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 먹는 행위나 음식 자체에 엄청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나지만, 그 음식이 면이라면 생각이 달라진다. 여전히 빠르고 쉽게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 같은 걸 선호하지만, 그 패스트푸드에 면을 포함하고 싶은 거다. 간단하게 사 먹거나 만들어 먹을 수 있고, 빠른 시간에 해결할 수 있고. ^^ 물론 간단하게 만든다는 것은 포장된 걸 단순히 끓여 먹는 수준을 말하는 거고, 먹는 속도도 남들보다 느리지 않다. 맛은 보장 못 한다. 제대로 만들어서 파는 전문가의 손길만 하랴. 그저 흉내만 내는 맛, 그렇게라도 한 끼 해결하고 비슷한 맛을 내는 정도로 만족하는 것도 감지덕지. 반드시 끼니를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면 음식은 더욱 나를 반긴다. 특히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자랐는데도 엄마와 난 식성이 다르다. 위에서 말했지만 나는 간단하게 허기를 채우는 정도로만 먹는 걸 선호하는데, 엄마는 밥에 찌개 종류를 좋아한다. 외식할 때도 무슨 탕이나 구이 같은 것을 먹으러 가자고 하고, 나는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 데서 주섬주섬 몇 번 먹고 마는 걸 좋아하니 마음을 통일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엄마와 나의 마음이 통할 때가 있는데, 바로 국수를 좋아한다는 거다. 둘 다 위가 좋은 편이 아니어서 면 종류는 피해야 한다고 항상 지적받는데, 그런데도 자꾸자꾸 손이 가는 건 새우 과자가 아니라 국수다. 그러니 이런 책이 반가울 수밖에. 저절로 눈에 들어오는 표지 때문에 책의 종이에 코를 킁킁대며 국물 냄새를 흡입했다.

 

 

 

『어이없게도 국수』 제목부터 눈에 저절로 들어온다. ^^ 저자의 나이 마흔에 닥쳐온 변화가 감당이 안 될 때 글쓰기를 떠올렸단다. 자신을 들여다보고 진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글쓰기. 주제를 무엇으로 할지 정한다면 15년여의 커리어의 그녀에게 글쓰기가 처음부터 벽으로 다가오진 않았을 듯하다. 그러면 여기서 문제. 그녀는 무엇을 쓰려고 했을까. 생각도 하고 고민도 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 자신의 일상, 공부, 책, 아이들. 많은 것을 떠올렸으나 그녀의 40년 인생에서 꾸준히 옆에 있었던 것은 딱 하나였단다. 바로 국수. 어이없게도, 국수였단다. (일단 한번 웃어보고) 하고 많은 것 중에 국수를 떠올린 그녀가, 나도 잠깐 어이없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꾸준히 자신의 곁에 있었다는 게 국수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고 기쁜 일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해봤는데, 내 인생 통틀어 줄곧 내 곁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게, 나는 하나도 없더라. 그러니 저자의 국수 찬양과 견문이 경건해 보일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 하나쯤 있을 거라 쉽게 생각했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거다. '기껏해야 국수'가 아니라 '대단한 국수'였던 거다. 저자의 추억을 채우고, 성장에 함께 하며, 위로가 되었던 건 다름 아닌 국수였다. 인생의 중심이 흔들릴 때 지켜주었다던 국수 이야기다.

 

콩나물, 그날 들어온 생선, 기계로 뽑은 납작한 칼국수 면을 고춧가루 듬뿍 풀어 끓여낸 모리국수는 원래 고된 뱃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부들을 위해 만들어주던 음식이었다. 국물이 시뻘게지도록 투하한 고춧가루도 그렇지만 마늘이 듬뿍 들어간 데다 생선과 국수의 전분으로 걸쭉해진 국물이 칼칼하고 든든했다. (20페이지)

 

유전적으로 뼛속까지 면식수행자인 저자의 입맛이다. 하루 한 끼는 국수를 먹으며 살아온 저자에게 국수는 남다르다. 저자의 삶에 국수가 강하게 각인되는 이유다. 특히 사람과 함께 한 국수의 기억은 대단했다. 단순히 뱃속을 채우며 먹는 행위에 그치는 게 아니라, 국수를 먹으면서 치유되는 마음의 상태를 경험했던 거다. 그러니 이런 국수 찬양이 가능해진 거 아닐까. ^^ 한 사람의 일생을 담아낸 기억으로 함께 하는 국수. 소소한 일상부터 크고 작은 일 옆에 항상 국수가 있었다. 삶의 형태와 배경을 그대로 담고 있는 우리네 세상살이가 그대로 담겨 국수의 의미를 새기기도 한다. 고된 뱃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부들을 위해 만들어주었다는 얼큰한 모리국수는 삶의 고된 순간을 견디게 해주는 매운 맛이 되기도 했다. 처음 국수를 만나게 해준 고모와의 추억, 야근에 몸이 늘어지지 않게 힘을 주었던 두부국수와 비빔국수, 여럿이 함께 먹어야만 그 진가를 발휘하는 닭한마리 국수, 소맥과 삼겹살의 강림 후에 열기를 식혀주는 열무냉국수, 손때 묻은 덩어리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하는 수제비, 진한 팥국물에 담가 조금 퍼졌을 때 먹으면 맛있는 팥칼국수, 참새방앗간 같은 고속도로의 가락국수도 빼놓을 수 없는 국수 가족이다.

 

가락국수 하니까 생각나는데, 예전에 만나던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집 앞으로 찾아와 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했다. 집 근처에 국숫집이 없는 것 같아 근처의 포장마차를 머릿속에서 찾고 있는데,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손지갑 하나 들고 슬리퍼에 반바지 차림으로 나왔는데 도대체 어디까지 가서 국수를 먹자는 건가 싶었다.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일단 탔으니 가보자 했는데, 도착한 곳은 내가 살던 곳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고속도로 휴게소였다. 가락국수가 너무 먹고 싶었는데, 휴게소만한 맛이 없다나 뭐라나.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따라 들어가 먹었는데, 역시, 그랬다. 맛이 있네 없네 여러 말을 해도 가락국수 맛은 고속도로 휴게소를 따라올 수가 없었던 거다. 인정!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저자 못지않은 국수의 추억이 있었네그려.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중국집은 화교들이 주인이었고, 주인이 당연히 주방을 꿰차고 있었다. 그런데 1960년대 들어 박정희 정권에서 혹독한 화교 탄압 정책을 펴면서 재산을 몰수당하다시피 한 수많은 화교들이 한국을 떠나게 되자 이를 계기로 중국집 주방에 한국인들이 들어서게 되었단다. 이때까지만 해도 짬뽕은 매운 음식이 아니었다는 것이 당시 중국집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분들과 옛 맛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의 전언이다. 화교들의 대거 이탈로 '어쩔 수 없이' 주방에 한국인들이 입성하면서 매운 걸 유난히 좋아하는 우리네 식성에 맞게 고출가루가 듬뿍 든 얼큰한 빨간 짬뽕으로 진화했다는 얘기다. 이는 1970 들어 급성장한 국내 외식산업의 두드러진 특성인 '매운맛의 보편화'라는 트렌드와도 일치한다. (100~101페이지)

 

국수에 누군가의 추억만 담긴 게 아니다. 국수는 한 시대를 기록하는 역사도 품고 있다. 지금 우리가 먹고 즐기는 짬뽕은 처음엔 빨간 국물도 아니고 매운 맛도 아니었다는 것. 오랜 시간 진주를 벗어나지 않고 그 맛을 이어온 진주냉면은 이제야 경남 지역 일부에서라도 맛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올챙이국수, 막국수, 옹심이 같은 가난한 자들의 식량이었다던 메밀은 배고픔과 동의어로 들린다. 한국의 거의 최초 패스트푸드였다던 구포국수의 명맥이 궁금하나 그 흔적을 찾지 못하게 되었고, 물자의 부족과 빈곤은 밀면과 비빔당면을 탄생시켰다. 그러고 보면 국수는 상당히 만만한 음식이었나 보다. 배고픔의 허덕일 때 금방 찾아내고 응용하여 허기를 달래주곤 했던 것이 국수의 다양한 버전과 발전을 이루어낸 건 아니었을까.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들려준 29개의 에피소드가 대부분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저자 자신의 기억이 보태어진 국수의 추억이 기록되는 거였다. 누구에게나 그런 기억 하나쯤 심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그런 이유다. 겨우 국수 한 가닥일 수 있지만 그 한 가닥이 모여 일생의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어느 순간 불쑥 튀어 나와 삶을 견디게 해주곤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물론 그 대상이 국수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저자의 이야기가 큰 거부감 없이, 낯설지도 않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마음 한 자락 열어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살아보니 그런 힘을 발휘하는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조금 알 것도 같다. 때로 위로가 되고, 흔들릴 때마다 붙잡아주며 구제하고, 한 템포 쉬어가게 해줄 수 있음을...

 

'나에게도 그런 음식이 있나?' 곰곰 생각하다가 떠오른 건 짬뽕이다. 미친 듯이 허기짐이 찾아올 때, 가슴 속이 답답할 때 매콤한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랄 때. 그럴 때면 집 근처의 작은 중국집까지 직접 가서 먹는다. 전화 한통이면 금방 배달 오는데 뭐 하러 굳이 가서 먹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짬뽕만큼은 만들어져 배달 오는 그 시간도 별로다. 그 몇 분 사이에 불어버린 면이 싫어질 것 같아서. 주로 배달 위주라 매장에는 겨우 테이블이 서너 개뿐인 그곳까지 가서 먹는 게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부끄러움이고 뭐고 없다. 일단 먹고 보는 거다. 다 먹고 난 후에 찾아올 개운함을 기대하면서 그 매운 국물을 들이켠다. 언제부터 짬뽕을 그렇게 먹었는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데, 그 시작 역시 엉뚱하다. 이십대 초반이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예쁘게, 조금씩 먹어도 모자랄 판에 짬뽕 한 그릇을 다 비워낸 적이 있다. 그릇째 들고 짬뽕 국물을 들이켰다. 앞에 앉은 그가 한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야, 짬뽕을 너처럼 맛있게, 한 그릇 다 먹는 여자는 첨 봤다." 그러면서 쌍엄지까지 추켜올렸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민망한 기억인데, 그때 난 뭔가가 정말 답답했던 것 같다. 그 매스꺼운 속을 풀어내지 않고서는 못 살 것 같았는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떨리고 설레는데, 짬뽕을 그리 먹을 수는 없었을 거다. 분명! (아마도... ㅠㅠ)

 

비록 내가 먹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만, 먹는 일이 단순히 먹는 행위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그 이상을 풀어가는 과정임을 알고 있다. 음식이기 이전에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소통을 이루어내는 하나의 매개가 되는 거다. 같이 먹는 음식, 먹으며 얘기하는 자리, 포만감이 불러오는 마음의 여유, 날카롭게 곤두서있던 시선을 누그러트리기도 하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맛있는 것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으로 쌓여가는 정 마일리지까지. 음식이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세상 경험하는 중요한 자리가 되기도 하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관계의 창이 되기도 한다.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의미 있는 행위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고 있다. 물론 이 책은 먹는다는 것 한 가지를 말하는 게 아니다. 저자가 자신의 인생에 동반한 국수를 통해 어떤 삶을 살아왔고, 또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를 말하고 있다. 국수가 지나온 삶을 추억하게 하고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게 우습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그런 웃음을 다 날아가고 얼굴에 추억의 웃음꽃이 피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 힘이 되는 그 어떤 것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 짓게 되는 것, 행복해지게 하는 것, 삶을 기운 나게 하는 것. 그게 저자에게는 국수였을 텐데, 이 책을 읽을 당신에게는 무엇이 그 자리를 채워주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금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는, 뜨거운 국물에 담긴 면발을 땡기고 싶다. 호로록~ 호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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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통해 중고책을 구매할 때 책 상태를 가장 먼저 확인하게 되는데, 보통 ‘최상’으로 기재된 책을 사곤 했다. 이왕이면 깨끗한 책으로 읽고 싶기도 하고, 혹시 나도 한번 읽고 되팔게 될 때 좋은 상태 그대로 팔고 싶기에 그렇기도 하다. 아니면, 꼭 필요한 책인데 책 상태가 별로인 것만 있다면 그것도 그냥 구매하기도 하는데, 언젠가는 그 책의 최상인 상태를 다시 구하곤 한다. ^^

 

며칠 전, 알라딘에서 새 책을 구매하면서 직배송으로 올라온 중고도서 한 권을 장바구니에 같이 담았다. 절판본이기도 하고 정가 이상으로 거래되는 책인데 내 눈에 띄어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글이라 한 권 더 사서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해줘야겠다 싶은 마음에 냉큼 담았는데, 책 상태가 ‘상’으로 기재되어 있다. 제품 상세페이지 열어봐도 어떤 부분에서 그 책이 상급으로 분류되는지 따로 설명이 없어서 확인할 수 없었다. 어디가 찢어졌나? 너무 낡았나? 그래도 상급 정도면 지저분한 상태는 아닐 것이니 그냥 결제했다. 막상 도착한 책을 살펴보니 새 책과 같았다. 너무 깨끗했다. 담당자가 실수로, 혹은 지나치게 완벽한 사람이라 ‘이 정도의 책은 상급으로 할 거야.’라고 생각했을까? 뭐, 암튼, 구매자의 입장에서 좋았다. 이왕 받은 김에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싶어서 펼쳤는데, 이 책이 왜 상급으로 분류되었는지 알겠더라. 이 책이 양장본이었는데, 양장본 뒤표지 안쪽에 처음 이 책을 구매한 사람의 메모가 있었다.

 

처음에 책 보자마자 실장님 생각이 났는데 선물로 드릴게요! 재미있게 읽으세용. ^^*

2010, 8, 3 은영이~

 

 

2010년 8월 3일에, (아마도 여직원일 터인) 은영이가, (같은(?) 직장의 상사인) 실장님에게, (뭔가 어울릴 듯한) 이 책을 보자마자 생각나서, (마음을 담아) 선물로 안겼던 것. ^^

 

누군가의 지극히 사적인 메모이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더 어떤 마음을 담아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뜬금없이 호기심이 쏠렸다. 이 책의 어떤 면을 보고 실장님에게 잘 맞을 책이라는 판단을 했는지, 혹시 은영이는 실장님에게 실장님 이상의 감정이 있었는지, 실장님은 이 책을 선물 받고 다 읽긴 했을는지, 지금 은영과 실장님은 여전히 어떤 관계로든 교류하며 지내는 사이인지... 무엇보다 가장 궁금했던 건 이거다. 이 책은 어떻게 5년여의 세월이 흘러 나에게까지 왔을까, 하는 것. 실장님이 이 책을 다 읽고 안 읽고의 여부와 상관없이, 어떻게 이 책이 실장님의 손에서 흘러나왔나 하는 물음표가 생겼다. 실장님은 이 책을 헌책방에 팔았는지, 너도 한번 읽어봐라 하며 실장님의 지인에게 주었던 건지, 어딘가에서 잃어버렸는지, 그 손에서 떠나온 책은 5년 동안 어떤 주인을 만나고 다녔을지... 별것 아닌데, 몰라도 그만인데, 중고책 한두 번 사는 것도 아닌데, 괜히 궁금해졌다.

 

 

사실 나도 아주 오래 전에는 구입한 책 첫 장에 구입한 날짜나 어떤 마음으로 구입했는지 하는 마음을 적기도 했다. 책 하단에는 내 책도장을 찍기도 했고, 맘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밑줄을 긋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선물할 때 위의 사연처럼 책의 첫 장에 마음을 담은 메모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냥 있는 그대로 읽거나 보관하기 시작했다. 책도장 절대 안 찍고, 메모나 밑줄도 안 한다. 아마도 소장하지 않는 책을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하면서 그랬던 듯하다. 누군가가 받을 책이 깨끗하고 새 책 같았으면 하는 마음. 별것 아닌 마음인데, 내가 받는다고 생각하니 그랬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 같은 것이다. 누군가는 나와 생각이 많이 다를 수도 있지만, 뭐, 나는 그렇다고.

 

 

 

이런 사연 있는 책을 받은 경우가 2년 전쯤에도 한번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예상하지 못했던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최근에 출간된 책에서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아주 오래전에 출간된 책을 구입할 때 만날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했다.

거의 20년 전쯤에 출간된, 지금은 절판된 책을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그냥 딱 한번만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서 굳이 찾아다녔다. 아주 얇은 문학도서였다. 오랫동안 단 한권의 중고도 보이지 않다가 발견한 반가움에 냉큼 결제했다. 책 상태도 나쁘지 않아서 만족했지만, 무엇보다 그 책의 전 주인이 적은 메모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이 책이 나에게 오기까지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주인들을 만났을지 모르겠지만, 날짜를 보아하니 아마도 이 책의 처음 주인이 아니었나 싶다. 이 책의 출간일이 1996년 9월 6일, 책 안에 써진 이의 흔적은 1996년 10월 27일. 이 정도면 처음 이 책을 새 책 상태로 구매한 이의 흔적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마음속에서는 공부를 하고자 하나 뭔지 모르는 힘이 날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지금도 도서관 자리를 옮긴 채 건성으로 종이 위에 눈동자를 남겨놓을 뿐이다. 멍한 머릿속은 어떠한 input도 거부한 채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 그러나 실망이란 말만큼은 하지 말자.

너무도 익숙해버린 단어지만 정말 이젠 떨쳐낼 때다.

넌 네 나름대로 열심히 삶을 즐겼고 여러 환경의 변화로 새로운 방향 전환이 필요한 과도기일 뿐이다.

더 이상 내 삶을 타인의 시각에, 잣대에 맡기지 말자.

내 삶에 행동 주체, 판단 주체로서 내 자신을 세워야 한다.

1996. 10. 27. 일요일

도서관 2열에서 교수법 print를 기다리며... ”

 

이렇게 쓰여 있다.

 

글씨체로 성별을 구별해도 된다면, 글쓴이는 아마도 남학생일 것 같다. 남학생이라면 제법 글씨를 잘 쓰는 편인 것도 같다. 나에게 온 이 책이 문학 수업을 들을 때 참고할 만한 책이라는 애기를 들었는데, 이 책을 소장했던 사람이 아마도 문학을 전공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교수법 print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사범대쪽 학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니면, 그냥 이 수업이 맘에 들어서 수강한 학생일 수도 있겠고...

 

일요일의 도서관. 수업에 필요한 복사물을 기다리는 시간.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나, 또 그만큼 따라주지 않는 머릿속이 안타까움으로 가득했을 수도 있겠다. 눈으로는 글자를 쫓고 있으나 읽는 그대로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 또한 공감했다. 자꾸만 실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오직 자신을 위한 일이어야 하는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음에 답답하고 힘든 마음을 토로하는 공간으로, 이 책이 선택되었던 듯하다. 단 몇 줄의 글이 그(혹은 그녀일지도 모를)의 마음을 풀어놓는, 다시금 열정으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만들어줄 수 있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누군가의 글을 바라보던 시간이었다.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건너 나에게 왔던 이 책은, 다시 또 내 마음을 풀어놓는 공간이 될지도 모르겠지, 하면서. 누군가의 흔적으로 시작된 시간여행, 1996년에 학생이었을 이 책의 전 주인은 아마도 나랑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니지 않았을까 하는 공감. 비슷한 고민으로 그 시간을 보냈을 동기 같은 마음. 일요일의 도서관 2열에서 수업자료, 혹은 과제물을 위한 자료를 기다리는 그 시간의 무료함이나 불안함일 수도 있겠지. 이름도 성별도 나이도 모를 누군가의 흔적 하나로, 타임슬립하여 십몇 년 전의 그 시간으로 잠깐, 돌아가고 싶어지게 했던 순간이다.

 

 

운명처럼 내 손에 들어온 헌책에서 지나간 것들의 흔적을 발견할 때면 내 심장의 박동소리가 커진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잊히기도 하고,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 일부러 저장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다시금 마주하는 시간이 온다. 설핏 웃다가, 눈꼬리에 눈물 한 방울 걸어놓았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떨림과 울림이 찾아오거나... 시간은 흐르고,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이별을 한다. 무언가를 향해 달리기도 하고, 잠시 멈추어 숨고르기를 하기도 한다. 일상 속에서 바쁘게 살아간다. 그러면서 잊히는 것은 잃어버린 것으로 진행된다.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그럴 때, 이렇게 우연히 찾아드는 것들이 우리를 유실물 보관창고로 안내한다. 나리코처럼...(『잃어버린 것들의 나라』가쿠타 미츠요) 우리의 잃어버린 흔적을 찾아서. 아니면 누군가가 우연처럼 나의 흔적을 찾아주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무엇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세상은 절대 끝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진짜로 깨닫게 되는 것은 대개 나이가 한참 들어서이다. 나 역시 서른 중반이 넘어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던 물건, 혹은 시간, 장소, 사람조차도 잃어버린다 해서 세상이 끝나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서 그것이 없어지고 난 빈 공간을 안고 살아간다.

(7페이지, 작가의 말)

 

 

 

5년 전 혹은 20여 년 전,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리에 앉아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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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eze 2015-03-20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메모가 있는 중고책을 팔다니요. 실장님은 선물해주신 은영씨를 잊었나 봅니다. ㅋ

구단씨 2015-03-20 18:24   좋아요 0 | URL
5년은 아마도, 그런 시간인가 봅니다. ㅋㅋ
그냥, 은영이의 마음이 궁금하더라고요. ^^
 

 

한 페이지에 그림 하나, 한 페이지에 문장 하나. 미스 반 하우트의 <해피 시리즈>는 아주 단순하게 표현한 듯하지만, 물고기의 표정 하나하나 세세하게 담고 있다. 그림으로 이야기를 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책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 매력적인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요술까지 부린다. 지금껏 동물을 그린 여러 그림을 봤어도 이렇게 표현한 그림은 처음 봤다. 물론 내가 그림책을 많이 접하지 않아서 모르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런 색감과 표현이 낯설면서 새롭고 자꾸 눈에 들어온다. 어른인 내 눈에 이렇다면 아이들의 눈도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내가 아동도서나 그림책을 보고 재미있다고 느껴지면 아이들도 재미있다고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는 주의.) 그래서인지 곧 4살이 되는 조카가 한참을 보면서 한 페이지씩 넘길 때마다 나는 조카의 표정을 보곤 했다. 웃으면서도 심오하게, 가끔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자주 웃으면서... 나는 옆에서 조카가 그림 한 장 넘길 때마다 옆에 있는 단어를 읽어줬다. 글을 모르는 아이도 그림의 표정에서 마음을 읽는다는 것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조카의 표정이 그림 속 물고기, 아이와 꼬마 괴물, 새의 표정과 너무 닮아 있었다.

 

 

<행복한 물고기>

시리즈의 첫 번째인 <행복한 물고기>는 아이들이 일상에서 실제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로 느끼는 감정이기에 어떻게 보이는지 더 궁금했다. 기쁘고 즐거운, 떨리고 놀라운, 궁금하고 화나는, 자랑스럽고 샘나는 감정을 물고기를 그린 색과 표정으로 말한다. 거울을 보지 않는 한, 내가 느끼는 감정이 어떻게 얼굴로 나타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어떤 감정을 가진 상태에서 거울을 본다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책에서 표현된 물고기의 표정을 보면서 사람의 감정에 따른 표정을 그대로 보게 된다. 화나면 찡그리고 미운 주름이 생기는 모습, 놀라워서 눈을 동그랗고 크게 뜨는 것, 기쁘고 흐뭇해서 함박웃음 짓는 입 모양,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의 불안함을 그대로 담았다.

물고기로 표현된 감정이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는데, 아이들의 순수한 표정을 보는 듯했다. 어른이 되어 때로는 감정을 표정에서 숨기고 세상을 대해야 할 때를 경험하곤 하는데, 아직 감정을 숨기거나 표정을 가리지 못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만 같다. 특히 눈빛과 입 모양을 달리하면서 말을 대신하는 표정은 사람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눈빛과 입 모양으로 보이는 표정이 얼굴 전체에 담기지 않나? 어떤 눈빛으로 보고 있는지, 입모양에 따라 어떤 웃음인지도 보이는 정도이니 얼마나 솔직한 언어인지... 시각적 효과를 그대로 담고 있는 <행복한 물고기>의 이야기에 눈으로 즐긴다는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다.

 

 

<행복한 꼬마 괴물>

어느 시기가 지나면 아이들은 매일 보는 가족이 아니라 타인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을 배운다. 그 시작은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동네 놀이터나 기타 장소에서 또래의 다른 아이들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나 혼자, 항상 내가 먼저였던 것이 이젠 나만의 것이 아니고 '함께' 하는 게 뭔지 배워가는 시간이다. 그런데 친구를 만들고 사이좋게 지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어른인 우리도 이 관계가 쉽지 않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 서로의 관계를 유지시키고 화해하고 계속 이어가게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게 <행복한 꼬마 괴물>이다.

아이와 꼬마 괴물의 만남. 같이 놀다가 지루하기도 하고, 그러다 약 올리고 다툰다. 속상한 마음에 울면서 "다신 너랑 안 놀아." 하며 팽 돌아서기도 한다. 그렇게 사이는 멀어지고 시간이 흐른다. 왜 싸웠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뉘우친다. 그러면서 기다린다. 친구가 다시 오기를... 머쓱한 마음이지만 화해도 하고 서로에 대한 믿음도 쌓아간다. 이젠 해피해피 스마일~! ^^

아이들 사이에서 우정을 만들어가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보니 참 단순해보이지만, 현실에서 그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 역시 만감이 교차하는 어느 순간을 만날 것 같다. 사람에 대한 생각, 내가 뭘 잘못하고 잘했는지 반추하는 모습, 타인과 잘 지낼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나 아닌 사람과 항상 잘 지낼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관계를 잘 유지해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 과정을 담은 <행복한 꼬마 괴물> 이야기는 어른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것에서 느끼지 못할 것들을 그림과 감정 표현으로 들려준다. 책 속에서 아이 자신의 모습을 많이 볼 것 같다. 특정한 어느 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그 나이에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의 보편적인 모습이고 갈등이다. 그렇게 배워가는 모습이 참 예쁠 것 같다. 우정의 풍경이 이렇게 그려지고,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이 쌓여 돈독해지는 것. 살아가는 모습이 비춰지는 이 순간에 행복을 느끼게 되는 아이들의 표정도 내 머릿속에 그려본다.

 

 

<행복한 엄마 새>

엄마가 되기를 꿈꾸고 바라는 일. 엄마 새를 통해 보여주는 건 우리네 엄마이자,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이다. 아이를 잉태하고 뱃속에 품어 보듬고 세상에 내보내는 일이 평범한 엄마의 모습이지만, 평범한 마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할 것 같다. 보살피고 다독이고 아껴 주면서 키우지만, 잘못된 부분에서는 호되게 나무란다. 사랑과 행복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지켜본다.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실패부터 생각하지 않게 많은 일에 용기를 불어넣어준다. '잘 할 거야.' '잘 할 수 있어!' 라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한없는 신뢰를 보낸다. <행복한 엄마 새>는 그런 마음을 그대로 담은 엄마 새와 아기 새의 시간을, 아기 새를 품고, 낳고, 키우고, 세상으로 향해 나가기까지 지켜보고 보살피는 엄마의 여정을 담았다. 그 여정에서 느낄 수 있는 놀람의 단어들과 표정을 하나의 단어, 문장으로 표현했다. “꿈꾸어요.” “바라고, 또 바라요.” “우아!” "즐겨요" "나무라요" "귀 기울여요" "용기를 주어요" "떠나보내요" 일련의 과정이 이 단어들로, 그대로 시간의 역사를 만든다. 아이를 보는 엄마의 시선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다.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열면 '엄마에게' 라고 써져있다. 아마도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헌정하는 책이 아닐까 추측한다. 어디 작가의 어머니뿐이랴. 세상 모든 어머니가 이 책에 담겨 있는 걸. 아이와 함께 보내는 순간들이 얼마나 애틋한지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기쁘고 슬프고, 아프고 고맙고, 기특하고 대견한 마음들. 몇 개의 단어로 빛나는 순간과 엄마의 사랑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아이가 자라서 누군가의 엄마와 아빠가 되면 똑같이 겪을 감정이 기대된다.

 

 

처음 이 책을 펼치지 전에는 물고기로 어떻게 사람의 감정을 표현할까 싶은 궁금증이 있었지만 특별한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하나, 등장하는 주인공의 표정 그대로 표현하는 게 너무 완벽해 보인다. '아, 이렇게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느낌표를 머릿속에 띄웠다. 이 시리즈가 아마도 4세 전후의 아이들에게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글을 모르는 아이도 말을 시작하고 단어를 쓰며 눈에 보이는 사물이 뭘까 궁금해 할 수 있는 나이다. 호기심과 궁금증이 넘쳐 '이건 뭐야?' 하는 말이 돌림노래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오는 게 이때의 아이들 모습이다. (아이가 없어도 여러 명의 조카들이 이 나이를 통과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그래도 좀 안다. ^^) 특히 보는 게 많아지고, 보이는 그대로 습득하기 쉬운 나이이다 보니 주변의 어른이 어떻게 행동하고 가르치는지 중요하게 영향 받을 시기다. 그대로 성립된 자아가 커가면서 어떻게 작용할지 생각하고 염려해야만 한다. 미스 반 하우트의 <해피 시리즈>는 우리가 살아가는 그런 일상적인 모습을,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키워야 하는지를 그림 하나와 단어 하나로 대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방법으로 그 마음을 설명하고 그린다.

 

무엇보다 이 책의 매력은 그림이다. 평소 관심이 없던 것도 한번 눈에 들어오니 소장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그림이 원색적이면서도 화려해서 한 번씩 펼쳐보고 싶어진다. 이런 색으로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터치 하나, 색깔 하나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이미지가 뇌리에 남는다. 게다가 보통 흰 바탕의 종이에 그림을 그린다는 보편성을 버렸다. 검은색을 바탕으로 깔아놓고 그림을 그렸다. 온통 검은색 바탕에 어둡고 무겁게 보일 수 있는데, 그 위에 그려진 그림이 전체적으로 밝고 환하게 보이게 한다. 원색의 강렬한 대비가 멋스럽다. 표현 재료로 오일 파스텔을 재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오일 파스텔은 다루기 쉽고 발색이 선명하며 속도감 있는 선묘에 적합하지만, 혼색이 어렵고 표현도 거칠어 정교한 표현을 하기에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고 한다. 작가는 오히려 오일 파스텔의 단점을 활용하여 그 표현 재료만이 가능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캐릭터가 분명해지고 다채로운 색채를 멋지게 조화시켰다. 특히 작가가 심혈을 기울여 한글의 문자 구조를 연구하고 연습한 끝에, 네덜란드 문자로 그려진 원작과 거의 다를 바 없는 글자의 시각 이미지를 재현했다고 한다. 다른 나라의 언어로, 처음의 의미를 그대로 담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보인다.

 

기존에 만났던 그림책과의 차별성이 매력적이고, 이런 간단한 표현과 문장에 인간의 온갖 감정을 다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가장 중요한 건, 이 책을 접할 아이와 어른들에게 전하는 글과 의미가 따뜻하다는 것이다. 아이의 정서에 이 책이 줄 온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커가는 아이들을 보며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이 책을 따라 그리기를 해도 좋을 듯하다. 서투르지만 함께 그리고 표현하면서 인간의 감정을 배워가는 여정을 부모와 아이가 함께한다는 게, 큰 의미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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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란 단어 끝에 매달린 눈물을 멈추게 할 치료약은 없는 듯하다. 그리움이 밀려오는 그 시간을 흘려보내는 수밖에는. 시간이 만들어낸 그리움이 시간으로 흐릿해지길 바라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눈물이 나면 나는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수밖에. 누구, 다른 방법 알고 있다면, 좀, 알려줘...

 

2회 모두 챙겨보게 된 <무한도전 토토가>가 한없이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렇게 화려하고 흥겨운 무대에, 왜 눈물이 나는지 알 수 없어 그냥 흐르게 놔두었는데, 다 끝나고 생각해보니 그건, 그리움이었다. 가수들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처럼, 언제 이런 자리가 또 만들어질지 몰라서 더 그리워질 시간.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찾아왔을 그 순간이 눈물로밖에 표현될 수 없었던 듯하다. 전성기라 불러도 좋을 시간을 묻어두고 살았을 그들에게 이번 무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을 분출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1990년대에 십 대 후반 이십 대를 살았던 나에게도 온갖 감정이 범벅이다. 자신들의 화양연화를 되돌아보고, 다시 모인 자리가 기쁘고 즐거운데도 눈물을 훔치는 그들의 모습에서 가슴 속 말들을 읽는다. 힘들지만 좋았던 시절, 좋은 줄도 모르고 그저 익숙하게 지냈던 시간, 다시 모여 이렇게 노래 부르고 행복하지만, ‘언제 또 우리 다시 뭉치자’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는 것. 지금 각자의 자리에서 만족해야만 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20대가 아닌 30, 40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선뜻 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것 알고 있기 때문에... 길에서 우연히 예전에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순간적인 반가움에 아는 척하지만 누군가가 먼저 ‘언제 한 번 밥이나 먹자.’ 하는 말이 영혼 없는 약속이 되어버릴까 봐, 선뜻 꺼낼 수 없는 말이 됨을 아는 것과 같은 의미.

 

그래서 계속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닌 지금 이 순간 들려오는 <토토가>의 노래가 기쁘면서 눈물이 나는 거 아닐까.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판타지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이들의 이 무대가 지금 이렇게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프고 좋다는 것. 나이를 먹고 체력이 달려 춤추면서 힘들어하고, 그때와 똑같이 분장을 했지만 얼굴의 주름이 다 가려지지도 않는... 그래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같이 나이 먹어가고 있음을 공감하며, 닿지 않는 손을 뻗어가며 다독이고 싶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틀에 박힌 향수라고 해도, ‘추억팔이’라고 말해도 괜찮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시간의 소환이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게, 어느 한 때를 노래로 공유했다는 것 자체가 그저 감사해서, 추억이라 부를 시간을 만들어낸 게 기적 같아서 좋은.

 

배순탁의 <청춘을 달리다>도 비슷하다. 그의 전문적인 음악 지식을 풀어내고 있지만, 그 배경은 1990년대, 그가 이십 대를 보내던 시절의 이야기가 곳곳에 녹아있다. 

 

 

때때로 음악은 특정한 시절을 소환하는 마법을 부린다.

그리고 내 경험에 의하면, 어려운 시절보다는 좋았던 시절이 소환될 때, 눈물이 왈칵 차올라서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고는 한다.

시간이 흐르면 나쁜 기억들은 사라지고, 행복했던 기억만이 남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돌아오지 않아’라는 진실을 그 어떤 바보가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이 곡을 지금까지도 듣는 이유는, 거기에 아버지와 나의 환한 미소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음악은 때로 이렇게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거는 전화가 된다.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된다. 나처럼 나중에 땅을 치면서 후회하지 말고 지금 잘해야 한다. 돌아오지 않는다. 절대로.

- 46~47페이지 <청춘을 달리다>

 

 

 

1년쯤 전, TV를 잘 보지 않았던 그때도 <응답하라 1994>에 빠져 본방송을 챙겨볼 정도였다. 주변에서 웬일인가 싶어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내곤 했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거, 우리 그때랑 너무 똑같잖아!’ 라면서 미치도록 공감하며 다음 회를 기다렸다. 우리의 20대, 너무 그립고, 서툴러서 아쉬웠던 그 시간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봤다. 드라마가 너무 재밌다며 몰입했고 중독됐다. 그땐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그저 재밌는 드라마라고... 근데 오늘 <무한도전 토토가>를 보면서 그 드라마를 떠올리니, 스토리 자체가 만드는 몰입보다 그 배경에서 계속 들려왔던 음악이 더 생각났다. 그 때문인 듯하다. 눈이 아닌 귀로 저절로 그 시간을 소환해내는 것. 물론 눈과 귀가 같이 영향을 받았기에 그 시너지가 엄청났을 테지만, 음악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의 감동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짙어진다. 그 시대의 음악이 빠져서는 이야기가 안 될 정도로...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잠시 잠깐, 시간이 멈춰있었다. 그 시간의 감동과 열기가 행복하면서 두렵기까지 하다. 이 순간이 지나면 한바탕 꿈에서 깨어난 후유증을 견디기 어려울까 봐. 휴...

 

어느덧, 누구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고, 누구는 가수보다 예능인으로 더 각인되었고, 누구는 혼자 두 사람 몫의 노래를 하며 행사를 뛰고, 누구는 한류의 한가운데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고... 그때 매일같이 얼굴 보며 왕성하게 활동했던 그들의 지금 자리는 너무 달랐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에 다른 생각은 낄 자리가 없는 듯하다. 지금, 이렇게 행복하면 좋다는 듯, 다행이라는 듯...

 

 

프로그램이 끝나고 이십여 년을 함께 한 친구에게 문자를 한 통 보냈다.

'졸업하고 우연히 남철이를 만난 적이 있어. 우리가 슬리퍼 버렸다는 거, 알고 있더라고... 그냥 웃더라.'

그 친구와 나만이 알 수 있는 암호 같은 문장을 전송했다. 가수들에게 오늘의 시간이 여운으로 길게 남아 힘들 것처럼, 나에게도 한동안 마음을 무겁게 할 여운으로 남아있을 듯하다. 그리운 어떤 게 빨리 잊히기만을 기다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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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늦은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나 문자가 무서운 적이 많았다. 지금도 그런 무서움이 아주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익숙해져서 그런지 아니면 조금 무뎌진 건지, 예전보다는 덜 하다. 뭐 별것도 아닌 걸로 그러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경험이 아니었기에 그 기억이 더 오래가는 듯하다. 위험한 말이 오고 가서가 아니고, 안 좋은 소식이나 듣고 싶지 않은 소식이 많아서였다. 절대 유쾌하지 않을 일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한밤중에 도착하는 소식 중에는 외로움, 혹은 쓸쓸함이 담겨 있는 것도 많았다. 자정을 전후로 들어오는 문자가 특히 그랬다. 밤이라는 시간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외로움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문자를 보내는 이는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었고, 대개 가까운 사이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말을 웃음과 같이 건넬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 다행인... 때로 바쁜 시간이 지난 후 찾아온 여유에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시간이거나, ‘그냥’이라는 이유로 스스럼없이 말문을 열 수도 있는 시간. 그래서 한밤중의 문자가 안 좋은 소식들로 불안한 것보다 괜히 마음이 허해지는 순간으로 변해가곤 했었다.

 

 

외로운 밤이 있다.

'아니 이건 그리움이야, 아니 이건 고독이지, 고독은 나의 친구인걸' 하고

아닌 체해보아야 어쩔 수 없이 사무치는 건, 외로움이다.

외로움에는 눈물이 없다.

메마른 가슴이 괴롭게 사람을 들쑤시는 밤.

(쓸쓸해서 비슷한 사람 194페이지)

 

 

 

이상한 밤이었다.

요즘, 이상하게 잘못 걸린 전화가 자주 온다. 일주일에 두세 번쯤, 그것도 밤에 주로. 지금 번호를 사용한지 1년쯤 됐는데, 그동안 잘못 걸린 전화 어쩌다 한번 받기는 했어도 요즘처럼 자주 오지는 않았다.

 

 

 

언젠가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어.

‘자신을 완벽하게 고백하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어떤 표현도 불가능하다.’

비루한 고백을 들어줘서 고마워. 오랫동안 옆에 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마지막으로 어떤 주저도 없이 말할게.

행복해라, 꼭. (말하자면 좋은 사람 198페이지)

 

 

 

며칠 전 금요일 밤, 자정이 거의 다 되어 가는데 문자 한 통이 들어온다.

 

“00아, 잘 지내니?”

모르는 이름이기에 잘못 온 문자려니 싶어 무시했다.

몇 분쯤 지나자 다시 또 문자가 들어온다.

“00아, 나야. 보고 싶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상대방에게 문자를 전송했다.

“문자 잘못 보내셨습니다.”

상대가 잘 알아들었겠거니 했다. 잘못 수신된 문자라고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했으니, 알아듣고 이젠 문자를 안 보내겠구나 했다. 그런데 이 사람 이젠 문자가 아니라 전화를 걸어온다. 순간, ‘이걸 받어, 말어?’ 몇 초의 고민을 했더랬다. 굳이 잘못 보냈다는 문자에 왜 전화를 걸어올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내 알바 아니라는 마음이 커서, 귀찮아서였다. 그래도 한 번 더 친절해도 될 것 같아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정말 00 휴대폰이 아닌가요?”

“모르는 분입니다. 전화 잘못 거셨어요. 제가 이 번호를 1년 전부터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네.”

바로 전화를 끊을 줄 알았다. 전화를 잘못 걸었다는데, 상대방은 자기가 찾는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끊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남자, 전화를 끊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전화를 끊겠다고 말하고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말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이 남자가 먼저 말문을 연다.

 

“죄송합니다. 00은 헤어진 여자 친구인데요.”

그래서?

“참고 참다가 1년이 넘어서야 전화를 했어요. 보고 싶어서요.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요.”

그런데?

“그 사이 전화번호가 바뀐 걸 몰랐어요. 너무 당연하고 익숙한 번호라 계속 사용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문자 잘못 보냈다는 말이 거짓말인 줄 알고 전화까지 하게 되었네요... 죄송합니다.”

“네.”

“......”

“저기요?”

“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평소 하던 대로 했다. 나와 상관없는 이 얘기를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찾는 분의 전화번호가 바뀐 걸 알았으니, 이제 이 전화를 끊어야하지 않겠어요?”

“아, 예. 그렇죠. 그래야죠...”

근데 왜 끊겠다는 말이 없어?

내가 먼저 끊어야겠다고 다시 말하려고 하는 순간, 상대가 다시 말문을 연다.

“정말 거짓말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00과 목소리까지 비슷하네요. 처음엔 본인인데 아닌 척하는 줄 알았어요. 근데 말의 억양이 달라서 아닌 걸 알았어요. 그쪽은 목소리가 좀 더 낮네요.”

“저에게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저는 그쪽과 계속 통화할 이유가 없는데요.”

냉정하게 들릴 정도로 딱 잘라 말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의미 없는 대화를 계속할 이유도 없었다. 상대를 배려하고 싶어도,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을 찾아 데려다 줄 수도 없잖아...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사람 말투가 정말 스팸전화 끊듯이 ‘뚝’ 끊어버릴 수 없게 했다. 그렇게 나 혼자 고민하고 있는데 다시 이어져오는 말.

“보고 싶은 거 그동안 잘 참았는데, 오늘은 정말 못 참겠어서요. 한마디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안하던 짓을 했어요. 죄송했습니다. 제가 먼저 끊겠습니다...”

뚜. 뚜. 뚜...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귀신에 홀린 듯했다. 오 분에 가까운 시간동안 뭐가 지나갔나? 뭐지, 이건? 아, 진짜...

 

 

 

그게 뭐 어때서, 라고 생각하는 순간 증기처럼 아득한 두려움이 나를 덮친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잊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시간 토막들을 잃어버리고 살아왔을까.

진짜는 죄다 도둑맞고,

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자아의 금고 속에는 엉뚱한 모조품만 잔뜩 쟁여져 있는 느낌이다.

스물두 살의 첫새벽처럼 나는 텅 빈 주방 앞에서 나지막이 읊조린다.

누가 너를 내게 보내주었지? (비자나무 숲 262페이지)

 

 

 

 

멀쩡한 기분이었다. 두통이 좀 심했던 거 말고 특별히 더 나쁠 게 없었다. 피곤해서 일찍 자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뭐야? 잠들려고 했던 기운을 다 깨워놓고 이상하게 멜랑콜리한 기분까지 남겨놓다니. 그 사람은 그렇게 전화를 끊고 괜찮아졌는지 어땠는지 몰라도, 그녀의 전화번호가 바뀐 것을 알고 이제 삭제하고 개운해졌는지 몰라도, 이젠 정말 그 미련을 버렸는지 몰라도... 나는 괜히 우울해졌다. 전혀 모르는 남인, 누군가의 외로움이 쓸데없이 전염된 듯했다. 수화기 너머 누군가의 쓸쓸함이 그대로 건너온 듯했다. 뭐가 이래. 아, 이런 거 정말 별론데.

 

 

잠이 다 깼다. 이대로 잠들기는 어려울 듯하여 양양의 책 제목이 생각나서 들춰보다가 문득, 내 전화번호 전 주인이 궁금해졌다. 나에게 온 잘못 걸린 전화는 남자를 찾는 전화도 있었지만 대부분 여자를 찾는 전화였다. 같은 이름의 여자를 찾고 있었다. 전화번호를 바꾸면서 번호연결 서비스를 사용하지 않은 듯했다. 그 말은, 굳이 바뀐 전화번호를 전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의미 아닌가. 본인이 먼저 전화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이상 타인이 그 번호를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나에게 잘못 걸려온 전화를 생각해보니, 1년 동안 이 사람들은 내 전화번호 전 사용자와 연락이 없었다는 건가? 왜,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1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사람을 찾는 거지? 전화한 그 남자는 1년 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혹시, 좁은 편도 1차선 같은 길을 가고 있었을까. 같은 마음으로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는 길, 상한 마음에 '나 없이 잘 지내지 말라'고 소심한 복수라도 했던 걸까. 그래도 결국 쓸쓸해진 마음을 어쩔 수 없어 그녀를 찾았던 걸까.

 

 

한 사람을 떠올렸다. 늦은 밤 전화해서 내려앉은 목소리를 들려주던, 늦은 퇴근길에 걸음은 무겁고, 불 꺼진 집에 들어와 시어진 김치에 물을 만 밥으로 허기를 달랬다던, 외롭다고 푸념을 늘어놓던 목소리. 누구나 사는 게 비슷하다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외롭다고 말하던 사람의 가슴은 쓸쓸했겠구나, 싶다. 이런 거였구나. 양양이 평범하다면 평범한 일상을 두고 말하면서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를, 어쩌면 알 것도 같다.

 

늦은 밤 불쑥 이 책을 펼쳐 들었던 건, 제목에서 흐르는 그 쓸쓸함 때문이다. 아닌 체하려고 해도 안 되는, 말로 다 하지 못한 침묵이 기어코 또 다른 말이 되어 뛰쳐나오고야 마는 것. 함박눈이 펑펑 내리며 추위가 더 짙어지고, 양양의 노랫말이 되어버린 그녀의 끼적임은 그래서 '비슷한 사람'이란 이유로 우리를 붙든다. 닮아있음을 부정하지 말라고, 닫힌 창문 열고 손 뻗으면 바로 닿는 사람들이라고... 살아가는데 때로 말이 없어도 되고 표정이 없어도 되고 혼자여도 되지만, 가끔은 딱 한 마디가 필요한 때가 있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한 마디만. '어쩌면 우린, 비슷하구나.' 느낄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이 필요할 때. 이 책에서 그녀가 뿜어대는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 같은 시간 앞에 괜히 민망해진다. '너도 그렇잖아' 건네는 한 마디에 모든 감정을 읽힌 듯 얼굴이 붉어진다. 나도 모르는, 혹은 모른 척하고 싶었던 감정을 타인이 살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서다. 전화를 잘 못 걸었던 그 남자에게 괜찮아질 거라는, 진심어린 한 마디라도 해줄 걸 그랬나 싶은 마음에 뒤늦은 후회를 한다.

 

 

 

 

외롭게 혼자 맞이하는 쓸쓸한 죽음도 있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떠나는 행복한 죽음도 있겠지.

하지만 어차피 떠날 때는 우리 모두 혼자다.

(기억해줘 184페이지)

 

 

 

 

나답지 않게, 전혀 상관없는 남의 일에 신경이 쓰여 생각의 오지랖을 넓혔다.

이상하게, 괜히 쓸쓸해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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