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스 머신 - 블록체인과 세상 모든 것의 미래
마이클 케이시.폴 비냐 지음, 유현재.김지연 옮김 / 미래의창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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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금전과 장부처럼 함께 오래 가야 할 관계가 또 없다." 저자는 21세기 초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스캔들을 거명하며, 돈처럼 "투명성"을 싫어하는 것도 따로 없으나, 돈만큼 투명성의 세례를 받을 필요가 더 큰 존재도 따로 없다는 취지로 여러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 저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비트코인은 돈이면서 그 돈의 쓰임을 자기 몸에 동시에 기록하는 장부이기도 합니다. 마치 기억을 잃지 않으려고 몸에 지저분하게(그러나 필사적으로) 메모를 해 대는 주인공의 분투기인 <메멘토>가 기억 나기도 합니다.

화폐는 가치의 표상일 뿐이고, 금은 같은 귀금속이 아닌 바에야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화폐는 패권을 차지한 제국이 그 지역 일대에서 "구태여 불순물을 안에 섞지 않는다"는 신뢰를 얻은 후 발행의 독점권을 지녀 왔습니다. 그저 대중과 시장의 신뢰를 한번 얻고 끝이 아니라, 그 발행과 유통에는 투명성과 분권화 같은 이념이 구현죌 필요가 있는데, 이를 준수하지 못한 많은 정부들이 얕은 유혹에 넘어가 국민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자신들도 무너지곤 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혼자 깨끗하지 못한 이익을 챙기고 잠적한 개인과 세력도 꽤 많을 것입니다.

비트코인이 처음으로 구현한 블록체인 기술은, 여태 많은 이들이 간절하게 바라 오던 몇 가지 혁신을 이뤄 냈습니다. 첫째, 디지털 자산이 흔히 그렇듯 복제가 너무도 쉽기에, 대체 전산 장치로 돈을 찍어 내면 그게 정당한 과정으로 얻은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복제품이라면 구태여 내가 지닌 무엇을 건네주고 얻을 이유가 하나도 없으며, 나도 집에서 컴퓨터로 만들어 내면 그만입니다. 너도 나도 집에서 돈을 만들어내면 그건 이미 돈도 무엇도 아니죠. 이것을 전문가들은 "결제의 이중성 방지" 이슈라고 부릅니다. 정당하게 만들어진 "화폐"라고 해도, 그걸로 어디에 한 번 결제를 하고는 복제품을 다시 다른 결제에다 쓰는지 아닌지 제재할 수단이 있냐는 뜻입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트루스 머신"은, 바로 이 점에 처음으로 착안하여 붙은 어구이겠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비트코인(뿐 아니라 블록체인 기반의 모든 가상화폐들)은 화폐이면서 동시에 장부입니다. 참여하는 사용자들이 한둘이 아닌데, 거래가 이뤄질 때마다 모든 이의 지갑(=장부=화폐)에 동시에 기록이 남는 판에 그걸 무슨 수로 일일이 다 조작하겠냐는 겁니다. 조금 회사가 잘나갈라치면, 밖에다 보여 주는 공시 자료(장부의 압축판)를 조작하여 이익을 사취하는 게 아주 못된 습성이지만 근절이 어려웠는데, 이 블록체인 기술을 시작, 기반으로 인류가 진정 최초의 투명성 보장 거래를 자유롭게 이룬다는 생각은 가히 혁신적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치 SF에서처럼 통일 화폐를 사용한다는 것도 대단하고 말이죠.

원리적으로는 그러한데, 현실에서는 여러 문제가 따릅니다. 우선 각자가 넷상에서 다 같은 장부(이지 화폐이자 클라이언트 프로그램)를 돌린다고 했을 때, 속도 문제가 반드시 생깁니다. 강터 신세계점에서 누가 고가의 물품을 사느라 돈(현금)을 치를 때, 예컨대 천원권으로 잔뜩 내놓는다고 해도 그 지연 행위가 저 멀리 신세계 센텀점 누군가의 지불 편의에 손톱만큼도 무슨 영향을 끼칠 리 없습니다. 한국은행에서 한번 찍혀 나가 시중을 도는 중인 지폐야 그 임자의 지갑 말고 어디에다 과부하를 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두(혹은 상당수)가 다들 비트코인으로 일상에서 결제하게 되면, 마치 p2p 쓸 때에도 queue가 형성되어 기다려야 하듯, 실시간 거래에 부하가 걸리는 게 사실입니다.

이 점이 생각보다 큰 문제라고 하는군요. 블록을 키워서 더 많은 이들이 동시에 접속하게 허용하면, 메모리를 더 많이 점유하게 되고, 채굴 행위에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고 합니다. 이 경우, 일부 재력 있는 이들만 (단기에 손해를 봐 가면서) 채굴에 적극적일 수 있어, 시일이 지나면 50% 장악을 소수의 세력이 위협, 좌우할 수 있는, 그야말로 블록체인 기반 암호화폐의 존재 이유가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현재는 이른바 "작업 증명"으로 별개의 비용을 치르게 하여, 채굴로 얻는 이익이 전기요금 등을 간신히 상회하게끔 일종의 속도 방지턱을 마련했기에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마저도, 투기 때문에 비트코인의 가격이 시장에서 급상승하기라도 하면 사정이 달라졌지만 말입니다(한국 같은 경우 예컨대 대구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입주할 수 있는 공단에 편법으로 들어간 후 시설을 비트코인 채굴에다 전업시키는 등....). 그렇다고 블록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면, 수수료 비중이 또 높아져서 예컨대 한 잔 5000원 커피에 만원 수수료를 내는 상황이 빚어질 수 있다고도 하네요. 흔히 "기술적인 문제"가 있다고 할 때에는 사소한 난점이라서 곧 해결된다는 뜻이나, 이런 종류의 기술적 문제는 암호화폐 기반 전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겠습니다.

혹시 메모리 크기를 늘리는 쪽으로 간다면, 또 하나 문제가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에 따르는 "하드 포크" 현상의 부작용입니다. 21세기 초에 한국에서 아래아한글 이용자들이 가장 큰 불편을 겪은 게, 워디안 등 최신 버전과 이전 버전이 호환이 안 된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한컴 쪽에서도 기능의 근본적 개선을 위해 반발과 불편도 다 예상하고 이런 하드포크 결정을 내린 거였습니다만. 만약 비트코인 클라이언트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업그레이드 조치가 내려진다면 꽤 많은 불편이 당연히 예상되죠.

아무튼 이는 암호화폐 분야에 대체로 한정된 이슈이며, 블록체인 기술의 활용 범위는 거의 무제한이라 할 만큼 넓습니다. IoT가 아직 한국에서도 초기 단계인데, 제일 신경 쓰이는 부분이 보안, 해킹 문제입니다. 샤워나 잡담 등 일상의 화면이 낱낱이 촬영되어 중국 네티즌 사이에서 돌아다닌다든가 하는 건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죠. 또 스노든사건 이후 인터넷이 결코 신뢰의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 매우 불편하게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사실 처음부터 많은 이들은 인터넷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보안 이슈가 해결 안 된 시스템인데 이처럼 많은 이들이 참여하면 어떤 부작용이 생기겠냐는 말을 해 왔었습니다. 헌데 이제 블록체인 원리가 이 정도로까지나 발전을 보았기에, 결제 단말에 과연 해킹 툴이 있는지 없는지, 부정이나 이중 결제가 아닌지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이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하다는 건 분명 큰 혁신입니다.

책에서 또 인상적으로 강조하는 게, 경영학 필수 개념 중 하나인 이른바 "서플라이 체인"입니다. 기업은 고립적인 공장 한 곳만 가동해서 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원료나 중간재를 대어 주는 수많은 다른 업체와의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혹은, 자신이 타 업체에 무엇인가를 공급하는 체인의 일환일 수 있고요). 이 사슬이 길면 길수록 생산의 규모가 크고 품목도 많다는 뜻이지만, 반대로 문제라도 혹 생기면 그 원인을 추적하기가 몹시 힘들어집니다. 여기서는 치폴레(이 책은 "치포틀레"라고 표기합니다만)의 사례를 드는데, 예전부터 RFID다 뭐다 해서 여러 시스템이 나왔으나 결국 원료 어느 단계에서 문제가 있었는지 발견하는 데 도움을 못 줘 유망 업체 하나가 망하다시피했죠. 블록체인이 성숙하면 이런 문제도 해결이 가능하다는 전망입니다.

우리하고는 큰 해당이 없는데, 남미에서는 아직도 부동산 등기 시스템이 불비하다고 합니다. 정부에서 공인하지 않은 필지이고 그 위에 건축된 주택이니, 이를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든가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한국은 이런 부분은 기가 막히게 잘 되어 있으므로 큰 실감은 안 나지만, 책에서는 해당 국가 자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런 부동산이 제도권으로 진입만 하면, 경제 성장 10% 역할을 거뜬히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합니다(어디까지나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정도고요). 한국에서도 동반 성장 이슈 관련하여 이 포용적 금융 정책을 거론하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큰 적실성은 없습니다. 남미 같은 데서는 등기부의 진정성이 큰 문제가 되므로, 행여 관련 공무원이 원시 조작을 시도하여 부정한 이익을 취할 수 있는데 블록 체인이 그 가능성을 원천 차단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앞에서 "한국의 경우 등기 시스템이 워낙 완비되어 있어..."라고 했지만, 변화무쌍한 세상에 더군다나 전산화된 Db에 누가 들어가 어떤 조작이 가능할지야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블록체인은 개인의 신원 증명 등에 결정적인 해답을 내놓을 수 있는데, 우리도 흔히 안구, 지문 등 신체 정보가 한번 털리기라도 하면 완전 답이 없는 상황으로 빠지리라는 걱정을 하죠. 여기에 대해서도 이 기술이 보안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블록체인은 애초부터 정부 없이, 중간자의 갉아 먹는 비용 없이, 모든 개인이 민주적으로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경제적 활동을 벌일 자유를 보장한다는 취지로 개발된 건데, 심지어 이 기술은 문학이나 예술 창작 활동의 표절 방지, 불법 카피 유통, 출판사나 서점 유통 라인의 도움 없이 대중에게 자발적으로 호응과 후원을 얻어 창작자를 경제적으로 돕는 단계까지 발전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혁신이란 참으로 한계가 없는 인간 정신의 대 도약임을 실감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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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눈이 내리면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2
디나 루비나 지음, 강규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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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벌써 포스트모던이라 불릴 자격을 잃습니다. 포스트모던에 대한 "담론"이 한창 인기를 끌던 것도 1990년대였으며, 이후로는 왠지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론하기도 촌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사는 지금은 온통 포스트모던한 행태, 작품, 분위기, 말투로 가득하며, 아닌 것을 찾기가 더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에만 해도 아직 뭔가 의미를 찾는 게 돋보이던 시절이었는데, 그 시절 열심히 대상보다 훨씬 어려운 방법론을 동원하며 포스트모던을 논하던 이들은 참으로 수고가 많았습니다. 문학과 인문의 해체를 열심히 설파하던 그들의 예측만큼 이후에 철저히 현실화한 것도 아마 유례가 드물 테니 말입니다.

유대계 러시아인으로서 이후 이스라엘로 근거지를 옮긴, 성장기와 주된 활동은 주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보낸 작가 디나 루비나처럼 독특한 개성과 이력을 지닌 분도 드물 듯합니다. 정녕 포스트모던은 이처럼 혼란스럽기까지 한 정체성을 지닌 분이라야 그 사조를 대변할 자격이 생기는 걸까요? 작가는 1953년생이니 1990년대를 탈의미, 시대의 종언 따위를 입에 올리며 마음껏 청춘을 즐긴 그 세대에 견주어도 거의 부모님 세대뻘입니다.

사실 저는 포스트모던이다, 혹은 다른 어느 유파, 사조에 넣고 이 작품집을 감상하기보다, 시대나 사회와 전혀 융화 안 되는 듯 통통 튀는 개성, 그러면서도 정면으로 대세나 체제를 거스르는 데에는 많이 주저하는, 위대하지도 않고 천재적이지도 못한 채 자신에 대해 끝없이 회의하는 목소리를 내내 경청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내려갔습니다. 하루키에 대면 그나마 일정한 스타일이 갖춰져 있고(보다 체홉에 접근한다고나 할지), 대중을 향한 배려라면 또 조금 소홀하고... 여튼 다 읽고 나면 어떤 뚜렷한 그림은 그려집니다. 서사가 뚜렷이 안 잡히는 모호한 단편은, 1990년대 한국의 이상문학상 수상집 같은 데에서도 많이들 보던 것입니다.

<두 개의 성>은 이 작품집의 한국어판에만 수록되었다고 하며, 비교적 줄거리가 선명히 독자에게 접수되는 편입니다(그래서 아마 TV로 극화될 수 있었는지도). "나"와 그녀 사이에 격한 갈등, 반목의 대화가 오가는 등 연극 한 편의 넉넉한 원작으로 기능도 할 듯합니다. 결말도 다소 충격적인데, 이런 돈강(頓降)의 마무리는 일찍부터 러시아의 거장들이 즐겨 구사하던 이지적이면서도 감성의 허점을 정확히 찌르고 들어가던 수법이죠.

<초록 대문 너머의 집>은, 아마도 엄마에게 홀로 길러지는 듯한 어린 소녀가, 말 그대로 초록 대문 너머의 집에서 피아노 레슨을 하는 여선생의 립스틱을 훔치는 버릇 때문에 빚어진 작은 소동에 대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단편입니다. 소녀는 "초록 대문 너머의 집"에서 본 수수께끼의 남자에게 포도를 건네주는데, 왠지 남자의 궁핍한 듯한 몰골로 보아 자신이 그런 행위를 할 필요가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꽤 컸다고 판단을 했나 봅니다. 소녀는 계속 스스로에게 불편과 불만, 좌절감을 느끼는데, 유독 약지로 건반을 잘 누르지 못하는 데서 이런 부정적 감정이 계속 솟아나게 됩니다.

소녀를 "현행범으로 잡은(선생 자신의 표현)" 피아노 선생은 "네 속은 어쩜 이런, 나쁜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니!"라며 꾸짖지만, 소녀는 기이한 자기 방어 기제, 혹은 현실 왜곡을 통해 곤경을 모면하고 죄의식을 떨어내려 듭니다. "그 남자는 선생님의 남편인가 보다." 자신이 명확히 알고 있는 사실은 선생에게 되물으면서 논점을 흐리려 하고, 헷갈리는 사실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속으로만 합리화합니다. 나중에 그 어머니는, "내게 없는 게 립스틱이었으니 신기해서 네가 훔치려 들었나 보다. 이 사실을 아빠에게 말 할까?"라고 딸에게 물어 봅니다. 더 자라서도 이 경험은 소녀의 마음에 계속 응어리로 남는데, "도둑" 이야기만 어디서 나오면 "나도 저랬었는데" 하며 당시의 굴욕과 타락한 느낌을 재생합니다. "초록 너머 대문의 집"은 처음으로 도덕관의 혼란과 죄의식을 소녀에게 깨우쳐 준 "레슨"의 공간이었습니다.

<모든 게 같은 꿈이로구나!>에서는, 앞(<괴짜 알투호프>)에서 나온 보리스 고두노프가 또 언급되는데, 물론 푸시킨의 작품 속 캐릭터로서입니다. 이 단편집에서 유독 푸시킨이 자주 인용되는 건 물론 러시아 문학에서 그가 차지하는 불멸의 거장으로서의 위상이 있긴 하나, 생전에 영원한 국외자, 이방인이었던 그와 작가 루비나 여사 자신 사이에 어떤 큰 동질감도 느껴져서였을 겁니다. 극중에 연극 무대가 배경의 일부로 쓰이고, 오가는 대사 역시 첨예한 의지의 대립을 표현하는 연극투가 많이 사용되는군요.

<괴짜 알뚜호프>에는 말 그대로 알뚜호프라는 천재성 기인을 대학 시절에 사모라도 했다는 듯 작가 자신의 자전적(으로 보이게 한) 회고가 담겼습니다. 발상도 기발하고 언어감각도 탁월한데다, 무엇보다 느낌과 생각을 표정과 동작 속에 순발력 있게 표현하는 재능이 대단합니다. 생긴 건 지독하게 못생겼으나 1인칭 화자 디나(작가 이름 그대롭니다)는 완전히 그에게 매료되었습니다. 그처럼 못생긴 사람도 본 적 없고, 그처럼 매력적인 남자도 다시 못 만날 듯합니다. 설령 모국어라 해도 아이들은 자모의 정확한 조음이 힘든데, 알뚜호프가 친하게 지내는 유르카란 아이는 Р (р) 발음을 잘 냅니다.

11월 시위에 대한 언급도 있고, 특정 학생 조직에 속한 듯 상부의 지휘도 받는 걸 보면 분명 이 단편은 어떤 정치적 격변기를 배경으로 삼습니다. 재미있는 건 두 인물이 끊임없이 떠올리는 데카브리스트 운동, 개화와 유럽 지향의 상징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혁명 후 바뀐 이름인 "레닌그라드" 등의 이름이 맥락에 따라 계속 교차 언급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 나는 알투호프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 알투호프가 과연 실존 인물인지, 어떤 초시대적 개성을 의인화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적어도 엠마뉘엘 카레르가 리모노프를 바라본 태도와는 서로 극과 극이라고나 해야겠습니다.

단편 <토요일마다>에는, 자신의 이름이 타냐였으면 좋겠다고, 아주 예쁘지는 않아도 남들만큼만 무난했으면 바랄 게 없겠다고 여기는 예바, 예프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녀는 우울해집니다. "저건 누가 봐도 키키모라(러시아 민담 속의 도깨비)의 얼굴이야!" 여튼 예바가 기특한 건, 아빠가 가정을 버렸고 엄마와도 불화하며, 청승맞게 할머니가 고작 길러 줄 뿐인, 여러 모로 불운한 자신의 처지를, 악착같은 남탓이나 뻔뻔스러운 거짓말, 허황된 변명, 비틀린 내면의 격렬한 발악인 폭력 따위로 얼버무리거나 도피하려 들지 않고, 이처럼 현실에 대한 냉철한 수긍으로 대응하는 저런 정직함입니다.

"전 재판관이 아니에요. 아빠. 그리고, 아이와 2년이나 떨어져서 살 수 있는 여자를 비난하는 건 아무 소용도 없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죠. "

암만 못생기고 가난해도 이 정도씩이나 현실과 자신의 내면에 솔직할 수 있는 여자라면, 아쿤딘이나 류리크, 지마 같은 멋쟁이들과 충분히 근사한 연을 맺을 수 있을 겁니다. 남들에게 판단(비판) 받을 구석이 가장 많은 비뚤어진 품성을 가진 오랑우탄이라야, 얼척 없는 구실을 들이대며 정신병에 가까운 현실왜곡과 중상 모략을 일삼게 마련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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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의 정치학 - 권력이 강한 사람에 맞서 어떻게 스스로를 방어할 것인가?
잭 고드윈 지음, 신수열 옮김 / 이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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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강한 사람에 맞서 어떻게 스스로를 방어할 것인가?" 아무래도 어느 조직이건, 사회의 어느 부문이건 갑(甲)보다야 을(乙)이 더 많은 게 엄연한 현실이므로, 이런 질문에 대해 "나 역시 그게 궁금했어."라며 동감 혹은 호기심을 가질 독자가 많을 듯합니다. 현재  저 질문에 대해 저자 자신의 체험이나 팁 등을 바탕으로 조언을 들려 주는 다른 책들도 적지 않게 출간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그런 책들은 현장에서 그대로 써먹기에는 좀 무리겠다 싶은 제안을 하거나, 실망스럽게도 "그저 체념하고 강자의 비위를 맞추라"는 결론으로 치닫기도 합니다. 하긴, 무슨 책 같은 데서 이 난문에 대한 정답이 행여나왔을 것 같으면 벌써 입소문을 타고 책의 비결이 실천에 옮겨져 온갖 사회적 갈등이 해소되었겠지 혼자서 속앓이하는 사람이 누가 남아 있겠습니까. 애초에 개인의 특수한 과제는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지, 어떤 일반적인 상황에 억지로 포섭시켜서 억지 해법을 만들고 혼자 만족할 일이 전혀 아닙니다.

성실한 독자가 그야말로 공부 한 번 제대로 하는 셈 치고 지금 이 책을 읽는다면, "사무실"뿐 아니라 인간사의 사회적 갈등 전반에 대한 현명한 깨달음이 아마 마음 속에 자리할 듯합니다. 가볍게 접근할 수 있을 듯했던 제목과는 달리, 또 얇은 분량과는 달리, 이 책은 생각 외의 깊이와 무게를 지닌, 전문가의 고뇌와 품격이 풍기는 내용이었습니다. 원제는 <The Office Politics Handbook>인데, 저 handbook이란 단어도 사람 헷갈리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영어권에서 이 단어는 말그대로 가벼운 참고서, 팁 모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예를 들어 독일어 서적이라면 웬만한 사전 한 권 분량인데다 내용 역시 꽤나 전문적입니다. 이 책은, 분량은 영어권(물론 당연히 미국 저자가 미국식 영어로 쓴 책이지만), 내용은 독일어권의 관행(?)을 따랐다고 보면 될 듯합니다.

한국과는 달리 영미권에선 본격 정치학 서적이 읽기에 그렇게나 어렵더군요. 정치학(외교학) 특유의 jargon이 자주 구사될 뿐더러, 간간이 곁들여지는 저자의 위트조차 (본의와는 달리) 독자를 혼란에 몰아넣곤 합니다. 이 책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나, 혹 편안한(안이한) 마음가짐으로 "회사에서 갑질 좀 할 수 있는 팁"을 얻고자 한 독자라면 좀 낭패를 볼 수도 있지 싶습니다. 최고의 지성인이 쓴 책 답게, 좀 고생해 가며 읽어내면 독자 입장에서 의외로 남는 바는 많겠지만 말입니다.

미국 역사에서 유명한 "모겐소"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두 명 있습니다. 하나는 FDR때 재무장관을 지낸 헨리 모겐소이며, 다른 한 사람은 국제정치학(외교학)계의 거물 한스 모겐소입니다. 후자의 경우 특히 그 저서들의 난이도가 엄청 높기로 유명한데, 난다긴다하는 예일대 학부생들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젖곤 합니다. 이 책 역시 그 한스 모겐소의 입장(워낙 클래식이니까)이 곳곳에서 자주 인용되는데, 저자분이 워낙에 정통파 학자이시라서 당연히 그러려니 하는 자세로 읽었습니다. 관련 전공자들에게는 익숙한 내용이지만 공부하는 자세로 한번 정리해 봤습니다.

1. 정치의 법칙은 인간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2. (생략)
3.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권력이며, 이 목적에 기여하는 사회적 관계라면 그 무엇이든 정치로 볼 수 있다.  (pp.39~42)

정치학에서 보통 하이 폴리틱스, 로 폴리틱스의 구분을 정하곤 합니다. 정치인들이 모여 상부 구조의 의사를 결정하는 건 하이 폴리틱스이며, 보이지 않는 하부에서 정치의 실체, 기반을 정하는 건 로 폴리틱스인데, 귀하다 천하다 혹은 높다 낮다의 개념이라기보단 드러나는 부분과 숨겨진 부분으로 해석하는 게 맞다고 합니다. 이 책에선 그 개념 말고도, 거시정치와 미시정치로 다시 개념을 나눕니다. 거시정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이며, 미시정치는 바로 이 책의 주제, 또 이 책의 제목에 끌려 집어든 독자들이 관심 있어할 만한 "사무실의 정치" 같은 게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일반인들도 "저 사람 정치(질)하네" 라든가 "일머리는 없는데 정치머리는 대단해" 같은 맥락 속에서, 은연중에 이 "미시정치" 개념을 수용한 셈입니다.

책이 이론적으로 상당히 까다로운 접근법을 취하기는 하나, 다시 두 패러그래프 위로 올라가 보십시오.

3. .... 관계라면 그 무엇이든 정치로 볼 수 있다.

미시경제와 거시경제는 그를 관통하는 법칙 몇 가지가 공통이긴 해도, 작동하는 생리가 꽤나 다릅니다(이걸 같다고 보면 꽤 보수적이고 원리주의적인 스탠스이고, 다르다고 보면 케인지언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이 책은 저 인용문에서도 눈치챌 수 있듯, "당신이 씹어대는 여의도나 저 태평양 너머 DC에서의 정치이든, 당신이 사무실에서 지금 겪는 눈치싸움과 처세의 곡예이든 알고 보면 다 똑같은 정치임"을 일단 전제로 삼고 논의를 풀어나갑니다, 그래서 이 책 한 권 잘 읽으면, 정치학에 대한 소양이 꽤 늘 뿐 아니라, 곤란을 겪고 있는 사무실의 꼬이고 꼬인 관계도 냉철하게 풀어나갈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의도이겠습니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불확실성의 시대> 등의 명저를 통해, 탈냉전의 과감한 발상 전환을 처음으로 강조한 정치학자입니다. 이분이 남긴 업적 중에 권력의 개념 구분 시도가 있는데 책에서도 요령 있게 잘 간추려 소개하고 있네요(p77). 초보 경영 조직론 같은 데서 자주 나오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본래 경영학은 인접 기초 학문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으니까요)

①징벌적 권력
②보상적 권력
③조종적 권력

1과 2가 가장 원초적 형태의 권력들입니다. 1과 2는 사실상 같은 권력 주체가 두 개의 탈을 번갈아 써 가며 구사하는 채찍과 당근(순서대로)이라 봐도 됩니다. 3에 대한 설명은 책 몇 페이지 뒤로 넘어간 후에야 나오는데, 이 권력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막후에서 행사되는, 가장 세련된 형태의 권력이라 불러도 되겠습니다.  행사하는 주체는 분명 의도를 달성하고 합당한(?) 대가를 챙기지만, 그의 전략 구사에 놀아나는 대상은 자신이 어떤 빅 픽처의 구도에 놀아나는지 전혀 감을 못 잡습니다. 1에 대해 저자는, 갤브레이스 본인이 쓴 condign이란 용어의 뉘앙스와 격을 지적하며 appropriate나 well-deserved 등보다 훨씬 고급임을 평가하는데 이뿐 아니라 정치학의 모든 용어들이 성격 면에서 다 이런 계열 구조입니다.

"나의 눈으로 바라보면 무수히 많은 시스템들로 이뤄진 상호 관게의 네트워크가 보인다.....  이 시스템엔 (다시) 바닥도 천정도 없는 하위 시스템이 들어 있으며, ..... 이 상호 의존 때문에 그들(하부 시스템들)은 정상적 상태를 방해하는 어떤 상황이나 자극에도 (일관되게) 대응한다. ..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시스템들은 창발적으로 대응한다..."

여기서 편집자는 창발적이라는 표현에 대해 "진화의 각 단계마다 그 전 단계를 기초로 해 이뤄지면서도, 전단계의 단순 총합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성질이 나타나며 이뤄지는 발전의 속성"을 가리킨다고 따로 설명(원주인 듯합니다)을 답니다. 아무래도 내용이 좀 어렵다 보니 수시로 편집자가 개입해서, 정치학의 jargon에 익숙지 않은 독자에 대해 어떤 배려를 베풀었어야만 했던 듯합니다.

인간 관계는 본시 갈등의 연속이다. (p93)
인간은 본래 정치적 동물이다. (p4의 서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며)

어떤 사람들은 (사실 그 본체에 대해 전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올바르지 않은 것, 소수의 탐욕에만 봉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협조할 수 없으며, 이 점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전제라도 가진 듯, 사무실의 정치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를 품기도 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이상 이런 태도를 나무랄 수는 없으나, 사무실의 정치에서 돌이킬 수 없는 패자로 낙인 찍힌 후에나 겨우 내뱉는 초라한 변명에 불과하다면 누구에게건 비웃음의 대상이 될 뿐이겠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역량은 생각지도 않고 무모한 정치적 수를 두다 실패한 후에 고작 저런 서투른 변명을 일삼기도 하더군요. 책의 전제는 (다시 강조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 정치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니 그저 받아들이고 룰에 따라 현명히 처신하여 행여 패자가 되지 않게 애 쓰라"는 쪽입니다.

p118에서 저자는 카를 융의 말을 인용합니다.

 "비록 생물학적인 본능 과정들이 인격 형성에 기여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은 집단적 본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실제로 개성은 집단적 본능의 대척점에 위치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인격으로서의 개인적인 것은 집단적인 것과 언제나 전혀 별개의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말, "정치적 동물" 론을 다시 거명하는데, "... 저 아래 깊은 곳, 인간됨이 분화되지 않은 익명의 하나의 큰 덩어리 상태인 우리 종(種)의 집단적 상태로 내려갈 때, 당신은 당신 내면의 정치적 동물을 만나게 된다"면서, 자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 명언을 언제나 이런 맥락에서 해석했다고 회고합니다.

사실 이 고백은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정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야말로 하이 폴리틱스이며 입장이 서로 다른 인간들이 머리를 맞대고 대화와 타협으로 갈등상을 해소하는 게 가장 고등 단계의 사회가 보일 수 있는 역량"이라고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정치"에 담긴 용어의 다의성에 근본적으로 기인하는 혼란이며, 이 둘 중 무엇 하나를 택일해야만 한다고 고집하는 사람은 본인 자신이 단세포라서 그런 고집을 피울 뿐입니다.

여튼 저자는, 마치 인간이 숙명적으로 진 업보처럼, 아직 무의식이나 하부 의식 구조에 도사리는 "동물적 본능"을 채 떨굴 수 없는 인간들인 만큼, 투쟁과 갈등을 동물적 계산과 승부욕으로 돌파하고 이익을 챙기려는 현상, 행태를 회피할 방법은 없다며 다소 씁쓸하지만 냉정한 현실 인식을 드러내는 셈입니다. 실제로 동물들 역시 무리를 지어 타 집단을 몰아내고 영역을 확보한다거나, 그룹 안에서 수위를 차지하려 빈틈을 보고 책략을 구사하며, 아무 의미 없는 괴성을 질러가며 제 힘을 과장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을 과학자들은 목격하곤 합니다. 정상인들의 공동체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을, 예컨대 지적 수준이 많이 낮은 이들이 수용된 시설에선 약자가 강자에게 괴롭힘을 당한다거나, 속임수를 부린다거나, 허세를 떤다거나 하는 행태가 오히려 더 자주 목격된다고도 합니다. 중국인들이 보이는 모습 중, 누구 하나가 무리에 쫓기면 구경꾼들도 아무 이유 없이 소동에 가담하여 추격전을 벌이곤 하는 것도, 다 이런 하등 동물들의 혼란스러운 폭력적 충동으로 설명 가능합니다.

조종적 권력은 그 중에서도 인간의 고등한 지능이 독특히 빚어낸 행태에 속하는 편입니다. 조종적 권력이 곧 "막후 실력자"와 언제나 동의어는 아니겠지만, 저자는 자신에게 이 말이 곧 inconspicuous와 거의 언제나 연상 작용을 일으키곤 한다고 털어 놓습니다. 이 책이 꽤 어려운 주제를 잡고는 있어도, 이처럼 이론 체계의 까다로운 정합성 추구에서 다소나마 이탈하여, 개인 수상록처럼 편안한 논의도 가끔 풀어주는 데서 어떤 여유로움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막후 실력자"를 논하며 저자는 예컨대 <대부>의 콘실리에리, 일본의 센세(이 단어의 직접 표의., 즉 "먼저 난 사람"의 의미를 매우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 정도로까지 의식은 않는데도 말이죠), 혹은 <매트릭스>의 오라클이나 그 오라클이 지목한 "더 원" 같은 걸 파고듭니다. (요즘 미국에선 "더 원이 알고보니 스미스 씨였다!" 같은 우스개 밈(meme)이 큰 유행입니다만)

이 책의 결론은 이 문장에 어쩌면 다 들어 있습니다. "미시정치를 능숙히 실행에 옮기는 사람들은, 그들의 지위로 인해 획득된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총명함, 창의성, 미시정치의 기술 등을 이용해 목표를 성취한다.... 유도사범 원형은 권위적 문화의 탈바꿈을 이뤄낼 수 있는데, 이것은 즉응적이고 협력적이며, 부드럽지만 약하지 않다." 집단 안에서 잔꾀를 부리며 유리한 포스트를 차지하려 애 쓰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못난 열등감이나 원시적인 적대감을 얼토당토 않은 말로 포장하는 행태 따위는, 알고보면 동물적 본능의 발현에 불과하지만, 현명한 인간은 이를 객관적으로 냉철히 인식 정리하여 오히려 생존에의 방편으로 활용할 줄 안다는 겁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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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2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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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는 순자, 백이삭, 또 그의 부모(백이삭의 장인 장모) 등의 이야기가 주로 펼쳐졌더랬고, 이 2권에선 순자가 원래 배었던(?) 아기, 그 후에 백이삭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기, 그들이 장성해서 낳은 아이들이 커서 벌어지는 굴곡 많은 사연이 길게 이어집니다.

여러 대(代)의 굵직한 희비극이 교차하는 장편을 읽다 보면 핏줄의 기질과 업보가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구나 같은 감회에 마음이 숙연해질 때가 많습니다. 대체로 이런 소설들은 전대(前代) 인물들이 뒤로 갈수록 비중이 급격히 적어지거나 아예 자취도 없이 퇴장하는 수가 많아서 아쉬웠는데, 이민진 변호사의 이 작품은 1권의 주요 인물들이 2궝에서도 계속 얼굴을 비추며 일관된 주제를 부각하는 것 같아서 좋았습니다.

백이삭은 1권에서 폐결핵을 앓았기에 얼마 못 살리라는 예상을 (작품 속의 인물들이든, 작품 밖의 우리 독자들이든) 다들 할 수 있었죠. 이 2권에서는 폐결핵이 아니라 그 외 다른 중병들(후유증이나 합병증일 수 있죠)을 계속 앓다가 중반부쯤에 가서 죽고 맙니다. 백이삭과 순자네 집은 가뜩이나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고 그 형 요셉네도 마찬가지였는데, 맏아들 노아는 공부를 꽤 잘 하는 아이였고 조선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력만으로 와세다 대 입학 자격을 따 냅니다. 이 집안에서야 당연 경사로 여길 만했습니다. 노아의 백부 요셉은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한수에게 찾아가 후원을 부탁하려는 집안 의견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파친코를 운영하는 고로 사장의 호의를 구하는 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갑니다. 지금이야 첫손을 다투는 명문이지만 와세다 대학은 사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인 학생이 입학금이나 기타 기여를 할 재력 있는 집안 출신이면 넉넉히 받아 주었습니다(그래서 나이 좀 드신 분들은 와세다[조도전] 대학 알기를 좀 우습게 압니다). p111에서 "그토록 위대하고 전설적인" 같은 평판은 좀 과장된 면도 있습니다.

고로 사장은 그 앞에서 잠시 나왔었죠. 노아의 이부 동생인 모자수는 자기 형(이부형인지는 물론 몰랐겠으나)이 갓 대학에 입학할 무렵 벌써 사회에 한 발을 디뎌 돈깨나 버는 어린 매니저 노릇을 하고 다닙니다. 형이 공부에 대단한 적성을 지닌 것과 대조적으로, 동생은 뭘 외운다든가 계산을 꼼꼼히 해 내는 일과는 아주 담을 쌓았습니다. 그렇다고 바보냐 하면 그렇지는 않고, 오히려 머리가 잘 돌아가며 구변이 매우 좋습니다. 옷도 잘 입고 덩치도 크고 힘도 꽤 쓰며 잘생긴 편이라 여성들에게 인기도 얻는 편이죠.

이 모자수를 고로 사장이 꽤 잘 본 겁니다. 고로 사장의 모친이 제주도 해녀 출신이라는 건 이 2권 전반부에서 암시됩니다. 그렇다고 반쯤 같은 조선인 혈통 때문에 모자수에게 끌렸냐 하면, 고로 사장은 전혀 그런 타입이 아닙니다. 세상사 이치에 훤하고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자수가 풍기는 활력과 총기를 알아보고 이런 애를 종업원으로 매장에서 굴려야 장사가 잘 된다는 확신이 유일한 동기였을 뿐입니다. 녀석이 똑똑했기에 유리한 조건으로 써 준 것이지, 무슨 핍박 받는 조선인 처지가 불쌍했더거나 동병상련의 심경 같은 한가한 소리는 이 사람 앞에 씨알도 먹힐 리 없습니다. 1권에서 너무도 암담하고 절망적이며, 그 와중에서도 사람만 좋은 이들이 대거 등장해서 독자의 마음이 좀 어두워질만 했다면, 2권은 활력 있는 자본주의 경제를 일찌감치 성공적으로 도입한 일본 땅에서 악착 같은 몸부림으로 살아남고 적응한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소설의 재미를 더합니다.

앞서 말했듯 모자수는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는데, 고로 사장에게 고용된 것도 지아키라는 처녀(예쁘긴 하나 지나치게 남자들에게 꼬리를 치고 다니는, 그렇다고 딱히 처신이 아주 값싼 것도 아닌)를 돕다가 (가뜩이나 조선인이라고 차별 받고 감시의 대상이 되는 판에) 경찰 손에 입견될 뻔한 걸 그가 관여해 구해 준(지역 유지였으므로) 사건을 계기로 해서였습니다. 고로 사장의 매장에서도 모자수는 단연 여직원들에게 주목 받았는데, 모자수가 고른 건 유미라는 직원이었고, 둘이 잘 어울린다며 사장의 축복까지 받습니다. 안타깝게도 유미는 2권 중반부에서 (이 매력적인 여성에 대해 좀 길게 이야기가 이어질 줄 기대했으나) 교통사고로 죽고 둘 사이에 태어난 아주 건강하고 영민한 아들 솔로몬은 혼자 살아남습니다. 미국 크로니클 타입 대중 소설에서 사실 자주 봐 오던 전개이고 다만 인물과 배경이 한국, 일본 등으로 바뀌어서 이색적으로 다가왔을 뿐 어딘가 좀 익숙한 진행이긴 합니다.

모자수의 이부 형 노아는 와세다 대학에 드디어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데, 우리 독자들은 다 알지만 사업가 고한수가 저 순자를 현지처 삼아 희롱하다 낳은 아이죠. 학교에서 그는 오만하고 리버럴 기질 가득한 아키코를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집니다. 아키코는 사실 학교에서도 제멋대로의 기질 때문에 교수에게 찍혔던 판인데, 앞으로 교수에게 잘 보여 학계 진출을 은근 염두에 두는 노아로서는 이런 학생을 가까이해서 유리할 게 없었습니다(정치적 고려). 출신 성분상 노아 같은 조선인에 친근감이나 연정을 느낄 이유가 없는 아키코의 화통한 처신에 반해, 노아는 장래 생각도 그만 놓아 버렸던 거죠. 이 과정을 한 챕터 정도로 처리하는데 조금 빠르다는 느낌도 들지만 역시 유사 장르에서 익히 보던 패턴입니다.

노아는 어느날 아키코에게, "난 니가 나쁜 조선인이 아니고 좋은 조선인이라 생각하며, 이런 멋진 조선인을 우리 엄마아빠에게 보여 줄 수 있어서 행운인 듯해."란 말, 또 "고한수란 사람은 사실 니 아빠 아냐? 너무 닮았던데. 그리고 우리 아빠도 못 버는 그런 엄청난 수입을 어떻게 올리니? 야쿠자겠지 아마." 란 말을 듣고 바로 그녀와 헤어집니다. "니네 생각대로, 우리 조선인들은 이처럼 한순간에 돌변한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그 다음 서술이 충격적인데, "나쁜 조선인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나쁜 조선인으로 본다는 말이나 같은 뜻으로 차별을 내포하고 있다"는 게 노아의 깨달음이었습니다. 역시 똑똑하죠. 노아가 또 충격을 받은 건, 그전까지만 해도 고한수 사장이 왜 자신을 돕는지 깊이 생각 않고 넘어갔는데, 아키코 말을 들으니 그제서야 진상이 확 납득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날 즉시 어머니인 순자씨에게 모든 걸 추궁하고, 고 사장의 진짜 직업이야 순자씨 본인도 모르니 뭘 확인해 줄 것도 없었겠으나 여튼 노아는 학업이고 뭐고 모든 걸 때려치우고 종적을 감춥니다.

고로 사장은 나이도 좀 젊은 편인데 유독 순자 아주머니에게 큰 호감을 느끼고 그 아들인 모자수에게도 잘 대해 줍니다. "모자수"는 영어 Moses를 일본어로 읽은 것이며, 한국 이름은 백모세입니다. 예전 1980년대 중반에 200m 육상 스타였던 에드윈 모지스 때문에라도 익숙해진 이름이죠. "보쿠(白)" 같은 일본식 독음이나, "반도" 등 재일교포들의 창씨 성을 접할 때마다 우리 독자들의 마음이 짠해올 수밖에 없습니다. 소설 초반부에 위안부 이야기가 잠시 언급되고, 한국전쟁은 그리 깊이 안 다뤄지며 "싸움이 나는 통에 (고향인) 부산 영도에 가 볼 수도 없다"는 정도로 언급되는 정도입니다.

영국계 청교도나 네덜란드계 신교도가 초기에 이민 와 시스템을 발전시킨 미국에서, 예컨대 아일랜드계니 그보다 훨씬 뒤의 이탈리아계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차별을 받았습니까. 게으르다, 성질이 급하고 감정적이다, 폭력적이다, 등등.... 이런 편견 패턴이 일인들이 식민지 조선 사람들을 대한 태도에도 그대로 전이되어, 예컨대 이런 소설에서 인물들의 입을 통해 표현, 재현돠는 건데.... 문학 작품(혹은 영화)를 통한 전염일 수도 있고, 근대화 과정에서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하는 행태를 보고 일인들이 그대로 따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파친코는 첫째 모자수가 고로 사장의 매장에 취업한 도박장이기도 하고, 확률을 기막히게 조정하여 손님들로부터 최대 이익을 뽑아내는 고로 사장의 수완이 화려하게 꽃피는 상술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또 모자수의 이부 형인 노아가 학교를 그만두고 취업한 곳이 바로 어느 파친코의 경리직이었기에, 이 기묘한 생을 살아가는 두 형제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마주친 산업의 교차점이기도 하죠.

사실 이 소설에서 무작정 일본인들이 악마로 그려지진 않습니다. 집단으로서 다가오는 일본인은 한없이 잔혹하고 비이성적인데, 개개인은 인간적이고 푸근한 마음을 지닌 이들이 많은 듯 묘사됩니다. 반면 조선인 역시, 우리 동포이고 같은 상처를 안았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이해와 지지를 얻고 들어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타고난 성품부터가 한없이 비뚤어졌거나 거친 본색입니다. 개개인의 선의/악의와 무관하게, 큰 틀에서 사람 운명을 갈라놓는 건 그래도 역사의 모순과 체제의 의도입니다. 차별과 억압의 기제가 얼마나 많은 개인과 가정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성실한 개인들은 또 어떤 식으로 치열하게 이런 시련을 극복해 가는지 이 장편은 잘 그려냅니다. 개인적으로는 한 5권 정도 분량으로 이야기를 더 상세히 늘렸으면 더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모자수와 노아 두 형제 이야기만으로도 두 권치 사연이 충분히 나올 듯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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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식사전 - 중국 비즈니스에 꼭 필요한 중국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를 한 권으로 끝낸다! 길벗 상식 사전
이승진 지음 / 길벗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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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상대란 참으로 만만치 않습니다. 관광지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추한 유흥을 즐기는 행태를 보면, 아 저 사람들 갈 길이 아직도 멀었구나 싶기도 하고, 불과 이삼십년 전 우리도 저런 모습이지는 않았던가, 심지어는 아직도 우리 속에 저런 뒤떨어진 행태가 남지는 않았을지 냉정히 자신을 되돌아보게도 됩니다. 헌데, 막상 대륙에 가서 일 때문에 사람을 겪어 보면 이런 생각이 확 바뀝니다. "그 사람들 보통내기가 아니다", 혹은, "역시 유구한 세월 동안 상행위에 종사해 온 이들이라서인지 몸에 밴 그 무엇인가가 있다"든지, 그 근원을 쉽게 짐작할 수 없는 능숙한 요량이 분명 풍기는 바가 있습니다.

이 책은 현지에서, 실무를 행할 때 중국인들 고유의 독특한 개성과 관습을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우리 한국인 독자들에게 따끔히 일침도 가하는 내용입니다. 어느 민족이나 그렇긴 합니다만 우리도 참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맛에 길든 면이 있습니다. 우리 딴에는 멋스럽고 운치 가득한 행태들인데, 남들이 보기엔 매우 어색하고 스스로 바보  같은 수를 두는 듯만 합니다. 특히 중국 현지에 진출한 사업가들 중, 이처럼 한국 밖에서 잘 안 통할 법한 습성에 젖은 채 중국(과 중국인들)을 대하다가 큰 낭패를 보거나 하는 일이 꽤 잦습니다. 한국에서 영영 터잡고 살기만 할 것 같으면 문제가 없겠으나, 그렇지 않고 기어이 중국에서 승부를 볼 작정이면 이런 문제는 반드시 고쳐 나가야 합니다.

사장님들이 보통 "중국인들은 개인주의"라고 자주 말하곤 하죠. 이 점에 대해 저자는 좀 다른 해석을 내놓습니다. 우리도 퇴근 시간 후 업무상 카톡 안 하기 등을 회사 지침으로 정해 두는 분위기가 근래 확산되는 추세입니다만, 서양인들이나 (심지어) 중국인들이나 이를 잘 이해 못 하는 눈치입니다. 사실 회사 일에 전념하고 조직에 충성을 바치는 풍조는 그 자체로야 전혀 나무랄 게 아니나, 때로는 선을 넘어 공과 사를 모두 해(害)하는 결과까지 빚는 건 확실히 문제입니다. 이를 이해 못 하는 한국 사장님들을 중국인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건 또 그러려니 하는데, 심지어 서양인들조차 "기업 문화는 서양과 중국이 정상이며, 당신네들이나 일본은 이상하다"고 지적하는 건 확실히 우리가 좀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이 책은 이처럼, 읽다 보면 속이 뜨끔해지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우리보다 못하다고 비웃곤 하던 사람들이, 알고보니 오히려 더 상궤와 정석에 충실한 길을 걸었더라는 깨달음이란 확실히 충격젹이긴 합니다. 많은 중국 기업들은 이미 세계 유수의 우량 회사로 발돋움했고, 부자들도 셀 수 없이 양산되어 돈을 쓰는 스케일부터가 한국의 졸부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한국에서 돈깨나 쓰며 행세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이들 중국 부자들이 호기롭게 과시적으로 써 대는 돈 부스러기를 받아먹으며 잘난 체 하는 계층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래 반중 혐중 분위기가 부쩍 고조되는 것도, 우리보다 중국이 꼭 문화나 경제상의 단계에서 뒤쳐져서가 아니라, 우리 뒤를 바싹 추격해 오는 중국에 대한 경계의식이나 조바심 따위가 그 원인이 아닐지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 회사는 가족 같은 회사입니다." 사실은 급여를 넉넉히 주지 못할 때 구차한 변명으로 내거는 사탕발림에 불과하고, 급여도 시원찮으면서 이런 가당찮은 슬로건을 내세우는 한국 회사나 사장님들을 중국인들은 꽤 경멸한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바람직하지 못한 직장, 회사 문화의 폐단이 누적되어 오다 작금의 갑질이니 미투니 하는 대혼란이 빚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일을 해 주고, 회사는 사원의 업적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해 주며 서로 윈윈한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예쁘장한 여사원 하나를 옆에 두고 과연 통역 업무를 하기나 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장식품인지 모를 용도로 수행시키는 사장님들을 중국 현지에서 흔히 보는데, 한국 사람이면 그 심리가 뭔지 훤히 짐작(공감?)되고도 남지만 중국인(혹은 그 어떤 외국인이라도)은 무슨 생각으로 저 사람이 저러는지 그저 고개가 갸웃해질 뿐입니다. 꽌시 꽌시 하며 노래방에서 큰 소리로 떠들고 술자리를 강요하지만, 남는 건 아무것도 없고 급할 때 중국 공무원을 찾아 청탁이라도 하면 어느새 딴청을 피우며 모르쇠로 나옵니다. 억울하게 뒤통수를 맞는 게 아니라, 겉발림 관계를 "꽌시"로 착각하다가 대가를 치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국 국기는 보통 오성홍기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공모를 통해 정해진 국가의 상징이라는 건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국기나 국가가 공산 혁명 완수 직후인 꽤 오래 전에 정해졌는데, 처음에는 도안이 그리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선정위원들이 고생깨나 했다고 합니다. 예선과 심사를 통과한 후보가 아니라 번외 군에서 골랐다는 배경 소개가 무척 흥미로우며, 당이나 국가나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건만 당시로선 거액의 상금이 지급되었다는 사실도 우리에게 매우 놀랍게 다가옵니다.

중국을 세운 혁명 1세대, 그 중에서도 마오쩌둥이 이 나라에서 어떤 신화적 위상인지는 우리도 잘 압니다. 많은 이들은 덩샤오핑을 두고 과감한 개혁 개방 정첵을 이끌며, 마오의 독재가 낳은 폐단 때문에 해체 위기까지 몰린 국가를 구원했다고 여깁니다. 헌데 덩샤오핑은 정작 국가 주석직까지 오른 적이 없으며, 1세대인 양상쿤, 완리 등이 주요 공직을 수행했고, 이분은 사실 중앙군사위원회만 장악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고 유명한 말을 남긴 마오의 태도를 계승이나 하듯, 덩샤오핑은 그저 군대를 장악한 사실만으로도 중국을 능히 다스렸습니다. 현재의 시진핑처럼 국가 주석, 당의 수반, 군의 총수 등을 모두 겸직한 지도자가 나오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두 기를 연임한 후 한 peroid를 격하고선 다음 후계자를 지명하는 전통까지 처음으로 사라진 터라, 앞으로 중국 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극히 불투명해진 상황이기도 합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이 있듯 중국은 지역이 너무도 광대하고 물류 등 인프라가 열악하여 시민들이 겪는 불편상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헌데 이런 악조건을, 알리바바 같은 영리한 전자 상거래 업체가 가장 효과적인 방식의 사업 기회로 활용하여,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쓴 수완을 보면 사실 선진국이나 심지어 우리 한국에서도 일찍부터 개발 적용해 온 방식인데, 내수 시장이 워낙 크고 현지인들의 입맛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이니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중국은 기회의 땅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이런저런 기업이나 CEO들이 어떻게 해서 그처럼 빛나는 성취를 거둘 수 있었겠습니까? 수억 소비자들의 "마음"을 살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인이라고 해서 그저 쉬운 땅 짚고 헤엄치기를 한 것만도 아니라서, 같은 중국인 사업자끼리도 살인적인 경쟁을 벌였고, 유능한 현지 인재는 돈 아끼지 않고 영입하는 정성을 들였기에 오늘의 그들이 있을 수 있었지요. 현지에서 성공하겠다며 종래의 구태의연한 방식에만 의존하는 사장님들이, 소비자나 종업원들의 내심, 생리도 전혀 이해 못 하고, 지난 그들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소양도 부족한 채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이 책은 단지 중국인에 대한 상식만 알려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 한국인들의 부끄러운 민낯에 대한 반성에잠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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