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의 손
윌리엄 위마크 제이콥스 지음 / 내로라 / 2021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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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가 조금 더 어렸다면, 이런 제안에 솔깃했을 것 같다. 무언가(누군가) 나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누구라도 당장 세 가지 소원을 고민하느라 머릿속이 바쁘지 않을까? 이런 기회 언제 또 올까 싶어서, 주저하는 사이에 기회를 놓칠까 봐 애가 타겠지.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얼른 말해야지. 내가 간절히 바라는 세 가지를 얼른 입 밖으로 쏟아내야지. 하늘에서 돈다발이 떨어졌으면 좋겠고, 죽는 날까지 아프지 않게 잘 나이 들어갔으면 좋겠고. 또 뭐가 있을까. , 막상 말하라고 하니까 모르겠다. 어떤 걸 제일 먼저 말해야 하는지 마음만 급하고 생각나는 게 없어. 어떡해!!


화이트 씨 가족에게 모리스 상사가 찾아온다. 그는 인도로 파견 갔던 신임 부사관으로, 화이트 씨와는 21년 만에 만났다. 반가운 이와의 재회도 잠시, 그는 이 가족에게 원숭이의 손을 꺼내놓는다. 그것은 늙은 수도승의 주술이 걸려 있었고, 운명이 이끄는 인생을 거역한다면 참담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거였다. 세 사람이 각자 세 개의 소원을 빌 수 있다고 한다. 모리스 상사가 원숭이의 손 두 번째 주인이었고, 첫 번째 주인 역시 소원을 이뤘다. 앞선 사람의 마지막 소원은 자기를 죽여달라는 것이었다니, 그에게 무슨 사연이 있던 것일까 궁금해질 무렵, 모리스 상사의 소원까지 덩달아 궁금해졌다. 무슨 소원을 빌어서 이뤘는지 모르겠지만, 모리스 상사는 자기 소원을 화이트 씨 가족에게 공개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더 궁금해지는 이 마음은 또 뭐란 말인가.


, 인간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 세 가지 소원을 빌면서 위험을 경고했던 것도 무시하고, 화이트 씨는 모리스 상사에게 원숭이의 손을 건네받는다. 소원을 빌기 위함이 아닌 그저 호기심 때문에 받아놓고 한쪽에 그냥 두었을 뿐이다. 여유롭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평범하게 잘 살아가는 이 가족에게 간절한 소원은 없었다. 그런데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원숭이의 손을 손에 넣는다. 그걸 호기심에 받아두었다니 어쩔 수 없지만, 그냥 거기까지였다면 좋았을 것을. 모리스 상사가 차마 다 말하지 못한 경고를 이 가족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장난처럼 농담처럼, ‘원숭이의 손을 들고 소원을 빌었다. 200파운드만 있다면 집 대출금을 갚을 수 있을 텐데. 그래서 외쳤다. “내 소원은 200파운드야!” 이상하다. 도깨비방망이 뚝딱하는 것처럼 눈앞에 200파운드는 나타나지 않았다. 에이, 좋다 말았네. 아쉽지만 원숭이의 손은 그냥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이었구먼.


거기까지였다면 다행인데, ‘원숭이의 손이야기가 처음 모리스 상사의 입에서 나왔을 때부터 다가오던 불안의 정체는 곧 모습을 드러냈다. 화이트 씨 가족의 첫 번째 소원인 200파운드. 곧 그 돈은 그 가족 앞에 나타났다. 되돌릴 수 없는 대가를 치르고 나서 말이다. 이쯤 되니 살아가면서 저절로 알게 되는 말이 떠오른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더냐. 주술을 걸어놓은 수도승의 말처럼, 인생을 이끄는 운명을 거스르려고 하니 고난이 찾아오는 거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럼 또 이렇게 생각하겠지. 이 가족의 불행이 200파운드 때문이었다면, 남은 두 가지 소원으로 해결하면 되는 거 아니겠냐고. 그렇게만 된다면야 간단하겠지만, 인생이 어디 또 그렇게만 흘러가지도 않는 거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대로만 완성되는 게 삶이라면 이런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겠지. 주술인지 우연인지, 저주인지 기적인지 모를 선물 하나에 평온했던 오늘은 달라졌다.


단순하게 본다면 단순하겠지만, 이 짧은 이야기에 많은 메시지가 담긴 듯해서 한참을 읽었다. 당신의 소원이 이뤄진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묻는다. 바라는 소원이 없는데도 호기심에 손에 쥔 것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지 또 한 번 묻는다.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왜 우리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비밀에 다가서려고 하는 것일까, 하는 거다. 화목하고 적당히 잘 지내는 화이트 씨 가족에게 정말 당장 소원은 없었다는 게 진실이다. 그런데도 모리스 상사의 불안한 눈빛을 뒤로하고 기어코 달라고 징징거리는 화이트 씨. 호기심이 이긴 결과는 어땠을까. 아마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예상했겠지만, 그들이 향했던 호기심을 결말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었다. 물론 되돌릴 수도 없었다. 중요한 것을 잃고 나서 후회해도,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끝이 없는 그 호기심에 또 다가설 것 같은 이 불길함은 뭘까.


비극이다. 소원을 빌 기회가 생겼는데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함부로 말할 수 없다니. 이 소설의 결말까지 보고 나면, 아무리 좋은 기회가 와도 그 소원 말하기는 어려울 거다. 처음 이 이야기를 접하고 나는 무슨 소원을 빌어볼까 웃으면서 한참을 생각했는데, 이제는 어떤 소원도 함부로 빌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본인의 노력과 의지가 아니라면, 바라던 바가 이뤄져도 기쁘지 않으리. 호기심이 일으킨 좋은 결과물도 분명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노력 없이 주어지는 것은 항상 오래 가지 못했다. 내 것인데 내 것이 아닌, 언젠가 들어온 것보다 더 크게 뺏길 것 같은 불안함. 정말 이런 기회가 온다면 도박하는 마음으로 다가서는 수밖에 없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언제나 선택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자유를 누리며 사는 인간이고, 우리는 그 자유 의지로 모든 순간을 선택하곤 했다. 어떤 결정이든 우리 자신의 몫이라는 게 새삼스럽지 않다. 기회가 찾아와서 소원을 빌어도, 어떻게 치를 대가인지 몰라서 소원을 빌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기회를 얻고 기회를 놓치는 건 똑같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나는 원숭이의 손을 들고 소원을 말하지 못할 것 같아. 너무 무서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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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제 손 이야기하시는 줄 ㅠㅠ ㅎㅎ 당선 정말 축하드려요 *^^*

구단씨 2022-03-12 23: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왜 원숭이의 손이 미니님 손을 떠올리게 했을까요? ^^
이 책 재밌어요. 짧고 굵어요.

새파랑 2022-03-08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표지 사진이 좀 무섭긴 하군요 ㄷㄷㄷ

구단씨 2022-03-12 23:2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제목은 약간 의문이 드는데, 표지가 오히려 이 책을 잘 설명한 것 같아요.

서니데이 2022-03-08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구단씨 2022-03-12 23:2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주말 잘 지내고 계신가요?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었습니다.

이하라 2022-03-08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2-03-12 23: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좋은 책 읽고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희선 2022-03-08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공짜는 없지요 뭐든 애써서 얻어야 더 그걸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까 싶어요 복권에 당첨된 사람 끝이 거의 안 좋다고도 하잖아요 저라면 복권에 당첨되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조금씩 쓸 텐데... 저는 복권 안 사요 안 될 걸 알기에...

구단 님 축하합니다


희선

구단씨 2022-03-12 23:26   좋아요 1 | URL
저도 정말 그게 궁금했어요. 왜 복권에 당첨된 사람의 이야기는 안 좋은 것만 들려올까요?
돈이 행복을 도울 것 같은데 말이죠.
저 역시도 복권 당첨되면 조용히 당첨금 수령할 겁니다. ㅎㅎㅎ 일주일에 한번씩 사요. ^^

독서괭 2022-03-09 00: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2-03-12 23:2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이 책 동화처럼 잘 읽히고 재밌어요. ^^

강나루 2022-03-09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당선 축하드려요.
오늘 투표하는 거 아시지요^^

구단씨 2022-03-12 23:27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사전 투표하고 왔어요. 결과가....

thkang1001 2022-03-09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2-03-12 23:2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러블리땡 2022-03-10 0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구단씨 2022-03-12 23:2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문득 생각나는 어떤 시간이 있다. 일부러 소환하지는 않았지만, 기어코 떠오르고야 마는 장면들 때문에 울컥해지고야 만다.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고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닌데, 아련하게 떠오르고야 마는 기억 때문에 심장이 잠시 두근거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어떤 계기로 떠오르기도 하고, 갑자기 찾아온 그리움 같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그런 순간은 대부분 후회를 동반한다. 그때 왜 그랬을까 하면서 가슴을 한번 치고 싶은 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어떤 일,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책 같은 거 말이다. 그래도 좋았는데, 그리운데, 그 한가운데는 언제나 아쉬움이 있다. 나이를 먹어가는 걸 이렇게 느끼는 건가. 아니면 이런저런 생각에 심란해서 그냥 그런 순간이 다가온 것이었거나. 안드레 애치먼의 하버드 스퀘어는 처음부터 그리움이 묻어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자인 는 열일곱 살 아들과 함께 캠퍼스에 있다. 하버드였다. 대학 입학을 앞둔 아들의 미래를 같이 고민하는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 중이다. 아버지의 자격으로 함께 듣는 설명회였지만, 거기에는 두 가지 진실도 있다. 아들이 후회하지 않는 대학 생활을 바라는 마음에 부모로서 건네는 조언과 염려와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는 그의 대학 생활 한 부분을 계속 생각하고 있다는 거다. 그럴 수도 있지. 대학에 입학하는 아이를 두고 어느 부모라도 그 시절을 떠올릴 수밖에. 너무 자연스러운 기억의 부름이 아니겠나. 대한민국을 기준으로 보면 이십 대의 시작이었을 테고, 너무도 찬란해서 종종 그리워질 시간이다. 가장 젊고 예뻤을 때, 청춘이라 불리며 힘이 넘쳤을 때, 하고 싶은 게 많을 때. ,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그립다. 하지만 그의 대학 생활을 여유롭지 못했다. 아르바이트하면서 버는 돈은 모두 집세로 들어갔고, 그의 용돈은 항상 모자랐다. 그나마 받는 장학금이 도움이 되는 정도였을까. 허투루 보낼 수 없는 시간이었고, 그의 청춘과 다른 어려운 시절이었다.


느 순간 그는 아들을 앞에 두고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그의 대학 시절의 어느 날, 문학 시험을 대비해 책을 읽던 카페에서 그는 친구가 될 칼라지를 만난다. 수다스럽지만 의미 있는 말을 쏟아내는 칼라지. 그의 힘든 시절 한 장면을 장식하게 될 중요한 사람을 만난 순간이었다. 칼라지의 몇 마디에 반해버린 그는 단번에 칼리지와 친해진다. 어쩌면 이방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칼리지와 나눌 수 있어서일까. 주변의 화려한 것 가운데서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일까. 하버드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자기 출신을 부끄러워하고 가난을 힘들어했다. 상황이 비슷한데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받아들이는 칼라지를, 그를 부러워했다. 매력적으로 여기며 닮고 싶었다. 두 사람에게는 프랑스를 좋아한다는 공통점도 있었으니, 대화가 얼마나 잘 통했을까.


소설에서 묘사되는 칼리지는 참 당당한 사람이었다. 환경에 주눅 들고, 항상 돈에 쫓기며 지내는 대학 생활이 그를 우울하게 했던 것과 달리 칼리지는 무서울 게 없어 보였다. 큰 소리로 이야기하며 지식이 넘쳐 보였다. 안으로 숨어들기에 바빴던 그가 칼리지를 어떻게 봤을지 상상이 된다. 비슷한 조건인 것 같은데, 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이상해 보이기도 했겠지만, 닮고 싶기도 했을 거다. 가난한 유학생 신분으로 하버드에서 살아가기란 어려웠다.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허락된 건 그저 하버드 입학뿐이었을까. 칼리지를 알고 그에게는 고향의 냄새를 맡는 것처럼 편안했다. 학교 시험에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통과해야 할 시험보다 카페에서 칼리지와 머무는 시간이 더 중요했다. 초라해 보이는 카페에서 마음만은 초라하지 않은 일이 가능했다.


이런 마음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아? 각자의 상황, 삶이 다르기에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냥, 그런 비슷한 시절을 지나왔다고, 현실에 치여 살다가 마음 편하게 해주는 것에 눈길을 뺏기기도 했다고 말하면 어떨까. 나는 눈앞의 것을 해결해야 하는데, 마음은 너무 힘들어서 좀 쉴 곳을 찾고 싶었다고 말이다. 그럴 때 우리가 보고 만난 누군가는 굉장한 의지가 된다. 나와 비슷해서 바라보고 연민을 느끼면서도, 내가 가고 싶지 않은 길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서 혐오스러운 대상. 가까워서 편안한데 그게 불편해서 멀어지고 싶은. 상대가 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이 그곳에 기대고 싶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야 할 텐데, 그 정도의 시간을 건너왔다면 그 존재가 지금 내 옆에 있어야 맞을 것 같은데, 없다. 그 존재는 이미 사라진 그 시간과 함께 나에게 남아 있지 않다. 잘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고, 또 지금을 살아가는 일에 다시 바쁘다고 핑계를 대면서. 일부러 기억할 수도 없었다. 그럴 기회조차 없이 살아왔다. 우리 대부분,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문득, 이런 책을 만나면, 주인공의 기억과 시간을 같이 거슬러 오르면서 찾아오는 이 감정에 잠깐 묶이곤 한다. 후회를 가득 안고서. 하아.


이 어두운 침실에서 문득 아주 선명하게 떠오르는 깨달음이 있었다. 그에게서 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 그는 여기서 모든 것을 망치고 모든 것을 잃는 순간에 내가 얼마나 가까이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였다. 그는 나보다 딱 세 걸음 앞서가는 내 운명이었다. (하버드 스퀘어 272페이지)


아마도 칼라지의 인생을 조금 엿본 다음에는 이 사회의 차별과 적대, 세상사에 무관심했던 그 자신을 더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을 거다. 거리를 떠돌고, 다른 이의 집에 얹혀살면서, 택시 운전을 하고 시를 쓰는 칼라지. 물론 칼라지에게도 험난한 사건이 많았고, 현재에도 칼라지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어려움에 부닥쳐 있다는 게 맞겠지. 그런데도 그와 닿을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서 두 사람의 우정과 끈끈함이 오래 갈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 밖으로 두 사람의 길을 너무 다르게 열리고 있었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세상에 맞선 칼라지와 하버드의 삶을 인정하며 꾸려나가려는 그는 더 가까워질 수 없었다. 오히려 서로를 알기 전보다 멀어졌다고 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미래를 하버드에 걸었으니까. 그의 인생이 칙칙한 카페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칼라지의 사이다 같은 말에 계속 빠져 있을 수도 없었다. 그에게 현실은 하버드 안에 있었고, 그가 올라야 할 곳을 바라보는 게 그의 삶을 완성할 수 있는 길이었으니까.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찾은 하버드 광장에서 그는 무엇을 보았을까. 너무도 닮았던 칼라지와 자신을 다시 보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대로 뒤돌아선 자신을 혼내고 있을까. 그도 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다른 선택이 그에게 최선이 될 수 없었음을.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도. 칼라지와 제대로 된 인사를 못 했기에, 풀지 못한 숙제로 오랜 세월 그의 가슴에 남아 있던 건 아닐까 싶다. 살아오는 동안 내내 그의 가슴 속에 숨겨두었던 것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누가 묻지 않았지만, 오늘의 그가 불행하지도 않았지만, 그에게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건 그만이 알겠지만, 그와 너무 닮은 한 사람이 그렇게 존재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종종 꺼내 보고 싶어질 것 같다. 세상에 맞서고 싶은 자신을 대신했던 사람, 그러지 못하고 숨죽인 자신의 모습을 아는 유일한 사람, 그립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고 그저 스치듯 한번 보고 싶은 사람.


누구나 비슷하게 겪는 어떤 마음을 마주하는 것 같다. 그립고 아쉽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은, 혹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우리의 선택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데도 자꾸 생각나는 건 무슨 마음인지 정의할 수 없지만, 이렇게 계속 남아 있을 것 같다고. 그냥,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머물러 있지 않은 어떤 마음, 아마도 계속 이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야겠지.


안드레 애치먼의 많은 작품이 그러하듯, 이 작품 역시 그가 가진 배경이 많이 담겼다고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마치 작가의 분신처럼, 같은 배경을 가진 이가 소설을 이끌어가면서 매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자전적 소설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소설에 잘 녹아 있다. 이방인과 방랑자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던 시절의 그, 그런데도 쉽게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렀던 그의 경험이 이야기의 바탕이 된다니 소설이 더 생생하게 들린다. 물론 소설에 담긴 모든 것이 그의 인생은 아닐 것이다.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표현하면서 독자에게 그 경계를 서성이게 한다. 아마 전작도 그랬을 테고, 다음 작품도 그러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아무렴 어떠하랴.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그의 시간을 듣는 일은 행복하다. 독자의 감정을 쥐고 흔드는 능력이 타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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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하는 마음에 덧붙입니다.

안드레 애치먼의 <하버드 스퀘어>를 읽고 싶으신 분이 계시다면 말씀 남겨주세요.

제가 두 권을 가지고 있어서 한 권을 나눔하려고 합니다. 

좋은 책 같이 읽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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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2-16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드레 에치먼 작품은 아직 안읽어봤는데 리뷰를 보니 완전 좋을거 같아요~ 감정을 흔든다니 ㅋ 이번달에 꼭 한권은 읽어봐야 겠습니다 ^^

2022-02-16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6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2-02-16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오늘까지 기다려 보시고 안 계시면 저에게
보내주시죠.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아니 새파랑님 보내달라는 뜻인가요?
표현이 어떤 의민지 잘 모르겠네요.
구단씨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ㅎㅎ

2022-02-16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6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6 2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2-02-18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오늘 책 받았습니다.
나눔해 주셔서 넘 고맙습니다.
구단님 메모 글도 예쁘구요.ㅎ
즐겁게 읽도록하겠습니다.
즐거운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mini74 2022-03-08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넘 재미있게 읽은 책 ㅎㅎ 구단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

새파랑 2022-03-08 18: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축하드립니다~! 좋은 책, 좋은 리뷰였어요^^

그레이스 2022-03-08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축하드려요~~

서니데이 2022-03-08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이하라 2022-03-08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희선 2022-03-08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 님 축하합니다 안드레 애치먼이 쓴 이 소설에는 자기 경험이 더 많이 들어간 듯하네요 사람한테는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자꾸 떠오르는 때가 있기도 하겠습니다


희선

독서괭 2022-03-09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2관왕 축하드립니다~^^

thkang1001 2022-03-09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2관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전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지만, ‘고전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한 가지. 너무 유명해서, 여러 버전으로 접해서 내가 이미 그 작품을 읽었다고 착각하는 거다. 그 착각 속에는 고전을 많이 읽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도 있다. 고백하지만, 나는 정말 고전 거의 안 읽었다. 이상하게 상 받은 작품들 재미가 없다고 느끼는 것처럼, 고전이 재미가 없더라는 거다. 물론 모든 고전이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다. 책을 읽는다는 건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이니, 그저 그 작품이 내 마음에 쏙 들어오거나 아니거나, 뭐 그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그렇게 고전을 두고 몇 가지 고민을 하던 차에 새롭게 만나는 고전의 버전이 일러스트였다. 그리하여 이번에 읽게 된 제인제인 에어를 현대판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주인공 제인은 사랑하는 부모님을 잃고, 이모의 집에서 길러진다. 평소 왕래가 없던 이모 집에서 살아야 하는 어린 여자아이의 인생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객식구 한 명이 늘었지만, 아무도 관심 두는 이가 없다. 이모의 집은 분위기가 살벌하다. 폭력적이고 매일 싸운다. 제인은 이 집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만 지내자고 혼자 마음먹는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모아야 했다, 여기서 탈출하려면. 그렇게 제인은 부모님이 바다에 나갔던 것처럼 뱃일을 한다. 어느 정도 돈이 모였을 때 제인은 뉴욕으로 떠난다. 아마 그 집 식구들 누구도 제인이 떠나는 것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각자의 티격태격에 바쁜 나머지 제인이 그 집에서 살았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지.


제인은 뉴욕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하고, 작은 방을 구한다. 그러면서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일자리를 또 구해야 했는데, 용모단정한 이를 뽑는다고 해서 간 일자리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가라는 대로 갔더니 저택이었고, 집주인 이름은 로체스터. ㅋㅋㅋ 제인이 할 일은 로체스터의 딸 아델을 돌보는 유모였던 것. 유모가 몇 번이나 바뀌었다는 말에 생각했다. , 고된 직업이겠군. 진상 고객의 요구를 들어주기 힘들었으니, 가장 오래 버틴 유모가 일주일이겠지. 바로 뒤돌아서서 나갈 줄 알았던 제인은 아델과 친해지고 싶어한다. ? 사실 제인은 어릴 적 혼자 지내며 외로웠던 시절을 아델에게서 다시 본 거였다. 엄마가 없이 아빠와 살지만, 아빠는 바빠서 아델을 볼 시간도 없는 게 현실. 제인이 지금 아델을 보는 게 동정은 아니겠지만, 안쓰러운 어린 시절을 지내는 건 맞지. 어쨌든 제인은 아델과 친해지고, 점점 아델을 보러 가는 일이 즐겁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마주친 아델의 아빠, 로체스터!



엄마는 돌아가셨고, 아빠는 사업 때문에 바빠서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아델의 상황을 아는 제인은 이때다 싶어 로체스터에게 아델의 상황을 말한다. 아이가 유치원에서도 혼자 지낸다고, 친구가 없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도 못한다고, 학습에도 문제가 있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로체스터는 과외 선생을 들이라고 했던가? , 뭐든 돈으로 해결하면 되는 거였군. 하지만 우리의 제인은 그렇게 놔두지 않았지. 로체스터에게 유치원의 상담에 참여하라고, 아델을 좀 더 잘 돌보라는 조언을 건넨다. 그러다가 점점, 제인은 심장이 없는 듯 살아가는 로체스터에게 반하고, 로체스터 역시 제인에게 마음이 가는데...


원작에서도 아이가 있었던가? 그게 잘 기억이 안 나네. 그런데 반전같이 존재했던 비밀의 방은 이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아무도 들어가면 안 돼, 큰일 난다, 누구라도 그 방에 접근하려고 하는 순간 저택에서 쫓겨난다고. 제인은 이 약속을 잘 지키지만, 설마 아델의 아빠에게 마음에 뺏길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겠지. 저택은 어디든 수상한 기운이 풍기고, 로체스터를 바라보는 마음을 자꾸만 심쿵하다. 이상하게 원작보다 뭔가 더 스릴 있고 더 로맨틱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밤에 계단을 오르던 그 남자는 누구일지, 로체스터가 강렬하게 제인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뭔지. , 이거 정말 사랑인가요? ?


줄거리는 거의 비슷하고, 배경이 현대로 바뀐 것만 좀 다른 듯하다. 제인이 당당하게 혼자서도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마지막까지 로체스터와 관계가 더 진전되는지 보여 주지는 않았지만. , 죽을뻔한 위기를 같이 탈출했으니, 사랑하는 마음에 전우애 비슷한 것까지 더해지지 않았을까? 중간에서 아델이 또 중재자 역할도 잘할 것 같고. 이 정도면 훈훈한 마무리 되시겠다. 읽으면서도 계속 쏠리는 이 소설의 장르는 역시 고전이라기보다는 로맨스 소설 아닌감? 근데 왜 열린 결말처럼 보여줬는지 모르겠군. 둘이 다시 만나서 잘 먹고 잘살았다, 이것까지 확인사살 해주면 안 되는 법칙이라고 있는 건지 뭔지. 문장 말고 그림이 보여 주는 장면들이 확실히 더 설레긴 하다. 막 뽀뽀하는 이런 장면도 넣어주고 말이야.


몇 년 전 언젠가,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키다리 아저씨를 읽은 적이 있다. 이미 내용도 알고 여러 가지 버전으로 눈을 호강하면서 봤던 작품인데, 이거 느낌이 다르다. 문장으로 장면을 그려가면서 읽는 그 느낌이 더 말캉하다고 해야 하나. 주디가 저비스 씨에게 편지를 쓸 때마다 밀당 잘하라고 중얼거렸다. 일상을 너무 오픈하는 거 아니냐고 주디를 구박하면서 읽었다니까. 나중에 저비스 씨가 키다리 아저씨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나 싶어서 혼자 안절부절.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이미 눈치챘는데, 주디만 몰라. 저비스 씨가 키다리 아저씨라니까!!! 뒹굴뒹굴하면서 읽다가 발차기를 여러 번, 혼자 얼마나 흥분을 했던지. 읽으면서 주디랑 저비스 씨 때문에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다. 주디가 너무 순진하게 보여서, 저비스 씨가 빨리 정체를 밝히지 않아서 말이야. 처음 뭣 모르고 펼쳤을 땐 동화를 읽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점점 빠져들면서 이 소설의 장르를 확인했다지. 로맨스 소설이지 뭐야. 홍홍. 아무래도 내 고전(?) 취향은 이런 건가 보다. 읽고 보니 말랑말랑해지는 거? ^^ , 주인공에게 너무 이입하지 말아야 하는데, 읽다 보면 그게 잘 안 됨. 이제 막 변신펼쳤는데, 이 작품은 또 어떠려나. 기대 반 설렘 반. 뭔가 묵직한 여운까지 한꺼번에 와닿았으면 좋겠네.


두 작품 모두 어린 여자아이가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보여 주면서도, 당당한 삶 속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세 역시 당당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험난한 성장 과정이었어도, 고아 소녀였어도, 불우한 어린 시절이 있었어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면서 자기 삶을 완성해가고 있었다는 것. 제인 에어의 원작이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면서, 여성의 삶이 남자의 보호 아래 있어야 안정적이라는 것과 그래서 결혼까지 닿아야 완성된 인생이라고 믿었을 때라고 하니, 현대판으로 각색된 제인에서는 로체스터의 보호나 선택이 아닌 제인 자신의 커리어와 당당함으로 인생을 완성해간다.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외면당한 자기 화풍이 인정받고 전시회까지 하는 것으로 그녀의 자리가 굳어진다. 그리고 사랑도 더 탄탄하게 이뤄가리라고 믿는다. 그게 인생이지.


혹시라도 나처럼, 고전 읽어보고 싶은데 선뜻 덤빌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비슷한 분위기로 들려오는 여러 버전을 접해도 좋다고 말하고 싶네그려. 활자로 빽빽한 이야기가 부담스럽다면, 일러스트나 동화 같은 이야기로 먼저 만나도 충분히 즐겁다. 뭐든, 읽는 게 먼저 아니겠음둥? 읽고 보니 재밌다. 그리고 더 재밌어질 이야기들이 기다려지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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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06 10: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왠지 저 키스씬은 캔디가 생각난다는.... 분위기 캔디와 테리우스의 키스씬과 분위기 너무 비슷합니다. 그러고보면 제인에어도 결국 캔디장르라는 생각이 드네요. ^^

구단씨 2022-01-11 15:18   좋아요 0 | URL
꺄아악~ 캔디와 테리우스.
이야기의 분위기가 약간 비슷하죠? 캔디형 주인공. ^^

다락방 2022-01-06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키스씬 때문에 보고싶네요 ㅋㅋㅋㅋㅋ

구단씨 2022-01-11 15:18   좋아요 0 | URL
까르르르르~
그림 스타일이 좀 투박(?)한 느낌이 있는데, 로맨스드라마 보는 느낌이 강합니다. ^^
 


 

엄마를 생각하면 정말 지독하게 슬픈 기억 몇 가지가 있다. 그중에 가장 기억나는 것 한 가지.


어느 날 집으로 최후 독촉장 같은 게 날라왔다. 뭔가 하고 펼쳐보니 가압류 통지서였나 보다. (그땐 어려서 그 서류의 정확한 이름이 뭔지 기억나지 않는다) 흔히 아는 그거, 빨간 딱지 붙이러 오겠다는 최후통첩이었다. 엄마는 왜 이런 게 우리 집에 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는데, 아뿔싸. 남에게 보증 서주는 게 취미였던 아버지가 엄마에게 의논도 없이 동네 후배의 사업에 보증인이 되었던 거다. 뭐 가진 게 있어야 털릴 거라도 있지. 낡고 허름한 집 한 채가 전부였던 우리에게 이 무슨 날벼락인지. 엄마는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았고, 그래도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어린 막냇동생을 둘러업고 여기저기 알아보러 다녔다. 당시 세무 관련 일을 잘 알았던 이모부에게 의논했고, 결과는 어찌어찌 집은 엄마의 명의로 변경했고, 돈을 빌린 후배는 간신히 사업 관련 채무를 정리한 듯했다. 그것도 꽤 오랜 시일이 걸려서 말이다.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얼마 안 되는 값어치의 집이지만, 이것마저 없다면 갈 곳도 없는데 온 식구가 길바닥에 나앉으라는 것이냐 하던 엄마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후로도 아버지는 또 다른 이의 빚보증을 서주었고, 그때마다 우리는 간을 졸이며 그 순간을 건너갔다. 항상 일을 터트린 사람은 아버지였는데, 언제나 그 일을 마무리하는 건 엄마의 몫이었다. , 엄마 속이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지.


기억 속 엄마는 항상 사는 일에 억척이었다. 아마 대부분 엄마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을까 싶다. 뭐 하나 넉넉하지 않은 생활을 꾸려나가려면 억척스럽고 드세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니까. 어릴 때 뭣 모르고, 나는 엄마의 그런 모습이 너무 좋았다. 남들과 싸워도 지지 않으려는 엄마의 태도는 용감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느 곳에서도, 누구에게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했던 엄마의 모습이 때로는 뻔뻔해 보였지만,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꽤 든든하게 느꼈더랬다. 어려서 그랬다고 말하기에는 참 말도 안 되는 이유였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엄마의 그런 세월이 안쓰럽기만 하다. 살아오느라 참 힘들었구나, 고생 많이 하셨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엄마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 번도 여유로웠던 형편인 적이 없었으니까. 달라진 게 있다면, 그때의 어린 자식들은 다 커서 더는 엄마의 돌봄이 필요 없어졌다는 것 정도. 하지만 이 말도 모순이다. 엄마의 자식인 우리 남매들은 여전히 엄마를 부르며 엄마의 손길이 닿아야 하는 일을 부탁하곤 하니까.


사실 엄마에 관한 정말 잔인한 기억 하나가 있는데, 그건 차마 말로 꺼내지 못하겠다. 엄마와 나만 아는, 우리가 함께 욕하는 그 일을 두고두고 반복하지만, 그건 엄마와 나만 기억하는 일로 묻어두어야겠지. 엄마의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되고, 엄마의 바깥 활동의 즐거움을 끊어버린 그 일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마영신 작가의 엄마들의 표지를 보면서 잊고 싶은 그 일이 생각났다. 세상 모든 엄마의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고 하면 과장일까. 누구나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면서 사는 건 아니겠지만, 머리끄덩이만 잡지 않았지 그런 자세로 살아가는 건 비슷하지 않을까. 작품 속 엄마는 빚만 남기고 살면서 행복한 적 없던 남편과 이혼하고 용역업체에 소속되어 건물 청소 일을 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생계를 위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나날 속에서 노조를 만들기도 한다. 노조를 만들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부당한 대우는 더 심해졌다. 일은 고되고 힘들지만, 엄마는 친구들과 자주 만나고 춤을 배우면서 일상의 즐거움을 누린다. 오래된 애인도 있다. 그 애인 때문에 덜 외롭고 울고 웃고 하지만, 항상 헤어지자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놈의 정이 뭔지 쉽게 헤어지지도 못한다. 집에는 서른 넘은 아들이 음악을 한다며 엄마와 함께 산다. 그 집에 애인까지 드나들며 서로의 인생을 꾸려가는데, 이게 참 묘하다. 친구들과 술 마시고 춤추러 다니고, 또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소장과 반장의 부당함에 입을 모아 욕하고, 애인은 또 다른 여자를 만나는데도 너만 한 여자 없다고 말하며 엄마 옆에 붙어 있다. 아들은 그런 엄마가 이해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건 또 엄마의 인생이니 서로의 삶을 존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도 이제 지쳤다. 인제 그만 혼자 지내고 싶다. 아들에게 독립하라며 집에서 내보낸다. 애인과는 헤어진다. 혼자가 된 엄마는 그럭저럭 잘 지낸다.


아, 이런 결말을 기대한 건 아닌데, 암튼, 엄마 이야기의 결말은 조금 더 이어진다. 상당히 팍팍한 삶을 겪어온 엄마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 멋있어 보인다. 자기 일 열심히 하고, 건강하게 자식 잘 키웠고, 애인과 외로움도 나누면서 돈도 나누고, 친구들 만나서 신나게 놀기도 하는 일상을 가진 사람. 너무 멋진 것 같다. 여전히 엄마의 삶은 팍팍하기도 하고, 돈이 궁하기도 하다. 노후 준비도 못 한 채로 살아가는 날들이 불안하다. 애인과 싸우기도 하고, 친구와 절교하기도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사는 데 그런 일도 생길 수 있는 거지 뭐. 보통 어머니를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과 억척스러운 날들을 살아온 것이 뭐가 얼마나 다른 건지 모르겠다. 이 모자(작가가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쓴 이야기란다. 50% 정도 비슷하다고)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가 많이 착각하고 살아온 건 아닐까 싶다. 나는, 내가 엄마를 잘 안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어쩌면 내가 아는 엄마는 10%도 되지 않는 거 아닐까? 보여주고 말로 하는 것 말고, 가슴에 담아둔 많은 이야기와 생각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들더라. 엄마의 희생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엄마의 역할이라고 생각한 부분도 있다. 그런 생각마저 뭔가 어긋난 느낌이다. ‘엄마가 아니라 부모의 역할이었을 뿐이었던 건 아닐까. 가끔은 엄마의 신세 한탄 같은 푸념을 듣고 있다 보면, 엄마 인생이 참 쓸쓸하다는 생각에 한참 머문다. 왜 엄마의 시간은 이렇게 채워져야만 했을까.


내가 모르던 시절의 엄마 이야기를 듣다 보면 웃기기도 하고 눈물 나기도 하는데, 같이 나이 들어가는 지금, 이제 그런 이야기는 우리의 공통 주제가 되기도 한다. 가끔 어떤 책을 읽으면 유독 엄마 생각이 많이 나서, 그 책의 후기에 나도 모르게 엄마 이야기가 주절주절 흘러나오기도 한다. 이제 내가 그럴 나이가 된 건지 어떤 건지, 엄마의 지난 세월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돼버리고야 마는... 작가는 엄마의 연애를 중심으로 엄마의 인생을 그렸지만, 나는 엄마의 고된 시간만 자꾸 생각난다. 오늘도 엄마를 모시고 병원 투어를 했는데, 젊은 엄마의 씩씩함과 열정은 어느새 사그라들어버렸다는 걸 새삼 느낀다. 시우 작가의 쑥부쟁이속 엄마의 모습에 더 가까워졌다. 언제나 인내만을 필요로 했던 삶을 곱씹으며, 고단한 시간을 억척스럽게 버텨온 것도 모자라 아직도 자식을 더 보살피지 못한 안타까움을 안고 산다. 쑥부쟁이속 엄마는 딸의 이혼 소식에 어떻게든 말리고 싶어 한다.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사는 고단함을 알기 때문에. 다 그렇게 산다고, 아이들 때문에 산다고 조금 참으라고. 하지만 딸의 이혼 결정은 또 다른 길을 연다. 딸은 이제야 숨 쉬는 것 같다고, 살 것 같다고 이혼 결정을 담백하게 받아들인다. 반면 엄마는 딸이 자기 삶을 따라오는 것 같아서 불안하고 미안하다.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삶, 그나마 큰딸이 있어서 의지가 되고 든든했던 건데, 이제 그 큰딸에게 엄마는 해줄 게 없다. 그저 마음만 아플 뿐.


뭘 그렇게 잘못하며 살아왔다고, 자식들한테 다 퍼주기만 하는 인생을 기꺼이 받아들었더냐. 오늘도 몸과 마음이 쪼그라드는 우리 엄마는 가난밖에 물려주지 못했다며 미안해하고, 이제는 나이 든 몸을 자식한테 기대느라 미안함이 곱절이 되었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만큼 해줬으면 됐지 뭘 더 해주겠다고. (뭔가 더 주면 받기는 하겠다만. ^^) 어찌 보면 아직도 이해할 게 더 많이 남은 사이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엄마들의 아들은 진즉에 엄마의 삶을 이해하며 받아들였기에 엄마의 애인을 인정했고, 쑥부쟁이의 엄마는 오랜 세월 키우고 지켜봤던 딸을 이제 좀 알 것 같다. 그 딸은 또 엄마가 조용히 적어둔 시를 들춰냄으로써 엄마의 시간을 읽는다. 그렇게 또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말고, 우리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게 뭘까. 나이 들어갈수록, 한 해 한 해 서로의 시간이 쌓일수록,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 쉬운 게 아니라 어려워지는 이 아이러니는 또 뭐고. 에휴.


눈이 오는 것도 아닌데 주변이 어두컴컴 흐려진다. 엄마가 이제 힘들다고 김장 안 하신다고 했는데, 엄마가 담근 김장김치 묵은지로 만든 김치찜에 막걸리 한잔하고 싶다. 아쉬운 대로 오늘은 치킨에 캔맥주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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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2-15 13: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마들>이란 책 존재도 몰랐는데 덕분에 알게 되어 장바구니에 넣습니다. 리뷰 읽을 때는 소설이겠거니 했는데 마지막 링크를 타고 가보니 그래픽노블이네요. 엄마 는 이상하게 그냥 엄마 라고 부르기만 해도 코끝이 찡해져서 어쩌면 저 그래픽 노블 읽다가도 울어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읽어볼래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구단씨 님.

구단씨 2021-12-17 14:44   좋아요 0 | URL
작가가 엄마의 연애 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기에 유쾌하고 재밌어요. ^^
근데 또 그 엄마 인생의 바탕에는 고생과 서글픔이 깔려 있어서 그런지 웃기만 할 수는 없더라고요.

쎄인트saint 2021-12-16 15: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021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그레이스 2021-12-16 15:37   좋아요 1 | URL
저도 축하드려요

구단씨 2021-12-17 14:47   좋아요 0 | URL
세인트님, 그레이스님. 감사합니다.
일년동안 좋은 글, 좋은 책 이야기 잘 듣고 보관함에 많이 넣었어요. ^^
즐거운 시간 감사한데 서재의 달인까지 되어서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이하라 2021-12-16 15: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즐거운 연말 되세요.^^

구단씨 2021-12-17 14: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thkang1001 2021-12-16 15: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2021 서재의 달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1-12-17 14: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일년동안 좋은 책이야기 잘 듣고 있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mini74 2021-12-16 15: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 제목도 내용도 넘 슬퍼서 읽기만 하고 댓글 못 단 글이네요 ㅠㅠ

구단씨 2021-12-17 14:5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책은 유쾌하게 잘 흘러갑니다. 재밌어요. 엄마의 인생이... ^^ 그래도 엄마는 언제나 힘드셨겠지만요.

감사합니다.
미니74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

서니데이 2021-12-16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합니다.
행복한 연말과 좋은 하루 되세요.^^

구단씨 2021-12-17 14:5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1-12-16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의 21년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

구단씨 2021-12-17 14:5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1-12-16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2021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구단씨 2021-12-17 15: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강나루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

러블리땡 2021-12-17 0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21년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 좋은 밤 되세요~

구단씨 2021-12-17 15:0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러블리땡님도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

희선 2021-12-17 01: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아프지 않고 건강하면 좋을 텐데... 구단 님도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걱정이 많겠습니다 덜 아프시기를 바랍니다 구단 님은 어머님 여러 가지를 아시네요 저는 더 몰라요

구단 님 서재 달인 축하합니다 2021년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세요


희선

구단씨 2021-12-17 15:04   좋아요 3 | URL
그래도 잘 모르겠죠. 아마 더 많은 세월을 같이 해도 다 알기는 어려울 듯해요.

감사합니다.
희선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thkang1001 2021-12-17 14: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2021 서재의 달인!‘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2022년도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는 모든 일이 모두 잘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구단씨 2021-12-17 15:0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코로나로 정신없이 지냈던 2년이 이렇게 흘러가네요.
제발 별일 없이, 무사히 한해가 마무리 되기를 바랍니다.

thkang1001 2021-12-17 16: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감사합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많이 힘드실텐데, 오늘 일기예보를 들으니, 내일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0도 가까이까지 떨어질 것 같다고 합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건강 잘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scott 2022-01-07 17: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이달의 당선 추카 !✌관왕 ^^

구단씨 2022-01-11 15:00   좋아요 1 | URL
우앙~ 감사합니다. 놀랐어요. ^^

mini74 2022-01-07 1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지무지 감축드리옵니다 *^^*

구단씨 2022-01-11 15:01   좋아요 1 | URL
좋은 책 읽고 즐거운 소식까지 들으니 더 기뻐요~ ^^

새파랑 2022-01-07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과 당선을 동시에~!! 축하드립니다 ^^

구단씨 2022-01-11 15:01   좋아요 0 | URL
연말연초 좋은 소식에 즐겁네요.

이하라 2022-01-07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새해 기쁜 주말되세요^^

구단씨 2022-01-11 15:02   좋아요 0 | URL
한파가 또 온답니다. 바람이 벌써 차갑네요.
건강 유의하시고 편한 날들 지내세요.

그레이스 2022-01-07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축하드려요~♡

구단씨 2022-01-11 15: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얄라알라 2022-01-07 1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이 아니었다면 놓치고 울고 갈뻔했네요

겨울이라 더욱 그런지, 어머니 아버지 엄마 아빠 어무이 아부지 이야기가 더욱 더 뜨겁게 들립니다.

구단씨님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2-01-11 15:03   좋아요 1 | URL
엄마가 요즘 많이 편찮으셔서 그런지 엄마 이야기가 나오면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것 같아요.
좋은 책 공유하게 되어 기쁩니다.

서니데이 2022-01-07 2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구단씨 2022-01-11 15:03   좋아요 2 | URL
주말 잘 지내셨나요? ^^
밖의 바람이 차가워져서 목도리 감싸고 나왔네요.
감기 조심하세요.

thkang1001 2022-01-07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구단씨 2022-01-11 15:0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평안한 날들 지내세요.

러블리땡 2022-01-08 0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씨님 축하드립니다 ^^ 2관왕 멋져용

구단씨 2022-01-11 15:04   좋아요 2 | URL
기뻐요~! ^^ 책 사고 싶네요.
 


"병이 났다고요? 그럼 빨리 사직서를 제출하세요. 그러면 실업 급여는 받을 수 있도록 권고사직으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사직서를 내지 않으면 무단결근으로 해고하게 되며 이 경우 실업 급여를 못 받게 됩니다."

황대리의 이야기는 간단했지만 명료했다. 경비는 아프지 말든지, 아프면 그만두든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대학병원에 입원한 직원에게 이튿날 전화로 해고 통보라니. 결근 사유가 질병임을 할면서도 무단결근으로 해곤하다는 것은 억지였다. 아파트 경비원을 할 때도 병이 날 경우, 국공립 병원의 진단서를 첨부하면 한 달의 기간에 한해 무급 휴가가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적어도 취업규칙상으로는 그랬다. (임계장이야기 244페이지)


가끔 집으로 가져오는 음식 중 일부를 아파트 경비 초소에 가져다드린 적이 있다. 시골에서 가져온 단감 몇 개, 비타민 음료, 여름에 집으로 들어오다가 사 온 냉커피. 일상에서 소소하게,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마음이려니 싶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니 선뜻 보이게 되는 호의다. 그런데 그렇게 한 번씩 보이는 호의에도 경비 아저씨는 고맙다며 고개 숙여 인사하신다. 나이가 지긋하신, 조금 젊으신 분은 어쩌면 나에게 나이 차 있는 큰 오빠 정도로 보이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인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오히려 인사받는 내가 민망할 때가 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실까 궁금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경비분들의 고충이 이해되기도 한다.


저자는 젊은 날 회사에 소속되어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외국 파견을 나가기도 하면서 한국에서 혼자 가정을 책임지는 아내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사업을 하면서 가진 것 모두를 잃기도 했다. 취업하려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냈지만, 회신을 주는 곳은 없었다. 스스로 눈높이를 좀 낮춰야겠다고 마음먹고 끝까지 매달린 경비 업무 일을 따내게 되었다. 경비 교육을 받기 위한 십만 원 남짓의 돈이 없어서 친구에게 빌렸다. 그렇게 얻은 일터였다. 쉽게 물러날 곳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남들에게 경비 일을 한다고 일부러 말하지는 않지만, 그는 자기 일을 고마워하며 책임을 다한다. 그런 그에게 아파트 경비 일은, 크지 않은 금액이지만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감사한 일이기도 하면서, 스스로 아파트 시설물이라고 주문을 외우며 자존감에 상처받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경험이 낯설지 않은 건, 이미 비일비재하게 접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전 입주민 대표에게 아는 척하지 않았다고 경비를 주시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도대체 전 입주민 대표의 존재는 뭐란 말입니까?!), 쓰레기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은 입주민들 때문에 음식물 쓰레기 날벼락을 맞기도 하는(왜 음식물 쓰레기를 일반 쓰레기 속에 몰래 숨겨 버리시는 건가요?!), 밤에 몰래 쓰레기장에 내다 버린 보라색 여행용 가방의 주인을 찾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고(쓰레기 수거 비용 3천 원 아껴서 부자 되시려고요?!), 입주민 사이의 갈등으로 뿌려진 왕소금을 이물질이라고 부르며 치워달라고 경비를 부르는 일에 허탈해한다.


경비원과 입주민 사이에 분쟁이 생기고 나면 어느 편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입주자의 승리다. 경비원과 트러블이 있다고 입주자가 이사를 나가는 경우는 없다. 나가는 쪽은 언제나 경비원이다. 말이라도 잘못 덧붙였다가는 그 자리에서 계약 만료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계약이 끝나는 1~2개월 후에는 무조건 연장 없이 계약 만료, 즉 해고다. 정규직이 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의 설움이겠다.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64페이지)


굳이 아파트가 아니어도 이런 진상들을 마주하는 일은 흔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한 나라의 대통령도 그러면 안 되는데 입주민이라고 갑질 행태로 사람을 자기 발밑에 두려는 사람,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계급으로 나누어 하찮게 여기는 사람. 나는 가방끈의 길이로 상식을 생각하진 않는다. 이렇게 비매너에 인간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이들이 무식하다고 보인다. 아파트 경비에게 신경 쓰고 대우해주라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이분들이 자기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며 일하는, 하나의 인격체로 살아가는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상기하며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건데, 왜 그걸 자주 잊고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식으로 하찮게 여기느냔 말이다. 혹시 지금 외제차를 타고 비싼 아파트에 산다고 당신이 그 아파트의 경비와 다른 삶으로 인생 마무리할 거로 장담할 수 있을까?


저자가 3년여의 세월을 아파트 경비로 일하면서 틈틈이 적은 메모 같은 글을 책으로 엮어낸 글이다. 그도 인생 살아오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시쳇말로 잘 나가던 때도 있었고 실패도 겪었다. 그런데도 사람을 위아래로 나눠서 보지 않았다. 그의 아파트 경비 경험은 세상을 다시 배우는 시간이었을 것 같다. 그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에 많은 생각에 잠겼으리라. 본인도 아파트에 실거주하면서 입주민과 경비를 동시에 살아가고 있지만, 인간다움을 잊지 않고 살아가려고 애쓰는 모습이 그의 행동 곳곳에서 보인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다. , 세상에는 내가 다 모르는 인간의 모습이 너무 많구나. 사람이 이렇게 잔인하고 마음이 작을 수가 있을까 싶어 안타깝기까지 했다. 경비 초소에서 졸고 있는 그를 지적하며 마치 내가 좋은 사람이니까 이런 것도 말해주는 거야. 다른 사람에게 걸렸으면 너는 끝이야.’라는 뉘앙스로 훈계하는 입주민 때문일까. 그는 스스로 투명인간이라 표현하며, 경비원 복장을 하는 순간 자기 안의 모든 감정을 버린다.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입주민이 부당하게 대우해도 그런 일이 없던 것처럼 뒤돌아서야 하는 자세로 일한다.


도대체 입주민들이 아파트에서 자기 업무를 하는 경비노동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기에 이런 이야기하는 걸까. 스스로 아파트의 움직이는 시설물로 주문을 걸면서 하루를 사는 기분이 어떤 건지, 이 책을 읽고서야 조금 알게 됐다. 작가 장강명이 이 책을 추천하면서 했던 말, 이 글을 읽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30년 넘게 아파트에 살면서도 알지 못했던 경비노동자의 삶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 장강명의 추천사에 공감한다. 혹시라도 내가 하는 한 마디가 그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내가 귀찮아서 제대로 하지 않은 일에 그들의 노동이 증가하게 되는 원리가 적용되는 곳이 아파트였다. 오늘도 분리수거에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다고 투덜대면서 들어왔던 것을 급히 반성한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누군가의 일은 더 늘어나고, 그들의 자존감에 상처가 되는 일을 만든다. 물론 아파트에 사는 사람 모두가 진상 입주민은 아니다. 그 안에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사람, 근무 위치가 변한 것을 알고 안부를 묻는 입주민도 있다. 사람 온기를 넣어주는 이들이 훨씬 많겠지만, 일부 입주민 때문에 받은 상처는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이 건넨 온기를 넘어설 때가 많을 거다.


나락에 떨어져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고 알지 못했던 타인의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특히 그 거울 앞에 선 나의 모습 또한 눈에 들어온다. 몸이 낮아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나의 눈높이가 움직인다. 나의 한심함을 뼈저리게 통감하면서 지금 나의 처지가 나의 선생이 되었음을 느낀다.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 130페이지)


이분들의 이야기가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 건, 아마도 내 주변에 아파트나 건물 경비 일을 하시는 분을 종종 봐서 그럴 거다. 대부분 아파트 경비 일을 하시며, 꼬박 24시간을 근무하고 24시간을 쉰다. 퇴근하고 지친 몸을 뉘면 피곤해도 쉽게 잠이 오지 않고, 혹시라도 개인적인 볼일을 하루가 빠듯하다. 남들은 하루 일하고 하루 쉬니까 좋겠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루를 쉰다고 해서 그 하루가 느긋하게 흐르는 것도 아니다. 가족과 얼굴도 보고 소박한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도 있는 시간. 한 개인의 노동 기록이지만, 누구나 비슷하게 품고 사는 하루의 이야기다. 무엇보다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하루를 들여다보는 일에 누구라도 선뜻 동참해주었으면 싶다. 그 작은 경비 초소에서의 하루가 어떻게 흐르는지, 언젠가의 내가, 내 가족이, 내 지인이 그 자리에서 보낼 하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감해주기를.


현실적인 경비 업무 교과서가 아닐까 싶다. 좀 더 깊고 무겁게 얘기해도 되겠지만, 이 책은 이것으로도 충분했다. 이론에만 머물지 않은, 실전 경험담이 그대로 담겼으니, 어쩌면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말보다 더 적나라하게 다가올 것 같다. 얼마 전에 읽은 임계장 이야기중간착취의 지옥도와 같이 읽어도 좋겠다.










#나는아파트경비원입니다 #최훈 #정미소출판사 #에세이 #임계장이야기 #중간착취의지옥도

#경비원 #경비노동자 #계약직 #갑과을 #경비업무 ##책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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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1-11-22 2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ㅠ 임계장이야기 펑펑 울면서 읽었네요. 이번 책도 임계장이야기에서 들었던 입주민 진상 부리는 문제는 여전하네요.ㅠ경비노동자들이 일보다는 사람들한테 더 치이는 것 같아요.맘 아파요.

구단씨 2021-11-22 22:01   좋아요 4 | URL

제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이런 주제의 책 많을 것 같아요.
최근에 이 주제의 책을 몇권 읽었는데, 진짜 힘들었어요. 인간이 왜 그럴까 싶었네요.
좀 더 무거운 내용도 있긴 한데, 그보다는 이 내용 자체가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scott 2021-12-09 16: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이달의 당선 추카 합니다
코로나 무섭게 확진자 급증 중 ㅠ.ㅠ
건강 잘 챙기세요

구단씨 2021-12-09 22:33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여기도 확진자 급증입니다. 언제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mini74 2021-12-09 16: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축하드립니다 *^^*

구단씨 2021-12-09 22:3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주말 지나면 추워진다네요!! 건강 챙기셔요.

그레이스 2021-12-09 16: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당선 축하드립니다.~~

구단씨 2021-12-09 22:3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좋은 책 많은데 다 읽을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

독서괭 2021-12-09 16: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임계장 이야기는 읽었는데, <나는 아파트 경비원입니다>라는 책도 있군요. 문득 오늘 경비원분들께 귤이라도 좀 갖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구단씨 2021-12-09 22:35   좋아요 3 | URL
좋은 생각이십니다. ^^
각자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그 일에 서로의 관심이 필요한 것 같아요.

새파랑 2021-12-09 17: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단님 당선 축하드려요^^

구단씨 2021-12-09 22:3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독서 목록에 항상 부러움이... ^^
차곡차곡 보관함에 넣고 있어요.

이하라 2021-12-09 18: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구단씨 2021-12-09 22:3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추워져서 자꾸 방안에 있게 되네요. 책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

서니데이 2021-12-09 2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구단씨 2021-12-09 22:36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 페이퍼 속에 항상 책 한권씩 있어서 책 소개 받는 기분이 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