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우면서 밥을 잘 챙겨먹으라고 했고,
나는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볼일을 보시라고 했다.
엄마는 말로만 하지 말고 알아서 좀 잘 하라고 다시 말했고,
나는 또 다시 알아서 할 테니 조심해서 다녀오시라고 반복했다.
몇 달 전에도 엄마가 며칠 자리를 비우면서 똑같은 당부를 내게 했었고,
나는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그때 엄마가 집에 와서 할 말을 잃고 혀를 끌끌 차면서 했던 말은,
도대체 며칠 동안 무엇을 먹고 살았냐고 물었고,
나는 그냥 잘 먹고 이렇게 멀쩡히 있다고 대답했다.
그 당시에 엄마가 보셨을 때는 밥통은 차갑게 비어있던 상태였고,
싱크대는 설거지 한번 한 적 없이 말끔하게 말라 있었고,
냉장고는 엄마가 집에서 나갈 때 그대로였으니,
나는 아마도 공기만 마시고 살았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냥 내게 있어 끼니라는 것은,
배가 고프면 먹는 것, 그 이상의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번에도 엄마가 같은 당부를 하시기에 나는 버니니를 사달라고 말했고,
엄마는 버니니가 뭔지도 모르시면서 사러가자고 했다.
그리고 마트 카트에 버니니 5병을 담고, 맥주 5병을 쓸어 담는 당신 딸을 보면서,
두 가지를 합해서 5병을 넘으면 안 된다고 못을 박았고,
나는 이대로 계산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은 버니니 3병, 맥주 2병으로 5병을 채우고 나왔다.
어차피 모자라면 더 사오면 그만인 것인데, 5병이면 어떻고 10병이면 어떠랴.
엄마는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테지.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저 5병이 비워지지 않고 그대로 있기를, 하고 말이다.






       






마치 실연이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감정의 휘몰아침을 겪고 있다.
나는 계절을 타는 사람도 아니고 날씨를 타는 사람도 아닌데,
가끔 한 번씩 몰아치는 이 감정을 주체 못해 사람들과의 거리를 길게 밀어두고,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생각도 행동도 나 혼자, 그렇게 알아서 했던 것처럼...



<단순한 열정> 속의,
이 여자의 모습에, 행동에, 생각에 지금의 나를 이입시킨다.
여자는 실연을 했고, 나는 아무 일 없지만 그냥 사람이란 대상에 지친 것 뿐이다.
그런데 여자의 모습에 나는 빠져들고 있다.
이 여자만의 방식에 빠져서 나의 지겨움을 잠시 덮어둔다.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할까봐 일상을 멈추고,
그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대부분 이 여자의 심리 상태, 그대로 표현하자면 미친 여자쯤으로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여자는 미치지 않았다. 그냥 사랑을 했을 뿐이다.
사랑은 지극히 사적인 일이며, 사랑이란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누구나의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
사랑은 자기만의 일이며, 개인적인 일이다. 이별도 마찬가지.
여자는 사랑을 했고, 이별을 했고, 이별의 후유증을 겪어가는 중일뿐이다.
그 시간을 여자는 기록으로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했던 시간을 기억하기 위한 기록을...
자신의 경험만을 쓴다는 작가에게 그 솔직함을 보여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생각했다.
여자(작가)는 자신의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했을 뿐이고,
우리(독자)는 그 기록을 보았을 뿐이다.



 

단지, 그것, 뿐이다.


사람이 가지는 감정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뿐이다.
사랑이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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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2-12-14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 오는 날 오늘 출장을 가는 데, 개인적인 경험과 겹쳐서 이 페이퍼의 글이 가슴을 두드리네여. 그렇죠, 전 미치지 않은 거에요. 사랑을 했을 테니 말이죠. 비 오는 밖을 보며 버스 안에서...마음에 확 다가오네요 감사합니다 ^^

구단씨 2012-12-15 21:54   좋아요 0 | URL
흐린 날씨 속에서 출장은 잘 다녀오셨나요?...
누구나의 일상 속에 있는 일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건 각자의 이야기일 뿐이라고요...
남들에게 뭐라 들을 말도 아니라고요...

저의 한숨 섞인 푸념이 누군가의 가슴을 두드렸다니, 제가 오히려 감사할 일이네요.
감사해요...

루쉰P 2012-12-17 16:35   좋아요 0 | URL
날씨는 흐려도 출장은 잘 다녀왔죠. ^^ 하기사 사랑은 사람마다 자기 가슴 속에 다 다르게 있으니 그 누구에게도 해답을 찾을 수 없고, 그 누구에게도 공감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한숨 섞인 푸념이 누군가에게는 공감을 주고, 세상을 좀 더 볼려고 하는 눈을 주는 것 같아요. ^^ 구단씨 근데여...식사는 하셔야 해요. 술만 먹으면 뼈 삭아요 ㅋ
 




독자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행운은, 바로 그것. 다른 이의 글을 만나고, 눈과 마음에 담아낼 수 있는 마음. 나는 그런 마음으로 책을 만나고 싶어 한다. 지금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큰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런 독자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

누군가가 써내려간 글을 통해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공감이란 것을 느꼈을 때의 그 희열이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내 안의 것들을 활자로 자유스럽게 표현해내지 못하는 나는 독자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책을 기다리는, 나는 그렇게 표현된 활자를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목이 길어 슬프다던 사슴이 되는 것도 불사하게 된다.

지난 한 달 동안 책을 많이 구입했다. 평소의 속도나 양을 기준으로 보자면 한 10배 이상은 되는 것 같다. 무엇의 빈자리를 그렇게 책으로 채워야 했을까 고민해 봐도 뚜렷하게 표현할 수 있는 그 선명한 이유는 없었다. 이런 저런 것들이 쌓여져 내 안의 것들을 비우게 만들었기에, 그 자리를 또 채워야만 했던 허한 마음이 커진 이유라고 변명해 보지만, 그것도 맘에 들지는 않는다. 날씨는 추워졌고, 내리는 비와 눈에 온통 젖어서 들어왔던 날, 또 한 번 책으로 비워진 마음을, 엉망인 방안을 채웠다.





단편집을 어려워해서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는 한, 단편집을 내가 먼저 손 내밀어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그 짧은 이야기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허둥대고 이렇게 모여진 단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자 하는 마음에 답답해서 어렵다는 선입견을 아직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순전히 이 책만큼은 나의 의지로 먼저, 선뜻 만나게 된 책이다. <너 없는 그 자리> 제목과 표지에 반해서 골라 들었던 이 책은 나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너무나 매력적인 느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하나의 단편들이 풀어내는 이야기가 짧다. 그래서 단편을 통해 느꼈던 그 ‘이야기하다가 만’ 것 같은 분위기로 찜찜할 것 같은 예상을 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그 짧은 이야기들은 그 토막 난 이야기 같은 그대로를 안고 가게 했다. 뭐랄까, 이 부분만을 내가 담아내도 충분할 것 같은 생각에 뭔가 중지된 느낌 보다는 이대로도 좋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책 속의 주인공들은 배신과 쓸쓸함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들이 지금 살아가는 우리를 대변해주는 것 같은 생각에 고스란히 흡수되고 있었다. 내 안에...
누군가가 알지 못하게, 내가 선점하고 싶은 욕심에, 나만 알고 싶은 간절함에 내내 가슴에 담아두었던 책. 게다가 나에게 단편의 매력에 흠뻑 젖어들게 만들었던 책. 곧 읽게 될 <그 집 앞>에 대한 편안함을 선사해 준 책이다.





우리가 사랑이라 정의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담겨진 책 같았다. 부모와 형제가 이루어내고 있는 가족, 연인, 친구. 많은 대상들이 그 사랑을 뿜어내고 있었으며, 그 관계들이 사랑을 이루어가게 하고 있었다. 사랑이 뭐 별건가, 싶었던 생각에 사랑이 별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사랑이란 단어가 포함하고 있던 그 넓은 범위를 이제야 재정립해주는 것 같은 느낌에 이 따뜻한 이야기를 더 담게 된다. 누군가가 풀어내는 마음, 누군가가 흘려보내는 슬픔, 많은 것들이 그 사랑이란 이름으로 세상 속에 흩어져 있었다. 미처 보지 못했던 많은 마음들을 보게 만들어, 이 겨울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책...






 

<이름이 없는 너를 부를 수 없는 나는> 제목이 풍기는 느낌이 너무 슬프고 쓸쓸해서 출간되기도 전에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던 책이다. 시인이 풀어냈다는 그 글이 궁금한 건 두 번째였고, 저 제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빨리 찾아내어 보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고비사막의 그 흙이 내게 가져올 감정들이 궁금했고, 이야기 하나하나에 따라오는 소제목이 애틋했다. 그 마음이 그대로 바람 타고 날아온 듯했다. 여러 말이 필요 없게 그냥 만나는 그 순간을 즐기게 해줄 책 같았다. 아니, ‘즐기게’라는 말은 좀 어울리지 않는 것도 같다. 그저 ‘만나는’ 그 순간을 기다리게 했던 것 같다. 만나고 난 후의 감정들은 아직 내가 정의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기다림을 견딜 수 있었나보다. 만나기만 한다면, 그러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녀는 떠났고, 그는 돌아온 것 같았다.

아닌가?

그녀는 떠나는 것 같았고, 그는 돌아온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누군가가 풀어내는 책에 대한 이야기, 글에 대한 느낌이 내 귀에 들어온 것은 그 두 사람의 영향이 컸다. 그녀는 떠날 것 같은 한 장의 페이퍼를 남기고 아무런 말이 없고, 그는 한 편의 리뷰로 잠깐의 등장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알지도 못하는 그들의 책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소심한 팬의 마음으로 기다리고 싶어진다.

그녀는 떠나지 않기를, 그는 이번 등장으로 계속 보여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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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2-08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소개해주신 단편집 정말 마음에 들어요. 다음 구매 때는 꼭 넣어야겠어요.
김경주 시인의 시도...

구단씨 2012-12-08 12:28   좋아요 0 | URL
단편집에 대한 선입견이 있던 저에게는 좋았습니다. ^^
김경주 시인의 시집은 개정판입니다. ^^
 

가을이 오면 생각나는 로맨스소설들...



가끔 읽는 책들 중의 일부분이지만, 사실 내 책장에서 몇 권 안 되는 로맨스소설들을 문득 다시 꺼내어 보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시간을 따로 구분해서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얘들(책 속의 주인공들) 잘 지내고 있나?’ 하는 궁금증으로 한 번씩 펼쳐본다. 그리고 그들에게 몇 달 만에 혹은 몇 년 만에 안부를 전한다.
“안녕?”
하고...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잠옷을 입으렴>
영원한 0순위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눈에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다시 꽂아두었다. 건피디도 진솔이도 마치 의무처럼 내가 그들의 안부를 듣고 싶어진다. 지금 마포대교 어디를 걷고 있나? 낙산공원 어딘가에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나? 두 사람 사이에 사라졌을 그 결계는 어딘가에서 다시 침입의 순간을 엿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난다의 일기>, <허니비 모놀로그>, <러브 고 라운드>
조금만 더 대중적인 글로 만나보고 싶은 작가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속에 한번은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야기를 그냥 이야기가 아닌 가슴에 남을 이야기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번 신간이 더욱 기다려지고 있나보다. 한 달에 한권 정도 마련하는 로맨스소설에 이 책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안달이 난...








<무정>
어마어마한 몸값을 자랑하는 메디컬 센터 때문에 알게 된 작가이지만, 나는 이 책이 더 맘에 든다. 가슴이 따뜻한, 온기를 가진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을 효림과 규원 두 사람을 통해 보게 된다. 사람이 되어가는 그 온기는 언제든 전염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이 들만큼...








<바람>, <정우>
상당한 분량에도 끝까지 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책이다. 다음 작품이 언제 나올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고민 없이 구매해서 읽어보고 싶어지게 만든다. 이 분의 모든 책을 서늘한 계절에 만나서 그런지, 이분의 글은 출간작의 제목처럼 ‘바람’과 동의어 같다.










그 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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