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피해의식과 결별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결심하라는 것. 무엇보다 등 떠밀려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아닌 자기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고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 삶에 균형과 평온을 가져올 것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274페이지)


글쎄, 버티는 삶이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겠다. 근데 정의하기 어려운 그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고 하면 참 모순이기도 하겠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틈틈이 찾아오는 절망의 순간을, 버티지 않으면 어떻게 건너갈 수 있겠는가. 절망의 근원을 찾아내 원망을 쏟아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나뿐일까? 하지만 그렇게 원망한다고 해서 또 무엇이 달라질까. 갈팡질팡, 힘들다가 괜찮다가 하는 마음을 다스릴 방법이 뚜렷하지 않은 것 같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예민해지고, 신경이 곤두서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날카로워지는 건 싫고. 그러니까. 신경질이나 짜증, 찡그린 얼굴이 내 모습이 되어가는 게 싫은데, 그게 쉽게 변할 수도 없는 방식 같아서 화가 나는 일 반복된다. 지금 이 상황을 대하는 자세가 변하면 될 것 같은데, 그건 또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그가 쓴 모든 글을 읽은 건 아니다. 책으로 출간한 몇 권, 그 안에서도 몇 문장을 읽으며 방송에서 보는 그의 이미지와 말투가 그대로 옮겨간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이 책을 보고 드는 생각.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는 또 어려운데, 글의 분위기가 변한 느낌이다. 그 변화가 싫거나 이상하지는 않다. 오히려 삶의 어떤 순간을 건너온 그가 세상을 대하는 시선이 달라진 게 보여서 흥미로웠다. 어쩌면 그가 평범한 한 사람이라는 걸 느끼게 된 게 더 좋았다고 해야 할까. 그는 항상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절대 그의 생각을 바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은 그의 모든 것이고, 그걸 부정하려면 차라리 부러져버리겠다고 말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던 시간. 이미 다 알겠지만, 그는 생사를 오가는 큰 시련을 겪었다. 힘들다는 항암 치료까지 마치고 건강해졌다. 어느 날 방송에서 다시 본 그는 변해있었다. 그와 결벽증은 너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먼지 한 톨 용서할 수 없는 그의 자세가 너무 익숙했는데, 그는 이제 조금 흐트러진 상태를 즐기고 있는 듯했다. 말투도 그대로고 문장도 그대로인데, 어딘지 모르게 그가 변했다는 건 그냥 느껴진다.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마치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를 시간을 걷는 사람처럼,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천천히 꺼낸다. 차분하게 말한다. 간절하고 친근하게.


영화 <애드 아스트라>에서 배우 브래드 피트는 태양계 경계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절대적인 고독 앞에 혼자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비할 수 없이 가치 있다는 걸 깨닫고 지구로 귀환한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간단한 걸 우주 끝까지 가서야 알 수 있냐며 조소한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몸으로 무언가를 깨닫는 데는 늘 큰 비용이 든다. 무려 암에 걸리고서야 그걸 알았냐고. 그러게 말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109페이지)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이 말이 이렇게 웃음이 나고 용기가 되는 말인 줄 처음 알았다. 입버릇처럼 죽겠다고 말하고, 미칠 것 같다고 머리카락 쥐어뜯는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그의 말처럼 망했다는 말도 저절로 나올 것이다. 그런데 망하려면 아직 멀었단다. 그래, 아직 망하지도 않았고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이 책은 총 3부로 나뉘었다. 첫 장은 그의 투병 경험을 말하고 이후 달라진 그의 시선을 들려준다. 나는 그가 언제나 당당하게 말하고 아무런 불편함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항상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방송에서 그런 이미지로 보일 수 있을까 싶었으니까. 심지어 그가 잘못했다고 해도 말로 싸우면 그를 이길 수 없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이미지는 그가 살아온 방식의 자부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살아온 시간을 뒤로하고 혼자였던 시간을 후회한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삶의 방식을 이제는 다르게 보려고 애쓴다. 오랫동안 혼자 힘으로 살아왔기에 타인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잊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안쓰러움을 느껴도 될지 모르겠다. 그 시간과 그 방식을 통과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감정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오늘을 사는 또 다른 이에게 말한다. 절망에 빠지거나 도움을 기대할 곳 없는 이들이 자신과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를 바란다고. 그에게 고민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답장을 쓰는 그의 마음이 문장에서 그대로 읽힌다. 그만의 방식으로, 달라진 그의 시선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거다. 사람들의 고민과 절망을 들을 때마다 그가 찾은 해법을 들려준다. 불행을 인정하는 것. 삶에 언제나 공생하는 불행이란 녀석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이 절망과 고통을 무너뜨리는 것일 테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불행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에서 우리가 버티고 이기는 방법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불행이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희망도 있다고, 우리 삶이 언젠가 빛을 낼 그 순간을 기다리고 기원하며 살아가는 날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이 귓가에 남는다.


불행한 일을 겪으면 사람의 머릿속은 그렇게 된다. 그리고 불행의 인과관계를 따져 변수를 하나씩 제거해보며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가장 그럴싸한 대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살고 싶다는 농담, 54페이지)


그래서 만약에, 라는 말은 슬프다. 이루어질 리 없고 되풀이 될 리 없으며 되돌린다고 해서 잘될 리 없는 것을 모두가 대책 없이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만약에, 는 슬픈 것이다. (살고 싶다는 농담, 60페이지)


두 번째 장과 세 번째 장은 그동안 그가 그동안 만나왔던 영화나 책, 시사적인 뉴스들을 가져와 삶의 바닥을 치는 순간에도 괜찮다고 말하는 의미를 전하고,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인간의 삶을 강조한다. 영화 속 인물과 실존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불행을 탓하는 일이 얼마나 인생을 안타깝게 만들고야 마는지 보여준다. 닉슨 대통령의 몰락, 천재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자기를 몰락시킨 연인에 대한 원망과 후회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것처럼 불행과 피해의식은 우리 삶을 또 다른 불행으로 밀어 넣는다. 비단 이렇게 영화 주인공이나 과거의 인물들에 빗대지 않아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가 겪는 불행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그 불행의 원인을 찾아내 원망도 하고 싶은 게 인간일지도 모르지만, 정말 그렇게 했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또 다른 후회뿐이라는 것을. 그의 말처럼, 우리가 불행한 일들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다는 생각 때문에 불행해진다는 게 무슨 말인지 너무 잘 알겠더라. 반복되는 절망과 괴로움, 고통 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게 불행을 원망하는 거로 생각하기 쉽다. 내 불행의 화살이 향할 곳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 불행의 화살을 쏘기만 하면서 살 텐가. 불행의 생각에서 멀어지는 것만이 불행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나를 바라보는 객관성을 키우는 게 불행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도 말한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도 그 바닥에서 올라와 역작을 남긴 니체의 이야기를 하면서, 불행을 직시하고 객관화하면 이 위기 극복의 실마리를 찾는다고 조언한다.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자기 객관화로 불행을 다스린다면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과거의 불행을 발판 삼아 현재의 건강한 삶이 유지되게 할 수도 있다는 것.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다 알 수도 없지만, 살아가야만 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가는 인생을 만들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들린다. 불행이나 피해의식 같은 것이 우리 삶을 짓누르는 무게 따위 느끼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고 용기를 준다. 각자의 불행은 너무 다양하고, 그 불행을 해결할 방법은 본인만 안다. 그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한 번 더 버티는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살아가야 한다고.


사람들은 아프기 전과 후의 내가 다르다고 말한다. 나는 뭐가 달라졌다는 것인지 조금도 모르겠다. 하지만 글로 써서 말하고 싶은 주제가 달라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나는 언제 재발할지 모르고, 재발하면 치료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 항암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래서 아직 쓸 수 있을 때 옳은 이야기를 하기보다 청년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남기고 싶다. (살고 싶다는 농담, 217페이지)


오늘도 버티는 삶인 모든 이들에게 건네는 그의 위로가 담백하다. 섣부른 오지랖이나 조언이 아니라, 그 불행을 건너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로 들린다. 살기로 한 이들이 충분히 닮아도 좋을 삶의 자세가 그의 문장 안에 담겨 있다. 그의 문장에 담긴 따뜻함이 더 빛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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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와 혼란을 동시에 맛보여준 소설이 아닐까 싶다. 작가 조영주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작가의 작품을 직접 완독까지 한 경우는 없었다. 언제나 그 입소문의 진가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까 싶어 궁금하기만 하던 차에 이 작품 『혐오자살』을 만났다. 뭔가 잔뜩 긴장하면서 읽기도 했다. 무엇보다 동명이인의 등장과 사건이 시간을 순서대로 보여주지 않아서 기억하면서 읽어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읽어가면서, 점점 결말에 다다르면서 느껴지는 그 사건의 진실 앞에서 만족감을 만났다.


자고 일어난 명지는 어젯밤의 일이 기억난다. 명지는 어젯밤에 남자 친구 김준혁을 죽였다.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자기가 김준혁을 죽였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남자 친구가 죽은 현자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을뿐더러, 모두 그가 자살했다고 말한다. 현재 그가 처한 신체를 비관해서 스스로 죽었을 거라고, 그런 일이 흔한 세상이니 자살이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14년 동안 김준혁을 만나온 명지는 그가 왜 자살해야 하는지 믿을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가 죽인 게 아니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제 죽은 사람은 잊고 새로운 김준혁과 잘 만나다가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죽은 김준혁과 현재 살아있는 김준혁. 두 명의 김준혁은 명지의 인생을 채운 남자다. 한 명은 명지의 청춘을 채운 남자, 한 명은 명지의 첫사랑이자 최근 재회한 남자. 소설은 이 두 명의 김준혁을 등장시키고, 또 김준혁이 죽은 날을 중심으로 그 전과 후의 이야기를 교차로 들려준다. 죽은 김준혁은 살던 집을 두고 허름한 동네의 허름한 아파트로 이사한다. 집을 중개했던 김 사장은 그의 형편에 딱 맞는 아파트를 소개해주고, 그 집에서 돈을 낭비하지 않게 충고 아닌 충고로 생활방식까지 정해준다. 하지만 그는 이사 온 첫날부터 그 집에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옆집에도 이상한 사람들이 드나들고, 위층 아래층 심한 층간소음에 돌아버릴 지경이다. 부동산 김 사장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경비실 정 이사에게도 말해보지만, 매번 그만 이상한 사람이 될 뿐이다. 주변 사람들 모두 그를 경계하고, 그를 볼 때마다 놀란다. 마치 소인국에 들어간 거인처럼, 다들 그를 멀리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본다. 이제 그는 더는 이곳에서 살 수가 없다. 일도 그만두고, 면접 보는 것마다 탈락이고,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이 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할 것만 같다. 안 되겠다. 마지막으로 명지를 한번 만나야겠다.


그랬다. 남자 친구 김준혁이 마지막으로 한번 명지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던 날, 명지는 그를 만났고 그가 죽었다. 소설은 명지의 착각 아닌 착각을 시작으로 김준혁의 죽음을 차근차근 파헤친다. 사건 8개월 전의 죽은 김준혁의 시간부터, 사건 일주일 전의 백명지의 시간과 사건 한 달 전의 형사 김나영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채워진다. 잘 짜인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도 들고, 누구도 모르는 자기만의 시선을 엿보는 재미도 있다. 무엇보다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모를 각자의 사정과 인생이 하나씩 들려올 때마다 한숨이 쉬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하며, 왜 내가 원하고 좋아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닌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보여주기 좋은 모습이어야만 하는 것인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 또한 이런 생의 진리 아닌 진리 같은 시선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게 무섭기도 하다. 어쨌든 이 소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나 자신과 다른 시선으로 나를 보면서 인간 혐오를 쌓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혐오의 이유를 마주했을 때 분노하고 흥분하면서도 어쩌면 우리는 이런 혐오의 감정을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지 묻고 싶어진다. 나는 정말로, 단 한 번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혐오를 가져본 적이 없는지를.


남자 친구 김준혁의 장례식이 끝나고 명지는 그가 살던 집에 가서 유품을 정리한다. 방문 목적은 유품 정리라고 하지만, 그녀 스스로 김준혁의 살인자로 생각했던 적이 있었기에 이 찝찝한 감정을 털어내고 싶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의 집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떨어져 죽었다는 발코니에서조차 그의 지문이 없었다. 그는 발코니에서 떨어져 죽었다는데, 어떻게 죽었기에 아무런 흔적이 없느냔 말이다. 아무런 증거도 없으니 명지의 초조함은 커져만 가고, 그 와중에 형사 김나영이 이 사건의 수상함을 감지하고 파고들기 시작한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동명이인에, 시간을 앞뒤로 왔다 갔다 했는지 궁금해도 재밌는 소설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뭔가 하나씩 더 드러나면서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범인의 실체에 다가가는가 싶으면 뭔가 이상한 낌새에 범인을 단정할 수 없게 된다. 죽은 이들과 죽은 이들에게 남겨진 메시지 '이 나라를 떠나'는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어서 끝까지 읽기 전까지는 그 확인을 마칠 수 없다. 등장인물들 또한 본명과 함께 그들의 별명으로 같이 나오는데, 아마 이 부분에서 이미 복선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미스터 블랙으로 불리던 김준혁, 죽은 김준혁의 친구 레드, 백설 공주로 불리던 백명지, 처음부터 계속 등장했던 난민이라는 신분. 언뜻 보면 이 단어들의 공통점을 금방 찾지 못할 것 같지만, 서서히 드러나는 인간의 묘한 심리가 가슴을 파고든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우리의 불행과 고통과 힘듦을 타인에게서 찾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너 때문에,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없으면 금방 해결되고 괜찮아질 것 같은... 작은 편견으로 시작했던 거부의 감정은 이제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산처럼 쌓여 금방 무너지지 않는 혐오로 자리 잡는다. 한마디로 표현하고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이 가지는 그 묘하고 두려운 감정의 적나라한 민낯을 그대로 비추는 작가의 방식이 흥미롭다. 그래서 추리소설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조각을 맞춰가는 재미가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혐오가 얼마나 뿌리 깊게, 사소한 것에서부터 자라나기 시작했는지 차근차근 보여주면서,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혐오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왔는지, 그 혐오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묻기도 한다. 그러면서 작가의 전작들에 등장한 형사 김나영 시리즈의 한 권으로 채워 넣는다. 추리소설의 재미와 메시지를 동시에 품고, 아직 형사 김나영의 다른 활약을 못 만난 독자가 있다면 당장에 확인하고 싶게 한다. 전작 『붉은 소파』와 『반전은 없다』와 같이 읽는다면 더 즐거울 것 같다. 작가의 말처럼, 두 작품 사이에 위치한 이 이야기의 여운을 더 느끼고 싶다면 세 작품 같이 만나는 시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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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받아들인 적은 없다. 그렇다고 마냥 무겁게만 대하기에는 뭔가 이야기를 덜 한 느낌이라 개운하지 않았다. 꺼내기 어려운 주제이지만, 잘 듣고 싶은 마음이 있기에 자주 접하고 싶기도 했다. 나와 내 가족이 경험하게 될 어떤 장면을 미리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조금 다른 의미로 보자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죽음이 내가 알던 것보다 다양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기도 했다. 그 죽음의 다양함을 확인하는 게 세상 사람들의 모습 전부는 아니겠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우리 살아가는 곳곳의 의미를 누군가의 죽음으로 알게 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사실 내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죽은 사람이 만든 냄새가 가져다줍니다. 그 냄새를 극적으로 없앴을 때 내 비즈니스는 성공하지요. 대가로 살아 있는 사람이 나에게 돈을 지급합니다. (죽은 자의 집 청소, 6페이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죽은 자의 시간은 멈췄으니, 남겨진 자들은 죽은 자를 보내는 일과 죽은 자가 남기고 간 자리를 정리해야 한다. 보통은 그 일을 가족들이 맡아서 한다. 장례를 치르고, 죽은 자가 살았던 방(집)을 정리하고 청소한다. 하지만 혼자 있다가 죽는 사람은 누가 정리해줘야 할까.


여러 가지 사연으로 고독사하는 이들이 머물다 간 곳을 청소하는 사람. 저자는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한다. 처음 일반청소로 시작했던 일이 점점 찾아주는 사람이 많아지고, 청소의 범위나 사연이 다양해지면서 어느새 그는 특수청소의 전문가가 되었다. 일이 다양해지고 힘들겠지만, 그만큼 그의 손을 거친 장소는 깨끗해졌다. 그리고 그 특수청소 안에서 그는 죽은 자의 집을 청소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가 청소하면서 읽은 그 공간의 주인들 삶이 조금씩 전해진다. 일명 고독사. 그 공간에 혼자 머물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조금씩 보인다. 개인적인 감정을 담아서 일하면 안 되겠지만, 인간인지라 보이는 것들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공간의 시간이 느껴지면서, 덩달아 연결되는 또 다른 생각들까지 같이 읽게 된다. 죽음이 우리 삶, 우리 사회와 절대 떨어뜨려 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거다. 누군가는 죽고 우리는 그 누군가를 애도하며 살아간다. 언젠가 나의 죽음을 두고 누군가의 애도를 받기도 하겠지. 만약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살다가 죽은 게 아니라면, 어딘가에서 혼자 맞이하는 죽음이라면 나도 저자와 같은 특수청소업자의 마지막 인사를 받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어떤 고독사의 얼굴들을 만났을까. 비슷한 죽음 같았다. 죽음 이후의 청소하는 것도 다 똑같은 거 아닌가 싶었지만, 달랐다. 죽은 지 며칠, 몇 달 후에 발견되었다는 시간 차이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저마다의 사정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떠올렸다. 누군가의 죽은 자리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담하기도 했고, 마치 오늘 아침에도 청소한 것처럼 분리수거를 해놓고 죽은 이도 있었다. 누군가는 죽기 전에 청소 가격을 문의하기도 했다. 읽으면서도 의심스러웠는데, 결국 그 의뢰인(?)은 자기 죽음 이후를 정리하는데 얼마의 돈이 드는지 그에게 묻고 싶었던가 보다. 보통은 죽은 이의 가족이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고, 세입자가 머물다 간 장소를 청소하고 복구해주기를 바라는 집주인이나 부동산 중개업자의 의뢰도 있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죽은 이가 머물던 자리를 정리하는 것이지만, 애도의 색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싶다. 가족이 떠나서 슬픈 마음 담은 정리와 재산 보호에 목적을 둔 이들의 의뢰가 완전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가끔은 경찰이나 검찰에게 의뢰받는 범죄 현장 정리도 있다. 범죄 피해자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장소에 다녀오기도 한다.


주로 가난한 이가 혼자 죽는 것 같다. 그리고 가난해지면 더욱 외로워지는 듯하다. 가난과 외로움은 사이좋은 오랜 벗처럼 어깨를 맞대고 함께 이 세계를 순례하는 것 같다. 현자가 있어, 이 생각이 그저 가난에 눈이 먼 자의 틀에 박힌 시선에 불과하다고 깨우쳐주면 좋으련만. (죽은 자의 집 청소, 47페이지)


TV 뉴스에서나 보던 소식을 저자의 입으로 듣는 느낌이 달랐다. 혼자 살던 노인이 죽은 지 며칠 후에 발견되었다는, 세입자의 월세가 안 들어와서 가봤더니 벌써 죽은 지 몇 달은 되어 백골 형태로 남아있었다는 등의 이야기들. 저자가 방문하는 장소들의 사연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혼자 살다 죽은 자연사에 더해진 스스로 선택한 죽음의 사연도 겹쳐 있다는 것이다. 고독사의 현실을 마주하면서 확인하게 되는 건, 지금 우리 사회의 민낯이었다. 자기 존재를 죽음의 냄새로 먼저 알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씁쓸했다. 죽음의 현장에서 맡아지는 냄새를 온갖 수식어로, 그대로 표현하고 싶어도 적당한 표현이 없을 것이다. 죽은 사람은 그 자리에 없지만, 죽은 상태로 오래 방치되었다는 사실을 냄새로 알리는 듯하다. 방호복과 신발 위로 신은 덧신, 방진 마스크와 방독마스크, 의료용 장갑과 청소 소독 용품까지 챙긴 저자의 발걸음 무게를 알 것 같다.


세대를 가리지 않은 쓸쓸하고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죽음이 어느 사람인가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일이 아님을 깨닫는다. 죽음을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것도 안다. 목숨을 내려놓기 바로 직전까지도 살아보려고 했던 흔적들이 집안 곳곳에서 발견된다. 죽은 이들에게서 나온 피와 오물, 여러 가지 유품에서 죽은 이들의 생전 일상을 유추하기도 한다. 대개 가난한 이들이 혼자 죽었으며, 가족이 아닌 채권자들이 안부를 묻는 경우가 많았다. 유품이나 쓰레기에서 죽은 자의 정보가 담겨 있었다. 죽음에 다다르게 된 이유를 유추하게 되는 증거이기도 했다. 방바닥에 놓여있던 자기계발서에서 위로받고자 했던 누군가를 떠올린다. 병원 처방전에서 죽은 자의 몸이 어땠을지 그려보면서, 신문광고 속의 구인란을 눈여겨보던 어느 인생을 생각한다.


그가 보고 확인하는 죽음의 흔적에서 삶을 생각하게 된다는 게 아이러니이자, 저자가 이 기록을 남기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남의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은 무게감에,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사실과 기록하는 이의 감정까지 들여다본다. 1인 가구와 고령 인구가 늘어나고, 매 순간 가계 빚이 사상 최고점을 찍는 현실의 암담함이 저자의 기록과 연결하여 생각하게 한다. 나는 아직 고령이 아니지만 죽음을 아주 먼 일로 생각할 수도 없게 하는 이야기에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고독사가 나이 성별 따져가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고독사의 공간이 아닌 쓰레기 집을 청소하는 의뢰가 올 때면 안도하기도 한다. 의뢰가 들어오는 쓰레기 집이 자살이나 고독사의 전조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말이다. 그런 집을 치울 때면 누군가 다시 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외치는 것처럼 들릴 것 같다. 나를 옥죄던 이 공간을 치우면서 다시 살아갈 의지를 만드는 기도같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좋은 것만 생각할 수는 없다. 변기를 꽉 채운 똥을 장갑 낀 손으로 퍼내거나 오줌이 가득 찬 패트병을 볼 줄 누가 알았으랴. 고양이 사체 몇 개를 치워야 했던 순간은 또 어떻고. 그럴 때면 치우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그런 공간에서 살아야 했을 누군가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내 옆에, 내 공간에 자꾸만 뭔가를 쌓아가는 일. 저장 강박증은 조금 더 관심 두어야 할 현대인의 질병이 아닐까.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도기용 광택제를 뿌려서 변기와 세면대를 천사장 가브리엘의 이빨이라고 할 만한 수준으로 하얗고 눈부시게 닦아놓으면 마음이 참 뿌듯해진다. 더러움이나 불쾌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 자리엔 그저 순수하고 충만한 행복이 남는다.

어째서인지 인간의 마음도 더러운 화장실 청소처럼 얼마간 곤욕을 치르고 나면 잠시나마 너그러워지고 밝아진다. 평소 우울감에 시달려 단순하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화장실 청소를 추천하고 싶다. 그 화장실이 더럽고 끔찍할수록 더 좋다. (죽은 자의 집 청소, 220~221페이지)


"누군가의 죽음을 돌아보고 의미를 되묻는 이 기록이 우리 삶을 더 가치 있고 굳세게 만드는 기전이 되리라고 믿는다"는 작가의 말이 무엇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저절로 느껴진다. 저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생계를 이어가지만, 그의 생계를 책임지는 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다시 삶을 생각한다. 죽음의 공간을 청소하면서 마음속 청소를 한다. 위로가 된다. 죽음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묻는 방식이 누군가가 죽은 공간을 청소하는 일이라니 놀랍기도 하지만, 막연하게 생각했던 죽음의 모습들을 보니 세상을 더 깊게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은 개인의 일이기도 하지만, 그 죽음에 이르는 환경과 감정의 문제는 개인만의 일이 아니기도 하다. 사회가 같이 묻고 답을 찾아가야 할 많은 일 중의 하나를 이렇게 마주한다.


저자의 말처럼, 죽음이란 게 참 신비하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면서 익숙하게 마주하는 죽음의 흔적이 지겨운 밥벌이의 고충으로 느껴질 법도 한데, 저자는 그 시간에 죽음의 곁을 들여다보고 삶의 생생함과 행복을 찾아간다. 오늘, 내 앞의 사소한 것들이 더 귀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시선 그대로를 배우고, 죽음 앞에서 삶이 더 절실해짐을 확인한다. 우리는, 우리 인생은 너무도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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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0-09-10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이들에게 둘러쌓여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는 그런 죽음의 장면. 그게 제가 꿈꾸는건데요. 쉽지않겠죠. 내 죽은 뒤의 자리를 스스로 정리하고 준비할수 있는것 누구에게나 오는 축복은 아니겠죠. 정말 죽음은 예측불허이므로 살아있는 오늘 하루가 소중해집니다. 구단씨님의 글로 죽음의 자리를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구단씨 2020-09-14 16:01   좋아요 0 | URL
저는... 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장면을 기대하다가도, 정말 누군가에게 악담을 들으면서 떠나는 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요. ^^ 혹시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나쁜 사람으로 기억될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지 문득 걱정되기도 하더라고요.
죽음으로 바라본 생의 의미를 들려주는 이야기에 한참 시선이 멈춰있었네요...
 


지독하게 무심했던 것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중략) 그러니 무표정했던 삶이 조금 환해졌달까. 무채색 세상이 유채색으로 칠해졌달까. 묵혀뒀던 오감이 자극된달까. 별것 아닌 일상조차 조금 특별해졌다. 손이 닿은 딱딱한 액정 속 디지털 세상이 아닌, 숨이 닿는 지근거리 이야기들이라서.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301~302페이지)


겪어봐야 안다. 세상일 대부분이 그렇다. 그중에 경험으로 가장 잘 알 수 있는 게 누군가의 마음이자 살아온 시간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군가에게 이해한다는 말을 섣부르게 꺼낼 수 없어질지도 모른다. 왜냐고? 똑같은 경험을 하기 전에는 상대의 마음을 그대로 다 느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이해한다는 말을 해왔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고 아프고, 제도의 불편함을 느끼고, 상실의 경험을 하고, 시험에 탈락하기도 하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일이 누군가에게 이해와 공감을 부를 수 있지만, 온전하게 같은 경험을 한 게 아니라면 제대로 알 수 없는 마음이기도 하다.


비슷하게 보자면 TV 프로그램의 ‘극한직업’ 정도 되려나? 하지만 이건 직업이 아니고 우리 일상 곳곳에 자리한 사람들의 불편하고 어려운 부분을 같이 경험하는 것이기에 진지하면서도 울컥한다. (그러면서도 저자의 깨알 멘트는 웃음을 놓지 않는다) 알면서도 그냥 지나쳤던 순간들이 떠오르고, 감히 잘 안다고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음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겪어보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거라는 깨달음이 남았다. 내가 굳이 이 책을 읽고 싶었던 이유도 비슷하다. 그동안 그의 연재를 꾸준히 찾아보지 못했기에 내가 놓친 이야기가 궁금했다. 호기심만 채우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삶에 너무 닿아있는 모습들을 알고 싶었다. 세상의 정의를 외치면서 앞에 서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삶과 마음을 함부로 단정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소심한 다짐을 더 해보면서 말이다.


저자는 평소 보고 생각했던 곳곳의 문을 열어보기로 한다. 아마 그가 알고 싶었던 버킷리스트쯤 되지 않을까 싶다. 리스트 목록에는 그가 가진 기자의 시선이 담겼으리라. 누구나 바라보는 밝은 곳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 이면의 곳곳을 비추고 싶은 마음. 세상의 시선 밖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공유하고 이해하면서, 같이 살아가고자 하는 바람까지 당연히 얹어 있다.


그가 어떤 경험을 했을까. 연재 때 읽고 가장 웃음이 났던 게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해봤다’이다. 어느 하루, 그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방 안에서 지냈다. 씻는 것을 생략한 것은 물론이다. 더럽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아무것도 안 하고 한없이 늘어지면 방바닥을 뒹굴던 우리의 모습을. 솔직히 나는 며칠 동안 밖에 안 나가면서 세수도 안 한 적이 있다. 뭔가 입에 대면 양치는 꼬박꼬박했다. 원래 그런 거 아닌가?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체험을 하는데 왜 씻어야 하는가? ㅎㅎ 사실 이 경험의 의미는 안 씻어도 된다는 데 있지 않다. 그동안 우리가 살아온 모습을 반추하며 삶에 의미가 무엇인지 조용히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무엇을 하며 누구와 살아가든, 우리가 바라는 궁극적인 목적지는 행복 아니었던가. 바쁘게 달려오면서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은근한 떠올림까지 저절로 이어진다. 이 체험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봤다’와 연결해서 생각하게 된다. 공부하면서 달려온 10대 20대 시절, 직장생활에 적응하고 결혼하면서 현실을 살아내느라 벅찼던 30대를 그리는 저자의 머릿속이 복잡했을 것 같다. 쉬어보자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안 하던 하루가, 가만히 쉬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동안의 궤적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모습을 그리게 한다. 어느 날 하루 그가 꺼놓고 지냈던 스마트폰은 그동안 놓쳤던 세상의 모습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표정과 진심까지 읽게 했다. 스마트폰에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살아왔던 시간이 무섭기까지 했다. 이 작은 기기 하나가 삶의 대부분을 조정하게 하다니. 놀라우면서도 겁난다. 편리하지만 무섭다. 그가 스마트폰을 꺼놓고 지낸 시간 동안 업무나 상대방의 감정에 스크래치가 났을지는 모르지만, 스마트폰 없는 하루가 그에게 준 것은 표정 있는 삶이었다.


거절과 나쁜 말 듣기가 싫어서 자꾸 움츠러드는 마음을 이기고자 스스로 거절당하기를 경험하고, 나도 모르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다가 정작 들여다보지 못한 내 마음을 돌봐 주려 착하게 살기를 거부해봤다는 저자. 유기견 보호소에서 안락사당하기 직전의 강아지 구출 작전에 참여해보고, 무연고자의 죽음을 배웅해봤으며, 24년 만에 초등학생이 되어 요즘 아이들의 일상을 경험했다. 가볍게 웃으면서 보고 싶은 경험 같았지만, 그 경험의 시간 동안 느낀 것을 듣고 있노라면 하나도 가벼운 게 없었다. 언제나 그 시간, 그 자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충이 함께했다.


노인 체험 장비를 벗은 뒤 팔이며 다리에 붉게 물든 상처들을 보고 알았다. 하루 내내 싸운 흔적이었다. 마음처럼 안 움직이는 팔과 다리를 애써 움직이려고, 굽은 허리를 곧게 펴려고, 몸은 여든 살이라는데 마음은 여전히 서른일곱 살이라 여기면서. 그렇게 세월을 거스르고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 노인 체험을 자처했으면서, 막상 노인이 되니 난생처럼 겪는 경험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언젠가 나이들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고요했던 물에 돌멩이를 던지면 파장이 일듯 별 것 아닌 일상들이 일렁거렸다. 43년의 세월이 주는 무게감은 그렇게 컸다. 이게 체험이 아니라, 언젠가 맞을 미래란 걸 알기에 더 그랬다.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58페이지)


돌아오는 길에 든 생각들. 그가 폐지를 줍는 건, 그의 잘못이 아니라 정말 우연히 그렇게 됐다는 것. 인생이란 게 얄궂어서 누구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이들을 외계에 사는, 별나라 사람쯤으로 볼 게 아니라 이웃으로 보면 좋겠다는 것. 관심을 두는 것만으로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145페이지)


그의 경험 대부분은 우리와 오늘을 함께 사는 이들의 시간이었다. 거리에서, 근처에서 익숙하게 봤지만, 우리가 실제 경험하지 않는다면 결코 알 수 없는 일들에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노인 분장을 하고 80세 노인의 삶을 경험한 그는 나이 듦의 자연스러움과 그동안 애쓰며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진하게 느꼈으리라. 누구나 나이를 먹고 노인이 된다. 어떤 젊음을 보내면서 맞이할 노인의 모습을 상상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웃음소리에 마냥 다 다 잃고 내려놓은 절망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나이 든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됐다. 폐지 줍는 이의 하루를 같이 걸으며 어떤 일상인지 보기도 했다. 길에서 흔히 보이는 폐지 줍는 이들. 리어카 한가득 싣고 가는 모습이 위태로우면서도 정작 그 리어카의 뒤를 밀어본 적이 없다. 그들의 삶이니, 타인이니 굳이 가까이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경험한 폐지 줍는 하루는 누군가의 생활수단 전부이자, 일할 수 있음에 감사한 하루이자, 아이들에게 먹여줄 음식값이 된다. 누구나 사연도 있고, 그런 삶을 가진 이유도 있다. 그 제각각의 이야기를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삶 하루를 경험한 이의 공감을 바탕으로 이해의 근처에 닿을 수 있으면 하는 간절함이 담겼다.


새벽 5시에 시작된 환경미화원의 세계를 보았다. 눈을 감고 벚꽃축제 그 길을, 시각장애우의 세상에서 걸었다. 집배원의 하루를 같이 다니면서 왜 과로사가 그렇게 많은지 알게 되었으며, 35킬로그램 방화복을 입고 계단을 오르며 소방관을 살아봤다. 거리의 쓰레기는 당연히 환경미화원이 치우는 거라고, 소방관은 불을 끄는 사람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 적이 있다면 저절로 반성 모드가 되어야 할 판이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고, 그에 보수를 받고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니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굳이 길에 쓰레기를 버릴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누군가가 무분별하게 버리고 쏟아내고 그냥 지나간 그 길을 깨끗하게 해주는 이들의 노고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물론 무료봉사가 아니다. 하지만 하는 일에 상응하는 대우가 주어지고 있는지 거듭 확인해봐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냥 멀리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하루였지만 직접 체험한 시간이 더욱더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다.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없는 세계의 일을 이렇게 들려주는 이가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방관자의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까. 나와 지금을 같이 살아가는 이들의 다양한 세상을 안다는 것은, 누군가가 나의 삶도 지켜봐 주고 있다는 말일 테니까.


식사 후 체할 것 같아 청계천으로 향했다. 그러자 더위가 고역이었다. 섭씨 32도, 체감온도는 더 높았다. 걸은 지 5분 만에 브라에 땀이 찼다. 15분이 지나니 브라 끈과 와이어 부분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가슴골 사이에선 땀이 흘렀다. 겨울이면 따뜻하기라도 할 텐데, 여름엔 대책이 없었다. 패드 밑을 잠깐 들었더니 시원했다. 땡볕에 브라가 불타는 느낌이었다.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16~17페이지)


체험한 지 사흘 만에, 브라를 결국 벗었다. 육체적인 불편함보다 더 힘든 건, 버거운 시선이었다. 누가 뭐라 안 했어도 그것만으로 무언의 족쇄였다. 그래서 여성들도 쉬이 벗을 수 없었겠구나, 절실히 깨닫게 됐다.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20페이지)


다양한 체험 중에서도 웃픈 몇 가지를 확인하면서 마음에 많이 와닿았다. 브래지어를 하는 여성의 마음을 한없이 알아주는 그가 되기를 바랐던 ‘브래지어, 남자가 입어봤다’는 정말이지 역지사지의 대표 격이 아닐까 싶다. 브래지어 안 하는 시간의 편안함을 그가 알려주어 얼마나 고마웠던지. 특히 이 더위에 밖에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고통이다. 집안에서 브래지어 안 하고 헐렁한 티셔츠 입고 살다가, 속옷까지 갖춰 입고 나가야 해서 외출을 포기한 경우도 있다. 해본 사람만 안다는 브래지어의 불편함을 남자인 저자가 생생하게 증언해주니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아이 없는 남자의 하루 육아는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였다. 어쩌면 그가 아이 계획을 세운다면, 하루 육아 경험 전과 다른 조금 더 괜찮은 남편과 아빠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루였지만 그 경험이 육아의 현장을 그대로 각인시켜줬으니까.


그의 솔직함은 ‘자소서, 진짜 솔직하게 써봤다’에서도 빛난다. 흔히 자소서가 아니라 ‘자소설’이라고 불리는 자기소개서. 태어나서 살아온 모습이 다 비슷한데 도대체 그 차별화는 어디서 가져와야 하는지 골치가 아픈 순간들. 결국 우리는 소설에 버금가는 자기소개서를 채워나간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첫 번째 관문인 서류심사조차 통과할 수 없을 테니까. 아무리 차별이 없는 세상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학력 구분이 없다고 해도, 아직 크게 달라지지 않은 취업 문턱을 증명하고 있던 셈이다. 저자는 취업준비생들의 솔직한 의견을 담아 자소서를 써서 지원했고, 당연하게(?) 탈락했다. 아마 그의 서류심사가 통과했다면, 그 기업의 취업 경쟁률 더 세졌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그는 어디에 지원했는지? 누구나 들어가고 싶다던 기업이 어디 한두 군데여야 말이지)


우리가 알아야 하고 서로의 삶을 응원해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다던 저자의 말을 읽는 내내 곱씹게 된다. 당사자를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의 진심이 그대로 전해진다. 아주 작은 경험 하나로도 우리는 그 세상을 알아갈 수 있다. 그러니 저자가 경험한 하루들의 시간은 얼마나 더 귀할까. 공감은 당연했고, 누군가를 더 이해할 수 있다는 작은 걸음을 보여줬다. (사실 누군가는 온전히, 다 이해한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온갖 고생을 하며 그가 들려준 세상의 많은 이야기에 고개가 숙여지기도 한다. 몸으로 부딪쳐 해내야만 하는 일부터 사랑한다고 말하며 감정에 힘을 실어야 하는 일까지 다양한 그의 체험이 값지다. 읽는 동안 고맙기까지 했다. 나에게는 간접경험이지만, 그렇게 무언가를, 누군가를 알아가는 게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하루의 경험이 그 사람의 모든 시간을 다 보여주지는 못하겠지만, 보게 된 만큼만은 세상을 더 알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우리 삶은 더 편해지고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렇게 달려온 세상이 놓치고 있는 것도 분명 있을 테지. 아마도 저자가 하루의 경험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잊고 있던 어떤 것을 찾아가고 확인하는 즐거움에 감사하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지 못하지만 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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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믿고 보게 되는 책이 있기 마련인데, 아마도 이 책 <지식 편의점>이 그중 한 권이 될 듯하다. 이미 책과 관련한 매체에서 그 활약을 보여준 저자의 이력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적인 현대인을 위한 책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궁금하면서도 막상 펼쳐봤을 때 보이는 고전과 베스트셀러의 목록이 보이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왜? 읽어보고 싶다고 다짐하면서 오랫동안 목록을 만들어두었지만, 막상 펼쳐보고 완독하지 못했거나 아예 펼쳐보지도 못한 책들이 가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궁금해졌다. 그러한 목록이 왜 만들어졌으며, 저자는 왜 또 그 책들을 언급하면서 지식인 운운하는가 말이다. 그래, 읽지는 못했으나 나도 지식인이 되어보고 싶다는 바람을 슬쩍 내비치며 저자가 차려놓은 편의점 진열대에 눈길을 주고자 한다.


생각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시작한 지식여행이라는 의도가 뭔가 있어 보였다. 하루하루 지내면서 그저 버티고 살아남는 게 목표가 익숙한 세상에서, 생각하는 인간이 되기 위한 시도가 필요한지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인문학적 지식 운운하면서 피부에 닿는 현실보다 앞서는 건 없을 거로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저자가 찾아내고 같이 이끌어주고자 하는 생각하는 인간으로의 길은 조금은 더 오래 멀리 내다보는 인생과 세상에 관한 시선을 만들어간다.


총 3개의 장으로 구성하였고, 질문하는 인간으로 시작해서 탐구하는 인간을 통해 우리는 생각하는 인간이 된다. 저자는 그 질문하는 인간의 시작을 『사피엔스』로 열고, 인류가 만들어갈 미래를 알기 위해 과거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발전해왔고, 또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 생각하는 장치이자 도구로 인류의 역사를 풀어놓는다고 했다. 사피엔스 종은 인지 혁명, 농업 혁명, 과학 혁명을 거쳐 죽음까지 극복할 새로운 인류로 진화하고 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많은 인간'종'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존재하고 있는 게 사피엔스, 현재의 우리 인간이다. 그렇다면 그 많던 인간'종'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묻고 싶겠지? 그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때문이다. 사피엔스가 다른 종을 정복하고 이겨내면서 우위에 올랐고, 이렇게 우월한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던 건 서로 연대(단합)하는 사회가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냥 어느 날 존재했고 별일 없이 이어져 왔던 역사가 아니었던가 보다.


이어지는 『총, 균, 쇠』의 저자는 백인의 세계 주도는 운이라고 했다. 생존을 위해 해오던 농사나 필요에 의해 발명하는 농기구, 그렇게 시작된 연구는 전쟁 무기를 만드는 것까지 가능했다. 쇠가 만들어낸 전쟁 무기보다 더 획기적인 무기는 우리도 이미 알고 있듯이 생화학무기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 우리의 모든 역사가 현대사라고 말하며, 기록에 남은 흔적으로 여러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역사를 누가 언제 썼느냐 하는 건 역사를 또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니까 말이다.


질문하면서 듣고 알게 되는 사실들로 우리는 탐구하는 인간이 된다. 저자가 탐구하는 인간으로 제시한 『국가』, 『장미의 이름』, 『군주론』, 『리바이어던』, 『로빈슨 크루소』, 『법의 정신』, 『에밀』, 『월든』, 『자유론』은 서로 매치가 되는 듯하면서도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로빈슨 크루소』나 『윌든』은 가볍게 만나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어느 날 만난 자연의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생활하고 생각하며 벗어나는가 하는 이야기로 여겼다. 한편의 모험소설 같은, 다른 한편은 편하게 읽기 좋은 에세이처럼.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인간이 존재하며 느끼는 것들은 다르지 않았다. 다른 책에서도 보게 되는 것처럼, 국가가 지켜야 할 정의에 대해 생각하고, 인간이 구성한 사회를 잘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규제를 해야 한다는 거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평등한 인간 사회가 만들어지려면 강한 규제가 필요하고, 그걸 국가의 강한 공권력이 행사한다는 것. 요즘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자칫 독재로 보일 수도 있는 내용들이기도 하지만, 국민의 법 감정도 무시할 수 없는 환경의 오늘이기에 우리를 평등하고 평화롭게 하기 위한 법으로 생각해도 좋을 듯하다.


개인이 부족이 되고 국가가 되고, 신이 지배하던 세계에서 시민이 권력을 가져오면서 민주주의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2장을 넘어가면, 3장에서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정말 생각해야 할 것들을 제시한다.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사랑받아왔으면서, 최근 몇 년 사이에 많이 보이던 베스트셀러나 필독서로 언급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기적 유전자』, 『멋진 신세계』, 『코스모스』이다. 돈이면 모든 게 가능한 세상이 된 건 아닐까 하는 노파심과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까놓고 말해서, 지금 돈으로 할 수 없는 게 몇 가지나 될까? 반대로 생각하면 돈이 없어서 불가능한 것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놓치지 않는 인간적인 생각들이, 바로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경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순간들을 기억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인간 세계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으면서 선명하게 보이는 계급이다. 과거의 언젠가 상상처럼 만들어놓은 이야기가 이제는 분명한 현실이 되어 흘러가고 있다. 인간에게 부여된 계급, 그 계급에 맞게 설계되고, 처음부터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이게 정말 소설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우리가 부딪힌 현실에서 마주하는 상황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을까? 세상은 발전하고 변화한다. 인간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더는 인간만이 가능한 일도 아닌 게 됐다. 그 어느 것도 당연하다고 여기며 고정관념처럼 묶어둘 수 없는 세상이 된 거다. 아니, 어쩌면 우리 인류가 처음 시작된 그때부터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조금 더디게 그 변화를 인지하고 겪어가면서 몸에 맞는 옷으로 만들어왔겠지. 하지만 역사 속의 변화 속도가 지금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이고, 많은 것이 그 속도를 빨리한다. 상상에서만 머물렀던 것들이 현실로 눈앞에 존재하는 일이 더는 판타지가 아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회, 과학 기술의 발달이 인류에게 가져온 변화가 인류 역사에 어떤 길을 그려놓았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우리의 오늘에 하나하나 대입해서 읽어보면, 이 책들이 어렵다는 생각보다 흥미롭다는 생각이 더 많아질 것 같다. 때로는 지루하고 많은 양의 고전으로만 보였던 내용이, 알기 쉬운 설명으로 지식 습득을 가능하게 한다. 지식을 배우고 쌓는 게 아니라 즐기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을 인류의 발전 속도가 숨이 가쁘면서도, 우리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라고 생각하면 뭔가 더 알아야겠고 배워야만 할 것 같을 때 이 책이 그 허기를 채워줄 것이다. 거기에다가, 읽고 싶었지만 읽지 못했던, 읽지 않은 책을 다 읽은 것 같은 정리로 머릿속을 개운하게 해주는 건 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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