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쓴 편지를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하고 싶거든, 날이 밝은 다음에 절대, 다시, 펼쳐보지 말고 그대로 부쳐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다. 그건 누가 굳이 강요하지 않아도, 설명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뭐에 홀렸는지 캄캄한 밤에 스탠드 불빛 하나 의지해서 써내려간 몇 문장에 온 마음을 담았다. 그대로 봉투에 넣고 입구를 봉한 다음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는다. 그럼 다 끝난다. 안전하게 상대의 손에 안착하면, 끝. 반면, 혹시라도 맞춤법이 틀렸을까 쓸데없는 말을 하진 않았을까 염려되어 정신 차리고 다시 펼쳐보는 순간 부칠 수 없는 편지가 되고야 만다. 다시 읽어보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차마 부치지 못하고 다시 펼쳐본 것에 안도한다. 아, 다행이다, 얼굴 붉어질 일을 만들지 않아서... 정말, 다행일까?

 

밤이라는, 마법을 부리는 시간에 적어 내려간 마음은 해가 뜨면서 저절로 풀린다. 신데렐라는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 마법이 풀리지만, 편지만큼은 아니다. 그 반대다. 밤에 마법이 걸리고 환해지면 마법이 풀린다. 이상한 건 유독 왜 밤에 책을 더 많이 읽게 되고, 말을 많이 하게 되고, 음악을 많이 듣게 되며, 누군가에게 전하는 말조차 밤을 이용하게 되는가, 이다. 물론 그 정도에 따라 개인적인 차이는 있다. 나를 비롯하여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보고 느낀 얘기다. 하루의 일과가 마무리되는 시간, 조급했던 아침이나 나른함에 피곤한 오후보다 좀 더 여유가 생기는 시간이기에 그렇다는 물리적인 이유 말고, 감정적인 이유가 가장 적합하게 들린다. 눈앞의 것들은 불을 켜지 않으면 캄캄해서 안 보이고, 한낮의 소란스러움 대신 고요함이 차지한 자리. 끊기지 않고 흐르는 음악보다는 누군가의 사연 한 자락이 더 귀에 들어오는 라디오가 어울리는, 음악의 볼륨을 조금 줄여도 그 속삭임에 마음이 풀어지는 순간.

 

왜 그런 거지?

밤이 사람을 홀린다는 말 말고는 딱히 답을 찾기가 어렵다. 솔직히, 그 답을 굳이 찾고 싶지도 않지만... 밤에 잠들기 어렵다면, 잠들기 위해 몇 시간을 누워있어도 잠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잠을 청하고 싶지만 멀리 달아나버려 짜증을 불러오기 전에, 그래, 차라리 잠들지 않는 밤을 흘려보내는 게 낫다. 밤이 부리는 마법에 걸려들어도 좋은 거다.

 

 

 

 

 

 

 

 

그래서 이런 음악도 듣게 된다.

Meav - One I Love

누군가는 아일랜드의 정서가 우리와 많이 닮았다고도 하던데... 그래서인가? 메이브의 노래만큼은 나에게 잘 맞는다. One I Love는 아일랜드 출신의 팝페라 가수 메이브가 부른 노래다. 몇 년 전, 어느 길을 걷다가 우연히 내 귀에 들어왔다. 그때도 밤이었다. 지금 말하기 어렵지만 잔뜩 소란스러운 마음을 붙잡고 어딘가로 향하던 골목길이었다. 어느 상가에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방 열린 창을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였다. 어떤 노래인지 몰라 다음 날 온갖 검색을 통해 흥얼거리던 가사를 검색했다. 그렇게 알게 된 노래에 미치도록 빠져들었다. 이 노래 한곡을 몇 달 동안 반복재생해서 듣곤 했었다. 그렇게 밤낮 구분 없이 나에게 찾아들었던 노래다. 유독 밤에 들을 때가 많아 감정적으로 위험해지기도 했지만 중독처럼 끊을 수 없는 노래였다. 친구가 우연히 이 노래를 같이 듣고서는 무슨 장송곡 같다고 했다. 그렇게 들릴 지도 모른다. 워낙 우울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음악이란 게 듣는 사람의 기분이나 성격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노래만큼은 친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우울할 때, 더 우울해지고 싶어서 들을 때가 많았다. 나에게 이 노래는 고요한 침잠에 아무 것도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힘을 가진다. 노랫말의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 노랫말 자체도 유쾌하지는 않지만 - 멜로디가 주는 분위기가 스산하다. 그럼에도 무슨 고질병처럼 이 노래를 찾는다. 몇 달 내리 들었던 적도 있다. 가을에 이 노래가 찾아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서늘해지는 이 계절, 가을, 밤에 이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어떻게 출렁일지 눈에 훤히 보인다. 잠들지 못해서 뒤척일 때면 더욱 염려해야 한다. 이 노래는 달콤한 꿈속이 아닌 몽유병처럼 목적지 없는 발걸음을 내딛게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One I love, two she loves, Three she's true to me...

One I love, two she loves, and three she's true to me...

 

 

 

 

 

 

 

 

 

 

 

 

 

한밤중에 빗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이런 영화도 괜찮다.

호우시절 2009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 혹은 “처음보다 설레고 그때보다 행복해” 라는 카피 문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평범한 남자 동하(정우성)는 중국 출장 첫날에 우연히 관광 가이드를 하고 있는 유학 시절 친구 메이(고원원)와 재회한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만난 두 사람. 한때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지금 어떤 사이일까. 달콤했던 과거의 시간이 떠오르고 보이지 않게 감정이 오고 간다. 그때와 지금, 뭐가 달라져 있을까. 앞으로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때를 알고 딱 맞춰 내리는 비가 좋은 비라고 하는 것처럼, 지금 이들의 사랑은 때를 알고 잘 찾아와 준 것일까.

내가 그동안 봤던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참 잔잔했다. 감정의 기복이 있는데도 파도 같지 않았다. 때론 밋밋해 보이기도 했다. 그 유명한 다른 영화들 놔두고 이 영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좋아하는 배우가 출연했던 것도 아니고, 특별하게 볼거리가 많았던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많은 요소를 골고루 갖춘 영화다. 지독하게 싫어하는 비, 내 눈에 그다지 매력 있게 보이지 않는 배우, 그저 그런 스토리. 그런데도 왜 이 영화가 생각나는지... 낯선 나라의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추는 춤마저 생생하게 떠오른다. 충동적(?)으로 사랑을 나누려다 멈춘 두 사람의 괴로운 모습도 생각난다. 다시 만나서 반가운건지 염려하는 마음인지 모를 그 혼란이 그대로 보이는 두 사람의 표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선뜻 그 손을 다시 잡을 수 없어서 망설이는 마음이 얼굴에서 읽힌다. 안다. 그 마음, 그 고민, 그 불안함. 그런 상황에서 내가 내린 결정과 반대의 결말을 보여준 두 사람 때문에 자주 떠오르는 영화다. 어느 날 메이에게 배달된 자전거가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고 있을 것만 같아 내가 괜히 설렜다. 비를 싫어해도, 좋아하는 배우가 아니어도, 상투적인 스토리에도 이 영화를 이 밤에 떠올릴 수밖에 없는 이유. 자꾸만 멀쩡해지려 애쓰는 내 마음을 흔들어서다...

“내가 아직도 널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달라지는 게 있을까?”

“때를 알고 내리는 비가 좋은 비야...”

 

 

 

 

 

 

 

 

 

 

이 분위기를 이어 서른 두 편의 단편영화 같은 이야기를 읽어도 좋겠다.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

영화감독 김종관이 쓴 두 번째 에세이다. 그의 첫 번째 글이 살짝 향수를 불러오는 느낌이라면 두 번째 글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은 수줍게 얼굴이 붉어져도 좋을 분위기를 만든다. 한낮보다는 밤에 읽기에 더 좋다. 저자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단편 소설 같은 느낌에 뭔가가 덧대어져 짧은 영화 서른 두 편을 본 기분이 든다. 남자와 여자, 딱 두 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둘은 사랑하는 연인일 수도 있고, 헤어진 사이일 수도 있다. 너 때문에 연애 불구가 되었다고 소리치던 여자가 남자를 괴롭히듯 늘어지던 장면은 찌질했던 연애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고 이야기 속 여자가 찌질해 보였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당당해 보였다. ‘너와의 연애가 이런 후유증을 남겼으니 내가 치유할 수 있게 너도 나를 좀 도와야 한다.’ 라는 목소리로 들린다. 연애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둘이 했으니, 그녀의 말투에서 전해지는 의미를 내 맘대로 해석해서 저렇게 들었다. 밑도 끝도 없이 지나간 연애가 떠올랐다. 나는 누군가와 헤어지고 나서 어땠나, 저 여자처럼 당당하게 연애의 끝을 볼 수 있었나, 알량한 자존심 세우느라 쿨한척 연기를 했었나...?

저자의 경험일 수도 있고 새롭게 태어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쨌든 사랑의 여러 장면이 어느 한 사람만의 일은 아니라는 것. 그러니 이 밤에 그들의 이야기에 같이 뛰어 들어도 좋겠다. 이건, 우리의 시간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술에 취한 듯 휴대폰에서 삭제된 전화번호를 기억해내지는 말자. 그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기적 같은 순간이 있었다. 잊지 말겠다고 다짐하던 아름다운 시간들이 있었다.

요즘은 굳이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는다. 잠시 머무는 것에 좀 더 충실히 즐기고 싶어한다. 남기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이 추억이 된다. 관찰자의 시선을 버리고 내가 풍경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가슴으로 받아들인 기억이 생긴다. 감정의 기억은 잘 잊혀지지 않아서 다시 오는 계절처럼 간간이, 그리고 오랫동안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불은 끄지 말 것, 243페이지)

 

 

마음 깊은 곳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음악을 듣고도, 빗소리 같은 사랑을 봐도, 다양한 연애를 들었어도, 이렇게 밤이 부르는 상념을 이어가지도 내려놓지도 못하겠다면, 편지를 쓰자. 누가 받게 될지 모르겠지만, 수신인이 없을지 모르지만, 쓰자. 끼적여보자. 시간이 흐르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다시 그 글을 보게 되면 어떨지 모르겠다. 민망해지거나, 더 외로워지거나, 눈물을 흘리게 되더라도, 가슴에 담아두고 꺼내지 못했던 말을 해보자.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해보겠어. 혹시라도 누가 묻는다면, 왜 그랬냐고 나무란다면, 밤이 그랬다고 핑계라도 대면 되지 않겠나. 밤 11시가 마법을 부렸다고, 새벽 세시에 바람이 불어서 그랬다고, 지금처럼 비가 내려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이다. 세상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게 이유 없는 일도 일어나고, 대답할 수 없는 질문도 많은 거다. 밤이라고 그 범주에 들어가지 말란 법도 없지 않나. 그냥, 그렇다고 해두자고. 그런 이유로 이해가 허용되는, 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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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4 0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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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4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보다 여행 시리즈는 그동안 시간 되면 챙겨보는 정도라 분위기 파악만 했다. 할배들의 여행에서는 더 늦기 전에 시작된 그들의 여행에 응원을 보냈고, 누님들의 여행에서는 누군가의 마음 속 아픔을 보는 듯해서 안타까웠다. 그들의 여행에서 웃음만큼이나 눈물을 많이 봤다. 방송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순간의 진심 같은 것을 봤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꽃보다 청춘> 1회를 재방송으로 보게 되었다. 유희열, 이적, 윤상. 꽃보다 여행 시리즈의 이번 테마는 ‘청춘’이라 부르더라. 내가 좋아하는 음악인들이어서 우연히 걸린 1회를 끝까지 봤다. 갑자기 떠나게 된 그들의 여행은 모험 같았고, 준비 없이 떠난 낯선 곳을 어떻게 걷게 될까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보다 보니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2회는 본방을 봤다. 낯선 곳, 서로 친분이 있지만 함께 여행한 적은 없는 사이, 사용할 수 있는 돈은 정해져있고, 성격이나 취향도 다른 사람들. 좋지 않은 조건에서 그들이 함께 할 시간이 궁금해서 보기 시작했는데, 볼수록 느낌이 이상했다.

 

처음에는 이 황당한 여행의 시작에 웃음만 났는데, 2회에서 이들이 움직이는 것이 달라졌다.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달라진 그 어떤 분위기. 더욱 놀랐던 건, 그 하루가 그들에게 만든 감정이었다. 알고 지낸 시간이 그렇게 오래되었는데도 서로에 대해 몰랐던 부분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가슴 속이 울렁거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닐 텐데, 그 오랜 시간이 무색하게 하루의 시간은 그들을 더욱 가깝게 만든 듯했다. 물론 그 사이에 약간의 오해도 있었지만, 누군가를 더 잘 알게 되는 준비운동 같은 거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한다. 상대를 위한 배려가 본인의 마음과 다르게 전해지기도 하고 오해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몇 십 년을 함께 산 가족도, 같이 울고 웃던 친구도, 그 누구도 한 사람을 온전히 알기는 어려울 거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거다. 조금 더 많이, 혹은 덜... 그래도 늘 몰랐던 게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어머, 그런 면이 있었어?’ 라고 놀랄 수 있는 일. 언제든 충분히 생길 거라고.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이란, 많은 것을 얻고 또 잃게 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달라진 뭔가도 함께 남아 있을 거다. 이들의 여행에서 내가 본 것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서로의 몰랐던 부분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 낯선 곳에서 함께이기에 쌓이는 정 마일리지, 가까워지는 서로의 거리... 평균 20년의 친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다 알 수는 없었던 거겠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관계가 된다면, 더 알아가고, 배려하고, 이해하는 관계가 될 수도 있는 거겠지... 이들의 여행이 이들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 궁금하면서, 긍정적인 결과를 생각하고 있다.

 

 

 

 

 

 

 

 

 

 

2회에서 내 눈을 사로잡고 마음을 흔들었던 건, 유희열의 인터뷰였다. 청춘이라고 테마를 붙였지만 그게 맞는 건지 어떤 건지... 모든 것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말하는 그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윤상의 얼굴에서 흰 수염이 났다고, 왼손잡이 노래를 부르던 이적의 얼굴에는 지금 주름도 보인다고, 그 묘한 느낌을 얘기하고 있었다.

"우리도 이제 거의 지났어..." 라고 말하는 유희열의 목소리를 똑바로 들을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나이가 참 애매하다고 말하더라.

나이가 너무 많은 것도 아니고, 어린 것도 아니고,

느끼기에 어른 같지도 않고, 청년 같지도 않고...

40대의 남자 셋이 하는 여행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어떤 것을 느꼈기에 유희열은 저렇게 말하는 걸까 싶다가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느껴지고 전해지는 게 있다는 것을 또 알 것 같기도 하다.

 

결국은

내일 아침부터 다시 청춘일 수도 있는 것 같아, 라는 말로 마무리되는 청춘...

 

20대는 그냥, 무조건 청춘이라고 생각했다. 청소년기를 넘어 스무 살에 진입하면 청춘인 거라고... 그게 유희열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청춘을 어디에 붙여야 하는지 정해진 건 아닌 듯 같다. 카메라를 손에 들고 모여 빙빙 돌면서 함박웃음으로 정신없는 세 남자, 좋은 것을 보면서 ‘좋다’ 연발하며 감탄하는 표정, 낯선 곳이 겁날 것도 같지만 철없는 모험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40대 아저씨의 모습이 늙었다는 게 아닌 파릇파릇해 보였다면 이상한 걸까. 그게 청춘이 아니면 뭐란 말이야... 음악이 공통 주제가 되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에서 열정을 느꼈고, 맛있는 것 앞에서 정전이 일어나도 웃으면서 먹으면 그만인 것을... 무조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일.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되는 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다시 사막을 간다면 또 청춘은 다시 시작될 수도 있겠지..."

유희열이 2회의 마지막에서 청춘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다시 사막에 간다면'이 아니라, 지금 사막에 같이 갔던 그들이 청춘일지도...

한때 윤상 오빠를 보겠다고 꾀병 부리고 학교 조퇴를 했던 기억이 나고, 순수해 보이는 표정이 맘에 든다고 좋아했던 유희열은 이제 매의 눈으로 여자를 스캔하고 있고, 다양한 분위기의 노래로 귀를 사로잡았던 패닉의 이적은 이제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 아니라 배가 오동통한 아저씨로 보이고...

그래도, 그래도...

이들을 청춘이라 부르고 싶다.

 

여전히 딱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청춘 같지만, 청춘이란 단어가 불러오는 설레는 감정은 같지 않을까.

그래서 더욱 궁금하다. 청춘을 테마로 하면서 40대 유부남 아저씨들을 데리고 간 나피디의 의도가.

끝까지 보고 싶어지는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꽃보다 여행 시리즈 대부분 봤는데, 이번 테마만큼 제 눈을 집중시키지는 못했다.

정말, 급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끝날 때까지 본방으로 보고 싶은 세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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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쯤이었을까... 정확하게 세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몇 번쯤 구급차를 탔다. 그 몇 번 중의 한번은 나를 위해 탄 것이고, 나머지 경우는 내가 부모라 부르는 이들을 위해 탄 것이다. 목숨을 앞에 두고 절실한 순간에 찾게 되는 생명줄이 구급차라니... 그런데 항상 죽음을 얘기하는 사람이, 죽을 거라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막상 당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니 구급차를 부르라 한다. 그러니까 죽을 거라는 말은 다 거짓말인 거다. 숨이 막히고 죽음의 문턱에 가까워지니 살기 위해 바동거리는 거다. 그 목숨이 아까워서, 놓기 싫어서...

 

굳이 가지 않아도 될, 정말 가기 싫은 곳 중의 하나가 병원이다. 그중에서도 응급실은 정말 싫다. 별일 아니라고 해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런데 정말 별일이면 심장도 두근거리고 몸의 기운이 쭉 빠진다. 의사나 간호사, 환자나 보호자 사이에서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난다. 갈 때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혹스러움에 놀라는 것은 기본인 곳. 미리 접수하고 진료 받는 외래가 아니고서야 갑자기 닥치는 이런 상황이 당황스러움을 만든다. 침착하자고 다짐하고 애쓰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상주하듯 대기실에 있다 보면 금방 지친다. 수도 없이 왔다갔다, 새로운 환자가 들어오고 치료가 끝난-아니면 치료를 더 받기 위해 입원실로 올라가는- 환자가 나가고, 시장 속 같은 상황에 어지럼증과 두통이 밀려온다. 늘 한밤중과 새벽에 기다렸다는 듯이 몰리는 곳...

 

 

 

 

 

 

 

 

 

병원을 경험하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의사는 최악의 상황을 아주 상세하고 정확(?)하게 미리 말해주는데, 정작 병원비에 대해서 미리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납처에서도 경과된 정산에 대해서만 말해주지 앞으로의 비용에 대해 말해주지는 않는다. 모두가 모르쇠로 일관한다. 예를 들면,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몸은 현재 이런 상태이며, 이런 치료, 시술(수술)을 해야 할 상황이며, 시간은 어느 정도 소요될 것 같으며, 그걸 시행했을 경우 이런 (아주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각종 동의서에 사인하라고 말한다. 물론 그 동의서는 결국, 이 모든 치료에 대해 보호자가 허락했으니 어떤 변수가 발생하더라도-그게 사망이라 할지라도-병원은 책임지지 않는다, 라는 말로 정리된다. 그런데 그러한 치료(혹은 수술)를 하면서 드는 비용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환자나 보호자가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의 침상에 누워있으면서도 중요한 것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말이다. 어떤 상품을 구매할 때 이만큼의 비용을 지불하면서 그 상품을 구매할 가치가 있는지 따져가며 구매해야 하는 것처럼, 치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만약 100원의 치료비용이 든다면, 그 100원 안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치료에 대한 단가가 적용되는지, 그 비용을 지불하면서 그 치료를 선택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고민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면서 정산할 때만 말해준다. 100원의 비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가 500원의 비용이 청구된다면, 그 500원이 상당히 부담이 되는 금액이면서 지불할 수 없는 형편의 금액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 많다.

주치의가 뭔가를 한참 설명하고 사인해야 할 것들을 말하고 있다. 응급 상황의 일이라 설명을 들으면서도 정신이 산만해진다. 외래 진료에만 특진료가 있는 줄 알았는데, 치료나 시술(수술)에도 특진료가 있나 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 의사만이 할 수 있다는데 누굴 선택하란 말인가. 그러니까 특진료는 선택에 의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선택이란 단어를 지워도 될 만큼...

 

치료를 받다가 병원을 옮길 경우, 소견서와 검사서 같은 서류를 발급해주기는 하는데, 거기에 또 사인이 필요하다. 자기네 병원에서 치료를 중단하고 가는 것에 대해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퇴원 혹은 전원(병원을 옮기는)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곳이었구나... 새삼 알게 되는 사실에 대해 허무한 웃음만 흘리고 있는 시간이다.

 

요즘 의사들 참 잘생겨 보이는 사람이 많더라. 응급실이라는 상황도 그렇지만 지금껏 응급실에서 경험한 의사들 대부분이 오동통 너구리 면발 같은 몸이거나 아주 떡이 진 머리로 무뚝뚝 불친절한 말투이거나 했는데, 이번에 본 의사들은(아마도 인턴이나 레지던트인 듯하다.) 외모가 참 훈훈하더라. 키 180cm는 보통인 것 같고, 얼굴도 평범하면서 눈길이 가더라. 어떤 이는 공유를 닮았고, 어떤 이는 아주 댄디한 스타일로 깔끔해 보이기도 하더라. 제법 친절하기까지 하다. 그동안 응급실이나 의사를 경험하면서 가졌던 편견이 살짝 누그러졌다.

 

하지만 거기까지... 병원은 병원이고, 현실은 로맨스소설이 아니다. 로맨스 소설에서 만났던 병원의 풍경과 의사, 혹은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로맨스는 소설일 뿐이라는 것. 이야기로의 재미는 충분히 즐길 수 있기에 만나도 좋은 소설들이지만, 현실 속 병원에 대입하기는 상당히 거리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틀 만에 집에 잠깐 들렀다. 급하게 나가느라 정리되지 않은 집이 어수선하다. 제날짜에 반납하지 못한 도서관의 책은 연체가 되었고, 하려고 했던 뭔가는 바로 포기를 하게 한다. 갑작스러운 일에 뒤죽박죽 엉망이 된 상황이 두통과 위염을 불러온다. 잠은 잔 것 같지만 잔 느낌은 없다. 보호자 대기실에서의 하룻밤은 멀쩡한 사람도 환자로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 이틀 동안 병원에 있는 보호자들의 표정과 한숨소리를 지켜보면서 거울을 보는 듯했다. 상당히 긴, 장기전이 될 듯한 상황에 몸과 마음이 먼저 신호를 보낸다. ‘그냥, 너도 바로 아파버려.’ 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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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14-07-05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병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지요.. 고생 많으십니다. 음식 잘 챙겨드시구요. 힘 내십시오~

구단씨 2014-07-09 22:3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꼬마요정님. ^^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뭐, 그냥, 그럭저럭, 버티고 있습니다.
저절로 다이어트가 되고 있어서 좋아해야 할까 생각하면서 웃음도 나고요. ^^
 

 

 

일부러 작정하고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최근 읽은 몇 권의 책에서 재능에 관한, 그 재능이 발휘하는 천재성에 관한 언급을 계속 보게 되었다. 그 재능이란 것이 후천적으로 습득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선천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능력으로 타고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느 쪽으로든 분명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그때의 감정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휘둘리는 판단일 수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때로는 긍정적으로 끄덕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시선으로 그 화살을 나 자신에게 돌리기도 한다. 나에게 오지 않은, 오지 않을 그 어떤 것에 대해 조급함 보다는 좌절이 먼저 찾아오는 듯하다. 안 보면 그만인 것을, 안 해도 별 상관없는 일들 앞에서 괜한 감정만 소모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 뻔하게 나올 수 있는 답은 하나인 것 같다. 각자의 색깔이 있다, 저마다 더 잘하는 게 있다, 괜찮다... 물론, 괜찮을 거다. 그래야만 한다. 안 그러면 자신에게 없는 것에 대해, 그걸 가진 사람을 보면서 생기는 그 부러움을 어떻게 감당하고 추스를 수 있겠나. 또 그런 감정을 어떻게 감당하느냐 하는 것 역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그걸 좀 객관적으로 보고 넘어가고 싶어진다. 모두가 다 같을 수는 없으므로, 어떤 현상쯤으로 보고 넘기고 싶은 것.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 나를 죽이지 않고 흘러갈 수 있는 방법 같아서. 외모든 타고난 재능이든 살면서 배운 현명함이든, 각자의 몫인 듯하다. 그 몫을 감당하는 것 역시도...

 

 

 

8살, 6살 남자 형제 조카가 있다. 큰 아이는 쌍꺼풀이 없는 눈, 동그란 얼굴, 보기 좋게 통통한 체형이다. 작은 아이는 쌍꺼풀이 있는 눈, 약간 갸름한 얼굴, 조금 마른 체형이다. 딱 봐도 알겠지만 두 아이의 외모가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다. 형제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내 눈에는 두 아이의 얼굴이 닮아서 분명 형제라는 게 느껴지는데 보통 첫눈에는 전혀 다른 아이들로 보이기도 한다. 바로 그 외모 때문에. 첫눈에 작은 아이는 누가 봐도 잘생겼다, 예쁘다, 라는 말을 듣는다. 여러 명이 있어도 유독 눈에 띄는 얼굴이다. 그에 반해 큰 아이는 그저 평범한 외모다. 내 눈에 큰 아이가 더 귀엽고 예뻐 보인다. 실제로 나는 큰 아이를 더 예뻐한다.(비밀) 하지만 작은 아이와 함께 있으면 큰 아이가 옆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못 알아본다. 분명 같이 있는데 작은 아이에게 먼저(아니면 작은 아이에게만) 말을 건다. 외모에 대한 칭찬은 기본이면서 관심을 쏟는 상황...

어느 날 큰아이가 엄마(내 여동생)에게 심각하게 얘기했다고 한다.

“엄마, 나는 얼굴을 바꾸고 싶어요.”

큰 아이에게 어떤 얼굴로 바꾸고 싶으냐고 물었단다.

(이 질문을 할 때까지 심각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가 하는 말이니 웃으면서 그런(얼굴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엉뚱함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00(작은 아이)의 얼굴로 바꾸고 싶어요.”

전해 듣는 나도 가슴이 철렁했다. 이제 겨우 8살 아이가 동생과 함께 있을 때, 혹은 동생에게만 몰리는 시선에서 뭘 봤기에 그런 말을 할까 싶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엄마, 나는 이름을 바꾸고 싶어요.”

(큰 아이의 이름은 수학을 공부할 때 나오는 이름이다. 혹시나 학교에서 친구들의 놀림이 되었나 싶은 마음에 걱정했단다.)

어떤 이름으로 바꾸고 싶으냐는 엄마의 물음에 아이가 대답한 건,

“00(작은 아이의 이름)으로 바꾸고 싶어요.”

라고 말했단다.

그러니까, 큰 아이가 생각했을 때 작은 아이의 외모가 질투의 대상이었을까. 굳이 보고 싶지 않아도, 같이 다닐 때마다 항상 사람들의 관심이 저절로 쏠리는 동생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렇다고 그 질투 때문에 동생을 함부로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저 평범한 형제 사이로 보인다. 같이 놀고, 장난치고, 먹고, 돌봐주고. 그런데도 가슴 속에 담아두는 상처가 생기기 마련인가보다. 외모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나 무심코 던지는 한 마디 때문에.

큰 아이는 4살 때 한글을 더듬더듬 익히기 시작하더니 곧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그 아이가 한글에 대해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주변의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일찍 한글을 알았구나, 하는 정도였다. 꼼꼼한 성격에 종이접기에 취미를 붙였다. 지금은 책을 보고 종이접기를 즐길 정도가 된 듯하다. 얼마 전에 와서 접어준 꽃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나는 손으로 하는 건 정말 못한다. 내손만 닿으면 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수준이다.) 요즘 아이들 종이접기 수준이 다 그 정도인가 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닐 것이다. 엄청나게 말을 안 듣는 개구쟁이이기도 하지만, 차분하게 뭔가를 하는 모습이나 공부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게 저 아이의 장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큰 아이가 가진 장점이 반짝반짝 빛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본다.

반면 작은 아이는 아직도 한글을 잘 모른다. 겨우 자기 이름을 쓰는 정도다. 그런데도 당당하다. 형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서, 형이 귀찮아하면 “나는 책을 못 읽으니까 형아가 읽어줘야지!” 라며 큰 소리 친다. 얌전하게 앉아서 뭘 하는 성격은 아닌 것 같다. 뭘 하더라도 항상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굳이 공부 쪽으로 생각해보자면, 작은 아이는 공부보다는 다른 것을 더 개발하도록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정도? 이 아이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혼나서 울 때 말고는 항상 웃고 있다. 뭐가 그리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도 모르겠다. 항상 웃고 있어서 웃는 모습이 이 아이의 일상처럼 보인다. 어쩌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게 이 아이의 장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 한글을 몰라도, 공부를 못 해도, 이 아이만의 매력이 넘치는 모습을 더 많이 봤으면 좋겠다.

 

 

 

 

 

 

 

 

 

 

 

 

사쿠라기 시노의 <순수의 영역>과 히가시노 게이고의 <몽환화>를 읽으면서 두 아이를 많이 생각했다. 너무 다르게 보이는 두 아이의 장점이 앞으로 어떻게 작용할지 궁금하면서 살짝 두렵기도 했다. 혹시라도 그 장점이 다른 이유로 방해받고 묻힐 수도 있을까봐... 두 작품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는 많고 다양했지만 유독 내 눈에 들어왔던 단어 두 개, 소설 속에서 ‘재능’과 ‘천재’라는 단어가 풀어내는 그 욕망과 무모함이 어떤 결말을 만들어낼지 궁금하게 했다. 예상했을 수도 있지만, 그 욕망의 끝은 결코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 끝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번쯤은 갈망하는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손을 뻗고 싶은 것이 인간의 모습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본다고 해도, 내 몫이니까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이상을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 아닐까 하고. 그러면서도, 그럼 안 된다는 생각에 그 위험을 붙잡아야 하는(붙잡는 척하는) 것이 이 마음의 아이러니다. 어떤 게 맞는 거라고 앞으로도 분명하게 말하기 어려울지도 모를...

 

 

가능하면 챙겨보고 싶은 TV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진짜사나이>의 군대 무식자 헨리도, 음악 천재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손대는 악기마다 연주할 수 있는 놀라움을 발휘하면서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그는 더 이상 ‘군대 무식자’라는 수식어보다 ‘음악 천재’라는 수식어가 앞서 오는 사람이 되어 버린 듯했다. 그럴 때마다 쌍엄지를 추켜들도록 만들더니 요즘에는 방귀를 조절하지 못하는 민망함으로 함박웃음을 주더라. 방귀에 대해 심각한 대화를 해야 할 정도로(혹 그게 예능의 설정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음악 천재도 방귀 조절을 못하는 단점 하나 있을 수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배시시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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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다닐 때, 그런 선배가 있었다.

어떤 제품을 사용하더라도 꼭 제품사용 설명서를 먼저 정독하고 물건을 대했다.

특히나 전자제품 같은 경우 설명서를 첫 페이지에서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정독한 후에 물건을 개봉했다.

 

 

 

 

 

 

 

 

나는 속으로, '뭐가 이리 꼼꼼해?' 라고 잠깐 생각했었고, 곧 그러려니 했다.

사람이 외모부터 성격까지 다 다를수밖에 없으니, 저런 모습도 당연하게 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 같으면 제품사용 설명서 대충 읽거나 아예 읽지 않고 제품 사용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다 그 제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때 사용설명서를 펼치거나 한다.

그 선배가 그런 꼼꼼함을 보였던 것을 다른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 선배는 제품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실수가 거의 없었다.

마치 예습 철저히 하고 시험 보는 사람처럼... ^^

 

 

알라딘 이용한지 10년이 훨씬 넘었다.

작년에는 알라딘과 10년 계약까지 체결했다.

2023년까지 플래티넘회원 등급을 부여받았다.

주구장창 알라딘을 애용할 거라는 마음의 자세를 다잡았다. (원래 그랬지만서도... ^^)

 

그렇게 애용하던 알라딘에서 늘 궁금한 게 있었다.

'왜 알라딘에서는 현금영수증 발행을 안해주지?'

 

 

처음 사용할 때는 모든 결제를 카드로 해결했기 때문에 현금영수증이란 단어는 떠올릴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몇 년동안 알라딘에서 구매하면서 카드 외 다른 결제수단을 종종 이용하게 되었다.

알라딘 상품권, 네이버책쿠폰, 문화상품권, 도서상품권, 알라딘 적립금, 등등...

그렇게 사용하면서 결제 과정에서 현금영수증 신청하는 항목이 안 보이더라.

(이건 알라딘 주문시 결제과정에서 현금영수증 신청하는 항목이 없었던 게 아니라, 내가 못 봤던 거다.

10년 넘게 수도없이 주문해왔으면서도 못봤다는 게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지만, 사실이다.

이렇게 멘붕이 깊어지고 있다. ㅡ.ㅡ;;;)

 

 

암튼, 그래서 생각했던 것이,

알라딘은 환전하면 따로 상품권으로 표시되는 게 아니고 알라딘 적립금으로 한꺼번에 표시되기 때문에

적립금으로 결제해서 현금영수증 발행이 안되나보다, 그래서 내가 주문할 때 적립금으로 결제하면 현금영수증 발행하는 항목이 자동으로 안 보이게 되었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평소에는 질문도 자주 넣으면서 왜 이런 것은 궁금해 하면서도 한번도 문의해볼 생각을 안 했을까...)

 

 

어제, 바로 그 현금영수증 발행 때문에 멘붕이 왔다.

알라딘 이용한지 10년이 넘었건만, 이걸 나만 몰랐나 싶어서 상당한 시간 좌절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어제 책을 주문하다가 보니 이상한 문구가 눈에 보인다.

어제 책 주문하면서 알라딘 상품권, 문화상품권, 알라딘 적립금, 쿠폰,

이렇게 4종류의 결제수단을 이용했다.

그런데 '현금영수증은 결제완료 후 '증빙서류 신청하기에서 신청'하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건 뭐지?

원래 있었던 문구였나?

낯선 문구에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기억해뒀다가 결제 완료 후에 '증빙서류 신청하기'를 클릭해봤다.

 

 

럴수럴수 이럴수... ㅠㅠ

거기서도 현금영수증을 발행 받을 수 있는 거였다. (아, 정말... ㅠㅠ 한참을 더 울어야 해...)

 

근데, 이런 거... 이런 경험...

나만 한 건 아니지??? ㅠㅠ

 

혹시나 나처럼 몰라서...

알라딘 결제과정에서 현금영수증 발행받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면,

이제라도 발급받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의 바보 같은 경험을 공유해본다. (아자아자!!)

 

결제 완료 후, 아직 배송 시작 전 단계에서 신청할 경우에는

주문배송 페이지에서 '증빙서류 신청조회' 클릭하면 된다.

 

배송이 완료된 경우라면 주문배송 페이지에서 '거래명세서'를  클릭하면 된다.

 

그러면 새로운 팝업창이 뜨면서 거래명세서가 나온다.

그럼 맨 위쪽 첫번째 항목 현금영수증 클릭하면 현금영수증 발행 페이지로 전환된다.

총 주문 금액에서 현금영수증 발행될 수 있는 금액이 새로 확인되고

그 밑에서 형금영수증 발행받을 휴대폰 번호나 형금영수증 카드번호를 입력하면 끝.

 

주의할 점은, 상품 출고 후 2일~3개월 이내의 것만 신청할 수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주문 완료 후에는 잊지 말고 꼭! 현금영수증 발행 받아야 한다는 진리. ^^

 

그리고 내가 지난 주문건, 어제 한꺼번에 다 신청하면서 확인해 보니

주문금액과 현금영수증 발행되는 금액이 다를 때가 있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 적립금(마일리지에서 전환된 적립금, 이벤트성 발급된 적립금, 등등)으로 결제된 경우이거나

쿠폰 사용 금액이 빠진 듯하다.

 

 

혹시라도 나처럼 모르고 지나간 경우라도 3개월 이내의 것은 발행받을 수 있으니,

꼭 확인해보시고 소득공제에 보탬이 되시길...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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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9 2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09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렇게혜윰 2014-06-10 0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몰랐어요! 고맙습니다^^
덕분에 발급받았네요. 근데 3개월은 아닌지 두 건만ㅠㅠ 담부턴 제때 챙겨야겠어요!!!

구단씨 2014-06-11 00:01   좋아요 0 | URL
아핫~!
저만 몰랐던 건 아니었군요. ^^ (다행 다행...)

2014-06-26 0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6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