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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벽
요로 다케시 지음, 정유진.한정선 옮김 / 노엔북 / 2025년 6월
평점 :
나를 부지런히 가꾸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내면을 들여다 보며 무엇이 참된 나였는지 알아내는 노력도 물론 큰 의미가 있고 더 나은 나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고, 그런 노력에만 몰두하다가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의 상당 부분이 지나가 버린다면 이 역시도 문제입니다. 모색과 탐구는 적정 선까지만 하고,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인정하고 스스로 그에 대해 확신을 갖는 게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북뉴스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자연의 신비는 실로 놀랍습니다. 흰개미는 목재를 먹고 살기 때문에 인간 거주의 안전에 아주 큰 해를 끼치는 곤충입니다. 그런데 흰개미의 생체만 놓고 보면 셀룰로스 분해 효소가 없어, 목재를 먹어 봐야 소화를 시킬 수 없다고 합니다. 이 기능은 흰개미의 위장에 기생하는 아메바가 대신하며, 만약 흰개미 주변에 열을 가하면 아메바는 모두 죽지만 흰개미는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목재로부터 셀룰로스를 섭취, 동화할 수 없으므로 목재만 먹고 살던 종은 결국 모두 죽게 되죠. 여기서 저자는 질문을 제기합니다(p59). 흰개미와 아메바는 같은 생명체라고 봐야 하는가? 어려운 질문이나, 저자는 일단 "공동 운명체" 정도로 선을 긋는데, 만약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사람과 세균 등의 관계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여튼, 저자가 이 예에서 끌어내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만의 독립된 자아라는 게 알고보면 얼마자 허망한 개념인가? 우리는 우리와 일견 아무 관계 없어 보이는 사람들과도 긴밀히 소통하며, 생존을 위한 경제활동에서도 서로 밀접히 의존한다. 뿐만 아니라 저 사람이 표명하는 의견과 감정, 저 사람이 끼친 사소한 영향이 돌고돌아 큰 파장을 만들어 내게로 돌아올 수 있다. 과연 저 사람과 내가 완전히 구별되는 인격체이며, 아무 관계 없는 남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저자는 일본 의사분인데, 전근대 시절부터 공동체의식을 강조해 온 우리 동아시아인들의 정서를 많이 반영했기에, 이 주장 역시 우리들의 어떤 근원적인 공감대를 자극하는 면이 있습니다. 저 타인과 나를 선 하나로 구별하는 자체가, 세상과 우주의 작동 원리를 이해 못하는 무지의 소치일 수 있다는 게 저자의 함의입니다.
"이상적인 자아를 만들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야 한다." 일본인들은 미국 페리 제독이 군함을 끌고 와 대포를 쏘며 경제 개방을 요구했을 때, 서양 문명의 발달된 현황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와 타인이 명확히 구별 안 되는 농업공동체의 삶은 전근대적이고 미개한 것으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의학, 물리학, 화학, 각종 공학 등을 공부하고 다시 태어난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불교에서는 같은 영혼이 몇 번이고 다른 삶에서 다시 태어난다고들 상상하는데 이 역시도 개인의 삶 그 독립선에 대한 자각이 부족한, 비이성적 미신으로 격하되기도 했죠.
그러나 저자는 의사로서 임사(臨死) 체험이라는 것도 가까이서 지켜 볼 수 있었습니다. 혼이 일단 육체로부터 이탈했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잠시의 시간 동안 나를 벗어나 관찰한 나의 모습은 매우 낯설고, 그토록 애써서 집착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도 느껴졌다고도 증언됩니다. 물론 당사자들의 이런 발언들은 그 디테일을 하나하나 신뢰할 건 아닙니다. 사람의 의식이나 기억은 사후(事後)에 편할 대로 조작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임사체험을 책이나 미디어에서 이미 접하고서, 자신도 비슷한 체험을 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없다고는 못 합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죽음 앞에서 "나는 완전히 독립된 영혼이며 타인들과 분리된 개체이다."라고 과감히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한 줌의 흙으로 변해야 할 상황인데 말입니다.
저자는 p128에서 현재의 일본 정치계를 맹렬히 비판합니다. 당대의 근시안적인 이익을 위해 함부로 국민의 세금을 쓰며 이 중에는 좁고 복잡한 일본의 국토와 자연에 민감한 영향을 항구적으로 남길 위험한 사업도 많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별개이며 자연은 인간에게 정복 대상일 뿐이라는 못난 생각도, 내가 사회와 세계로부터 고립된 개체라는 아집이 그 근원입니다. 좀 더 멀고 깊게 세상을 볼 필요가 우리 모두에게 절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