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동작연출 드로잉 워크북 - 기초부터 기획, 연출, 제작, 마케팅까지!, 개정판
차양훈 지음 / 두드림미디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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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를 보면 애니메이션의 종류는 대개는 제작 방식에 의해 구분된다고 합니다. 아주 예전에는 모두가 2D였고 초당 24매면 풀 애니메이션, 초당 12매 이하면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나누었다는 말이 책에 나옵니다. 나이 든 세대라면 이 말이 추억과 함께 정겹게 다가올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풀 애니메이션 방식으로는 제작이 거의 이뤄지지 않으며, 특정 장면을 길게 늘이거나 줄이는 식으로 처리한다고 책에 나옵니다. 

다음 페이지에 보면 클레이 애니메이션이 소개됩니다. 아마 이 말 하면 대뜸 1996년작 <월레스 앤 그로밋>이 떠오르는 이들도 있겠습니다. 그 외 스크래치 방식, 절지 방식, 퍼핏 방식이 두루 소개되는데 이 모두가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책에 나옵니다. 1996년 훨씬 이전에 컴퓨터그래픽 방식이 도입되었지만 클레이는 그 나름 독특한 미감에 호소하기 때문에 장르로서 통째 없어지기에는 사실 아깝습니다. 어렸을 때 장난으로 많이들 했던, 책 귀퉁이에 연속된 그림을 그리고 후루룩 넘기는 플립북 방식도 잠시 언급이 있습니다. 이 모두가 인간만의 창의, 호기심의 소중한 산물들이었습니다. 비록 기술 진보의 흐름에 밀려 도태되었으나 그 정신만은 예술가들이 간직할 필요도 있겠습니다. 

요즘은 유튜브를 널리들 이용하기 때문에 시간이나 형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개인이 기술과 아이디어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신의 컨텐츠를 세상에 릴리스할 수 있습니다. p27을 보면 혹시 유아용으로 만드는 애니메이션이라면 3D로 만드는 게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유아들은 사선으로 기울여 그린 투시도 같은 개념을 이해 못 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 정육면체의 경우 옆에서 그린 그림이 있다면 이를 입체로 보지 않고 평면 다이아몬드꼴로 보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아들에게 입체를 더 확실하게 인식시키는 데에 3D를 쓰는 편이 훨씬 낫다고 하네요. 

이 책은 특히 제1장, 제2장 하단에 오렌지색으로 Behind Story가 자주 삽입됩니다. 애니메이션의 역사, 흥미로운 에피소드, 기술적으로 간과하기 쉬웠던 유익한 팁 같은 게 이 코너에 소개됩니다. 예를 들어 p33을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이 처음으로 미국에 진출했을 때에는 크게 환영을 못 받았다고 합니다. 움직임이 적고 대사 위주의 연출이라서 그랬다고 하네요. 물론 이후에는 "덕 중의 덕은 양덕"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동아시아보다 오히려 북미에서 더 열혈인 팬 집단이 나타날 정도가 되었습니다. 여튼 재패니메이션의 특징을 지적한 저 말은 여전히 타당한 게, 실사판을 만들거나 할 때 감독들이 애를 먹는 게 이런 포인트에서이니 말입니다. 

미술의 기본은 역시 구도입니다. p77을 보면 화면 왼쪽의 루킹룸(looking room), 뒤 공간의 리어룸(rear room)을 적절히 배치해야, 답답한 느낌이나 바보스러운 느낌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예사롭게 보던 부분도 사실은 이처럼 치밀한 이치가 배후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캐릭터가 이동하는 중이라면, 저 루킹룸은 리딩룸(leading room)이 되어 어색함을 피하게 합니다. 말로만 이렇게 설명하면 무슨 뜻인가 해도, 책에는 컬러 도판, 예시가 일일이 제시되었기 때문에 직접 책을 보면 직관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황금비율은 내분과 외분의 비가 같아지는 지점에서 발생하는데 그 값은 대개 1:1.618이라고 책에도 나옵니다. 그럼, 애니메이션에서 황금분할 구도는 무엇인가? 책에서는 4:3화면을 9분할하여 그 교차점들에 피사체를 두는 게 기본이라고 합니다. 세로선에는 인물, 가로선에는 배경의 아이 레벨(eye level)을 놓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을 볼 때 무심하게 넘기던 게 사실은 이처럼 치밀하게 최상의 효과가 나올 만한 이치가 자리했던 것이죠. 무엇이 우리의 미감과 취향에 가장 효과적으로 어필할지에 대한 고민이, 앞선 전문가들(이에는 멀리 르네상스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포함됩니다)의 시행착오 끝에 이처럼 결과물로 정리된 것입니다. 

p102를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연출은 항상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자." 연출은 그냥 예쁜 화면만으로 꽉꽉 채우는 것도 아니고, 허겁지겁 이야기만 이어가는 과정도 아닙니다. 이 페이지를 보면 주관적 구도(책에 설명이 나오듯 이 말은 캐릭터의 시선을 뜻합니다. p97에도 이 설명이 있었습니다)로 대본의 내용을 보여 주는 게 81번 컷입니다. 81번 컷은 책에서 예로 든 스토리보드에 나오는 장면들 중 하나인데,  이 책은 이처럼 실제 스토리보드(예)가 자주 삽입되기 때문에 독자들이 제작 실무의 가장 생생한 순간을 엿볼 수 있습니다. 

p164를 보면 동화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그 뜻은 원화와 원화 사이의 그림을 그려 주는 작업이라고 합니다. 책에 보면 한 작품에서 쓰는 원화 작업자는 수십 명에 달하는데, 아무리 캐릭터 생김새가 딱 정해졌다고 해도 그리는 사람마다 차이가 나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원화를 수정하여 원작(=원화작감) 작업을 따로 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동화 작업자는 원화를 다시 그리기도 한다고 하네요. 

이 책을 보면서, 그저 생각없이 구경하고 소비하던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치밀한 사전 계산과 갖가지 미학적 스킬, 테크닉에 의해 완성되는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장면장면이 너무 촘촘하게 짜여도 지루하고, 반대로 너무 팍팍 건너뛰면 시청자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재미와 이해를 모두 달성할 수 있는 최적점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작가, 감독, 제작자의 센스입니다. 예화와 도판이 많아서 애니메이션 초보라도 재미있게 원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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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강화 - 강력한 소설 쓰기 비법 125가지
제임스 스콧 벨 지음, 오수원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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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 그것이 실화이건 허구이건 간에 남들 앞에서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가 다 소설로 자동변환하여 문학적 자격을 갖추는 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내 이야기가 버젓한 한 편의 소설이 될 수 있을까? 그것도 독자를 매혹하는 강력한 소설이 되려면? 제임스 스콧 벨은 원래 법정 변호사였다가 현재는 인기 장르물을 써서 명성을 얻은 70세의 미국인 전업 작가입니다. 그는 창작 못지 않게 소설 작법 강의로도 큰 인기를 얻었으며 지금 이 책도 자신의 상업적 성공 비결을 고스란히 담은 문예창작 교재 중 한 권입니다. 

수십 년 전에 한국의 mbc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제시카의 추리극장>이라는 TV 드라마가 있었다고 하죠. 원래는 미 지상파 방송국 CBS에서 틀어 주던 건데, 책 p88을 보면 제임스 스콧 벨은 그 시리즈의 총괄 제작자였던 자신의 친구 톰 소여(마크 트웨인이 창조한 캐릭터와 철자, 발음이 같습니다)는 <이해하기 쉬운 소설 쓰기>란 책도 썼다고 합니다. 이 제목은, 쓰는 소설이 이해하기 쉽다는 게 아니라, 소설 쓰는 방법을 이해하기 쉽기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여튼 저자 벨은 그의 책으로부터 몇 가지 교훈을 간추려 한 페이지 분량으로 제시하는데, 읽으면서 우리가 열광했던 캐릭터들에게는 과연 저런 매력들이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p106에는 "물리적 법칙을 존중하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무슨 뜻인지 독자가 쉽게 이해하게 도우려고 저자는 어떤 장르물에서 한 장면의 예를 듭니다. 인물이 짧은 한 마디를 하면, 그 짧은 시간에 웨이트리스가 이런 식사 저런 메뉴를 날라 오는데, 이게 물리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런 오류가 대단히 신경에 거슬리는 독자도 있겠고, 저자는 대안을 제시하길 이런 장면은 일일이 대사 처리를 하고 상황 묘사를 해서 메울 게 아니라, 관찰자의 서술, 설명으로 대신하라는 조언을 합니다. 상황에 적합지 않은 억지 묘사를 불필요하게 소설 분위기만 내려고 지루하게 이어가지 말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p116 이하에는 잘된 서두를 만들려면 "주인공의 일상이 교란되는 충격적 장면"을 제시하라고 합니다. 확실히 이런 장면이 소설 초두부터 나온다면 독자들은 느슨한 마음으로 접근했다가 깜짝 놀라며 주의를 집중하게 됩니다. 그 좋은 예로 마이클 크라이튼이 쓴 <폭로>를 드는데, 이 작품은 책에도 본문 중 역주로 나오듯 소설 발표 연도인 1994년에 바로 영화화까지 되어 더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소설은 물론 벽두부터 주인공 샌더스(영화에서는 마이클 더글라스가 연기)가 총에 맞아 크게 다친다거나 투자한 자산 가격이 폭락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밑도끝도없이 궁지로 몰지는 않습니다. 역(逆)시간 진행이라면 모를까, 그렇게 해서는 역효과나 나기 마련이죠. 한 가정의 남편, 애들 아빠라면 며칠에 한 번 정도는 겪을 만한 소동이 묘사될 뿐입니다. 

그래도 독자들은, 이 소동 때문에 정신이 없어진 주인공한테 무슨 더 큰 불운이 닥치지 않을지 걱정하며, 이 불운을 만회하기 위해 남은 하루는 그에게 좋은 일만 생겼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하지만 더 눈치 빠른 독자라면, 마이클 크라이튼이 앞으로 일을 더 배배 꼴 것을 예상하게 됩니다. 저자 벨은 크라이튼의 이런 영리한 처리를 적극 본받으라고 독자들에게 권합니다. 

p154를 보면 장면 전환을 할 때 주인공의 시선이나 행보를 따를 게 아니라, 분위기를 암시하는 다른 인물을 등장시켰다가 (갑자기) 퇴장시키라고 합니다. 그러면 독자들은 저 인물의 퇴장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서 빨리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효과가 생긴다고 하네요. 여기서 포인트는, 평범하게 사건 A 뒤에는 사건 B, 다음에 사건 C 등이 주루룩 이어지게 할 게 아니라, 적어도 한 장면의 마무리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어떤 교란을 집어넣어, 장면 전환은 물론 다른 궁금증까지 유발할 것이며, 그 대표적인 장치가 인물의 퇴장이라는 겁니다. 혹시 다른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그걸 시도해 봐도 좋겠죠. 

형용어구가 결여된 문장은 적어도 문명인의 의사 표현 방식은 아닙니다. 모두가 terse한 헤밍웨이 같은 문장가가 될 수는 없고, 어설프게 흉내내다가는 초등학생의 낙서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적정한 형용 어구는 언제나 제 자리에 배치해야 하는데, p218에서 저자 벨은 첫째 일반 형용사는 캐릭터의 반응이나 평가를 묘사하고, 둘째 특정한 형용사는 "독자들에게 생생한 느낌을 창조하여 전달한다"고 합니다. 책에서 예로 든 구절들을 보면 이 설명이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저는 처음에 이 책 제목을 소설 강화(講話)로 읽었습니다. 마치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작가 이태준의 책 <문장강화>에서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원제 "Power up your fiction"도 그렇고, 책을 곰곰 읽어 보니 그게 아니라 더 독자한테 강렬하게 어필하는 소설 쓰기, 즉 소설 강화(强化)였습니다. 비단 소설 창작뿐 아니라 일상에서 말로 하는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구성할 때에도 이 기법들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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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임수의 섬
히가시가와 도쿠야 지음, 김은모 옮김 / 북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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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중문화를 접할 때마다 개인적으로 크게 부러운 점 중 하나는, 프로야구와 미스터리 장르물 분야가 수요, 공급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크게 발전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오타니 쇼헤이, 즉 대곡상평 같은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세계적 스타가 배출되어 저렇게 활약하고 있으며, 직접 비교할 건 아니지만 (과거 요코미조 세이시, 또 훨씬 이전 에도가와 란포 등의 뒤를 이어) 이 히가시가와 도쿠야 같은 차세대 작가(물론 현재 예순을 바라보는 분이지만)가 계속 특정 장르물의 명맥을 이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 해당 문화를 즐기는 팬과 독자에게 너무도 행복한 체험이 자국어, 자국 감성 상태로 가능하다는 게 부럽습니다. 

1995년 초에 일본에서는 효고 현 대진재라고 나중에 이름붙여진 큰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물론 2011년 동북 대지진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저때의 피해도 세계를 놀라게 할 만큼 막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해 봄에는 옴진리교라 자칭하는 사교(邪敎) 집단이 전철 안에서 테러를 일으키는 등 종전의 안정된 일본 사회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던 사건이 터져 확실히 세기말은 세기말인가 보다 같은 분위기가 확산되기도 했습니다. 1998년에 론칭된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 오프닝 송에도 가사 중에 지금 들으면 뜬금없는 세기말 타령이 나오는 게 다 이 때문입니다. 

이 작품 중 서두에 세 젊은이가 세토나이카이(이 한국어판에서는 내내 "세토내해"라고 번역됩니다)에서 뜻밖의 변을 당하는 에피소드에서 지진, 사린 가스 운운하는 게 다 저런 시대상을 반영해서입니다. 캐릭터들의 저런 언급들이 좀 작위적이지 않나 싶어도, 이 작가 스타일이 원래 다변(多辯)에 코믹에 self-referential하기 때문에 별 위화감은 들지 않고 오히려 재미를 더하는 장치들입니다. 

육지와 고립된 섬만큼 지방색이 강한 지역은 없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것, 획일적인 것보다는 낯선 것을 구경하고 싶어하며 그러기에 전라도 서남해안, 남해안 등의 신기하고 다채로운 섬 풍경을 예로부터 그토록 즐겨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 오카야마 변두리의 어떤 섬은 그런 맥락이 아니라 다른 상황, 소유 관계 때문에 몇 사람, 좀 특별한 사람들, 돈이 많아서 특별하건, 돈이 많아서 특별한 사람과 특별한 관계라서 특별하건, 그냥 성격이나 생긴 게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간에) 특별하건, 여튼 이런저런 이유로 특별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주인공이라 할 탐정 고바야카와(여러 이유로 한국인들도 잘 아는 성씨입니다) 다카오, 변호사 야노 사야카 등도 제 생각에는 머리가 좋다, 똑똑하다, 영리하다(직업상의 선입견)는 느낌보다, 뭔가 성격적으로 외모상으로 좀 특이한 사람들처럼 다가왔습니다. 

작품 중에도 언급이 있습니다만 이 두 남녀 주인공은 2대 직종인들, 즉 선대의 가업을 물려받아 일하는 사람들입니다(주치의도 포함). 물론 (소설을 읽다 보면, 또 이미 같은 세계관의 전작들을 읽었으면 알 수 있지만) 자신의 능력도 갖춘 사람들입니다. 선대의 경험과 지혜도 전수받은 데다, 본인 고유의 능력까지 갖추었으니 얼마나 부럽고, 또 사회적으로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할 사람들이겠습니까. 아무 자질도 자격도 없이 대접만 받으려 드는 식충이들하고는 구별되는 게 당연하죠. 이 소설에서 다카오가 기어이 찾아내 이리로 데리고 온 쓰루오카 가즈야(신호등 패션)는 과연 어떤 타입의 인간일까요? 아 참 그리고, 다카오와 사야카가 과연 그렇게 촉망받아야 할 만큼 뛰어난 자질의 2세들인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그 나름의 이유로 매력적이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특히 사야카의 경우) 꼬마 미사키가 그렇게 졸졸 따르는 거겠죠. 

알게모르게 관련된 사람들이 누군가의 초대에 의해 하나둘 섬으로 몰려든다, 혹은 배경이 꼭 섬이 아니라고 해도 공증인, 유언집행인의 주도로 한 자리에 모여 마침내 개봉되는 유언장의 내용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장면은 장르팬들에게 무척 익숙하지만 또 볼 때마다 새롭습니다. 유언장 파트 2를 개봉할 때, "이 부분이 발표된다는 건 곧 (최초 수임인인) 야노 고조 변호사가..... 라는 뜻이겠지?"라며 유언자가 짐짓 묻는 부분까지도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딸인 사야카가 "너무 뻔하게 읽힌다(predictable)"며 아빠를 부끄러워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호들갑입니다. 아니, 아빠나 본인이나 이 단계에서는 장르 공식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어떻게 뻔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다카오하고 괜히 티격대는 본인은 독자한테 안 읽히는 줄 아는 걸까요? 

"범인은 이 책을 읽는 독자라는 뜻이지. 야, 거기 너 말이야 너!" 책 뒤표지에 나오는 말입니다. 과연 이 문장은 우리한테 무슨 복선을 던지는 걸까요, 아님 (여태 그랬듯이) 히가시가와 씨 특유의 너스레일 뿐일까요? 소설 중에는 사이다이지 저택의 구조도를 포함, 독자에게 상세한 힌트를 주어 공정한 게임이 되게 최대한 노력합니다. 우리 독자들도 섣불리 짐작하거나 결말이 궁금하여 괜히 과속하지 말고 한번 이겨보겠다는 생각으로 이 퍼즐 풀이에 임하길 권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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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는 죄가 없다 - 코로나19로 살펴보는 감염병의 도전과 인류의 응전 10대를 위한 세상 제대로 알기 3
채인택.이지선 지음 / 북카라반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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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 초 코로나가 팬데믹 단계로 발전할 무렵에, 많은 사람들은 인류에게 병을 퍼뜨린 주범으로 박쥐를 꼽았습니다. 드물게도 박쥐를 식용한 누군가가 코비드 19에 감염되었고 이것이 지구촌을 뒤덮은 비극의 시작점이 되었다고들 생각했습니다. 아직 모든 인과관계의 고리가 밝혀진 건 아니지만, 이 책에서는 박쥐 등 야생동물에게 꼭 모든 잘못을 돌릴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니파 바이러스(1998), 에볼라, 사스 등 많은 바이러스의 저장고 구실을 하는 게 박쥐라고 평가들 하지만, 또 진드기나 낙타 등도 여태 인간을 큰 위기로 몰아넣은 병원균의 숙주 노릇을 했지만, 과연 그들에게 모든 잘못을 돌릴 수 있을까요? 

이 책 p34를 보면, 애초에 그런 야생동물들이 잘 살던 보금자리를 싹 밀고 침투해 들어온 건 인간들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들이 정주하던 공간에 고이 머물지를 않고 기어이 꾸역꾸역 삼림지대, 초원, 정글로 밀고 들어와서는 저런 야생동물들과 구태여 접촉했습니다. 초청도 없이 남의 구역에 침범해서 피해를 입어 놓고는 누구 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인간이 타인(타 생명체)과 공존하는 지혜를 갖추지 못하고 남의 영역을 넘보며 탐욕을 부린 결과이니 자초위난이요 자업자득입니다. 그래서 이 책 제목이 "박쥐는 죄가 없다"고 붙은 것입니다. 죄가 있다면 괜한 욕심을 부린 우리 인간에게 잘못을 물어야죠. 

책 p56에 나오듯이 에볼라 바이러스는 1970년대 후반 최초로 알려졌고 1990년대 중반 <아웃브레이크>라는 영화의 소재가 될 정도였으며 불과 얼마 전에도 미국에서 아프리카 여행자 중심으로 퍼져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병은 공기 중으로 퍼지지는 않기 때문에 의료 기관을 통해 관리만 잘 하면 사실 지금처럼 만연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진단이 유력합니다. 결국 선진국의 제약회사나 금융자본이 지나친 탐욕으로 치료 시스템의 보급을 막지만 않았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나빠지지는 않았으리라는 결론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에이즈도 아프리카에서는 마치 감기처럼 널리 퍼진 질병인데 이 역시도 큐어의 제공에 오로지 자본의 이익만 생각하는 유럽 각국과 미국의 맹성이 부족했던 탓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은 많이 잊었지만 2003년에는 홍콩, 중국을 중심으로 급성호흡기 증후군, 이른바 사스(SARS)라는 병이 퍼져 전세계에 공포를 안겼습니다. 이상하게도 같은 동아시아인이면서 한국인들은 잘 걸리지 않아서 당시 중국인들은 비결이 김치에 있는 것 아니냐며 김치를 사다 먹기도 하는 등 웃지 못할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병이 사람이나 국적을 가릴 리 없으며, 결국 전염병의 팬데믹이란 전세계가 국경을 넘어 합심 협력해야만 방지할 수 있겠습니다. p87 이하에는 어떻게 해야 각국 간에 협력이 유기적으로 잘 이뤄지겠으며, 현재의 WHO 시스템은 무엇이 문제이며 극복해야 할 한계인지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과연 중국 우한의 한 정체 모를 실험실에서 바이러스에 대한 불법 연구 끝에 무엇인가가 유출되어 그런 큰 재난이 일어났을까요? 답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게 보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거나 거의 없다는 게 현재까지의 중론이며 이 책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중국 정부는 아무 이유 없이 억울한 누명을 썼을까요? p114 이하를 보면 국제 사회를 향해 정보를 투명하게, 적어도 다른 나라들이 하는 만큼 공개하지 않고 일을 개운치 않게 처리해 왔다는 점에서 그들이 마냥 억울해할 일도 아니라고 날카롭게 꼬집습니다. 여튼, 재난이 발생하면 서로 네탓을 하며 자원과 시간을 낭비할 게 아니라 무엇이 가장 시급한 공동의 목표인지 합의를 통해 정하고 지체없이 행동에 나서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가장 가난한 나라의 접종률은 세계 평균의 절반(p141)" 물론 그 나라의 일은 그 나라가 알아서 하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특정 지역에서 병이 퍼지면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하고 국경이 많이 개방된 세상에서는 어느 지역 어느 나라이건 안전 지대라는 게 따로 없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게 나 자신을 구하는 방법이며, 이를 위해서는 아프리카 등 여건이 나쁜 나라들의 보건 시스템, 영양 상태 등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잘못은 우리 인간에게 있으며 애꿎은 박쥐 탓을 할 게 전혀 아닙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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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학을 위하여 - 오에 겐자부로 소설론의 결정판! 오에 컬렉션 1
오에 겐자부로 지음, 이민희 옮김, 남휘정 해설 / 21세기문화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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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는 그의 문학 세계 안에 반전과 평화를 담아, 당대 일본인들과 세계의 독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던 작가입니다. 그의 이런 활동과 성취를 세계도 인정하여 1994년 노벨 문학상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한동안 소식이 뜸했는데 작년(2023) 그의 서거가 뉴스를 타서 많은 독자들이 슬퍼했던 게 불과 얼마 전입니다. 오에 컬렉션이 이렇게 나와 사람들이 그의 문학 세계를 톺아보고 그의 메시지를 다시 새길 기회를 얻은 건 무척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세상은 크고작은 전쟁으로 바람잘 날이 없고 미국이나 중국 같은 큰 나라들이 신냉전을 벌인다고 하지만, 오에가 활동하던 20세기 중후반은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이 언제라도 핵전쟁을 일으켜 온누리를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며 사람들이 공포에 떨던 시간이었습니다. 일본은 실제로 연합국과 추축국(나치 독일 중심)이 붙었던 2차 대전 끝에 원폭을 맞아 큰 피해를 입은 유일한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오에가 자신의 문학 세계 중심에 반전 사상을 놓은 건 그의 유려한 필치, 정교한 플롯과 더불어 세계인들에게 그의 문학적 탁월성을 납득시키는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p54를 보면 그는 인류가 본연적으로 안고 있던 전쟁에 대한 공포가, 자연스럽게 20세기 들어 핵전쟁에 대한 저항으로 변용되었다며 그 유구한 뿌리를 강조합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혹은 체험하거나 표현하는 것 중 그 어떤 것도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은 셈입니다. 여기서 그는 빅토르 시클롭스키를 원용하며,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중 익숙한 무엇이 어떻게 낯설게 변하며(이화. 異化. остранение. 아스트라녜니예. p49) 어떻게 전혀 새롭게 다가와 감정의 정화와 각성을 유도하는지 잘 설명합니다. 사람은 익히 접하던 감정 등에는 그리 열렬히 반응하지 않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또한, 관성에 젖어들면 예컨대 일상의 돌을 더 이상 돌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여기서 오에는 시클롭스키의 이론을 다시 인용하여, 문학의 소명은 그저 무엇을 심드렁하게 알아보는 인지(узнавание. 이즈나바니예)가 아니라, видение(비졔니예), 즉 명시(明視. 오에는 이렇게 번역합니다)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졔니예는 영어의 vision과도 통하며 라틴어 동사 videre가 그 어원입니다. 그저 그러려니 하며 수동적으로 알아채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면서 나의 인격적 가치까지를 투사하는 작용입니다. 핵전쟁에 대해 우리는 태곳적부터 있던 또하나의 전쟁이라며 습관적인 거부 반응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생생하게 다시 솟아나는 거부감으로 반응해야 하며 그 중심에 문학이 작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낯설게하기"란, 습관적으로 미끄러져가는 무심한 우리의 인식과 감성을 확 잡아채며 반대 방향으로 르르게 하는 역류(逆流)를 촉발하는 기법이라고 오에는 강조합니다(p69). 이는 또한 문학의 본원적 한계에도 어느 정도는 기인하는데, 오에는 이를 독자에게 쉬운 말로 설명합니다. "문학은 책 중에 사물을 직접 제시할 수 없다." 물론 앞으로는 3D, 4D book 같은 게 나올 수도 있겠으나 이건 이미 전통적인 의미의 문학 장르는 아닐 것입니다. 오에는 가장 성공적인 낯설게하기 사례로 나쓰메 소세키의 <명암>의 한 대목을 드는데, 이로써 "소세키의 주인공에게 찾아든 심적 이변은 이제 독자들의 것이 되었다(p74)"며 그 미학적 성취를 평가하는 오에의 문장은 차라리 감동적입니다. 

근세 르네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 이래, 생각하는 주체에 대한 의심은 제기되어 본 적 없습니다. 그러나 p156이하에서 오에는 롤랑 바르트를 인용하며 이미 그에 대한 해체가 시도되었고, 이미 작가부터가 한때는 이런 사람, 한때는 저런 사람 등으로 수시로 변한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p157 이하에서 오에가 제시하는 "읽는 중심축" 이론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매우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이어 p186에서 오에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베주호프 부부의 현란한 대화에 넘어가 당대의 러시아 귀족 사회의 단면을 마치 나의 현실인 양 받아들이게 되는 독자들의 태도를 지적하는데, 이는 문학의 화려한 기만으로 우리가 어떻게 건강하고 유쾌한 각성에 돌입하는지에 대한 오에의 명쾌한 설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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