 형사 팀은 이 사건이 단순 자살이 아님을 느끼고 유력한 용의자이자 김성기 전 장관의 비서 같은 강하라를 취조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김성기 전 장관의 자살로 사건은 마무리되고 강하라는 유유히 빠져나간다. 그리고 프랑수아에게 단서를 얻은 김 건과 소주희는 하나씩 단서를 추적하고,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사건의 윤곽을 좁혀나간다.

 

형사, 민간조사원, 셰프, 추리 소설가 등 이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알겠는데, 정작 무슨 사건인지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사건도 모른 채로 단서만으로 퍼즐을 풀듯이 맞춰가는 뭔가가 오히려 더 궁금해질 지경이다. 그러면서 제각각 개성이 뚜렷한 이들이 모이면 어떤 사건이라도 해결하지 못할 이유가 없겠다는 기대감이 생기는데, 그들이 추적하는 단서에는 음식이 중심이 된다. 이번 2권에서는 1권에 이어 프랑스 음식이 등장한다. 서대기를 주재료로 하는 '솔 베로니크'와 빛나는 칵테일이라는 뜻의 '글로우 칵테일'이다. 단편처럼 두 가지 음식을 소재로 사건을 푸는 이야기 두 편이 담겼다. 처음에는 별도의 이야기로 짧고 굵게 끝나는 건가 싶었는데, 다른 메뉴가 등장하면서도 처음 사건과 연결이 되는 방식이다. '솔 베로니크'로 추적한 음식에 얽힌 사건을 가지고 가면서, 뒤이어 '글로우 칵테일'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이 따라간다. 물론 사건을 일으키는 주체는 다르지만, 그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들은 같다. 첫 번째 사건에 이어 두 번째 사건을 만난 독자에게는 아리아 변호사라는 새로운 인물이 합류하면서 이들에게 사건 해결 어벤져스라는 이름도 붙일 수 있게 된다.

 

특히 2권에서는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곳곳에서 등장인물들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아마 1권에서 시원하게 확인하지 못했던 그들의 배경이 2권에서 들려줌으로써 이들이 가진 상처와 인생을 사건 해결에 더 열정적으로 다가가게 한다. 마치 숨어 있는 비밀과 미스터리를 풀어가면서,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사건도 밝혀주고 등장인물들의 삶도 나아가게 하는 의미가 있을 듯하다. 아버지가 연루된 비밀조직 '레메게톤'의 사건을 밝히려는 프랑수아, 기억을 잃으면서도 그 재능을 뽐내는 김 건, 어머니의 후계자보다 프랑스 음식에 끌린 소주희, 그 누구도 끼어들 틈이 없이 완벽한 사건 해결을 위해 달리는 신영규,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여 그 활약을 기대하게 하는 아리아. 이들 앞에 닥칠 진짜 사건이 뭔지 알 수 없어서 그 기대감이 더 커지는 듯하다. 얽히고설키면서 서로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이들이지만, 그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것처럼 하나씩 새로운 인물이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고 등장하면서 분위기는 더 고조된다. 온갖 추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서, 지금 눈앞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의 진실을 파헤치고 싶어지게 한다.

 

프랑수아가 아버지의 친구를 찾아낸 순간 사건은 끝난 것 같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사건은 묘하게 그 끝이 보이지 않게 붙잡고 있다. 게다가 추방당할 뻔한 프랑수아가 위기를 모면하면서 다시 신포(신데렐라 포장마차)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한국을 구하기 위해 왔다는 프랑수아가 정면에서 마주할 사건의 진실은 무엇일지...

 

페이지가 너무 잘 넘어가면서도, 도대체 이 사건은 언제 시작되는 건가 싶은 마음에 자꾸 투덜거렸다. 전 장관이 방송 도중 죽어버리지를 않나, 살인자로 보이는 여자가 타이밍 좋게 빠져나가지를 않나, 추레한 남자 한 명이 비행기에서 묘하게 분위기를 바꾸지를 않나, 가면 하나 쓰고 인생 바꾸려는 여자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지를 않나. 무엇 하나 시선을 끌지 않는 게 없다.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에 한 지점으로 모여드는 방식이 추리소설의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다른 분위기를 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새로운 시리즈의 주인공들이 더 탄탄하게 사건을 마주하게 되었으면 하는 성장의 시간 같기도 하고, 언젠가 이 사건이 완벽하게 마무리될 때는 이들이 가진 상처들 모두 깨끗이 나아서 그들이 처리한 사건처럼 깔끔해질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마지막에 숨어서 보고 있던 '독 예술가'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하고, 아리아 변호사의 합류가 소설을 어디로 끌고 갈지도 궁금하다. 무엇보다 '레메게톤'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가장 궁금하겠지. 2권이 끝인가 싶었는데, 이야기가 점점 열린 결말처럼 보여서 이게 뭔가 싶었는데, 3권이 이어진다는 갈증 나는 마침표로 끝난다. 아우~

 

빨리 1권 마무리 하고 3권 기다려야겠다. 작가님, 빨리 3권 내놔요. 롸잇 나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혹시 내가,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딱 여동생만큼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결혼생활의 이상향을 보여주었던 여동생이 이혼을 언급했을 때는 충격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여동생이 그런 생각을 할 거로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시’자 붙은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역시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역시 시월드의 굴레는 벗어날 수 없는, 며느리의 고통 영역이었던가 싶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이미 영화에서 보여준 김진영과 시어머니의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보였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적응하면서 살아가기에도 힘든 게 결혼생활인데, 그 결혼생활이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의 관계에 머물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 때문에 더 힘들어진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답을 모르겠다. 그 어려운 문제가 어떤 것인지 이 고부가 보여준 것이다. 처음에는 좀 충격이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이런 대화(라고 쓰고 싸움이라고 읽는다)를 한다는 게 놀라웠다. 누가 봐도 ‘감히’ 시어머니에게 ‘대드는’ 며느리라고 여길 테니까 말이다. 한편으로는 왜 이런 충돌이 계속되어야 하는지 그 시작점을 찾게 되더라.

 

남편은 아내의 입에서 직접 어른들에 대한 거부와 부정과 분노가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해줘야 한다. 자식과 오래 알아온 부모님은 자기 자식의 허물에 더 너그럽다. 남편의 중재는 그렇게 간단한 이치에서 필요한 것이다. (슬기로운 B급 며느리 생활 173페이지)

 

행복해지자고 결혼했다. 남편과 아내 두 사람이 차곡차곡 만들어갈 하나의 가정을 상상하고 나아가고자 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시작으로 만들어져야 할 하나의 가정이 주변 사람들의 개입으로 전쟁터가 됐다. 이 전쟁에서 이긴 사람은 없다. 모두 상처 입고 나뒹굴어 피를 흘리고 있을 뿐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 전쟁의 시작이 ‘간섭’과 ‘관심’의 차이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나 같을 말을 오랫동안 해왔다. ‘간섭’과 ‘관심’은 한 끗 차이라고, 그 한 끗의 차이는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내가 건네는 게 관심이어도 상대가 받아들일 때 간섭이라고 느끼면 그건 간섭이라고 말하곤 했다. 내가 보이는 관심이 상대가 부담스럽고 과하다고 여기면 불편해진다. 그럼 나에게서 나간 관심은 간섭으로 모습을 바꾸어 상대에게 도착했다는 말밖에는 안 된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게 시월드와 며느리 사이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믿는다.

 

며느리 김진영은 남편 선호빈과 함께 두 사람이 주축이 되는 가정을 이루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부모에게 독립하지 못한 두 사람은 부모의 관심 안에 있었고, 부모는 그런 두 사람의 삶에 관여하고 계속 보살펴야 할 대상으로 여긴 듯하다. 특히 시어머니는 아들의 인생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아들 며느리의 태도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던 거로 보인다. 한번 시작된 김치 건네기는 언제나 싸움과 분노의 발단이 되었고, 며느리의 삶을 좌지우지해도 된다고 생각한 시어머니는 개인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집안의 화장대 위치까지도 간섭하며 계속 말하는 것이었겠지.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의 며느리 삶을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보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실 며느리로 살아가는 부조리함을 말하는 게 이 책이 처음도 아니지 않은가. 앞서 만난 몇 권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 ‘라떼’를 마시면서 강요하는 과거 여성의 삶이 충돌을 일으킨다. 나 때는 말이야... 시월드의 모든 말에 복종하고 며느리는 그 집안의 하녀처럼 살아온 시절의 이야기. 그 시절을 언급하고 강요하면서 따라주지 않는 며느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시작하면 갈등은 시작된다. 하지만 왜 그 시대가 기준이 되어야 할까 이해하기 어렵다. 그 시대의 며느리 모습은 잘못된 건데, 왜 그 모습이 기준이 되어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게 갈등의 발단이 되어 끝이 없는 전쟁을 일으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러니까. 서로가 인간적으로 존중받고 살아가야 하는 지금의 모습을 찾아야 하는 게 맞다.

 

사람들은 영화 〈B급 며느리〉보고 거의 두 가지 평을 내놓는다. 저런 며느리 얻으면 큰일 나겠다, 아니면 저런 시어머니 때문에 이혼하는 거다, 뭐 이런 비슷한 의미의 말들을 꺼낸다. 사실 이 책을 읽어도 비슷한 느낌이긴 하다. 이 책이 영화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니, 영화의 연장선에 있으니까. 하지만 왜 그 상황이 시작되었는지 말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전쟁이 시작될 때마다, 항상 그 시작을 찾고 싶었는데 말이다. 며느리 김진영이 정말 이상한 사람일까? 그냥 인간 김진영으로 살다가 선호빈의 아내 김진영이라는 호칭이 하나 늘었을 뿐인데, 그녀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은 낯설고 힘들어졌다. 그녀의 존재는 사라지고, 새롭게 형성된 가족 구성원의 하나로 머물기를 바라는 시선이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을 없애고자,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말들은 ‘B'급으로 취급받았다. 싸우고, 절연하고, 또 싸우고, 화해하면서도 분노의 찌꺼기는 남아있고.

 

막장드라마만 암 유발하는 건 아닌 듯하다. 며느리와 시월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고구마 한 박스 그냥 삼킨 것처럼 답답하다. 그럴 때마다 궁금하다. 우리 엄마와 나의 올케 사이에는 어떤 감정이 흐르고 있을까 싶다. 엄마에게도 ‘시’자의 냄새가 풍길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를 조금 다독거린다. 엄마에게도 딸이 다섯이나 있다고, 사람들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그나마 좋은 관계가 유지된다고. 괜히 친해지려고 애쓰고, 잘하려고 아등바등하다가 지레 질려 나가떨어진다고. 안부 전화 한번 안 한다고 투덜거리지 말고 안부가 궁금한 사람이 전화하면 되는 것이고, 쓸데없이 전화 타령하지 말고 용건 있을 때 통화하면 되는 것이라고. 적당한 관심은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이겠지만 적당한 선을 넘는 간섭은 서로를 피곤하게 하는 것이니 조금만 무관심해지라고 말이다. 며느리 김진영의 시어머니를 보면서 느낀 건, 아들 며느리에게 관심을 넘어선 집착에 스스로 분노를 쌓아가는 것 같았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된 아들의 자리를 인정하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당신이 돌봐주면서 길렀던 아들의 모습으로만 뿌리박혀 있으니 그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고통 속에 자기를 가두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싶은. 무리하면 탈이 난다. 마음이 넘쳐도 탈이 난다.

 

과연 중간이 있었을까? 이제 보니 우리는 중간 지점에서 만난 게 아닌 것 같다. 각자 자신이 서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성숙한 관계는 ‘나를 위해 네가 변해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줘’라고 말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동안 서서히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었던 것 같다. 눈치채지 못하게, 서서히, 젖어들듯이 말이다. (슬기로운 B급 며느리 생활 238페이지)

 

읽을수록 짠하다. 그러면서도 시원하다. 며느리니까 참아야 하는 건 없다. 하고 싶은 말 담아두기만 할 이유도 없다. 인간 대 인간으로, 새로 어우러진 가족이 된 일원으로 서로를 대하면 되는 일이다. 며느리 김진영이 투쟁하듯 이뤄낸 현재의 관계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아진 관계의 모습을 보니 이 투쟁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미 있는 전쟁이었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며느리 이미지가 바뀌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리’라고 하면서 ‘의무’를 강요하지 말고, 서로를 존재 자체로 인정해주면서 같이 살아가야 할 일이다.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다. 이미 웹툰이나 후속작으로 그 후의 이야기까지 읽었지만, 아무리 많이 봐도 다시 보게 된다.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너무 현실 속 이야기들이라 생생하고 또 생생하다. 영상으로 만들어지면 또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0-05-13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느라기]가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요? 우앗... 저는 보기도 전부터 고구마 백 개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이 밀려오네요.

모든 시어머니들이 ‘나는 달라, 나는 좋은 시어머니야‘라는 생각을 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저희 엄마 포함해서요. 저는 그럴 때마다 ‘엄마, 그래봤자 엄마는 시어머니야‘라고 말하곤 합니다.

구단씨 님이 정말 정확한 지적을 하신 것 같아요. 원인을 알아야 해결할 수 있는 거잖아요. 한 여자와 다른 한 여자가 며느리와 시어머니로 만났을 때 왜 그렇게 갈등을 일으켜야만 하는건지, 우리는 그 시작을 찾아서 부숴버려야 하는건데 말입니다.

구단씨 2020-05-13 14:04   좋아요 0 | URL
20분짜리 드라마로 만들어진답니다.
방송하게 될지 웹드라마로 보여줄지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옆에 사이다 캔맥주 한잔 가져다 놓고 보고 싶은 드라마여서 기다릴 겁니다요. ^^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남자 사람 포함해서요. 남자들이 하나같이 얘기해요.
˝우리 엄마는 안 그래.˝
그렇게 말하는 너네 엄마가 더 그러더라, 라고 말하곤 했거든요.
실제로 저희 엄마도 아들 며느리 있는데요. 똑같이 말씀하세요. ˝나는 안 그래, 야.˝
그래서 제가 옆에서 자꾸 말씀드리죠.
엄마도 그럴 수 있다고. 그래도 딸 가진 엄마니까 며느리 마음 많이 헤아려주시라고요.

 

 

 

 

가끔 감정이 폭발할 때가 있다. 험한 말을 막 쏟아내고, 앞뒤 가리지 않고 지금의 것만 보면서 순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순간들 말이다. 작정하고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어느 순간 내 안에 머무는 성격이 아닐까 싶다. 때로는 이 성격이 어떤 일을 그르치게 만들기도 하고, 중요한 순간에 현명하지 못한 선택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이런 시행착오의 순간이 한 번씩은 스쳐 지나가기도 하는 거 아닐까? 그럴 때마다 내 안의 내려놓음, 차분한 마음을 갖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니, 갖고 싶은 게 아니라 필요하다. 이 책에서는 이 순간을 내면의 고요라고 말한다. 스토아 철학에서 유래한 단어로 우리는 스틸니스라고 부른다.

 

살면서 굳이 이 스틸니스가 필요한 건지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소개해주는 여러 인물 사이에서 공통된 것이 바로 스틸니스였다. 타이거 우즈나 나폴레옹, 윈스턴 처칠이, 안네 프랑크, 케네디 대통령 등 유명인에게 내재한 내면의 고요가 그들의 성공과 성장을 이끌었다. 다른 누구와 견줄 수 없는 경지의 인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현명하고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정신을 만든 것이다. 특히 한 나라의 지도자였던 케네디 대통령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했던 나폴레옹 같은 이들에게는 냉정한 판단력이 필요했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판단하면서 흥분하는 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이야기들에, 우리 삶에서 스틸니스의 영역이 얼마나 광대하게 작용하는지 알 것 같다.

 

나폴레옹이 받은 편지를 바로 뜯어보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기억에 많이 남는데, 그에게 오는 편지를 나중에 뜯어보라고 지시하고, 나중에 그 편지를 뜯어볼 때쯤이면 편지 속에 적힌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결된 후라고 한다. 그가 개입하지 않아도 저절로 해결되는 일들에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까운 시간을 저절로 해결될 문제들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들이 어떤 양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고민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니 해결되는 것들. 안다. 당장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지만, 결국은 해결된 문제들이라는 것을. 그러면서도 지금 당장 어떻게 하지 못하면 아등바등 몸부림을 치면서 조급해하는 게 또 우리의 성격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렇게 조급하게 발을 동동 굴러봤자, 해결될 것은 해결되고 해결되지 않을 것은 끝까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마주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인정하느냐에 그 순간이 어떻게 흘러가느냐 하는 문제였다. 마음의 고요가 우리가 부딪히는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시시때때로 선택의 순간에 서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현명하고 냉정한 판단으로 좋은 결과를 도모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아니었나 싶다. 감정적으로 흥분하고 결정해봤자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날 수는 없다는 것.

 

요즘의 나에게 때맞춰 잘 와주었다고 느끼게 하는 책이었다. 갑작스러운 일로 서울에서 몇 주를 보내고,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예정에 없던 일이다 보니 집안일을 제대로 처리하고 오지도 못했고, 짐도 제대로 꾸리지 못해 필요한 것들을 챙기지 못했다. 일상이 불편했고, 무엇보다 해결되지 않은 현재 상황이 불안만 증폭시켰다. 어떻게 하면 될까 계속 걱정하면서도, 막상 명확한 답이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기에 또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살면서 가장 싫어하는 말이 ‘어쩔 수 없지’였는데, 지금 이 상황에 가장 분명하게 할 수 있는 말이 그거였다. 어쩔 수 없지. 저자가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들이 처한 다양한 상황과 그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 보면서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냉정한 시선과 판단보다는 감정의 시선으로 결과를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 고요한 내면을 마주하면서 잘못된 선택을 할 리가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또 순간순간 감정이 앞서는 행동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고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또 한 번 시행착오를 반복하더라도 현명한 판단이 무엇인지 다시 배울 것만 같다.

 

저자는 앞서 나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들려주면서, 그들이 내재한 고요의 모습을 보게 했다. 집중력과 창조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주변의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에 파고드는 모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말한다. 그 힘을 스틸니스라고 부르며, 그들은 내면의 고요 힘으로 인생을 이끌어나간다.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그들의 성장을 이끄는 좋은 과정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 안에 스틸니스를 장착하는 게 쉬워 보이는데, 사실 처음부터 내면의 나를 잘 아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이 방법을 배우는 게 문제의 해답이 되면서, 우리가 잘 성장하고 좋은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열쇠가 되는 거겠지. 이 책에서 처음 들은 이름인 야구선수 숀 그린은 슬럼프를 겪으면서도 조급함보다는 불교의 사상에 기댔다고 한다. 마음이 급해지면 시선이 좁아지기 마련인데, 그는 머릿속을 비우면서 내면의 고요를 찾았던 거다. 빌 게이츠가 혼자 숲에 들어가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 윈스턴 처칠이 틈틈이 그림을 그리는 것, 나폴레옹이 편지를 바로 읽지 않으면서 중요한 일을 고를 수 있었던 것 등을 보면 무슨 상황에서건 우선순위를 제대로 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것 같다. 집중해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을 가장 잘 나아가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고만고만해 보이는 여러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그 문제들은 저마다 자기가 중요하고 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는 그렇게 우선순위를 경쟁하는 목소리와 신념에 이끌린 채 너무 많은 방향으로 끌려간다.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일 앞에는 수많은 장애물과 적이 깔려 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선하고 악한 충동 사이에서, 야망과 원칙 사이에서, 우리가 되고 싶은 존재와 실제로 그 존재가 되기까지 겪어야 할 어려움 사이에서 격렬한 내전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이러한 전투에서 이러한 전쟁에서 고요는 아주 많은 것들이 달려 있는 강이자 철로의 교차점이다. 고요는, 열쇠다.

그러니까 고요는, 거의 모든 문제를 푸는 핵심이다.

더 나은 부모, 더 나은 예술가, 더 나은 투자자, 더 나은 운동선수, 더 나은 과학자,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 인생에서 우리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는 열쇠인 것이다. (스틸니스, 23~24페이지)

 

우리 안의 스틸니스가 발휘하는 때는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직면했을 때다. 그러니 평소에 얼마나 내면의 고요를 잘 찾아낼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인생에서 마주하는 많은 문제와 선택의 순간을 현명하게 해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가 아직 다 찾지 못한 내 안의 가능성을 찾게 해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신, 영혼, 몸의 영역이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 저자는 우리의 정신을 시끄럽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우리의 영혼이 분노나 욕망에서 멀어져야 하고, 무엇보다 생각한 것을 몸으로 움직이며 실천하면서 우리 안의 고요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산책이나 걷는 것, 충분한 휴식과 수면은 우리 몸을 진정시키고 편하게 만든다. 그때 생기는 고요가 또 한 번 우리의 성장을 위한 발판이 될 것이다.

 

누구나 바란다. 내 인생이 더 완전해지기를, 누구보다 만족한 삶이었기를. 언젠가 죽음을 마주할 우리지만, 지금 마주해야 할 현재의 우리 하루하루가 중요하다. 그래서 지금을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 순간을 잘 채우고 싶어진다. 어떻게 하면 잘 살아가는 것인지 묻고 싶을 때마다, 지금 이 순간을 건너가는 방법이 듣고 싶을 때마다 펼쳐보고 싶은 책이다. 좋은 문장이 너무 많았고, 특히 지금처럼 힘들다고 여기는 때 내 안의 고요를 찾는 것만이 답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당장 눈앞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서 조급해할 게 아니라, 한 발짝 떨어져서 지금의 상황을 마주하는 시선을 가지고 싶다는 바람이다. 거리를 두니 보이는 것들, 시간을 두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을 거다. 그렇게 우리는 내면의 고요를, 현명한 판단을 하나씩 찾아가면서 인생이 흐르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