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학교 세계기독교고전 58
앤드류 머레이 지음, 김원주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순종의 학교". 제목을 들어 보면 예전 KBS에서 방영하던 애니메이션 주제가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사랑의 학교 우리 학교. ♫새하얀 알프스가 보이는 곳...." 아니 데 아미치스의 원작은 이탈리아 배경인데 거기서 알프스가 왜 보이나? 같은 생각도 어렸을 때 했지만(이탈리아 하면 로마나 나폴리, 시칠리아 부터 대뜸 떠올림), 1) 키살피나, 트란살피나 라는 말이 있듯 알프스 산맥은 본디 이탈리아와 非이탈리아를 가르는 지리적 문화적 경계 중 하나였으며 2) <쿠오레>의 배경(즉 엔리코, 데로시 등이 다니던 학교)은 더군다나 토리노 소재이기까지 하니 저 가사에는 아무 하자, 오류도 없는 셈입니다. 학교는 요즘 폭력의 온상으로도 대두하여 사회에 우려를 안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린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자애로운 선생님께 지혜와 지식을 전수 받는 모습이 우선 떠오르는, 일단은 정감 어린 이미지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순종". 중세 기독교 신학에서(뭐 지금도 가톨릭은 그렇습니다만) 대죄, 큰 죄의 하나로 꼽던 게 "오만"이었습니다. 우리 동아시아에서는 이런 전형에 꼽힐 만한(그걸 죄로 보든 아니든 간에) 사례가 좀 드뭅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죽림 칠현 중 하나인 완적, 혹은 명나라 때 이탁오(이지), 혹은 이문열이 그렇게 까는 삼국시대(정확히는 후한 말기)의 예형 등이 이에 해당할까요? 아니면 주체에게 입을 찢겨 죽은 방효유? 비슷하기는 해도 정확히 해당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반대로, 마지막 사람은 완강하게 신앙을 고집하다 "순교"한 기독교 성인들과도 맥락이 통합니다. 대체로 동아시아에서 "지적 오만"을 내세운 이들은, 구태여 찾자면 윤휴, 박세당 처럼 독자 학설을 내세우다 이른바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은 예가 있겠으나, 이마저도 기독교적 "오만"의 경우에 포섭하기엔 다소 난감한 대목이 있습니다.

여튼 "오만"은 "순종"의 반대어입니다. "순종"의 미덕을 내세우는 건, "오만"의 악덕에 빠지지 말라는 가르침과 정확히 통합니다. 이 배경에는 중세 스콜라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깊이 기반하며, 오로지 이성과 논리로 신의 오의를 재단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가 깔려 있긴 했습니다. 물론 책 저자, 19세기 프로테스탄트의 경건하고 저명한 대표 신학자이신 앤드류 머리(머레이.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의 입장은 그와는 꽤나 다른 성향이지만 말입니다.

체스터튼이 창조한 캐릭터 브라운 신부가 나오는 한 단편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대도" 플랑보가 브라운 신부에게 "어떻게 내가 가짜 신부인지 알았소?"라고 묻자, 브라운 신부는 대뜸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이성을 비난했지. 그건 아주 천박한 신학이오." 그러니 사이비, 가짜는 목소리를 높여 열을 올려도 다 무지를 감추려는 위장일 뿐, 진리는 결코 어느 극단에 존재하지 않음을 (추리 소설인데도!) 작가는 작품 속에서 깨우치려는 의도이겠습니다.

"순종"은 굴종이나 비굴과는 또 다릅니다. 사실 지적으로 오만하기나 하면 그나마 괜찮은데, 그렇지도 못하고 기질만 건방진 사람은 서열의 갑을 관계 앞에 아주 약합니다. 순종은 그래서 내적인 확신이 자리잡힌 사람이, 진리 앞에, 절대선 앞에 당당하게 그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떳떳하면 이유가 있는 굽힘에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열등감 많은 사람은 거짓 굴종에는 능하지만, 진짜 몸을 낮춰야 할 상황에서는 오히려 주저하기가 일쑤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순종은 절대적 완전의 개념과 곧잘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종종 오해되기도 합니다. 저자는 특히, "성경의 모든 계명과 질서를 모으고, 순종하는 사람은 이 모든 명령이 보장하는 은혜를 생각하며, 마침내 그는 순종함으로써 은혜를 한 몸에 받는다"는 (잘못된)생각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이 가진 각각 다른 재능과 능력을 고려하시며, 어떤 조건의 충족보다는 그저 매 순간 매 시간의 순종, 더 정확하게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티없이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중시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p77). 이 설명에는, 순종과 신앙에는 어떤 현세의 구복, 기복을 바라는 불순한 마음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며, 그야말로 어린이가 부모님을 따르듯이 계산 없는 동기가 유일해야 한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러니 순종은 "선함, 착함"과도 동의어입니다. 은혜가 있기에 조건부로 순종한다면 이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판상을 들어엎으신(화끈하시죠!) 그 돈놀이꾼들과 다릉 바 없으며, 이미 비굴한 노예이며 사기꾼에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자는 지옥에나 떨어져야 합니다.

"순종은 바로 소망을 품음"입니다.(p90) 소망을 품기에, 세상에 대해 긍정적 시선을 유지할 수 있기에 그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종은 "낙관, 긍정"의 마음가짐과 통합니다. 이런 낙관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제 이웃을 사랑(예수의 새 언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도 지행 합일의 가르침을 내내 강조했습니다. 아무리 정교한 지식이 머리 속에 내장되어 있어도, 행동으로 영혼으로 이 가르침이 옮겨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대다수의 어리석은 자들은 그나마 서푼짜리 지식도 없고, 어디서 거칠기 짝이 없는 폭주 도그마 몇 마디를 머리에 심고 "네 다리는 좋으며 두 다리는 나쁘다!" 한구절로 홍위병처럼 날뛸 뿐입니다. 혹은 아주 어설픈 개똥철학으로 삶을 달관한 양 유치한 허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저자가 가르치는 순종은, 첫째 지식에 맹종하지 말 것, 둘째 착한 마음으로 참된 진리 앞에 언제나 겸손해지고 그를 배우려 열망할 것, 이 두 가지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순종의 미덕을 가르치는 "학교"이며, 우리는 순하고 착한 진리의 학생들인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무 쉽게 찾기 - 전면 개정판 호주머니 속의 자연
윤주복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한민국처럼 산천이 수려한 곳은 세상에 또 없습니다. 온갖 기화요초가 강산을 수 놓고, 오묘한 향취와 현란하면서도 그윽한 색채는 이 땅에 처음 발을 딛는 이들(외국인들)의 오감을 아찔하게 사로잡습니다. 이런 금수강산 곳곳을 자신의 부지런한 다리로 답사하며 눈에 담고 마음에 새기며 (더 여유가 닿으면 사진으로까지 포착하며) 행복한 물적, 정신적 컬렉션을 꾸미는 이들은 진정 행복하다고나 하겠습니다. 헌데 평범한 우리 일상인들은 그런 기쁨을 애써 추구하기가 힘듭니다. 눈 호강 마음 힐링을 못 시켜 주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지상 최고의 수려한 국토에 살면서 그 소중한 가치를 못 알아보고 아까운 생을 허비하는 데 있습니다.



지천에 널린 게 예쁜 꽃이고 수려한 나무라면, 그저 예사로 봐 넘기고 다음 기회의 완상을 기약해도 되는 걸까요? 영화 <빠삐용>에서 초자연적인 목소리가 주인공에게 선고하는 준엄한 한 마디가 있습니다. "여러 죄 중에서도 인생을 낭비한 죄가 네게 가장 크다." 물론 돈벌이도 중요하고 주변의 이웃과 가족에게 살뜰한 신경과 정성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변만 조금 돌아보면 널린 게 야트막한 산이요 도심에 애써 조성된 공원인데, 그 속에서 자신을 좀 봐 달라고 애처롭게, 혹은 당당하게 하늘거리거나 손짓하는 나무와 꽃과 자연을 외면한다면, 이 역시 내가 몸 담은 공간의 아름다움을 거칠고 무심하게, 둔감하고 투박하게 외면한 죄가 어찌 작다고 하겠습니까? 죄 운운하면 너무 거창하지만, 나의 상처와 피로를 씻어내고 치유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돈 안 들고) 확실한 방법은, 바로 자연과 벗으로 지내는 길입니다. 미술품 감상하려면 먼저 안목을 키워야 하고, 안목을 키우려면 노력과 시간과 돈이 들게 마련이지만, 꽃과 나무와 벗하는 길은 그런 번거로운 중간 과정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저 그들의 품에 가서 안기기만 하면 되니까요.

이 책의 제목은 "나무 쉽게 찾기"입니다. 정말 예쁘고 알차고 도톰한 이 책이 자신의 제목을 그리 달고 있다는 건, (우리들 많은 독자들에게) 예상 밖으로 "나무 제대로 찾기"가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뜻(그래서 책 자기가 막 도와 주겠다는 뜻ㅎㅎ)입니다. 나무와 꽃과 사귀는 건 그저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되지만, 내가 나무와 꽃에다가 (마치 김춘수 시인의 어느 구절처럼) 이름을 붙여 주고 어린왕자처럼 특별한 관계를 맺으려면, 나보다 앞서 다른 분들(선인들이나 학자들)이 이 아이들에게 어떤 이름을 붙였는지, 얘들의 특징과 생태는 어떠한지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나무가 궁금하고 꽃과 친하게 지내고 싶을 때, 사전보다 더 간편하게, 일반 도감보다 더 정확하게 사항을 찾아볼 수 있는 게 바로 이 책입니다.



꽃이나 나무도 정이 한번 붙으면 혹시 얘가 아플까봐(통각 체계가 우리하곤 많이 다르긴 해도 ㅎㅎ), 예쁜 몸 상할까봐 함부로 건드리질 못합니다. 만져 보고 싶지만 그저 눈으로만 일단 감상해야 하는데, 사실 저는 책 덕후라서 이 예쁜 책에도 도대체 함부로 손을 못 대고, 책 상할까 싶어서 조심조심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사진도 책 중간 벌어질까봐(물론 제본은 튼튼합니다만 그래도요) 얼마나 조심해서 찍었는지 모릅니다. 여튼 아무리 책이 소중하다고 해도, 열심히 읽어 주고 찾아봐 주지 않는다면, 그건 또 위에 적은 대로 주변의 자연을 다음에 감상하겠노라며 참된 가치 평가를 뒤로 미루는 무신경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다 마음껏 책 자랑을 좀 해볼까 합니다 ㅎㅎ

우리가 중학교 생물 시간에 맨 먼저 배우는 게 종속과목강문계의 생물 분류입니다. 그 중에서도 학자건 일반인이건 가장 자주 만나는 단위가 일단은 종(種), 그 다음에는 적정 대분류인 목(目) 정도죠. 이 책도 소나무목, 미나리아재비목, 벼목, 무환자나무목, 장미목 등 해서 목 단위의 분류가, 책의 장(챕터) 분류와 거의 상응한 편제로 기능합니다. 일단 위에 열거한 다양한 식물군(즉 "목")은, 우리가 아는 종의 이름과도 상당 부분 같아서, 아 이 대표적이고 유명한 종이 자기 이름을 딴 단위 안에 친족들을 이처럼이나 많이 거느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은 영어로 order인데, 자유분방하면서도 한편으로 질서정연한 틀 안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는 나무, 꽃들, 마치 풍부한 정보를 담으면서도 독자를 격의 없이 맞고 환영해 주는 이 책과도 닮은 모습이라고 할까요.

조록나무과의 히어리는 우리 주변에서 아주 드물게 보지는 않는 아이입니다. 헌데 둔한 우리 눈이, 음 그저 나무인가보다 하고 무심히 넘어가는 게 문제지요. 이 책에는 예쁘고 선명한 사진들과 함께, 예를 들면 "꽃자루, 잎자루, 입 뒷면 모두에 털이 없다"거나, "송이꽃차례에 8~12개의 작은 꽃이 모여 달린다"처럼, 그 생태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아무리 눈썰미가 좋아도 자연에 깊이 몸 담거나 나무를 봐 온 눈이 꽤 트여야, 사진이나 지나가는 풍경만 흘깃 보고서도 일일이 종 단위로 구별해낼 텐데요. 우리 같은 일반 독자, 문외한 처지에서 그게 쉽지를 않습니다, 안타깝게도요, 헌데 이런 자세한 설명이 담긴 도감이 있으면(도톰하지만 판형이 아담하여 휴대하기가 편합니다), 현장에서 바로 아 이 꽃이 뭐다, 설명과 모양새가 일치하니 이 종이 맞나 보다 하고 바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홍자단(누운개야광)은 중국이 원산이라고 이 책에 나옵니다. 주로 관상수로 심는다고 나오는데 정말 주변에서 보기로도 그렇더군요. "줄기에서 가지가 많이 갈라져 나오고 비스듬히 누워 자란다"는 게 특히 강조된 설명입니다. 같은 목에 분류된 다른 식물들과 어느 정도 굥유하는 특성, 생리는 검은색 폰트로, 이 아이만 유독 도드라지는 특성은 청색으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연홍색 꽃이 한두 개씩 피는데 지름은 6mm이며, 완전히 벌어지진 않는다"는 설명입니다. 완전히 벌어져 흐드리지게 피는 녀석들도 있고, 얘처럼 오래 자신을 봐 달라는 듯 혹은 부끄럽다는 듯 살포시 자신을 감추기도 합니다. 자연은 이래서 천태만상의 아름다움이 깃든 것이며, 그 다양한 경우의 수는 인간의 한정된 상상력을 압도할 뿐입니다.

무환자나무목의 개산초는 주로 남부 바닷가에서 자란다고 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 아주 친근한 모습들이 사진과 텍스트 설명 중에 가득 담겨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책에는 예컨대 9월의 열매, 4월에 핀 꽃, 겨울눈 등 해서 같은 식물의 다양한 모습을 담았는데, 마치 아름다운 여인의 (무죄인) 변신을 파노라마처럼 화보로 만든 듯해서 한동안 정신을 놓고 구경했습니다. 저뿐 아니라 누구라도, 꽃와 나무의 이런 변신, 변모, 화려한 단장과 맵시를 구경하면, 세상에 천국이 따로 없고 이런 다채롭고 화려하면서도 순수한 구경을 할 수 있는 자체가, 이 지구상에 눈 열린 생명체로 태어난 보람임을 절로 확신할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책은 권말에서 어떻게 본문 내용에 재접근하게 독자를 배려하는지를 보고 그 성의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일단 용어 해설을 별도로 정리해서, 혹시 본문 설명 중 모르는 말이나, 그 뜻을 분명히해 둘 필요 있는 TERM들을 따로 정리해 뒀습니다. 그 다음에는 가나다순 이름 색인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사실 일반 독자에게는 이 부분이 가장 절실한데) 잎 모양만 보고 바로 찾기가 따로 나와 있습니다. 잎 모양 분류 다음에는 꽃 색만 보고 찾는 인덱스가 따로 나오는데, 여기서 정말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더군요. 옆면 THUMB 인덱스 색을 꽃 색과 일치시킨 것도 센스고 말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가 무심하고 둔해서 지나칠 뿐 삼천리 금수강산의 나무와 꽃들은 지금도 도처에서 우리에게 정겨운 눈짓과 손짓으로 세상의 참된 아름다움을 좀 알고 가라며 끝 없이 편지를 쓰고 메시지를 보냅니다. 신이 인간을 만들어 지상에 생육 번성하게 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우리 역시 그 이치에 맞춰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함이 아닐까요. 이름을 아는 건 바른 방법으로 사랑하느니만 못하지만, 주변의 나무와 꽃 이름을 바로 알면 종전보다 더 깊이 더 뜨겁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예쁘고 충실한 책이 바로 그 "연애 교본"이요, 올곧고 맑은 삶을 살게 돕는 "인생 독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페이스 보이 - 2018년 제14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박형근 지음 / 나무옆의자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페이스 보이"는 물론 이 소설에서 실제 우주인 노릇을 하고 지구에 귀환한 주인공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잘 읽어 보면,  그 자신도 스스로의 정체성이 뭔지 내내 헷갈리면서 세상이 무중력 상태처럼 떠받치고 도는 "유명인 놀이"에 결국은 완전한 환멸에 도달하는, 아직은 좀 철이 없어 보이는, (역설적이지만) 철부지 상태에서 어떤 깨달음에 도달하는 서른 살 청년의 이야기를 한 줄로 압축한 어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 띠지를 보면 정이현 작가가 "어깨에 힘 다 빼고 쓴 소설"이라든가 허세 없는 작품 등으로 평한 구절이 나오는데요. 읽어 보면 정말 모든 문장이 잡담처럼 술술 읽힐 만큼은 아닙니다. 아직 젊은 작가가 여튼 고뇌와 사색을 많이는 하셨구나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어깨에 힘을 뺀 건 작품 자체라기보다, 젊은 나이에 거의 모든 것(현대 한국 사회의 피상성을 감안할 때)을 얻었다고 해도 될 주인공 "신 씨"의 무념무상 초탈 해탈 소박털털한 순정입니다.

테드 창의 어느 작품을 보면 한 개인의 가장 지옥같은 기억을 끄집어내는 게 살인 필살기라는 재미있는 설정이 보이는데, 이 책의 외계인(들)도 그런 인간의 약점을 잘 알고, 기억의 메커니즘을 가장 쉬운 말로 주인공에게 설명하고는, 주어진 행운과 재능을 잘 쓰라는 당부와 함께 지구로 돌려보냅니다. 그러니 "우주인(지구에서 미션을 받고 우주로 나갔다가 돌아온 이)"은 그냥 말로만 우주인이 아니라, 외계인과 진짜 컨택을 하고서 종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었기에 우주인인 셈입니다.

이뿐 아니라 "저 사람 외계인 아냐?" 같은 말을 듣는 탁월한 기량의 소유자라든가(하필 이 책에서는 축구 선수 메시 이야기만 드네요), 천재라든가 하는 사람들은 다 외계인한테 한번 끌려갔다 풀려나와서, 그 기억도 모두 잊은 채 불가사의한 솜씨를 발휘한다는 겁니다. 미국에서는 이처럼 "외계인 납치" 테마가 꽤 인기를 끄는 편인데 우리 한국인들로서는 잘 이해가 안 되기도 합니다. 무튼 작가께서도 혹시 외계인에게 납치라도 되셨다가 풀려난 건지(농담입니다) 이 테마에 아주 몰입해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주고 있네요.

소설 평을 보면 "진짜 압권은 주인공이 지구로 귀환한 후반부부터이다."란 말이 있는데, 후반부가 재미있긴 합니다. TV를 보며 어쩜 저렇게 얼굴이 작을까, 근육은 대체 사람이 맞을까 싶게 오밀조밀 잘 만들어서 대중은 선망과 좌절감을 느끼곤 하죠. 그런데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새로 계약한 기획사 베테랑들의 말을 빌려, "다 경락치료빨이다. 다 약물빨(스테로이드라네요. 헉)이다." 등등 평범한 소시민들을 그저 안심하게 만드는 충격적인(ㅎㅎ) 설정이 가득합니다. 아마도 많은 독자들은 이런 대목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다 그렇지는 않으니 괜한 오해는 없어야겠습니다). 주인공을 두고 "귀여운 반항아 같은 이미지"라고 한다는데, 이 주인공이 반항하는 건 권력이나 재력 같은 전통적인(?) 타겟이 아니라, 천박한 상업주의, 속임수, 생각 없이 트렌드에 열광하며 사람을 들었다놨다 하는 대중의 여론, 소셜 미디어의 폭력 등입니다. 이 소설에 깊이 빠져드는 층은 아마 주인공이 선택(이라기보다 천성이지만)한 그 반항의 지향점에 공감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주인공은 돈 주고도 얻을 수 없는 모든 걸 갖고도, 그 과정의 위선과 허위와 경박성에 질린 나머지 애써 가꾼(소속사가 가꿔준) 이미지를 모두 팽개치고 일종의 자폭 행각에 나섭니다. 그뿐 아니라 "로또 번호"를 공개하여 많은 이들에게 행운을 던져 주고 (자기 말로) "이 시대의 예수"가 됩니다. 딱히 과장도 아닌 게, 예수 역시 당대의 위선을 질타, 비판하가 미움을 사 인민 재판에 희생되었으며, 굶주리던 대중에게 이른바 "오병이어"를 통해 포식의 기적을 행했는가 하면, 그 자신이 어린이와도 같은 마음가짐의 소유자였으니 말입니다.

요즘 워낙 대중서로 뇌과학 이야기가 많이 다뤄지다 보니 웬만해서는 대화 자리에서 이 소재로 다들 한 마디씩 합니다. 전혀 안 되던 게 왜 어느날 자고 일어나면 멀쩡히 되는 걸까? 주인공은 천진하게 묻고 외계인은 답해 줍니다만 이 정도는 국내 권위자들도 충분히, 오류 없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의문이죠.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외계인은 실제로 주인공의 뇌를 어루만지며 원하는 바가 가능하도록 신경의 매듭을 이어 줄 능력이 있다는 점 정도입니다(이 소설엔 관련 학계에서 즐겨 쓰는 전문 용어가 거의 없고 쉬운 말로 다 풀어 놨던데 확실히 "어깨에 힘을 뺀" 태도이긴 합니다). 주인공은 정말 일렉기타를 잘 치고 싶었는지, 아니면 보드 타는 기술이 가장 절실했는지, "소원은 신중하게 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귀한 기회에 고작 생각한다는게 이런 소박한 것들뿐입니다. 이런 순진한 태도에 외계인님께서 특히 호감을 가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러나.... ㅠ).

나의 가장 아픈 기억은 무엇일까? 사람은 자신이 처한 비극적 운명을 내내 모르고 살아 오다, 어느날 한순간에 내키지 않는 진실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쩌면 가장 무서운 심연의 비극은 바로 스스로가 왜곡하고 감춰 둔 기억 속에 도사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은 무모한 건지 용감한 건지 스스로 자신의 기억을 캐어 들어가는데, 아무리 파고 파도 그 자리에는 여인 한 명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불x친구이자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인 그녀는,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남의 여인이 되기 직전입니다. 세상을 단순하고도 솔직하게 살아온 그였기에 이 기억 말고 그를 아프게 할 다른 어떤 약점도 없습니다. 여성들은 물론 심지어 게이들 사이(이걸 근데 딱히 강조하는 이유가 뭘까요? 대안으로서 생각은 하고 있다는 뜻입니까?)에서도 최고 인기남이 된 그이지만, 가장 갖고 싶은 걸 못 가지는 그이기에 마음이 하나도 편하질 않습니다. 기억의 심연에서 찾아낸 가장 내밀한 욕구 혹은 상처가 고작 이런 것뿐이라면 예수까지는 몰라도 진정 달관 득도한 자인지도요.

처음부터 우주인으로 선발된 게 프로젝트의 상업적 효과를 노렸을 뿐 다른 어떤 배경이나 자격이 있어서가 아님을 스스로가 잘 알고, 대성공을 거두고 귀환한 후엔 자신에게 덧씌워진 그 모든 허상의 이미지에 환멸을 느끼는 그. 이처럼 주인공은 세상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가장 밀도 높은 소통(비록 가짜지만)을 누리지만, 세상과 철저히 유리되어 고독 속에 감금됩니다. 이런 그이기에 결국 그녀 역시 설령 기회가 주어졌더라도 제대로 합일하지는 못 했을 듯한데, 뇌경색으로 불구자가 되고 나서도 여튼 그를 찾아준 건 엄마 말고는 그녀뿐입니다. 그를 100% 이해는 하는데 역시 그 단순함에 질려 결국 옆을 지켜 줄 자신은 또 없는 그녀. 명품은 어려서부터 좋아했는지 결국 자신이 그 사건의 범인이었음을 자백하는 그녀. 혹 속편이 나온다면 두 불x친구의 과거를 다루는 프리퀄이었으면 어떨지 생각도 해 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괴적 혁신 - 부의 추월이 일어나는
제이 새밋 지음, 이지연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파괴적 혁신은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대 교수가 정리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경영학 개념입니다만, 실제 비즈니스계에서 이를 실천에 옮긴 사례는 역사도 오래되고 그 가짓수도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래서 파괴적 혁신의 필요성이나 마력은, 이를 실제 현장에서 자신의 사업체 운영을 통해 성과를 거두어 본 사람이 설파를 해도 해야 우리 대중, 독자들에게 설득력이 생긴다고 해야 맞겠습니다. 

이 책 저자 제이 새밋은 분명 그런 자격 있는 저자들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서문과 본문 중에서 여태 자신이 어떤 비즈니스 이력을 걸어 왔는지, 어느 상황에서 처절한 좌절을 맛 보고 어떤 국면에서 통쾌한 성공을 거뒀는지, 상당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합니다. 자계서가 대개 그렇듯 저자 자신이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금과옥조로 여기는 타인들의 사례와 교훈, 명언을 이 책에서도 자주 인용하지만, 저자 자신도 치열한 생을 살아 왔기에 할 말이 많으며, 그 말들이 다른 인용례보다 오히려 독자에게 훨씬 큰 재미를 줍니다.

그래서 저자에게 붙은 별명은 "세상에서 가장 쿨한 직업을 가진 사내"입니다. 사실 그가 걸어 온 이력이 다채롭기에 구체적으로 뭐가 그의 직업인지 딱 짚어서 말할 수 없지만(대체로는 "사업가"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과연 고정된 직업이 뭔지 쉽게 규정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넉넉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긴 합니다. 이 책 주제인 "파괴적 혁신"이, 그런 고정된 범주에서 탈피하라는 주문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레이저디스크를 기억하시는 이들이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1997년만 해도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대부 3> 등 몇몇 상품을 실제로 판매했었습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술회하는 대로, 기기에 넣고 돌리다 테이프가 감겨서 망가지는 일 없고, 화질은 비교도 안 되게 선명하고, 원하는 구간으로 즉시 이동 가능한 등 종전의 VHS 포맷 등을 크게 앞서는 장점이 많았습니다. 허나 이 책의 저자는 "레이저디스크는 파괴적 혁신이 아니라, 그저 좀 잘 된 혁신에 불과했다"고 말합니다. 사실 저자는 이 상품을 처음 보았을 때 당연히 시장을 휩쓸리라고 예상한 많은 대중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스스로 책 중에서 고백하는 바이기도 하고요). 그랬던 그가, 상품의 실패를 사후에 다 지켜 보고서야 속 편한 비판을 하는 건 값싼 결과론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여기서 우리는 저자의 진짜 의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저자의 경우 1990년대 중후반 CD-ROM 사업으로 큰 돈을 벌어 자신의 신나는 개인 커리어의 처음을 열어젖힌 사람입니다. 그가 파악하기로 LD가 망한 진짜 이유는, VHS 포맷과 달리 사용자가 녹화, 기록할 수 있는 기능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비자는 제공되는 컨텐츠를 수동적으로 소화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에 드는 방송을 자기만의 공간에 소장도 하고 싶어하며, 종전의 상품이 이 욕구를 만족시켰는데 새롭다는 매체가 오히려 더 제약된 기능만을 가진다면, 자연 실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런 진단은 실제로 CD-ROM 사업으로 재미를 본 분이 하는 말이기에 설득력이 있는 거죠.

"파괴적 혁신"은 그래서 "다소의 향상"이 아니라, 종전의 체험과 만족을 송두리째 탈바꿈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저자가 또 주목하는 파괴적 혁신의 대표적 성공례는 축음기입니다. 토머스 에디슨도 자신이 가장 아끼는 발명으로 꼽은 이 "파괴적 혁신 상품"은, 이 책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엔리코 카루소나 베시 스미스 등 세계적인 예술가의 퍼포먼스를 그저 소수 계층이나 특정 지역 거주자의 전유물로부터, 모두의 안방에서 체험할 수 있는 기적의 환상을 창조한 혁신으로 꼽혀 마땅합니다.

서투르고 미흡한 성과만 거두던 시절이 분명 있었으나 이후 손 대는 사업마다 큰 재미를 보았던 저자 같은 이가, 자신의 성공 비결이라며 내세우는 건 뭘까요? "종전의 고정 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시대의 트렌드를 객관적으로 잘 살펴 이거다 싶을 때 바로 치고들어가라."입니다. 이런 건 요즘 같은 세상에 어느 섹터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도 다 명심할 만한 지침입니다. 예를 들면 주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망하는 사람, 호구처럼 사기 당하는 사람은, 꼭 보면 주견이 없습니다. 제 딴에는 강자에게 편승하고 대세를 탄다며 착각하는데, 몇 박자 늦거나 일이 꼭 끝난 후에 열심히 허우적대니 그게 문제입니다. 아니, 승자를 정확히 예측해서 그에 부화뇌동하는 것 자체야 누가 뭐랄 수도 없습니다. 세상이 본래 그런 거죠. 진짜 중요한 건 타이밍인데 꼭 뒷북이나 치면서 혼자 약은 듯 허세를 떠니 그게 우습다는 겁니다. 저자의 지적은 그래서 특히 이런 변화무쌍한 세상 풍조에서 울림이 깊게 들립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장편 <쥬라기 공원>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명체는 반드시 자신의 길을 찾아낸다." 참 무서운 얘기인데 이 말이 속속들이 맞다면 아마 인공지능은 실패하고 말 겁니다. 또 현생 인류의 지혜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진화론의 신비 역시 단초가 여기서 찾아지는 거겠고 말이죠. "기득권을 가진 공룡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고객의 니즈는 무시되었다."

한국에도 소리바다 같은 사이트, PC 프로그램(P2P 클라이언트)이 있었습니다만 그 무렵 저자는 EMI에 몸 담고 있었는데, 제가 이 책 읽으면서 저자가 참 약은 분이라고 느낀 게, 아무리 모험 사업을 하면서도 결코 허허벌판에 자기 혼자 떨어져서 위험 부담 큰 스탠스는 피한다는 겁니다. 이 역시 처세 스타일로는 훌륭한 것이고, 이분의 특징이라면 그 와중에서도 현실을 굉장히 냉정히 직시하고, 패배자의 넋두리나 변명거리만 잔뜩 챙겨 두는 마인드는 아주 경멸하고 든다는 거죠. 그는 EMI 근무 당시(정확하게는 정규직 고용이 아니라, 일시 파트너십으로 협력 업체형 참여였던 듯합니다. 여튼 자율권 보장되고 유리한 계약 조건이었겠죠), 냅스터 측의 저작권 침해 사실을 일일이 캐 내고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역사의 한 장에 몸을 담았던 셈이죠.

EMI 참여 전 냅스터 측에서 저자에게 찾아와서는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그러니 당시만 해도 이 저자가 냅스터 측의 우군이 될 수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헌데 저자가 보기에, 이들은 구체적인 사업 모델을 갖지도 못했으면서, 그저 유저 수만 많이 확보하면 자연 기반이 잡히겠거니 낙관하더라는 겁니다. 그들이 보이는 자신감은 저자 눈에는 근거 없는 허세로 느껴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사람의 자질과 그릇을 판단하는 데 소름끼칠 만큼 저자는 정확한 안목이 있었던 거죠.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대로입니다. 이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도 있었는데 당시 MBC 백분토론에서 벅스 대표하고 저작권 관계자들이 거의 멱살잡이 직전까지 가는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벅스는 NHN 소속이며 지분 관계 변화에서 큰 우여곡절이 있긴 했으나 여튼 법인으로서는 지명도와 사업 본체를 유지한 채 잘나간다고 봐야 합니다. 역시 사업 모델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똑똑한 사업가는 자주, 빨리, 실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이는 이미 와튼 비즈니스 스쿨에서도 일찌감치 강조해 온 명제 중 하나이며, 이 책에서 시도때도없이 저자가 되풀이하는 사실상 주제문입니다. 실패한 자는 땅에 엎드려 계속 쓰디쓴 패배의 먼지만 씹으면서 일어날 줄 모르거나, 남탓을 하지 말라면서 실제로는 본인 자신이 남탓만을 일삼는 무지와 자가당착에 빠져 있죠. 반면 저자처럼 훌륭한 사업가는 자신이 부리는 피용인의 자질을 한눈에 알아보고, 어떻게 하면 정해진 월급으로 이 사람에게서 최대한의 포텐을 뽑아낼지를 연구합니다. 졸렬한 사장은 그저 명목 월급 지출을 아낄 뿐, 비용의 참된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혁신가들은 사소한 현상 속에서도 이윤의 동기를 찾아내고, 이를 보다 넓은 정보의 채널에 공유함으로써(이 과정에서, 유해하고 사악한 독재 정치도 없어진다고 하는군요) 세상과 더 광범위한 소통을 시도하고 합일합니다. 진정한 파괴적 혁신의 원동력은 바로 이런,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인드를 끊임없이 가다듬고 자신을 확장하는 데에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동차 혁명 2030
사이먼 B. 버락 지음, 엄성수 옮김 / 교보문고(단행본)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나 모빌리티(mobility) 면에서야 다른 동물들에 비해 많이 열등한 존재입니다. 반면 이동과 진출에의 욕구는 그 어느 경쟁 생명체보다도 강력하게 품곤 하죠. 이런 까닭에 자동차는 대표적인 문명의 이기(利器)이며, 인류가 문명을 이어가는 한 자동차 역시 필수적인 생존 수단으로 끊임없이 진화를 계속할 것입니다.

자동차 하면 우리는 안이하게도 화석 연료로 구동되는 가솔린 엔진형만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십여 년 전부터 우리 주변에도 하이브리드 모델을 보유, 운전하는 이들이 크게 늘었으며, 이제는 전기자동차가 미래의 대세가 되리라는 전망에 거의 의견이 일치되고 있습니다. "충전소만 많이 늘어봐라. 내 당장 바꾸고 말지." 이 정도 분위기가 대세라고 평가해도 별반 지나치지 않습니다. 미래에 어떤 형태의 연료를 소모하는 자동차가 주류로 나설지의 고민, 모색은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자동차 연관 산업이 워낙 광범위하게 분포하다 보니, 진로를 모색하는 누구라도 이 사항을 염두에 둬야 하며, 그 전에 내 일상의 필수 동반 아이템인 자동차가 향후 어떤 모양새를 갖출지를 두고 관심이 없기란 그게 차라리 더 어렵다고나 하겠습니다.

전기자동차는 1800년대, 즉 19세기의 중후반부터 오히려 주요 모델 중의 하나로 더 친숙한 모습이었습니다. 21세기형 첨단으로만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에게 오히려 의외에 가까운 상식이겠는데요. 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 걸쳐 일상의 에너지원으로 전기가 폭 넓게 도입되던 시절, 자동차 역시 전기로 구동되는 게 당대인들에게는 차라리 자연스럽게 인식되었습니다. 토마스 에디슨 역시 포드와 손 잡고 전기자동차 사업을 구상했었으나, 뜻하지 않은 화재 사고를 겪고 이 분야 진출이 좌절되었습니다. 책에 나오듯이 이를 두고 어떤 음모론자들은 정유업계의 압력과 로비, 심지어 테러가 빚은 결과라고도 하나, 저자의 신중한 판단처럼 이런 태도는 지나친 억측입니다.

1990년대에 GM이 전기자동차 모델을 시중에 이미 내놓았다고 하면 안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관련 업계의 반대도 있었고(주유소 등에서 과세 반대) 시장성을 확보할 만큼 단가를 충분히 낮게 맞출 수 없어서 이 사업부문은 결국 중단되었습니다. "리콜을 빙자한 회수(책 p44에 이 표현이 그대로 나옵니다)"라든가, 사막 한가운데에 시설과 제품을 갖다버리는 식으로 결국 2001년에 파국을 맞는데, 만약 이 프로젝트가 좌절없이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지금쯤 미국 산업이 얼마나 전기자동차 분야에서 세계 경쟁자들을 멀찌감치 따돌렸을지 아쉬워하는 저자의 평가가 나옵니다.

그런데 어느 산업발달사를 회고해 봐도, 이처럼 시대를 잘못 만나 좌초하는 선구자, 모험가의 사연은 얼마든지 나오니 딱히 아쉬워할 대목만은 아닙니다. 이 책에는 안 나옵니다만 프레스턴 터커라는 개척가가 이미 지난 세기 중반에 디스크 브레이크, 반자동 변속기 등을 달고 연비도 획기적으로 개선된 모델을 내놓은 적 있었죠. 프랜시스 포드 코플라가 만든 영화 <터커>가 이 사연을 자세히 다룹니다.

터커 자동차를 압살한 빅3도 21세기 들어 시대의 대세를 채 못 따르고 방만한 경영과 후진적 노동 행태를 이어간 탓에 큰 위기를 맞습니다. 크라이슬러는 이미 1980년대부터 미국 경제의 암덩어리나 마찬가지였고, GM 역시 파산 직전까지 갔다가 후과를 감당 못할 상황이란 걸 알고 미국 정부가 반 국유화하다시피해서 오늘에 이릅니다. 포드는 그전부터 긴축 경영에 들어가 당시 간신히 위기를 넘겼으나 역시 힘겨운 행보를 이어가는 건 他 兩社와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책이 특히 21세기 들어 일어난 이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처럼이나 산업 전반에 영향을 크게 끼친 이 회사들의 경영 주체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대폭 물갈이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부나 공공 단체, 혹은 전혀 새로운 세력이 경영에 참여하고부터는, 패러다임을 크게 바꿔 전향적으로 친환경 컨셉을 개발할 수 있었다는 건데, 현재 자동차 산업의 대세가 이처럼이나 크게방향 전환을 이룬 데에는 이런 요인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저자는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대 교수의 이른바 "파괴적 혁신" 개념을 예로 들며, 전기자동차야말로 이 범주에 넣어야 할 대표이자 모범이라 규정합니다. 종래의 휘발유 구동 엔진은 대체로 세 가지 정도의 치명적 약점이 있는데, 1) 에너지 효율이 20% 정도밖에 안 된다. 2) 에너지 단위당 가격이 비싸다. 3) 하나의 엔진이 변속장치, 주행장치를 거쳐 바퀴에 에너지를 전달하는 일체형 구조라는 사실 등입니다.

반면 전기자동차는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열역학 법칙의 제약에서 거의 자유롭다 할 정도로, 100%에 가까운 에너지 효율을 자랑하며, 모터 등이 고장나도 대개 모듈형 구조라서 해당 부품만 교체하면 수리가 완료됩니다. 정비, 유지, 보수가 크게 편리해졌기에 소비자 입장에서는 그저 원료 패러다임의 전환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친환경도 대단한 편익이고 대의(cause)이지만, 그를 훨씬 넘어선 효용이 따로 생기는 거죠.

그러나 저자도 pp. 73~75에서 고백하듯, "현재로서는 화셕 연료가 그 어느 배터리보다 에너지 밀도가 높으며" "항상 배터리팩 안에 100%를 충전하는 게 좋다고만 말할 수 없기에, 내연기관형과 전기자동차 중 어느 것이 경제적으로 우수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산업으로서 경쟁력이 있는지, 소비자에게 어느 정도 어필할지는 기술적 우위만으로 판정할 수 없고, 어디까지나 "경제학적 판정 절차"를 거쳐야만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존 하이브리드 방식의 핵심이 엔진이었다면 최근 대두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방식은 배터리다." 저자는 이렇게 정리하는데 그 이유는 이 PHEV 모델에서 어디까지나 모터가 위주이고 내연기관이 보조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존 하이브리드 방식은 당연히 엔진이 메인인데, 이런 의미에서 PHEV야말로 진정한 하이브리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초창기만 해도 오히려 전기자동차가 가격이 더 싼 편이었습니다만 일부 특수 계층의 장난감에 가까웠을 뿐 대중 상대로 판매되는 아이템이 아니었기에 가격 대조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여전히 전기자동차는 일반 자동차보다 비싸게 시장에서 팔리는 경향이죠. 그래서 소비자들이 우선 염두에 두는 게 하이브리드인데 책 4장에서는 가격과 함께 다양한 모델들의 스펙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사진이 좀 함께 나왔다면 더 좋았을 뻔했습니다. 가격 고려해서 하이브리드를 찾을 독자를 위한 배려겠습니다만 볼보(현재는 포드 소유 브랜드입니다만)나 포르셰에서 나온 럭셔리 모델도 소개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전기자동차 대중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 중 하나라면 역시 배터리 이슈입니다. 에너지 밀도 면에서 아직 내연기관 구동형을 따라올 수 없고, 책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것처럼 여전히 가격이 너무나도 비쌉니다. 저자도 "파괴적 혁신"을 거론하지만, 분명 전기자동차가 혁신 아이템임에도 불구하고 보급이 늦어지는 이유는 인프라, 그 중에서도 충전 인프라의 문제가 있죠. 자동차 산업에서 신상품의 히트에는, 예컨대 "허니버터칩"처럼 개별 상품의 경쟁력과 호응 유발로만 충분한 게 아니라, 사회 제도적 뒷받침이 수반되어야만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백여년 전 니콜라 테슬라가 이미 무선 충전 방식을 제안한 적 있다는군요. 이 방식은 현재 이탈리에서, 정해진 노선만을 운행하는 버스들에 제한적으로 적용 가능하다고 합니다. 가장 큰 애로점은 배터리에다 100% 완충을 유지하면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는 건데(배터리 사이즈가 너무 커지고 시간도 오래 걸림), 버스의 경우 고정 노선만 다니므로 거점에서마다 아주 조금씩 충전을 지속하는 식으로 이 난관을 해결했다고 합니다(시간 문제와 용량 제한). 저자는 직장인들의 경우 이동 경로가 어느 정도는 고정이므로 비슷한 방식으로 해결 가능하다고 예측합니다. 허나 자차 소유의 장점이 노선에 제약을 안 받고 변덕이든 즉흥이든 내 맘대로 행선지를 정할 수 있다는 데에 있으므로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걸 알 수 있네요.

현대자동차 그룹 같은 경우, 대졸 신규 공채를 할 때 파격 조건을 걸고서도 우수 인재를 모으려 애 씁니다. 해당 공학을 이수한 이가 아니라면(자동차 공학이라고 따로 특화한 학부를 설치한 대학이 그리 많지도 않고요) 우수 인재가 자동차 사업 부문에 들어가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갖는 분들도 많습니다만, 영업이나 법무 파트가 아니라도 자동차공학이 (생각보다 훨씬)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그래서 자동차 전문가라면 물리, 화학 등 다방면에 걸쳐 탄탄한 소양과 논리적 두뇌를 갖추어야만 합니다.

이 책 역시 뜻밖에도 마지막 파트에, "왜 전기자동차인가?"의 의문을 학문적으로 풀어 주고 책을 끝내겠다는 듯, 대중서치고는 이례적으로 토크 등 물리 개념을 자세히 끌어들여 마치 전기차 전도사처럼 그 수월성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일단 특정 기업의 이해에 국한된 이슈가 아니라, 인류 문명이 한 단계 진보하는 핵심 기술, 친환경 아젠다와 연관된 기술이기에, 우리 일반 소비자의 건전한 관심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음모론을 지나치게 믿어서는 안 되겠으나, 행여 특정 독점 자본이 대중의 이해를 희생하여 이기적인 시도를 벌이는 결과는 막기도 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