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캐니언 정말 노아 홍수 때 생겼을까? FIELD TRIP SERIES 1
양승훈 지음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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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캐니언에 다녀오신 적 있습니까? 이름 그대로 장쾌한 스케일과 기괴한 형상에, 진정 "그랜드"란 형용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누구에게도 들죠. 본디 그랜드캐니언은 신대륙에 소재한지라 당연히 기독교도들을 몰랐을 테고, 기독교도들 역시 그랜드캐니언을 몰랐겠으며, 성경에 "감자"가 나오지 않듯 그랜드캐니언 역시 "홀리 스크립트"에 등장할 리 없습니다. 즉 그랜드캐니언은 애초에 "비블리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심 깊은 청교도들이 북미 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하고, 그때로부터 다시 한참이 지나 미국 중서부의 이 절경에 도달하고선, 그 신묘한 경관에 자연 신의 섭리를 덩달아 떠올리는 게 당연했지 싶습니다(말은 이렇게 했으나 유럽인으로서 최초로 이를 "발견"한 사람은 스페인 제국 신민이었던 켑틴 카데나스라고 책에 나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할 생각이 없고, 반대는커녕 흔연히 동참까지 하고 싶어집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보면 말라키아 수도사가 이런 말을 인용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늘은 위에, 땅은 아래에.
기적 중에 기적이로다."

하물며 이런 절경을 두고 어찌 섭리의 신통함을 연상치 않기가 쉽겠습니까(물론, 냉철한 지성으로 엔트로피의 랜덤 워크를 먼저 염두에 둔다면 그 역시 멋진 일입니다). 또, 미국 기독교인들은 그야말로 구절양장의 교리와 입장들을 지녔으며, 프로테스탄트라고 한들 결코 신앙 고백과 신조가 세세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유독, 극히 일부 근본주의자들만이 이 아름답고 웅장한 지형에 대해 왜곡된 의미를 부여하며, 성경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이 협곡의 역사가 불과 몇 천 년 전"이라는 반지성적 결론을 강변합니다. 그 몇 년 전이라 함은 노아의 홍수 시절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축자주의 입장을 취한다고 해서 모두 반지성적이라거나 극단, 편협의 비난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은총 중 하나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 지성의 작동 결과, 우리는 현재 우리가 발 디디고 선 지구의 나이, 우주의 이력이 대략 어느 정도인지 상당한 논거를 가지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미래에 또 어떤 과학적 천재가 나와 인류에 새로운 눈을 띄워 줄지야 아무도 모르긴 하겠으나, 현 단계에서 가장 뻬어난 지성들이 합의를 어느 정도 이룬 이상 단번에 뒤집힐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이만큼이나 인식의 지평을 넓힌 것 역시, 신앙인이라면 그에 대해서도 "전지전능한 신의 은혜"라 못 새길 바 없습니다. 이 역시 넓은 의미에서 신이 인간에게 계시한 바인데, 어찌 가볍게 기각,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현재 자연과학의 성과가 이처럼이나 힘들여 일궈 놓은 바를, 문자 그대로 자연과학 지식을 가르치는 게 주 목적이 아닐 성경 구절의 포괄적 문언 몇 마디를 들어 배척한다면, 이는 상당히 우려스럽고 개탄스럽기까지 한 현상입니다. 이른바 창조과학이 한국에서 일정 반향을 일으킨 건 대략 삼십여 년 전입니다. 여기 가담하신 분들이 한국(그 교육 열풍 극성스럽기로 유명한)에서 단연 몇 손가락 안에 들만한 지성인들이 많았기에, 그 충격은 상당했습니다. 지금 이 책의 저자께서도 (유감스럽게도) 그 그룹에 열성으로 참여하신 분이었죠.

학문적 성취 높은 정통파 물리교육자이며 동시에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는 젊은 시절 정말로 신앙과 학식의 조화로운 지점을 한때 발견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창조과학이나 근본주의는 그시절이나 지금이나 결코 기독교의 주류였던 적이 없습니다. 계몽주의와 이성의 재발견 역시 처음에는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주도했고, 교회의 주류는 처음에야 마음이 불편했겠어도 인류 문명의 도도한 발전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이들 상당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진화론의 학습에 대해 별 갈등을 못 느낍니다. 교단의 주류가 이를 승인하고, 그 이전에 상당수 신도들이 넉넉히 세속화된 이유도 한몫 합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만 저자께서 통렬한 반성과 회심의 계기로 이 책을 저술하셨기에, 독자로서 공감하며 그 취지에 대해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고요.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을 자연과학, 그 중에서도 지구과학 부교재로 아주 유익하게 읽었다는 점 고백하고 싶네요. "부교재"라기보다, 외려 표준적 교과서보다 더 설명이 자세하고 도판이 미려하여, 그간 긴가민가했던 지식 사항이 말끔히 정리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랜드캐니언의 사진, 연구 결과가 세심히 반영된 도판, 그래픽 등은 어디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그래픽은 텍스트만큼이나 작성자의 학식과 명철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라, 막힘 없이 훤히 진상을 뚫는 대가의 명강의를 청취한 느낌이었습니다.

최고 수준 과학자이기도 한 저자이시니만치 명칭 배경에 대해 어떤 정서적 거부감(이교풍이라는 등)을 느끼진 않으시겠으나, 너무도 이질적인(서유럽인 기준으로) 힌두의 신들 이름(이들 중 상당수는 근래 들어 부쩍 컨택이 잦은 인도 문화 유입 때문에 친숙하기도 합니다), 북미 원거주인 토착어 등을 딴 지층 명 때문에 당혹감이 적지 않다는 솔직한 느낌도 실려 있어 독자로서 웃음을 머금게도 되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무슨 잘 알지도 못하는 브리튼 섬, 스위스나 독일의 산맥 이름을 딴 학술명칭이 처음에야 생경한 건 당연하죠.

Know the Canyon's history, Study rocks made by time.

무슨 소리냐 하면, KTCHSRMBT란 두문자를 순서대로 외우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열풍인 공시(공무원 선발 시험)에서 주목을 받곤하는 두문자 암기법이 떠오르기도 하죠(사실 본질이 같아요). 카이바브, 토르웹, 코코비노 사암(sandtone. 沙岩), ... 하는 식의 9대 주요 지층(그랜드 캐니언의)을 일단 암기하고 있어야 연구의 프레임이 잡힐 텐데, 전문가들도 정작 이게 쉽지 않은가 봅니다.

상식적으로도, 대홍수가 났다고 하면 넓고 얕은 하상(河床. 강바닥)이 형성되지 싶습니다. 반면, 콜로라도 강과 그 아래 캐니언은 전형적인 구불구불 사행천입니다. 사행천이 무엇인지는 중학교 2학년만 되어도 다 배우는 내용이죠. 우리들 인간 개체의 평균 수명이 워낙 짧다 보니, 수백만 수억년은 고사하고 몇 천 년 단위의 변화마저도 이해가 어렵고, 모르면 진리 앞에서 겸손해지긴커녕 오히려 짧은 지식을 들이대며 당치도 않은 만용을 부리기 일쑤입니다. 근본주의자이건, 그 반대로 무지하기 짝이 없는 안티 기독교 분자들이건 이런 어리석음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랜드 캐니언은 지질학과 지구과학에 많은 연구 과제와 영감을 던져 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독립된 연구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간 5, 6백만년 전 형성설이 확고한 주류설이었으나, 대략 십 년 전에 1700만년 전이라는 입장이 새로 대두했다고 합니다. 왜 방사성 연대 측정법으로 명확하게 못 가리는가 하면, 이런 계곡의 경우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에 어느 대목에서 연구자들이 함정에 빠지거나 오도될지 장담을 못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방법론이 발전하거나, 새로운 법칙이 정립되기도 합니다. 자연 과학 어느 분야라도 흔히 패턴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진지한 과학자들 사이에선 "몇 천 년 전" 설이 더이상 고려대상이 아닙니다만, 여전히 한국의 "창조과학자들" 중에서는 끈덕진 반론을 펴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튼 상대가 논리로 반격해 오면 정당한 논리를 동원하여 논파, 혹은 설득할 필요가 있고, 무작정 권위만을 앞세워 묵살하거나 과학 외적 논변으로 뭉개고 드는 건 안될 일입니다. p202에서 일단 저자는 반대측 선교사분의 입장을 예거하며 그에 대한 반대논리를 전개합니다. 사실 독자야 이미 진부를 마음 속에 확신합니다만, 그래도 무작정 대세에 기대는 건 비겁한 태도 아니겠습니까? 천에 하나 상대측에 일말의 타당성이 있을 수 있다 가정하고(귀무가설?), 일단은 경청하고 듣는 게, 이 저자분의 결론(학계 주류설)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양측에서 동시에 인용하는 R G 셰퍼드 박사의 논문 내용도 <사이언스>에 등재되었던 것이라 우리 독자들에게는 그 구체적인 전개에 대해 큰 흥미가 생깁니다. 셰퍼드 박사의 결론은 유속(流速)이 증가함에 따라, 측방침식뿐 아니라 하방 침식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건데(p204), 홍수가 얼마든지 깊은 강도 만들 수 있다는 게 이를 인용한 선교사분의 요지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실험은 사전에 인위적으로 수로를 만들어 두고 실시한 실험이므로, 애초에 홍수의 효과를 시뮬레이션하는 논지와 무관하다고 재반박합니다. 여튼 논쟁 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자연과학 지식은 많다고 헤야겠습니다. 또, 제아무리 한쪽 입장이 진리라는 쪽으로 심증이 기울어도, 그 과정 하나하나에 절대적 타당성이 부여된다는 게 역시 쉬운 일은 아니라는 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 정직한 느낌으로는 저쪽 반박(창조과학 측)도 만만치 않았다는 편이었거든요. 이겨도 뭔가 많이 맞고 이긴 기분이랄지요. 하긴 일부 맹목적 기독교 안티들처럼 뭘 모르면 그저 목소리만 높이고 악다구니만 써도 창피한 줄을 모르므로 편하긴 합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말입니다.

그랜드 캐니언은 협곡 지형을 가리키기도 하고, 그 협곡을 흐르는 물줄기를 가리키기도 하는 맥락으로 이 책에서는 쓰입니다. 지류, 지지류, 지지지류 등 다양햔 층위의 흐름에 대해서도 독자는 유의하며 책을 읽어나가야겠습니다. 저자가 거론하시는 핵심 논거 중 하나가 지류와 지지류(혹은 그 하위 레벨)가 만나는 "각도"인데(라디안 단위가 아니라 우리가 흔히 쓰는 "도[度]"입니다), 표본으로 대표성을 잘 갖춘 케이납 크릭의 예를 듭니다. 왜 이들은 90도 이상의 둔각으로 만나는가? 오랜 세월에 걸친 느린 침식 과정이 결정적 형성 요인이었음을 증명한다는 저자의 논변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저자의 태도는 마치 존 스튜어트 밀의 리캔테이션이나 파스칼의 겸허한 고백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책 말미에는 도널드 트럼프 같은 성향의 정치인을 지지하는 일부 근본주의 진영에 대한 거듭된 우려, 복음주의와의 차별성 등에 대한 소신 개진이 있는데, 이 역시 진지하게 읽고 독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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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흉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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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편은 이미 1992년에 발표되었고, 한국에서도 같은 출판사에서 몇 번 출간된 적 있습니다. 이분이 워낙 다작을 하시는 분이라 어지간한 팬의 입장에서 챙겨 읽는다고 하는데도, 전에 읽었던 작인지 여부가 간혹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10페이지를 넘길 즈음에서는, 아스라이 십수 년, 혹은 수십 년 전의 감흥(개인화된)이 그 줄거리에 앞서 먼저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최소한 이분의 작품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편 세계 스펙트럼은, 한 축에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놓여 있고, 다른 반대편 축에 <질풍론도>가 자리했다고 봐도 됩니다. 잔잔하고 소박한 톨스토이풍 우화에서 시드니 셸던 스타일의 정신없는 스릴러까지, 어찌보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대중에게 가장 손쉽게 어필할 통속 문학의 빤한 경로를, 욕심 가득히 만물상 좌판처럼 벌인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는 팬이건 무덤덤한 축이건 간에, 이분에게 애써 그런 부당한 곡해 프레임을 씌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게 봅니다(어지간히 속이 배배 꼬인 못난 늙은이의 나잇값이 아니고서야 말이죠).

이유가 뭘까요? 그는 어떤 얘기를 늘어놓아도 장르에서 지키는 최소한의 규칙을 "모범적으로(참 모범적입니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인데)" 준수하며, 말미에는 언제나 따스한 주제의식을 집어 넣습니다. 이게 당치도 않은 가식이어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작가, 작품도 따로 있습니다만, 이분의 시도는 그리 요란, 유난을 떨지 않고 어찌보면 좀 진부한 테마인데도, (우리 독자들이 평범, 범속해서인지) 끝에 가선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져 옵니다.

저는 그 이유를 단 한 마디로 요약하고 싶은데요. 그건 "이분이 본래 마음이 착한 사람이어서다."입니다. 세상을 따스하게 보고 싶고, 품고 싶고, 가능하면 낙관하고 싶으며, 결국은 좋은 사람이 이기고 잘 되는 걸 보고 싶은 작가의 착한 마음은 거의 어떤 작품에서건 표현됩니다. 또 그 진정성은 독자에게 거의 언제나 소통에 성공합니다. 소통 성공의 필요충분조건은 진정성이겠으므로 결국 그말이 그말이긴 합니다만.

그냥 착하기만 하고 재미는 좀 떨어지느냐, 그건 뭐 누구라도 동의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히가시노 상 하면 첫째가 재미인데 뭔 소리냐"며 대뜸 반박이 날아올 겁니다. 이 작품은 제가 초회독 할 때도 참 정신없이, 말 그대로 페이지터너에다 몰입할 수 있던 그런 장편이었고, 세월이 좀 지나다보니 플롯이 발전할 때마다 느끼던 흥분, 기대는 다시 재생되어도 줄거리가 좀 가물가물해서 더욱 즐거웠던 재독이었습니다.

일단 이 장편은, 아마도 한국 독자(혹은 영화 팬이라고 해도)들이, 이런 식의 스릴러 공식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을 무렵에 (작가분의 본국에서) 발표되었고, 한국에 번역되었을 터입니다. 이 정도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와 사람을 이처럼 미치게 몰입시키는 명작"이라며 대중 문화에 아직 세련된 길이 덜 든 이들 넋을 빼놓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시작부터 대체 뭔 상황인지 독자가 감도 채 잡기 전에 화들짝 장면을 바꾸고 충격적인 진상을 드러내며, 이 테크닉이 효과적으로 남긴 서스펜스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스테이지의 강약 세팅이 바뀝니다. 시작이 이리 현란하니, 앞으로 독자는 뭘 기대했건 그 이상의 플롯 롤러코스터를 탑승할 수 있으며, 이 게임에서 무슨 수를 두건 지레 돌을 던질 각오에 오히려 쾌감을 느낍니다.

미국 장르물에서 영향을 받았건 안 받았건, 그 구조와 상상이 과연 얼마나 독창적인 잎맥과 물관을 지녔건 간에, 재미있게, 슬프게, 오싹하게 책 한 권 잘 읽은 독자는 개운해진 제 감정을 뿌듯해하며 아무것도 묻거나 따질 마음이 안 듭니다. 여튼 확실히 정화된 내 마음이니 구태여 잡된 생각을 서둘러 들일 이유가 없겠는데, 위대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작가로서의 선의와 도덕성, 천진한 창작자의 무구한 심성만큼은 어느 문호가 부럽지 않은 그이기에, 작품의 완성도 따위보다는 (문학 본연의 기능인) 소통과 감동을 언제나 우리는 쌍수 들며 환영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확신합니다. 이보다 더 공공연한 비밀, 단단한 컨센서스도 없고, 이것이야말로 히가시노 상이 보유한 "아름다운 흉기"입니다. 부디 아껴서들 읽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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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도쿄 - 여행을 기록하는 아주 특별한 방법 YOLO Project 두근두근 여행 다이어리 북 시리즈 7
21세기북스 편집부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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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또 어디를 향한 것이건 가슴이 설레는 체험입니다. "가깝고도 먼 나라"란 표현을 흔히 쓰지만, 사실 뱃길로건 항공편으로건 오가는 데에 불과 몇 시간이 채 안 걸리는 일본이야말로 물리적으로는 그보다 더 가까울 수 없는 행선지입니다. 근래 정부와 지자체 차원의 대대적인 홍보라든가, 민간에서 발 벗고 나선 산업 전체 레벨의 "혁신"이 있었기에, 일본에 대해 "마음으로 먼 감정"을 느끼는 이들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참으로 많은 분들이 다녀오신다는 생각이 부쩍 자주 듭니다.

일본은 여튼 고유의 문화색, 개성이 꽤 강하고, 우리처럼 외세의 침략을 자주 받지 않았기에 전통 유산이 많이도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도쿄는 번화한 도회, 현대 산업의 중추, 막부 소재지의 삼백 년 역사가 남긴 매력이 두루 겹쳐, 우리 한국인들뿐 아니라 세계 도처로부터 여행객을 많이도 끌어모으는 곳입니다. 어느 여행인들 "두근두근거리지" 않을 곳이 없지만, 동경 같이 살뜰한 멋을 두루 갖춘 곳은, 각별히 마음설레하며 1) 치밀한 계획을 짜고, 2) 여정을 꼼꼼히도 메모하여 두고두고 추억으로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이 책은 여행 다이어리입니다. 이 시리즈 "두근두근 여행 다이어리" 중에서는 일곱째 권인데, 일본 도시를 다룬 것으로는 "오사카&교토"편에 이어 두번째이며, 아시아 여행지를 주제로 한 다이어리 중에서는 홍콩 편도 앞세운 세번째입니다. 표지는 보시다시피 진분홍의 원 톤인데, 오사카&교토 편이 초록이었던 것과 대조됩니다.

첫장에는 모눈종이 같은 형식 위에, "이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리"해 볼 것을 독자들에게 권합니다. 저 역시 넉 달 뒤 여행을 앞두고, 어차피 아무도 안 볼 나만의 기록이란 전제 하에 몇 마디를 적어 보았습니다. 가서 어딜 둘러보며, 경로를 정할 때는 뭘 기준으로 삼을지 같은 계획을 짜기 전, 이미 현지에서의 내 마음가짐이 어떤 감상과 기분에 젖을지 미리 상상하거나 미래의 자신에 감정 이입도 하게 되었습니다. 본디 여행의 설렘이란 그런 거죠. 비장하게 순서를 매겨가며 감개어린 투로 털어놓는 "목적 선포"와는 그래서 여행의 경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뭘 상상해도 신 나니까요.



한국과 달리 교통비가 많이 비싼 편인 일본이기에, 선불 충전식 카드 하나 정도는 구비해 둬야 하겠습니다. 책에는 "하루 일정에 이동이 많기보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경우라면 1회권 구매가 더 유리하다"고 알려 줍니다. 또, 여행 계획이 완전치 않은 여행자에게는 도쿄 프리 승차권을 권해 주는데, 기왕 이런 예쁜 다이어리까지 입수한 이상 계획 하나는 원 없이 세울 생각입니다. 두번째 여행은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흥 따라 발걸음 따라 다녀올 요량이라도 말이죠.



철도역이건 공항이건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찾는 게 기본 자세이며, 꼭 있게 마련인 마감시각을 몇 분 앞두고 허겁지겁 달려오는 분들에 대고 혀를 차기 일쑤이지만, 어디 그분들이라고 매번 지각대장이었겠습니까. 일생을 두고 작은 약속 한 번 어겨본 적 없는 성실한 분들이 하필 그날따라 책임 못 질 사정이 생겼을 수도 있죠. 여튼 이런 운 없는 경우가 내 머리 위에 혹여 떨어진다면, 그때를 대비해, 나리타 공항의 세 군데 터미널을 각각 어느 항공사가 자주 이용하는지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합니다. 이런 세심함이 마음에 참 들었습니다. (물론, 우선 기억할 곳은 1터미널이라는 게 결론입니다)



아키하바라를 두고 덕후들의 성지라고 합니다. 사실 저는 덕후 소리를 듣기 싫어 그러는 게 아니라, 그리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또 자기 취향은 생각 않고 남들 따라 명소 위주로 일정 짜는 것도 좀 어리석은 선택이긴 합니다. 허나 첫번째 여행이니만치, 가급적이면 이런 책에서 권하는 표준적 코스를 "무난하게" 고를 생각입니다. 일본과 가까운 부산도 플라모델이 큰 유행인 고장이지만, 어디 해당 문화의 본거지에서 구매하는 상품은 뭐가 다를지도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부산에서 자란 사람이면 어린시절 친구따라 잔뜩 컬렉션 마련했던 추억 없는 이가 아마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이 취미를 졸업한지 너무도 오래고, 심지어 취미 가진 사람 만나본지도 꽤 된 터라....)



얼마전 일본의 평범한 중년 회사원이 쓴 트위터 소설을 읽었습니다만 그 책에도 배경으로 또 등장하는 롯폰기 역시 들러볼 필요가 있겠죠. 새로운 부촌으로 작정하고 개발된 "롯폰기 힐스"는, 그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 미국 서부에서 모두의 선망 대상인 "베벌리 힐스"에서 따왔음이 분명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체 어떤 감각, 재능, 매력을 지녔기에 이처럼 화려한 인생을 즐길 수 있는지, 가볍건 심각하건 간에 자극 좀 받아보는 것도 유익할 터입니다. 이런 자극은 같은 국내인들에게서 받는 것보다 이처럼 타국에서 치르는 게 정신건강상 유익하겠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ㅎㅎ


"일본의 과거부터 현재를 모두 볼 수 있는 매력적인 곳." 도쿄 여행 다이어리인 이 책이 도쿄를 규정하는 말입니다. 아사쿠사와 하라주쿠를 고, 금 대표 구역으로 나란히 두는가 하면, 야경의 장관으로는 도쿄 타워와 레인보우 브리지를 듭니다. 아마 이 책이 진분홍 표지를 예쁘게 걸친 이유와도 관계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합니다. "와규, 스시, 라멘은 물론이고 커피나 맥주까지 모두 맛이 좋다." ㅎㅎ 정말 그럴까요? 객(客)을 반가이 맞아주는 주인의 마음이 넉넉하니 손의 입맛도 절로 돋우는 게 아닐지 추측합니다. 뭐 맥주 맛 좋은 거야 한국에서도 일찍부터 인정, 승복한 사실이지만요.



블루 보틀 커피의 원산이 미 서부인 줄은 알았으나, 아시아에서 이를 최초 수입한 나라가 일본인 줄은 몰랐습니다. 책에서는 "최초일 뿐 아니라 유일하다"고까지 말하는데, 일본은 본디 타 문화의 근사한 구석을 앞장서 수용하되, 묘하게 자기 식대로 변용한 후에야 직성이 풀리는 묘한 기질을 가지기도 했죠. 책에서는 "(라인업이) 조금은 상이하나 메뉴와 맛은 거의 같다"고 전합니다. 특히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좋아 대대적으로 오픈했다는 사장님 말씀인데, 좀 색안경을 끼고 보자면 바로 이런 게 일인들의 기발하고 은근하며 민첩한 상술입니다. 진재를 겪고도 오히려 근래 더 관광 진흥에 열을 올리고 재미도 톡톡히 보는 그들에게서, "혁신 의지와 창의성"까지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전에는 "전철에서 망가든 뭐든 일단 책을 보고 앉은 일본인들이 놀랍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한국인들도 워낙 자기계발에 열심이라 두세 사람 건너선 꼭 한 명쯤이 책을 보는 게 흔한 풍경이며, 우리가 어느 나라에게건 뒤처질 바 별로 없습니다. 허나 책사랑의 문화가 어디서 닮았고 어디서 갈라지는지 확인하는 것도 "책 덕후"에게는 적지 않은 기쁨이겠는데요. 이런 이들을 위해 책에서는 pp. 48~55에 걸쳐 책 명소를 자세히 소개해 놓았습니다. 계획을 어떻게 짜건, 예산의 한계가 어디이건 여기는 꼭 들를 생각입니다. (근데 이러면 앞에 했던 장담과 살짝 대의가 어긋나기는 한데... 에휴 뭐 예비군 훈련 가는 것도 아니고 내 돈 들여 내 여행 다니는 건데 말 좀 어긋난들 뭐 그리 큰 흉이겠습니까)

"당신은 참 좋은 사람 같군요."

이 글귀는 영화 <동경 가족> 중에 나오는 대사라고 하네요. 미유키도리를 알리는 표지판 위에 눈 지긋이 감고 터줏대감마냥, 혹은 초자연적 능력을 지닌 가고일마냥 폼 잡고 앉은 고양이 사진이 배경이라 무척 인상적입니다. 아니면, 나쓰메 소세키의 그 유명한 고전 <나는 .....>도 생각나고 말입니다. 나는 혹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진정으로, 어떤 계산이 개입하지 않을 순간에 들어본 적 있습니까? 물론 정 많은 한국 사회에서 친구들 간에 흔히 오가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떤 상황, 어떤 맥락에서 문득 별 일 아닌 양 귀에 꽂힌 적 있다면, 새삼 행복감에 젖을 만도 합니다. 내가 스치듯 방문한 처음의 도쿄가 "참 좋은 도시 같았으면" 좋겠고, 도쿄도 나를 "그래도 괜찮은 것 같은 길손"으로 기억해 줬으면 훈훈할 듯합니다. 이 예쁜 다이어리가 증인 노릇 해 줄 겁니다.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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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새롭게 믿는다면 - 다시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교회와 크리스천이 가져야 하는 새로운 생각
박광리 지음 / 패스오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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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라면 육신을 갖고 사는 생(生)에도 "거듭남"이 필요하고(p253), "믿음'에도 역시 "새로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실 믿는다는 행위가, 그냥 시간만 오래 끈다고 믿음이 깊어지는 게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반성 없고 타성에만 젖어 끌고 가는 신앙은, 초심이 사라지고 형식과 건성만 남아서는 믿음의 순도를 더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집과 편견 역시 갱신, 혁신의 계기를 가지지 못해, 자칫 잘못하면 오도된 믿음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다른 어떤 행위나 신념도 그렇지만, 신앙 역시 "새롭게 믿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겠습니다.

어떤 신앙 서적이든 그 무게가 가벼울 수야 없습니다만, 이 책은 본문에 담긴 권고와 단어와 문장의 무게가 상당해서, 페이지를 넘기는 데에 시간이 꽤 오래 걸렸습니다. "이렇게나 심각한 책이었던가?" 책 중에는 그저 달콤한 말로 독자에게 값싼 위안을 시도하는 게 있고, "찔려서" 함부로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 중 후자에 속합니다. 독자들이 믿어 왔던 건 그 중 상당수가 그릇되었었구나, 그건 믿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을 모독하는 짓이었구나, 그만큼이나 오랜 시간 동안 믿어왔음에도 방향이 잘못되었더랬구나, 이런 생각 때문에 아마 이 책이 쉬이 넘겨지지 않는 게 많은 분들의 공통된 체험이지 싶습니다. 어떤 말씀은 폐부를 찌르는 듯 아프고, 어떤 말씀은 감긴 눈이 뜨이는 듯 시원하고, 어떤 말씀은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독자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하긴 없는 시간을 내어 책 한 권을 읽고, 독서 전과 후가 이 정도는 달라지고 감흥이 느껴져야 마땅한데, 우리 주변에선 그런 책을 접하기가 참 힘듭니다.

목사님은 특히 자유의지에 대해 따끔히 한 말씀 하십니다. "지나치게 강조된 자유의지는 오히려 성경적이지 못하다." 많은 분들이 그런 말을 하죠. "어째서 하루 종일 일한 일꾼과, 나중에서야 도착하여 일을 조금만 한 사람의 몫이 서로 같은가?" 저자는 아무도 손해를 보거나, 부당히 여길 만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일한 사람은 일한 만큼 대가를 받았고, 자신의 잘못도 아닌데 늦게 와서 배를 주리게 된 사람조차 배를 주리지 않게 은혜를 받았으니, 오히려 모두를 차별 없이 사랑하는 신의 섭리가 증명된 셈입니다.

"평생 동안 아버지 곁에서 일한 나와, 타락한 생활로 인생을 허비한 저 몹쓸 녀석이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러나 아버지가 하는 말은, "너는 너라서 귀한 아들이며 나와 함께 그 모든 은혜의 시간을 함께하지 않았느냐. 저 녀석은 이제서야 제 잘못이 부끄러운 줄 알며 헛되이 보낸 인생을 한탄하니, 알차게 잘 산 네가 왜 네 동생을 미워하느냐." 신의 사랑과 이치는 결코 마구잡이가 아니라는 점을 저자는 특히 강조합니다. 인간들이 이해 못 할 방식으로 다만 세상을 다스리고 인간을 사랑하실 뿐이라는 거죠.

영화 <미션>에 보면 그런 대목이 있습니다. 노예 상인이었던 로버트 드 니로가 자신의 죄악을 모두 뉘우치고 자발적으로 무기 등을 싸짊어진 채 과라니 족의 거주지(높은 벼랑)까지 오르며 고행을 합니다. 고행이라기보다 잘못하면 미끄러져 죽는, 목숨 걸고 벌이는 모험인데, 그가 다 올라오자 과라니 족은 한때 짐승이나 포획하듯 동족, 형제, 부모, 자식, 가족을 잡아가 노예로 팔아먹은 이 인간 말종을 둘러싸고 알아듣지 못할 말로 한 마디씩 합니다. 노예 상인은 맞아 죽거나 찢겨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에서 한편으로는 참담함, 한편으로는 공포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는데, 이 사람의 진심을 안 주민들은 천진하게 웃으며 마치 어린이들이 지난 원한을 싹 잊듯 그를 토닥입니다. "너희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자에게 행한 게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이게 바로 신이 대신해서 행하는 용서인 줄 알고, 노예 상인은 웃음과 회개가 교차하는 극한의 체험 속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사람에게 구원에 대한 책임이 있다면, 사람의 공로도 있긴 하다는 뜻 아닙니까?" "신의 은혜로 이미 구원 받고 안 받고가 결정되었다면, 우리 인간은 가만 있기만 하면 될 것이 아닌가? 모든 게 팔자소관이란 동양식 미신과 아무 차이가 없지 않은가?" 여기 대해서도 저자는 신앙적으로, 신학적으로 명쾌한 답을 내어 놓습니다. "하나님은 본디 인간에게 죄를 선택할 자유까지 주었으며, 그래서 완전한 자유인 것이다." 앗수르(아시리아)는 신의 도구가 되어 북이스라엘을 파괴합니다만, 그들이 무엇을 알아서 이스라엘을 단죄하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심판은 신이 행하며, 앗수르의 서슬 퍼런 창날과 무자비한 전차는 그의 도구일 뿐이죠.

왜 우리는, 우리보다 적게 일하고 삯은 똑같이 받는 이웃에 대해 불편해하고, 그런 신의 섭리에 대해 부당하다고 여길까요? 저자는 "이는 부조리나 불평등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 느끼는 이의 탐욕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아수르는 저들의 탐욕 때문에 이스라엘로 쳐들어와 문명을 말살했을 뿐, 어떤 우월한 깨달음이나 자격이 주어져서 그리한 게 아닙니다. 무엇의 도구처럼 쓰이는 신세만큼 처량한 게 없습니다. 도구에게는 아무 의지도 축복도 존엄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만약 웅리가 우리 자신의 섣부른 기준으로 누구를 재단한다면, 이는 신의 주권에 도전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타인의 행복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고 든다면, 신의 선물로 주어진 자유의지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소중한 자녀가 아니라, 탐욕으로 가득한 도구 신세로 떨어지겠다고 차청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신의 자녀라면 그 주권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요셉은 이런 이치를 일찍부터 깨달았기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형제들의 무도함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구원 받은 이는 이처럼 매사에 초연하며, 누구도 감히 그의 내적 평화나 지혜를 침노할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긴 게 잘났다고, 더 똑똑하다고, 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다고, 온갖 모함과 저주와 질시를 그 동생에게 퍼붓고는, 급기야 노예 상인에게 신병을 팔아먹은 자들이 어디 사람입니까? 율법 시대라면 어떤 잔혹한 형벌을 받아도 마땅할 패륜아들입니다. 그러나 만약 요셉이 이런 이들에게, 사람의 판단으로 정당한 "복수"를 꿈꿨다면, 그는 용모도 지혜도 똑같이 그의 형제들처럼 추하고 어리석고 저열한 단계로 떨어졌을 겁니다. 짐승과 같이 놀면 같은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대신 그는 지상에서 가장 부유한 왕국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심판이고 섭리입니다. 그 형제들도 각각 (먼 훗날)12지파의 수장이 되었을 뿐, 어떤 참혹한 죄과를 치르지는 않고, 눈물로 회개한 후 새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신의 섭리란 이처럼 인간의 협소한 정의감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저 포도원 주인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십시오. 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빅 픽처가 있다." (p263)

칼뱅은 인간의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오로지 신의 선택과 구원이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정"이란 말로 표현됩니다. 이미 칼뱅 이전에 "왜 유대인은 구원 받지 못하는가?'"를 두고 사도들의 고민이 이미 있었습니다. 이때 그 결과로 도출된 유명한 말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입니다. 사실 이 점은 장 칼뱅이 로마 가톨릭을 공박할 때, "구원에는 선행, 행위가 필요하다"는 상대측의 교리 허점을 지적하려는 역사적 의도도 있었지요. 그런 태도는 유대인들(당신네 구교도들이 그렇게 미워하는)의 입장과 뭐가 다를 바 있냐는 겁니다. "예정, 구원"은 분석 대상이 아니라, 그저 "선포"될 뿐이라는 말씀을 다시 새겨봐야겠습니다.

저자는 본디 메디컬 엔지니어링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로 재직하다 "새로 믿고 새로 태어남"의 체험을 통해, 2012년 목사님으로 완전히 다른 경력을 시작한 분입니다. 분당은 신도시 설립 당시부터 교회 많기로 유명한 동네였고, 그 중에서도 이름난 분당우리교회에서 오래 사역자로 봉사해 왔습니다. 2016년 이 교회로부터 분립하여 "우리는교회'를 개척하여 지금에 이릅니다. 성경 본문이 매우 자주 인용되며 그 깊은 의미에 대한 해박한 고찰, 무엇보다 오랜 세월 갈등과 번민의 산물일 듯한 깊이 있는 깨달음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신앙 서적은 본디 독자를 다독이기보다는, 독자의 부족한 면을 호되게 깨우치는 책, 부끄럽게 만드는 책이 좋다는 생각이며, 그런 이유에서 이 책은 간만에 만난 "만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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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버리기 연습 - 한국어판 100만 부 돌파 기념 특별판 생각 버리기 연습 1
코이케 류노스케 지음, 유윤한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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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정말 지치고 피곤하게 하는 건 육체적 수고가 아닌 듯합니다. 어떤 분들은 일부러 여가와 비용을 들여 자신의 몸을 고되게 함으로써, 존재의 확인으로 쾌감을 맛보기도 하니 말입니다. 일상에서 직장에서 상처를 종종 입곤 하는 우리이니, 어떤 방법으로건 그 힐링이 필요합니다. "힐링책"으로서 이 책이 그처럼 뜨거운 반응을 독자들에게 얻었는지는 제가 무심한 탓에 솔직히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나마 입소문으로 이 특별판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몸이 고되어서가 아니라 비생산적이고 불건전한 생각이 우리를 지치게 하며, 그런 생각을 버리는 게 마음을 낫우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인 줄, 이 책을 읽고 비로소 확실히 동의하게 되었네요.

"주위에 기관총을 발사하듯이 변명을 난사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변명을 일삼는 사람은 대개 어설픈 무대 기질이 많습니다. 전후 관계는 누가 봐도 바보 아닌 이상 뻔하게 드러나고 짐작 가능합니다. 그런데 일을 꼬이게 만든 장본인만 혼자서 바쁘고, 아무도 안 믿는 변명으로 연극 한 편이 꾸려지기라도 하듯 뻘짓으로 참 열심입니다. 그 사람 딴에는 변명을 이렇게 늘어 놓아야 남들이 편해지겠거니 덜 상처 받겠거니 여기는데, 실은 지극히 이기적인, 자기 마음 달래려고 열심히 뭘 고안하는 게 보통입니다. 저자는 그래서 "변명 자체가 주변에 난사하는 기관총"이라고 꼬집습니다. 이런 구차한 변명 끝에 구색맞춤이나 하듯 한 줄 덧붙이는 "사과" 역시, 상대의 힐링을 위한 정성이 아니라 "내가 이 정도로 자신을 낮출 줄도 안다"는 비뚤어진 과시이고 위선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오로지 내면에 뻥튀기된 에고만 가득할 때 이런 행태를 흔히 내보이죠.

오감 외에도 확실히 사람에게는 외부 사태의 진상이나 상대의 마음을 알아보는 무엇인가가 있는 듯합니다. 저자는, 불교에서 이 오감 외에 "의(意)"를 더해서 육문이라 일컫는다고 우리 독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네요.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감각 그 자체에 집중하면 묘한 쾌감이 얻어지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느껴진다"와 "느낀다"의 차이라고 설명하십니다.

"느껴진다"는 예를 들어 비 오는 날 축축한 습도 때문에 일어나는, 누구나 "느껴질 만한" 불쾌감입니다. 그러나 온도에 대한 "생각하기"를 멈추고, 감각 그 자체를 집중해서 느끼면, "어떤 온도에서도 사람은 상쾌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말씀입니다. 이런 경지에 오르려면 여튼 상당한 수련이 필요하겠으나, 추위는 몰라도 더위 속에서는 우리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덥다고 연신 불평만 할 게 아니라, 서늘히 흐르는 땀 속에서도 내 신체가 건강히 생리 작동하는구나 같은 느낌은 한 번 정도는 누구나 받으니 말입니다. 일단, "습도가 높고 온도가 이 정도니 나는(혹은 누구라도) 불쾌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이런 편안한 마음을 찾을 수 있겠죠. 저런 생각이 끼어들면 그냥 견딜 수 있을 만한 고통도 더 버겁게 느껴집니다. 스트레스란 말이 스트레스를 더 부른다는 것처럼요.

저자는 특히 TV 코미디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에게 끼치는 해악에 대해 경고합니다. 저자의 말을 잠시 인용하면
1. 다른 사람의 실패를 비웃는 우월감
2. 갑작스레 허를 찌르는 공격성
3. 부조리한 말과 몸짓에 의해 생기는 혼란 (pp. 124~125)

이런 요인, 동기들이 코미디 프로그램에 시청자들이 몰입하는 원인인데, 이런 웃음은 첫째 그 유발이 자연스럽지 않고, 둘째 웃는 중에서도 사람의 마음 속에 긴장을 불어넣고, 셋째 자신의 현실을 잊으려는 불건전한 욕망이 자라며, 넷째 쳥중이나 무대의 희극 배우가 웃고 웃기는 타인의 리듬에 자신을 맞추는 부작용이 있다고 합니다. 들어 보면 모두 타당한 지적입니다. 저자는 또한 이런 프로그램을 보며 웃는 사람은, 웃고 있어도 뭔가 표정이 밝지 않고 일그러진 구석이 생긴다고 하는데, 옆의 시청자나 TV 속에서 웃어 대는 관객들을 봐도 확실히 맞는 말입니다(안 보이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저자는 지금 TV 프로그램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 밝고 자연스럽고 건전한 웃음이라야 우리 건강에 도움이 됨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독한 약이 어떤 환자에게는 필요할 수 있듯, 그런 프로그램도 꼭 봐야 할 사람이 있겠지요.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고 더 흥미와 집중도가 높아지는 게 우리 인간의 뇌입니다. 먹는 동안에는 스트레스가 풀리고 다른 생각이 사라지기에 현대인들은 더 먹는 일에 집착하고 과체중으로 고생합니다. 다이어트를 해야지! 같은 강박 관념은 어떤 체중 감량 결의로 이어진다기보다, 이렇게 독하게 다이어트 결심을 했으니 지금은 좀 먹어야지! 같은 보상 심리로 이어집니다. 벌써, 다이어트가 필요하다고 강박 관념이 생기는 그 자체가, 먹는 데에 엄청 신경 쓰고 집착한다는 불 같은 반증입니다. 정말 살이 빠지는 사람은 다이어트란 생각 자체를 안 떠올립니다. 체중계에 올라가서 경각심을 다지는 게 아니라, 먹고 싶어 죽겠는데 왜 이리 눈금이 안 내려가냐며 속으로는 오히려 더 뭘 먹을 각오를 불태우는 거죠. "생각 버리기"란 이처럼 살 빼는 과정에서도 중요합니다.

왜 이렇게 저장 강박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일까요? 오죽하면 미니멀리즘, 버리고 살기에 대한 책들까지 많이 출간되겠습니까. 저자는 특히 "사람은 마음 한 구석에 무엇을(무엇이든 간에) 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역으로 이런 욕구가 생각의 끄트머리를 잡고 이어져 저장 강박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생각 버리기"라는 코드 하나로 이처럼이나 많은 현상에 대한 일관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무엇인가를 가지면 가질수록 마음이 어두워진다" 왜냐하면, 여태 무엇을 모으고 간직해서 그만큼 기분이 좋아졌으나, 이것을 잃을 수 있다는 걱정, 추락에의 공포가 사람의 생각을 반대방향으로 옭아매기 때문입니다. 이걸 잃어버릴 때에, 종전의 초라했던 상태로 돌아가는 건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주며, 컬렉션의 남겨진 일부만 지켜 볼 때의 느낌은 마치 신체의 일부가 손상된 양 좌절을 안깁니다. "아예,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만도 못해!" 허나 어디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다 가진 건 불안해서 좋지 않고, 일부만 가진 건 잃은 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괴롭고, 다 잃은 건 결핍의 모멸 때문에 또 못 견디겠고.... 역시 답은 집착과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는 것입니다.

그럼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진짜 해답은 무엇이겠습니까? 대개, 무엇을 모으는 데 집착하는 사람은 참된 자존감이 낮습니다. 억지로 가장하는 허영이나 허세가 아니라, 내가 진짜 어느 정도 가치의 인간인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압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 자신이 변변치 못하므로, 물욕과 수집욕으로 이를 만회하고 싶은 거죠. 대범하게 무엇인가를 버려 버릇해 보면, 의외로 참된 나 자신과 더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들여다 보면 누군들 왜 내면의 튼실한 장점, 자신만의 미덕이 없겠습니까? 이럴 때도 사람은 일단 잡된 생각을 버려야 정직한 자신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특히 저자는 불교의 가르침을 자주 인용합니다.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대범하며, 대범한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어느덧 자긍심이 생깁니다. 참된 자신감, 자존감이 생기면 쓸데없이 꼬리를 무는 잡생각도 잊혀집니다.

생각 버리기를 올바로 깨친 분이 만약 부모라면, 그 부모는 아이에게 학습 동기를 불어 넣어 주면서도 건전한 소통을 동시에 이룹니다.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얼마나 부모님들이 아이 교육에 열성입니까.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자녀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데, 아이들은 이런 부모의 마음을 모릅니다. 부모의 욕망을 대리 만족시키려는 꼭두각시로 나를 취급한다고 여겨, 심지어는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 열성으로 아이를 대하는 부모님의 자식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지도 모르고 말이죠.

저자는 아이를 대할 때, "나는 너를 언제나 받아들이며, 너의 점수가 아닌 너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전해 주라고 충고합니다. 이런 충고를 하면, 마음이 근본에서부터 비뚤어진 자는 꼭 "뻔한 소리, 하나마나한 소리"라며 거부부터 하고 봅니다. 심사가 이처럼 배배 꼬인 사람은 부처님이 와도 교화 못 시키고, 크리스퍼 기법을 써도 인간 개조가 안 됩니다. 나아질 가망이 있는 사람은 그 마음 안에 작으나마 희망의 씨앗이 자라야 하는데, 어미가 밖에서 아무리 알을 쪼아도, 그 저주 받은 어린 것(늙은 것?)이 도통 나올 생각을 않으면 뭐 방법이 없는 거죠. 쓸데없는 생각만 가득한 사람은 언제나 이런 가당찮은 허세로, 빈약한 지성을 벌충하려 듭니다.

저자는 참 재미있는 말씀도 많이 하시는데, 예컨대 병문안을 와서는 막 우는 사람이 꼭 있다는 겁니다. 이런 불안하고 절망적인 기운이 환자에게 전염되면, 이건 숫제 병문안을 안 오는 것만도 못한 결과이죠. 그러면서 저자는, "이런 이들에게 걱정은 남이 진짜 걱정되어서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취미 활동이다."라고까지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사람들인데, 이런 이들이 생기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머리에 불필요한 생각이 너무 많이 자리해서입니다. 올바르지도 않은 생각이 머리에 똬리만 틀었으니, 정작 필요한 생각이 퍼뜩 떠오를 리 없고 느는 건 남탓 스킬 뿐입니다.

3부에서는 뇌과학자 이케가야 유지 박사와, 이 책 저자 코이케 류노스케 스님과의 대담이 이어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음 수련의 대가, 생각 버리기의 달인인 스님, 일본 최고의 뇌과학자가 만나면, 누가 누구에게 더 궁금하고 묻고 싶은 말이 많을까요? 이 책 마지막을 장식하는 말을 한번 보십시오.

"전에는 명상을 지나치게 많이 하면, 사회 생활에 꼭 필요한 투쟁심이 사라져서 곤란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스님 말씀을 듣고 보니 '자기 통제력'의 이점이 훨씬 클 것 같군요."

좋은 책은 이처럼, 행여 독자의 마음 속에 남은 한 점 의구심마저, "네 마음 다 안다"는 듯 말끔히 씻어 주고 마무리짓습니다. 정말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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