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 윌리엄 제임스의 운명과 믿음, 자유에 대한 특별한 강의
윌리엄 제임스 지음, 박윤정 옮김 / 오엘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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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뒤르껨은 "인간에게 주어진 완전한 자유는 바로 자살에의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극단적인 언명이지만 사실 알고보면 식욕, 성욕, 명예욕이나 자아실현 욕구 같은 것도 순수한 나의 것은 아닙니다. 속한 사회나 준거집단이나 가족, 친구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 역시 자아상이나 정체성이나 자신의 욕구 같은 걸 어디서 모방했을 것입니다. 한편 식욕 등의 원초적 욕구는 그저 생체 작용의 유지를 위해 주기적으로 발동되는 것일 뿐 나의 인격 등과는 무관합니다. 이처럼 알고 보니 우리 자신의 것도 아니고 그저 비천한 생리작용의 결과물이거나 주입된 착각의 산물이라면 생이 과연 살 가치가 있는 것일지 의문이 들 만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두고 "이렇게 가난하게 살 바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나, 반대로 생산활동에 참여 않는 기생분자 입장에서 어떤 가난한 사람을 가리켜 "저렇게 살 바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면, 이 둘은 똑같은 이유에서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봐도 됩니다. 본인은 어리석어서 모르겠지만 후자 역시 자신이 잉여인간임을 자인하는 꼴이지요. 이들에게는 저 질문에 대한 답이 (그나마) 명쾌해서 좋겠습니다만 이들보다 복잡하고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위의 저 질문은 좀처럼 답이 안 나오는 난제입니다. 19세기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짧지만 짧지 않은 이 고전에서 편 논변은 아마도 독자가 자신만의 답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보면 중세 가톨릭이 어떤 이단(그들 입장에서)을 얼마나 잔혹한 방식으로 탄압하고 절멸하려 들었는지 잘 나옵니다. "죽여라.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알아 보신다." 이 책 p40 이하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발도파를 말살하려 든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다소 뜬금없이 저자가 발도파 이야기를 꺼낸 건, 저들이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강력한 압제 세력 앞에서 어떻게 자존과 자유를 지키려 애썼는지의 과정을 돌아봄으로써, (그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생이 거의 언제나 살 가치가 있는 것임을 증명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 이들이 오히려 삶의 가치를 증명했다는 게 역설이긴 하지만 그 결론에는 정상적인 사람이면 누구나 수긍하게 되죠. "저렇게 살 바엔 죽는 게 낫다" 같은, 가장 비천한 인생관을 거꾸로 프라이드 삼아 떠드는 인간(물론 이런 인간들이 실제로 곤경에 몰리면 죽을 용기도 없습니다 ㅋ)은 예외로 치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생즉필사 사즉필생"이란 담백한 경구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실제로 당사자가 어떤 삶을 산 분인지를 알면 더 소름끼치는 명언이기도 합니다. 


정통 영국인의 가치관을 강하게 상속한 저자답게 책 곳곳에서, 어리석은 대륙의 미신과 고집, 인습 등과, 각성하고 깨어 있는 영국식 성품을 대조시켜 부각하려는 습관도 드러납니다. 사실 그가 집필 무렵에 참조한(혹은 소일삼아 읽은) 여러 책들은 지금 사학의 관점에서는 많은 오류를 노정했음도 드러나지만 여튼 저자의 좋은 의도(혹은 좋게 이해할 수 있는 취지)가 무엇인지는 우리 독자들이 잘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영국인들이 저런 발도파의 후예, 혹은 한참 후에 각처에서 추방당한 혁명가 등을 잘 받아들여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하게 도운 건 그 특유의 관용의 정신이라며 얼마든지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의 시대는 또한 미국이 국제 무대를 향해 서서히 발언권을 높일 무렵이므로 책에는 그를 반영한 기술도 있습니다. 영구 먼로주의(고립주의)도 언급되며, p74에는 아서 밸푸어의 이름도 나오는데 책 후주의 설명처럼 이 사람은 영국의 수상이었으며 우리가 잘 아는 밸푸어 선언의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p72에는 올더스 헉슬리의 이름도 나오는데 물론 우리가 잘 아는 <멋진 신세계>의 작가이죠. p111에는 결정론에 대해 약한 결정론/ 강한 결정론의 이대별을 설명하는데 아마 이 무렵에 시도된 구분인가 봅니다. 당시 미국의 표준적 지성인으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면 많은 시사점이 발견됩니다. 


개념은 독일어로 Begriff라 하는데 "사유를 통해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데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 칸트가 이에 Grenz를 붙여 한계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후주 17번(p163)에 나옵니다. 참고로 이 책의 후주는 원주도 있고 역주도 있는데 역주 역시 내용이 대단히 알찹니다. 윌리엄 제임스뿐 아니라 모든 위대한 저자들의 책에서 원주는 그 역시 본문 내용의 일부이므로 반드시 읽어야 하죠. p166의 후주 11번에 원주로서 자유의지에 대한 짧으면서도 강력한 논의가 있는데 윌리엄 제임스의 신학적 입장을 단적으로 잘 드러냅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물론 신교측 입장에 훨씬 가깝지만 역주에서는 예컨대 "루카 복음" 등 신구교에 두루 통할 표기를 씁니다. 한국에서는 허버트 스펜서를 무조건 나쁘게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갤브레이스 시니어의 <불확실성의 시대> 같은 책이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펜서 본인은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에 반대한 사람이며 윌리엄 제임스는 이 책 여러 곳에서 그를 우호적으로 원용합니다.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면 그 믿음이 삶의 가치를 창조하게 도와 줄 것이다(p60)." 그리고 같은 페이지에서 앙리 4세의 말도 인용되는데 그 역시 편협한 기존 왕실(이 작자는 프랑스 혈통도 아니고 타국에서 시집온 주제에 미친 광신을 고집했죠. 가장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과거 회귀를 추구한 악질 반동을 놓고 자칭 진보주의자가 이런 류를 존경한다는 건 코미디 중의 코미디입니다)의 전통을 깨고 자국 영토 안의 모든 백성 모든 신앙을 감싸안으려 든, 진정한 진보주의자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무엇을 가져다주든,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p42)." 인생은 본디 고통과 부조리, 뷸평등, 불운으로 가득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악덕을 당연하게만 여기고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삶을 살아낸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악조건이 있다면 이를 극복하고 제거하는 과정이 또한 당사자의 인격과 자존에 플러스 팩터를 쌓으며, 그저 호조건 속에서만 사는 사람이 아무 적립도 하지 않고 사는 것보다는 훨씬 가치 있습니다(그러니 이미 이런 사람한테는 호조건이 더 이상 호조건이 아니죠). 물론 호조건을 타고난 사람은 생계 걱정 않고 자신만의 관심사에 몰두하며 얼마든지 조건을 잘 살려 의미있고 자긍심을 높이는 성과를 쌓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것입니다. 


"우리의 반지성적 본성은 분명히 우리의 확신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p76)." 어리석고 무지한 자일수록 자연과학이 증명하는 진리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으며, 사회과학의 몇 가지 도그마 중에서도 극히 편협한 몇몇을 가려 무지몽매한 미신을 믿듯 절대화하기도 합니다. 애초에 그게 무엇이든 절대로 맞다며 확신할 수도 없고 이런 걸 타인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의 견해를 마치 재해석이나 수정이 불가능한 것처럼 고집하는 건 대단히 잘못된 테도이다.(p81)"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을 보면 지혜와 공부가 부족하고 멍청한 인간일수록 무엇 하나를 절대 무오류의 진리인 양 숭배하며 고집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개인 숭배(cult of personality)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우주는 단순한 그것(it)이 아니라 그대(thou)가 된다(p99)." 저자는 물론 반지성주의를 배격하지만 동시에 종교가 여전히 진리에 대한 통로를 열어 준다고 여겨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현대 독자 사이에 찬반이 갈릴 수 있겠습니다. 특히 도킨스 같은 사람은... ㅎㅎ 그러나 도킨스 역시 두 세기 전의 이 윌리엄 제임스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격렬하게 호오가 갈리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적정 수준의 회의주의를 드러내면서도 너무 나간(?) 회의주의를 경계하는 저자의 스탠스에서 독자는 중용의 미덕을 캐치할 수도 있습니다. 저 위의 인용구는 마치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아리아 "투나잇"에서 "And here you are and what was just an address is a star"라는 유명한 가사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p79를 보면 ad(a)equatio intellectûs nostri cum rê라는 라틴어 구절이 나옵니다. 사실 프랑스어도 아니고 û라는 건 라틴어에 없으므로 intellectūs가 맞겠으며, 이것은 intellectus의 단수 2격(속격)입니다. nostri도 자신이 꾸미는 명사를 그대로 따라가므로 역시 단수 속격입니다. 인터넷에 보면 이걸 corformity of our minds to the fact라고 영어로 옮겼는데 intellectūs는 1) 단수 남성 속격 혹은 2) 복수 주격이 있으나 의미상 이걸 2) 복수 주격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새기면 앞의 ad(a)equatio가 허공에 붕 떠버리는 셈이지요. 또 rê를 rê로 보면, 이것은 단수 탈격형태 뿐입니다. res가 intellectus와 단복 여부가 같아야 하므로 이런 이유에서도 intellectûs는 단수로 새겨야 하겠습니다. 사실 영어 번역 맥락에서 보아도 our minds가 아니라 our mind가 옳죠. 인류가 공유하는 정신이란 의미이므로(각각의 정신들이 아니라). 


"오 우주여 그대 자신을 보라 그대는 나빠지는 게 아니라 더 좋아지고 있다(p146)." 이 시구(詩句)는 저자 윌리엄 제임스 자신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의무는 그것대로 끝내고 나머지는 더 고차원적인 권능에 맡기자는 저자의 제안은 확실히 우리의 삶을 더 경건하게 만드는 느낌을 줍니다. 마치 동양의 경구 진인사대천명이 생각나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 책에는 <삶은...> 외에도 <믿으려는 의지>, <결정론의 딜레마> 등 기독교적 인사이트가 가득 담긴 두 편의 글이 더 실려 있습니다. 이 세 권 모두 윌리엄 제임스의 평판과 문명 그 자체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걸작들이며 그 가치는 독자가 읽어 보고 바로 확인할 수 있죠.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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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자립과 자기통제를 키우는 ABA 교육법 : 사춘기편 - 자폐 스펙트럼 사춘기 아이를 위한 생활자립기술 36
이노우에 마사히코 지음, 전선진 그림, 최정인 옮김, 민정윤 감수 / 마음책방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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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A는 응용행동분석의 약자입니다. 원어로 applied behavior analysis의 약자인데, 작년('21) 6월경에 이 시리즈 "문제행동편"을 리뷰한 적 있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주된 논의는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아이의 사춘기 양육에 대한 여러 유익한 방법론들입니다. 지난 리뷰에서도 언급되었지만 ABA는 두루 유익한 교육체계이지만 특히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아이들에게 의미 있는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론입니다. 그래서 책 pp.12~13에는 ABA 관련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용어 설명이 먼저 나옵니다. 가급적이면 앞선 시리즈를 다 읽고 공부하는 편이 좋겠으나 일단 이 책부터라도 빨리 읽고 도움을 얻고자하는 학부형들이라면 이 점을 유념해야겠습니다. 


꼭 특정 자폐 스펙트럼 때문에 고생하는 아이가 아니라고 해도, 많은 자녀들이 "보호자로부터 감정적 자립"이 완성되지 않아 성인이 되어서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문제는 결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많은 이들은 심지어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혹은 그보다 더 높은 연령대에 도달해서도), 자신이 이러이러한 시기에 부모로부터 어떤 도움을 못 받아서 생긴 상처를 놓고 심하게 아파합니다. 이 상처가 평생을 가는 듯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한테서 입은 상처라서인 듯합니다. 그런데 부모도 사람인 이상 자녀에게 단 한 번의 실수도 안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상처를 오래 안 남기거나 빨리 극복하는 사람은, 부모로부터 감정적으로 빨리 독립하는 유형입니다. 감정적 자립이 빠르다고 해서 효도를 안 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늦게까지 자립 못 하는 타입이 효도는 효도대로 더 안 합니다. 


"부모에게는 당황스럽겠지만 반항이나 양가성은 자립을 위해 필요한 발달상의 통과점이다(p23)." 참 의미심장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사춘기는 아이에게 위험하기도 하지만, 평생 귀여운 아이로 부모 곁에 머물 수 없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겪어야 하며 그래야먄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책에서는 모든 이상행동이 치료대상인 건 아니고, 자폐 스펙트럼과 무관하게 그저 사춘기라서 보이는 증상일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설명은 과연 이 분야 전문가다운 친절하고 적확한 설명이며, 한편으로 자폐를 다루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사춘기 증상까지 같이 받아내고 다뤄야 하는 그 부모님들이 얼마나 어려움이 크실까 하는 생각도 새삼 듭니다. 


책에서는 꼭 또래가 아니어도, 친구를 하나 두게 하라고 조언합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인 한 아이가 나오는데 당연히 이런 아이는 교우관계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동네 모형가게에 다니면서 단골 손님들과 친해졌다고 합니다. 그 손님들도 순전히 같은 취미로 모인 이들이니 괜히 어떤 병을 문제삼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다. 다만 이는 일본의 사례라서 그렇고, 우리 같으면 순전히 동호회에서 만난 이들조차 취미 외적인 이슈, 사회적 지위라든가 재산 같은 걸 공연히 문제 삼는 못된 이들이 있고 거기서 받은 스트레스로 자살한 사례도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조심할 부분이 있다는 점 언급하고 싶고, 다만 친구가 필요하다는 결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주위에 부모뿐이고 다른 친구(관계)를 못 만든 아이는 이걸로 평생 콤플렉스가 생길 수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닌데. 


ABA 방식은 우리들 일반인들이 스몰스텝 위주로 잘게 쪼개어 난관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 p33에서는 다소 의외랄까, 탑다운 방식도 병행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아니 소소하고 작은 걸 아직 못하는데 더 상위단계 방법을 어떻게 가르친단 말인가, 무엇보다 ABA에 안 어울리지 않나 싶지만 저자는 그게 바로 우리들 비전문가의 오해라고 지적합니다. 아이에 따라서 특정 애로가 아주 안 넘어가지는 경우도 있는데 이 단계 때문에 계속 거기 머물 수는 없습니다. 스몰스텝에서 살살 위로 높여나가는(p33. 높혀나가는 x) 방식을 바텀업이라 부른다면, 탑다운은 지금 당장 아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마치 편법처럼 시원시원하게 가능한 단계부터 먼저 싹싹 찾아 목표, 목표부터 일단 달성하고 보는 방식입니다. 과연  이게 더 ABA스러운 방법 같기도 합니다. 권위자의 가르침을, 나의 상식보다 앞세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꼭 자폐스펙트럼이 아니라 해도 자기 통제의 힘을 키우는 단계가 특히 청소년에게는 중요한 것 같습니다. p40에는 네 가지 방법이 나오는데 첫째 강화를 받지 않아도 기다린다입니다. 강화는 심리학 개념이고 일정한 보상을 통해 특정 행동을 유도하는 걸 가리키죠. 이게 사실 성숙한 인간이 되고 안 되고의 결정적 갈림길인 것 같습니다. 미숙한 인간은 장기적으로 보아 A가 분명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보상이 필요해요!"라면서 당장 무슨 대가가 주어지길 기다리고, 떼를 씁니다. 이 단계가 지독하게 안 넘어지는 유형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명문대 진학에 성공하는 유형은 머리가 딱히 좋다거나 하기보다, 순간의 유혹과 편해지고 싶은 충동을 이기느냐 아니냐에 더 크게 의존합니다. 이 고비를 못 넘는 유형은 커서도 공무원 시험이건 한능검이건 토익이건 절대 통과를 못하고 평생 그렇게 삽니다. 청소년기를 어떻게 보냈는지가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 같습니다. 


아이와 행동계약서를 작성하고 이것이 남 좋으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과정이며, 약속을 지키는 인간이 얼마나 품위 있고 멋진 인간인지 스스로에게 확신을 시키는 게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책에서는 가르칩니다. 또 잘못이 있으면 엄마아빠한테 매를 맞아서 고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기 스스로 수정하는 게 핵심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이 단계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미숙하고 어리석은 반 범죄자로 사느냐 조직에서 회사에서 존중 받는 사회인이 되느냐가 갈린다는 점을 깨닫게 되더군요.


탑다운 방식으로 일단 잘되는 것부터 해결하고 목적지향적으로 과감하게 행동하는 방식은 이 책에서 여러 경우를 염두에 두고 가르칩니다. 가게에 가서 돈 내고 물건 계산하기도 있는데,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대체 우리 나라는 왜 자폐아라든가 애가 지들 생각에 좀 이상하다 싶으면 점원들이 그렇게 눈치를 주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지들은 뭐가 그리 잘나서, 고작 카운터에서 일 보는 게 무슨 큰 벼슬이라도 됩니까? 정작 사회에서 성공하고 남들에게 인정 받고 사는 사람들은 어려운 이들에게 참 관대합니다. 꼭 보면 무슨 하자 있는 사람들일수록, 남이 좀 못한다 싶으면 그걸 흉을 꼭 보고 참지를 못합니다.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죠.


자폐스펙트럼 있는 아이들은 그 외에도 빨래하기, 빨래 개고 정리하기, 몸가짐 단정히하기, 뒷정리하기, 뭐 이런 걸 힘들어하기 쉽습니다. 탑다운 방식은 세세한 절차를 가르치기보다, 목적이 무엇인지를 인식시키고 성큼성큼 다가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듯합니다. 사실 이건 자폐아다, 청소년이다, 이걸 떠나서 성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부 사항을 다 익히고 나서야 일을 하는 사람은 회사에서 일머리 없다 소리 듣기에나 딱 좋습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탑다운 방식은 사실 성인들도, 지금 도대체 달성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지를 먼저 떠올리고 무엇이 문제 해결에 더 본질적인지(뭣이 중한겨?) 생각하게 돕는 좋은 방법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외에도 피아노 연주하기, 뜨개질하기, 인터넷 안전하게 이용하기도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책의 방식은 경우에 따라 탑다운 위주라는 걸 독자, 학부모들이 알 필요가 있으며 책 읽다가 "아니, 이렇게 해도 되나?" 싶으신 분들은 책 앞부분 총론으로 다시 돌아가서 탑다운 방식 개념부터 다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면 이 출판사에서 나온 ABA 시리즈를 차분히 1권부터 복습을 할 수도 있겠죠. 특히 저는 ATM 이용하는 방법 같은 건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학부형들이 가르쳐야 하겠다 싶었습니다. 또 여기서 배운 여러 요령들은, 타 행동에도 응용하기가 좋았기에, 이건 꼭 탑다운이 아니라 바텀업이라고 해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하긴 저자는 애초에 탑다운 바텀업을 이분법으로 고지식하게 나눌 게 아니라 "조화"있게 아이를 가르치고 공감하는 게 ABA의 핵심이라는 말씀을 합니다. 나아가, "과연 교육이란 무엇인가?" 그 본질에 대해서도 우리 어른들이 깊이 있게 반추하게 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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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부동산 사기꾼에 당할 수밖에 없는가?
김하진 지음 / 밝은강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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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기발하고도 교묘한 부동산 사기 수법이 늘어나는 요즘입니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현금의 가치가 떨어지는 시대에 자산투자를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자산 중에 가장 유망한 건 현재로서는 부동산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기꾼의 마수를 피하여 내 재산을 안전하게 늘릴 수 있을지 고민되는 시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글쓴이는 대학 교수님인데 분양형 호텔에 투자하라는 권유를 받고 행동에 옮겼다가 큰 손해를 보시고 부차적인 정신, 육체적 건강까지 상한 경우입니다. 이런 분도 낭패를 당하는 판이니, 하물며 물정에 어두운 서민들이라면 까딱 잘못하다가 무슨 큰 피해를 볼지 모를 일입니다. "미국에서는 다들 401k에 자동으로 연금을 붓게 되어 있어 노후 준비는 그게 끝인 줄 알고 산다(p27)." 우리 나라도 물론 국민연금이라는 게 있습니다만 수익성이 좋지 못해서 적립할 때에는 거액이고 막상 연금을 탈 때가 되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 무슨 연금개혁이다 뭐다 해서 사실상 국가에 사기를 당하지나 않을지 걱정도 되고 말입니다. 그러니 다들 부동산이다 주식이다 코인이다 해서 한눈을 팔지만 결과가 다 좋지 못합니다. 여튼 분양형 투자 관련, p48에 나오듯 "연금같이 받으시라"는 말이 있으면 무조건 사기인 줄 알고 피하라는 게 저자의 충고입니다. 


사실 흔한 아파트, 우리 나라에서 가장 보편적인 거주 형태인 아파트에서도 동대표 잘못 뽑거나 하면 이 사람이 어떤 비위를 저지를지 알 수가 없으며 그저 한동네 사는 사람이니 믿어야지 하며 반은 체념하고 삽니다. 그러나 이번 둔촌동 개발 사건에서 보았듯 집합건물에 사는 이들은 매번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게 아니며 민법상 조합을 이뤄 사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의사집행기구를 구성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집행부가 다수 주민을 대변하지 않고 모럴 해저드에라도 빠지면 대책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한국의 현실에서 이 부분이 언제나 맹점입니다. 


대략 십 년 전부터 전단지라든가 중개업소, 심지어 책까지 만들어서 분양형 건물에 투자하라는 마케팅이 참 많았습니다. 이 중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찾는다며 명동 소재의 호텔에 투자하라는 움직임이 특히나 두드러졌던 게 기억 납니다. 주주총회에서도 이른바 총회꾼들이 현장에서 난리를 치는 일이 있는데 소유자들이 집합건물을 놓고 어떤 여론을 형성할라치면 과연 소유자가 맞는지조차 의심이 되는 인물들이 들어와서는 원활한 의사 진행에 방해를 놓거나 반대방향으로 여론을 끌어가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큰돈을 들여 지분을 갖게 된 건물에, 어느 특정 인사(소수)들이 조직적으로 방해 공작을 펴서 투자자의 정당한 이익에 해를 끼친다면 이런 투자는 정말로 조심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책 후반부 p370에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 책에서는 이처럼 다수 투자자들의 정상적인 의사 형성을 방해하는 이들을 두고 "프락치"라 부르는데 이 말은 무려 대한민국 헌정 초기 국회 프락치 사건이라든가 1980년대 학원가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까지 해서 참 연원이 깊은 말입니다. "해방구"는 과거 1980년대 학생운동진영에서 널리 쓰던 말이기도 하고(?), 역사 속에서는 예컨대 1871년 보불전쟁 종료 후 파리 코뮌 같은 게 거론될 수도 있는데 저자와 그 동료분들은 "모 호텔 해결 방안을 구하는 모임"의 약칭으로 쓴 점이 재미있습니다(재미있다는 말은 어폐가 있겠지만 일단은요). 저자께서도 "입에 착착 감긴다"고 하셔서....


저자는 이 과정에서 유사한 패턴으로 피해를 입었음을 주장하는 신촌 M 빌딩 투자자들과 연대를 하기도 합니다. "개별등기 분양이 아닌, 구좌 지분 분양으로 몇천만원 소액으로도 투자가 가능한"이 홍보문구였다고 하는데 제가 십 년 전에 자주 봤던 전단지도 이런 취지의 계획을 소개하며 투자자를 유인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한한령이 내려지지 않아서 계속 중국인 보따리상이 오는 상황이었으면 명동 지역에 한해서라도 활황이 계속되어 이런 분쟁이 벌어지지 않기라도 했을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책에 따르면 사기꾼들은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보면 유정개발 사기꾼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니는데 나중에 밝혀지지만 자기 애도 아니고 고아이며 설마 애 키우는 사람이 사기를 칠까 하는 생각에 사람들이 쉽게 믿게 하려는 수법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게 사기면 내 아들이 죽는다" 같은 말을 하는 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디까지나 이는 저자분의 주장입니다. 아무튼 투자 결정이란 신중해야 하며 못 믿을 말을 주변 정황 때문에 덜컥 믿어서는 곤란합니다. 


신촌의 피해 주장인들이 지적한 특징은 대략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1) 채권 자체를 가짜로 만든다. 2) 거짓말을 쉽게 한다 3) 소유자 임원 회유에 능하다 4) 경찰서, 세무서, 구청은 다 한통속인듯 보인다. 


특히 4)와 관련하여 전직 국세청 직원을 대표로 앉혀서는 일을 벌이기도 한다는 것인데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는 아직은 저자분의 주장일 뿐이지만, 정말로 어떤 세력이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서민들 포함 숱한 피해자들을 만든다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시행사 측은 준매매위탁계약(p70)이라는 주장을 폈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한국민법이 상정하는 전형계약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적 자치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인 이상 당사자 간의 합의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새로운 내용의 계약을 만들 수는 있죠. 문제는, 계약의 내용이 어느 한 당사자에게만 명확하고, 다른 당사자에게는 불명확하거나, 원래 이런 것이라며 마치 이런 성질의 전형계약이 예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양 계약서 안에 없던 내용이 갑자기 당연한 이치인 양 바깥 어디서 원용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형계약은 일일이 계약서 안에 모든 이치와 경우의 수를 다 명기할 필요가 없습니다만, 준매매위탁계약(?)은 사회가 아는 전형계약이 아닙니다. 


지분소유권자들이 여튼 잘 뭉치기만 하면 사기꾼들이 다수의 정당한 주장을 무시하고 조합을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사기꾼 상대하기도 힘든데, 소유권자들(투자자들)조차도 이런저런 근시안적인 주장만 내세우며 결국 단합이 안 된다는 데 있는 듯합니다. 저자는 이를 두고 웬 얄팍한 인정욕구만 가득찬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이렇게 많은지를 놓고 개탄합니다. "똑똑함보다 현명함과 통찰력이 요구되는 곳이다(p83)." 이런 건 확실히,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느끼는 겁니다. 내가 이 주장을 하면 상대방은 이런 이해가 침해되므로 반대할 것이다, 같이, 상대방의 반응을 합리적으로 예측하고 서로 에너지와 시간을 절약하여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는 게 최선일 것인데, 그게 안 됩니다. 그냥 어디서 자기가 주인공인양 멋있는 말을 연극 대사처럼 연설해 대는 과정에서 쾌감을 느낍니다. 중2병에 걸린 사람이 이렇게나 많으며, 이건 사실 똑똑한 게 아니라 가장 멍청한 짓입니다. 이러니 이런 오합지졸을 사기꾼들이 얼마나 고마워하고 우스워하며 갖고 놀겠습니까. 악질 사기꾼은 알고보면, 단견+협량의 평범한 소시민들, 바로 멍청한 우리들이 배양하고 출세시켰던 셈입니다. 


"어쨌거나 운영수익 대비 임대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높았다.... 약속된 임대료의 비중은 7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럼 나머지 30%로 운영비, 인건비, 기타 비용을 모두 충당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게 가능하겠는가.(p121)" 더군다나 무시무시한 객실 회전율 유지 등 각종 비현실적인 가정을 다 하고서 이런 계산이 나오는 건데, 저자께서 말씀하시듯 비수기, 돌발상황 등 다양한 변수가 있으므로 오히려 보수적으로 잡아야 맞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진짜 호텔 전문경영인"께 이게 가능한지를 물어 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답은 당연히 부정적이었습니다. 물어 볼 만한 호텔 경영인 같은 사람이 주변에 없기까지 한 서민들은 정말 악 소리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처럼 계획이 현실성이 있냐도 따져야 하고, p123에 나오는 대로 인근에 대기업이 운영하는 경쟁 시설이 있는지까지도 다 따져 봐야 하는 것이겠습니다. 


"사기죄는 고의성 여부가 관건이던데..(p122)" 사기죄뿐 아니라 모든 범죄가 다 마찬가지로 고의가 없으면 성립을 하지 않지요. 어떤 투자가 실패했을 때 그 결과만을 놓고 "애초에 사업 자체가 무리"였다며 투자한 돈을 도로 내놓으라고, 사업가를 무작정 사기꾼으로 몰 수는 없습니다. 투자자 역시 그 위험 부담은 스스로 져야 하는 게 맞지요. 문제는, 당초의 사업 계획과 실제 집행 과정이 큰 차이가 난다거나, 허위의 계획을 고지한 후 전혀 당초의 계획을 이행하지 않으면 이건 뭐 처음부터 돈만 떼어먹을 작정을 하고 벌이는 짓이겠죠. 이게 바로 고의라는 것의 본질입니다. 


크라우드펀딩과 유사수신행위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책 p148에서 적절히 말씀하시듯 "장래에 원금 이상의 돈을 준다고 약정"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겠습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 특수사정이 더 곁들여지는데, 그것은 호텔객실 소유권 지분을 블록체인 형태로 발행하여, 이를 숙박권 겸용으로 쓸 수 있게 하는 아이디어였습니다. 사실 고급 콘도 회원권도 비슷한 원리에 의해 운영되며 구좌를 만들어 구분소유권자가 되고 동시에 일정 기간 동안 시설을 이용(숙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질이 같습니다. 또 이런 회원권은 유가증권으로 인정이 되죠. 게다가 블록체인 형식으로 발행되었으니, 이 당시에 한창 인기 좋던 코인의 일종으로 취급될 수도 있었겠습니다. 한때 최악의 매물로 떨어졌던 이 호텔이 기막힌 아이디어 하나로 다시 최상의 투자상품으로 거듭나기 직전이었겠습니다. 이때 그 모 관리인분의 "이건 유사수신이라서 안된다!"는 발언은 사업에 초를 치는 언동으로 받아들여졌겠고, 새 관리회사를 꽂아넣고 가려는(p149) 일종의 사전 정지작업이었겠습니다. 


사실 저도 책을 읽으면서 왜 그 모 관리인, 선한 인상을 하신 분을 그토록 끝까지 믿으셨는지, 심지어 형사 재판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그를 믿어 그의 충고에 따라 유죄인정을 하고 벌금형을 받으셨는지(p157)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미 배신의 징후, 마각을 드러낸 분인데 즉각 손절을 쳐야 맞지 않았겠습니까? 불성실한 수임자를 끝까지 믿으신 것 자체가 과실이라면 과실입니다. 사기꾼들의 오랜 수법은, 나만 나쁜 게 아니라 너희들도 잘한 것 없다며 어떻게든 형사전과를 만들어 같이 흙탕물을 튀기는 것입니다. 이런 전과가 생기면 제3자가 겉으로 보기에 아 둘 다 잘못한 게 있군 하면서 양비론으로 갈 수밖에 없죠. 


이 책 p166 이하를 보면 특히 서울 모 기초자치단체 일부 공무원의 심각한 태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저 담당자가 바뀌었을 뿐인데도 이후에는 업무추진이 그만큼 쉬워졌다니 말입니다. 최종보스격인 모 씨와의 유착 관계를 의심할 만하나 이는 물증이 없으니 그저 그리 짐작만 할 뿐입니다. 사실 대체 어떤 분이기에, 저 선한 인상을 한 변호사분도 구워삶고 동시에 모 과장도 그처럼 손 안에서 부릴 수 있는지 그 수완이 놀랍기까지 합니다. 오히려 저자분의 피해의식이 빚은 환상(!)으로 여기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 공무원들에 대해서는 책 p325 이하에 자세히 또 나옵니다. 내부고발자로 방송국에 제보하여 오히려 영웅 비슷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저자분 입장에서는 기가 찰 뿐이겠죠. 

 

"명도집행은 또다른 세계였다.(p169)" 이 책을 읽어 보면 승소판결을 받아 내어도 명도까지 이어지기에는 엄청난 수고를 들여야 함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이나 치밀하게 준비를 했으니 과연 이쪽 방면에 도가 튼 분들이 분명합니다. 집기를 객실마다 알박기했으니 이를 치우자니 운반비 보관비가 몇억이며, 집기의 소유 여부를 다투면 이걸 해결하는 데 또 시간이 소요됩니다. 웬만한 사람은 제풀에지쳐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와중에도 사람 보는 안목이 탁월한(그 정도가 아니지만) P회장, "머리가 좋고 할 줄 아는 게 어찌나 많은지 맥가이버가 따로 없을(p177)" 아무개 씨 같은 분입니다. 정말 이런 사람이 되어야 사회 어디서도 환영을 받습니다. 책 읽으면서 진정 부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던 분들이었습니다. 맥가이버가 또 보면 드라마에서도 돈 욕심이 없습니다. 물론 손튼 국장이 때때로 두둑이 챙겨는 주겠지만 말입니다. p262 이하에 전업투자가인 이 젊은분이 "나홀로파이터"로 살아온 이력이 짧게 언급됩니다. p264에 언급된 책 저자인 어느 검사님(현 국회의원)은 키가 아주 크죠. 저도 학교 다닐 때 먼발치에서 본 적 있습니다. 


p282에 보면 저자분께서 이 분양형 호텔을 맡아 끝까지 살려 보려 한 선택을 후회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 솔직히 저도 책을 읽으면서, 이 분야에 도가 튼 그 보스분하고 구태여 불리한 그라운드에서 이렇게까지 싸울 필요가 있었을까 싶었습니다. 적당선에서 서로 타협하고(물론 저자분이 큰 손해를 본 상태이지만) 물러나셨다면 그토록 큰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불운의 사슬도 만나지 않았겠죠. 그 변호사라든가 C 모씨 같은 경우도, 왜 그렇게 저자분 말을 듣지 않고 맘대로 하다가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이게 다 그 보스의 치밀한 사전 계획의 산물이라기보다(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싸움이 저쪽에 승산이 기운다 싶을 때 내부 배신자가 계속 나오는 건 세상의 이치입니다. 이건 방법이 없습니다. 


여튼 이처럼 부조리한 일을 겪고 순순히 물러난다면 또다른 피해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정말 끝까지 간다는 결연한 각오로 불리한 싸움을 여기까지 이어오신 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이런 분쟁이 미연에 방지되려면 입법을 통해 계약 내용을 규율하고 감독관청을 따로 두어 관리회사의 영업을 관찰하게 하는 특별법을 (저자분 말씀대로) 제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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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는 인간 - 확증편향의 시대, 인간에 대한 새롭고 오래된 대답
박규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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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했을 때 "생각"이란 곧 의심을 뜻했다고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저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왜 그럴까? 혹시 저 말이 틀린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해 보는 가운데 각성도 일어나고 새로운 진리의 발견도 가능해집니다. 저자는 p11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 역시 무지의 자각 그 중요성을 일갈한 언명이라고 독자에게 가르칩니다. 책에서는 서양 철학자들의 다양한 업적을 회고하면서 이 가운데 "의심(회의주의)"이라는 키워드가 관통하는 현대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쉽고 친절하게 되짚습니다. 


"그리스어 doxa는 '믿음, 의견, 억견' 등으로 번역된다. 그 뿌리는 '보인다'라는 뜻을 가진 dokein이라는 동사이다.(p29)" 이처럼 고전을 공부할 때는 그리스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수인 듯합니다. 이 중 억견이라는 말은, 한자어의 "억"이 억지를 쓴다고 할 때의 그 抑입니다. 회의주의의 먼 근원은 모든 믿음은 억견일 수 있다는 태도인데, 무엇을 철석같이 믿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곧 억견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이 종교이든 정치이든 연예인에 대한 열광이든 간에 "절대적으로 맞는 것"은 있기 힘듭니다. 오류일 가능성이 다분한데도 마냥 유지하려 드는 믿음은 그게 곧 억견인 것입니다. 모든 믿음이 억견일 수 있다는 생각은 곧 세련된 회의주의 스탠스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실제로 특정 진영을 무작정 믿는 사람보다, 시쳇말로 "중립기어 박고 보는 사람"이 더 멋있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지 싶습니다.


이에 대비되는 태도는 "독단주의자"입니다. 이들의 논변도 참 설득력 있는 게, 회의주의자들처럼 이건지 저건지 장담 못한다며 매번 팔짱만 끼고 있으면 어떤 행동도 안 이뤄진다는 거죠. 이런 행위불가의 상태를 "아프락시아"라고 부른다고 합니다(p29). 영어의 practice 같은 단어의 어원도 저 단어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의심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의심이란, 언젠가 완전한 앎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잠정적으로 거치는 단계이며 언젠가는 극복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완전한 인식에 도달하기 어렵고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지간히 많이 아는 단계까지 이르렀어도 의심, 건설적인 회의는 아예 상비적인 태도, 방법론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윤리 시간에 열심히 배운 데카르트의 태도를 놓고 언제나 강조되는 포인트가 그의 회의는 방법론적 회의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방법론적 회의가 아니라, 회의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철학적 입장도 따로 있다는 소리입니다. "표상들의 불일치성, 그로 인한 자아의 혼란은 제거되어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 다가왔다(p31)" 이게 방법론적 회의입니다. 우발적이고 과도기적인 상태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회의 그 자체에 큰 의의를 두었던 고대 회의주의자들의 생각은 달랐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우리는 중등 교과서에서 소피스트들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았고, 소크라테스나 이후 서양의 주류 철학자들이 이들 소피스트들을 철저히 배격하고 극복하는 일련의 행보가 근대성의 확립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회의주의는 불확실성이 점차 증가하고 복잡계를 직면하여 더욱 유연해져야 하는 우리의 사고, 도전받는 원칙의 시대에 오히려 새롭게 하나의 가능성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완전한 하나의 진리에 복종해야 오히려 마음의 평화가 생길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 진리는 현실에서 부단히, 온갖 예외에 맞부딪혀 체면과 위신을 전혀 지키질 못합니다. 그런 불완전한 걸 진리랍시고 받들고 있으니 마음에 평화가 생길 날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카데미 회의주의이건 피론 학파건 간에, "판단유보, 파악 불가능성"을 공통으로 지향했으며(p34), "마음의 평안"에 대한 지향이 두 학파의 공통점이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독자인 저 개인적 생각으로, 야구 경기를 볼 때에도 처음 입문할 때는 응원팀을 하나 만들어야 흥미가 생기지만, 계속 보다 보면 아예 응원팀 없이 경기 자체를 즐기는 편이 훨씬 마음이 홀가분한 것과 이치가 통할 것도 같습니다. 이런 게 철학으로 치면 회의주의겠죠(이기는 편 우리편). 


"피론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항상 '마음의 평안'을 강조했던 현자와 같은 인물이었다.(p113)" 책에 따르면 피론은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할 줄 아는 성품이었고, 이에 반해 그의 스승이었던 아낙사르코스는 성품이 거칠어 제자인 피론의 그런 장점을 언제나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에 참여했고, 도중에 인도의 나체 철학자들을 만났다고 책에 나옵니다. 원어는 gumnosophistai라고 역시 책에 나오는데, "나체"라는 gumno- 어근은 영어의 gymnastic이라든가 독일어의 학교 김나지움 등과 다 공통이죠. 아마도 나체 수행을 중시했던, 마하비라 바르다마나가 창시한 자이나 교 승려들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고전은 오늘날에는 사어로 취급받는 언어로 쓰인 것도 있고, 고전 헬라어라고 하면 현대 그리스인들이 쓰는 언어와는 크게 다릅니다. 그래서 해석의 과정이 필요한데, 많은 해석 입장 중 "인식론적(주관적) 입장"은 사람에게 원래 사물의 본성을 파악하는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고 합니다(p127). 재미있는 건 이 책에도 나오는, 예컨대 dia tutto 같은 부분을 dia to로 바꾸어 해석하는, 즉 원문에 일종의 오기가 발생했다고 보는 19세기 독일 철학자 E 젤러(에두아르트 첼러) 같은 학자입니다. 원문을 수정해가면서까지 더 잘 통하는 해석을 추구하는 입장은 철학 외에도 여러 분야에 있습니다. 


동양철학에서도 명가(名家) 같은 학파가 있어서 공손룡 같은 이가 발전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서양 철학에서 가장 빛나는 파트가 논리학, 논변술 같은 걸 이론적으로 아주 정밀하게 마련한 것입니다. p143에는 아이네시데모스의 열 가지 논증방식이 나오는데 이는 긍정의 논증과 부정의 논증이 동시에 성립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존재의 대상이건 사유의 대상이건 간에, 등치 또는 양립의 구조라는 건, 결국 모든 주제에 대한 판단이 "유보"되어야 함을 결국 암시합니다. 저자는 피론의 회의적 방법론을 최초로 체계화한 게 바로 이 아이네시데모스라고 합니다. 


이어 피론주의의 집대성자로 평가되는 섹스투스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에 의하면 이 회의주의에 대한 핵심 개념은 대립, 판단유보, 마음의 평안이라고 합니다. 대립과 판단유보 같은 기술적 개념이, 마음의 평안 같은 가치적, 도덕적 개념과 나란히 놓인다는 게 정말 흥미롭습니다. 섹스투스의 평가 중 또 흥미로운 건, 같은 회의주의 계보인 아카데미파의 아르케실라오스를 두고 "(회의주의와 대척에 서 있는) 독단주의자"로 규정한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아카데미파를 플라톤 진영으로 거의 몰아넣는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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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초판본 리커버 고급 벨벳 양장본) 코너스톤 초판본 리커버
알베르 카뮈 지음, 이주영 옮김, 변광배 감수 / 코너스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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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드19 때문에 지난 2년 동안 많은 이들이 고생했으며 아직도 완전 종식이 되지 않아 확진자, 사망자들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고전 <페스트>는 오랑이라는 가상의 도시, 그것도 북아프리카가 아닌 프랑스 본토 남부 해안의 한 지점을 배경으로 삼아 당시만 해도 치명적 질병이었을 페스트로 인한 봉쇄와 고통, 갈등과 극복의 과정을 다룹니다. 페스트는 (가상의, 혹은 일반적인) 권위주의 체제가 내린 계엄령의 은유라는 해석도 있었고 지금 이 책 변광배 교수님 해제에 의하면 파시즘, 나치즘 등의 억압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또 이 소설에서 시민들이 질병과 투쟁하며 이를 극복하는 과정은 "부조리"에 대해 "반항"하는 시민들의 의지와 행동, 혹은 의무를 상징하며 이것이야말로 알베르 카뮈 문학의 본령이라는 지적이 역시 책 말미의 해제에 나옵니다. 


"그러나 리샤르는 자신에게는 그만한 권한이 없다고 생각했다(p44)." 마치 영화 <죠스>에서 마틴 브로디 서장이 해변을 폐쇄해야 하느냐 아니면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현존하는 위험을 묵살하느냐의 갈등을 하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이 소설은 체제의 모순에 대해 시민의 양심으로 저항하는 당위를 거대한 은유로 표현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이처럼 마치 재난영화를 보는 듯한 스릴과 서스펜스도 독자가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페스트는 치명률도 높지만 증상이 끔찍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소설에서 독자들의 공포감을 자아내는 건 그 구체적인 초기, 말기 증상들입니다. 전문가들이 내어놓는 진단도 생생합니다. "사흘 만에 비장의 크기를 네 배로 부풀리고 장간막의 임파선을 오렌지처럼 물컹하게 만든다면...(p67)" 이 장면에서 리외는 사태의 심각한 면(부정적인 면)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쪽이고, 리샤르는 그 반대입니다. "질문이 틀렸습니다. 어휘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 문제입니다." 즉 페스트다 아니다 판정을 내리는 단계는 이미 지났고, 이제 어느 정도 문제가 심각한지 전염병 만연이 어느 정도 임박했는지가 문제라는 겁니다. 


"전염병이 저절로 멈추지 않는 한, 당국이 생각한 조치들로는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p81)." "해도 너무해요! 높은 사람들 말입니다." 고위층과 행정 당국의 무능, 무책임, 무신경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건 언제나 기층 민중입니다. 평소 고압적이고 오만한 그들의 태도를 묵묵히 참아 온 건, 바로 이런 공동체 전체의 재난이라도 닥칠 시 그들이 최소한의 권능을 발휘해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일이 터지고 보니, 특권층의 판단과 행동은 그저 갈팡질팡이며 아무런 대비책을 마련해 둔 것 같지 않습니다. 


한국도 동란 중에 이산가족이 대폭 늘어났고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생존을 도모하는 모습이 눈물겹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그저 잠시의 이별이겠구나(p91)" 했던 이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만나지도 못하고 ... 말그대로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는 묘사가 나옵니다. 페스트의 만연은 말그대로 전쟁과 같습니다. 일상, 평온, 희망을 모조리 파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를 갈라 놓습니다. "사람들은... 유배 생활이 삶을 통째로 위협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p132)." 


처음부터 사태의 진행에 대해 비관적이었고 결과적으로 맞는 관측을 한 리외는 "머지않아 이 도시에는 미친 사람만 남을 겁니다(p133)."라며 다시 한 번 비관적인 예언을 합니다. "모든 예언마다 공통점이 있었으니 결국에는 사람들을 안심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페스트만은 그렇지 않았다(p289)" p251에는 "리외가 매일 주는 건 구원이 아니라 정보뿐이었으며 그것은 인간의 직업이라고 할 수 없었다"는 문장이 있는데 이건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카뮈 자신에 대한 셀프디스로도 읽힙니다. p392에는 아예 "이 연대기의 서술자가 리외 자신이라는 걸 고백"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무신론자였던 카뮈가 창작한 세계 안에서 성직자가 어떤 역할을 맡는지 살펴 보는 건 언제나 재미있습니다. p133에서도 설교(강론?)하는 신부가 잠시 나왔고, p167에서 등장인물들은 파늘루 신부에 대해 토론합니다. "신을 믿지 않는다면서 왜 그리 헌신적입니까?" 타루의 질문입니다. 그는 핵심을 단단히 잘못 짚고 있으며, 헌신과 신앙 사이에 서로 본질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오히려 신이 없다면 사람의 일을 스스로 살펴야 하므로 맡은 바에 몇 배의 헌신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신의 일을 대신하는 셈이겠으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의사의 소명이 아닙니까. 


"파늘루 신부가 (그의) 설교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니 기쁩니다.(p199)" 설교만 번지르르하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수준을 면했다는 게 아니고, 설교도 좋지만 그의 행동은 더 좋다는 뜻입니다. 무신론과 종교가 공동의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잠시 동맹을 맺는 셈입니다. 뒤에 자리한 잔다르크의 동상과 투구가 햇볕에 빛나는 장면도 의미심장합니다. 설교에 대해서는 p287 이하에 아주 자세한 장면이 있습니다. 


게오르규 신부의 장편 <25시>를 보면 아무리 끔찍한 비극이 심화되어도 이것이 종식될 기미가 안 보이며 오히려 밤이 더 깊어지는 절망의 시간이 펼쳐집니다. p212에 보면 타루가 항베르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일이 안 풀립니까?" "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요." "두 분 모두, 페스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특징이라는 점을 이해 못 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연대를 통해 그 돌파구를 찾습니다. "이 도시를 떠날 방법을 찾을 때까지 함께 일하게 해 주시겠습니까?"(p217)


"뒤틀린 알몸의 시신들이 거의 나란히 붙어 구덩이 밑바닥에 떨어지고(p231)... 페스트로 경제 생활이 전부 마비되어 대량의 실업자가 생겨났다(p232).... 그 시기부터는 사람들에게 공포보다는 빈곤함이 더 절실한 문제임이 명확해졌다." 카뮈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이런 페스트 팬데믹까지는 아니라도 여러 비상사태를 겪어 본 덕인지 평온이 깨어지고 위기에 대처하는, 혹은 시달리는(stricken) 도시 거주자들의 모습을 다큐처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한편으로 그는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용기를 키워주는 영웅이나... 대단한 구경거리를 소개할 것이 하나도 없어서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또 특유의 냉소를 띄웁니다. 카뮈의 소설은 헐리웃 흥행물이 아님을 우리 독자들도 분명히 깨닫게 하는 대목입니다. 영웅과 미덕은 애초에 없고, 잔인한 부조리에 맞서는 원초적인 반항의 본능이 영웅을 대신하고 이게 바로 카뮈의 세계입니다. "이후의 밤은 투쟁의 밤이 아니라 침묵의 밤이었다(p375)." 본성인 반항에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어려움을 특히 심하게 겪는 건 언제나 아이들입니다. p280 이하에는 혈청 실험이라든가 정규 패턴의 감염으로 빈사지경에 놓인 아이들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묘사됩니다. "하느님, 이 어린아이를 구해 주소서." 전해지지 않을 것이 뻔한 소망도 이런 절체절명의 시각에는 어느 무신론자의 입에서도 나올 것이 당연합니다. "페스트균은 절대로 죽지 않고 살아남아...(p402)" 본성이 부조리한 인간 사회에 재앙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며 인간의 반항과 몸부림 역시 마찬가지로 결코 죽지 않는다는 점을 연대기의 마지막은 씁쓸히 증언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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