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고, 국적이나 피부색이 달라도 감염병이 휘두르는 힘에 반응하는 건 똑같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이탈리아 소설가인데, 그가 적어간 코로나 진행 중의 일상이 우리가 겪는 오늘과 다르지 않아서 놀랐다. 아니, 이건 놀랄 일이 아니라 그냥 당연했던 건데 나는 무슨 근거로 다를 거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 누구도 고립되기를 원치 않는다. 세상과의 단절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그저 참아내기에는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다. 우리는 절실하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사이에 있고 싶다. 소중한 사람들과 2미터 이상의 사회적 거리를 두고 싶지 않다. 그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욕구이다.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33페이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놀랄 시간도 없었다. 코로나 19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일상에 침투했고,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그 감염병에 노출되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게 어떤 병인지도 자세히 알지 못한 채로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다가 하나씩 코로나 19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시작된 병인지 알아내려고 했고, 어떤 방어로 우리가 이 위험에 대응할 수 있는지 찾아내고 배워나갔다. 개인위생의 철저함을 강조했고, 서로 거리 두기를 일상화했다. 마주 보며 밥을 먹던 일상은 이제 잊어야 한다. 같이 모여 찬송가를 부르는 일도 삼가야 했다. 안부를 물으며 화기애애하게 술 한 잔 나누는 일도 어려워졌다. 아이들은 학교에 갈 때도 마스크로 무장을 한다. 초등학교 조카아이는 일주일에 한 번 학교를 가는데, 그마저도 힘들다고 가정학습으로 대체하곤 한다. 어차피 녹화된 동영상 수업이라 크게 다를 바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 반년 가까이 가정 학습을 하는 초등학교 수업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어느 방향에서 어떤 분야를 봐도, 코로나 19가 우리 생활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건 사실이다.


비단 우리만 겪는 일이 아니며,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음을 그대로 들려주는 저자의 음성이었다. 저자가 하나씩 적어낸 어느 날의 일상과 생각들이 우리의 오늘과 똑같다. 삶을 멈출 수는 없으므로 계속되는 일상의 모습이 변했다. 출근하지 않은 재택근무가 되었다. 특히 코로나 19 확진자가 갑자기 늘고 사망자 역시 예상할 수 없는 수치로 늘어난 이탈리아는 외출 제한을 철저하게 했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것도 각 가정에서 허락된 사람만이 가능했다고 한다. 무엇이든 국가의 통제에 따라야 하는 상황이 된 거다. 그게 꼭 답답하기만 한 건 아닐 테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감염의 상황을 방지하자는 게 이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 모두의 의무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하나둘 통제가 늘어나고 계속 이어질 때, 공동체를 따라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 마음은 불편해진다. 갇힌 일상에 화가 나고, 개인의 자유를 외치고 싶어진다. 그래도 우리는 지켜야만 했다. 이 위기를 같이 통과해야만 했다. 전염의 시대에 우리 인간은 절대 혼자인 섬이 될 수 없으며, 개개인이 방역선을 지키는 게 전염의 상황을 종결시키는 유일한 대응책이라는 거다. 근데, 정말 코로나19가 끝나기는 할까? 이런 걱정을 하는 게 나만은 아니겠지?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뚜렷한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은 코로나 19가 시작된 지 거의 반년이 지난 지금 확실히 알게 됐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했을 때, 마스크 착용으로 감염 위험을 방어했을 때, 일상의 많은 부분을 비대면으로 소화했을 때 감염자는 줄어들었다. 그런데도 이 상황이 끝난 건 아니다. 끝날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어서 더 무섭다. 지금까지 코로나 19가 보여준 것은 우리가 어디에 있어도 다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거다. 저자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모든 관계가 연결되어 있고, 그렇게 세상은 하나의 큰 고리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건 곧 전염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비행기나 버스, 기차 같이 여러 명이 이용할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은 빠르고 효율적으로 운행되지만, 지금은 이런 수단이 바이러스의 수송망이 되었고, 현대 사회가 이룬 압도적 성취는 도리어 형벌이 되었다고. 그 형벌로 우리는 보편의 고독을 불러오는 전염의 시대를 살아간다. 방호복 안의 의료진, 집중치료실의 환자,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 공포를 부르는 거짓 뉴스들, 사람들이 사라진 거리의 문 닫은 상점들, 누구나 감염을 퍼트릴 수 있다는 의심의 눈빛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는 상황까지. 자유와 고립을 동시에 경험하는 순간이다.


이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저자는 이 답을 R0(기초감염재생산수) 값에서 찾는다. R0는 한 명의 감염자가 몇 사람을 전염시킬 수 있는지를 수치화한 것이다. R0 값이 1을 넘어간다는 건 감염자 수가 증가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이 값을 1 미만으로 내려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공동 운명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연대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배려하면서 살아가야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조심하고 방어하는 일이 먼저라는 거다. 저자는 이 고통의 시간에서 의미를 재발견하고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겪게 된 고립의 시간에 우리는 생각할 기회를 얻었으며, 가려져 있던 진실과 인생의 우선순위를 돌아보게 한다. 현재 우리 삶의 다른 모습을 찾게 한다. 그러면서도 이 역시 금방 잊게 될지도 모를 현실을 경고한다. 이 위기가 수그러들고 모든 일이 수습되면, 이렇게 깨달은 여러 가지 역시 증발해버리고 말 테니까.


감염 가능자에게 정보가 전달되면(수치, 장소, 입원 상황 등), 상황에 맞게 더 잘 행동할 것이다. 물론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예상외의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합리적 추론을 할 수 있는 이성을 갖추고 있다. 지금 진행 중인 시뮬레이션들은 모두 전염병 확산을 저지하는 요소로서 우리의 의식을 고려하고 있다.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 70페이지)


코로나 19를 응시하는 저자의 말 중에 우리나라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전염의 시대에 투명한 정보는 절차나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적인 예방 의학이라는 거다. 사람들의 공포는 숫자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불신의 고리에서 나온다고. 몇 명의 확진자가 더 생겼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몇 명이 더 확진되었는지 그 사실 자체를 숨기는 거에 공포가 생긴다. 무엇을 더 감추고 있는지 몰라서, 아는 게 없으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이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좌절과 고통은 커진다. 매일 같은 시간에 브리핑하면서 전날 감염된 사람의 수를 말하고, 지금 어떻게 대처하고 있으며, 우리 개개인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뉴스를 떠올려봤다. 이런 투명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우리는 더 조심하고 개인이 취해야 할 방어를 고수한다. 이렇게 코로나 19를 함께 겪어가고 있는 국민이나 정부의 연대 의식이 확인된다.


지금 누구나 바란다.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코로나 19 이전의 일상으로 완전하게 돌아갈 수는 없을 듯하다. 미세먼지가 많다고 해도 잘 쓰지 않던 마스크를 이제는 필수품으로 착용하고 다닌다. 휴대용 손 소독제를 가방에 넣어서 다니고, 어디를 가더라도 입장할 때 신분을 밝히고 기록한다. 당연하게 즐기던 문화생활은 내 맘대로 다닐 수 없게 됐다. 도서관은 이제 겨우 문을 열었고 착석하지 않은 채로 도서 대출만 가능해졌다. 평범하다고 부르던 일상이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저자는 이런 전염의 시대에 우리가 다시 전염에 묶이지 않고(혹은 묶이더라도 반복하지 않으려면) 살아가려면 우리 각자가,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생각하는 용기를 갖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고, 지금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고 경고한다. 비단 저자의 경고 때문이 아니더라도, 거의 반년동안 바뀐 우리 일상을 떠올려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인류에게 침투한 이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우리 삶을 어떻게 얼마나 바꾸어놓았는지를. 그래서 쉽게 잊히면 안 되는 기억이고 시간이다. 나도 모르게 오늘을 잊고 방심한 채로 살아가다가도 문득 한 번씩 2020년의 봄과 여름을 어떻게 고통스럽고 힘들게 보냈는지 떠올려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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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문장 쓰는 법 - 못 쓰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땅콩문고
김정선 지음 / 유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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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쓰기 시작했다는 건 아마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거 아닐까? 듣는 사람이 있든 없든, 누구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표현 중의 하나가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그럼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몇 문장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전달하고 있는지 또 궁금해진다. 그 궁금증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다. 일단은 써야 하고, 그렇게 쓴 글을 자꾸만 들여다보고 고치고 또 고치면서 계속 확인해야 한다. 저자는 이 책 『열 문장 쓰는 법』으로 반전을 일으키면서 글쓰기의 노하우를 속성으로 전수한다.

 

누구든 훈련만 거친다면 제아무리 길고 복잡한 문장이라 해도 주어와 술어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데 능숙해질 수 있다. (29페이지)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습관화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40페이지)

 

이 책의 구성이 좀 특이하다. 처음에는 저자의 전작처럼 그냥 잘 읽히는 글쓰기 산문처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챕터는 나누고, 그 챕터마다 글쓰기의 다양한 방법과 시도를 언급한다. 온라인 강의를 듣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총 24개의 챕터로 나누어 설명하는 글쓰기 연습 중에 기억에 남는 몇 가지만 소개해본다.

 

먼저 하나의 글을 자유롭게 쓰게 한다. (저자는 자기가 직접 쓴 글로 예시를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씩 제안한다. 입장을 바꿔서 써보기('나만의 것'이 아닌 '너만의 것'에 대해 쓰기)로 내가 보는 방향에서 생각하고 쓰던 것을 반대의 입장에서 같은 상황을 보고 생각하게 한다. 이 부분은 '나만의 것'에서 '모두의 것'으로 쓰라는 다섯 번째 챕터와 연결되는데, 우리가 어떤 말을 들을 때 귀에 잘 들리고 안 들리고 하는 것 중의 하나는 나만의 것을 모두의 것으로 풀어내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내가 아는 것을 모두가 알게 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처럼 들려서 웃음도 났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해보면, 이는 또 소통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하는 말이 모두가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면, 저자의 말처럼 나와 모두의 거리를 좁히는 게 힘들 수도 있다는 의미일 테니 말이다.

 

말과 글의 차이도 경험하게 하는데, 이것은 내가 하는 말을 녹음해서 듣게 하는데, 진짜 피부로 확 와 닿는 가르침이었다.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데, 목소리로 하는 말과 글로 표현하는 말이 너무 달랐다. 입을 통한 말은 너무 길고 장황해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단점을 보완하면서 차분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게 글이었다. 이 경우는 나도 선호한다. 나는 그다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잘 전달되고 있는지 항상 걱정하고 의심하면서 상대방과 이야기한다.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데 말하는 방식과 선택하는 단어에 따라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 여유가 있다면, 문자나 급한 전화 한 통 보다는 이메일이나 조금 천천히 말하는 방식이 좋다. 글쓰기는 나처럼 노파심에 무슨 말을 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최적의 대화법이다.

 

같은 글을 짧게 쓰고 길게 쓰는 연습을 함으로써 차이를 눈으로 확인하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 같다. 짧게 쓰는 문장이 읽는 이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길게 쓰면서 느껴지는 이야기의 늘어짐은 또 어떻게 보완하면 되는지 동시에 알려주는 셈이다. 같은 재료를 놓고 활용하는 여러 레시피를 펼쳐놓은 것처럼, 어떻게 시도하면 같은 문장이 이렇게 다양한 결과물을 내놓는지 눈앞에서 확인시켜주는 게 놀라울 뿐이다. 의미 있게 들려왔던 부분은 '글쓰기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채우는 작업'(챕터 12)이라는 거였다. 예를 들면, 우리는 어떤 경험이나 상황을 전달하고 싶을 때 시간 순서로 나열한다. 언제 일어났고 무엇을 먹었고 얼마나 일을 했으며 어떤 마무리를 했는지 적었다고 한다면, 그건 시간을 적은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건 단순하게 시간의 흐름을 적은 게 아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적느냐에 따라 감정이 다르다는 것. 느리거나 빠르게 흐르는 상황의 시간이 글을 흐르게 한다. 자연스러운 흐름이 저절로 느껴진다면, 그건 시간을 채우는 문장 때문일지도 모른다.

 

24개의 챕터를 통과하려면 저자가 내준 숙제를 해야 한다. 저자가 먼저 자신의 글로 숙제를 하는 과정과 결과를 보여준다. 바로 앞에서 오답 노트를 보여주는 것처럼, 글의 다양한 변화를 체험할 수 있다. 그러다가 깜빡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 알려준, 길게 한 문장 쓰기로 문을 열었던 첫 페이지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무슨 추리소설의 반전을 확인하는 순간 같다. 처음에 저자는 길게 이어지는 한 문장 쓰기로, 한 문장도 못 쓰는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 자, 써보자. 그렇게 길게 쓴 한 문장을 다시 끊어서 여러 문장을 만든다. 이는 길게 쓴 문장을 계속 살펴보면서 어떤 부분이 어색하고 이상하지 찾을 기회였다. 계속 쓰면서 읽고 또 보고 있자면, 연결된 한 문장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없는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표현되고 있는지 집중할 수 있다. 정작 가장 중요하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써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거였다. 그 확인의 절차가 글쓰기 연습이다.

 

나누어 쓸 때 유의해야 할 점은 '그리고, 그래서, 그런데, 그러나(하지만)' 같은 접속부사와 '이, 그, 저' 같은 지시대명사를 되도록 쓰지 않고 문장을 이어 가는 겁니다. (61페이지)

 

꼭 글쓰기로 밥 벌어먹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요즘에는 글쓰기가 습관처럼 되어 간다. 간단하게는 SNS부터, 가까이에는 휴대폰의 문자에서도 글쓰기는 우리의 일상에 가깝다. 알게 모르게 모든 순간에 타인과 글로 소통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직장에서는 보고서를, 개인적으로는 일기나 메모를 쓰기도 한다. 어쩌면 누구나 글을 써야 하는 시대로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에게 글쓰기는 피하고 싶은 숙제처럼 막막하고, 멀미가 날 정도로 괴로운 일이다. 저자는 이렇게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가 '나만의 것'과 '모두의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좁힐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그 거리를 좁힐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노력이 바로, '나만의 것'이 '모두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차근차근 그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쓴 문장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지켜보는 흥미로움을 선사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가 일으킨 반전이 길게 쓰기에서 짧게 쓰기로 변신하는 거였다. 앞서 반전이라는 표현으로 이 책을 말했다. 저자는 요즘 강조되는 짧게 쓰기의 압박에서 벗어나라고 하면서 일단 한번 써보기만 하라는 듯이 길게 쓴 한 문장으로 시작했다. 같은 내용이면서 다른 문장으로 적으면서, 때로는 줄여 쓰고 늘여 쓰면서 분량으로 체험하는 시간을 말한다.

 

어떤 성격의 글을 어떤 방식으로 쓰든, 글을 쓰는 순간 우리는 이미 소통을 시작하는 셈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19페이지)

 

결국, 처음 길게 쓴 한 문장으로 시작한 설명은 열 문장으로 바꾸어 쓰는 훈련이었다. 짧게 써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일단 쓰게 한 다음, 짧게 쓰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한다. 누구나 말하는 짧게 쓰는 일을 재밌게 설명한다. 제각각 이유는 달라도 우리는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고, 또 글쓰기가 부담되는 건 사실이기에 저자의 이런 가르침이 귀하게 들려온다. 뭔가를 쓰면서 지금의 나와 조금은 다른 나를 발견하고 가꾸어 나가는 게 글쓰기라고 의미를 알려준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소통은 물론이고, 더 넓게 많은 것을 보는 시야를 만들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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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ianjeon 2020-08-14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결하면서도 책의 핵심내용을 잘 전달해주는 서평이네요, 서평 잘 보았습니다!!
 
셰어하우스 플라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0
혼다 데쓰야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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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보면 뜨끔해지는 소설이 있다. 스멀스멀 머릿속을 파고들면서 괜히 고개 숙이게 하는 이야기 말이다. 혼다 데쓰야의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전과자에게 방을 임대한다는 특이한 소재로 읽기도 전에 독자의 궁금증을 만든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세상의 시선을 한번쯤 받은 이들에게 방을 내어준다는 말인가. 입주자 중의 일부가 그런 조건이라는 게 아니다. 입주자 모두가 전과가 있고, 세상으로 스며들지 못해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찾아든 곳이다. 그곳에 모인 이들이 어떻게 같이 살아가고 있을까, 혹시 서로의 과거를 모두 드러내는 것도 가능할까 궁금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입견 있는 시선을 버릴 수 없는 조건을 가진 이들이 살아가는 마음이 궁금했다.

 

다카오는 각성제 사용으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약물을 즐기려다가 그런 건 아니다. 친구들과 함께했던 술자리에서 자기도 모르게 약물 복용을 하게 된 거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살던 곳은 갑자기 화재가 나서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 그런 그에게 보호사는 셰어하우스 플라주를 소개해주었고, 큰 무리 없이 입주하게 됐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그의 전과 이력을 알고도 선뜻 방을 내주었는지 모르겠다. 일단 거처가 마련되어 있으니 안심이지만, 일정한 거처가 있다고 해서 쉽게 일자리가 구해지지는 않았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알고 보니 그가 잘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전직과 같은 업종으로 계속 일을 찾았는데, 이미 그의 소문은 업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던 것.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당분간은 셰어하우스 주인 준코가 운영하는 플라주에서 일을 돕기로 한다.

 

일단 임대 조건은 나쁘지 않다. 월세가 5만 엔. 하루 세 끼 식사가 제공된다. 청소는 교대로 하면 된다. 방문이 없어서 사생활 보호가 안 될 것 같은 불길함은 있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는 스타일이라 그것도 괜찮다. 입주 조건이 전과자인 것만 빼고는. 준코가 왜 이런 조건으로 세입자를 구하는지는 모른다. 언제까지 이런 조건으로 임대할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 셰어하우스에 모인 이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이들의 내일은 어떻게 될지 궁금할 뿐이다. 특이한 점은 서로의 과거나 오늘에 대해 굳이 간섭하거나 캐묻지 않으면서 사생활을 지켜주는데, 또 어느 순간에는 플라주에 모여 같이 식사를 하고 술도 마시면서 노래를 부른다. 마치 이 모임이 오래전부터 지속하여 온 것처럼, 서로가 허물없이 지내면서 가족처럼 여기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누구나 처음 들어왔을 때는 낯설고 어색해하던 게, 어느새 서로의 간격을 좁혀가는 게 눈에 보인다.

 

어디까지 가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태풍이 언제 멈출지도 알 수 없었다. (135페이지)

 

시오리는 말했다.

"인생이 그렇게 간단히 리셋되지 않아. 과거는 언제까지고 따라다녀. 속죄는 할 수 있어도 실수를 저지른 과거를 지울 수는 없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262페이지)

 

당신이라면 어떤 마음일까?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렇게 묻는 나부터도 전과자라는 이력에 두려움을 가질 것 같다. 흔히 '빨간줄'이라고 말하는 인생의 오점은 그 자체보다는 오점의 내용이나 이유가 더 중요할 것 같지만, 그런 사연을 들을 기회는 많지 않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던 어떤 사실 하나만을 생각하고 판단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저지른 죄로 벌을 받았다는 사실이 있다. 시간이라는 귀한 것을 잡히고 죄의 대가를 치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저지른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한번 저지른 일로 평생을 마음 다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일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은 계속 생각해야 할 문제다.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로 각인해야 하는지, 과거는 과거이므로 지금의 모습만 판단해야 하는지. 이런 마음은 셰어하우스 플라주와 의미가 통하기도 한다. '플라주'는 프랑스어 '해변',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 모호하게 계속 흔들리는 사람과 사람의 접점, 남과 여,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사랑과 미움, 죄와 용서(278페이지)라고 해석한다. 해변이 정확한 선으로 그어서 표시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선이라고 여겼던 일은 때로 악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진실은 거짓과 정반대의 자리에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죄와 용서가 서로 마주 보고 있기만 하지는 않는다는 것 역시 삶의 경험으로 아는 일이다.

 

다카오를 포함한 셰어하우스 입주자 여섯 명과 집주인 준코. 플라주에 드나드는 손님들과 보호사로 존재하는 몇몇 어른들까지. 이들의 어두운 과거를 아는 데도 나쁜 시선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한 사람으로 인정해주었으며, 하나의 존재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읽다 보면 그들의 어두운 과거가 하나씩 들려올 때마다 그들을 겁내거나 욕해주고 싶은 게 아니라, 그들의 사연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어쩌다 그런 상황에 빠졌던 걸까, 이제 이들이 살아갈 세상의 시선은 또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까 하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바빠진다. 거기에 어떤 살인자의 행방을 추적하는 프리랜서 기자가 셰어하우스에 잠입하면서 이야기는 현실적인 고민에 더해 흥미진진해진다.

 

프리랜서 기자가 한 살인자를 쫓고 있었다. 친구를 죽였다는 이유로 살인죄로 복역하다가 2심에서 무죄 판정을 받고 나온 한 사람이 있다. 기자는 그의 소식을 찾아다녔고, 그가 플라주에 세입자로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위장하여 그곳에 세입자로 들어간다. 살인자의 모든 것을 밝혀내어 그가 무죄가 아님을 입증하고, 그 사건에 대해 다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도록 그럴싸한 기사를 작성하리라 다짐한다. 그 부분이 조금 아리송했는데, 기자의 시선에서 펼쳐지는 셰어하우스의 모습을 봐도 처음부터 그 살인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는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점점 살인자의 존재를 확인해갈 수 있지만, 선뜻 그가 정말 살인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범죄라는 게 얼굴에 써놓고 다니는 건 아니기에, 그가 얼마나 잔인한 짓을 저질렀는지 들려올 순간을 기대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분명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 나라는 법치국가다. 설령 죄를 저질렀어도 제대로 벌을 받으면 용서해주어도 좋지 않은가. 그 사람이 제대로 생생했는지 어떤지, 재범 가능성이 높은지 낮은지 그건 또 다른 문제일 터다. 일단 벌을 받은 사람에게는 재출발할 기회를 준다. 그 정도는 사회가 보장해주어도 좋지 않은가. (346~347페이지)

 

소설은 마지막에 다다르면서 준코가 왜 전과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셰어하우스를 열었는지, 프리랜서 기자가 왜 무죄 판정을 받은 살인자를 그토록 찾아 헤매면서 셰어하우스까지 들어오게 되었는지 드러난다. 오, 이런. 준코의 사연이야 혹시나 하면서 상상했던 일이기도 하지만, 기자의 잠입 이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반전을 일으킨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향해가는 소설의 결말이 뭉클하다.

 

날마다 똑같아 보이는,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도 어느 하나 같은 파도가 아니다.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 달라진 것을 슬퍼해서도 안 된다. (396페이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다. 그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느냐 아니냐 하는 태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로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그 잘못의 다음이 어느 방향으로 갈 수 있는지 긍정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범죄자라는 과거가 주홍글씨가 되지 않도록, 다시 사회에서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그렇게 각자의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누구에게나, 누구라도 생각해볼 문제에 작가는 추리소설로 흥미를 더해가면서 우리가 직접 부딪혀야 할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의 중심에 끌어다 놓았다. 죄를 저지른 이들을 갱생한다고 만들어놓은 곳이 교도소나 법의 규율 안에 있는 곳이지만,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그 갱생의 성공을 감동적으로 이루어낸 곳이다. 현실에서 마주 하고 싶은 의미 있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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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가 말하는 아빠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는 아빠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40여 년을 아빠의 딸로 동거인으로 살아왔는데, 돌아가신 지 3년이 넘어가는데, 아빠에 대해 기억나는 건 한 가지다. 살아계시는 동안 가족들을 참 힘들게 했지. 아빠는 나에게 애틋한 기억보다 안 좋은 기억이 많은 존재로 남았다. 함께 외식을 한 적도, 서로 대화를 한 적도 거의 없다. 다른 친구들 아빠들을 보면 딸과 참 돈독하게 잘도 지내던데, 나에게 그런 행운은 주어지지 않았던가 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마스다 미리 역시 아버지와 친근하게 지내지는 않은 듯하지만, 우리가 보통(?)이라고 생각하며 보이는 부녀지간의 모습을 보인다. 읽는 동안, 서먹하고 다 이해하지 못한 존재로 여기면서도 결코 놓을 수 없는 가족의 한 자리에 있던 아빠를 기억하는 그녀가 너무 부러웠다.

 

아빠는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가까운 사람일 텐데 몹시 먼 사람 같기도 하다. 딸을 편하게 대하지 못할 때면 좀 안됐다는 생각도 든다. 관심과 애정을 자꾸 원하는데 자꾸 헛짚는달까, 애정 표현이 때때로 이상해서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아빠는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그래서 성가실 때도 있다. (아빠라는 남자, 4페이지)

 

저자가 들려주는 아빠의 에피소드 중 한 부분인데, 아빠는 딸의 운동회나 학예회, 졸업식 같은 행사에 참여하는 걸 거북스러워했다. 그런 아버지인데도 딸이 다닌 고등학교와 단기대학, 취직한 회사 주변은 훤히 알았다고 한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반드시 견학하러 갔단다. 내 딸이 다닐 학교와 일하는 곳의 환경이나 지리를 미리 파악하고 다니셨던 거다. 세상 어느 아빠가 이 정도의 애정을 뽐낼까 싶다. 딸의 공식적인 행사에 참석하는 건 어색해서 피하면서도, 내 딸의 안위를 위해서는 몸소 움직여 안전을 살피는 아빠라니. 어떤 때 보면 굉장히 고집스럽고 독단적이면서도 내가 지켜야 할 가족이라고,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그 고집스러운 면이 빛을 발하는 듯하다. 굳이 나서서 내 딸이 다닐 그 길을 살펴보는 아빠를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비록 아빠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고 모든 상황에서 100% 소통할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던 거다. 무뚝뚝하고 투박하지만, 그 마음이 그대로 보이는 걸 보면 이런 사랑이 또 있을까 싶다. 아빠의 그런 사랑은 소소한 기억에서 더 애틋해진다.

 

한없이 품이 넓은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도 천 엔짜리 라면에 흥분하는 아빠를 기억하는 모습은 불편하기도 하다. 값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공통으로 생각하는 건, 다음에 가족이 같이 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저자의 아빠 역시 그랬겠지. 하지만 그녀는 아빠와 외출하는 건 반기는 일이 아니었단다. 편하지 않았고, 아빠를 접대하는 시간으로 기억했다. 아빠의 기분을 맞춰주고 아빠가 화를 낼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였다고. 그러니 아빠가 기분 좋게 찾아낸 맛집을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선뜻 반길 수는 없었던 거지. 마음 편한 외출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결국 따라나선 시간은 어색하기만 하다. 아빠와 둘이서 라면을 먹는 상황이 겸연쩍어졌다고. ㅎㅎ 맛있다는 감탄사만 거듭하면서 그 불편한 시간을 견뎠나 보다. 문득 궁금해졌다. 딸보다 더 오랜 시간 아빠의 모습을 보며 살아왔을 엄마의 마음을 어땠을까 하고.

 

'엄마.'

혼자, 가만히 입 밖에 내어보면 어린 시절이 되살아난다.

'엄마.'

이것은 마법 같은 단어다. 푸근하고 아늑해지는……. (엄마라는 여자, 4~5페이지)

 

둥지에서 떨어진 쇠약한 새끼 제비를 엄마가 주워 온 적이 있었다. 수건으로 따듯하게 감싸고 모이를 먹였지만 끝내 살리지 못했다. 새끼 제비 한 마리 때문에 우는 엄마를 보면서,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묵직한 일인지 나는 천천히 배웠던 게 아닐까. (147페이지)

 

엄마의 인생 역시 다른 엄마들과 다르지 않았다. 소소한 기쁨을 맛보며 살아왔던 엄마의 시간이었고, 모든 아끼며 검소하게 가정을 꾸려왔다. 저자가 들려주는 엄마의 여러 가지 모습 중에서 전단을 이면지로 사용하는 것도 친근했고, 백화점 행사 매장에서 쇼핑하는 것도 익숙했다. 가정주부로 살면서 어떤 시간을 건너왔을지 상상이 된다. 소박한 수다에 사람의 정을 나누고, 별거 아닌 일에 까르르 웃으면서 일상을 견디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모든 순간이 '견디는' 세월은 아니었을 것이다. 남편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온 시간은 적응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고, 딸들을 키우면서 함께한 시간은 많은 것을 보고 생각하게 했지 않았을까. 어쩌면 엄마 자신이 성장하는 시간을 떠올렸을 수도 있고, 엄마가 아니라 친구처럼 딸과 지내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가족이기에 같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성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해야 했을 거다. 저자가 고향에 갈 때마다 엄마의 살림에 못마땅한 것을 지적할 수 없는 것은, 자기만의 방식의 삶이 인정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엄마와 딸 사이라고 해도 말이다.

 

여행하는 엄마와 딸 이야기는 가장 뭉클하면서도 내가 가장 바라는 시간이었다. 뭐 이런 걸 다 챙기고 왔느냐는 핀잔에도 순박하게 웃으면서 그 필요성을 어필하는 엄마의 표정을 상상하며 읽었다. 아마 어디를 갔어도, 어떤 피곤함이 있어도 좋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오랜만의 외출에 들떠서 여행지의 택시 기사와 수다를 떨고, 눈에 보이는 곳곳에 감탄한다. 때로는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날리는 엄마이기도 하고, 마치 사랑하는 자식을 바라보듯 작은 동물들을 감싸고 돌보는 엄마를 보기도 한다. 엄마에게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며 놀라기도 하지만, 원래 엄마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미안해지기도 한다. 도대체 우리는 엄마에 관해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살아왔기에 엄마의 별것 아닌 모습에 낯섦을 발견하는 것일까. 그래도 딸이라고, 아들보다는 엄마를 더 잘 이해하고 안다고 자부했는데, 작은 에피소드 하나에서 끄덕일 때마다 내가 엄마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구나 싶었다.

 

우리는 엄마와 아빠를 부모라고 부르며, 그들과 모든 생애를 같이 한다. 아빠를 이상형으로 꼽으면서 우상으로 여기며 자라기도 하고, 같은 여자로 엄마의 인생을 이해하기도 하면서 가족 그 이상의 감정을 나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아빠와 엄마의 모습이 제각각의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걸 보면, 혹시 엄마 아빠의 고정적인 성향이라도 있는 것일까 싶지만, 아직 부모가 되어보지 못한 내가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조금은 아는 그 감정을 흠뻑 느끼며 읽게 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였다. 아끼고 절약하는 게 습관이 되고, 마당 한쪽에 작은 꽃을 심어놓고 흐뭇하게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엄마의 표정을 떠올렸다. 엄마의 많은 부분을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엄마가 해주시는 반찬 중에 하나도 못하는 나를 보면 '엄마'의 모든 것은 당연한 게 하나도 없었다. 일상의 소소함에서 느끼는 행복이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그대로 보여주는 게 엄마였는데, 그걸 저자가 들려주는 엄마 이야기에서 또 확인하고 있다.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어서 유감이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아빠에 관해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만큼 다 알지 못한다. 어떤 특별한 감정이 떠오르지 않는 존재, 살아계시는 동안에도 서로 얼굴 마주하며 애틋했던 적이 없던 아빠를 떠올리는 게 익숙하다. 저자가 아빠에게 느꼈던 불편함과는 조금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마음 자체가 달라서 저자나 다른 사람이 아빠에게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저자가 말하는 아빠를 다 모르지 않기에, 다 드러내고 살아갈 수 없는 성격을 좀 알기에 이해해보고 싶다.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적어도 내 기억 속 아빠라는 존재가 미움으로만 가득하지 않기를 바란다. 두 권 모두, 많이 안다고 착각(?)하는 내 부모의 모습을 다시 보게 하는 이야기다. 자기 부모에 대해 솔직하게 쏟아내는 저자의 입담에 꽉 조인 뭔가를 풀어내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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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라는 말에 깜빡 속을 뻔했다. 깨어있다면 감성을 누리기에 충분한 시간 아니던가.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는 밤, 아니 아침으로 향해가는 새벽 시간에 뭔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즐길 수 있는 시간. 책을 읽어도 좋고, 누군가 깨어있는 사람 또 없을까 싶은 마음으로 라디오를 켜놓고 있어도 좋다. 미뤄두었던 정리하지 못한 책을 꺼내놓고 이삿짐 싸듯 정리해도 괜찮겠지. 뭐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만으로 기꺼이 깨어 있어도 좋은 시간이다. 그 시간에 깨어있는 게 내 의지라면 말이다. 이 책에서 마주하는 ‘새벽 세 시’는 내가 생각했던 감성과는 거리가 먼, 책임과 부담이 먼저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여러 이유로 겪게 되는 우리 몸의 변화가 가장 날카롭게 지각되는 시간이라고 했다. ‘통증의 들쑤심에 속절없이 지새우는 밤의 새벽 세 시를, 쏟아지는 잠을 떨치며 지친 몸으로 아픈 이의 머리맡을 지키는 새벽 세 시를, 나이 들어가며 ’전 같지 않은‘ 몸을 마주하게 되는 새벽 세 시’(12페이지)를 떠올려 보라고 말한다. 듣고 보니 몸에 찰싹 달라붙어 떼어지지 않는 삶의 무게를 보는 듯하지 않은가?

 

이 책은 우리가 아프고 나이 들며 살아가고 죽어가는 몸으로 사는 일에 관해 말한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그 과정이 적나라하게 들려온다. 그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문제와 감당해야 할 일을 한 개인으로 몫으로, 가족의 일로 남겨둘 수 없다는 게 대다수의 생각이었다. 우리 모두 병명은 다를지라도 아픈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언젠가, 현재에, 앞으로의 어느 날에 그렇게 된다. 그래서 관심 두어야 할 문제들이다. 우리가 애써 무시하고 싶었던 고통과 질병을 마주하고, 그 정면에서 부딪히는 장면에 질문한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아야 할 상황을 마주한다면, 당신이 그 돌봄을 수행해야 할 자리에 있게 된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우리 사회가 같이 안아야 할 본질적인 문제를 꺼낸다.

 

보호자는 불현듯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히지만, 동시에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차마 도망치지 못한다. 이 ‘차마’에 담긴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많이 아픈 사람들 곁에서 돌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금의 사회가 ‘보호자’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마음은 어째서 수시로 진창이 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머물 수 있게 하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지, 우리는 간병하는 이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리고 ‘같이’ 배우지 않는다면 아무도 배우지 못한다.(131페이지)

 

돌봄의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지 궁금했다. 가족의 일이니까 마음을 다해 보살피면 된다고 여기던 일에 위기는 찾아온다.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고 그 돌봄의 책임이 당연한 건 아니다. 우리나라의 특성 때문인지 왜인지, 우리는 종종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가족같이’라는 말을 꺼낼 때가 많다. 서로 애틋하고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뜻일까? 이 말에 의미를 둔 적은 없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니 가족 같다는 말이 언제나 정이 넘치는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돌봄의 위기가 그 ‘가족’에서 시작되고, ‘독박’에서 찾아온다는 말이 너무 와닿았다. 나도 한마디 거들면서 경험해본 사람만이 아는 그 양가감정을 슬쩍 꺼내놓아 본다. 상황이 그러하니까, 가족이니까,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이런 이유로 누군가 독박 돌봄을 해야 한다면, 돌봄의 온전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들어지는 한 사람은 온전한 마음으로 환자를, 가족을 돌볼 수 없다. 그러다가 환자를 방치, 학대하는 일도 생긴다. 어느 순간 간병인에서 가해자가 된 이들의 마음을 누가 제대로 읽어줄 수 있을까.

 

성장하고 독립하면서 인생을 꾸려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배워왔는데, 우리는 다시 독립적이지 못한 몸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우리가 찾아가는 젊음이 독립이었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늙음은 의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의존의 상황은 두렵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묻는 말에 나오는 답은 늙고 병든 몸은 비용이고 짐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동하지 못하고 도움이 되지 못하는 육체가 버겁다고 여긴다. 자신에게 찾아온 질병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돌봄을 피할 수도 없다. 치욕이라 여기는 돌봄과 아픔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언제부터 돌봄이 이렇게 고역이 되었나. 이 책으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우리나라의 돌봄 구조였다. 앞서 말한 독박 돌봄의 불균형이 돌봄을 긍정의 이미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돌봄은 대개 가족 내 돌봄으로 이루어지고, 돌봄 노동자의 90% 이상이 여성이란다. 한국 사회가 만든 돌봄의 구조가 가족, 특히 여성에게 전가해온 현상이다. 그 안에서 돌봄은 고통과 희생이 되고, 때로는 학대와 방치에 가깝게 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돌봄 경험은 여성의 주도가 되지 못하고 남성이 돌봄 경험으로 기록한 책들이 더 많다. 웃기게도 이건 육아와 비슷한 흐름으로 보인다. 남성의 돌봄은 기록으로 남겨져 남다른 지식과 경험이 되는 현상이다. 왜 누가 하면 당연하고 누가 하면 배워야 할 지식이 되는가? 이는 여성의 모성과 돌봄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뿌리 깊은 인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한다. 우리 몸의 아픔과 돌봄 문제에서 같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사회 문제이다.

 

저자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하는 말은, 돌봄이 가정 안에서 누군가의 부담으로만 해결할 수 없다는 거다. ‘시민적 돌봄’을 강조한다. 누구나 아프고 죽어가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간이라면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속한 사회에서 비슷하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 돌보고 돌봄을 받는 관계가 된다. 이는 각자가 겪는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시민으로 감당해야 할 ‘우리’의 일이라는 감각을 깨워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과 가정의 일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정책이 반영되어 이 문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절대 혼자 이룰 수 없는 집단이며,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공동의 부담이면서 ‘우리’가 되었을 때 받는 힘의 크기도 만만치 않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계속 말하고, 소통하며, 듣게 하는 이야기다.

 

부담인 줄 알면서도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에 다른 시선이 생긴다. 나는 환자로 누워있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보호자로 누워 있는 사람을 돌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가족의 일이었고, 누군가는 해야만 했던 일이 나의 일이 되었다. 갑자기 닥친 일이라 간병인을 구할 수 없던 그때 꼬박 일주일을 환자 옆에 있던 어느 날, 자주 마주치던 수간호사 선생님이 나에게 빨리 간병인을 구하라고 했다. 장기전이 될 텐데, 지금 이러면 보호자가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다고. 간병인이 구해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간병 비용 부담도 상당했다. 어쨌든 나중에는 간병인과 교대하면서 병상을 지켰지만, 책에서 언급한 ‘독박’이란 분노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온전히 내 몸을 챙기지도 못하면서 쌓여가는 감정적 육체적 피로는 또 다른 고통을 낳고 있었다. 아, 이래서 학대와 방치가 생길 수 있다고 하는 마음의 경험을 했다고 해야 하나. 저자들이 들려주는 많은 경험과 통계 자료들이 내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저자들은 한때, 그리고 지금 아픈 몸으로 살고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더 절실하고 생생하게 들려오는 이유다. 건강하다고 여기는 이 몸이 언젠가 돌봄을 받는 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모두 아프고 늙으며 살며 죽는다. 이 모든 삶의 순간들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돌봄에 의존한다. 또한 의존하면서 의존하는 다른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돌본다. 내용과 형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돌봄은 언제나 상호적이며 쌍방향적이다. 의존과 돌봄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큼 더 다양하고 세밀하게, 복합적으로 발화되고 청취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돌봄이 어떤 노동이고 어떤 윤리적 가치인가를 차이 속에서 보편적 합의로 구성해내는 것은 어렵지만 포기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공통과제다. (21페이지)

 

이 모든 돌봄의 시간, 돌봄을 주고받았던 관계는 ‘나’의 일부다. 각자, 혼자 알아서 하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짐이고, 또한 힘이다. (80페이지)

 

우리는, 누구나 새벽 세 시의 몸이 된다. 우리 몸이 늙어간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신과 나, 모두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돌봄의 현실을 같이 마주해야 한다. 지금이 아니라고, 멀고 먼 일이라고 여길 텐가. 피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 마주침을 최대한으로 미루고 싶기도 하겠지. 하지만 그 시간은 내 계획대로 찾아오지 않는다는 걸 이미 잘 안다. 어느 순간 우리 앞에 떡 하고 나타나 현실이 된다. 그러니 이 책의 저자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돌봄의 고립된 세상에 남겨지지 않았으면 한다. 누구나 혼자 부담하기에는 외롭고 힘든 시간이 될 간병에 힘이 되는 ‘토로’이자 ‘토론’의 이야기인 이 책이 조금은 위로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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