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즈 상하이 : 쑤저우·항저우 - 2025~2026년 개정판 프렌즈 Friends 40
서진연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하이는 영국인들에 의해 개발된 이래 백 년 넘게 국제 도시로 영화를 누렸으며, 공산 혁명 직후와 문혁 기간 동안 침체하다 덩샤오핑 집권 이후 훌륭한 영도자들을 만나 다시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하는 중입니다. 산업의 발달상으로나, 그로부터 파생한 문화, 도시의 각양 미관 등으로 볼 때 외국인들도 찾아볼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문충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작성한 후기입니다)



p99를 보면 중화예술궁이란 곳이 소개됩니다. 이런 명칭의 시설은 베이징 등 전통의 화북 지방에나 있을 법한데, 2010년 상하이 엑스포 때 여기가 중국관으로 이용되었다고 책에 설명이 나옵니다. 아직 정규 엑스포를 개최한 바 없는(1993년은 간이 엑스포였습니다) 한국으로서는 이조차도 부러울 뿐입니다. 또,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시설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되는 줄 모르는 입장에서, 일단 보고 배워야 할 사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프렌즈 시리즈가 언제나 그러하듯 상하이에서만 즐길 수 있는 별미들이 잔뜩 소개됩니다. p105를 보면, 전취덕이라는 음식이 나오는데, 이건 한국식으로 읽어서 그렇고 중국식으로는 첸쥐더라고 부른다고 책에 역시 나옵니다. "덕"은 덕스럽다는 덕(한자)이며, 재료가 베이징 덕(duck. 오리)라는 점과는 아무 관계 없으며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상하이의 명동이라 불리는 곳이 난징둥루라고 합니다(p115). 상해에 왜 남경의 이름을 딴 지명이 있는지 궁금할 수 있는데, 이 길의 방향이 난징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특별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이 매력적인 난징둥루(동녘 동, 길 로)를 설명합니다.



와이탄도 p121 이하에 소개됩니다. 한국어로는 "외탄"이라 읽히겠는데, 반대로 내탄이나 네이탄 같은 지명은 없으므로 이 지명은 분명 19세기 영국 등 제국주의 세력이 침투해 들어 온 후 생긴 것이겠습니다. 책에서 "외국인의 강변"이라고 그 유래를 설명한 건 그래서 정확합니다.


앞에선 난징둥루가 나왔고 p189에는 난징시루가 나옵니다. 당연히 서녘 서, 길 로를 저리 중국식으로 발음한 것이고, 시루떡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책에서는 이곳을 "차분하고 세련된 명품 거리"라며 난징둥루와 대비시킵니다. 근처에서 먹거리를 찾으려면 우장루를 방문하면 되겠습니다.



상해 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바로 떠오릅니다. p210에 그 설명이 적절하게 잘 나옵니다.


아무래도 상하이가 외국인들이 일찍(19세기)부터 침투하던 곳이다 보니 각종 조계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p236 이하에는 우캉루, 안푸루 등이 소개되는데, 역시 프렌즈 특유의 선명하고 예쁜 사진, 정확한 설명이 곁들여져 유익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와인드 : 하비스트 캠프의 도망자 언와인드 디스톨로지 1
닐 셔스터먼 지음, 강동혁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급적으로 중절?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한참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이 소설 제목 UNWIND가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줍니다. 풀어헤쳐진 걸 도로 말아올려, 원래 상태로 돌려 놓는 것인데 소설에서는 코너의 부모가 자신의 아들에게 그런 짓을 하려 듭니다. 이 끔찍한 조치는 "부모의 동의 하에" 진행된다고 하는데, 아무리 청소년이라고는 하나(유아, 아니 태아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신체에 대한 처분권을 어떻게 부모가 가진다는 말입니까? 벌써 작가의 문제 의식부터가 심상치 않은, 걸작의 포스를 풍깁니다.


"아직도 저 할머니가 우리를 돌봐 줄 수 있을 거라 믿냐?자기 몸 건사 하나 힘들다고.(p144)" 코너의 지적은 날카롭습니다. 도와 주려 해도 당사자에게 그럴 힘이 있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누가복음 10장을 보십시오. 사람을 돕는 데에는 재력과 신분, 혈연 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 선의(good will)가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아직도 사람을 믿니? 주보시에서 자라고도?" 리사의 신념도 옳고, 코너의 내적 분노도 그것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문에는 언제나 언와인드 이야기가 나와. 우리 이야기가 빠졌다면 그건 뭔가 이유가 있는 거지.(p93)" 청소년이라고 해도, 아니 청소년이기 때문에, 사회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특히 대중 앞에 어떻게 특정 종류의 사건이 노출되는지 그 방식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다 우리 뉴스에 나오는 것 아냐?" 그런데 미디어는 그들의 사연을 다루지 않습니다. 검열에는 뭔가 음험한 동기가 작용하는 게 보통이죠. 과거든 미래이든.


"그는 열기에 익숙한 듯 보인다. 초록이나 카키가 아니라 남색 제복이다.(p261)." 이 남색 제복이란 건 the American Civil War 당시부터 해서 유구한 역사를 지닌 통일, 무력 과시, 실력 행사의 상징입니다. 생명파와 선택파는 이 소설의 세계관뿐 아니라 우리 독자들이 몸 담고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에 엄연히 벌어지는 전쟁의 양 당사자입니다. 리사는 말합니다. "남색이 어느 편 군복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둘 모두 패배했으니까." 우리들도 무엇이 본질인지를 잊지 않고, 싸움에서의 승리 자체를 목적으로 삼다 모두가 공멸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물농장 (오리지널 초판본 고급 양장본) 코너스톤 착한 고전 양장본 3
조지 오웰 지음, 이수정 옮김, 배윤기 해설 / 코너스톤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리지널 초판본 디자인이며 양장본입니다. 확실히 예전 책들은 독특한, 고풍스러운 분위기입니다. 기울어진, 날카로운, 길게 늘여진 폰트이며, ANIMAL FARM이란 제목 밑에 a fairy story라는 부제가 붙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누가 읽어도 이 이야기는 당대의 정치 현실을 풍자하는 의도인데, 혹시나 제기될 시비를 차단하려고 이런 문구를 덧붙였을까요? 아무튼 이 고전은 읽으면 기분이 씁쓸하고, 곳곳에 박힌 명언들의 통찰이 놀랍고, 오웰의 정의감과 신조가 존경스럽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사실 원서도 그렇고 번역본도 동무(예를 들어 p16 같은 곳. comrade)라는 단어 때문에, 초등학생이 읽어도 이게 어떤 풍자의 의도인지 다 눈치챌 수 있습니다. 메이저 영감은 동물들을 모아 놓고, 지극히 사리에 맞으며 감동적이기까지 한 연설을 행합니다. 메이저 영감이 자신의 이상이 첫발을 디디는 걸 채 못 보고 죽은 건 칼 마르크스를 닮았고, 동물들과 더 밀착해서 활동한 걸 보면 레닌 같기도 합니다. 나폴레온은 누가 뭐래도 스탈린이며, 불쌍하게 축출당한 스노우볼은 트로츠키라는 데에 거의 이론이 없습니다. p24에 나오는 선전선동 담당(전체주의 국가에서는 이 기능이 무척 중요하죠) 스퀼러는 (이론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몰로토프라고들 말합니다. 이름을 스퀼러라고 지은 걸 보면 선전 담당에 대해 오웰의 혐오감이 무척 심했던 것 같습니다.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p44) 현대에도 공동체의 진지한 공론 형성을 막는 대표적인 반지성주의 행태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도층의 주장에 약간의 이의만 제기해도 "그래서, 당신은 지금 적들의 논리에 찬동하는 반동 노릇을 자청하는 건가? 입 다물어!" 이건 민주주의의 기초를 말살하는, 가장 어리석은 전체주의적 자멸의 시그널입니다. 어떤 조직에서도 이런 식의 입틀막으로 의사형성과 정책 집행이 이뤄져서는 안 됩니다. "동무들, 존스가 다시 돌아오는 걸 보고 싶소?" 아니,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메이저 영감은 지하에서 이 꼴을 보고 얼마나 통탄했겠습니까? p64에는 "개들은 존스 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폴레온에게 꼬리를 흔들어댔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p77에서 스퀼러는 처음으로 나폴레온을 지도자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왜 7계명의 내용이 슬쩍 바뀌었을까요? 스퀼러는 탁월한 궤변으로, 무엇이 본질인지 생각해 보라며 신조의 훼절을 합리화합니다. 거 참 어디서 많이 보던 수법 같습니다. 제가 21세기 사람이니 90년 전 스탈린 패거리의 가증스런 수법을 목도했을 리는 없고, 분명 최근에 이 비슷한 걸 봐서 치를 떠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클로버처럼 머리가 나빠서 구체적으로 뭔지는 기억이 안 나고, 그저 "잘되어가는 중이겠지"라며 복서처럼 현실을 외면합니다.

일제 강점기 내내 조선의 소작농들은 종래의 지주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내고, 이민족의 압제에 시달리는 이중의 억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진보 세력은 반외세 반봉건을 부르짖었는데, p86을 보면 암탉들은 혁명 이후에 오히려 더 가혹하게 소출을 빼앗깁니다.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집행한 집단농장화 정책과 홀로도모르를 풍자한 건데, 이렇게 농민들의 가혹한 희생이 따른다면 제정러시아의 구태와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p87에는 나폴레온이 다른 농장주들과 관계 개선을 도모한다는 말도 나옵니다.

실제로 1930년대 전운이 고조되자 영국, 프랑스 등은 소련과의 연대를 잠시 모색했지만 이내 무성의한 태도로 돌아섰습니다. 그럼 나치 독일과 손을 잡고 같이 소련을 쳤으면 어땠을까? 히틀러는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식으로 경제를 재건하려 했고, 어차피 영, 불과 함께 갈 수 없었기에 서쪽으로 치고나올 수밖에 없었겠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프랑스를 불시에 쳐서 굴복시키려 했으나, 병력은 물론 전반적인 국력이 우월한 프랑스에게 반격을 받고 나치가 망했어야 정상이었는데, 하필 당시 너무도 무능한 자들이 정권을 잡은 터라 거꾸로 프랑스가 망하고 말았죠. 저는 만슈타인의 그 전술이 그렇게까지 탁월했다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p143에서는 드디어 나폴레온이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며 네 발은 좋지만 두 발이 더 좋다는 새 구호가 나옵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세상에! 1939년에 폰 리벤트롭과 몰로토프 외상, 스탈린 사이에 맺어진 불가침조약은 전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고 이 작품이 여기서 돌연 마무리되는 것도 당시 오웰이 받았던 충격을 반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84 (오리지널 초판본 고급 양장본) 코너스톤 착한 고전 양장본 4
조지 오웰 지음, 박유진 옮김, 배윤기 해설 / 코너스톤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도 양장본이며 초판본 당시의 디자인입니다. 그나마 제가 여태 리뷰한 중 이 책은 초판본 출간 연도가 늦은 편이라서 위화감이 덜한 것 같기도 합니다. <동물 농장>은 1945년, 이 책은 1949년에 초판이 나왔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빅브라더가 사회 곳곳을 감시하며 통제한다는 발상은 글쎄, 1948년 당시의 기술 사정으로는 좀처럼 떠올리기 어려웠지 싶은데 대단한 상상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빅브라더 비슷한 시스템이 작동하는 건 겨우 지금에서나, 중국 같은 나라에서 가능합니다. 중국은 작금의 발달된 네트워크, 빅데이터 활용 기술을 들며 앞으로는 자신들의 방식이 체제 대결에서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고 10년 전쯤부터 이미 장담해 왔습니다. 이 정도 테크놀로지의 발달이라면 본격 계획 경제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1984년 당시 백남준은 당신이 예언했던 그런 암울한 미래는 오지 않았다며 비디오아트를 통해 유쾌하게 오웰을 비웃었는데, 4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오웰리언 유니버스가 성큼, 비로소 다가왔다는 게 아이러니입니다.

저는 또 놀란 게, p23에 나오듯 유라시아, 오세아니아, 동아시아 거대 삼국으로 통합 정립되었다는 정세 설정입니다(p245도 참조). 지금처럼 가면 결국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인도, 중동 등이 소홀히 다뤄지는 게 살짝 아쉽지만 1948년 당시에는 이들 지역이 전혀 힘을 못 쓸 무렵이었기에 무리도 아닙니다. 인도는 겨우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하니 마니 하는 판이었고 중동은 원래 오스만 투르크의 패권 아래에 숨죽이던 초라한 신세였습니다. 터키가 1차 대전 참전으로 완전히 망하고 나서야(1919) 중동 여러 부족이 주권국 행세를 하기 시작했죠.  

p108를 보면 그런 말이 나옵니다. "어쩌면 당이 옳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1+1=2가 참이라고 대체 누가 보증할 수 있는가? 중력의 법칙이 틀렸다고 해도 누가 확실한 반론을 제기하겠는가?" 사실 날 설득해 보라며 까마귀처럼 울부짖는 무리들이 믿는 건 이치와 논리, 이성이 아니라 그저 폭력입니다. 폭력 앞에서는 끽소리도 못하며 1+1=5라는 억지에도 기꺼이 수긍하는 무리들이, 존중되어야 마땅한 과학적 진리 앞에서는 "난 아직 설득되지 않았다"며 끝내 바리케이드를 치고 이불속 유격전을 벌입니다. 제일 같잖은 게 뼈속까지 노예의 혼을 가졌으면서 당장 주먹이 날아오지 않는 판에서만 투사연하는 작태입니다. 뭘 머리아프게 따집니까 따지길. 당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겠지.

p136을 보면 가혹한 고문을 통해 불순분자들에 대해 사상개조를 하는 과정이 언급됩니다. 부하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소련 공산당의 가장 총명한 이론가이자 지도자들이었는데 재판정에 끌려나와 양순하게 모든 죄목을 인정해서 1930년대 후반 이를 지켜 본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그랬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양심과 사실 모두에 어긋나는 바를 아무 이의 없이 긍정하는 모습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영국군에 잡혀 심문을 받고 화형에 처해진 육백년 전의 잔다르크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 혁명가들에게 대체 무슨 짓거리를 저지른 것이었을까요? p136에 해답이 있습니다.

p234에서 오브라이언은 줄리아에게 말합니다. "술이 반이나 남았군." 역시 혁명가의 필수 자질은 대책없는 낙관주의와 튼튼한 간(肝)입니다. 인정하는 동시에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중사고의 원칙! 이렇게 뻔뻔스러워야 전체주의자가 될 기본 자격이 갖춰지는 것이겠죠. 전쟁이란, 부분적으로는 파괴를 통해 재생산을 유도하며, 체제 내적 불만을 외부로 돌려 모순을 은폐하는 매우 효율적인 기능을 수행합니다. "자네 손가락이 몇 개인가?" "네 개, 다섯 개, 아니 뭐라도 상관 없으니 고통을 좀 멈춰줘요!(p327)" p390에서 윈스턴은 하찮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마침내 승리하고 빅브라더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사랑하게 됩니다. 아, 해피엔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생여행 1 - 전생퇴행 최면치료, 존재와 내면의 치유 전생여행 1
김영우 지음 / 전나무숲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연 전생이라는 게 있을까요? 2차대전의 영웅 조지 S 패튼은 자신이 전생에 알렉산더, 나폴레옹 같은 불패의 야전사령관이라고 믿었는데 워낙 자기도취성향이 강한 인물이라 그런 강한 주관적 확신이 제3자에게도 객관적 증거가 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떤 "기억" 비슷한 것을 증언하는 이들이 있을 뿐더러, 이 책 저자분처럼 전문의로서 높은 명성을 지닌 분까지 전생에 대해 호의적인 연구를 이렇게 체계적으로 내놓으시는 걸 보면 뭔가 귀가 솔깃해집니다. 우리만 해도 윤회의 이치를 핵심 교의로 삼던 불교를 천 수백 년 동안 믿어온 민족이라서 더욱 그런 듯합니다.

(*북유럽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환자들의 환각은 대개 두렵거나 지리멸렬하여 일관된 스토리를 읽을 수 없다(p28)." 그렇습니다. 무엇인가를 명징하게 언어로 표현한다는 건 사실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닙니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환자들은 대개 자신들이 겪은 과거에 대해 큰 상처를 품고 삽니다.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공포감이 몰려오고, 이 공포감에 압도될 뿐 아니라 말로 재구성하려는 그 순간 다시 그 순간이 머리에 재생됩니다. 어떻게 두려움 없이 스토리를 선명하게 진술하겠습니까? 이게 가능하다면 그는 더 이상 환자가 아니며 병원에 다닐 필요도 없고, 그가 무슨 증언을 한다면 그건 아마 공익을 위한 봉사에 가까울 것입니다.

영혼이 육체를 벗어난다는 게 가능할까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침대에 누운 환자를, 천정 정도의 높이에서 그 환자의 영혼이 내려다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가 너무도 생생하기 때문에, 혹 임사 체험을 했다는 이들이 이 비슷한 증언을 내어놓긴 해도 완전히 신뢰가 가지는 않습니다. "다른 문화권에서의 전생을 기억하는" 환자들의 증언은 어떨까요? p38에서 저자는 "집단무의식"이라는 개념으로도 이 현상은 설명이 안 된다고 합니다. 전생이라는 게 있어 실제로 그 생을 살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구체적인 진술이, 호세-원종진씨의 입에서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어떤 이는, 원종진씨의 청일전쟁이나 레콩키스타 상황이, 1980년대 KBS 드라마 <노다지>나 1960년대 클래식 <엘 시드> 같은 걸 보고 재구성되었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습니다.

p91 이하에서 원종진씨는 또다시 신비스러운 증언을 이어갑니다. "사람을 악하게만 생각하는 것과, 행위 때문에 선하게 생각하는 건 둘 다 옳지 않습니다." 참 심오합니다. 행위로 사람이 선해질 수 있다는 건 로마 가톨릭의 오랜 교의이며, 마르틴 루터라든가, 특히 장 칼뱅은 구원 여부는 오로지 신이 태초부터 독점적으로 정해 놓음이지 인간이 제 하찮은 의지로 행위한다 하여 섭리에 변화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이른바 예정설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이분은 그럼 전생에 칼뱅이라든가 프랑스에 거주하던 위그노 교도였을까요? 이어 서양고전음악의 음계를 설명하며 삼위일체의 이치에까지 유비하는데 저자의 퇴행 지시에 따라 비로소 긴 변설을 마치고 휴식합니다. 대단한 학식인데 이게 모두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만약 정말 전생의 기억 잔재라면 해당 언어로도 설명이 가능한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동물에게는 영혼이 있을까요? p146에서는 요가난다의 책에서 저자가 읽은 바를 인용하며, 어린 사슴이 지극한 간호를 통해 살아나기 직전이었으나 요가난다의 꿈에 사슴의 영혼이 나타나 자신을 놓아달라고, 이 생을 여기서 마쳐야 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다고 간청하는 걸 보고 비로소 치료를 중단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사람과 때로는 비슷한 감정, 유대의식, 친밀감을 형성하는 패턴을 보면 마냥 허황되다며 평가절하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들 마음 깊은 곳에 이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는 강렬한 끌림이 이미 만들어져 있습니다.

원종진씨는 p186 이하에서 또 신비스러운 증언을 계속합니다. "행위는 남 보라는 듯이 겉치레로 이뤄져서는 안 되고, 나의 선행이 내 이름을 드러내게 하고 내가 이를 즐긴다면, 이는 허상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역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며 신랄하게 질타했는데, 원종진씨의 이 신비한 증언은 과연 어디까지 그 오의를 떨치는 것일까요? 이어 김금례라는 (전생에서의) 이름을 지닌 환자분이 또다른 흥미로운 증언을 이어갑니다. 김영우 닥터께서 리딩하는 전생체험의 행로는 점점 흥미를 더해 갑니다.(1권 리뷰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