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가 선거인데, 그래서인지 이번 9권의 내용이 남다르게 들린다. 여기저기 이동하면서 차에서 틀어놓은 선거 유세 녹음 방송과 선거 운동원들의 길거리 홍보를 보고 있노라면, 후보자들은 무엇을 위해 선거에 나왔나 싶었다. 개인의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올바르게 가기 위한 사회를 만들고 싶을 수도 있다. 솔직히 정치인들에 대해 호감은 없지만, 때가 되었고 필요한 자리이니 사람을 뽑는구나 하고 말았는데, 아무리 봐도 선거 운동은 적응하기 힘들다.

 

학생회 간부 선거를 다룬 9권이다. 아이들은 어떤 학교로 만들고 싶어서 이 선거에 나온 걸까. 아주 단순한 마음이기도 하고, 그동안 쌓여왔던 생각들을 뿜어내는 기회로 만들기도 하는 아이들이다. 후보로 나온 아이들의 마음과 태도를 엿볼 수 있는데,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품고 나왔다. 자기 꿈을 위해 도전하고, 내신을 위한 목적으로 후보로 나오고, 학생회 자체에 즐거움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어른들의 선거판과 다를 게 없는데도 분명 다르다. 아이들은 어떤 계산을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솔직하고자 한다. 자기 마음이 가장 원하는 것을 목적에 두고 나선 것이다.

 

 

학생회 후보 연설 대회를 통해 아이들의 진심을 볼 수 있었는데, 저마다의 공약을 걸고 간부가 되기 위한 목적을 드러낸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한 아이, 현재의 선거 방식이 가진 문제를 언급하며 어떤 식으로 개선할 수 있는지 방안을 내비친다. 무효표가 나오는 이유, 무효표를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문제, 그로 인해 공개 투표에 가깝게 진행되었던 과거 어느 학교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그래서 지금 선거 방식이 어떤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지 보게 하면서 그때의 일을 대응책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물론 그 아이의 대안이 100% 옳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아무도 현재의 투표 방식에 문제가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아이의 연설은 선거를 목적에 두지 않았더라도 한 번쯤 새겨들어야 한다. 지금 이대로의 방식이 옳은 것인지, 문제점은 없는지, 개선해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보완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어른들의 선거판 역시 이런 게 가장 필요한 거 아닐까.

 

현재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 아이의 연설 후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아이들의 마음은 예상외로 흘러간다. 별것 아닌 일을 문제로 만들어 시끄럽게 했다고, 가장 먼저 탈락할 거로 생각했던 후보가 학생회를 이끌게 된다. 다른 간부들 역시 그 역할에 가장 적합하다고 맞는 후보들이 선정되었을 테지.

 

학생회 간부 선거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게 뭘까 생각해 봤는데, 다양한 사고가 있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 다양한 의견을 들으면서 부족하고 어긋난 방식이 조금씩 개선해 나가는 모습을 찾고자 하는 게 목적이라고. 선거는 분명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 방식에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도 있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하는 듯하다. 학교 안에서 학교 밖 세상을 먼저 경험하는 듯한 느낌이다. 학교가 사회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이유를 그대로 드러내는 '학생회 간부 선거 편'이다. 열심히 제 자리에 맞게 일하는 후보도 중요하고 투표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 투표가 왜 진행되고 있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잊지 않기를 바란다.

 

 

 

소란스럽지만 현명하게 치러낸 선거. 선거가 끝나고 아이들에게 다가온 건 히자쿠라야마 중학교 문화제다. 각자의 이름을 걸고 다양한 분야의 축제를 준비한다. 특히 이 아이들이 준비하는 연극이 주를 이루는 10권인데, 아이들이 직접 쓴 원고로 오르는 극을 준비하는 과정이 볼만하다. ‘이거 정말 아이들이 한 거 맞아?’ 하는 놀라움이 들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누군가가 쓴 원고가 인정받고, 아이들은 그 대본을 바탕으로 오를 연극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 준비 과정에서 역시나 불거진 일들이 있는데, 그건 하나의 목적지로 가기 위해 반드시 겪어내야 할 관문으로 보인다.

 

특히 스즈키 선생님 지도로 아이들은 연기를 배우는데, 그게 너무 진지해서 숨죽이고 읽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하는 문화제, 그냥저냥 빨리 해치우고 지나가야 할 숙제처럼 여겼는데, 막상 이를 대하는 아이들과 선생님도 자세가 너무 진지하다 보니,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일 년에 한 번이 아니라 십 년에 한 번이라도 잘, 최선을 다해 해야 하는 것임을 간과했던 거다. 공부에 방해된다고 학급 임원도 하기 싫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게 전부는 아닌 듯하다. 이게 한국과 일본의 문화 차이인지, 아니면 이 만화에서 유독 좋은 이야기만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문화제를 대하는 이들의 태도가 너무 맘에 들었다.

 

 

연극 한 편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와 과정이 필요한지, 그 한 무대를 만들어가는 아이들이 어떻게 ‘함께’임을 배우는지 보여준다. 캐스팅 과정 역시 신중하고 공정하게 하려고 애쓰는 스즈키 선생님의 방식이 맘에 들었다. 누구에게나 잘 어울리는 역할이 있을 거다. 역할부터 맡기지 않고, 극의 모든 과정과 분위기를 소화하는 걸 지켜본 다음, 그 배역에 어울리는 아이를 캐스팅하는 순서가 긍정으로 다가온다. 배역뿐만 아니라 연극을 올리는데 필요한 스태프 역시 존재감을 뚜렷하게 만들어준다. 주인공이 아니어도, 무대에 오르지 않아도, 누군 하나 없어서는 안 될 구성원인 거다.

 

학교 축제가 단순히 아이들의 하루 놀이 정도로 멈추는 게 아니었다. 그 준비과정을 통해 무엇을 배우고 겪을 수 있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현실과 조금은 동떨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그런 일이 또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도 없으니 들어주어도 괜찮다. 학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아이들과 선생님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 누구나 겪을지도 모를 일들을 언급한다. 히키코모리가 되어 방황하는 청춘,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는 과정, 마음이 아픈 병이 왜, 누구에게 다가올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하는 것까지. 다양한 소재로 중학교 2학년 아이들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모습을 비친다.

 

공부하기에도 바쁘기 만한 시간이라고 여겼는데, 이런 행사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태도에 생각이 많아졌다. 지금 내가 가진 생각과 내가 보는 학교의 분위기가 이 만화의 분위기와는 많이 달라서다. 배우는 목적으로 존재하는 게 학교라면, 그 배움을 끌어주는 게 선생님이라면, 아이들이 머릿속에 담는 지식 그 이상의 것을 보고 즐길 수 있는 것도 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번 문화제 편에서 줄곧 생각했던 게 그런 거다. 성적을 위한 학습, 지식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는 지혜와 여유를 배우는 방법을 끌어주는 곳이 학교였으면 좋겠다고...

 

 

 

10권의 문화제가 이어진다. 아직 연극은 상연되기 전이고, 배역도 정해지지 않았다. 스즈키 선생님은 모든 아이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한다. 아이들 역시 어떤 역할이 주어질지 몰라 모든 연습에 최선을 다한다. 그래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제들이 있다. 아니, 이건 문제라기보다는 스즈키 선생님이 아이들의 성장을 이뤄내는 교육이라고 봐도 좋겠다. 분명 연기는 잘하는데, 무대 위에 서면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대역이라는 역할을 주려 한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작년에도 거절한 것처럼 이번에도 거절한다. 도저히 할 수 없다면서...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스즈키 선생님은 그 아이가 조금 더 용기 낼 수 있도록 부담 주지 않으면서 기회를 잡아보기를 바란다.

 

아이들의 연극 연습이 한창 무르익어가고, 아이들은 연극에 푹 빠진다.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는 그 시간의 매력에 빠진 거다. 실제 무대 위도 아니고 관객도 없는데, 그 연습 시간에 몰입하게 된다. 그 안에 있던, 대역을 맡기고 싶었던 아이. 어느 순간 역할에 빠져들면서 연극 속으로 스며든다. 아직은 완벽하게 용기가 장착된 건 아닐지라도, 그 무대에 서고 싶은 마음이 드는 순간 이미 용기는 시작된 거다.

 

굳이 이 문화제에서 아이들의 연극을 두 권이나 되는 분량에 담아냈을까 궁금했다. 나의 추측이지만, 그건 아마도 스즈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던 것도 다양한 가치관의 형성이 아니었을까 싶다. 극의 흐름은 하나의 인생을 보는 듯했고, 각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그 역할을 살아야 한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삶을 보여주면서도, 그 삶을 이뤄 가는데 여러 사람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건 연극 준비 과정에서부터 누누이 강조되어 보였던 점이다. 역할 분담에서부터 무엇을 준비하고 어떤 내용을 서로 주고받으며, 얼마나 몰입하고 이해하면서 캐릭터를 살려내고 있는지 보면, 알 만하다. 극장판 「스즈키 선생님」의 무대가 된 게 문화제 편이라는데, 그럴 만하다.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이 만화의 주제에 가장 걸맞은 에피소드였다. 함께 이뤄가는 과정을 배우는 일,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가는 시간, 아직은 어리지만 그래서 더 확인하고 배워야 할 것들이 넘쳐나는 기회. 거기에 선생님이란 역할로 함께 하는 스즈키까지 동반 성장하는 시간을 만든다.

 

 

궁금하지만 낯설게 다가왔던 이 시리즈가 11권으로 다 끝났다. 다 읽었지만, 여전히 이해 못 할 설정도 있고, 다양한 면을 보게 하는 장점도 있다. 문화의 차이라고 봐도 좋고, 세대 차이라고 봐도 괜찮다. 무엇보다 일어나지 못할 일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선생님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데, 어떻게 일어날 일이라고 예상한 일만 생길까. 언제 어디서든 기존의 생각과 다른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게 당연한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일이라는 건 정해진 대로 일어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 이 만화의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과감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는 거. 이 아이들의 행동이나 다른 설정들이 때로 과격하게 보일 때도 있었지만, 그것마저 수용할 수 있게 한다. 그 정도의 마음을 가진 이들을 지켜보게 하면서, 나와 다른 면면을 경험하게 하는 것. 가르침은 계속된다고 말하며 이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의미도 충분히 전달된다. 그 배움, 그 가르침이 멈추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말이다.

 

제법 긴 호흡으로, 나와 다른 마음을 알아가는 마음으로, 배우는 시선으로 읽게 된 책이다. 언제 또 시리즈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이제 모른 척 넘어갈 수는 없겠다. 이 아이들과 스즈키 선생님의 성장이 여전히 궁금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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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김밥을 못 싼다. 초등학교 소풍 때부터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 간 적이 없다. 지금에야 드는 의문인데, 분명 유치원 때도 소풍을 갔고, 엄마도 같이 따라갔는데, 그때는 어떤 도시락을 싸갔던 걸까? 이상하게도 그때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기억 속 소풍 도시락은 초등학교 때부터다. 그런 기억에서 엄마가 김밥을 싸주지 않은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슬픈 일이지만, 사실인데 어쩌랴. 가까이 사는 친구 엄마가 내 것 김밥까지 싸주시곤 했다. 중학교 때부터는 소풍 도시락을 거의 안 가지고 다녔고, 고등학교 때는 가방도 안 들고 소풍을 다녔으니 뭐, 도시락이 문제였겠나. 그런데도 유독 초등학교 소풍 도시락이 생각나는 건, 누구나 다 싸서 왔던 그 '김밥'이 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데 있다. 그 나이의 소풍 도시락에 김밥이 없다는 건 큰 슬픔이었고, 창피함이었고, 엄마를 원망할 만한 일이었던 거다. 지금에는 가까운 사람에게 '싸는 김에 우리 딸 것도 하나 싸줘.'라고 부탁할 수도 있는 일이고, 친구 엄마가 도시락을 싸줄 수도 있고, 무엇보다 김밥을 못 싼다는 게 무슨 큰일인가 싶지만, 그땐 그랬다. 지금은, 가끔 밥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동네 분식점에서 김밥 두세 줄로 한 끼 때우는 엄마와 나를 떠올려보면 정말 별거 아닌 일인데 말이다. (여기서 살짝 투정을 더 부려보자면, 우리 엄마는 김밥도 못 싸지만, 떡볶이도 못 만들고, 카레도 못 한다.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인데... ㅠㅠ) 나를 슬프게 했던 김밥이 이제는 그저 그런, 한 끼를 채우는 음식이 되어버렸다는 게 웃음 날 뿐.

 

 

 

 

 

 

 

 

 

<바나나 우유>저자 김주현의 기억 속, 세월 속 음식들도 그런 걸까. 어떤 간절한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들이다. 좋아서 같이 먹고 싶었던, 따뜻해서 포근했던,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서 생각나는 맛. 오늘을 사는 모든 순간에, 그렇게 한 번씩 치고 올라오는 감정이 동시에 따라오는 음식이 있던 거다. 가족, 사랑, 일상, 여행. 삶을 채우는 어떤 테마를 떠올려도 따라오는 음식이 있다. 오늘의 절망을 목으로 넘기며 진한 한숨의 캬아~ 소리 내고 싶은 소주 한 잔, 너무 짧게 왔다 가는 벚꽃이 아쉬워 차로 마시는 봄날의 시간, 기어코 나오려고 하는 그 울음을 참아야만 했던 날 마시는 아포가토, 청춘의 사랑이 상큼하게 혀끝에 닿는 아이스티, 어려운 시절 최고의 음식이었던 탕수육과 비프가스, 늦은 밤 퇴근길 부모님이 품에 안고 왔을 뜨끈한 만두, 그리고 빨간 소시지 달걀말이. 아, 나도 잊을 수가 없다. 분홍 소시지...

 

나는 그걸 분홍 소시지라고 부르는데, 어렸을 적 항상 도시락 반찬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음식이다. 지금이야 몇 천원이면 큰 거 하나 사놓고 몇 날 며칠을 먹을 수 있는 양인데, 그땐 그거 한 조각이 왜 그렇게 간절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아무 날에도 생각나지만, 특히 명절날 더 생각이 난다. 핑계 삼아 큰 거 하나 사두려고. 일 년에 두 번 명절에 전 부친다고 엄마가 장 볼 때, 나는 꼭 분홍 소시지 하나를 카트에 넣는다. 엄마는, 입안에서 달라붙고 밀가루 범벅이라 맛도 없는데 뭐하러 그걸 사냐고, 먹을 사람도 없다면서 잔소리를 한다. 그렇다고 안 살 나도 아닌지라, 내가 혼자 다 먹겠다며 기어코 하나 사서 명절 전 부칠 때 같이 부쳤다. 그러고 나서, 명절날 식구들이 모두 모여 식사하는데, 제부가 분홍 소시지를 엄청 맛있게, 많이 먹는 거였다. 엄마가 놀라 제부에게 물었다. “아무개야, 그 소시지가 그렇게 맛있냐?”, “어머니, 저 이거 학교 다닐 때 도시락 반찬으로 싸가고 싶었는데 못 했어요. 저희 형편이 어려웠거든요. 엄마가 이걸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신 적이 거의 없어요. 너무 맛있네요. (쩝쩝~)” 와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분홍 소시지를 보고 나만 그런 기억이 있는 게 아니었던 거다. 내 눈은 찌릿~ 엄마를 한 번 향했고 엄마는 의외라는 듯 웃고 말았다. 그 후로 엄마는 명절이 되면 꼭 분홍 소시지 하나를 장바구니에 넣는다. 늙어서도 말 안 듣는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뭘 먹어도 예쁘기만 한 막내 사위를 위해서... 엄마의 예쁜 막내 사위가 좋아하는 분홍 소시지의 발견 내가 했거든?!

 

먹는 것에 관심 없어 하면서도 가끔 허기질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배고파...’ 하고 혼잣말을 할 때, 그럴 때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더라. 평소 먹던 양의 몇 배를 먹어도 배부름을 느낄 수가 없다. 늘 그렇듯,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 때는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픈 거다. 그 허기진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건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유명 맛집의 소문난 음식도 아니다. 그때 그 순간, 내가 기억하는, 나를 데워줄 음식이다.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추억’이라 불러도 좋을 것들. 저자도 마찬가지였겠지. 웃고 울던 시절의 그리움에 음식을 부른다. 서글펐던 사랑이 끝나고도 어김없이 위로의 음식을 떠올린다. 뒤늦게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알아채곤 미안함에 후회도 한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고 눈물 나려고 할 때, 뜨거운 국물 한 모금에 오늘을 견뎌내기도 하는, 그런 일상. 특별할 건 없지만 어느 순간 특별해지고야 마는 마법을 일으킨다. 저자가 이야기를 시작하던 그때, 저자만의 특별함이 시작되었을 때, 공감을 일으키며 읽는 이들의 기억을 소환한다.

 

세월이 흘러서 뒤를 돌아보면,

아, 그때, 그 시각, 그 1초가 생각나.

그때 그 말을 할 걸, 그때 시원하게 화를 낼 걸, 그때 웃어줄걸…….

타이밍을 놓친 파스타는 형편없지. (111페이지)

 

2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꺼내며 노란 표지와 바나나 우유를 지긋이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와 사뭇 다른 느낌에 잠깐 당황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냥 흐르는 시간 속 맛있는 음식들로 다가와서 웃음 나고 재밌었고,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며 눈과 입이 행복하기만 했다. 이번에 다시 만나는 이 글에서는 담담하지만 조금 더 깊어진 울림이 있더라. 지금 내 마음이 그때보다 더 고요해져서 그런지 왜인지... 그냥, 막연하게 떠올리는 음식이 아니라, 나에게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음식이 있다. 지금보다 시간이 더 흘러서 되돌아보면 오늘을 떠올리게 하는 또 다른 음식이 있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우리가 과거의 한 때를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또 생길 텐데, 그 매개가 음식이라니 글이 더 맛있어진다.

 

작년에 접했던 어떤 글에서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언급하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왜 자꾸 과거로 돌아가는 이야기에 열광하느냐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맞다. 사람이 자꾸 뒤를 되돌아보기만 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는데, 이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구나.’ 싶어서 긴장했었다. 여전히 지나간 시간만 떠올리고 그리워한다면 좋을 건 없을 거다. 내일을 살기 위해 우선 앞을 봐야 하는 게 현실이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어쩌면 오늘을 조금 더 버티게 하고, 어제의 추억으로 오늘이 웃는 날이 된다면 가끔은 이런 그리움을 불러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여전히 앞을 보고 살아가고 달려야 하는 게 우리 삶이지만, 우리 추억 속에 이런 음식 하나 없다면 사는 게 너무 서늘하잖아. 맛있는 위로가 뭔지 모른 채로 살아가게 될 것 같다. 생각해보니, 그건 별로다. ^^ 저자를 위로해준 게 팔 할이 음식이었다는 게 나와는 좀 다르지만, 그 위로의 지분이 좀 다를 뿐이지 음식이 그 위로에 들어와 있는 건 마찬가지다. 지나간 사랑도, 울고 웃으며 묶여있는 가족도, 힘들어서 잘라내고 싶었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힘든 세 세상살이에서도, 음식이 불러오는 화해와 뜨끈함, 개운함, 쫀득함, 쌉싸래함이 있어서 다행이다. 삶을 아우르는 다양한 맛을 이렇게 알아간다...

 

아쉬워서 그리운 것들,

혹여 한번 다시 찾을 날이 있겠거니, 그렇게 그리워하며

사진 한 장 품고 사는 거. 심장에 그런 아쉽고 그리운 순간들을

진 한 장처럼 품고 사는 거. 그게 꼭 바보 같기만 한 일은 아닌 듯하다. (248페이지)

 

노트를 펴고 먹고 싶은 목록을 하나씩 채우는 요즘이다. 얼마 전부터 치과 진료를 받고 있다. 이 치료가 다 끝나려면 빠르면 1년, 길게는 1년 반에서 2년 정도 걸릴 거라는 말에 ‘음, 그렇구나.’ 하며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거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는 삼겹살까지 먹고 싶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며칠 전에 엄마가 삼겹살 먹고 싶다고 할 때 못 이기는 척 먹으러 갈 것을. 엄마와 나는 식성이 달라서 같이 외식하기가 쉽지 않은데, 삼겹살도 그중 하나다.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상황이 되고 보니 엄마가 먹고 싶다던 음식부터 평소에 내가 좋아하지도 않던 음식들까지 떠오르곤 한다. 거기에 보태져 항상 맛있게 먹던 음식까지 덩달아 머릿속에서 춤을 춘다. 바삭한 튀김에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마셔야지. 절반쯤 익힌 스테이크도 먹고 싶은데. 엄마가 맛있게 담근 총각김치도 손으로 집어 먹어야겠고. 아주 진~한 초콜릿무스 케이크도 목록에 올렸다. 아, 김밥도 꼭 먹을 거다. 이번엔 사 먹지 않고 내가 직접 싸서 엄마에게도 줘야지. 하아, 슬프게도, 목록이 늘어날 때마다 배고픔도 커진다.

 

시간이 많이 흘러 오늘을 떠올릴 때, 나는 무슨 음식을 소환하고 있을까.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웃음 나게 했던 음식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은데, 꼭 그게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다. 그 시간을 불러오는 것만으로도 그 음식은 충분히 맛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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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선생님의 몇 년 전 기억을 꺼내는 순간이다. 학급에는 다양한 아이들이 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 말썽만 부리는 아이, 평범하게 모범적으로 학교생활을 하는 아이. 스즈키 선생님의 기억 속 그 아이는 평범하고 모범적인 아이였다. 정해진 규칙에 따르며 선생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 그 아이가 졸업한 후에야 알게 된 마음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선생님은 학급의 모든 아이에게 신경 써야 하고, 그 아이들과 무사히 잘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 누구 한 사람의 희생(?)일지 모를 마음마저 보듬어 주지 못했다. 그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제대로 보고 알게 된 거다.

 

몇 년 전 스즈키 선생님의 제자였던 아이. 졸업 후 그 아이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 그 아이가 그동안 써온 일기로 자기가 담임을 맡고 있던 그때 그 아이의 마음을 엿보게 되었다. 같이 청소해야 하는데도 문제아는 청소하기 싫다고 그냥 가버리고, 남아있는 몇 명의 아이도 제대로 청소하지 않는다. 설렁설렁. 함께 해야 하는 일인데도 누군가는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저 시간 보내기로 생각하고 책임감 없이 행동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 틈에 낀 한 여학생은 그저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 왜 나 혼자 청소해야 하지? 왜 나는 못하겠다고 말할 수 없는 거지? 이 상황을 다 알고 있으면서 선생님은 왜 나무라지 않는 거지?

여기서 선생님 입장을 살짝 들여다보게 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교사의 임무가 끝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행정 업무도 있고 수업 이외의 자질구레한 학교 일이 많다. 청소당번 확인하고 나무라는 것쯤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느 한 사람의 마음만 다독이는 게 간단한 일도 아니었을 테고, 그 책임을 회피한 아이들을 훈계하는 것도 만만하지 않았을 거다. 무엇보다 드러내놓고 불만을 쏟아내지 않은 여학생의 목소리까지 귀 기울일 수 없었다는 것. 그렇다고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것도 안다. 그때의 일은 스즈키 선생님에겐 아픈 기억으로 남을 것과 동시에 앞으로도 계속될 교직 생활에서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거다. 여러 가지 이유로 눈에 띄는 아이들도 있지만,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학교생활 하는 아이들에게도 목소리가 있음을 알게 해준다.

 

공부를 엄청나게 잘하지도 않았고,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도 아니었던 나는 지극히 평범했다. 친구들과 적당히 어울렸고, 크게 모나지 않게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기억한다. 특별이 나쁜 기억으로 남진 않았는데, 이 책을 보면서 평범하게 학교 생활하는 아이들을 조금 더 생각하게 되었다. 한반에 몇십 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선생님이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선생님이 수업하는 것 말고 보이는 게 없어 한가할 거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큰 목소리를 내는 아이가 아니라고 해도, 그 반에 똑같이 존재하는 아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눈빛만으로 보내는 신호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아이들과 눈빛을 한 번이라도 마주치려 애써준다면, 그 신호를 못 알아볼 리는 없을 것 같다. 과한 기대가 아니라, 지금도 어느 반에서 고요하게 생활하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하는 소박한 바람이다.

 

 

 

스즈키 선생님 시리즈의 소개를 처음 봤을 때 가장 궁금하고 기다려졌던 게 6권이다. 드디어 등장하는 ‘스즈키 재판’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기대됐다. 아마 앞의 이야기를 못 봤다면 이 재판이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겠지. 이미 스즈키 선생님 반과 중학교 2학년 아이들의 분위기를 알고 나니 이 재판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알 수 없어서 더 궁금했다.

 

여름 축제 때 스즈키 선생님 애인이 임신한 사실을 아이들이 알게 됐다. 아이들은 이 문제를 학급회의 안건으로 올리고 스즈키 선생님을 심판대에 세운다. 재판이 열릴 거란 사실을 알게 된 스즈키 선생님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교실로 들어가고, 정해진 시간 동안 아이들이 이끄는 회의를 지켜본다. 아이들이 스즈키 선생님을 재판에 부치면서 알아가고 있는 건 무엇일까?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게 과격해 보였다. (일본의 중학교는 정말 이런 건가?) 선생님의 사생활을 언급하면서 그걸 학급회의 안건으로 올릴 수 있는 건가? 게다가 무슨 죄인 취급하든 심판대에 세워놓고 몰아붙이는 분위기로? 아무래도 이건 이 만화의 그림이 표현하는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등장인물들의 표정이 너무 세게 보일 때가 많다. ^^),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이들로서는 꼭 한번 따져보고 싶은 일일 수도 있겠더라. 학교에서 성교육하고 피임법을 가르치며 성생활의 책임감을 강조하곤 했는데, 그런 것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애인을 임신시켰다? 그 사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계속 생각하고 물을 수밖에 없다. 여러 명의 학생이 저마다 가진 생각, 궁금증을 꺼내놓는다. 왜 선생님은 피임하지 않았는가, 애인의 임신으로 선생님은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책임만 진다고 하면 피임하지 않고 임신해도 괜찮은가.

 

아이들의 다양한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일방적으로 ‘너희는 이래야 해.’하는 식으로 일방통행이었다면,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아이들에게 잘 스며들지 않을 것 같다. 서로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나눔으로써 소통이 이루어지고, 오해는 이해가 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스즈키 선생님의 솔직한 생각을 들은 아이들은 그 상황에 한 발 더 다가가게 되었고, 스즈키 선생님은 자기의 임신 문제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을 만드는지 알게 된다. 물론 스즈키 재판에서 판사의 봉은 울리지 않았다. 어느 한 가지 결론으로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진행 중이다. 언젠가 아이들 스스로 자기만의 판단과 방식으로 이 문제의 답을 새길 것 같다. 그게 어떤 답이든, 이 사건을 겪으면서 성숙한 사고를 하는 아이들로 거듭날 것을 알겠다. 어떤 상황을 함부로 판단해서 말해서도 안 되며, 같은 상황이라도 그때마다 할 수 있는 선택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어떤 나이냐 하는 문제도 포함해서 말이다.

 

어떤 생각과 판단에서 성숙과 미성숙의 차이가 아니라, 방향성을 좀 더 떠올려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만드는 이야기다. ‘너희는 나이도 어리고 아직 미성년이기 때문에 안 돼!’ 하는 정해진 가르침이 아니라, 문제를 여러 방향으로 열어두고 하나씩 찾아가서 그 답을 스스로 보게 하는 과정이었다. 스즈키 선생님 등에 식은땀 좀 흘렸겠군. ^^

 

 

 

스즈키 재판의 결과가 한마디로 정리되지 않고 끝났다. 그건 여러 생각이 공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콘돔이 없이 관계하고 싶다는 생각과 그런데도 지켜야 할 규칙 같은 게 같은 선상에서 고민되기에 말이다. 어쨌든 한바탕 바람을 일으킨 스즈키 재판은 서로의 생각을 읽고 책임감을 느끼고 나아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에 답은 없어도 조용히 지나갈 수 있었다.

 

여기서 선생님의 입장을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생기는데, 다루코 선생님의 발광이다. 스즈키 선생님의 일로 아이들에게 어떻게 성교육을 해야 할지 혼란에 빠진 다루코 선생님의 심리가 단순하게 보이지 않는다. 문제가 한두 가지는 아니었다. 점점 쌓여왔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갑자기 악화된 상황이다. 아이들을 대하는 선생님의 자리에서 생기는 일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할 게 아니다. 3학년 아이들이 다루코 선생님의 수업에 파업하고, 다루코 선생님은 감정적으로 폭주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게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다. 내가 하는 수업을 아이들이 거부한다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그때 필요한 건 무엇보다 대화일 텐데, 서로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는 어떤 것도 시도하기 어렵다. 교장 선생님까지 나서지만, 극과 극을 달리는 견해 차이는 좁혀지기 어렵다. 차분하게 시작하는 게 필요한데 아직 그런 상황이 만들어지지 못한 듯하다. 아이들은 거부, 다루코 선생님은 폭주. 마음을 정돈할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은 각자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행동하게 된다. 3학년 학생들이 다루코 선생님의 수업의 어떤 게 불만이어서 그렇게 된 건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최선을 다해왔음에도 몰라줄 수 있고, 뭔가 더 채워지길 바라는 마음에 불만을 터트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화가 오가기에 앞서 터지기부터 한 거라면, 나는 이 상황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궁금하면서도 두렵다. 학교라는 곳에서 선생님의 존재가 무엇이라고 새로운 개념이 써질지 몰라서 말이다. 그저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 정도로 여긴다면 기계적일 것 같고, 한없이 인간적이기만 하기에는 적당한 통제와 규제가 필요한 곳이기에 과한 것 같고... 다루코 선생님의 폭주하는 표정이 고통스러워 보이면서도 그 마음 한 번 자세히 듣고 싶어졌다. 선생님의 자리에서 가장 힘든 건 뭔가요? 

 

 

 

다루코 선생님의 일로 혼란에 빠진 아이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8권이다. 아이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지만,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 의견이다. 다수와 소수로 나뉘고, 그때 소수의 의견이 힘을 내지 못하는 것 역시 안타깝다. 서로가 목소리를 높이지만, 이 상황을 보니 각자의 얘기만 하겠다는 것으로 보여 혼란스럽다. 아이들의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어른들 세계에서도 늘 보아오던 일이라 더 두려워진다. 아이들이 이 순간을 잘 건너가지 못하면, 이 상황을 지혜롭게 배우고 가지 못하면, 결국은 나만의 생각과 목소리가 전부인 것으로 살아가게 될까 봐... 그에 스즈키 선생님의 한 마디가 아이들의 혼란을 잠재운다. 완벽한 승리도 없고, 이해하는 게 이기는 것도 아니라는, 이해에 가까워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의미가 담긴 말을 할 때의 스즈키 선생님은 참 멋져 보였다. 이상적인 선생님 상이라고 해야 할까. ^^

 

이어지는 학생회 선거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학생회 임원의 후보로 나서는 아이들과 선거의 모양을 지켜보는 게 재밌다. 아이들의 세계가 어른들의 세계와 너무 닮아있음을 볼 때마다 씁쓸해지면서, 아이들이 그 시간을 잘 배워갔으면 하는 바람이 멈추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어느 한순간 중요하지 않을 때가 없겠지만, 특히 더 예민하게 지켜보게 되는 시기인 것 같다. 나도 지나왔고 지금 누군가도 지나가고 있을 그 시간을 더 눈여겨보게 된다. 머리와 마음속에, 온전하게 따뜻하고 옳은 것만을 담고 갔으면 하는 기적 같은 바람을 갖고서...

 

아이들의 학생회 선거가 마무리되지 않고 8권이 끝났다. 11권까지 어떤 이야기가 더 펼쳐질지 모르겠지만, 이제껏 보여준 스즈키 선생님의 경험과 노하우가 아이들과 함께 가는 그 길에서 꽉꽉 채우게 될 것을 기대해본다.

 

그나저나 이 만화가 일본 중학생의 생활 그대로일까 하는 궁금증은 여전하다. 내가 중학생일 때와 너무 달라서 혼란스럽기도 하고, 지금 대한민국의 중학교도 이런 분위기인지 궁금하고, 한국과 일본의 차이라고 이해해야 할지 어떨지도 모르겠고... 내년이면 중학교에 들어가는 조카에게 많은 말을 듣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 이 시기의 아이들을 이해하는 데는 좀 무리가 있는 듯하다. 그 아이들과 나 사이, 그 생각과 태도의 차이가 쉽게 좁혀지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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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3년 정도 신경과 진료를 받고 있다. 그전 병원에서 증상에 대한 원인을 찾지 못했던 것을 지금 다니는 병원에서 찾아주고 꾸준히 진료해주고 있다. 근처 대학병원과 연계한 병원이라 여기서 안 되면 소견서 가지고 대학병원으로 가려고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잘 진료 받고 있고 큰 문제 없이 다니고 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두 달에 한 번 정도 가고 있는데, 처방받는 약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 거의 같은 증상으로 찾아가니 그 증상을 해결하는 약도 그리 많이 달라질 게 없겠지.

 

이번에는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진료를 받으러 갔다. 진료실에 들어서고 선생님이 환자에게 하는, 늘 반복되는 질문이 계속됐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상태는 어떠한지, 잠은 잘 주무시는지... 늘 그렇듯 나오는 대답도 똑같다. 요즘 이러한 생활을 하고 있다면서 크게 변함없는 일상을 얘기했다. 선생님에게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언급한 적은 없다. 대부분 두루뭉술하게 ‘이렇다’라고 얘기해왔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선생님이 좀 더 질문을 늘린다. ‘이렇다’라고 말하니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 하나하나 차근차근 묻는다. 신경 쓰고 있는, 고통스러운 그 문제가 해결이 될 일인지 물으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답이 이어졌다.

 

처음이다. 3년 동안 마주한 그 선생님과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된 것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거라고 한 번도 예상한 적도 없다. 정신과 진료도 아닌데 이 선생님과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주고받을지 몰랐다. 어차피 환자는 엄마이고, 나는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같은 진료실에 동행했을 뿐이다. 점점 얘기가 길어지자 선생님은 나를 향해 묻기도 하고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늘 그랬다. 이번에 다른 점은 좀 더 사적인 이야기가 깊어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뿐이다. 선생님이 하는 말도 평소보다 많아졌다.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을 계속했다. 환자는 엄마인데, 선생님과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나도 모르게 펑펑 울고 있었다. 그러면서 평소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고 엄마하고만 공유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는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비정상인데 누구에게 말을 할 수 있겠느냐며 따져 물었다. 이건 분명 잘못된 거잖아요, 누구라도 욕할 만한 생각인 거잖아요, 저는 지금 정말 그렇게 하고 싶거든요,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생각이 없거든요? 잠도 잘 자고 싶어요, 웃고 싶어요, 밥도 맛있게 먹어보고 싶어요. 무엇보다, 행복해지고 싶어요. 그 행복이란 게 가능해지려면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바로 그거거든요. 그런데 해결되지 않을 거거든요. 간절하게 바라게 되는 일이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누구도 그런 소원을 바라는 사람이 없을 거잖아요. 그래서 제가 비정상인 거잖아요...

 

한참을 들으며 중간에 한 번씩 대꾸하던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정상입니다.”

 

“어떻게 이게 정상일 수가 있어요. 누가 봐도 저를 욕할 일인데요? 이런 마음을 욕하고 벌을 주려고 할 텐데요.”

 

“그게 정상입니다. 그런 상황에 그런 마음 드는 게 지극히 정상입니다.”

 

“정말요?”

 

“네. 맞아요.”

 

“정말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정상인 거니까요.”

 

계속 의심하면서, 끊임없이 물으며,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정상이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

 

하아... 또 한 번 통곡하듯 울고 말았다. 이런 비정상이 있을 수 있나 싶게 생각했던 게 정상이란다. 그게 맞댄다. 그러니 염려 말라고 한다. 그런 마음이 들면 드는 대로 괜찮은 거란다. 좀 더 시간이 흐르고 나중에 이러이러한 마음이 들게 될 텐데, 그것마저도 거부할 수 없을 거라고 한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또 이러이러한 마음이 들게 될 거라고. 그게 순서이고, 거부할 수 없고, 그런 시간을 맞이해야 한다고. 의학적으로도 그렇고, 오랜 시간 많은 환자와 가족들을 보면서 확인한 결과, 열이면 열 모두 그러하다고. 경험에서 나온 말이고, 정신적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일 것이니 그것마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마음을 갖는 게 너무 싫다고 했는데,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싫다고, 거부한다고 해서 그런 마음이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니라고... 그러니 그때가 되면 그 마음을 받아들이고, 지금은 또 지금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게 덜 불행해지는 방법이라고 했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불화가 생기는 이유는 상대에게 바라는 게 있어서, 라고 했다. 상대에게 무심하고 아무 상관도 없을 거라면 불화가 생길 이유가 없다고. 상대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더 좋은 관계가 되고 싶어서 상대에게 자꾸 바라는 게 생기는 거라면서. 그게 채워지지 못할 때 불화가 생기고, 고통의 시간이 이어지며, 상처로 깊숙하게 남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 계속 생각했다. 지금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상대에게 나는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은 의지가 있었나? 전혀 없다. 칼처럼 잘라내고 끊어내고 싶었지, 어떤 관계가 되고 싶지도 않고 끊어내고 싶은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면? 내가 지금 겪는 이 고통의 무게만큼이나 나는 그 상대에게 무언가를 바라던 게 있었던가? 있다. 오직 한 가지가 있더라.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원하는 단 한 가지가 있었다. 그걸 바라는 게 이렇게 큰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일인가.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자꾸 머릿속에 내가 비정상이라고 배워왔던 생각들이 가득한 건데... 병원에 다녀온 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선생님 말씀을 자꾸 곱씹고 있다. 오직 한 가지 바라고 있는 그것마저 버린다면, 무심해진다면, 눈 감고 귀 닫고 모른 척한다면, 이 불화도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짙어지는 중이다.

 

 

진료시간 5분을 넘기는 일이 굉장히 힘든 일인데, 선생님은 우리에게 20여 분의 시간을 내주었다. 오래 보아온 환자와의 유대감을 만들어준 것일까. 아니면 그동안 풀어내지 못했던 진짜 원인을 이렇게 찾아내어 준 걸까. 일어나서 진료실 밖으로 나오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선생님, 다음에는 엄마가 아니라 제가 진료받으러 올게요. 저에게 더 필요한 시간이었어요. 고맙습니다.”

 

진료실 밖으로 나가면서 인사하니 선생님이 웃더라. 3년 동안 다니면서 가벼운 농담을 건네기도 했는데, 그 선생님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다. 이번에 웃는 걸 처음 봤다. 다음에는, 조금 더 편하게 볼 수 있을까요? 라고 묻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동안 어떤 병원에 다녀도, 대학 병원이든 동네 병원이든, 의사들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가 없었다. 그들이 의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 인간적으로 호감이 없던 대상이었다. 실제로 여러 의사를 겪으면서 반감이 생길만한 일도 있었던지라, 그저 한 개인이 선택한 직업이고 그들 나름의 밥그릇을 챙기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번에 이 선생님과 보낸 20여 분의 시간이 그 생각을 바꿔놓을 정도로 큰 힘을 발휘했다. 적어도 이 선생님에게만은 의사 이전에 인간적인 신뢰를 무한히 보낼 수 있을 듯하다. 선생님이 내놓은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그 정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나는, 정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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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다이어리의 첫 장에 올해 하고 싶은 일들을 적었다.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일들. 그래도 한 번은 꼭 해보고 싶은 일들. 어쩌면 불가능할 확률이 높기에 조금은 모험 같은 바람을 담아 소박한 소망을 적었다. 남자는 우연히 여자의 다이어리의 그 페이지를 보게 된다. 여자를 만나러 가는 어느 날, 남자는 다짐하며 집을 나선다. 여자가 다이어리에 적은 그 많은 바람 중의 하나는 이뤄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여자의 목록 중 한 가지를 이뤄주려 어딘가를 향한다. 여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가능’으로 바꿔놓는다. 여자는 놀랐다. 이렇게도 이룰 수 있는 일이었구나, 하는 마음에.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일이 별것 아닌 것처럼, 이 남자로 이뤄지는 순간 때문에... 남자는 천기누설을 알려주겠다며 말한다. 다음 생이라는 건 없다고, 설령 다음 생이 있다고 해도 그때 다시 태어나면 전생을 기억이나 할 수 있겠느냐고, 기억도 못 하는 전생에서 바라던 것을 그때 이룰 수 있겠느냐고. 그러니 이번 생에서 하고 싶은 건 지금, 이번 생에서, 지금, 해야 한다고...

 

 

 

 

 

 

 

 

 

좋아하는 소설의 한 장면이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남자가 저 말을 하는 건 여자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애를 쓰면서도 쑥스러워서 핑계 대는 말일 거로 생각한 적이 있다. 이 소설을 몇 번 재독 했는데, 그때마다 저 장면에서 한참을 멈추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남자가 마음 표현하는데 어색해서 하는 말일 거로 생각했던 게, 두 번째 세 번째 읽는데 점점 남자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된다. 정말 다음 생이라는 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러니 이번 생에서 다음 생으로 미루는 일을, 다음 생에서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짙어지곤 했다. 종교적인 의미로도 많은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굳이 그걸 믿는다거나 믿지 않는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게 더 맞겠다. 그 정도로 나에게 크게 와 닿지 않는 말이었는데, 요즘은 가끔 궁금해진다. 남자의 말처럼, 정말 다음 생이 없을까. 이번 생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위로하는 마음에서라도 하게 되는 다짐을, 정말 다음 생에서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걸까.

 

‘만약’이라는 가정을 좋아하지도 않고, ‘다음에’라는 약속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굳이 다음 생이 아니어도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냥 하면 되고, 할 수 없는 건 포기하기 마련이라 크게 의미를 두는 단어가 아니었다. 만족도 아니고 포기도 아닌 것들에 대해 ‘만약’이라는 가정은, 지금의 불안을 잠재우려는, 몇 분 동안만 지속할 ‘순간의 처방전’ 같았다. ‘다음에’라는 약속 역시 내가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에 누군가에게 쉽게 하지 않게 되는 말이 되었다. 그래서 소설 속 남자의 말에 종종 공감했다. 진짜 원하는 건 이번 생에서 해야 하고, 기억도 못 하는 다음 생에 대한 기대나 약속 같은 건 의미 없어 보였다. 그게 맞는 거로 여겼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만약에’라는 가정을 떠올리고, ‘다음 생’이라는 부질없는 기대를 하기도 하고,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는 의미 없는 바람을 자꾸 하게 된다. 다시 태어나서 하고 싶은 게 많은 것도 아니다. 무조건 돈이 많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지금 못하고 살았던 모든 것을 다 싸가서 이루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단 하나, 딱 하나, 오직 하나.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딸 바보 아빠’의 딸로 태어나고 싶다. 아니, ‘딸 바보’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가족이 소중한 줄 알고, 자기가 만든 가정에 책임감을 느끼며, 자식을 사랑하면서 키워야 한다는 그 뻔하고 당연한 진리를 아는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고 싶다. 불가능할까? 정말 다음 생의 나는 이런 바람을 기억조차 못 할까? 이게 그렇게 거창한 바람인 건가? 분명한 건, 나의 이번 생에 아주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고 해도 결코 이룰 수 있는 바람이 아니라는 거다. 이미 이번 생에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아주 오래전에 확인한 것이니, 죽어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절대 바랄 수 있는 소망이 아닌 거잖아. 그러니 자꾸 기대고 싶은 가정일 수밖에. 정말 다음 생이 있다면, 이라는 가정을 자꾸 바라게 되는 걸 어쩔 수가 없잖아...

 

12월 한 달을 병원에서 보내고 있다. 매일 저녁에 병원으로 가서 아침 찬바람을 맞으면서 집으로 온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잘 모르겠다. 며칠 전에는 친구가 보낸 문자 한 통에 크리스마스인 걸 알았다. 병실 입구 보호자 휴게실에서 사람들이 케이크를 먹고 있기에 누구 생일파티를 병원에서 하는 줄 알았는데, 그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던 거다. 1년 반 사이에 아버지의 병원행이 벌써 세 번째. 기간으로 따지면 두 달을 넘기고 있다. 중환자실에서 열흘을 보내고 겨우 일반실로 옮기니 간병이 문제가 된다. 24시간 보호자 대기해야 가능한 일반실행이 처음부터 꼬이고 삐걱댔다. 작년에는 전화 한 통에 바로 구해지던 간병인이 이번에는 왜 그렇게 구하기 힘든 건지, 이대로라면 그냥 중환자실에 있어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했다. 업체 서너 군데를 알아봐도 지금 바로 올 수 있는 사람이 없단다. 연말이라 그런지 왜 그런지 모르겠다. 지인께 부탁해서 건너건너 겨우 한 명 구했는데, 그나마도 계약된 시간보다 40분씩 늦는다고 미리 말한다. 병원까지 오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린다면서 아침 시간 40분 늦는 것에 이해를 구한다. 아쉬운 입장이라 바로 오케이 하고 시작했는데, 며칠 지켜보니 생각보다 간병인이 잘 봐주고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면서 슬슬 사적인 것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어 궁금한가 보다. 왜 다른 가족들은 찾아오지 않느냐고 묻는다. 다들 멀리 살고 있고 연말이라 바빠서요, 라고 둘러댔다. ‘아무도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아요.’라고, ‘나도 여기서 도망가고 싶어요.’라고 사실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진짜 그러고 싶은데, 도망가고 싶은데...

 

겨울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어서 다음 생을 만나고 싶은 건, 정말, 아이 같은, 철없는 바람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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