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윤석열 탄핵 사건 선고 결정문 읽기와 필사 -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사건 파면 결정문 전문 수록
대한민국.헌법재판소 지음 / 시원북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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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에서 최종적으로 대통령(권한 정지 상태였던)에 대한 파면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국회는,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대통령의 행위를 내란으로 보고 같은 달 14일에 탄핵소추를 의결했었는데 4개월 정도만에 사법적으로 결론이 난 것입니다. 이 책은 110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 그 절반이 우리 독자의 필사를 위한 공란(20줄 노트)이긴 해도 여튼 적다고는 할 수 없는 볼륨입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이 결정문은 심판 대상이 무엇인지 우선 밝히고, 그 적법 요건을 판단하는데, 여기서 적법 요건이란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이 적법했는지를 먼저 따지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서 부적법하다는 판단이 나오면 본안에 더 들어갈 것도 없이 각하(却下) 결정이 내려집니다. 일단 헌재는 대통령의 12.3 계엄 선포에 대해 사법심사가 가능한지를 먼저 살핍니다. 저는 작년 7월 7일, 8월 31일에 썼던 책프 리뷰에서, 이른바 통치행위(act of state)라는 것에 대해, 한상범 동국대 교수가 1993년 그 불법성을 논한 대목을 인용하고 제 나름대로 분석했었습니다.

이 책 p5를 보면 그 맨하단에 적법요건에 대한 판단이 나옵니다. 피청구인 윤석열 측은 이 계엄 선포가 고도의 통치행위이므로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고도의 정치적 결단을 요하는 행위라 하더라도" 계엄의 선포는 헌법과 법률에 정한 절차가 있으므로 그를 따라야 하며, 이런 이유 때문에 헌재는 얼마든지 그 행위의 당부를 심사할 수 있다고 판단합나다. 사실, 이른바 act of state라는 건 과거 왕정 시대에 국사행위로 이뤄진 행위에 대해 일일이 법원이 개입할 수 있다는 이론 체계의 잔재로서, 20세기 이후에는 헌법이건 행정법이건 거의 논거로 쓰이지 않는 편입니다. 벌써 저 한상범 교수도 1995년에, 통치행위라는 말 앞에 "불법"을 붙여 얼마든지 사법심사를 할 수 있다는 전제로 삼았습니다. 학계의 일반적인 분위기가 이와 같았습니다.

적법요건 중 "반복발의이기 때문에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피청구인의 주장에 대해 헌재는 "제418차 회기에서 일단 투표가 불성립"했음을 지적합니다. 이때 우원식 의장은 정족수 미달로 "부결"된 게 아니라 투표가 불성립했음을 강조했는데, 그게 알고보니 이처럼 깊은 포석이 깔렸던 것입니다. 또 그게 아니라도, 두번째 표결이 차수가 변경된 419차 회기 중 이뤄졌으므로 역시 일사부재의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고 헌재는 보았습니다. 구체적으로는 국회법 92조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p8).

피청구인 측은 이 사건 (국회의) 청구가 보호이익을 흠결했다고도 주장했습니다. 계엄이 몇 시간 만에 해제되었으므로 아무런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아마도 앞에 적힌 청구인(국회) 측의 청구 사유들을 지적하는 듯, "탄핵사유가 이미 발생했으므로 심판의 이익이 있다"고 설시합니다.

다음으로, 아마도 이번 사건에서 가장 핫하게(?) 조명되었던 게 청구사유의 일부 철회에 대한 지적이았는데, 일각에서는 이 부분 때문에 탄핵심판 청구 전체가 각하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동일성이 인정되지 않을 정도의 변경은 허용되지 않음"이라는 기존 판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의 문제인데, 사실 관계의 변경이 아니라 적용 법조문의 변경은 헌재의 판단 영역일 뿐 이를 두고 사유의 추가, 철회, 변경이라 볼 수 없다는 게 결론(p10)입니다. 피청구인의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순간 이미 본안 판단에서도 탄핵 인용의 가능성이 과반으로 치달았다고 저는 봤었습니다.

본안으로 들어가서, 병력 동원이 필요했냐를 두고 헌재는 헌법 77조를 들어, 정치적 혼란은 제도적 수단으로 해결해야지 병력을 동원할 일이 아니며, 국회만큼은 그 권한을 계속하여 행사할 것을 전제로 헌법 자신이 "해제요구권"을 자체 규정한 것이므로, 국회에 병력을 진입시킨 피청구인의 행위를 위헌으로 선언합니다. 정국경색을 타개하려면 대국민담화(사실행위)나 국민투표 부의(헌법 72조)로 해결할 수도 있었음에도, 최후 수단이 되어야 할 병력 동원이 먼저 이뤄진 점을 비판합니다(이 책 p32).

역사적인 탄핵 결정문을 많은 국민들이 읽고 그 헌법적 의미를 새길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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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없는 삶 - 타인의 욕망에서 벗어날 용기
고명한 지음 / 세이지(世利知)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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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부제 안에 벌써 많은 메시지가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브랜드에 가치를 내가 부여하고, 내가 버는 소득 상당 부분을 투자하여 그 브랜드를 구입함으로써 내가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이걸 두고 누가 뭐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감, 가치관 같은 게 과연 순수한 나만의 것일지, 아니면 거대 미디어로부터 세뇌받은 건 아닌지 나부터가 겸허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지인이나 직장 동료들이, 이 브랜드를 착용하는 나를 이렇게 봐 주겠지 같은 강박 때문에 특정 브랜드에 충성하고 괜한 돈을 쓴다면, 그게 장기적으로는 나를 불행으로 몰고 가는 선택이 아닐까요.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32를 보면 "브랜드를 통한 과시욕은 모든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인정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한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촌락에서 장원에서 자신의 아주 제한적인 자아만 실현하고 살 때에는 남의 시선에 그닥 신경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내 부모 내 가족, 이웃에 대해 할 도리만 하고 살면 그만이었죠. 그런데 시장 경제가 점차 확산하고, 내가 만드는 물건이 시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면서 나의 생각과 가치관이라는 게 시장의 평균에 맞춰지도록 애 쓰게 됩니다. 이런 비생산적이고 타인지향적인 경주(race)를 시작하는 순간 나의 에너지, 나의 소중한 자산이 남의 욕망에 의해 잠식됩니다. 그것들은 원래 나를 위해 쓰여 나의 행복을 낳아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소유에 대해 발터 벤야민은 "나와 사물 사이의 가장 깊은 관계"라고 정의했습니다(p118). 이 말에 따르면 소유라는 양상에서 구태여 부정적인 의미를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 책에서 종종 인용되는 에리히 프롬은 소유와 존재(삶)을 대치시키며 전자를 비판했지만 말입니다. 그럼 이 맥락에서 발터 벤야민이 비판한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소비"입니다.

나는 과연 구찌나 루이비통의 원천적 미의식이나 탐미적 철학에 공감하여 그 비싼 돈을 들여 구두와 백을 소유하(려 드)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합니다. 명품의 탁월함은 정작 알아 보지도 못하면서 주위의 남들이 좋다니까 맹목적으로 추종하여 평판과 이미지, 선망의 시선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명품의 가치를 차라리 알아라도 보고 그 (개별 상품)를 진지하게 "소유"라도 해 보라는 게 차악의 대안입니다. 가장 나쁜 건 남들 따라 사는 "골빈 소비"입니다. 자신이 무대 위의 연극배우라며 환각 속에 사는 미친 노파처럼 말입니다.

독자인 저도 이 책을 받아들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게 저자분의 성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작명의 내력이 이 책 p150에 대해 자세히 나옵니다. 이름이란 이처럼 한없이 소중하고 뜻깊은, 당사자를 낳아 주신 부모님, 혹은 그 직계존속분들의 소망과 기대가 깃든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명자(名字)는 그저 족보나 관가의 기록에만 올리고, 성년이 되어서는 자(字)라든가, 별호(別號)로 통하곤 했던 것입니다.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건 임금이나 부모에게나 가능했습니다. 존재 없던 일개 들꽃을 찬란한 생명의 빛깔로 물들이는 건 의미의 총합체인 이름이며, 이 이름이 붙은 후에야 생명체는 비루함을 벗고 전 우주에 맞먹는 가치를 얻습니다.

이제는 남들 따라 사는[生], 혹은 남들 따라 사는[買] 행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요즘 미 증시에서 나이키 주가는 1년 전에 비해 2/3가 되었습니다(2025. 4. 26 기준). 이 회사의 브랜드 관리 전략이 형편없어진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애초에 모든 브랜드라는 게 대체 생각이라는 게 없는 멍청한 대중을 자본이 세뇌한 환각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저자의 말씀대로, 대체불가능한 나만의 1인 브랜드(p182)로 내가 다시 태어나는 선택이, 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회사에서 천덕꾸러기 취급 안 받고 살아남는 비결이고 또 용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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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스쿨 네이티브 어디서나 통하는 리얼 영어회화 - 50개 상황으로 떠나는 방구석 어학 연수
제나 강 지음 / 시원스쿨닷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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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여덟 챕터로 이뤄졌고 50개의 유닛이 50개의 상황을 담은 회화책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p84 같은 곳에 나오는, 특정한 단어나 표현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있어서, 영어에 대한 깊은 지식을 쌓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학문적 지식이라기보다는 일상의 대화를 더 생기 있게 만들고, AI 통역기 없이 나의 자연스러운 매력을 드러내기 위한 맛깔 나는 개인기를 키우기 위한 팁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54에서 직장 생활 관련 대화를 다룹니다. Can you get it done by the deadline?는 마감일까지 끝낼 수 있냐는 질문인데, get it done 같이 수동형을 쓰는 건 네이티브 감각이 있어야 바로바로 입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반대로 get it started 같은 말도 한국인은 쉽사리 잘 안 떠오릅니다. 바로 아래 나오는 hang in there.도 요즘 한국인들한테 "존버" 관련해서 부쩍 인지도가 높아진 표현입니다.

p78의 unit 17에서 반려동물 관련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흥미롭습니다. let (her) dog off the leash 라는 표현은 개를 묶어 두지 않고 풀어 두다는 뜻입니다. 원서에서 어떤 주제를 낱낱이 해명한다고 할 때 unleashed 같은 말을 떠올리면 leash라는 명사의 뜻이 잘 다가올 듯합니다. 반대말은 on a leash라고 바로 따라나옵니다. 다음 페이지의 walk a dog같은 말도, walk를 저렇게 타동사로 쓰는 건 상당히 낯선 용법이긴 합니다. p108을 보면, 어떤 경우에 a를 쓰고 the를 쓰는지 자세한 구별법이 나옵니다.

p138 이하의 unit 29에서는 건강 관련 표현들이 나옵니다. check-up은 건강 검진이라는 뜻입니다. have (an) endoscopy라는 게 내시경검사를 밭는다는 뜻이라고 다음 페이지에 특별히 강조되어 나옵니다. I hope () goes well.이라는 게, 저 종속절 안에 주어로 들어갈 말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표현할 때 쓰입니다. 유용한 표현들을 한 유닛 안에 묶어 학습자가 맥락 안에서 더 잘 기억하게 도운 편집이 돋보입니다. 또 컬러풀하고 예쁜 레이아웃 덕분에 눈이 덜 피로하고, 종이 질이 좋아서 의욕도 더 오래 지속되는 느낌이네요.

헬스장을 다닌다고 할 때 여러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원어민처럼 자연스러운 게 join a gym이겠고 p130에 그 표현이 나옵니다. 아직 특정된 헬스장이 아니니 부정관사 a이며, 만약에 두 대화자가 어떤 공통된 헬스장을 염두에 둔다면 the가 와도 되겠습니다. join이라는 동사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러닝 머신이라고 해도 되지만 원어민들은 treadmill이라고 더 자주 말합니다. 경사 있는 기계는 스텝밀이라고 하죠.

p170을 보면 카페에서 쓸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샷 추가해서"라고 하려면 뭐라고 할까요? with an extra shot이라고 나옵니다.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그란데 아이스(grande iced)라는 메뉴도 있나 본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요즘 한국인들도 많이 아는 표현인데 "여기서 먹을 것인지 아니면 가져갈 건지?"를 가게 측에서 물을 때, for here or to go?라 한다고 p171에 나옵니다. 책에서는 이에 대답할 때 (메뉴)+ to go라고 간단히 하면 된다고 나옵니다. 쟤들은 테이크아웃보다 이 to go를 훨씬 자주 쓰니 이쪽으로 습관을 들여야 하겠습니다.

요즘 한국의 엠지(콩글리시지만)는 주식 안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p202를 보면 투기(투자가 아닌)를 speculation이라 한다고 나옵니다. "(해 보니) 조마조마해 죽겠어"라고 하려면 "I find it very nerve-racking."이라고 한다고 나옵니다. find it +(상태)도 한국인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기 힘들고, nerve-racking도 미국인들은 정말 자주 쓰지만 한국임들은 잘 모릅니다. 주식 상황을 추적하면서 나올 만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p240에 수다 떨때 두루 쓸 수 있는 표현들이 모아 정리되었고, 뒤에는 찾아보기가 마련되어 잘 생각이 안 날 때 페이지를 참조할 수 있게 배려했습니다. 깔끔하고 실용적인 회화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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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손글씨의 힘! - 창용쌤 기적의 글씨 교정 5가지 공식
김창용 지음 / 시원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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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때에는 유치원에서부터 연필을 손에 바르게 쥐고, 또박또박 글씨를 쓰게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바른 자세를 어려서부터 잡아 줘야 그 손끝에서 바른 글씨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요즘의 교육 환경은 바른 글씨쓰기에만 자원을 집중할 수 없는 어떤 사정이라도 있는지, 혹은 키보드 타자 위주의 메시지 작성 조건 때문인지, 아이들 글씨 중에는 (어린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너무도 상태기 나쁜 악필이 간혹 보입니다. 이게 그냥 웃고 넘길 일만은 아닌 게, 아무리 요즘이 신언서판(身言書判)의 시대가 아니라도, 어쩌다 진정성 어린 손글씨로 마음을 상대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을 때, 나쁜 글씨는 당사자의 자존감을 떨어뜨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명필 선생님, 판서 한석봉으로 유명한 저자 "창용쌤" 김창용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평소 인성 함양에도 큰 정성을 쏟으시는 걸로 유명합니다. 그저 글씨만 잘 쓰신다고 유명인사가 된 게 아닙니다. 선생님에 대한 이러저런 훈훈한 미담이 입소문을 타면서, 그의 반듯한 글씨도 새삼 다시 주목받았습니다. 선생님의 글씨를 보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반듯한 필체인데, 보기 좋기도 좋지만 그렇게나 많은 글씨를 쓰시면서 필체가 마치 인쇄된 글꼴처럼 형태가 일관됩니다. 글씨를 못 쓰는 사람은 남이 알아보기 어려운 것도 어렵지만, 어떤 때는 이렇고 어떤 때는 전혀 다른 꼴이어서 더 난감합니다.

p7을 보면 이런 반듯반듯한 글씨는 다양한 과목의 내용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으로 쓰입니다. 아마 초 4 정도에 배울, 선거의 4대 원칙, 보통, 평등, 직접, 비밀이 칠판에 판서되었습니다. 그런데 교과서나 참고서에 나오는 흔한 내용이 아니어서, 독자인 저는 그 점에도 눈길이 갔습니다. 즉, 직접과 비밀의 셋째, 넷째 원칙에 대해서는 "쉬움!"이라는 한 마디로 포괄해 정리하시고, 구구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는 게 제 눈에 띄었습니다.

이 사항에서 문제가 출제된다면, 보통 선거는 신분의 차별(귀족/평민)이나 납세 실적 유무에 무관하게 선거권이 주어진다는 것이고, 평등 선거는 선거권자 누구나 단 1표씩만 행사할 수 있다는 데 포인트가 있죠. 형식논리적으로는, 보통 선거를 실시한다 해도 반드시 평등 선거까지 채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님은 아마 이 점을 수업 시간 중에 강조하며 학생들에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필체도, 쓸데없는 장식을 과하게 담기보다, 기역이면 기역 니은이면 니은이, 보는 사람에게 잘 식별되게 하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저 판서 사항을 보고서도, 실용성과 식별용이성을 중시하는 "창용쌤체"의 정신이 배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의 악필을 고치는 데에는 단 하루면 충분하다고 선생님은 말씀합니다. 핵심 공식이 단 다섯 개로만 정리됩니다. 가나다의 시작은 출발화살표, 가로형 받침글자의 시작은 깃털화살표, 세로형 글자의 시작은 출발화살표 등 다섯 개의 원칙들입니다. 어떤 원칙에도 예외가 있기 마련인데, p25를 보면 ㅅ(시옷)의 경우 유일하게 칸을 살짝 튀어나간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모든 글자를 네모 칸 안에 반듯하게 넣으라고만 배웠지, 시옷의 경우 이런 예외가 적용된다는 의식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실용성을 강조하는 선생님의 개성이랄까 인격적 특징이, 거의 원칙에 가까운 이런 중요한 예외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게 한 게 아닐까 생각되더군요.

한글은 모든 글자에 일관된 구조가 관철되기 힘든데, 모아쓰기라는 독특한 규칙이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가, 나, 다 같은 글자는 가로형, 고, 노, 도 같은 글자는 세로형이라고 해서 분류를 다르게 잡습니다. 세로형은 출발화살표, 가로형은 깃털화살표, 이렇게 바른 글씨의 원칙을 어려서부터 배운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흔들리지 않는 명필을 갖게 될 것 같아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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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세계사 : 과학편 벌거벗은 세계사
tvN〈벌거벗은 세계사〉제작팀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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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10편의 에피소드가 정리되어 실렸습니다. 이 책에 실린 방송분들은 모두 과학 연관인데, 공룡 편(박진영 박사)는 작년(2024) 5월 14일, 화산(윤성효 교수) 편은 '23년 7월 25일, 세균편은 작년 2월 27일, 갈릴레오 편은 '23년 2월 28일, 다윈과 우생학 편은 같은해 5월 2일, 노벨 편은 작년 7월 30일, 에디슨 편은 '23년 1월 17일, 바다 오염 편은 같은해 3월 14일, 마리 퀴리 편은 작년 1월 30일, 오펜하이머 편은 재작년 9월 12일에 방영되었습니다. 제가 작년 9월에 리뷰한 한정판 5권 세트에는 당연히 포함되지 않았던 새 책이며 교보문고에서 이번에도 제작했습니다.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저희가 자랄 때와는 달리 요즘은 공룡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견해들이 등장하여 혼란스러울 지경입니다. 그러나 TV 방송에서도 연예인 패널들을 잘 이끌며 설명하셨듯, 이 설 저 설이 언론을 통해 난립하던 것을 박진영 박사께서 잘 정리하여 책에서도 알기 쉽게 가르칩니다. 일단 소설가 마이클 크라이튼부터가 공룡은 파충류보다 차라리 새에 가깝다고 작품 속에서 말하여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990년 창작된 그 소설은 2년 후 한국어로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 p39에 나오듯 시노사우롭테릭스 화석의 발견(1996)은 공룡이야말로 새의 조상이라는 입장에 결정적 증거가 되었고 2003년에 나왔던 <쥬라기 공원 3>의 몇몇 중요 장면에 모티브 노릇을 했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악어 피부가 아닌 병아리처럼 털이 복실복실한 공룡의 상상도, 복원도는 뭔가 좀 깨기도 하지만 진리를 향해 전진하는 인간의 노력은 경이로울 뿐입니다. 

1990년 이전 우리 민법에는 약혼 해제 사유에 폐병이 들어 있었는데 그만큼 이 질환은 인류를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p121에 나오듯 결핵은 유독 에밀리 브론테, 프레데릭 쇼팽 등 천재들을 괴롭혀 죽음으로 몰고 간 병이기도 했습니다. 18세기에만 해도 맨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세균이라는 게 많은 병의 원인이 된다는 과학적 설명을 사람들이 널리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일찍이 16세기 얀센이, 또 19세기 코흐와 파스퇴르가 세균학을 크게 발전시켰고, 20세기 들어 알렉산더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우연히 만듦으로써 인류는 크나큰 위험 하나로부터 해방되는 듯했습니다. 세균은 꼭 나쁜 게 아니며, p131에 나오듯 좋은 쪽으로도 얼마든지 활용 가능하니 김응빈 연대 교수님 말씀처럼 "작은 것들의 힘은 위대"합니다.

앞에 나온 얀센처럼 당시 네덜란드에는 렌즈를 잘 다루는 기술자들이 많았는데 21세기에도 특정 EUV 노광장비를 네덜란드 회사 ASML만이 제조 가능하니 전통과 풍토란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p155에 나오듯 이탈리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 같은 천재도 대륙 저 건너편인 네덜란드인들의 망원경 발명이 아니었다면 그같은 업적을 이루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무염시태>에서 성모 마리아는 매끈한 달의 표면을 밟고 섰으나,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확인한 달의 표면은 전혀 그렇지 않아 당대인들의 신앙심에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p161까지 이어지는 당대인들의 논쟁과 명화 도판은 독자를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재미있고, TV 방영분도 그러했습니다. 

많은 박물학자들이 세계를 유람하며 학문 연구의 단서를 찾아다녔으나 찰스 다윈처럼 폭넓고 혁신적인 결과를 내놓은 이는 없었습니다. 비글 호를 타고 그는 카리브해의 갈라파고스에 다다라 온갖 진귀한 생태를 접하고 놀라운 결론을 도출했습니다. 찰스 다윈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으나 진화론은 뜻밖에 우생학이라는 위험한 사조, 경향을 낳았으며 이는 엉뚱하게도 미국에서 큰 세를 한때 얻었고, 안타깝지만 J D 록펠러, 앤드류 카네기, 켈로그 등 산업계의 거인들도 이에 호응했습니다(p201). 이 대목에서 염운옥 교수님의 평가가 끝나자 패널들이 일제히 아쉬워하던 리액션이 시청자로서 저는 생각나네요.

일반적인 과학자와 발명왕 에디슨이 달랐던 점은 p259에 나오듯 "나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걸 만들겠다"는 그의 현실 감각과 무서운 집념입니다. 전구 필라멘트 소재 하나를 찾기 위해 수천 개를 실험했듯 그의 의지와 끈기는 상상을 초월했는데, 요즘은 인공지능이 도와 주기 때문에 이런 중노동을 할 필요도, 많은 자금을 투입할 필요도 없기는 합니다. p281에 나오듯 그는 직류를 밀었고, 그의 적수로 알려진 니콜라 테슬라는 교류를 밀었는데 에디슨의 편에는 그 유명한 J P 모건이, 테슬라 편에는 웨스팅하우스社가 섰습니다. p280에 나오듯 이 싸움을 당시에 Current War라고 불렀고 이걸 소재로 한 최근 영화도 있습니다. 같은 페이지에 나오는 당시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중임은 했으나 연임을 못한 유일한 예였는데 몇 달 전 트럼프가 당선됨으로써 역사상 두번째 사례를 만들었죠.

마리아 스클로도프스카, 우리가 퀴리 부인으로 아는 위대한 과학자는 p325에 나오듯 최초라는 타이틀을 여럿 가진 천재였습니다. 두 분야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아직도 이분밖에 없습니다. 역시 천재라서인지, 그녀는 한 번에 한 가지 주제만 읽으면 쉬이 피곤해져 차라리 여러 주제를 동시에 공부해야 직성이 풀렸다는 말이 p331에 나옵니다. p341에서 박민아 한양대 교수가 평가하듯, 그리스 신화에서 인류에게 최초로 불을 선사한 프로메테우스처럼 마리 퀴리는 그 전에는 사람의 두뇌가 전혀 알지 못하던 소중한 지식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한국처럼 부존자원이 부족하고 무역에만 의존하여 국부를 창출하는 나라에서 과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려운 내용을 최대한 쉽게 풀어 설명해 주는 각계 최고 전문가들의 정성과 재능이 돋보이는 멋진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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