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전 시집 : 카페 프란스 - 윤동주가 사랑하고 존경한 시인 전 시집
정지용 지음 / 스타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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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이동원이 부른 가곡으로도 유명한 <향수(鄕愁)>는 시인 정지용의 대표작입니다. 이 시 전집에서는 p55에 실렸습니다. 이 책 서문에도 나오듯이 정지용 시인은 한때 납북/월북 여부가 불분명하여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실리지 못한 것은 물론, 그의 성명이 일부 혹은 전부가 가려진 채로만 표기되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제약 없이 그의 모든 작품을 읽을 수 있으며, 우리 독자들도 그 느낌을 거리낌없이 표현할 수 있으니 새삼 자유의 소중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박인수, 이동원 두 분이 몇 년 전에 타계해도 그들의 목소리가 영원히 우리 곁에 남듯, 정지용 시인이 사거한지 한 세기가 가까워 와도 그의 아름다운 작품들은 여전히 한국의 혼을 공유하는 독자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스타북스의 이 전집은 몇 가지 특색이 있습니다. 이 책 표지만 봐도 카페의 ㅍ, 프랑스의 ㅍ에 ㅇ이 병기되어 있습니다. 이런 표기는 현대 한국어 맞춤법에서는 전혀 허용하지 않는 것인데, 작품 발표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살려서 대단히 멋스럽기까지 합니다. 사실 훈민정음 창제 당시(15세기)의 표기 관행은 자음 몇에 ㅇ이 붙어서(ㆄ), 그 자음이 이른바 순경음(脣輕音)임을 드러냈는데, 요즘 언어학 용어로 하면 일종의 마찰음(fricative)입니다. cafe, France의 f은 labial fricative인데, 이 음소들이 우리말 [ㅍ]과 다름은 명백합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어학에도 일정 조예가 있었던) 정지용 시인이나 당시(20세기 전반) 한국어(조선어) 문예지 편집진들이 더 합리적인 원칙을 가졌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 외에도, France의 n이 ㄴ으로 표기되었는데 이 경우 [ŋ]으로 발음되는 걸 모른 채 당대인들이 그저 문자대로만 읽은 오류로 생각됩니다(아니면 식민 모국인 일본의 표기를 그대로 따랐었든가). 여하튼 출판사의 이런 의도적인 효과가 현대 독자의 눈에는 그저 정겹습니다. 

시인의 시대가 지금과 거의 90여년 차이가 나다 보니 저런 표기뿐 아니라 어휘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꽤 낯선 게 많습니다. 책에는 그래서 어려운 단어 밑에 일일이 각주를 달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전혀 모르는 어휘라고 해도, 작품 속에서 우리는 그리 큰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편안히 읽습니다. 편안히 읽을 뿐만 아니라 시어가 주는 본연의 리듬과 감동까지 받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가 한국인이고 둘째 시인의 작품이 워낙에 잘 짜여졌다 보니 사전지식 없이도 본연의 의도가 그대로 잘 전달되어서가 어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가곡 덕분에 "성근"으로 그냥 받아들인 시어도, 이 책에서는 잡지 <조선지광>의 태도를 따라 "석근"으로 정했으며 다만 각주에서 성근, 석근 각각의 경우에 시에서의 맥락이 어떻게 달라지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p160에는 작품 <절정(絶頂)>이 소개됩니다. 아마 고교 교과서에는 잘 실리지 않았던 작품이겠습니다. 절정이라는 제목을 가진 가장 유명한 작품은 이육사의 시이겠습니다. 나붓기오(나부끼오), 섰오(섰소) 등 종결어미도 오늘날 우리가 쓰는 원칙과는 무척 다른 결과물들입니다. 제2행의 주사(朱砂)는 아래 각주에 상세히 뜻이 나오지만, 당시에는 여성의 입술에 오늘날의 립스틱처럼 바르던 물질이었습니다. 철새를 "기후조"라고 쓴 부분도 무척 흥미로운데 저는 심지어 1970년대 한국 현대 문학 작품에서도 이를 줄여 후조(候鳥)라 쓴 경우를 자주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어휘를 당시 일본어 corpus에서 수입된 것이라기보다, 더 오래된 중국 기원 한자어로 봅니다. 

정지용과 동갑이었던 소설가 채만식은 그의 단편 <치숙(痴叔)>에서 조선 여성과 이른바 내지(일본) 여성을 대조하며 전자의 열등성을 너절하게 설파하는 1인칭 주인공을 내세운 적 있습니다. 물론 채만식이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진 건 아니고 식민화가 진행되며 본연의 혼까지 빼어놓고 사는 한심한 인간상을 반어적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이 책 p232를 보면 제목이 "우리나라여인들은(띄어쓰기가 없습니다)"인데, 조선 여인들의 미덕과 아름다움을 절절한 형용어구들로 기막히게 묘사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이족의 철제 하에 얼마나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습니까. 그 상황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니 구십 년 후에 읽어도 눈물이 핑 돌 정도입니다. 일부 못난 세력이 악질적으로 성별 갈라치기를 하는 요즘, 제발 이런 작품을 교과서에 좀 실어서 젊은 세대가 반대 성별에 대해 근거없는 적대감, 혐오심을 갖지 않게 도와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표기법은 발표 당시의 것을 살렸기에 더욱 맛이 잘 살고 시대 분위기까지 간접으로 풍기게 합니다. "오월ㅅ달"처럼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사이시옷 쓰임도 눈에 확 띄어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표지 안쪽에 실린 정지용 시인의 사진을 보면 그대로 21세기에 모셔 와도 여성들이 환호할 만한, 이지적이고 단정한 외모입니다. 예쁜 책 장정과 잘 조화되어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한눈에 지성인임이 느껴지는 그였기에, 그 작품들도 더욱 강렬한 매력을 풍깁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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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 한달 완성 일본어 말하기 Lv.3 한권 한달 완성 일본어 말하기 3
최유리.시원스쿨어학연구소 지음 / 시원스쿨닷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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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스쿨에서 펴낸 일본어 시리즈를 여태 여러 권 읽고 리뷰를 써 왔습니다. 이 책은 말하기 교재인데 시리즈 중에서 레벨 1이 가장 낮은 단계이며 레벨 6이 프리토킹 수준의 가장 높은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 앞표지에 보면 "あなたに必要なすべてがこのー冊に!"라는 문장이 있는데, 뜻을 새기면 "당신이 필요한 모든 것은 이 책에 있다!"입니다. 물론 독자 입장에서는 시리즈 전체를 꼼꼼하게, 한 권을 한 달 안에 마스터한다는 자세가 따라줘야만 하겠습니다. 

p3의 머리말을 보면 "히라가나를 몰라도 되며, 문법보다 말로 배운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을 보면 우리하고 말 구조가 전혀 다른 인도유럽어족 원어민들도 아주 천연덕스럽게 한국말들을 잘합니다. 그들이 한국어 문법에 통달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한국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표현의 묘한 면과 자연스러운 발음을 배워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말과 매우 닮은 일본어를 배울 때 구태여 힘들게, 문법 위주로 고통스럽게 학습할 필요도 없지 않겠나 생각도 됩니다. 입말 위주로 원어민 발음(mp3)을 듣고 반복적으로 따라해 보면, 이 단계에서 배워 줘야 할 표현들은 이 책의 계획표대로 차분히 따라갈 때 충분히 학습자 몸에 배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레벨 3 교재는 학습자가 앞 교재들의 내용을 충분히 잘 배우고 따라왔다는 전제 하에 내용이 진행됩니다. 교재는 마치 저자 최유리쌤이 독자에게 이야기를 현강에서 건네듯이 차분한 대화투로 전개됩니다. part 03을 보면 총 4주차 코스를 전제로 해서 1주차 3일째에 배울 내용들입니다. "3그룹 동사의 て형은 불규칙적으로 활용된다고 배웠습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내용은 레벨2에 나왔었습니다. 일본어도 우리말과 비슷해서 몇 가지 불규칙 활용형이 있는데 이게 비원어민 입장에서는 너무도 어렵죠. 책에서는 "하고, 해서"라는 활용형이 "하다"는 기본형으로 바뀌는 게, 이 일본어 3그룹 동사에서 "して"가 "する"로, 來て(きて)가 來る(くる)로 바뀌는 것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이 내용은 원칙을 아는 것보다, 입으로 소리 내어 3그룹 동사 변화형을 몇 번이고 소리내어 반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회화에서 아무래도 여러 번 반복해서 따라하고, 이것을 자기 귀로 들어서 계속 머리에 맴돌게 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어학은 그저 반복, 반복이 중요하며 반복 학습 끝에 입에 안 떠오르는 표현은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6강에서 부탁의 표현을 배우는데 "~해 줘"라는 뜻입니다. "사 줘"는 買って(かって)이며, 책에서는 이 て형 동사가 "그 자체만으로 이거이거해 줘,라고 반말로 명령, 부탁하는 표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좀 정중한 표현은 어떻게 말하는가? て에다가 그대로 "ください"를 붙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아무리 일어 첫 코스만 배우다가 중도에 그만둔 사람이라고 해도 익숙할 만한데 이제는 전체 체계 안에서 정확히 어디에 해당하는지 배울 필요가 있겠습니다. 

모든 파트에서는 살펴보기, 연습하기, 응용하기, 말해보기 체제로 진행해가며, 반복이 필수니까 학습자에게 반복은 시키되 지루하지 않게 다양한 그래픽(일러스트)도 넣어가며 학습자들을 이끕니다. 또 매 챕터 뒤에는 오모시로이 니홍고(おもしろい にほんご. 面白い日本語)라고 해서, 일본어에 관한 재미있는 상식을 알려 줍니다. 예를 들어 p98(파트 10)에서는 오사카, 교토에 대해 여러 흥미로운 상식을 가르쳐 줍니다. 또 5챕터씩이 끝날 때마다 "실력 업그레이드"라고 해서 문장 복습, 변형된 다른 예문 소개, 추가 단어 적용 등을 제시합니다. 추가 단어 표를 보면 색깔별로 구분을 해 놓았기 때문에 눈에 잘 들어옵니다. 

파트 23에서 い형용사의 변화 표현을 배웁니다. 형용사에다 적당한 어미를 붙여 ~게 되다, 라는 뜻을 갖게 하려면 먼저 い를 떼어 내고, くなります를 붙인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강해집니다, 라고 하려면 强くなります(つよくなります)라고 하면 되는데 뜻은 (당연히) "강해집니다"가 됩니다. 다음 페이지에 바로 "~지고 싶습니다"를 배우는데, 앞에 나온 强い을 활용시켜 보면, 强くなりたいです가 되겠습니다. 밑에 다른 동사들을 활용하여 다양한 표현들을 배우는데 편집도 산뜻해서 덜 지루하게, 뭔가 머리에 잘 들어오는 느낌입니다. 

*시원스쿨에서 제공한 교재를 공부하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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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전영애.박광자 옮김 / 청미래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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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르브룅은 한때 왕족, 귀족의 초상화 커미션을 도맡다시피했던 화가였습니다. 마담 르브룅의 나이 사십대에 터졌던 세계사적 대사건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었습니다. 물론 그녀는 혁명 이후에도 자신의 탁월한 솜씨와 유럽에 두루 퍼진 인맥 덕에 큰 고비 없이 천수를 누린 편에 가까웠습니다만 개인적인 크고작은 고뇌까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화풍은 30년 전쟁이나 종교개혁 후에도 오히려 더 큰 경제적 풍요를 향유했던 프랑스의 활기 그 자체의 산물, 바로크, 로코코의 정수를 담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청미래에서 올해 새로 펴낸 이 리커버판을 보면, 마담 르브룅의 화사하고 섬세한 작품 세계의 핵심, 대표작이라 불러 지나치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그녀에게 궁정 화가로서 결정적인 명성을 얻어다 준 게 이 작품이었습니다. (큰 의미는 없으나) 마리 앙투아네트와 마담 르브룅은 나이도 동갑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 많은 상념이 떠오릅니다. 혁명 발발 6년 전에 그려졌는데 그린 르브룅이나 그려진 왕후나 28세였을 때입니다. 오늘날 28세의 여성들과 비교하면 다소 나이 들어 보이는 느낌인데, 표정에는 심지어 이처럼 편안한 일상의 스탠스에서도 어떤 위엄이 풍깁니다. 그 어머니의 딸이라서 당연하긴 합니다만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와도 닮았습니다. 그러나 황후의 경우 본인부터가 불세출의 군주 기질을 갖고 태어난 만능인이었으며 그 내면의 능력이 위엄으로 겉모습에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이겠지만, 28세의 철모르는, 정치적으로는 더욱 서투르기 짝이 없었던 그 딸이 뭘 안다고 (덩달아) 저런 표정을 지었는지 사실 딱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겠습니까. 왕족의 운명이 본래 그런 것을. 없는 위엄이라도 지어서 표현해야죠.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서는 오히려 21세기 들어 더 다채로운 평가가 나오는 듯합니다. 프랑스 대혁명 자체가 구시대 전근대의 썩은 문짝을 걷어차고 새 시대를 확립한 대사건이라는 데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었던 편이었고, 앙시앙 레짐의 적폐를 모두 책임지고 상징하다시피한 루이 16세 왕 부부에 대해 모든 오명이 쏟아지는 건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과연 마리 앙투아네트가 죄를 짓고 죽었는지에 대해 적잖은 회의론이 제기됩니다. 아예 프랑스 대혁명 자체에 대해서도 새로운 증거와 사료를 바탕으로 프랑스 본토에서조차 회의적 시각이 제기되는 터라 왕비 개인의 평가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스테판 츠바이크는 본래부터가 박력있고 흥미로운 전기 서술로 유명했던 20세기의 문필가였고, 어떤 시대의 분위기나 경향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시각을 유지했었기에, 역사 연구가 더 진척된 오늘날에 읽어도 그리 어색하거나 위화감이 덜 느껴집니다. 무엇보다, 전기인데도 소설처럼 재미있습니다. 

p154를 보면 쥘 드 폴리냑 백작부인(=욜랑드 드 폴라스트롱)을 처음 보았을 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떤 느낌이었을지 츠바이크는 자신의 상상력을 가득 담아 서술합니다. 이때에는 백작부인이었지만 나중에는 남편의 작위가 공작으로 승급됨에 따라 공작부인이 됩니다. 이 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다섯 살이 많았는데 물론 마담 르브룅이 이 부인을 그린 그림도 있습니다. 이 부인은 나중에 프랑스가 왕정 복고(復古)를 이루고 나서 샤를 10세를 보필한 재상이었던 쥘 드 폴리냑 2세 공작(우리에게 드 폴리냑이라고 하면 이 사람이 더 유명하죠)의 모친이기도 합니다. p155를 보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부인의 빚도 갚아 주고, 가문을 공작으로 올려준 사실이 다 나오는데 어쩌면 이런 생각없는 총신 편애가 왕조와 체제의 몰락을 앞당겼는지도 모릅니다. 저런 행적들은 엄연한 팩트입니다. 다만 드 폴리냑 가문의 사람들이 귀족 특유의 품격과 인격, 적어도 매력을 충분히 갖추었는지는 또 별개의 이슈입니다. 1세 공작은 러시아로 망명하여 예카체리나 2세에게 농장도 하사받고 말년을 보냈으니 말입니다. 

아... 누군가가 자신을 뒤에서 조롱하고 비웃을 때 이에 오불관언 무시하는 태도(p192)를 보이는 건 과연 왕족다운, 황족다운 태도이긴 합니다. 드레스에 똥파리 몇이 앉았다고 분노를 가볍게 표출하면 그게 똥파리와 같은 격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린 헌트의 <포르노그라피의 발명>이라는 책을 예전에 읽고 저급하고 야비한 시중의 농간이 위엄 가득한 왕실도 거꾸러뜨릴 수 있었음을 처음 알았습니다. 생산의 주력으로 어느새 등장한 부르주아지가 제 역량에 걸맞은 대접을 못 받자 불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제3계급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었다(rien)! 무엇이라야 하는가? 모든 것이다(tout)! 이제 그들은 무엇을 바라는가? 그 어떤 것이다(quelque)." 시에예스의 너무도 유명한 선언입니다. ㅎㅎ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의 저 언명을 혁명 즈음에 접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제 출신 계급을 배신한 저 담대한 젊은 주교에게, 적어도 그 모후였으면 대갈일성으로 쏘아붙였을 만한 몇 마디가 혹 있었더라면 역사가 (설령 방향을 바꾸지는 않았더라도) 더 다채로워졌을 터입니다. 

이 책은 일단 츠바이크 원저의 완역판이라서 볼륨이 무척 두껍습니다. 게다가 독자로서는 생각지도 않게 각종 회화와 자료 사진들(올컬러)이 많이 실려 독자의 눈이 호강합니다.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 비엔나에서 종자를 빌려 베르사유에서 피어난 장미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대중의 흥미와 환호, 혹은 개탄을 이끌어내는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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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짧고도 사소한 인생 잠언 - 마흔,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처방
정신과 의사 토미 지음, 이선미 옮김 / 리텍콘텐츠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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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6월에 정신과 의사 토미님이 쓴 <1초 안에 고민이 사라지는 말>을 읽고 리뷰를 썼었습니다. 저자의 본국인 일본에서는 이 시리즈가 큰 인기를 끈다는데 그 전작이나 지금 이 책도 과연 읽으면서 그럴 만하다 싶었습니다. 모두 4챕터로 이뤄졌고 각 챕터마다 여러 꼭지의 좋은 말들이 실려서 우리 독자들의 마음음을 달래 줍니다. 특히 저는, 정신과 의사라든가 이 부류에 속한 다른 책들이, 으레 하곤 하던 말과는 크게 다른, 일종의 반전 매력을 풍기는 조언들이 꽤 있어서 책을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예전에 저는 어떤 지인의 동기분이 소속 모임에서 따돌림을 당한 일을 겪고 크게 분노하여 타 모임을 바로 주선해 주고 마음의 상처를 바로 잊을 수 있게 그 지인이 조치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기민하고 단호하게 잘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사자가 쉽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런 일은, 당사자가 확고한 자존을 가진 분이라면 별 타격 없이 넘어갑니다(따돌림 같은 유치한 짓을 한 자들이 물론 나쁜 거겠고요). 저자는 p46에서 이런 일은 그냥 쿨하게, 내가 저 사람들과 처음부터 잘 안 맞나 보다 하고 넘어가라고 조언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기도 해서, 내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라면 쿨하게 잘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아는 독자들은 따로 사정을 알지만, 저자는 한때 이보다 더 심한 일을 겪고도 결국 일어선 분이라서 이런 충고가 더 진정성 있게 와 닿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인싸"라고도 하는, 커뮤니케이션 잘하는 사람은 어느 집단 안에서나 인기가 좋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p72 같은 곳에서 이런 사람들이 꼭 좋은 사람들은 아니라고 알려 줍니다. 이런 사람들이 무조건 옳고 이 사람들에 의해 배척당하면 내가 잘못이었던 거다, 이런 생각을 단호하게 버리라고 조언합니다. 저도 중학생 때 반장한테 크게 면박당한 어떤 애가, 평소에는 제법 강해 보이다가 유독 그 일을 겪고 정말 서럽게 울던 걸 보고 의아했었는데 그 애는 그저 한 명의 친구한테 당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는 느낌이 지금 드네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인싸도 그저 한 명의 인간일 뿐이며 때로 억텐을 통해 분수에 넘는 영향력을 유지하려 애쓰는 불쌍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물며, 흐름을 잘못 타면 한순간에 아싸 내지 왕따로 떨어지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한테 타격을 받았다고 해서 그걸 "1인분 이상"이라고 과대평가할 필요는 전혀 없겠습니다. 다만, 나 역시 객관적으로 잘못한 부분은 없었는지 겸허하게 돌아볼 필요는 당연히 있겠지요. 

p120을 보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신경쓰지 말고, 내가 무엇을 지금 해야 행복해지는지를 먼저 생각하라고 합니다. 얼핏 보아서 "무슨 뜻이지?" 싶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짧게 덧붙입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생각해 보면, 남을 의식하는 사람은 자신이 남들의 생각을 다 계산해서 그렇게 행동한다고 여기지만, 사실 남들도 그 사람의 그런 계산은 다 읽어 냅니다. 결국 자기가 제 꾀에 넘어가는 셈인데, 반대로 남 신경 안 쓰고 자기 할 일 신명나게 하는 사람을 보면 아 저 사람에게는 진짜 뭔가가 있나 보다 하며 오히려 더 관심을 가지고 동경의 시선을 보냅니다. 이게 대중적 관심의 역설인데, 그런저런 사정을 떠나 순전히 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내 일에 전념하는 게 결국 승자의 선택 아니겠습니까. 이 말도 저자 자신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면 더 공감이 깊어지기도 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다툼이 없을 수 없고 가까움 사람 사이라고 해도 언쟁이라는 게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이 부분도 참 역설적인데, 언쟁이 없다고 그게 문제가 없는 관계가 전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일방 당사자가 꾹 참고만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이게 우리 나라도 약간 좀 이렇고, 특히 일본에서 자주 보이는 패턴입니다. 을의 입장에서 그저 자제만 하다가 어느 순간 문제가 크게 터질 수 있다는 건데, 설령 안 터진다고 해도 한쪽만 부당하게 화를 참는다고 그게 올바른 상황이겠습니까? 저자는 과감하게 말하기를 아니다 싶으면 그냥 터뜨리는 게 장기적으로 더 나을 수도 있다고 과감하게 충고합니다. 심지어 의도적으로라도 말입니다. 마치 막장드라마에서 불륜 파트너가 일부러 상황을 들키는 것과도 비슷한데, 물론 이런 걸 마냥 환영할 수는 없어도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p52를 보면 "지나침"의 미덕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지나침이라 하면 extreme이 아니라 lookover, pass를 뜻합니다. 친절한 사람들(그렇게 평가받는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받는 비결은 뭐냐, 친절하게 굴지 않고 따지고 다투고 상대를 뒤집어 놔야겠다 싶은 "건수"를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들이 착해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냉정하게 따져서 내 실리에 영향이 없다면 그냥 넘어가라는 겁니다. 만약 이렇게 안 하면 당사자가 당장 살아남기가 어려운 지경까지 갑니다. 깡패 앞에 서면 분노조절장애가 바로 치료된다는 우스개가 있듯, 괜한 일에 일일이 신경 곤두세우지 말고 사소한 일은 그냥 지나치는 게 현명한 선택이라는 뜻입니다. 

이 책이 재미있는 점은, 얼핏 보면 상처를 달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을 지르는 듯한 역설적인 충고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들이 무책임하게 그냥 지르는 게 아니라, 잘 살펴 보면 인간 심리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빛나는 진리들입니다. 책 전체를 통해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지나치게 잘 가꾸려고만 들지 말고, 때로는 자연스럽게 마음 가는 대로 흐르게 놓아두라"는 결론을 저는 마음에 남겨 두었습니다. 사람 마음은 engineering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겠죠. 잠언집 답게 말들이 짤막짤막하게 던져지면서도 울림은 묵직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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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호에 비친 내 얼굴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3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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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선생의 글들을 읽어 보면 어쩜 이렇게 많은 글을 쓰셨으면서도 중복되는 소재나 주장이 없는지 놀라울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책 표지에는 "마르지 않는 지성의 불꽃놀이, 현재진행형"이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비록 서거하셨으나 이렇게 많은 글들을 통해 독자들을 계속 만나시니 그의 인문 탐구 정신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 우리를 만날 것 같습니다. 

요즘은 유전공학이 발달하여 하플로그룹 추적을 통해 우리의 먼 기원이 어디인지 추정할 수 있습니다. p51을 보면 프리모리예, 즉 연해주에서 아득한 우리 조상(중 가야인)의 모계쪽 얼굴이 발견되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야라고 하면 한반도의 남부인데, 아무리 연해주 쪽과 교류가 고대에 잦았다고 하나 그 흔적이 발견된다는 게 신기합니다. 또 현재 일본인 혈통의 약 9%를 차지한다는 조몬인의 모습도 있다 하니 다시 한 번 놀라운데, 그처럼 한반도가 유전학적으로 다양한 이들이 혼재해 살았다는 근거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는 한반도라고 하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닫힌, 반도를 넘어 거의 섬에 가까운 지형이라고맠만 알았는데 이런 고대의 흔적을 보면 놀랍기만 합니다. 

본래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세력이 미미했던 신라가 기어이 삼국을 통일한 비결에 대해, 저 멀리 바이칼호 근방에 살던 나그네 민족이 경주에까지 흘러들어와 국제도시, 콘스탄티노플이나 하노이, 시안, 교토 등에 못지 않은(p64) 수도를 건설하여 세계로 문호를 오픈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어 저자는 고 김원룡 교수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경주 일대의 적석 목곽분이라는 게 시베리아 일대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매우 흡사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책에도 나오듯이 강인구 교수 같은 분의 반대견해도 소개됩니다. 다만 저자는 다시 최병현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신속한 이동이 핵심 목표였던 기마민족의 흔적이 뚜렷하다며 김원룡 교수 설에 찬동하는 편입니다. 

그전부터 서양 문명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두 축으로 하여 발전했다는 패러다임이 있었습니다. 이어령 선생은 잘 알려진 네 개의 사과 이야기를 꺼냅니다. 선악과, 트로이 내전을 촉발한 불화의 사과, 빌헬름텔의 사과, 뉴턴의 사과 등입니다. 이 이야기를 선생이 구태여 꺼낸 건 백인중심의 확고한 우월문명적 서사가 사실은 그리 단단한 기반을 갖춘 건 아니라는 반증을 서서히 꺼내는 포석으로 저는 해석했습니다. 책을 읽어 보면 드러나지만 사실 선생은 코카서스 단일 인종기원설에도 짙은 회의를 표시하는 쪽입니다. 

2011년 김호석 화백의 그림 <사유의 경련>은 눈을 지운 어느 유학자의 안경 쓴 모습을 담아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왜 눈이 지워지니까 더 많은 의미를 그림이 담게 될까? 그림을 봤던 사람들도 사실 이 이유 때문에 충격을 받았던 것인데 다만 이어령 선생처럼 이렇게 명쾌하게 문장으로 표현을 못 했을 뿐이겠습니다. 보통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여 그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며,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그의 영혼이 보유한 파괴력을 상징한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눈을 지웠더니 더 많은 메시지가 전달된다? 대단한 역설입니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를 담은 문장이기도 합니다. 

우리 문화재에는 예로부터 그 깊은 뜻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미소를 띤 조상(彫像)이나 회화가 많았습니다. 하긴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그 모델이 미인이라서가 아니라 대체 얼굴에 띤 저 미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놓고 의견이 다양하게 표출되기에 그렇게나 유명한 것입니다. 저자는 영산회상에서의 마하가섭 심심상인 고사를 들며 사람의 얼굴과 그 웃음이라는 게 천만 마디의 문장보다 더 많은 뜻을 품을 수 있음을 강조하는 거죠. 

저도 책을 읽으면서 감탄(탄식?)했던 게, 어떻게 아이한테 생김새를 칭찬하는 말 중에 "얘는 한국 애처럼 안 생겼어요."가 있는지 하는 구절이었습니다. 아니 애 엄마한테 이런 말을 하면 "그럼 동남아 애 같다는 소리에요?"라고 화내는 경우는 열에 하나도 드뭅니다. 혹여 정말 동남아 사람을 닮았다는 뜻이었다고 해도 일단은 뚜렷한 이목구비를 놓고 좋아하는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역시 날카로운 게, 요즘은 인위적으로 고친 이목구비는 뭔가 유흥업소 접객원 같아서 기피되는 풍조가 또 하나의 대세임을 지 는다는 점입니다. 이제 한국인이 경제적 풍요를 달성하고 어떤 미의 표준 중 하나로 한국 고유의 외모를 확립해 가는 중, 우리도 진정한 자긍을 갖고 무엇이 진정 보기 좋은 얼굴인지 떳떳한 생각을 키워 갈 때가 되었다는 뜻도 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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